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 시장 상품 인간을 거부하고 쓸모 있는 실업을 할 권리
이반 일리치 지음, 허택 옮김 / 느린걸음 / 201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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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98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이반 일리치

 허택 옮김

 느린걸음

 2014.9.5.



극좌 선동가도 극우 경제학자도 일자리를 늘리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더 필요하다고 대중을 선동한다. 교육자는 법과 질서를 확립하고 생산성을 높이려면 지식을 더 습득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산부인과 의사는 건강한 아이를 낳고 싶으면 자신들이 더 개입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39쪽)


평등한 교육을 약속하는 학교는 불평등한 능력주의 사회를 만들고, 평생 교사에게 의존하며 살게 한다 … 이 시대는 학교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인생의 3분의 1은 무엇을 처방받아야 할지 배우고, 나머지 3분의 2는 자신의 습관을 관리하는 저명한 전문가의 고객으로 살았던 시대로 기억될 것이다. (54, 55쪽)


전문가의 자기 규제는 오로지 무능한 전문가를 보호하고 대중이 서비스에 더 의존하도록 만든다. 이 ‘비판적 의사’, ‘급진적 변호사’, ‘공공 건축가’들은 자신들보다 변화에 둔감한 동료들로부터 고객을 가로채는 것이다. (107쪽)


1965년 이후 미국에서만 환자 스스로 병을 고치는 방법에 관한 책이 2700여 종이나 쏟아졌다. 그런 책을 읽으면 의사는 정말로 필요할 때만 만나면 된다. (111쪽)


그렇게 자유가 공정하게 분배되어도 천연자원과 도구, 공공시설에 대한 권리가 공평하게 분배되지 않으면 아무 의미가 없을 것이다. 식량과 연료, 신선한 공기, 삶의 공간은 전문가가 만드는 필요와 상관없이 분배되지 않으면 망치나 일자리보다도 공정하게 분배될 수 없다. (115쪽)



  어느 날 문득 알았습니다. 도시에서 살며 회사를 다니는 사람은 나라에서 여러모로 펴는 복지를 고루 받을 수 있지만, 시골에서 살며 회사를 안 다니는 사람은 그 어느 복지에도 닿지 않는 줄. 도시에서 아파트를 빌려서 사는 사람은 나라에서 펴는 갖은 복지를 두루 받을 수 있지만, 시골에서 시골집을 장만해서 사는 사람은 그 어느 복지에도 안 닿는 줄.


  이런 얼거리를 알거나 느끼려면 시골에서 회사에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 일거리를 찾아서 살되, 전원주택 아닌 오랜 시골집, 뼈대가 흙하고 나무요 ‘한 평에 10만 원이 못 되는’ 시골집, 마당까지 해서 100평쯤 되어도 1000만 원 값을 하지 않는 시골집을 장만해서 손질하여 지내는 살림이어야겠지요. 아마 한국에서 이처럼 살림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겠지요.


  이제 이 땅에 없고 책이 남은 이반 일리치 님이 남긴 글을 엮은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이반 일리치/허택 옮김, 느린걸음, 2014)를 읽어도 알 수 있습니다만, 사회에서 시키는 대로 한다면 복지나 문화나 교육으로 이바지를 많이 받습니다. 이와 달리 사회에서 시키는 대로 안 한다면 그 어느 이바지하고도 멀리 떨어집니다. 아이를 어린이집에 안 넣고 집에서 돌보면 열 몇 해 앞서나 요즈음이나 다달이 10만 원을 받지만(8살까지), 어린이집에 넣으면 얼추 50만 원을 어린이집에 주는 나라 얼개입니다. 아이가 초·중·고등학교를 다니면 교육·문화비를 꽤 이바지하지만, 아이가 집에 머물며 스스로 배우는 길을 갈 적에는 0원을 이바지합니다.


  이는 돈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이가 어린이집이나 학교에 다니든 집에서 스스로 배우든, 이 아이하고 어버이는 똑같이 세금을 냅니다. 똑같이 세금을 내되, 나라에서 펴는 복지나 문화나 교육 이바지에서 따돌림을 받지요. 나라는 누구한테서나 세금을 고스란히 가져가지만, 이 세금이 누구한테나 고루 복지나 교육이나 문화로 돌아가는 길에는 마음을 안 쓰는 얼거리인 지 무척 오래되었습니다.


  이반 일리치 님이 남긴 글을 묶은 책에 《누가 나를 쓸모없게 만드는가》 같은 이름을 붙일 만합니다. 이처럼 여러 행정에서 따돌림을 받는 자리에 있는 이웃들은 스스로 ‘쓸모없는 사람인가?’ 하고 생각하기 쉽고, 이러다가 스스로 목숨을 끊은 분이 꽤 많은데, 아직 나라 얼개는 바뀔 낌새가 잘 안 보입니다.


  ‘준법·적법’이라는 말이 함부로 쓰이는 오늘날입니다. ‘법을 지키는·법에 알맞은’인 뜻일 텐데, ‘법에 어긋나지 않도록 뒷일이나 뒷돈이 오가는 흐름’이 꽤 불거지지만, ‘법에 어긋나지 않은 터’라 말썽이 되지 않습니다. 법그물을 살살 빠져나가면서 사회를 주무르거나 흔든다고 할까요.


  지역자치라고 하지만, 이 ‘지역자치’란 이름 때문에 오히려 ‘시골 공무원’이 너무 많이 늘어났습니다. 이를테면, 인구가 2만쯤인 시골 지자체조차 공무원이 1000에 가까운 숫자요, 인구가 4∼5만쯤인 시골 지자체는 공무원이 1000을 웃도는 숫자입니다. 시골 지자체는 인건비로 너무 많이 돈을 쓰는데, 이 공무원 숫자는 거꾸로 더 늘고, 시골 지자체 인구는 빠르게 줄어듭니다. 참다운 자치라면 공무원 숫자를 줄이면서 마을마다 집집마다 스스로 참되고 바르며 곱게 살아가는 길이리라 봅니다. 국회의원도 줄이고, 판·검사도 줄이고, 공무원도 줄이는, 공단 일꾼이며 군인이며 관리자란 자리를 줄이고 줄여, 스스로 삶이며 땅을 가꾸는 길로 가도록 해야지 싶습니다.


  늦가을 햇볕에 귤이며 유자가 무럭무럭 익습니다. 귤나무나 유자나무뿐 아니라 모든 나무는 해하고 비하고 바람하고 이슬을 머금으면서 매우 놀랍도록 달콤한 열매를 베풉니다. 사람이 거름을 주지 않을 적에 외려 더 달콤하며 알찬 열매를 오래오래 맺습니다. 가지를 휘어서 쇠그물에 붙들어맨 채 거름이며 비료를 듬뿍 먹이는 과일나무는 열 몇 해쯤 열매를 맺으면 힘이 다하여 뽑아내고 새로 심는다지요.


  어쩌면 오늘날 문명사회는 ‘가지를 휘어서 쇠그물에 붙들어맨 체 거름하고 비료하고 농약을 먹여 겉보기로 굵어 보이는 열매를 맺는 나무’와 닮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이 흐름을 멈추고, 저마다 아름드리로 자라는 나무가 되도록, “사회에서 쓸모있고 쓸모없고란 틀”이 아니라 “다 다르게 어우러지는 숲”으로 나아가야지 싶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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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수 스님의 코끼리 - 본래 나로 사는 지혜 용수 스님 시리즈
용수 지음 / 스토리닷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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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96


《용수 스님의 코끼리》

 용수

 스토리닷

 2019.9.28.



마음이 천당과 지옥을 만듭니다. 행복과 불행은 마음에 달려 있습니다. (15쪽)


우리가 이미 완벽하고 신성한 존재라는 것을 모르기 때문에 좋은 것을 갈망하고 안 좋은 것을 거부하고 두려워합니다. (31쪽)


‘앞으로 더 열심히 하라’보다는 ‘지금까지 참 잘했네’ 충분히 인정하고 칭찬해 주세요. (43쪽)


자녀들에게 알려주세요. 있는 그대로 괜찮다고, 있는 그대로 좋아한다고요. 바꾸려고 하지 마세요. 바꾸려고 하면 아이는 스스로 가치가 없다고 느낍니다. (86쪽)


남의 마음보다 자신의 마음이 제일 중요합니다. 다른 사람이 우리를 좋아하든 말든 우리 일이 아닙니다. 칭찬하든 비난하든 이미 죽은 사람을 말하듯이 신경 쓰지 마세요. (157쪽)


흙탕물을 가만히 두면 저절로 고요해지고 맑아집니다. (213쪽)



  아무리 흙이 많이 섞였구나 싶은 물이라 해도 가만히 지켜보면 어느새 찬찬히 가라앉습니다. 고요한 물이 되면 흙물 아닌 맑은 물로 바뀝니다. 마음이 어수선하다면 이 어수선한 가닥을 한 올씩 느끼면서 풀어내면 되어요. 서두른다면, 더 바빠게 몰아친다면 어수선한 마음은 자꾸 엉키기만 합니다. 가득 쌓인 빨래나 설거지도 하나씩 하노라면 어느새 끝납니다. 섣불리 “이 많은 걸?” 하고 여기면 제풀에 지치거나 짜증이 일지만 “천천히 하나씩 해야지” 하는 마음이면 사뭇 달라요.


  사전이라고 하는 책을 짓다 보면 처음에는 언제 저 고개를 넘느냐 하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한 해도 걸리고 세 해도 걸리고 열 해도 걸릴 테지 하고 여기면, 스무 해나 서른 해쯤 걸릴 수 있겠지 하고 여기면, 이 고개가 그리 가파르지 않습니다. 그냥 하는 말은 아닙니다. 저 스스로 서른 해쯤 이 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고개를 꽤 올랐네’ 싶어 곧잘 놀라요.


  이런 마음으로 《용수 스님의 코끼리》(용수, 스토리닷, 2019)를 손에 쥐었습니다. 스님 한 분은 《용수 스님의 곰》이란 책을 여미어 내기도 했어요. 이제 곰에 이어 코끼리를 곁에 두면서 마음읽기를 들려주려 합니다. 숲에서 그 어느 짐승보다 날렵할 뿐 아니라, 숲살이를 모두 꿰뚫는 곰이라고 해요. 더구나 곰은 풀열매를 아주 좋아하고 꿀도 매우 반겨요. 우리는 곰한테서 숲길을 배울 만하지 싶습니다. 덩치가 커서 무서워할 곰이 아니라, 숲에서 슬기롭게 살아가는 길을 배울 수 있달까요.


  코끼리한테서도 이와 같겠지요. 코끼리도 그저 덩치만 큰 짐승이 아니에요. 어른 코끼리는 어린 코끼리를 온몸으로 아끼고 돌보면서 사랑으로 가르친다지요. 그 커다란 덩치를 뽐내는 일이 없이 언제나 넉넉하면서 푸근하게 들판을 아낄 줄 아는 코끼리요, 들살이를 바로 코끼리한테서 배울 만하구나 싶습니다.


  가만히 보면 사람 곁에는 사람을 일깨우거나 타이르는 숨결이 가득합니다. 개미 한 마리도 사람을 일깨울 수 있어요. 파리나 모기도 사람을 깨우칠 수 있습니다. 나비랑 벌 한 마리도 사람을 가르칠 만하고, 작은 애벌레하고 풀벌레도 사람이 배울 만한 대목이 가득해요.


  들풀이 길잡이가 될 만합니다. 들꽃이며 나무 한 그루가 길벗이 될 만해요. 그러니까 들풀을 보면서 ‘들풀도 사람도 똑같이 아름답고 거룩한 넋’인 줄 받아들이는 마음이 됩니다. 들꽃을 보면서 ‘들꽃도 사람도 나란히 어깨동무하는 사랑스러운 숨결’인 줄 받아들이는 마음이 되어요.


  스님 한 분은 《용수 스님의 코끼리》라는 책으로 조곤조곤 속삭입니다. 어려운 경전이나 지식을 머리에 담으려 하지 말라고,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사랑하면 넉넉할 뿐이라고, 아이들을 타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어른 스스로도 깎아내림질을 거두고 스스로 활짝 기지개를 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남말에 휘둘리지 않기를, 남말에 춤추지 않기를, 이리하여 스스로 가장 사랑스러우면서 고운 말을 입에서 터뜨리며 훨훨 날아오르듯 춤추는 하루가 되기를 바라는구나 싶어요. 아무렴, 이렇게 하면 다 될 테지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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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끼나와, 구조적 차별과 저항의 현장
아라사키 모리테루 지음, 백영서 외 옮김 / 창비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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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78


《오끼나와, 구조적 차별과 저항의 현장》

 아라사끼 모리떼루

 백영서·이한결 옮김

 창비

 2013.5.31.



애초에 미국이 군사기지에 관한 이러한 제한조건들을 인정할 리도 없었다. (일본정부는) 가장 중요한 점을 애매모호한 상태로 놔둔 채 기정사실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62쪽)


‘국가’에 있어서 ‘영토’라는 것은 그런 것으로 존재한다. 따라서 그것은 결코 그 지역에 사는, 혹은 그곳을 생활권으로 삼는 주민의 이익에 들어맞는다고는 말할 수 없다. 근대적 국제관계를 규정하는 국경이나 영토도 국가의 역학관계나 국제법 이상으로, 그곳에 사는 주민의 자기결정권 내지 인근주민의 생활권으로서 어떤 의미를 가져왔는가를 존중해서 결정해야 하는 시기에 다다른 것이 아닐까. (121∼122쪽)


동일본대지진은 안전신화를 깨부수면서 또 하나의 구조적 차별을 부각했다. 일본(국민)은 오끼나와에 주일미군기지의 압도적 다수를 떠맡기고 ‘허위의 평화’를 향수했을 뿐만 아니라, 토오호꾸 지역의 벽지에 위험한 원자력발전소를 떠맡기고 거기서 얻는 전력으로 ‘허위의 풍요로움’을 향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141∼142쪽)



  서울에 마실을 나와 볼일을 보고서 용산 기차역에 왔습니다. 제가 타려는 열차가 스르르 미끄러지고 문을 엽니다. 짐을 짊어지고 들어섭니다. 갑자기 나프탈렌을 비롯한 소독약 냄새가 훅 끼칩니다. 어지러운 나머지 자칫 쓰러질 뻔했습니다. 두리번거렸지요. 기차에 있는 뒷간 문이라도 열렸나 하고. 그러나 아닙니다. 온 기찻간이 소독약 냄새입니다. 이 냄새를 저 혼자 느끼며 어질어질한지 잘 모르겠는데, 어쩌면 사람들은 이런 소독약 냄새가 흐르기에 ‘기차를 잘 건사하는’ 줄 여기겠네 싶기도 합니다. 소독을 끔찍하게 해댄 나머지 잔벌레나 곰팡이 기운을 냄새로 지워버리는 셈이요, 게다가 사람이 쓰러질 판이지만 말예요.


  《오끼나와, 구조적 차별과 저항의 현장》(아라사끼 모리떼루/백영서·이한결 옮김, 창비, 2013)는 바로 소독약 같은 이 지구별 이야기를 다룹니다. 뜬금없이 웬 소독약 이야기인가 하고 물을 수 있을 텐데요, 소독약이 어떤 구실을 하는지 생각할 노릇입니다.


  소독약은 오롯이 화학약품입니다. 소독약으로 고약한 냄새를 지워낸다고 하지만, 엄청난 화학약품인 이 소독약을 쓰면, ‘소독약 기운’은 고스란히 땅으로 스며들고 냇물로 퍼지겠지요. 자, 소독약을 쓴 물을 그대로 마실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먹는 밥에 소독약을 치면 먹을 수 있겠습니까?


  뒷간 오줌그릇에 소독약을 쳐야 오줌내를 지운다고들 하지요. 그런데 말예요, 오줌내를 지울 만한 소독약이라면 더욱 모진 냄새가 날 뿐 아니라, 물이랑 흙을 모두 망가뜨리지 않을까요? 소독약 범범인 기찻간이란, 전쟁무기에 총칼에 탱크에 군함에 잠수함에 전투기에 핵무기가 가득한 이 지구별하고 닮은꼴은 아닐까요?


  왜 오끼나와에 모질게 차별바람이 불었을까요? 왜 오끼나와뿐 아니라 지구별 곳곳은 군사기지 때문에 시름시름 앓는 곳이 있을까요? 그 군사기지는 하나같이 ‘평화를 지킬 뜻’으로 세웠다고 하지만, 막상 군사기지가 있는 터에서 예부터 마을을 이루어 살아온 사람들은 숨이 막힙니다. 소독약범벅인 기찻간에서 숨이 막히고 어질어질하듯, 전쟁무기에 잔뜩 둘러싸인 ‘군사기지 마을이 되고 만 그 보금자리’에서 삶을 이을 사람들은 하루하루 숨이 막힐 뿐 아니라 견디기조차 벅찹니다.


  우리는 왜 군사무기로만 평화를 지키려 할까요? 군대나 군사무기가 아닌 길로 평화를 지키는 생각은 왜 안 하려고 들까요? 저쪽이 움켜쥔 군대나 군사무기를 왜 두려워하면서 우리 스스로 군대나 군사무기를 저쪽보다 더 키워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까요? 우리가 군대나 군사무기를 저쪽보다 더 키워서 움켜쥐면, 저쪽도 우리하고 똑같이 두려움을 키우면서 우리보다 더 센 군대나 군사무기를 갖추려고 악을 쓰지 않을까요?


  오끼나와가 오끼나와가 되는 길이란, 남북녘이 아름답고 사랑스레 어깨동무를 하는 길이란, 뜻밖에 매우 쉬울 수 있습니다. 두 나라뿐 아니라, 일본도 중국도 러시아도 미국도 한꺼번에 군대랑 전쟁무기를 내려놓도록 ‘두 나라 + 네 나라’ 우두머리가 ‘전쟁무기와 군대 없애기 모임’을 꾸리면 첫발을 뗄 수 있겠지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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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미스터 최 - 사노 요코가 한국의 벗에게 보낸 40년간의 편지
사노 요코.최정호 지음, 요시카와 나기 옮김 / 남해의봄날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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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94


《친애하는 미스터 최》

 사노 요코·최정호

 요시카와 나기 옮김

 남해의봄날

 2019.7.5



당신은 왜 일본에 대한 정보를 아사히신문 같은 얌전한 매체에서 얻으려고 하십니까? 그런 신문은 진실을 전혀 보도하지 않습니다. 고급 신문이 진실을 보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아실 테니 부디 그런 것만 보지 마시고 저속한 주간지나 스캔들만 쓰는 삼류 잡지를 잘 보시기 바랍니다. 영화도 예술제에 출품한 고상한 작품만 보지 마시고 무협이나 조폭 나오는 걸 보세요. (54쪽/사노 요코 1971)


여기에서 즐거운 것은 요코 씨 편지를 받는 것과 언론의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것뿐이에요. 유럽에 와도 우리나라 사람들과는 마음 놓고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99쪽/최정호 1981)


이봐요, 미스터 최, 독일에 있을 때 저는 깨달았어요. 왜 독일이 철학자를 많이 배출하는지를. 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몰라서 그 문제를 생각한 거예요. (103쪽/사노 요코 1981)


다니카와 데쓰조 선생님의 서재를 구경한 것은 저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됐습니다. 저는 그때 처음으로 한국인이니 일본인이니 하는 아집을 떠나서 위대한 석학의 생전 모습을 마음속에 그려 볼 수 있었습니다. (146쪽/최정호 1991)


진정한 국제 친선은 나라와 나라가 하는 게 아니라 개인과 개인이, 욕하면서 같이 술을 마시고 밥을 먹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한 명이 한 명을 담당하면 충분할 것 같아요. (149쪽/사노 요코 1991)



  요즘 우리는 손전화를 쥐고서 손가락으로 톡톡 누리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1초 만에라도 쪽글을 띄울 수 있습니다. 때로는 쪽글뿐 아니라 긴글을 보낼 수 있고, 온갖 그림이나 사진까지 날릴 수 있어요.


  무척 손쉽게 쪽글이며 긴글을 주고받을 수 있는 오늘날, 우리는 손전화에다가 셈틀로 얼마나 마음을 담은 이야기를 서로 띄우고 받을까요. 손쉽게 주고받을 수 있기에 더 알뜰살뜰 마음을 나눌까요, 아니면 가볍게 주고받다가 잊어버리는 글자락이 될까요.


  마흔 해라는 나날이 넘도록 바다를 사이에 두고 글월을 주고받은 두 사람이 있다고 합니다. 마흔 해를 넘는 동안 주거니 받거니 한 글월은 쉰 자락이 살짝 안 된다고 합니다만, 두 사람 사이에서 글월 하나에 담아서 나눈 마음은 매우 깊으면서 넓으리라 생각해요. 더 많이 주고받아야 더 깊거나 넓게 나누는 마음이지는 않거든요. 글월 한 자락마다 온마음을 싣고 온사랑을 실어요. 짧게 적바림한 엽서 한 자락에도 온꿈이며 온숨결을 담습니다.


  글월꾸러미 《친애하는 미스터 최》(사노 요코·최정호/요시카와 나기 옮김, 남해의봄날, 2019)는 진작에 책으로 묶으려 했답니다. 일본에 사는 사노 요코 님은 굳이 ‘허접한 내 글월 따위를 읽고 싶을 사람이 있겠느냐?’며 너털웃음이었다고 하는데, 한국에 사는 최정호 님은 ‘그대가 띄운 글월이야말로 놀라운 빛이며 숨결이 싱그럽게 춤추니, 이 글월을 나 혼자서 누릴 수 없다!’고 여겼답니다.


  그런데 이 글월꾸러미는 사노 요코 님이 눈을 감고서 한참 뒤에야, 그러니까 2010년에 사노 요코 님이 눈을 감았으니 얼추 열 해가 지나서야 비로소 책 하나로 태어납니다.


  글월자락을 천천히 읽습니다. 한 자락을 읽고서 책을 덮습니다. 며칠 뒤에 다시 한 자락을 읽고 또 책을 덮습니다. 이렇게 읽고 덮고 하노라니 한 달 두 달 지납니다. 그러나 아무리 더디 읽는다 하더라도 두 달이면 다 읽어냅니다. 두 사람 사이에서 마흔 해를 넘는 애틋한 마음이 흐르던 글월자락도 책으로 묶어 놓으니 참으로 한숨에 읽어낼 수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제 마음에 흐르는 소용돌이를 바라봅니다. 두 사람은 오직 서로를 바라보며 글월을 적었습니디만, 이 글월은 이제 두 사람 아닌 누구나 바라보는 이야기가 되고, 누구나 새삼스레 그날 그곳, 이를테면 1971년 어느 날 어느 곳이라든지, 1981년 어느 날 어느 곳을 어림하는 발판이 됩니다.


  그때 한국에서는 이렇게 마음앓이를 하는 사람이 있었고, 그무렵 일본에서는 엉터리 일본 정치에 이렇게 날선 목소리로 나무라는 사람이 있었군요. 군사독재에 입도 벙긋하지 못하던 숨은 눈물이 흐르고, 이웃나라에 군사독재가 있는 줄 생각조차 못했다는, 더구나 제국주의 강점기라고 하는 슬픈 사슬을 학교에서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고 털어놓는 그림님이 있습니다.


  모든 삶은 발자취입니다. 대통령 같은 사람들이 보낸 몇 해만 발자취이지 않습니다. 수수한 사람들이 얼키고설키면서 길어올리는 자그마한 이야기도 발자취입니다. 어쩌면 아주 수수한 사람들이 따사롭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주고받은 글월자락이야말로 길이길이 남기면서 새로운 빛을 바라보는 길동무로 삼을 만하지는 않을까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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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지음, 히스테리아 옮김 / 황금가지 / 199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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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89


《이갈리아의 딸들》

 게르드 브란튼베르그

 히스테리아 옮김

 황금가지

 1996.7.1./2016.12.1. 고침판



“자기가 되고 싶은 것이 될 수 없는 것이 더 삭막하고 짜증 나는 일이에요!” (13쪽)


페트로니우스는 불편한 신발을 벗고 둥근 바위 위로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바위는 다뜻했다. 공기보다 더 따뜻했다. 정말 사람들은 항상 맨발로 살아야 한다. 신발은 발을 너무 꽉 조이기 때문에 지나치게 꼭 맞으면 발이 까지기도 한다. (89쪽)


그들은 서로 박자를 맞춰 움직이고 있었다. 세 번째 움은 뒤에 앉아서 그의 허리를 잡고 있었다. 이 악몽이 얼마나 오래 계속될까? (94쪽)


“난 정말로 내가 무슨 가치가 있나 의심스러워져요. 난 그저 주방용 기구처럼 항상 집에 있는 거예요.” (153쪽)


그것은 맨움용 광대 복장이었고 맨움의 다른 옷처럼 우스꽝스러웠다. 어째서 물속에서조차 광대가 되어야만 하지? (160쪽)



  목소리를 내지 않으면 알 수 없기 마련입니다. 목소리가 생긴 뜻이 있지 않을까요? 사람들이 살아가는 터전마다 말소리가 다릅니다. 나라나 겨레마다 말소리가 다르기도 하지만, 같은 나라에 같은 겨레라 하더라도 고장마다 말소리가 달라요. 고장이라는 터전은 어디나 다르니 말소리도 마땅히 다를 테지요.


  다 다른 말소리란, 다 다른 삶소리란 뜻이라고 느낍니다. 다 다르게 짓거나 누리거나 가꾸는 삶에 맞추어 다 다른 말이 태어나고 흐릅니다.


  사내가 내는 목소리하고 가시내가 내는 목소리가 다릅니다. 마땅하지요. 사람이라는 목숨으로는 같으나, 결이 달라요. 그런데 결만 다르다면 소릿결만 다를 텐데, 숨결뿐 아니라 삶결이 다르지요. 사내랑 가시내 사이에서는 억누르거나 억눌리는 삶결이 엇갈렸습니다.


  《이갈리아의 딸들》(게르드 브란튼베르그/히스테리아 옮김, 황금가지, 2016)은 두 사람, 바로 가시내랑 사내 사이에 엇갈린 삶결을 확 뒤집는 얼개로 이야기를 폅니다. 곰곰이 보자면 이 문학책은 두 가지를 드러내려고 했지 싶어요. 첫째, 이 책을 읽는 이들이여, 거북하게 느껴라! 왜냐하면, 이 줄거리가 안 거북하다면, 오늘날 이 삶터도 안 거북하다고 느낄 수밖에 없을 테니까요. 둘째, 이 책을 읽는 이들이여, 뭔가 바꿔야 하지 않니? 왜냐하면, 뭔가 바꿔야겠다고 느끼지 않는다면, 이 거북한 얼개를 그대로 떠안고 그대로 살아야 한다는 뜻일 테니까요.


  가시내가 광대 차림으로 살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가시내가 어떤 차림새로 살든 구경거리로 쳐다봐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사내도 매한가지이지요. 사내가 어떤 차림새로 살든 광대나 구경거리가 될 까닭이 없습니다. 이쪽 사람이 저쪽 사람을 억누른다든지, 거꾸로 저쪽 사람이 이쪽 사람을 억눌러야 할 까닭이 없어요.


  《이갈리아의 딸들》은 목소리가 없는 어수선판에서 목소리를 내기에 뜻있습니다. 다만, 목소리는 내되 이다음길까지는 짚지 않거나 못합니다. 마땅하지요. 문학책 하나가 뒷길까지 모조리 짚어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우리가 새롭게 가꿀 이다음길이나 뒷길은 바로 우리 스스로 생각을 바꾸고 목소리를 내어서 지어야지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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