박헌영 트라우마 - 그의 아들 원경과 나눈 치유 이야기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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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을 생각하는 삶인가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59] 손석춘, 《박헌영 트라우마》

 


- 책이름 : 박헌영 트라우마, 그의 아들 원경과 나눈 치유 이야기
- 글 : 손석춘
- 펴낸곳 : 철수와영희 (2013.4.17.)
- 책값 : 13000원

 


  고흥군 봉래면 봉래산 편백나무 숲길 한켠에 피나물밭 있습니다. 피나물 아는 이한테는 피나물밭이요, 피나물 모르는 사람한테는 아무것 아닙니다. 모르는 사람한테는 피나물이 안 보일 뿐더러, 노랗게 피어나는 꽃 또한 안 보이지요. 줄기를 톡 꺾거나 잎을 톡 뜯을 적에 나오는 발그스름한 물을 보며 피나물이라 하기도 하고, 노란 꽃송이 바라보며 노랑매미꽃이라 하기도 합니다.


  풀이름이 피나물인 만큼 나물입니다. 먹는 풀입니다. 누군가는 꽃만 바라보며 꽃 사진 찍을 테지만, 누군가는 이야 맛난 풀이로구나 하면서 줄기와 잎을 톡톡 끊어 나물로 삼습니다. 또, 누군가는 사진으로도 안 찍고 나물로도 안 먹을 테지요.


  사람들마다 피나물꽃 바라보는 삶이 다릅니다. 사람들마다 풀 한 포기 마주하는 삶이 다릅니다. 집일 도맡는 누군가 피나물 뜯어서 날푸성귀로 밥상에 차린다면 먹을 테지요. 양념을 해서 나물무침으로 밥상에 차려도 먹을 테지요. 살짝 데쳐 나물버무림을 해서 밥상에 올려도 먹을 테지요. 그러나, 정작 스스로 피나물 뜯으러 멧마실 다니는 사람은 매우 적습니다. 식구들한테 피나물 먹이려고 멧마실 다니며 숲바람 마시는 사람은 참 적습니다.


.. 박정희가 일본 육사에서 일본 왕에게 충성을 굳게 맹세하고 있을 때, 대다수 자칭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의 앞잡이로 전락해 갈 때, 박헌영은 불굴의 의지로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 박헌영은 살인적인 감옥 생활을 이겨가며 1939년 만기 출옥했다. 박헌영은 다시 혁명 활동에 들어가 지하조직인 경성콤그룹의 지도자로 활동했다. 1945년 8월 15일 현재 그는 광주에서 벽돌공장 노동자로 은신하며 지하운동을 벌여 나가고 있었다. 따라서 그해 9월 서울에서 조선공산당이 재건될 때 그가 지도자인 책임비서가 된 것은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박헌영 이상으로 일제와 줄기차게 투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  (7, 28∼30쪽)


  고흥군 봉래면 버스터에서 군내버스를 탑니다. 여섯 살 세 살 아이들 데리고 버스에 타니, 어른 한 사람 버스삯만 치릅니다. 도화면 동백마을 우리 집으로 돌아가야 하니, 포두면까지 가는 버스를 탑니다. 버스삯 3100원입니다. 서울이나 부산 같은 큰도시라면 이만 한 거리 달리는 데에 버스삯 2000원조차 안 나오리라 생각합니다. 그러나 시골이니 이만 한 삯 치릅니다.


  누군가, 이만 한 버스삯 비싸다 여길 수 있습니다. 누군가, 이만 한 버스삯 내느니 자가용 타겠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자가용 장만하는 값이나 기름값은 쌀까요. 게다가, 군내버스로 3100원 내는 거리라면, 시골에서 택시 타고 달릴 적에 31000원쯤 나오는 거리입니다. 도화면 동백마을 우리 집에서 고흥읍내까지 군내버스로 1500원인데, 택시삯으로 치면 15000원 나와요.


  참말, 사람들마다 다 다르게 느낄밖에 없습니다. 다 다르게 느낄밖에 없는 까닭은, 사람들마다 삶이 다 다르기 때문입니다. 더 깊이 살핀다면, 고흥군 봉래면, 곧 바깥나로섬 옛사람은 나로다리 놓이기 앞서는 굳이 이만 한 길 달릴 까닭 없어요. 바깥나로섬 옛사람은 바깥나로섬에서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건사하며 살았지요. 안나로섬 옛사람도 굳이 다른 데 돌아다니지 않고 스스로 이녁 마을에서 밥과 옷과 집을 손수 건사하며 살았어요.


  아이들과 군내버스를 타고 시골마을 구비구비 돌아서 집으로 갑니다. 원세동세거리에서 군내버스를 내리고는, 고흥읍에서 우리 마을 거쳐 도화면소재지와 지죽까지 달리는 군내버스를 새로 잡아 탑니다. 두 가지 군내버스를 타면서, 그야말로 시골자락 골골샅샅 홀가분하게 누빕니다. 이웃마을 봄맞이를 버스 창밖으로 바라봅니다. 바닷바람 쐬고 들바람 쐬며 숲바람 쐽니다. 버스삯 3100원과 1100원으로 한 시간 남짓 시골마실 흐드러지게 즐깁니다.


  아마 누군가 이 길을 자가용으로 달린다면, 군내버스로 달릴 때처럼 느긋하게 즐기지 못하리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자가용을 모는 사람은 앞만 보아야 하니까요. 이쪽도 저쪽도 실컷 내다볼 수 없어요. 자가용은 어디에든 멈추어 마음껏 돌아볼 수 있다지만, 멈추기 앞서까지는 거의 아무것도 제대로 누리지 못해요.


.. “김삼룡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너밖에 없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러니 중부경찰서로 가서 그가 잘 있는지 보고 오랬습니다. 그래서 가 보니 아저씨가 진짜 거기 있더라고요. 나무로 된 긴 의자에 앉아 있는데 한쪽 가랑이는 피로 말라붙어 검붉었어요. 어디가 어떻게 다쳤는지, 다친 다리가 왼쪽인지 오른쪽인지 모르겠고, 수갑이 나무에 채워져 있었어요.” “김삼룡과 눈이 마주쳤나요?” “네. 저는 하도 놀라 말도 못 하고 그냥 바라보고 있었거든요. 아저씨가 무서운 눈빛으로 저를 봐요. 아는 척을 못 하게 하는 거예요. 아예 접근을 못 하게끔 압박합니다. 저는 뒷걸음질쳐서 복도에서 나왔어요.” ..  (52∼54쪽)


  나는 인천에서 나고 자랐습니다. 우리 집 큰아이는 인천 골목동네에서 태어났고, 작은아이는 충청북도 음성 멧골마을에서 태어났습니다. 나는 어릴 적 인천에서 늘 제비를 바라보며 골목동무하고 뛰놀았습니다. 국민학교를 마치는 1987년까지 제비를 보며 놀았는데, 중학교에 들어서는 1988년부터 새벽 일찍 학교에 붙들리고 밤 열 시 넘어서야 비로소 자율학습과 보충수업에서 풀려나느라, 이때부터 제비 구경은 한 차례도 못합니다. 눈으로는 참고서와 교과서를 쳐다보아야 하는 수험생이 되었지만, 마음으로는 교실 창밖을 바라보면서 제비들 날갯짓 올려다보며 동무들과 골목에서 뛰놀던 일을 떠올렸습니다.


  두 아이와 고흥 시골자락에 깃들어 지내면서 처마 밑 제비들 날마다 만납니다. 지난해 봄에는 둥지 하나만 있었는데, 여름 끝물에 어미 제비가 낡은 둥지 하나를 바지런히 손질해서 둥지가 둘 되었습니다. 올해 봄, 지난해 우리 집에서 태어난 새끼 제비들 모두 돌아와서 두 군데 둥지에 깃들며 놉니다. 어른인 나도, 우리 집 두 아이들도 늘 제비를 보고 제비 노랫소리 들으며, 제비똥 떨어지는 섬돌 언저리 신을 바라봅니다. 똥받침 달았어도 제비들은 어디에든 똥을 떨굽니다.


  이른새벽부터 늦은밤까지 가만히 제비를 바라보며 생각합니다. 나는 중학생 되고부터 이 제비들하고 어울리지 못했지만, 우리 아이들 열너덧 살 될 무렵 갑자기 제비하고 등을 지고 마는 굴레에 갇히도록 할 생각 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언제나 제비 노랫소리 듣고, 개구리 노랫소리랑 풀벌레 노랫소리 그득그득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풀내음 맡고 숲바람 쐬며 들햇살 먹는 싱그러운 숨결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점수따기 피 튀기는 끔찍한 싸움터에 아이들 내몰리도록 하고 싶지 않아요. 밥이랑 옷이랑 집을 아이들 손수 건사하고 마련하며 보듬을 수 있도록, 맑고 씩씩한 삶 누리는 길 함께 일구고 싶어요.


.. 일제 강점기에 살인적인 고문을 이겨내며 혁명 운동에 나선 사람들을 ‘간첩’으로 몰아 죽인 사실은 아무리 한국전쟁의 참화에 누군가 책임을 져야 할 상황이었다고 하지만, 사회주의자로서 금도를 벗어난 야만이었다. 그 과정에서 끔찍한 고문이 자행됐다는 증언은 그들이 진정으로 사회주의 혁명에 헌신한 사람들이었는가를 회의하게 해 준다 … 평생을 민족독립과 사회주의 혁명에 바친 박헌영을 죽인 것은 일본 제국주의자들도, 미군정도, 이승만 정권도 아니었다. 김일성이었다 ..  (93, 104쪽)


  손석춘 님이 원경 스님 만나 주고받은 이야기를 갈무리하면서 찬찬히 엮은 인문책 《박헌영 트라우마》(철수와영희,2013)를 읽습니다. 원경 스님은 ‘원경’이요 ‘스님’인 한편, ‘박헌영 아들’이라고 합니다. 소설쓰는 김성동 님하고 자동차 타고 멧길 달리다가 그만 비탈길에서 고꾸라져 다친 이야기를 읽고는, 아, 그때 그분이 바로 이분이었네, 하고 무릎을 칩니다. 그무렵 다쳤을 때에 왜 김지하 님한테 연락할 생각 못했나 하고 읊는 대목 읽다가, 그렇구나, 모두 그렇게 이어지는 끈이었네, 하고 무릎을 칩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이 책 《박헌영 트라우마》에서 글로 만나기 앞서, 다른 사람한테서 먼저 들었어요. 1970년대에 잡지 《뿌리깊은 나무》 편집장으로 일하던 윤구병 님이 있고, 윤구병 님 옆지기로 김미혜 님이 있는데, 두 분이 슬기를 모아 엮은 《보리 초등국어사전》을 만들 때에 나는 두 분하고 함께 일했습니다. 나는 편집장이었고, 윤구병 님은 기획자였으며, 김미혜 님은 출판사 사장님이었습니다. 일하다가 쉬며 차 한 잔 마실 때에, 함께 도시락 펼치고 밥을 먹을 때에, 김미혜 님이 곧잘 지난날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는데, 그때 그 교통사고 이야기는 오래도록 잊히지 않았어요. 김성동 님이 그 교통사고 뒤로 얼굴 사진 안 찍는다 하던 이야기도 새삼스레 떠오릅니다.


  삶이지요. 살기도 하고 죽음 문턱을 넘나들기도 하는 삶이지요. 서로 만나고, 서로 이야기하며, 서로 어울리는 삶이지요. 슬픈 일이 찾아들다가도, 기쁜 일이 찾아들고, 서글픈 일이 몰려들다가도, 아름다운 일이 넘실거리는 삶이지요.


  더없이 마땅한 흐름이라고 느낍니다. 가을날 서늘서늘 바람 찾아들어 들판에 풀포기 거의 다 말라죽을 무렵, 모든 풀과 나무는 씨앗을 한껏 흙바닥에 떨굽니다. 이러면서 풀잎과 나뭇잎 씨앗 위로 내려놓아 씨앗이 얼어죽지 않도록 보듬고, 기나긴 겨울 동안 눈이 소복소복 내리면서 씨앗들은 시나브로 흙 품으로 스밉니다. 햇살 따사롭게 거듭나며 새로 봄이 찾아오면, 지난해 흙 품에 안긴 씨앗 하나둘 천천히 깨어납니다. 새 숨결 틔우며 새 잎 올립니다. 다시금 싱그럽게 푸른 잎사귀 내놓고, 마알갗 꽃망울 터뜨립니다. 풀과 나무는 해마다 삶과 죽음 갈마들면서 한결 푸르고 맑으며 씩씩합니다. 사람도 이와 같아요. 사람들 누구라도 봄이 있고 여름과 가을이 있으며 겨울이 있어요. 그리고, 다시 봄이지요.


.. “그것보다도 어머님이 계셨다는 사실 자체가 보통 충격이 아니었습니다. 진작 알았다면 그리워하기라도 했을 텐데, 외로울 때 가서 멀리 그림자라도 보고 올 수 있었을 텐데.” … “한산 스님이 사실을 역사적으로 보라고 일러 주었습니다. 아버지의 죽음은 역사가 심판하고 다뤄야 할 것이지, 인간이 인간을 상대해서는 안 된다고 했어요.” … “안기부에다 제가 박헌영 아들이라는 사실을 고발한 스님도 있어요.” … “아버지의 복권은, 우리 손 선생님이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저는 급한 게 아니라고 봅니다. 대신 남로당 전체, 이름 없이 산화된 그 사람들의 명예를 정말이지 바로 찾아야 합니다.” ..  (130, 132, 148, 159쪽)


  박헌영이라 하는 분 삶은 어떤 빛이었을까요. 봄빛이었을까요. 겨울빛이었을까요. 일본 제국주의자가 후려갈기던 주먹질을 견뎌야 하는 겨울빛이었을까요. 일본 제국주의자 물러간 자리에 ‘일본 제국주의자한테 빌붙은’ 이들이 권력을 뽐내며 우쭐거리던 등쌀에 다시금 허덕여야 하던 시리디시린 겨울빛이었을까요. 아니면, 어느 정당 높은 자리에 올라 어떠한 혁명을 이룰 수 있던 여름빛이나 가을빛이었을까. 이 땅 가난한 농사꾼들이 지주한테 시달리던 굴레를 벗겨내는 평등과 자유와 민주를 바라던 꿈결 어여쁜 한창 새싹 돋는 푸른 봄빛이었을까요.


  박헌영 님은 이슬처럼 죽습니다. 박헌영 님 둘레에 있던 숱한 사람도 이슬처럼 죽습니다. 북녘에는 북녘대로 어떤 권력자가 독재를 부리듯 숱한 사람을 죽이며 권력을 거느립니다. 남녘에는 남녘대로 어떤 권력자가 독재를 부리듯 숱한 사람을 죽이며 권력을 거머쥡니다. 한국전쟁이 일어났을 적에 죽은 사람은 권력자가 아닙니다. 남녘에서도 북녘에서도 ‘여느 시골마을 흙일꾼’이 싸움터로 붙들려 나가 죽습니다. 한국전쟁통에 ‘지주’나 ‘일제 앞잡이’가 죽지 않았습니다. 미군 부대 폭격기가 퍼부은 폭탄은 시골마을 조그마한 살림집을 몽땅 불태웠고, 이 나라 예쁜 숲과 들을 온통 불질렀습니다.


  전쟁은 권력자와 권력자가 다툰 힘싸움이나 힘겨루기가 아닙니다. 마을을 살찌우고 나라를 북돋우는 ‘가장 밑자리에 있는 시골 흙일꾼’을 총알받이로 내세우고 꼭둑각시로 세웁니다. 싸우려면 권력자끼리, 우두머리끼리 싸울 노릇이지, 막상 전쟁통에 우두머리는 어딘가에 숨어서 힘여린 사람들을 죽음터로 내몰기만 합니다. 혁명이란 무엇이길래 시골 흙일꾼 손에 총자루를 쥐어 주었을까요. 민주란 무엇이기에 시골 흙일꾼 손에 칼자루를 안겨 주었을까요.


  서로서로 죽여야 평화가 찾아오거나 통일이 되거나 혁명이 되거나 민주를 이루는가요. 서로서로 흙을 만지면서 살림을 꾸리지 않고도 평화나 통일이나 혁명이나 민주를 이룰까요.


  북녘 김일성이나 김정일이라 하는 사람도 밥을 못 먹으면 죽습니다. 남녘 이승만이나 박정희리 하는 사람도 밥을 안 먹으면 죽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먹는 밥은 누가 짓는가요. 이들 스스로 짓는가요. 아니지요. 바로 시골 흙일꾼이 짓지요. 이들 권력 우두머리가 지내는 궁궐 같은 집은 누가 짓나요. 이들 권력 우두머리가 입는 으리으리한 옷은 누가 깁나요. 이들 권력 우두머리가 타고다니는 자동차는 누구 돈으로 장만하는가요. 바로 시골 흙일꾼 피땀이 있기에 권력 우두머리도 권력을 누립니다.


.. “우리 후세대들이 김일성이나 전쟁 책임 이런 걸 떠나서, 지금과는 다른 세계관에서 남북이 서로 이야기할 수 있을 때, 그때 통일이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 “외롭고 배고픈 이웃을 생각하면서, 뭔가를 나누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봅니다.” … “상대방의 시각으로도 세상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생각은 금을 그을 수가 없는 거거든요.” ..  (170쪽)


  인문책 《박헌영 트라우마》를 읽으며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아버지 박헌영’이 꿈꾸던 혁명이란, 곧, ‘아버지 박헌영’이 한겨레 삶자리를 아름답게 일구려 한 밑바탕은 무엇이었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아들 원경’이 바라는 삶이란, 곧 ‘아들 원경’이 한겨레 보금자리를 사랑스레 돌보려 한 밑힘은 무엇일까 하고 가누어 봅니다.


  책을 읽다가 틈틈이 밥을 짓습니다. 아이들 먹일 밥을 짓습니다. 아이들 밥을 먹이고 손과 낯 씻긴 뒤 이를 닦입니다. 숨을 살짝 돌리고서, 아이들 옷가지를 빨래합니다. 방바닥을 쓸고 닦습니다. 이불을 들어 마당에서 팡팡 턴 다음 햇볕을 쪼입니다. 아이들 마당으로 쪼르르 따라나와서 까르르 웃으며 놉니다. 아이들 웃음소리 들으며 비로소 기지개를 켜고는 다시 책을 손에 쥡니다.


  혁명이란 삶을 바꿀 때에 혁명입니다. 민주란 삶을 아름답게 돌볼 때에 민주입니다. 삶은 어떻게 바꾸어야 할까요. 저마다 스스로 밥과 옷과 집을 짓는 삶이 되도록 바꾸어야겠지요. 책을 읽거나 이론을 외운대서 혁명이 되지 않아요. 총이나 칼을 들기에 혁명이 이루어지지 않아요. 혁명은 낫과 호미로 이룹니다. 민주 또한 제도나 선거로 이루지 못해요. 책을 읽든 학교를 다니든 신문을 읽든 민주하고는 동떨어집니다. 민주는 들과 숲과 메와 바다를 골고루 사랑하는 손길일 때에 민주입니다. 멧자락에 구멍내어 고속도로 내는 짓은 민주가 아닙니다. 도시에서 펑펑 쓰는 전기를 뽑으려고 시골 아름다운 터전에 핵발전소랑 화력발전소 아무렇게나 때려짓는 짓은 민주가 아닙니다. 밥을 나눌 때에 평화라고 말들은 하지만, 돈 많은 기업이나 재산꾼들 스스로 밥(엄청난 재산)을 기꺼이 이웃하고 나누지 못해요. 돈은 많이 움켜쥐지만, 사랑은 조금도 붙잡지 못해요.


  이제 책을 다 읽었으니 내려놓습니다. 아이들이 아버지를 부릅니다. 같이 놀자고, 같이 노래하자고, 같이 춤추자고 부릅니다. 그래, 아버지는 아이들 손에 이끌려 같이 놀고 같이 노래하며 같이 춤춥니다. 이론이나 학문으로 따질 것 없이, 육아지침서나 육아이론서를 들출 것도 없이, 아이들 노랫소리가 책입니다. 아이들 웃음소리가 혁명입니다. 아이들 이야깃소리가 민주요 평화요 통일이며 사랑입니다.


  무엇을 생각하는 삶인가요. 우리들은 무엇을 생각하는 삶을 일구는가요. 아니, 삶을 일구기나 일구는가요. 생각을 하기는 하는 삶인가요. 인문책 《박헌영 트라우마》는 꼭 한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박헌영 아들’이 아닌 ‘스님 원경’이 삶을 어떻게 바라보고 사랑하면서 하루하루 웃음꽃으로 누리는가 하는 이야기 한 자락 들려줍니다. 잘 읽었습니다. 책 아닌 삶을 잘 읽었습니다. 4346.4.9.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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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04-09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귀한 글,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손석춘님의 책은 '껍데기는 가라'로 만났었지요.
오늘도 웃음꽃으로 누리는 삶, 감사한 마음으로 시작합니니다.

숲노래 2013-04-09 12:03   좋아요 0 | URL
귀하게 여겨 주시니 귀한 글이 되네요~ ^^
즐겁게 하루 열며
따사로운 봄빛 누리셔요.

저는 오늘 두 아이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좀 멀리 나들이 다녀올까 싶어요~

페크pek0501 2013-04-09 12: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로서로 죽여야 평화가 찾아오거나 통일이 되거나 혁명이 되거나 민주를 이루는가요"

이 글 읽으니 전쟁 무기도 나라 간에 첨단적 기술로 경쟁한다는 슬픈 사실을 생각하게 되네요.
모든 지구인이 다 평화롭게 살면 그런 데에 쓰는 국가 경비를 다른, 좋은 데에 쓸 수 있을
텐데요. 인간이라서 그런 가요?

숲노래 2013-04-09 16:22   좋아요 0 | URL
전쟁무기가 산업이 되고,
이 전쟁무기 산업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참 많아요.
군인도 바로 '전쟁산업 노동자'이기도 하지요......

국방비가 없어지면
지구는 평화와 완전 무상교육... 완전 무상평등... 이루어진답니다....
 
음악가의 음악가 나디아 불랑제 - 피아졸라, 에런 코플런드 등 수백 명의 음악가를 길러낸 20세기 음악의 여제
브뤼노 몽생종 지음, 임희근 옮김 / 포노(PHONO) / 201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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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으로 부르는 사랑노래
 [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58] 브뤼노 몽생종, 《음악가의 음악가, 나디아 불랑제》

 


- 책이름 : 음악가의 음악가, 나디아 불랑제
- 이야기 나눈 이 : 브뤼노 몽생종
- 옮긴이 : 임희근
- 펴낸곳 : 포노 (2013.3.15.)
- 책값 : 16000원

 


  노래꾼이 노래를 부릅니다. 마을 할매가 노래를 부릅니다. 노래패가 노래를 부릅니다. 마을 할매들이 노래를 부릅니다.


  누가 불러도 노래입니다. 누가 들어도 노래입니다.


  길거리에서 노래가 흐릅니다. 사람들 손전화에서 노래가 흐릅니다. 가게마다 노래가 흐르고, 텔레비전과 인터넷에서 노래가 흐릅니다. 사람들 삶터와 일터에서 노래가 끊이는 법 없습니다. 뽕짝이든 대중노래이든, 가곡이든 오페라이든, 어느 노래이든 흐르고 또 흐릅니다.


  어른도 노래를 듣고 아이도 노래를 듣습니다. 어른도 뽕짝을 부르고, 아이도 뽕짝을 부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어른들은 아이들한테 뽕짝이나 대중노래 빼고, 어린이노래조차 불러 주지 못합니다. 시디나 인터넷이나 텔레비전으로 아이들한테 어린이노래를 가끔 들려주기는 하되, 어른 스스로 늘 듣거나 부르는 노래는 뽕짝이나 대중노래입니다. 오늘날 아이들로서는 굳이 어린이노래를 부를 까닭이 없습니다. 어른들하고 똑같은 노래를 듣고 똑같은 노래를 부르며 똑같은 생각을 할밖에 없습니다.


.. 우리 어머니는 결코 그런 칭찬에 현혹되지 않으셨어요. 딸이 일등을 하든 안 하든, 그건 어머니에겐 아무 상관없는 일이었어요. 일등한 그날, 어머니가 이렇게 얘기하시더군요. “그래, 이 모든 건 정말 고마운 일이다. 하지만 어디 말해 봐라. 네가 스스로 평가할 때, 최선을 다한 것 같니?” … 가르친다는 일이 갖는 커다란 특권은, 가르침을 받는 대상이 속으로 생각하는 바를 진정 똑바로 바라보게 해 주고, 원하는 바를 진정으로 말하게 해 주고, 그의 귀에 들리는 것을 정확히 듣게 해 준다는 점입니다 … 저는 기본 토대를 알아야 한다고 강조해야 했어요. 즉 듣기, 응시하기, 경청하기, 보기. 그리고 자기 자신을 존중하여, 교만하지 않고 존재에 중요성을 부여하기. 누구나 존재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으면 잘 연주할 수 없고, 잘 생각할 수 없고, 잘 살 수도 없다고 생각해요 ..  (17∼18, 25∼27, 39쪽)


  시골마을에서 자전거를 달려 자동차 거의 없는 한갓진 들길에 섭니다. 문득 자전거를 멈춥니다. 바람이 부는 소리를 듣습니다. 구름이 지나가는 소리를 듣습니다. 햇살이 드리우는 소리를 듣습니다. 풀잎과 나뭇잎이 바람결 따라 춤추는 소리를 듣습니다. 봄들판에서 새싹 돋는 소리를 듣습니다. 멧새와 들새가 먹이 찾고 짝꿍 찾으며 새로 낳은 새끼한테 먹이 주러 부산하게 날갯짓하는 소리 듣습니다.


  귀를 기울이면 겨울 지나 봄이 오면서 막 깨어난 숲벌레와 풀벌레 움직임 소리를 들을 수 있습니다. 개미가 겨울잠 끝내고 밖으로 나옵니다. 나비가 팔랑거립니다. 곧 깨어나려고 하는 나비들이 풀잎이나 나뭇잎에 붙어 천천히 몸부림을 칩니다. 귀를 기울이는 사람한테는 이 모든 소리가 고스란히 들립니다.


  봄들꽃에 이어 매화꽃이 핍니다. 동백꽃이 맨 먼저 피고, 닥꽃(닥나무꽃)이 뒤를 잇습니다. 아가씨꽃(아가씨나무꽃, 또는 명자나무꽃)이 망울망울 발갛고, 모과나무는 이제 새잎 움트려 합니다. 귀를 기울이고 마음을 기울이면, 이 모든 꽃내음뿐 아니라 꽃소리를 듣습니다.


  꽃가루 날립니다. 꽃가루 퍼집니다. 봄내는 짐승과 새와 벌레뿐 아니라 사람들 코와 살갗을 간질입니다. 즐겁고 가벼우며 맑은 기운 찬찬히 베풉니다.


.. 음악이 머릿속에 들어 있지 않은 때는 한 번도 없다는 것이 사실입니다. 제 귀엔 그냥 음이 들려요. 항상 음이 들리고, 항상 음을 생각해요 … 신을 인정하듯이, 저는 아름다움을 인정하고, 감동을 인정하고, 걸작도 인정합니다 … 제가 당신을 제대로만 바라볼 줄 안다면, 볼 때마다 제 눈에 당신은 놀라움이에요 … 제대로 듣는 법을 알게 된 사람이면 누구나 이제까지와는 다른 방식으로 연주를 합니다 … 사람은 남들과 같을 수 없기에 독특한 것이니까요. 우리가 독특해지겠다고 선택해서 독특한 것이 아니니까요 ..  (24, 45, 56∼57, 85, 98쪽)


  시골도 도시도 온통 소리입니다. 시골이 조용하거나 고요하거나 한갓지다고 여기는 사람은 시골에서 살아가며 누릴 소리를 모르는 셈입니다. 시골은 조용한 적도 고요한 적도 한갓진 적도 없습니다. 언제나 숱한 소리 가득합니다.


  천 살 먹은 나무가 새롭게 자라면서 소리를 냅니다. 천 살 먹은 나무가 바람을 맞으며 쏴아아 내는 나뭇잎 춤소리는 물결소리를 닮습니다. 새벽 아침 낮 저녁 밤에 따라 바람소리가 다릅니다. 햇볕 흐르는 낮과 달빛 흐르는 밤에 부는 바람소리는 다릅니다.


  느끼려 하는 가슴일 때에 비로소 시골소리 듣습니다. 느끼고 싶은 마음일 때에 바야흐로 시골소리 즐겁습니다.


  이와 달리, 도시소리는 억지로 와닿습니다. 도시소리는 사람들이 다른 숱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하도록 가로막습니다. 자동차 지나가는 소리, 전철이나 지하철 달리는 소리, 버스와 택시 지나가는 소리, 가게마다 장사하는 소리, 기계가 움직이고 건물이 내는 소리, 갖가지 소리와 소리는 시끄럽게 울려퍼집니다. 도시소리는 저마다 이웃을 윽박지르거나 들볶는 소리입니다. 장사를 하고, 돈을 벌며, 이름을 알리고, 권력을 뽐내려 하는 소리가 도시소리 밑바탕입니다. 도시에서는 어른이든 아이이든 마음을 기울여 ‘내 소리’를 추스르기 어렵습니다. 나날이 소리를 잊고, 날마다 소리와 동떨어집니다. 이러는 동안 ‘새로운 시끄러운 소리’를 스스로 빚습니다.


.. 누군가를 격려하기에 앞서, 그 사람이 과연 자기 안에 사랑을 지니고 있는지, 그가 자기가 하는 일에, 그 일이 무엇이든 간에, 흥미를 지닐 수 있는지를 알아야 해요. 왜냐하면 어떤 일에 몰두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관심을 지니는 일이니까요 … 잠자는 사람들을 굳이 흔들어 깨우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들은 깨워 봐야 아무런 이득도 없으니까요 … 슈베르트는 “난 러시아어를 하고 싶어.” 같은 말을 안 하죠. 그런 말을 하는 대신 실제로 합니다. 우리는 하지는 않으면서 말만 합니다. 그리고 시간이 없다는 거창한 변명을 앞세우지요. 하지만 슈베르트도, 바흐도, 포레도 시간이 없었습니다. 시간이 넉넉한 사람은 아무도 없어요. 그들은 시간을 찾아낸 것이고 ..  (48, 58쪽)


  아이들은 어른들 말씨를 따릅니다. 아이들은 어른들 말을 고스란히 배웁니다. 어른들이 맑으며 사랑스러운 말마디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 아이들은 이 맑으며 사랑스러운 말마디를 늘 들으면서 즐겁게 받아들입니다. 어른들이 거칠거나 시끄러운 소리로 이야기를 섞으면, 아이들 또한 거칠거나 시끄러운 말을 물려받습니다.


  청소년범죄란 없이 어른범죄가 있을 뿐입니다. 청소년사랑이란 따로 없이 어른사랑이 있어요. 아이들은 살아가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사랑하고 싶습니다. 아이들은 꿈꾸고 싶습니다.


  꿈을 꾸는 어른과 함께 꿈을 꾸는 아이입니다. 사랑하는 어른과 나란히 사랑을 꽃피우는 아이입니다. 삶을 일구는 어른과 어깨동무하며 동무랑 살가이 어깨동무하며 삶을 일구는 아이입니다.


  사랑을 물려받은 아이는, 동생이나 동무나 이웃하고 사랑을 나눕니다. 어릴 적부터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나 학교나 학원에 등떠밀리며 사랑 아닌 지식과 훈육과 학습에 길들인 아이들은, 나중에 커서 새 어른이 되면, 이녁 아이들을 다시금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이나 학교나 학원에 보낼밖에 없습니다. 아이들로서는 이런 것만 배웠으니까요.


  다시 말하자면, 청소년범죄를 저지르는 아이들은 ‘어른범죄’ 말고는 본 적 없어요. 어른들이 서로 사랑하며 아끼는 삶을 바라보며 물려받은 아이들은 ‘범죄’라는 이름조차 몰라요. 어른들 스스로 서로 사랑하지 않고 아끼지 않는데, 아이들이 ‘사랑’을 알 턱 없어요.


.. 난 음악 악보를 읽을 때 비평하는 마음으로 읽지 않아요. 음악과 만나는 기쁨을 누리죠 … 많은 것들을 기억 속에 담아야 합니다. 그래야 그 자체로 훌륭한 벗들을 곁에 두는 셈이 되지요. 기억에 담은 것은 모두 우리를 풍부하게 해 주고, 우리 자신을 찾는 데 도움이 됩니다 … 보평성이란 뿌리뽑힘이 아니에요. 브람스는 나폴리 사람이 아니고 몬베테르디는 스웨덴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그들의 음악을 들어 보면 아주 잘 느낄 수가 있어요 ..  (71, 73, 103쪽)


  도시소리가 시끄럽다 했지만, 이제 시골소리도 그리 살갑지만은 않습니다. 이제 시골소리도 꽤 시끄럽습니다. 경운기 지나가는 소리 시끄럽습니다. 기계 쓰는 소리 시끄럽습니다. 마을방송 시끄럽습니다. 마을 돌며 장사하는 짐차 확성기 소리 시끄럽습니다. 발동기 돌려 농약 뿌리는 소리 시끄럽습니다.


  호미와 낫과 쟁기를 쓰며 노래하는 소리가 거의 사라집니다. 두레를 하거나 품앗이를 하며 노래를 즐기는 소리가 자꾸 사라집니다. 등짐을 지거나 지게를 짊어지며 부르던 노래가 까맣게 사라집니다. 마당에서 흙 파며 노는 아이들이 몽땅 사라집니다. 절구를 빻고 키를 까부르는 아주머니 노래가 아스라이 사라집니다. 나무를 깎고 다듬으며 짚을 엮는 할아버지 노래가 아득히 사라집니다.


  오늘날 시골에 무슨 소리가 있을까요. 도시로 떠난 아이들이 돈을 벌어 시골 늙은 어버이한테 텔레비전을 사다 줍니다. 시골마을 할매와 할배는 서로 일노래 놀이노래 즐기던 삶을 버리고는, 집집마다 방구석에 틀어박혀 연속극에 넋이 나갑니다. 스스로 노래를 즐기며 부르던 삶인데, 도시로 떠난 아이들이 시골 어버이 삶을 한껏 망가뜨립니다. 도시로 떠난 아이들은 가끔 시골로 찾아와 어버이 품에 안기더라도 함께 일하지 않고 함께 놀지 않아요. 함께 일할 줄 모르고 함께 놀 줄 모르겠지요. 도시로 떠난 아이들은 ‘돈 벌 줄’은 알 테지만, ‘일할 줄’은 모를 테고, 무엇보다 ‘놀 줄’ 몰라요. 시골에서 무슨 일을 하고 무슨 놀이를 누릴 때에 삶이 아름다운가를 하나도 몰라요.


.. 선생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제자가 여러 도구를 자유자재로 만질 수 있는 힘을 길러 주는 거예요. 제자가 그 도구로 무엇을 하건, 선생은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요 … 자녀가 변덕을 부려도 그대로 놓아두는 것은 자녀를 사랑하는 일이 아니에요. 자녀를 사랑한다는 건 그에게서 최선을 끌어내는 일, 어려운 일을 좋아하는 법을 가르치는 일이죠 … 우리는 누군가의 마음을 꽉 닫아버릴 수 있습니다. 한편 어떤 식으로 한 말이 상대방을 활짝 피어나게 하고 믿음을 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진실을 말해야 하지만, 어디까지나 신뢰를 불러일으키고 마음속 자아를 해방시키자는 생각을 갖고 말해야 합니다 ..  (84, 86, 95∼96쪽)


  브뤼노 몽생종이라는 분이 나디아 불랑제 님한테서 들은 이야기를 갈무리하면서 엮은 책 《음악가의 음악가, 나디아 불랑제》(포노,2013)를 읽습니다. 나디아 불랑제 님은 젊은이와 어린이한테 노래를 가르치며 한삶을 누린 분이라고 합니다. 삶을 밝히는 노래를 가르치면서 스스로 삶을 밝혔겠지요. 삶을 사랑하는 노래를 가르치면서 스스로 삶을 사랑했겠지요.


  모든 목소리는 노래입니다. 밥을 짓고 아이들 부르는 목소리도 노래요, 졸린 아이들 잠자리에 누여 토닥토닥 자장노래 부르는 목소리도 노래입니다. 삽질 소리도 호미질 소리도 모두 노래입니다.


.. 저는 학생들이 바흐 이후의 음악은 바흐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걸 원치 않아요. 바흐 이후의 음악은 단지 바흐와 다를 뿐이니까요 … 한 인간에 대해 아는 것은 일상에서 일어나는 일들에는 매우 큰 도움이 됩니다만, 예술가의 삶이란 다름 아닌 그의 작품이에요 … 연주자가 우위를 차지하는 순간부터 연주는 잘못됩니다. 연주자는 승리하지만 곡은 망쳐지는 것이죠. 결국 지고한 연주란, 듣는 이가 작곡가도 잊고 연주자도 잊고 나 자신조차 잊게 만드는 그런 연주예요. 오직 그 빼어난 곡뿐, 그것 말고 다른 것은 모두 잊게 되는 경지 … 연주자를 잊을 정도라면 연주자는 아주 높은 곳에 자리매김되는 것이죠. 왜냐하면 아무것도 아닌 사람의 빛은 아무것도 밝혀 주지 못하는 법이니까요 ..  (111, 144, 161, 163쪽)


  미나리를 뜯을 적이랑 유채잎을 뜯을 적에 소리가 다릅니다. 쑥을 뜯을 때랑 별꽃나물 뜯을 때에 소리가 다릅니다. 꽃다지 잎이랑 꽃마리 잎을 뜯어서 씹을 때에 냠냠 소리 다르고, 맛이랑 내음이 모두 다릅니다. 배추잎하고 양배추잎을 칼로 썰 때에도 소리가 달라요. 미역국 끓일 때랑 감자국 끓일 때에도 소리가 다릅니다. 냄새도 맛도 다르지만, 소리부터 달라요. 무를 썰 때하고 고구마를 썰 때에도 소리가 다르지요.


  도랑물 흐를 적에도 언제나 소리가 다릅니다. 같은 논둑 없고 같은 논뙈기란 없어요. 같은 소나무라 하지만 솔잎 건드리며 지나가는 바람이 일으키는 소리는 노상 달라요.


  온누리에는 늘 다른 소리가 감돕니다. 온누리는 사뭇 다른 소리가 곱게 어우러지는 기쁨입니다. 귀를 기울일 줄 안다면, 이 모든 소리를 살포시 잇고 맺으면서 노랫가락으로 엮을 수 있습니다. 마음을 쓰고 귀를 열며 가슴으로 껴안을 줄 안다면, 이 온갖 소리를 아름답게 엮는 길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 습관이 전통은 아니에요 … 과거에 기대어 미래를 구축할 수는 있어도, 지난날 이미 이뤄진 것을 되풀이함으로써 미래를 구축할 수는 없습니다 … 음악을 몸으로 산다는 건 제게 너무도 큰 기쁨의 원천이라, 저는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제 방법을 통해 그것을 나누고 싶었던 겁니다 … 마치 아이처럼 표현하는 것이죠 ..  (184, 186, 194쪽)


  하늘을 울리는 듯한 노래는 참말 하늘을 울리려고 지은 노래입니다. 별빛이나 햇빛이 흐르는 듯한 노래는 참말 별빛이나 햇빛이 흐르는 기운을 받아서 지은 노래입니다. 사랑을 속삭이는구나 싶은 노래는 참말 사랑을 속삭이려고 지은 노래이지요.


  마음이 있고, 꿈이 있기에, 노래 한 가락 짓습니다. 생각이 있으며, 사랑이 있으니, 노래길 걸어가고픈 이들한테 이야기 한 자락 가르칩니다.


  어버이 되어 아이들 가르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천재로 만들려고 아이를 가르치나요? 돈 잘 버는 일꾼 되라며 아이를 가르치나요? 학자나 지식인이나 전문가 되라며 아이를 가르치나요? 온통 사랑 되며 삶을 곱게 누리라는 뜻으로 아이를 가르치나요? 이웃을 아끼고 아이 스스로 아이 몸과 마음을 아끼라는 뜻으로 아이를 가르치나요?


  삶으로 부르는 사랑노래입니다. 사랑으로 부르는 삶노래입니다. 꿈으로 부르는 웃음노래입니다. 웃음으로 부르는 꿈노래입니다.


  개나 고양이는 스무 해 살면 죽음 문턱 넘나든다지만, 사람은 스무 해쯤 자라면서 몸과 마음이 무르익습니다. ‘아이로 살아가는 나날’이 더할 나위 없이 긴 사람입니다. 왜 사람은 ‘아이로 살아가는 나날’이 이렇게 길까요. 그리고, 오늘날 물질문명 도시사회에서는 왜 아이들이 스무 살 될 때까지 즐겁게 놀고 뛰고 노래하고 춤추고 사랑하도록 이끌지 않으면서, 갖가지 시험지옥과 입시지옥과 학원지옥과 영어지옥 따위를 만들어 괴롭힐까요.


  프랑스에서 1980년에 나온 이야기책 《음악가의 음악가, 나디아 불랑제》가 2013년이 되어서야 비로소 한국말로 나옵니다만, 오늘날 우리 한국사람은 이 책을 읽으면서 어떤 넋을 받아먹거나 어떤 얼을 받아들일 만할까 궁금합니다. 오로지 지옥살이 꾀하는 문질문명 도시사회에서 톱니바퀴 되어 흐르는 사람들이 개구리노래 풀잎노래 바람노래 햇살노래 무지개노래 별빛노래에 귀를 기울일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4346.3.25.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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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 산골
김수자 지음 / 종합출판범우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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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27

 


아름다운 보금자리는 어디에
― 낭만 산골
 김수자 글
 종합출판 범우 펴냄,2009.3.16./9000원

 


  스스로 사랑할 만한 곳에서 사랑하며 살아갈 때에 가장 아름답습니다. 스스로 사랑할 만한 곳이 아닌데 억지로 머물면서 지내야 한다면, 아름답지도 못하고 즐겁지도 못합니다. 사랑이 샘솟지 못하고, 꿈이 자라지 못합니다.


  어른이나 아이나 사랑을 느낄 만한 데에서 삶을 꾸려야 아름다우리라 느낍니다. 사랑을 못 느낄 만한 데에서 돈만 벌거나 시험공부만 한다면, 어른도 아이도 아름다움하고는 차츰 멀어질밖에 없다고 느낍니다.


  돈을 억수로 번대서 억수로 쌓은 돈을 다 쓰지 못해요. 즐겁게 쓰지도 못해요. 시험성적 잘 나와 이런 대학교 저런 대학교에 붙는들 졸업장이 남지, 딱히 더 남을 것이 없습니다. 돈 때문에 살아갈 목숨이 아니고, 졸업장 이름값 때문에 흘려버릴 푸른 나날이 아닙니다.


.. 눈밭에 낫을 들고 나가 마른 산 갈대를 잘라 와서 밑불을 놓고 생 참나무 장작을 아궁이 가득 밀어 넣는다. 눈 속에 불쏘시개거리 마른 풀이 남아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가 … 돼지 냄새에 신경 쓰고 질병에 신경 쓰다 보니, 사람 사는 동네와는 먼 곳을 선호하게 되는 까닭이다. 돼지 따라 변두리를 좋아하다 보니 평생 수돗물을 못 먹어 보았고, 쓰레기 봉투를 모르고 산다 ..  (15, 26쪽)


  며칠 앞서 ‘고흥 마중길’이라는 자리를 지나갑니다. 이웃이 모는 짐차를 얻어타고 아이들과 함께 해창만 사이를 지나가다가 ‘고흥 마중길’ 알림판을 봅니다. 살짝 멈추어 ‘고흥 마중길’ 첫 자리를 살펴보는데, 그늘이 드리우는 자리도, 흙을 밟을 자리도, 물 한 모금 마실 자리도 아직 따로 없습니다. 알림판과 푯말만 덩그러니 있습니다. 해창만부터 능정마을과 사도마을까지 죽 걸어가라는 길이라 하지만, 이 길은 자동차가 매섭게 싱싱 달리는 길이며, 참말 그늘이건 앉을 빈터이건 하나 없어요. 그렇다고 풀밭이나 흙을 밟는 포근한 길이 되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이곳까지 오자면 자가용을 몰아야 해요. 자가용 몰고 이곳에 차를 댄 다음 10킬로미터 길을 죽 걸어가서, 다시 10킬로미터 길을 돌아오라는 소리인데, 시골마을에는 가게나 편의점이 없습니다. 그렇다고 물 마실 자리도 없지요.


  고흥군청에서 애써 목돈 들여 알림판과 푯말 세운 뒤, 이런 시설 저런 건물 짓느라 부산한 듯하지만, ‘사람이 걷는 길’은 돈으로 지을 수 없습니다. 사람이 느긋하게 거닐며 삶을 누리도록 하는 길은 돈으로 닦을 수 없습니다.


  내 보금자리 깃든 마을에서 이웃집 찾아가는 구비구비 시골길은, 사람들 스스로 꾸준히 두 다리로 천천히 땅을 디디고 다니면서 생깁니다. 오솔길은 사람이 빚습니다. 숲길은 숲이 빚지요. 제주 올레길이든 지리산 둘레길이든 그닥 재미있지 않아요. 왜냐하면, 마을사람 스스로 즐겁게 거닐며 오가는 길이 아니니까요. 살가운 이웃을 만나러 사랑을 마음에 품고 오가는 길이 아니니까요.


.. 각박한 세상을 향기로 채우고 사람들을 웃게 만드는 것은 꽃과 식물이다 ..  (82쪽)


  관청에서 찻길 가장자리에 꽃씨를 뿌린대서 찻길이 예쁘지 않습니다. 빈논이나 빈밭에 유채씨 뿌린대서 찻길이 곱지 않습니다.


  그저 가만히 놓아 두셔요. 그러면 나무씨앗 풀씨앗 스스로 날려 아름다운 들길이 이루어집니다. 찻길 넓이만큼 사람들 느긋하게 다닐 만한 흙땅을 마련해 주셔요. 그러면 사람들 스스로 이 길을 거닐면서 아름다운 거님길로 일굽니다.


  관청에서 돈을 안 들여도 마을사람 스스로 거님길에 씨앗을 심습니다. 관청에서 돈을 안 퍼부어도 마을사람 스스로 열매나무 꽃나무 거님길 한쪽에 심습니다.


  길은 마을에서 태어납니다. 길은 마을에서 싱그럽게 숨을 쉽니다. 곧, 집은 마을에서 스스로 일구어 짓습니다. 어여쁜 살림살이 깃든 보금자리는 마을사람 스스로 한 땀 두 땀 기나긴 해에 걸쳐 손질하며 차츰차츰 고운 결과 무늬와 빛으로 거듭납니다.


..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시골구석에서 산다고, 고층 아파트에서 한겨울에 반팔 옷 입고 살지 않는다고, 유명백화점에서 쇼핑을 하지 않는다고 시골 사람들이 자존심 상해 할 거라는 선입견은 오해다 … 이번 (한미자유무역)협정으로 가장 이익을 보는 쪽은 ‘소비자’이며 가장 손해를 보는 쪽은 ‘농수축산업’이란다 ..  (190, 212쪽)


  전라도 순천에서 돼지농장 하는 김수자 님이 쓴 《낭만 산골》(종합출판 범우,2009)을 읽습니다. 시골살이 즐기는 사람이 쓰는 책이 무척 드문데, 《낭만 산골》은 참말 시골사람 스스로 시골살이 들려주는 이야기책입니다. 시골내음 밴 이야기요, 시골소리 감도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돼지 한 마리 두 마리 보살피는 냄새까지 글에 담지는 못합니다. 늘 돼지와 어울려 돼지내음 맡는다고 하지만, 농장경영과 농장관리 테두리에서 글을 쓰는 바람에, 여느 수수한 시골사람 목소리까지 차분하면서 조곤조곤 이야기꽃 피우지는 못합니다.


  그래도, 이렇게 이야기 한 자락 나올 수 있어 반갑습니다. 순천 돼지농장 아줌마 이야기가 책으로 태어난다면, 고흥 김공장 아저씨 이야기도 책으로 태어나면 재미있겠네 싶습니다. 매생이집 할머니 이야기도 책으로 태어나면 재미있을 테고, 유자농장과 석류농장 아저씨 아줌마 이야기도 책으로 태어나면 재미있을 테지요. 수필이나 산문을 떠나 농사일기나 농장일기를 군청에서 ‘제대로 돈을 들여 펴내어’ 시골마을뿐 아니라 도시사람한테도 읽히도록 하면 참으로 재미나리라 생각합니다.


.. 넓은 산속을 종횡무진 누비고 살던 나는 15층 좁은 아파트에서 어질어질 멀미에 시달리다가 겨우 이틀 밤 자고 서울을 탈출했다. 돌아오는 길에 서울에서 시내버스를 탔다가 또 한 건 톡톡히 올렸는데, 이번에는 5천 원권 지폐 한 장을 낸 것이 화근이었다. 나는 “죄송합니다.” 하고 잔돈 준비 못 한 실수를 사과했지만 때는 늦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난(고액권이 얼마나 짜증나는 일인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그렇다고 돈을 보고 이렇게 화를 내면 어쩌나? 1만 원권을 냈더라면 아마도 승차거부나 멱살잡이를 당하지 않았을까) 기사님께서 우당탕 동전통을 두드려 쏟아낸 동전을 한참이나 쓸어담아야 했다. 끈적이는 기름때와 먼지에 전 마흔 개의 동전(버스요금이 천 원인 것을 처음 알았다) ..  (158∼159쪽)


  시골사람이 쓸 글은 시골 이야기입니다. 시골사람은 시골에서 흙 만지는 삶을 글로 쓸 노릇입니다. 시골 군청은 시골사람 누구나 시골 이야기를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어 책이 태어나도록 도울 노릇입니다. 쌀 한 톨 어떻게 빚는지, 김 한 장 어떻게 얻는지, 나물 한 접시 어떻게 뜯는지, 푸성귀 하나 어떻게 마련하는지, 이런저런 숱한 시골살이를 저마다 다른 빛깔로 시골사람 스스로 적바림하도록 북돋울 노릇입니다.


  이런 건물 짓거나 저런 공사 벌이는 데에는 돈을 그만 쓰기를 빌어요. 살아가는 이야기 나누고, 아름다이 보금자리 누리는 이야기 길어올려, 사람이 사람답게 어깨동무하는 길을 밝히는 데에 ‘군 예산’ 알뜰살뜰 쓸 수 있기를 빌어요.


  이야기가 있기에 길이고, 이야기가 있어서 마을입니다. 이야기가 있을 때에 비로소 정치·교육·문화·예술·행정이 빛납니다. 4346.3.11.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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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마지막 축제 - 2013년 문광부 우수교양도서
용서해 지음 / 샨티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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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25

 


삶은 날마다 잔치
― 삶의 마지막 축제
 용서해 글
 샨티 펴냄,2012.12.24./14000원

 


  삶은 날마다 잔치입니다. 새 하루를 웃으며 즐겁게 맞이하면 웃음잔치이고, 새 하루를 울면서 슬프게 맞이하면 눈물잔치입니다.


  삶은 언제나 잔치입니다. 언제나 노래를 부르는 삶이면 노래잔치요, 언제나 투정만 부리면 투정잔치입니다. 언제나 소곤소곤 속닥속닥 도란도란 이야기를 즐기면 이야기잔치일 테고, 언제나 꿍한 채 말다툼을 일삼는다면 말다툼잔치예요.


  내 삶이 웃음잔치가 되게 하는 사람은 바로 나입니다. 내 삶이 눈물잔치가 되게 하는 사람도 바로 나입니다. 남들이 내 삶을 웃음잔치로 이끌지 않습니다. 남들이 내 삶을 눈물잔치로 내몰지 않습니다. 스스로 가슴에 품는 넋에 따라 하루가 달라집니다. 스스로 마음으로 빚는 꿈에 따라 하루가 거듭납니다.


.. 나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빠르게 흐르는 시간 속에서, 꽉 짜인 일정에 맞추어 마치 기계를 다루듯 악기를 연주했고 공연을 하러 다녔으며, 집에 돌아오면 또 주어진 역할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 호스피스 센터에 드나드는 세월이 제법 쌓여 가면서, 죽어 가는 사람들의 얼굴에 드러나는 표정만 봐도 그 사람이 행복한 삶을 살았는지, 아닌지 어느 정도는 가늠할 수 있었다. 결국 죽음 이후보다 살아 있는 지금 이 순간 행복하냐 아니냐가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  (18, 43쪽)


  용서해 님이 빚은 이야기책 《삶의 마지막 축제》(샨티,2012)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용서해 님이든 다른 분이든, 오늘 하루를 누릴 사람들입니다. 모레를 누리거나 글피를 누릴 사람이 아니에요. 바로 오늘을 누릴 사람입니다.


  오늘 뜨는 해를 바라봅니다. 오늘 지는 해를 바라봅니다. 오늘 부는 바람을 쐽니다. 오늘 찾아드는 추위를 느끼고, 오늘 풀리는 날씨를 느껴요. 오늘 피어나는 꽃을 마주합니다. 오늘 돋는 봄나물을 뜯어서 먹습니다.


  어제 웃었으니 오늘 안 웃어도 되지 않습니다. 엊저녁에 밥을 먹었으니 아침에 밥을 굶어도 되지 않습니다. 그제에 노래를 불렀으니 오늘은 노래 없이 지내도 되지 않습니다. 그끄제에 햇살 한 줌 쬐었으니 오늘 햇살 안 쬐어도 되지 않아요.


  하고 싶은 놀이를 합니다. 하고 싶은 일을 합니다. 하고 싶은 말을 합니다. 먹고 싶은 밥을 먹고, 가고 싶은 곳을 가며, 나누고 싶은 사랑을 나눕니다.


  벌써 제법 된 일인데, 도시에서는 스모그가 생깁니다. 여느 먼지가 아닌 먼지덩어리요, 푸른 바람이나 맑은 바람이 아닌 매캐한 바람이나 뿌연 바람입니다. 흙땅 없이 시멘트땅에 아스팔트땅이고, 나무 없이 아파트에 건물인 도시입니다. 들과 내와 바다 아닌 자동차와 가게와 전철과 갖가지 물질문명이 춤추는 도시입니다. 그런데 더없이 많은 사람들이 도시에 깃들어 회사를 다니거나 공무원이 되거나 장사를 합니다. 맑은 바람보다는 돈을 바라고 맙니다. 푸른 바람보다는 대학교 졸업장을 바라고 맙니다. 싱그러운 햇살보다는 공무원 이름표를 바라고 맙니다. 따순 햇살보다는 자가용을 바라고 말아요. 어떻게 살아갈 때에 즐거운 내 하루가 될까 헤아릴 겨를 없이, 도시는 너무 바쁘고 너무 빠르며 너무 어지럽습니다.


.. 몸과 함께 사라질 헛된 명성이나 부귀, 권력 같은 것에 마음을 두기보다는 이 몸을 가지고 살면서 내 영혼이 더 아름답고 소중한 것을 경험하고 깨닫는 것이야말로 진실로 가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았다고나 할까 … 우리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주느냐에 따라 우리 아이들의 미래가 달라질 것이라는 말은 너무도 당연한 말이었다. 그런데도 우리는 어쩌면 이리도 쉽게 그 사실을 망각하고 있고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  (51, 232쪽)


  옆지기가 그림책을 읽어 줍니다. 아이들은 어머니가 그림책 읽어 주는 소리를 듣습니다. 나도 곁에서 몸을 쉬면서 그림책 읽는 소리를 듣습니다. 즐겁습니다. 졸린 작은아이를 품에 안고 다독다독 재우면서 자장노래를 부릅니다. 자장노래 열 가락쯤 뽑으니 작은아이는 새근새근 잠듭니다. 잠자리에 살며시 눕히고 자장노래 두 가락 더 부릅니다. 그동안 더 놀던 큰아이는 조금 더 논 다음 잠자리에 눕습니다. 잠자리에 누운 큰아이 이마를 쓸면서 자장노래를 새로 부릅니다. 자장노래 다섯 가락 뽑을 무렵 큰아이도 스르르 잠듭니다. 그런데, 큰아이가 잠들기 앞서 내가 먼저 곯아떨어질듯합니다. 노래를 부르다가 똑 끊어집니다. 조금 뒤 더 이어서 부르다가 그만둡니다. 큰아이도 잠들었겠거니 생각하며 나도 스르르 꿈나라로 접어듭니다.


  깊은 밤, 작은아이가 끙끙거립니다. 왜 그런가 하고 잠에서 깨어 살피니, 흥건하게 쉬를 누었습니다. 다른 때라면 쉬 마렵다고 꽁꽁거리며 일어났을 텐데, 엊저녁에는 하도 늦게까지 노느라 깊이 잠들며 그만 바지에 쉬를 누었군요. 기저귀며 바지며 모두 갈아입히고, 잠자리 바닥에 새 기저귀 한 장 펼칩니다. 기저귀 펼친 자리에는 내가 눕고 작은아이는 내가 눕던 자리로 옮깁니다.


  다시 잠들었다 싶은 깊은 밤, 이제 큰아이가 끙끙거립니다. 쉬 하러 같이 가자며 부릅니다. 아이야, 집에서 무엇이 무섭다고 그러니. 혼자 가도 될 텐데. 여섯 살 큰아이더러 일어나라 하고 대청마루로 함께 나옵니다. 큰아이는 오줌그릇에 쉬를 합니다. 쉬를 다 눈 아이를 눕힙니다. 오줌그릇을 들고 마당으로 내려섭니다. 마당 귀퉁이 밭자락에 아이 오줌을 뿌리고 나도 쉬를 눕니다.


  밤하늘 올려다봅니다. 저녁에 잠들 무렵에는 구름 없이 별이 쏟아지더니, 어느새 구름이 제법 끼고 달빛도 어슴프레합니다. 바람이 살살 불며 후박나무 잎사귀를 건드립니다. 겨울바람입니다. 쏴르르 쏴르르, 쏴아 쏴아, 낮이든 밤이든 바람소리를 귀기울여 듣고 보면, 바닷가에서 물결치는 소리하고 닮습니다. 맑은 물결이 모래밭 간질이는 소리랑 맑은 바람이 나뭇잎 간질이는 소리는 그윽합니다. 시냇물 구르는 소리랑 풀벌레 노래하는 소리는 고즈넉합니다.


  아이들은 숲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을 때에 얼굴이 환합니다. 아이들은 숲이 들려주는 소리를 들으며 새근새근 잘 잡니다. 어른도 똑같을 테지요. 어른도 자동차 소리 시끄러운 도시에서보다 숲바람 숲노래 그윽한 시골에서 새근새근 잠들기 좋겠지요. 아이뿐 아니라 어른 누구나 기계 소리 가득하고 전깃불 훤한 도시에서보다 멧새와 풀벌레와 별빛과 달빛이 어우러지는 시골에서 코코 잠들며 쉬기 좋겠지요.


.. 숲으로 들어와 살면서 나의 감각들이 조금씩 되살아나는 것을 느낀다. 주변의 나무나 돌, 작은 동물이나 벌레들은 물론 소리, 기온이나 습기 같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도 훨씬 또렷이 느끼고 알아차릴 수 있게 되었다. 또한 보고, 느끼고, 맛보고, 냄새 맡고, 만져 보는 행위들 하나하나에서 전에는 느끼지 못하던 감사함도 느낄 수 있게 되었다 … 나는 자연 속에서 보내면서 풀잎 하나 나뭇잎 하나도 의미 없이 생겨났다 사라지는 건 없다는 사실을 몸으로 체득할 수 있었다 ..  (148, 235쪽)


  삶은 날마다 잔치입니다. 그러면, 날마다 잔치인 삶을 어떻게 누리면서 나눌 때에 한껏 아름다울 만할까요. 삶은 언제나 잔치입니다. 그렇다면, 언제나 잔치인 삶을 누구와 어디에서 누리면서 나눌 때에 한결 빛날 만할까요.


  어제 낮, 고흥읍 장날에 맞추어 읍내에 먹을거리 장만하러 마실을 갔습니다. 게와 오징어와 조개와 튀김닭 들을 장만합니다. 감 여러 꾸러미를 장만해서 장모님 댁하고 형님 집에 부칩니다. 큰아이를 데리고 읍내를 걷는데, 조그마한 고흥읍이지만 자동차 소리 꽤 시끄럽고, 배기가스 냄새가 코를 찌릅니다. 아저씨들은 길을 걷는 아이가 있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고 담배를 태웁니다. 저잣거리 길바닥에 쪼그려앉아 장사하는 할머니한테서 이것저것 사는데, 이 옆으로 자동차가 꾸준히 지나갑니다. 할머니 앞에 쪼그려앉아 물건을 사며 자동차 배기가스를 흠씬 들이마십니다. 저잣거리 할머니는 이 자리에서 자동차 배기가스를 얼마나 많이 마시는가 하고 새삼스레 생각합니다. 자가용 몰며 좁다란 저잣거리 골목을 굳이 지나가려 하는 이들은 이런 대목을 생각하지 못하겠지요. 왜 저잣거리에까지 자동차를 밀고 지나가려 할까요. 왜 조금이나마 걸을 생각을 못할까요. 왜 내 이웃을 살피지 못할까요.


  동짓날 지난 뒤로 낮해가 차츰 길어집니다. 햇살 좋으면 이불을 빨아 널 만합니다. 어제 낮에는 새로 돋은 광대나물 살짝 뜯어 맛을 보았습니다. 곧 피어날 광대나물꽃을 기다릴까 하다가, 줄기와 잎 똑똑 끊어서 먹으면 다시 새 줄기와 잎 돋겠거니 생각하며 먹습니다.


  천천히 동이 틉니다. 아침이 밝으면 아이들이랑 밭자락과 이웃 논둑을 슬슬 돌면서 봄풀 몇 가지 뜯을까 싶습니다. 겨울 딛고 새봄 부르는 어여쁘고 작은 풀포기에 담긴 햇살을 온식구 다 함께 누리고 싶습니다. 4346.2.5.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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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의 일요일들
은희경 지음 / 달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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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23

 


생각을 읽는 말과 책
― 생각의 일요일들
 은희경 글
 달 펴냄,2011.7.20./12000원

 


  내가 쓰는 말은 내가 품은 생각입니다. 내가 품은 생각은 내가 누리는 삶입니다. 스스로 누리는 삶에 따라 생각이 자라고, 생각이 자라는 만큼 말이 태어납니다. 국어사전 한 질을 통째로 읽거나 외운대서 아름다운 말을 쏟아낼 수 없어요. 이오덕 님이 쓴 《우리 글 바로쓰기》 같은 책을 읽는대서 우리 말글을 알맞게 가다듬거나 바르게 쓰지 못해요. 먼저 생각을 가다듬어야 말을 가다듬을 수 있고, 생각을 가다듬자면 삶을 가다듬어야 해요.


  삶이 바로선 사람은 생각이 바로섭니다. 생각이 바로설 적에는 아무 말이나 함부로 하지 않습니다. 삶이 바로서지 않으면 생각이 바로서지 않습니다. 생각이 바로서지 않는데 말이 바로설 수 없어요. 삶은 엉터리이면서 말만 번드레한 사람은 생각 또한 엉터리요 번드레할 뿐입니다. 입에 발린 말로 껍데기만 내세우는 꼴입니다.


  아마, 오늘날 같은 사회에서는 어쩔 수 없는지 모릅니다. 이른바 ‘감정노동’이라는 말까지 있는 만큼, 마음하고는 다른 말을 내뱉고, 마음하고는 동떨어진 생각을 품으며, 마음에 와닿지 않는 삶을 보내기도 해요. 아이들 가르치느라 도시에서 살아야 하고, 아이들 학원 보내느라 힘들게 돈을 벌어야 한다고들 하는데, 아이들 가르치는 삶이 무엇인지 슬기롭게 깨닫지 못하니, 스스로 굴레에 갇혀요. 가르침이 무엇인지 모르고, 스스로 삶으로 누리지 못하니까, 쳇바퀴질에서 맴돕니다.


  앞으로 오백 해나 천 해쯤 지나면, 우리 뒷사람은 우리를 어떻게 바라볼까 하고 생각해 봅니다. 개화기를 지나고 일제강점기를 지나며 해방과 한국전쟁을 지나면서, 신분과 계급이 거의 사라졌다고 일컫습니다. 그러나, 종이쪽에 적은 신분이나 계급만 안 보일 뿐, 우리 사회는 사람들을 숱한 새 신분과 새 계급으로 나눠요. 먼저, 학교 졸업장이라는 신분과 계급이 있어요. 대학졸업장 없이는 공무원시험이든 여느 회사 취직시험이든 치를 수 없어요. 신문사도 출판사도 잡지사도 방송사도 대학졸업장을 반드시 갖춰야 해요. 곧, 대학졸업장은 새로운 신분증입니다. 은행계좌 숫자에 따라 삶자리가 갈리면서, 돈 크기에 맞추어 계급 또한 갈립니다. 동네와 마을이 계급으로 갈리고, 일자리에서도 계급으로 갈립니다. 한국 사회는 밥그릇이라 하는 나이에 따라 새삼스러운 신분과 계급이 있습니다. ‘년차’라고 하는 회사 밥그릇으로도 신분과 계급을 새삼스레 나눕니다.


  이 모든 신분이나 계급은 도시에만 있어요.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스스로 신분이나 계급에 갇혀요. 돈을 벌자니 어쩔 수 없다는 말은 핑계입니다. 아이들 가르친다는 말도 핑계입니다. 어쩌면, 수렁이나 덫일는지 모르지요. 이런 핑계 저런 핑계를 대며 스스로 신분이나 계급에 갇히도록 하는 수렁이나 덫일 수 있어요.


  그러니까, 나는 앞으로 오백 해쯤 뒤를 헤아려 봅니다. 2500년을 살아갈 뒷사람은 2000년대 사회를 어떻게 읽고 말하려나요. 봉건사회 다음으로 찾아온 2000년대 오늘날을 2500년대 사람들은 어떻게 읽고 말하려나요.


.. 소설을 쓰고 있을 때는 온힘을 다해 나 자신을 믿을 수밖에 없다 … 한 사람의 독자로서, 나에게도 좋아하는 작가들이 있어요. 동료나 후배이긴 해도 어쩔 수 없이 약간은 팬의 마음으로 대하게 되죠. 모임 같은 데에서 옆자리에 앉게 되면 기분이 좋구요. 그쪽에서 무슨 말을 하든 재미있어 할 준비를 갖추고 귀를 기울여요 … 봄날이었을까, 나는 오렌지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지. 행사가 끝난 다음날 선생님께서 아침밥을 먹자고 부르셨다. 박완서 선생님과 오정희 선생님이 와 계셨고, 햇살이 비쳐드는 선생님 댁의 아침밥상에서 세 분의 대선배가 나누시는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그랬다. 정말 이것이 현실일까. 그렇구나. 꿈이 아니야. 내가 작가가 된 거야, 아아! ..  (6, 47, 199쪽)


  은희경 님이 쓴 《생각의 일요일들》(달,2011)이라는 산문책을 읽습니다. 생각이 있는 일요일인지, 생각을 하는 일요일인지, 생각이 쉬는 일요일인지, 생각이 모이는 일요일인지, 아무튼 생각하고 일요일이 만납니다. 책 하나에 깃든 글 한 줄 읽으면서, 소설쓰는 은희경 님 삶과 넋과 말을 만납니다.


  소설쓰는 은희경 님은 어떻게 소설쟁이 길을 걸었을까 헤아려 봅니다. 아마, 꿈을 꾸었겠지요. 그리고, 글을 썼겠지요. 그리고, 다시 꿈을 꾸었겠지요. 그러고서, 또 글을 썼겠지요.


  꿈을 꾸고(생각) 글을 씁니다(삶). 다시 꿈을 꾸고(생각) 글을 씁니다(삶). 거듭거듭 꿈을 꾸고(생각) 글을 씁니다(삶). 이리하여 소설(말)이 태어납니다. 소설(말)이 태어나면서 꿈(생각)이 천천히 이루어지고, 꿈이 천천히 이루어지면서 글(삶)을 쓰는 하루가 새롭게 빛납니다. 삶을 누리려고 생각을 밝히고, 생각을 밝히면서 말이 샘솟아요. 삶을 일구면서 생각이 자라고, 생각이 자라면서 말이 나타납니다.


.. 하지만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 하나하나 제자리를 찾아 주고 싶어요 … 한국어는 소수의 언어이다. 한국 작가는 제한된 독자밖에는 가질 수 없다, 고 생각해 왔다. 헝가리어를 쓰는 사람은 더 적다. 그런데 자기 언어에 자부심이 대단하다고 한다. 죽은 지 400년 뒤에 유명해진 국민 작가가 있는데, 내가 놀란 것은 400년 전에 씌어진 글이 지금도 아무 곤란 없이 잘 읽힌다는 점이다 ..  (137, 158쪽)


  사백 해 앞서 어떤 헝가리 글쟁이가 쓴 글을 오늘날 헝가리 사람들이 ‘즐겁게’ 읽는다고 합니다. 헝가리는 참 아름다운 나라로군요. 사람들도 삶터도 말도 아름답기에, 사백 해 앞서이건 사천 해 앞서이건, 또 사백 해 뒤이건 사천 해 뒤이건, 헝가리는 아름다움을 곱게 이을 수 있으리라 생각해요.


  그러면, 오늘날 한국사람은 어떠할까요. 2000년대 한국사람이 쓴 글을 1600년대 사람이 ‘즐겁게’ 읽을 만할까요. 2000년대 한국사람이 오늘 쓰는 글을 1600년대 사람이 ‘즐겁게’ 읽을 만하다면, 앞으로 2400년대 한국사람도 2000년대 우리들 글을 ‘즐겁게’ 읽을 만하리라 느껴요.


  뿌리가 없이 쓰는 글이라면, 참말 뿌리가 없습니다. 잎사귀를 틔우지 않는 글이라면, 참말 잎사귀가 트지 않습니다.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만한 글을 쓰면, 참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요.


  글이란 내 생각입니다. 글이란 내 삶입니다.


  시골에서 흙을 만지며 푸성귀 돌보는 손길은 내 삶입니다. 아이들과 살아가며 따사로이 어루만지는 손길은 내 삶입니다.


  내 삶은 어디 먼 데에 있지 않아요. 내 삶은 바로 내 곁에 있어요. 삶을 읽을 때에 생각을 읽고, 생각을 읽기에 글을 읽습니다. 이렇게 하기에 예쁘거나 아름답지 않아요. 저렇게 하기에 밉거나 못나지 않아요. 즐거움을 깨닫고 즐거움이라는 씨앗을 삶자리에 뿌릴 때에 즐거움은 웃음꽃으로 피어나요.


.. 대중은 쉽고 재미있는 것을 애호하는 한편, 아예 어려운 것이라야 존경심을 품는 것 같다 … 하늘과 구름에 가장 잘 어울리는 건, 역시 산 … 바람이 섞인 빗소리가 너무 좋아 잠들기 아깝다 ..  (217, 222, 224쪽)


  겨울비 하루 내내 들판과 숲을 적신 고흥 시골집에서 은희경 님 산문책을 읽습니다. 빗소리는 참 즐겁습니다. 바람소리는 참 싱그럽습니다. 비님 지나가신 하늘은 티없이 맑습니다. 깜깜한 밤을 빛내는 수많은 별빛을 낮에도 가만히 그려 봅니다. 햇빛이 워낙 밝게 드리우니 별빛을 못 느끼는 한낮일 텐데, 어쩌면, 별빛이 어우러지며 햇빛이 한껏 눈부시게 온 들판과 숲을 포근히 감쌀는지 몰라요. 즐거운 넋으로 쓴 글이 즐거운 웃음이라는 씨앗을 뿌립니다. 4346.2.3.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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