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 가련하고 정다운 나라
조르주 뒤크로 지음, 최미경 옮김 / 눈빛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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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66

 


구경꾼과 마을지기 사이
― 가련하고 정다운 나라, 조선
 조르주 뒤크로 글
 루이 마랭 사진
 최미경 옮김
 눈빛 펴냄, 2001.7.30.

 


  구경꾼은 구경을 합니다. 마을사람은 마을을 보살핍니다. 구경꾼은 얼핏 구경하다가 지나갑니다. 마을사람은 마을에서 살아가며 마을빛을 가꿉니다. 구경꾼이 사진을 찍을 적에는 구경하는 사진이 태어납니다. 마을사람이 마을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면 마을에서 감도는 마을빛이 새롭게 환합니다. 구경꾼이 구경하며 글을 쓰면 이 글을 읽는 사람도 다른 사람들 모습을 구경하듯이 읽습니다. 마을사람이 마을살이를 글로 쓰면 이 글을 읽는 사람은 마을사람을 살가운 이웃으로 느끼며 서로 어깨동무하며 살아갈 길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먼발치에서 구경하느냐, 아니면 마을에서 마을사람으로서, 또 마을지기로서 살아가느냐 하는 대목에서 서로 엇갈립니다. 삶이 엇갈립니다.


  구경한대서 나쁠 일은 없습니다. 그저 구경할 뿐이에요. 살아가기에 더 훌륭하지 않습니다. 그예 살아갈 뿐입니다. 구경하면서 하루가 스쳐서 지나갑니다. 살아가면서 하루를 한결 깊고 넓게 들여다봅니다.


.. 남산을 거쳐 한양에 도착하는 사람은 나뭇가지 사이로 초가지붕으로 잔뜩 덮인 큰 마을을 볼 수 있다. 처음에는 굴뚝 연기에 휩싸인 이 초가가 가득한 마을이 조선의 수도인 한양이라고 믿어지지가 않는다. 그러나 끝없이 늘어선 초가들과 시가를 둘러싸고 있는 성곽, 웅장한 성문들을 보게 되면, 더 이상 의심의 여지는 없어진다. 여기가 바로 한양이며, 한양은 마치 겉보기가 볼품없는 농촌의 아낙 같아 보인다. 초가들은 꾸밈이 없어 보이며, 무척 가난해 보이기는 하지만 결코 처량하지는 않다. 아주 맑고 은은한 햇빛이 이 가난해 보이는 정경을 포근하게 감싸안는다 …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중국식 청기와를 얹고 싶어하지만, 그것은 일부 양반에게나 가능한 사치이며, 대다수의 경우는 짚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 조선의 가옥에는 반드시 뜰이 있게 마련이다. 자유롭게 바람을 쐴 수 있는 이 작은 뜰마저 없었더라면, 집안을 지키며 거의 노예와 같이 사는 아낙네들의 삶은 너무나 처량했을 것이다. 사방이 담으로 둘러져 있고, 패랭이꽃이라도 한 뿌리 심어져 있는 햇살이 잘 드는 이 작은 뜰을 사이에 두고 이웃과 약간의 공간을 두게 된다 ..  (67∼68, 69쪽)


  한국사람이 한국을 더 잘 읽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이 한국을 더 잘 말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태어나 이 나라에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스스로 이 나라를 알뜰히 아끼거나 살가이 사랑하지 못한다면, 한국을 제대로 모르기 마련이에요. 참답게 사랑하고 착하게 아끼는 눈길과 손길로 이 나라를 제대로 빛내는 길을 걸어갈 수 있어요.


  나는 인천에서 태어났고 고흥에서 살아갑니다. 나는 인천사람도 되고 고흥사람도 됩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태어난 곳도 사랑하고 내가 살아가는 곳도 사랑하기 때문이에요. 나로서는 인천에서도 마을지기로 지내고 싶으면서 고흥에서도 마을지기로 살아가고 싶습니다. 어느 곳에 머물든 그 마을에서 꿈과 사랑을 속삭이고 싶습니다.


  구경꾼으로 있으면 재미없습니다. 냇물 너머 불구경을 하는 삶이란 재미없어요. 불을 끄든 불을 쬐든 해야지요. 아픈 이웃이 옆에 있는데 모른 척할 수 없어요. 슬픈 벗이 곁에서 우는데 못 본 척할 수 없어요.


  이웃한테 손을 내밉니다. 동무를 살포시 안습니다. 내 이웃도 내가 어려울 적에 손을 내밉니다. 내 동무도 내가 아플 적에 살포시 안아 줍니다. 나는 내 이웃과 동무를 사랑하고, 내 이웃과 동무는 나를 사랑합니다.


  서로 아끼고 사랑할 적에 비로소 마음을 읽습니다. 마음을 읽을 적에 속내를 헤아리고, 속내를 헤아리면서 서로서로 잘 알고 활짝 웃는 벗님이요 옆지기가 됩니다.


.. 일본인들이 아무리 그들의 겉옷인 하오리를 조선인들에게 자랑해도 소용이 없다. 한민족은 항상 눈을 맞은 듯한, 건조한 기후에 쉽게 때를 타는 그들의 아름다운 의관을 고수하고 있다. 고국을 떠나 아무리 먼 나라로 이주해도 한민족은 항상 흰옷차림을 하고 있다. 헤이룽 강가에 채소밭이라도 하나 보이고, 밀가루라도 뒤집어 쓴 듯이 흰옷을 입은 농부를 보게 되면, 그 사람은 틀림없는 조선인이다 ..  (78쪽)


  조르주 뒤크로 님이 글을 쓰고, 루이 마랭 님이 사진을 찍은 인문책 《가련하고 정다운 나라, 조선》(눈빛,2001)을 세 차례 읽었습니다. 글이 살갑고 사진이 따스해서 여러 차례 되읽었습니다. 책을 세 권 장만했고, 두 권은 내 책꽂이에 건사했으며, 한 권은 동무한테 선물했습니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조르주 뒤크로 님이나 루이 마랭 님이 이 나라 한국을 구경꾼으로 스쳐 지나치지 않았다고 깨달았습니다. 한국에서 머나먼 프랑스에서 태어나 살아온 사람들이지만, 이 사람들은 한국땅에 발을 디딜 때부터 ‘마음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눈빛’이었어요.


.. 조선의 문인들은 한자를 배우며, 고전을 본따 한시를 짓는다. 그렇지만 조선의 서민들은 이런 중국식 한시 따위에는 관심이 없다. 왜냐하면 서민에게는 그들의 문자인 한글로 쓰인, 삶의 애환과 꿈을 노래하는 가락과 시가가 있기 때문이다 ..  (105쪽)


  글을 쓰는 마음은 사랑을 하는 마음입니다. 사진을 찍는 마음은 사랑을 하는 마음입니다. 글을 쓰거나 사진을 찍거나 사랑을 하는 마음이 될 뿐입니다. 사랑을 하는 마음이 없이는 글을 못 쓰고 사진을 못 찍어요.


  생각해 보셔요. 사랑을 하는 마음이 없이는 아이를 못 낳습니다. 사랑을 하는 마음이 없으면 아이를 돌보지 못합니다. 사랑을 하는 마음이 아닌데 아이를 가르칠 수 있을까요. 사랑을 하는 마음이 없는 채 아이하고 활짝 웃고 노래하며 놀 수 있을까요.


  삶을 이루는 바탕은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삶바탕을 다스리면서 이 자리에 이야기씨앗 뿌려 이야기꽃을 피웁니다. 이야기꽃은 이내 이야기열매 되어요. 이 이야기열매는 무르익어 어느덧 꿈으로 자랍니다.


.. 양반의 신분·학식·고관의 직은 모두 일치된 것이다. 서민들에게 양반은 주인이며, 돈을 엿보는 눈초리를 의미한다. 세금과 부역은 이 나라에서 아주 무겁다. 때때로 고관들은 황제에게 일정한 수의 호랑이 가죽을 상납해야 하는데 그렇게 되면 사냥꾼들에게 사냥 명령이 떨어진다. 어떤 경우에는 고관이 마을을 지나다 새로 지붕을 이은 집을 눈여겨본다. 그러면 그 지붕을 새로 한 사람은 돈을 바쳐야 한다. 이런 가차없는 징세제도 때문에 차라리 백성들은 빈둥거리며 노는 편을 택한다. 그러나 조국을 떠나 시베리아에라도 가게 되면 한두 푼 저축을 한다. 만약에 정부가 덜 가혹하게 군다면 백성들은 덜 게으를 것이다. 그렇게 무섭게 백성에게서 뺏은 돈은 황제의 기분풀이, 환영행사, 만찬, 불꽃놀이, 성대한 외출, 코끼리 구입, 한양의 백성들을 위한 쌀배급, 군대의 월급 등으로 쓰인다 ..  (119쪽)


  학문으로 다가서면 학문이 돼요. 철학으로 다가가면 철학이 돼요. 교육으로 마주하면 교육이 되지요. 학문이나 철학이나 교육이 나쁘거나 모자라거나 어수룩하다고는 느끼지 않아요. 그런데, 삶도 사랑도 이야기도 꿈도 없이, 학문이나 철학이나 교육이 된다면 무슨 보람이 있을까요. 사랑스럽지 않은 학문은 어떤 뜻이 있을까요. 살갑지 못한 교육은 어떤 빛이 될까요. 아름답지 않은 철학은 우리 삶에 어떤 이야기로 스며들까요.


  《가련하고 정다운 나라, 조선》은 인문책입니다. 일제강점기 조선을 돌아본 사람들이 갈무리해서 내놓은 인문책입니다. 일본제국주의와 봉건왕조에 짓눌려 애틋한 사람들이지만, 이렇게 짓눌린 채 살더라도 웃음과 노래와 춤과 꿈과 사랑을 곱게 건사합니다.


  제국주의자도 임금도 밥을 먹어요. 밥을 안 먹으면 제국주의자도 임금도 굶어죽습니다. 친일부역자도 밥을 안 먹으면 죽어요. 그러니까, 이들 권력자는 제아무리 사람(백성)들을 짓누르거나 짓밟더라도 죽이지 못합니다. 권력자가 스스로 흙을 일구어 나락을 거두겠습니까? 권력자가 스스로 나무를 돌보며 능금알을 따겠습니까? 권력자가 배를 뭇고 노를 저어 바다에서 고기를 낚겠습니까? 권력자는 권력을 거머쥐었을 뿐 아무것도 스스로 못 해요. 권력자는 옷을 기울 줄 모릅니다. 권력자는 집을 지을 줄 모릅니다. 권력자는 아이를 돌볼 줄 모르고, 권력자는 아이한테 삶도 사랑도 꿈도 물려줄 줄 모릅니다.


  그러나, 시골사람은 짓눌린 몸으로도 빙그레 웃으면서 흙을 만져요. 시골사람은 이녁이 먹을 밥을 손수 지어서 먹을 뿐 아니라, 권력자한테까지 나눠 줘요. 다만, ‘세금’이라는 이름으로 빼앗기는데, 빼앗기더라도 아쉬워 하거나 서운해 하지 않습니다. 저들이 이렇게 ‘세금’을 내세워 빼앗지 않으면 저들은 굶어죽으니까요.


.. 한양의 사대문 밖 들판은 아름답다. 여기저기 언덕이 보이며, 습곡이 많고, 고요해 보이는 막힌 계곡들이 있고, 그 사이사이에 오래된 밤나무 밑으로 마을들이 들어서 있다. 들판은 모두 논인데 나무숲, 항상 살랑거리는 빼어난 큰 버드나무 등이 있는 곳은 그대로 두었다. 돌로 된 길은 채전·뽕밭·자두나무·살구나무 들이 있는 곳을 피해 구불거리며, 움직이는 흰옷과 소를 끌고 가는 농부들, 머리에 항아리를 이고 우물로 가는 아낙네들의 왕래가 끊이지 않는다. 그런데 아무도 서두르는 사람이 없다. 햇빛이 맑고 바람이 가볍게 이는 이렇게 평온한 나라에 사는 조선인들은 행복하다 ..  (130쪽)


  배부른 부자가 불쌍하다는 말은 괜히 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이한테서 빼앗는 부자라고 해서 너그럽거나 넉넉하지 않습니다. 거머쥔 재산은 많지만, 이 재산을 또 다른 누구한테 빼앗길까 봐, 그러니까 부자가 가난한 이한테서 돈을 가로채거나 빼앗았듯이, 어떤 다른 부자가 이녁 재산을 가로채거나 빼앗을까 봐 끙끙 앓아요. 잔뜩 거머쥐고 많이 챙겼어도 배부르지 못해요. 많이 먹고 잔뜩 먹지만 너그럽지도 느긋하지도 못해요. 외려 더 바쁘고 빠듯합니다. 가지면 가질수록 답답하고 갑갑합니다.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다 할 만합니다. 손에 쥔 것은 풀포기밖에 없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숨 마시고 냇물빛 먹으며 싱그럽게 살아가요. 멧새와 놀고 풀벌레와 노래합니다. 흙빛이 되고 하늘빛이 되며 풀빛이 됩니다. 가난한 여느 조선 시골사람들은 너그럽게 웃고 넉넉하게 노래할 줄 알던 아름다운 우리 어버이들입니다. 4346.11.1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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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11-15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다운 나라에 대한 정다운 글이네요.
행복은 재물에 있지 않고 마음속에 있으니, 가진 재물의 양과 행복이 비례하지 않겠죠.
얼마큼 갖는냐가 아니라 마음의 평화가 제일 중요하겠죠.
마음을 잘 다스려야 되겠습니다. 쉽고도 어려운 일입니다. ^^

숲노래 2013-11-15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로서는 이 글이 여러모로 마음에 드는데
pek0501 님이 좋게 읽어 주셔서 고마워요.

그런데, 저 스스로 이 느낌글을 좋아하는 한편,
이 책이 참 좋아요.

나중에 이 책 꼭 읽어 보셔요.
이렇게 '이웃을 사랑스레 바라보며 글을 쓸 수 있는 마음'이
얼마나 반가우며 예쁜지...
참 아름답구나 싶어요.
 
문화편력기 - 유쾌한 지식여행자의 세계문화기행 지식여행자 8
요네하라 마리 지음, 조영렬 옮김, 이현우 감수 / 마음산책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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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43

 


삶을 읽는 문화
― 문화편력기
 요네하라 마리 글
 조영렬 옮김
 마음산책 펴냄, 2009.12.10.

 


  겨울은 천천히 찾아옵니다. 한겨울을 떠올리면 그닥 춥지 않다 할 만한 온도로 똑 떨어져서 아직 가을에 익숙한 사람들한테 찬기운 물씬 풍기더니 다시 따순 바람이 살살 불다가 천천히 찬바람이 불어 추위에 잘 견디도록 이끕니다.


  겨울 들머리에서 봄을 떠올립니다. 봄바람도 이렇게 찾아옵니다. 하루아침에 갑자기 폭 따스해지지 않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따숩게 바람이 부는데, 이러다가도 다시 썰렁한 바람이 찾아들어요. 섣불리 봄을 노래하지 말라는 듯이, 봄은 스스로 알아서 찾아오기 마련이니 서두르지 말라는 듯이, 따숩고 썰렁한 바람이 갈마듭니다.


.. 사람만 메밀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메밀꽃이 흐드러지게 필 때 대지는 분홍빛이 도는 하얀 융단으로 뒤덮인다. 그 위를 온종일 꿀벌들이 분주히 날아다닌다 … 아침의 복닥거리는 통근 전철 안에서 독서가 어울리는 것은 아마도 같은 이유 때문이리라. 재미있는 책은 불쾌한 현실을 의식에서 쫓아내 준다 ..  (95, 141쪽)


  지구별에서 북반구에서 살아가기에, 북반구에서 남녘에서 지내는 사람은 따순 바람을 더 품으며 살아갑니다. 남반구에서 지내는 사람이라면 북녘에서 지내는 사람이 따순 바람을 더 누리며 살아가겠지요. 그런데, 더 따순 곳이라 해서 더 좋은 곳이 아닙니다. 더 추운 곳이라 해서 더 나쁜 곳이 아닙니다. 누군가한테는 추위가 추위 아닌 여느 날씨입니다. 누군가한테는 더위가 더위 아닌 여느 날씨입니다. 푹푹 찌는 더위라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며 살아도 땀이 흥건하게 고이니 찝찝할 수 있습니다. 휘휘 매섭게 바람이 불지만, 서로 살을 맞대어 한결 가깝고 살가이 살아갈 수 있습니다.


  알래스카에서는 알래스카대로 삶이 있습니다. 시베리아에서는 시베리아대로 삶이 있습니다. 적도에서는 적도대로 삶이 있어요. 쿠스코에서는 쿠스코대로 삶이 있지요. 그리고, 한국에서는 한국대로 삶이 있습니다. 함경도와 평안도와 경기도와 전라도는 저마다 다른 삶자리대로 삶이 다르게 있습니다.


  고장마다 누리는 즐거움이 다릅니다. 고을마다 빚는 맛이 다릅니다. 마을마다 어깨동무하는 노래가 다릅니다.


  다 다른 마을이기에 다 같은 일을 하지 않습니다. 다 다른 삶터이기에 다 같은 길을 걷지 않습니다. 백이면 백, 만이면 만, 서로 다른 삶이요 길이며 일이자 놀이입니다. 다만, 살아가는 마음과 사랑하는 마음은 같아요. 어깨동무하는 마음과 손잡는 마음은 같지요.


.. 일본의 학교에 돌아와 보니, 그저 지식은 조각나고 뿔뿔이 해체되어, 몽땅 암기하는 것을 장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객관적 지식이라는 것이다. 그 지식과 단어가 전체 속에서 어떠한 위치를 차지하는지에 대해서는 묻지 않는다. 괴로운 일이었다 … 그저 ‘부품이 되어라, 완전히 부품이 되어라’라고 강요당하는 느낌이었다. 내 인격 자체가 난도질당하고 해체되어 가는 공포를 느꼈다 … 공정한 평가 따위는 그럴듯한 말일 뿐이다. 지금의 방식이라면 기계로도 채점을 할 수 있으니 평가 기준이 획일화된 것뿐이다. 단순히 교사가 평가에 책임을 지지 않아도 좋을 뿐인 것으로 … 대다수의 사람들은 개나 고양이의 머리가 좋은지 나쁜지를 평가할 때 사람을 기준으로 삼는다 ..  (105, 176쪽)


  밥을 짓는 마음은 어디에서나 똑같습니다.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어버이를 섬기는 마음은 어디에서나 똑같습니다. 아이를 가르치는 빛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다만, 삶자리에 따라 삶이 다르기에, 다 다른 길을 걸어가면서 삶을 누려요.


  오늘날 우리 삶을 돌아봅니다. 오늘날 우리 삶은 도시 물질문명입니다. 서울과 부산이 다를 구석이 없습니다. 서울과 전주가, 서울과 옥천이, 서울과 통영이, 서울과 나주가, 서울과 고흥이, 서울과 양양이, 서울과 서천이, 서울과 함평이, 도무지 무엇이 다를까 알 길이 없습니다. 도시와 도시는 거의 똑같습니다. 도시에서 회사원이나 공무원 되는 사람들 하는 일은 거의 똑같습니다. 공무원이나 회사원 되려고 하는 공부도 거의 똑같습니다.


  서울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대학교를 가려 하든,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다니며 대학교를 가려 하든, 아이들이 들추는 교과서가 똑같고 아이들이 머리에 넣는 지식이 똑같으며 아이들이 다니는 학원마저 똑같은데다가 아이들이 먹고 입고 자는 삶마저 똑같습니다. 틀림없이 다 다른 고장 다 다른 고을 다 다른 마을에서 살아가는 다 다른 아이들인데, 머리에 든 지식이 모두 똑같고 말아요. 그저, 이 지식을 놓고 시험을 치러 다 다른 점수값만 낼 뿐입니다.


  둘레를 살펴보셔요. 전라도사람이라 하더라도 전라도말 제대로 못 합니다. 경상도사람이라지만 경상도말 제대로 모릅니다. 제주사람은 제주말 잊지 않았을까요. 울릉사람은 울릉말 고이 건사할까요. 전라도에서도 고흥사람은 고흥말을 남달리 지키는가요. 전라도 고흥에서도 도화사람은 도화말을 사랑스레 보듬는가요. 전라도 고흥 도화에서도 조그마한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은 이녁 마을말 알뜰살뜰 꽃피우는가요.


.. 일상적으로 수천, 수만 가지 식품에 둘러싸여 있으면서, 그 독성과 품질, 생산지 등에 대해서 거의 아무것도 모른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먹기 위해 일하지만, 돈을 벌고 그 돈으로 음식물을 조달하는 삶의 방식을 취하면서도 식재료를 획득하는 과정에 직접 관여하고 있지는 않으니 무리도 아니다. 식재료 확보에서 음식물 섭취까지의 거리는 점점 멀어지고 있기 때문에 상표나 브랜드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 바로 이때 … 아이들이 인생의 지혜를 가장 잘 배울 수 있는 것은 격리된 교실에서 배우는 이론을 통해서가 아니라, 어른들과 함께하는 노동을 통해서라는 점은 많은 교육학자가 지적해 온 사실인데, 이것은 새끼 고양이만 관찰해 보아도 알 수 있다 … 품과 시간을 들여 만드는 것이 기쁨이기도 할 텐데, 그것이 점점 생략되고 상품화되고 있다 ..  (154, 179∼180쪽)


  요네하라 마리 님이 쓴 《문화편력기》(마음산책,2009)를 읽습니다. 여러 나라, 또는 여러 겨레 문화를 찬찬히 살피면서 느낀 이야기를 그러모은 책입니다. 일본과 러시아, 일본과 동유럽, 또 일본과 여러 문명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문화란 무엇일까요. 우리가 돌아보는 문화란 무엇일까요. 우리들은 ‘문화’를 누리거나 돌아본다고 말하지만, 막상 우리들이 말하거나 누린다는 문화란 문화가 아닌 ‘도시문명’이나 ‘물질문명’은 아닐까요. 도시에 있는 공장에서 찍은 복제품을 놓고 문화라고 잘못 배우고 잘못 말하며 잘못 누리는 모습은 아닐까요. 공산품도 문화라면 문화라 할 테지만, 참말 공산품을 문화라고 말할 만할까요. ‘옷’이 아닌 ‘나이키 아디다스 베네통’과 같은 공산품 상표를 문화라고 말해도 될까요.


.. 차든 꽃이든 유파에 사로잡히지 말고, 맛있게 달이고 아름답게 꽂으면 되는 것이다 … 4월 말, 여섯 살 되던 생일에 어머니가 정원에 수유나무를 심어 주셨다. “이건 마리 네 나무야. 마리보다 딱 여섯 살 어리단다. 귀여워 해 주렴.” 이 말을 듣고 나니 피를 나눈 동생 같은 기분이 들어 내게는 정원에 있는 나무들 가운데 가장 소중한 나무가 되었다 ..  (206, 219쪽)


  요네하라 마리 님은 《문화편력기》라는 책에서 문화를 말한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요네하라 마리 님은 그저 이녁이 살아온 나날을 말할 뿐입니다. 마리 님을 둘러싼 어머니와 아버지 삶을, 또 마리 님 삶을, 마리 님과 마주한 동무와 이웃 삶을, 가만히 돌아보면서 이야기 한 자락으로 적바림하는구나 싶습니다.


  교과서에 나오는 이야기를 읊지 않습니다. 학자나 전문가가 외는 이야기를 읊지 않습니다. 그렇지요. 문화는 교과서에도 학문에도 없어요. 문화는 바로 삶이고, 삶이 곧 문화예요. 삶을 말할 때에 문화를 말합니다. 삶을 누릴 때에 문화를 누립니다. 삶을 가꿀 때에 문화를 가꿔요. 삶이 없으면 문화가 없고, 삶을 잊으면 문화 또한 사라집니다.


  오늘날 한국에는 어떤 문화가 있을까요. 오늘날 한국사람은 스스로 어떤 삶을 누릴까요. 오늘날 이 땅 이 나라 이 고장 이 마을에는 문화가, 삶이, 어느 하나라도 똑똑하거나 맑거나 아름답게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4346.11.12.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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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슴이 부르는 만남 - 이해인 수녀, 혜민 스님, 김선우 시인… 열여덟 멘토의 울림 깊은 인생 이야기, 그리고 법정 스님 가르침
변택주 지음 / 불광출판사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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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65

 


살아가도록 이끄는 빛
― 가슴이 부르는 만남
 변택주 씀
 불광출판사 펴냄, 2013.2.1. 15000원

 


  스스로 보고 싶은 빛을 봅니다. 스스로 듣고 싶은 노래를 듣습니다. 전남 고흥에서 경기 일산까지 두 아이를 데리고 마실을 합니다. 아이들이 일산 할머니 보고 싶다 노래를 부르기에, 먼길 씩씩하게 나서기로 합니다. 새벽밥 먹고 나서는 길 아닌 한낮에 나서는 길이라 기차표를 못 끊고, 고흥 읍내에서 서울로 가는 시외버스를 탑니다. 시외버스 네 시간 반 남짓 걸리는 길에서 아이들이 씩씩하게 잘 놀며 버텨 줍니다. 잠을 한숨이라도 자면 수월할 테지만,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오랜만에 타는 시외버스에서 개구지게 놀려 합니다. 한편으로는 힘이 듭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대견합니다. 시외버스 창문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까맣게 물들 무렵, 작은아이를 품에 안고 나즈막하게 노래를 부릅니다. 삼십 분 남짓 노래를 부르며 아이들을 달랩니다.


  서울 강남버스역에서 내려 지하철을 탑니다. 아이들하고 덜 복닥이자면, 버스역부터 택시를 타고 일산으로 가면 됩니다. 그러나, 나는 굳이 지하철을 탑니다. 지하철로도 얼마든지 일산까지 갈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두 아이는 지하철에서 이리 뛰고 저리 달립니다. 아마, 지하철에서 뛰거나 달리며 노는 아이는 요즈음 거의 없지 싶어요. 시골집에서 새벽부터 저녁까지 조금도 안 쉬고 뛰노는 아이들이니, 시외버스 네 시간 반이란 얼마나 고되었을까요. 아이들은 너무 갑갑했기에 어른 두 사람이 자리에 앉으라며 자리를 내주었어도, 자리에 안 앉습니다. 쉬잖고 뛰며 놉니다. 뛰면서 웃고 까르르 노래합니다.

 

  나는 큰아이를 불러 조금 얌전히 있어 보렴, 신을 벗고 걸상에 예쁘게 앉아 보렴, 하고 말한 뒤, 머리를 두 갈래로 다시 묶습니다. ‘어머니 없이’ 아버지가 혼자 아이 둘을 데리고 다니는데, 지하철에서 가시내 머리를 고무줄 휘휘 돌려 묶는 모습을 서울사람들은 거의 못 보았겠지요. 둘레에서 수건거리는 소리를 다 듣습니다. 그런데 말예요, 왜 수군거릴까요. ‘아버지 아닌 어머니’가 아이들 데리고 다니면서 머리를 묶어 주면 ‘그러려니’ 하고 여길 텐데, 아이 돌보는 몫을 아버지가 못할 까닭이 있겠습니까.


  낮잠 없이 먼길을 가는 아이들이 조금씩 지칠 무렵, 그래도 큰아이는 전철칸 이 끝에서 저 끝으로 달리며 노는데, 작은아이는 힘에 부쳐 아버지 무릎에 드러눕습니다. 그래도 눈을 안 감으려 합니다. 누나 노는 모습을 지켜봅니다. 그래, 너한테 다시 노래를 불러 주어야겠구나. 3호선 지하철이 대화역에 닿기까지 또 삼십 분 즈음 작은아이한테 노래를 들려줍니다. 아이들 웃음과 노래와 놀이로 지하철 시끄러운 소리를 잊고, 내 노래로 아이들 마음결에 보드라운 속삭임이 깃들기를 꿈꿉니다.


- 부처님이 생각했던 불교와 우리가 생각하는 불교는 거리가 멉니다. 우리는 내 편이냐 아니냐를 따지지만 부처님은 달랐습니다. 중생 안락이 기준이었죠. (도법/81쪽)
- 법정 스님이 여성지에 모습 드러내지 말고, 얼굴 팔리려 하지 말고, 세상에 엄격하고, 임 목사답게 살라고, 그러면서도 자유를 마음껏 누릴 수 있다면서 정신 줄, 하늘 줄 놓지 말라고 이르셨어요. 그 뒤로 텔레비전 출연을 하지 않았어요. (임의진/147쪽)


  밤 열한 시 가까워 일산집에 닿습니다. 대화역부터 택시를 타고 구산동까지 들어오는 동안 드디어 작은아이가 잠듭니다. 그러나 일산집에 닿아 할아버지를 보니 작은아이가 깹니다. 이윽고 할머니를 보니 두 아이 잠들 생각을 않습니다. 놀다 놀다 지쳐서 스르르 곯아떨어지기까지 놀고 나서 자리에 눕습니다. 눕힌 두 아이 곁에서 오늘로서는 세 번째 노래를 부릅니다. 나는 우리 집 두 아이한테 노래꾼 되어 하루 내내 노래를 들려줍니다. 큰아이도 작은아이도 아버지 노래를 들으며 말을 배우고 생각을 틉니다. 곧, 나는 아이들 말과 생각뿐 아니라, 내 마음과 꿈을 여는 길목에서 노래를 부릅니다. 아이들을 포근히 달래거나 함께 누리는 놀이가 되는 노래이면서, 어버이인 나 스스로 사랑스러운 눈길로 거듭나도록 북돋우는 말꽃인 노래입니다.


- 스님께 드리면서 ‘남도에는 꽃이 활짝 피었는데 스님도 어서 털고 일어나셔야지요.’ 그랬더니 스님 눈에 눈물이 고이더라고요. (금강/161쪽)
- 예전에는 바른 견해가 없어서 깨달음은 제가 애써 달려가 닿아야 하는 곳인 줄 알았어요. 그런데 이제 보니까 그곳에는 한 발짝도 떨어져 본 적이 없더군요. (혜민/189쪽)


  변택주 님이 쓴 《가슴이 부르는 만남》(불광출판사,2013)을 읽었습니다. 읽은 지 제법 되었습니다. 다 읽고 나서 여러 달 책상맡에 두었습니다. 변택주 님이 만난 ‘법정 스님과 살가운 알음알이 이어진 실타래’ 있는 사람들 이야기를 곰곰이 돌아봅니다. 이 책에 나오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법정 스님한테서 깨달음 한 가지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이녁이 알게 모르게 법정 스님한테 깨달음 두 가지를 선물했겠지요. 그리고, 법정 스님은 다시금 이녁한테 깨달음 세 가지를 베풀었을 테고, 이녁은 이녁 스스로 모르는 사이 법정 스님한테 깨달음 네 가지를 돌려주었으리라 느껴요.


  왜냐하면, 삶을 이루는 빛이거든요. 살아가도록 이끄는 빛이에요.


  어른은 아이를 낳아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놀리고 가르치면서 키웁니다. 그런데, 아이는 어른 뒷바라지 받으면서 자라기만 하지는 않아요. 아이는 아이 스스로 모르는 결에 어른을 돕고 살찌웁니다. 아이가 있어 어른은 기운을 내어 더 씩씩하게 일하지요. 아이가 있어 어른은 이녁 몸도 아름답게 살찌울 만한 밥을 찾아요.


  생각해 보셔요. 아이가 없을 때에 어른들이 어떤 밥을 먹나요. 아이들한테 어른들이 어떤 밥을 먹이나요. 조미료덩이나 가공식품 아이들한테 함부로 먹이는 어른은 없어요. 아이들한테 깨끗하고 좋은 밥 먹이려고 하면서, 어른 또한 저절로 깨끗하고 좋은 밥 먹습니다. 어른이 요모조모 많이 배우고 살펴 아이들을 가르친다 하지만,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뜻이란 어른 스스로 제대로 배우고 난 뒤에야 가르칠 수 있으니, 아이들을 낳고 가르치는 동안 어른은 언제나 새롭게 배운다는 소리입니다.


- 모든 절이 불자든 아니든 시민들이 누구나 자유롭게 들어와 쉴 수 있는 공원이 되어야 하고, 어린이 놀이터를 만들어야만 젊은 보살들이 애들 데리고 올 수 있지요. (김종서/200쪽)
- 법정 스님은 문순태 선생에게 시사는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 그런데 빠지지 말고 자연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라고 했다. (문순태/261쪽)


  학교에서 교사는 가르치기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가르치면서 늘 배우는 사람이 교사입니다. 학교에서 학생은 배우기만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배우면서 늘 가르치는 사람이 학생이에요.


  스승과 제자 사이란 언제나 서로서로 가르치면서 배우는 실타래입니다. 어른과 아이 사이란 언제나 서로서로 돌보며 사랑하는 실타래예요.


  대학교수도 아니요, 대학교 문턱조차 못 밟았다 하는, 여느 아줌마 할머니 들한테서 이야기 한 자락 들어 보아요. 우리 삶을 밝히는 환한 빛줄기 한껏 찾을 수 있어요. 시골에서 흙을 만지는 할매와 할배 들을 만나 이야기 두 자락 들어 보아요. 우리 꿈을 가꾸는 고운 빛줄기 실컷 찾아볼 수 있어요.


- 아무리 설법을 많이 듣는다 해도 제 마음은 제가 열 수밖에 없습니다. (나석정/299쪽)


  오늘 아침도 여느 때와 똑같이 풀을 뜯어 아이들을 먹입니다. 풀을 뜯어 아이들을 먹이기에, 어버이인 나도 풀을 함께 먹습니다. 언제나 아이들을 사랑하면서 내 마음과 몸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나 스스로 돌아보고 가꾸면서 아이들을 돌아보고 가꾸는 길을 걷습니다. 사랑은 하나요, 꿈은 하나입니다. 빛은 하나이고, 꽃은 하나입니다. 4346.8.31.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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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대혁명 1
막스 갈로 지음, 박상준 옮김 / 민음사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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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63

 


목아지 따는 전쟁은 혁명이 아니다
― 프랑스 대혁명 1
 막스 갈로 글,박상준 옮김
 민음사 펴냄,2013.6.28./18000원

 


  사람들이 으레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일컫는 역사를 다시 엮어서 새롭게 보여주는 《프랑스 대혁명》(민음사,2013) 1권을 읽습니다. 1700년대 끝무렵 이야기인데, 수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지난날 이야기를 마치 오늘날 이야기처럼 들려줍니다. 프랑스는 참 놀라운 나라로구나 하고 생각하다가, 문득 이 나라에서 1800년대 끝무렵 농사꾼들 동학 이야기라든지, 1980년대 전남 광주 사람들 이야기를 이처럼 들려줄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이 나라에는 어떤 자료와 기록이 있어 우리들 살아온 모습을 우리 뒷사람한테 조곤조곤 들려줄 만한지 궁금합니다.


.. “국가 만세!” “공화국 만세!” “평등 만세!” “자유 만세!” 파랑돌 춤을 추는 무리가 사형 집행대를 둘러쌌다. 몇몇 남녀가 이전의 프랑스 왕, 루이 카페의 피로 손수건이나 편지 봉투 따위를 적시려고 기요틴에 다가왔다. 그들은 붉은 승리의 기념물들을 흔들어댔다 … 왕비는 왕에게 이 ‘반란’을 끝내라고 고집했다. 루이는 거기에 동의했다. 자신이 상속받은 왕조가 몰락하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 이들은 7월 28일 일흔네 살 먹은 풀롱 드 두에를 붙잡았다. 농민들은 비리 성의 석빙고 안에 숨어 있던 그를 내몰았다. 그의 머리 위에는 건초 한 더미를 놓고, 목에는 엉겅퀴 목걸이를 걸고 입에는 풀을 가득 넣었다. 빵이 없으면 건초를 먹으면 된다고 그가 말하지 않았던가..  (16, 163, 208쪽)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인 《프랑스 대혁명》입니다. 막상 이 이야기책에는 ‘혁명’이나 ‘큰 혁명’에 걸맞다 싶은 모습은 거의 안 나타납니다. 《프랑스 대혁명》에 나오는 ‘프랑스 대혁명’에 나오는 모습은 하나같이 죽음과 죽임입니다. 슬프게 죽는 사람들 모습과 괴롭게 죽이는 사람들 모습이 나옵니다. 힘있는 이는 힘없는 이를 죽입니다. 힘있는 이한테 짓밟혀 죽기만 하던 이들이 창과 칼을 들고 일어서면서 그동안 저희를 괴롭힌 힘있는 이를 사로잡아 죽입니다.


  죽음과 죽음이 되풀이됩니다. 죽임은 죽임을 낳습니다. 아름다운 삶이나 즐거운 삶을 노래하는 혁명이나 큰 혁명은 안 보입니다. 힘있는 이들이 겉발림으로 내세우는 ‘혁명’이 있고, 힘없는 이들이 창과 칼을 들고 일어선 ‘앙갚음’이 있습니다.


  백성들이 죽어야 혁명이 일어날까요. 애꿎게 죽은 백성들이 똘똘 뭉쳐서 권력자를 끌어내려 죽이면 혁명이 이루어질까요.


  이제 1961년 5월 16일 일을 가리켜 ‘혁명’이라 일컫는 사람은 거의 없지만, 절대권력 누리려 하던 이들은 아주 오랫동안 1961년 5월 16일 일을 가리켜 ‘군사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지난날 독재를 새로운 독재로 바꾸었을 뿐이지만, 독재자는 스스로 ‘독재’라는 이름을 안 씁니다. ‘혁명’이라는 이름을 썼어요.


  그러고 보면, 오늘날 절대권력 누리는 이들은 ‘독재’나 ‘불평등’이나 ‘반민주’로 나아가면서 막상 겉으로는 ‘민주’라는 이름을 내겁니다. 조금도 ‘민주’스럽지 않은 권력자들이 스스로 민주라는 이름을 써요.


  ‘교육’이라는 이름도, ‘문화’라는 이름도, ‘경제’라는 이름도, 저마다 허울로는 퍽 곱상하게 붙이지만, 제대로 교육을 하거나 문화를 하거나 경제를 한다고는 느끼기 어렵습니다. 교육이 아니라 입시지옥이기 일쑤이고, 문화가 아니라 자본주의이기 마련이며, 경제가 아니라 독점재벌이곤 합니다.


.. 사람들은 굶주려 죽어 가고, 세금으로 가난한 사람들을 수탈하며 고혈을 짜내고 있었으나, 귀족들과 사제들은 손댈 수 없는 존재들 같았다. 그들은 더더욱 돈벌이에 혈안이 되어 자신들을 위한 세금을 올리고, 심지어 모든 것을 독차지하려고 할 만큼 탐욕스러웠다. 기마 사냥을 하면서 여문 이삭들을 뭉개 놓으면서도, 농부들에게 밀렵 혐의를 씌워 그들을 법정으로, 때때로는 심지어 사형대에까지 끌고 갔다 … 마리 앙투아네트 ‘진영’이 있었다. 이들 진영은 왕궁 지출의 여하한 감축도 거부했다. 그들이 보기에 왕가는 특권층을 존중할 수밖에 없었다. 왕가 자체가 특권층의 표현이기 때문이었다 ..  (28, 38쪽)


  권력을 손에 쥐려 하는 이들은 이녁 밥과 옷과 집을 스스로 짓지 않습니다. 권력과 가까이하려는 이들도 이녁 손과 몸과 발을 움직여 삶을 지으려 하지 않습니다. 한국 사회에서 권력자는 스스로 땅을 일구지 않고, 스스로 바느질을 하지 않으며, 스스로 밥을 짓지 않아요. 텃밭을 일구는 대통령이 있던가요. 텃밭을 돌보는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있는가요. 모두들 책상맡에서 서류를 만지작거립니다. 저마다 권력자 앞에서 계획을 세우고 행정을 꾸린다고 합니다.


  정치나 문화나 교육이나 경제나 무엇무엇 하는 이들 가운데, 또 과학이나 철학이나 문학이나 무엇무엇 하는 이들 가운데, 이녁 보금자리에서 아이들 돌보거나 가르치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집 바깥에서 정치를 하거나 문화를 하거나 과학을 하거나 철학을 하느라 바빠, 아이들 돌보는 몫은 ‘집식구’한테 도맡기거나 보육시설에 맡깁니다. 저마다 스스로 ‘전문가’ 되어 정치 전문가나 경제 전문가나 언론 전문가 되지만, 정작 집에서 아이들한테 삶을 물려주거나 보여주거나 가르치는 일이 없습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교육 전문가’ 손에서 자랍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교육 전문가’들이 몰아넣는 ‘입시지옥’에서 시달립니다. 오늘날 아이들은 집짓기나 밥짓기나 옷짓기를 배우지 않아요. 오늘날 아이들은 사랑이나 꿈이나 삶을 배우지 않아요. 오늘날 아이들은 오직 대학입시와 전문지식만 달달 외워요.


  가만히 보면, 지난날 아이들도 이와 비슷해요. 시골에서 태어나 시골사람으로 살던 아이들이 아닌, 권력자 집안에서 태어나 다시금 권력자로 크는 아이들은 어버이한테서 사랑이나 꿈이나 삶을 물려받지 않아요. ‘새끼 권력자’가 되는 훈련을 받습니다.


.. 기아와 추위가 1783년부터 1785년까지 겨울 동안에 온 나라를 괴롭혔다. 소작료가 올랐다. 실질 통화 가치가 하락했기 때문이었다. 빵값은 비쌌다. 집 없는 빈민들은 파리의 거리에 큰 불을 피웠고 그 곁에 모여서 서로에게 몸을 붙였다. 배고픔으로 인한 폭동이 여기저시거 터져 나왔다 … “반란이야.” 루이 16세가 둔탁한 목소리로 우물우물 말했다. “아닙니다, 전하. 혁명입니다.” … 죽이는 것만으로 만족하지 않았기에, 능욕하고, 약탈했다. 누가 감히 손이 피로 붉게 물든 무장한 남자들에게 맞서겠는가? 살인자들은 시계와 목걸이, 보석을 내놓을 것을 요구했다. 빨리 해야 했다. 그러지 않으면 귀고리가 달린 귓바퀴를 잡아 뜯었다 ..  (98, 190, 417쪽)


  프랑스 임금이나 조선 임금은 왜 스스로 ‘임금 자리’를 떠나지 못했을까요. 왜 이들은 권력다툼에 끝까지 사로잡혀 죽음길로 내달려야 했을까요. 어버이가 애써 권력을 물려주려 한다 하더라도 사랑과 꿈과 삶이 아닌 만큼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조용한 시골숲으로 깃들어 아름답게 살아갈 길을 찾을 수 있었을 텐데요. 씨앗을 심고 풀과 나무를 돌보며 하늘과 땅과 바람을 아끼는 길을 누릴 수 있었을 텐데요.


  이 나라 조선 임금들 가운데 숲바람 마시면서 들노래 부른 이는 한 사람이라도 있었을까요. 프랑스 임금들 가운데 손수 밀씨 심고 손수 밀포기 베며 손수 밀알 훑어서 손수 반죽을 하고는 손수 빵을 굽는 즐거움 누린 이는 한 사람이라도 있었을까요.


  궁궐을 짓고 군대를 두니 전쟁이 태어납니다. 궁궐을 안 짓고 군대를 안 두면 평화가 이어집니다. 궁궐을 짓고 군대를 두니 밥·옷·집 짓는 사랑과 꿈과 삶하고 멀어집니다. 궁궐도 군대도 모르는 채 흙을 만지고 햇살과 바람과 냇물을 누리면 언제나 밥·옷·집 가장 싱그럽게 일구면서 사랑이랑 꿈이랑 삶을 빛내는 길을 걸어갑니다.


  중국 옛말에 내 몸부터 바르게 다스리고 집안을 알뜰히 돌볼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나라를 슬기롭게 다스리며 평화를 부른다고 했어요. 대통령이 되거나 국회의원이 되거나 임금님이 되거나 황제가 되어야 올바른 정치를 펼치지 않아요. 모든 정치권력은 없애면 돼요. 신동엽 시인이 스칸디나비아 대통령을 노래하며 쓴 싯말에 나오는 대목처럼, ‘막걸리병 짐받이에 꽂고 자전거를 타는 사람’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에 올바른 정치가 이루어져요.


  대통령도 흙을 만져야지요. 임금님과 황제도 갓난쟁이 똥기저귀를 갈고 손빨래를 해야지요. 시장도 군수도 아이들 도시락을 싸야지요. 교사도 교수도 교과서나 교재는 집어치우고 아이들을 무릎에 앉히고 그림책을 읽어 주어야지요.


.. 하루가 저물 즈음, 신선한 산들바람을 느끼기 위해 루이가 창문에 다가가면, 절규하는 욕들이 솟구쳐 올랐다. ‘바보’, ‘돼지’, ‘배신자’, ‘비겁자’. 사람들은 루이의 피를 뽑겠다고, 그를 잘게 자르겠다고, 그의 심장을 뜯어 먹겠다고 위협했다 … 루이는 언젠가 백성이 자기를 죽이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 왕을 재판하는 것, 그에게 형을 언도하는 것, 그를 처형하는 것은 또한 왕이 그 현현이자 상징인 힘 있는 자들에 대해 공화국이 무자비하다는 것을 인민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편리한 방법이었다. 왕을 죽인다면, 어떤 부농이, 어떤 주식 투기업자가, 어떤 징세 청부인이, 어떤 의원과 장관이 처벌로부터 안전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은 어떻게 빈곤과 싸워야 할지는 몰랐다. 그러나 왕을 재판하고 효수할 줄은 알았다 ..  (300, 360, 484쪽)


  총과 칼을 든 자리에 혁명은 없습니다. 낫과 쟁기를 든 자리에 혁명이 있습니다. 바보스러운 권력자 머리를 열 백 천 만 베어서 숨통 끊는대서 혁명을 이루지 않습니다. 씨앗을 심고 풀과 나무를 사랑할 때에 혁명을 이룹니다.


  군대를 늘릴 적에는 전쟁만 찾아오듯, 땅을 아끼고 사랑할 때에 평화가 찾아옵니다. 정치 행정과 경제 정책 이래저래 꾀한대서 나라살림 북돋우지 못해요. 컴퓨터에서 손을 떼어 텃밭에 한 발 디디면 나라살림 북돋웁니다.


  철학을 하지 말아요. 멧새 노래를 읽어요. 과학을 하지 말아요. 냇물 노래를 들어요. 문학을 하지 말아요. 풀벌레 이야기를 들어요. 교육을 하지 말아요. 아이들과 손을 잡고 들길을 걸어요. 정치나 경제를 할 까닭이 없어요. 하늘을 올려다보고 흙땅을 두 다리로 디디면서 바람을 마셔요. 혁명도 큰 혁명도 아닌 삶을 느끼고 사랑을 헤아리며 꿈을 돌아볼 수 있기를 빌어요. 4346.7.22.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삶을 밝히는 책, 인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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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의 고양이
데이비드 미치 지음, 추미란 옮김 / 샨티 / 201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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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60

 


길고양이를 내 몸처럼
― 달라이 라마의 고양이
 데이비드 미치 글,추미란 옮김
 샨티 펴냄,2013.6.7./15000원

 


  아이들을 내 몸처럼 여기면 아이를 살가이 마주합니다. 누군가를 내 몸처럼 아낀다면 따스한 눈길과 손길을 보냅니다. 꽃 한 송이를 내 몸과 같다 느끼면 가만히 쓰다듬으면서 예뻐 하지요.

  사랑스레 바라보면서 사랑이 피어납니다. 짓궂게 바라보면 거친 말이 튀어나옵니다. 사랑스레 마주하면서 사랑을 속삭입니다. 짓궂게 마주하면 슬픈 모습이 잇닿습니다.


.. “교수님도 아시다시피 이 길고양이와 교수님은 아주 중요한 공통점이 하나 있지요.” “그런가요?” 교수는 냉랭하게 대답했다. “교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교수님의 목숨이겠죠?” 달라이 라마가 이어 말했다. “이 고양이한테도 그렇죠.” … “이 세상에서 우리 밖의 모든 것을 통제할 수는 없지만 마음을 통제하는 일은 배울 수 있으니까요.” ..  (16, 176쪽)


  온누리 어느 곳에서나 사랑이 숨쉴 수 있습니다. 사람들 마음속에 사랑이 숨쉰다면, 온누리 어느 곳에서나 고운 사랑이 넘실거립니다. 지구별 골골샅샅 미움과 다툼이 판칠 수 있습니다. 내 마음속에 미움과 다툼이 스멀스멀 기어든다면, 지구별 골골샅샅 괴로운 미움과 고달픈 다툼이 자꾸자꾸 불거집니다.


  온누리 어느 곳에서나 꿈이 피어날 수 있습니다. 사람들 가슴속에 꿈씨 하나 깃들어 푸른 빛으로 환하게 자란다면, 어디에서나 꿈이 피어나요. 지구별 골골샅샅 눈물과 생채기로 얼룩질 수 있습니다. 내 가슴속에 착한 빛 아닌 얄궂은 빛이나 어두운 빛 스미면, 나와 이웃 모두 눈물과 생채기로 힘겨운 나날 보냅니다.


  저마다 품는 마음에 따라 저마다 삶이 다릅니다. 남들 때문에 달라지는 삶은 없습니다. 언제나 나 때문에 달라지는 삶입니다. 내가 내게 있는 힘을 보태어 함께 애썼기에 뜻을 이루고, 내가 내게 있는 힘을 안 보탰기에 뜻을 이루지 못합니다. 내가 아름다운 길 걸었기에 아름다운 이야기 온누리에 드리웁니다. 내가 아름다운 길 안 걷는데 온누리에 아름다운 이야기 드리우지 못해요.


  내 입에서 흘러나오는 사랑스러운 말이 온누리를 따사로이 보듬습니다. 내 눈에서 퍼지는 사랑스러운 빛이 온누리를 밝게 비춥니다. 내 손으로 흘리는 촉촉한 땀이 온누리를 기름지게 일굽니다. 내 몸에서 자라는 씩씩한 씨앗 한 톨이 온누리를 푸르게 물들입니다.


.. “불교의 목적은 사람들을 개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커다란 행복을 느끼게 하는 도구들을 제공하는 것입니다.” … 언덕 위쪽의 스님들이 세상에서 가장 소박한 음식을 그렇게 행복하게 먹을 수 있다면, 카페 프랭크에서 그처럼 맛있는 요리를 먹는 손님들은 등골이 오싹해지고 손발이 오그라들고 온몸에 털이 곤두서는 황홀경에 빠져야 하는 것 아닐까 … “무엇보다도” 달라이 라마는 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아이를 너희가 제일 좋아하는 라마처럼 모셔야 한다.” “하지만 저희가 제일 좋아하는 라마는 성하님입니다!” 어린 쪽인 사시가 손을 가슴에 모으며 성급하게 외쳤다. “그렇다면” 달라이 라마는 웃으며 말했다. “나를 모시듯 이 아이를 모셔야 한다.” ..  (52, 67, 191쪽)


  들꽃을 바라봅니다. 들풀을 바라봅니다. 들에서 피니 들꽃이요, 들에서 자라니 들풀입니다. 이들과 함께 들에서 살아가면 들벌레·들나무·들새·들고양이·들짐승·들사람이라 할 테지요.

  그런데, 온누리 모든 꽃과 풀과 벌레와 나무와 새와 고양이와 짐승은 모두 들에서 살았어요. 들 아닌 데에서 안 살았습니다. 사람도 이와 같아요. 사람도 들에서 살던 사람입니다. 들 아닌 도시에서 살던 사람이 아니에요.


  사람들이 손으로 전쟁무기를 만들면서 권력이 생깁니다. 권력이 생기며 들을 밀어 도시를 세웁니다. 도시를 세우면서 종교를 따로 만듭니다. 종교를 따로 만들면서 학교를 짓습니다. 학교를 따로 지으면서 아이들을 길들입니다. 아이들을 길들이면서 새로운 말·꿈·사랑·이야기가 피어나지 않습니다.


  전쟁무기가 지키는 권력으로 지은 도시에서 종교를 누리면서 학교에서 지식을 길들이니 과학이 태어나고 문명이 자라며 기계가 샘솟습니다. 그리고, 공해와 매연과 부정과 부패가 찾아듭니다. 사람들은 전쟁무기를 만들면서 땅을 어지럽힙니다. 사람들은 도시를 지으면서 바람을 더럽힙니다. 사람들은 종교와 학교를 세우면서 물을 망가뜨리고 숲을 깎아냅니다.


  전쟁무기에서 비롯한 권력과 도시와 종교와 학교는 맨 마지막으로는 ‘들에서 곡식이나 열매를 거두지 않고도 영양성분 채우는 밥’을 만들려 하겠지요. 해와 바람과 비와 흙과 풀이 없어도 화학조합으로 영양성분 만들어 사람들이 ‘안 굶주리’도록 과학문명 사회 세우려 하겠지요.


  생각해 볼 노릇입니다. 해를 안 보고 자란 능금이나 배는, 해를 보고 자란 능금이나 배와 같은 맛을 내면서 즐거움을 베풀까요. 맑은 바람 아닌 인공시설에서 자란 시금치와 상추와 배추와 무는 비바람 맞으며 자란 시금치와 상추와 배추와 무와 같은 냄새를 내면서 기쁨을 나누어 줄까요.


.. “제가 알고 있는 정말로 행복한 사람들은 돈이 거의 없습니다.” … 질투와 분개는 아주 힘든 감정이라 마음의 평화가 깨진다. 나를 위해서라도 불행하고 불합리한 감정에 소모될 이유는 없다 … “생명을 가진 존재의 살을 먹는 걸 자비심을 가지고 완전히 끊을 수만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일은 없단다. 그럴 수 있는 사람들은 꼭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문제지.” ..  (87, 95, 195쪽)


  오늘날 도시사람은 흙땅에서 벌레와 지렁이 쪼아먹으면서 숲바람 마시는 닭을 잡은 고기를 먹지 않습니다. 오늘날 도시사람은 누구나 0.1평조차 안 되고 스물네 시간 형광등 불빛 밝히는 좁디좁은 쇠그물감옥에서 항생제로 만든 사료만 먹고 한 달조차 안 되는 사이에 살집만 디룩디룩 불린 ‘생체실험기구’와 같은 닭을 공장에서 기계로 뭇칼질한 고기를 먹습니다. 돼지도 소도 이와 같습니다. 사람이 먹는 모든 밥은 목숨이지만, 목숨을 목숨답게 섬기거나 다루거나 모시거나 여기지 않으면서 끼니 채우는 톱니바퀴처럼 몸속에 집어넣을 뿐입니다.


  쌀 한 톨이 우주인 까닭은, 쌀 한 톨에 우주가 깃들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하느님인 까닭은, 모든 사람 가슴에 하느님이 깃들기 때문입니다. 풀 한 포기도 우주이며, 물 한 방울도 우주입니다. 길고양이 한 마리도 하느님이고, 들강아지 한 마리도 하느님입니다. 길고양이 한 마리를 내 몸과 같이 여겨 섬긴다면, 나는 내 몸을 그야말로 하느님이라고 여기며 섬기는 셈입니다. 들강아지 또는 조그마한 땅강아지 한 마리를 하느님으로 모시며 아낀다면, 나는 내 동무와 이웃 모두를 하느님으로 모시며 아끼는 셈입니다.


  언제나 비손하는 마음이에요. 길을 걸을 적에는 내가 밟는 땅에서 작은 벌레 다치거나 죽지 않기를 비손하지요. 뜻하지 않게 어떤 목숨을 다치게 했으면 고개를 숙이면서 부디 좋은 삶 이어지기를 바랍니다.


  종교 때문에 비손을 하지 않아요. 삶이 반갑고 즐거우니 비손을 해요. 아름다운 하늘빛 바라보며 ‘아름답네’ 하는 말이 터져나오는 까닭은, 하늘빛을 예술이나 문화로 바라보기 때문이 아니에요. 그저 마음속에서 아름다운 빛이 샘솟기에 이런 말이 터져나와요.


.. “여기 딱 이 길밖에 없으니 모든 사람이 그 방식을 따라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지. 그 방식이란 그저 어쩌다 그들이 생각하게 된 방식인데 말이야. 진실로 모든 것이 개인적인 선택이란다. 중요한 것은 반드시 자비심을 갖고 지혜롭게 선택하고 결정해야 한다는 점이지.” … “다르마에 죄책감은 필요없단다. 죄책감은 쓸모가 없어. 이제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일에 대해 마음 아파할 필요는 없어.” ..  (197, 202쪽)


  데이비드 미치 님이 쓴 이야기책 《달라이 라마의 고양이》(샨티,2013)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데이비드 미치 님은 ‘달라이 라마와 살아가는 고양이’ 마음이 되어 이야기를 펼칩니다. 데이비드 미치 님은 이 책에서 ‘고양이와 한마음’이 되었구나 싶은데, 더 깊이 살피면, 길고양이 한 마리하고 한마음이 될 수 있을 뿐 아니라, ‘달라이 라마 님하고 한마음이 될’ 수 있습니다.


  누구나 할 수 있어요. 누구나 달라이 라마 님뿐 아니라 부처님과 예수님하고 한마음 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흔히 전쟁미치광이라 일컫는 미국 아무개 대통령하고도 한마음 될 수 있어요.


  이 나라 조그마한 숲과 멧골과 냇물을 사랑스레 돌보고 싶은 지율 스님하고 한마음 될 수 있어요. 돈에 눈이 먼 사람들한테 사로잡혀 애꿎은 재롱놀이 부려야 하는 돌고래와 한마음 될 수 있어요. 나뭇가지 모두 잘린 채 나무젓가락처럼 덩그러니 서야 하는 소나무와 한마음 될 수 있어요. 죽음을 앞둔 돼지와 한마음 될 수 있고, 술 마시고 자가용 몰아 사람을 다치게 하는 이들과 한마음 될 수 있어요.


.. 참 흥미롭다. 일단 다른 방식으로 해 보기로 결심을 하고 나면 종종 세상이 그런 나를 돕기 시작한다 … 라마가 말했듯이 그렇게 늘 약한 마음만 먹으면 어떻게 되겠는가? 더 나약해지는 것 외에 무슨 대단한 결과가 나오겠는가 … 달라이 라마는 주저하지 않았다. “의심할 여지 없이 가장 중요한 수행은 보리심(bodhichitt) 수행입니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를 똑같이 깨달음의 상태로 이끌기 위해 깨닫겠다고 바라는 마음이죠?” 왕비가 확인해 주었다 ..  (220, 246, 260쪽)


  나는 어떤 목숨과 한마음 되고 싶을까요. 나는 어떤 숨결과 한마음 되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싶을까요. 나는 언제 어느 곳에서 어떤 이웃하고 한마음 되어 온누리를 어떤 손길로 보듬는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을까요.


  내 생각에 따라 내 삶이 달라집니다. 내가 생각할 때에 내 삶이 달라집니다. 내가 생각하지 않는다면 내 삶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내가 기쁘게 생각해야 삶이 기뻐요. 내가 아름답게 생각해야 삶이 아름답지요.


  반가운 사람을 사랑하고 싶으면, 어느 때에 반가운 사람이 나한테 찾아들어 사랑을 속삭일 수 있는지 생각하면서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넉넉한 삶을 호젓하게 누리고 싶으면, 어느 때에 넉넉한 삶을 일구며 호젓한 하루 지을 수 있는지 생각하면서 삶을 바꾸어야 합니다.


  마음이 움직일 때에 몸이 움직여요. 몸이 움직이면서 마을이 움직여요. 마을이 움직이면서 지구별이 움직이고, 지구별이 움직이면서 우주가 움직이지요. 맨 먼저 내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데, 마을도 지구별도 우주도 움직일 수 없어요. 내 몸 또한 작디작은 세포들 모두 한마음 되어 움직여야 비로소 내 몸이 움직인다고 할 수 있어요. 실핏줄 하나 끊어져도 내 몸이 무너지고, 발톱 한쪽이 끊어져도 걷지 못해요. 작은 것이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은 작은 것입니다. 작은 사랑이 큰 사랑이고, 큰 사랑이 작은 사랑이에요.


.. 히말라야 산맥 뒤에 위치한 고립된 외지라서 외부의 침공이 거의 없었던 부탄 왕국은 1960년대까지 화폐도 전화도 없었다. 텔레비전도 1999년에 처음 등장했다고 한다. 부탄 사람들은 전통적으로 물질적인 편안함보다 내면의 풍성함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왔다 ..  (253쪽)


  1999년에 텔레비전을 처음 들였다고 하는 부탄이라고 하는 나라는, 텔레비전을 들였다 하더라도 아름다운 삶터를 망가뜨리지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이와 달리 한국은 어떠한가요. 텔레비전 집집마다 있는 한국은 어떠한가요. 무척 어린 아이들까지도 손전화 쥐고 돌아다니는 한국은 어떤 삶터인가요.


  데이비드 미치 님은 달라이 라마 님 마음이 되면서, 또 길고양이와 한마음 되어 책 하나 써내요. 우리 곁에 있는 이웃들은, 아니 이웃들에 앞서 바로 우리들은 저마다 어떤 마음이 되어 살아가는가요. 우리들은 이웃 마음을 제대로 읽을까요. 아니, 우리들은 이웃 마음에 앞서 내 마음부터 제대로 읽는 삶일까요. 4346.6.24.달.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삶을 밝히는 책읽기, 인문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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