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단시대의 사회학
이이효재 지음 / 이화여자대학교출판문화원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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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4.2.22.

인문책시렁 349


《분단시대의 사회학》

 이효재

 한길사

 1985.10.20.



  《분단시대의 사회학》(이효재, 한길사, 1985)을 문득 되읽었습니다. 이 책이 처음 나오던 무렵에는 ‘분단시대’라는 낱말이 제법 퍼졌는데, 어느덧 잊히거나 낡은 이름이라 여기는구나 싶어요. 2100년이나 2200년 무렵에 2000년 언저리를 돌아볼 글바치가 있더라도 ‘분단시대’라는 이름을 안 쓸 수 있으리라 봅니다.


  북녘에서 나라를 이끄는 무리는 남녘에서 일군 열매를 아예 안 받아들입니다. 북녘은 ‘조선문학·조선문화·조선예술·조선과학’일 뿐입니다. 남녘도 매한가지라, ‘한국문학·한국문화·한국예술·한국과학’ 일 뿐입니다. 남북녘은 서로 무엇을 하는지 안 쳐다보기도 하고, 알 길이 없기도 한데, 한겨레가 숱하게 살아가는 일본이나 중국이나 러시아나 중앙아시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일군 열매도 남북녘 모두 안 쳐다봅니다.


  중국한겨레나 일본한겨레가 여민 글을 한국문학에 넣거나 가르치는 배움터가 있을까요? 일본한겨레나 중국한겨레가 가꾼 우리글을 말글밭에서 품거나 가르치는 배움터가 있는가요?


  우리는 아직 ‘조선 봉건사대 굴레’를 벗어나지도 못 했다고 느낍니다. ‘조선 봉건사대 굴레’는 ‘역사·문화·사회·경제·과학·문학’을 모두 어느 울타리를 바탕으로 쳐다봅니다. 웃사내질이 판치기도 하지만, 웃사내가 아니어도 ‘힘꾼인 웃가시내’도 나란합니다. 힘과 이름과 돈이 있으면 담벼락을 높이 세워서 끼리끼리 추켜세우고 나눠먹는 얼거리가 단단해요.


  이효재 님은 이런 우리나라를 ‘사회학’이라는 눈으로 읽었습니다. 앞으로 태어나서 자라날 아이들은 굴레나 담벼락이나 힘이나 돈이나 이름이 아닌, 봉건사대도 아니고 끼리질도 아닌, 오롯이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어깨동무하는 즐거운 보금자리와 마을을 바라는 뜻을 글자락에 담았어요.



한은 우리 민중 속에서 특히 그중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깔린 아낙네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통속적으로 표현되어 왔으며 그들의 행동을 좌우하는 심리적 요인이었다. (12쪽)


우리 민중인 여성들이 오랜 역사 동안 쌓이고 쌓여온 한에서 해방되지 못하는 한 우리는 한의 노예로 계속 살 수밖에 없으며 인간적 자유와 주체성을 누리지 못할 것이다. (13쪽)


분단된 상태에서 분단을 유지하며 살아가기 위한 집권층의 정치적 노력이 우리 민중의 삶에 인간적 및 비인간적으로 영향을 미치지 않을 수 없다. (18쪽)


내수(內需) 중심이라기보다는 수출중심적이고, 따라서 국제경쟁력이 우선시되는 경제정책이 채택된다 … 권력의 실질적 근거가 조직의 상층부에 있다. 즉, 국가와 군(軍), 대기업 및 국제자본의 상호관계가 중요한 것이다. (39쪽)


가부장제도의 답습은 또한 지배층에 의해서 권력을 뒷받침하기 위한 충효교육이나 전통계승을 위한 문화정책을 뒷받침하는 사회기반으로 이용되고 있다. (58쪽)


군사쿠테타로 정권을 탈취한 기반 위에 민정을 수립한 제3공화국은 그들의 정권에 정통성이 약한 것만큼 정권안정을 위해 민간부문의 집단활동을 정권지지의 기반으로 확대하며, 각 분야 및 계층간의 이해갈등을 억제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82쪽)


즉, 대통령의 진두지휘 아래 시달된 사업이 중앙과 지방의 관료조직을 통하여 농민들에게 지침으로 시달되며 재정적 투입과 함께 마을사람들에게 설득하며 협력하도록 강력한 압력을 가했다는 것이다. (134쪽)


이름이 없고 지위가 없는 상태에서 묵묵히 살아온 여성들의 생활 자체에서, 특히 국가나 민족공동체의 경제를 위해 생산적 노동을 담당하며 가족의 생존을 지탱해 온 피지배층 여성들의 노동과 삶을 이제 새롭게 인식해야 할 것이다. (269쪽)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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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미래 - 라다크로부터 배우다
헬레나 노르베리-호지 지음, 양희승 옮김 / 중앙books(중앙북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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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4.1.26.

인문책시렁 345


《오래된 미래, 라다크로부터 배운다》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

 김종철·김태언 옮김

 녹색평론사

 1996.7.15.



  《오래된 미래》(헬레나 노르베리 호지/김종철·김태언 옮김, 녹색평론사, 1996)가 처음 나올 즈음에는 강원 양구 멧골짝에서 총을 들고서 볼볼 기었습니다. 저는 가시울타리에서 여덟 달 즈음 살고서 ‘펀치볼’을 내려다보는 멧자락 싸움터로 내려왔는데, 그무렵에 한창 북녘 자맥배가 넘어온 탓에, 한 달 동안 움을 파고서 옴짝달싹 못 하는 나날이었어요. 얼추 쉰 날 즈음에 이르러서야 우리 싸움터로 돌아갔고, 지친 몸으로 발버둥(군사훈련)을 쳤습니다.


  땅개라는 이름을 받은 ‘육군 보병’은 늘 걷습니다. 발버둥을 쳐야 할 적에는 300킬로미터를 큰짐(완전군장)을 지고서 밤낮으로 걷습니다. 새벽부터 걷다가 한밤에 이르러 겨우 숲에 천막을 친 뒤 곯아떨어지는데, 밤에도 별지기 노릇을 합니다. 새벽에는 서리가 앉은 채 깨어나고, 숱한 멧등성이를 날마다 끝없이 오르내리다다 보면, 드디어 이레째 이른 걷기를 마치고, 우리 싸움터가 깃든 또다른 멧꼭대기로 꾸역꾸역 걸어갑니다. 다만 300킬로미터를 이레 사이에 못 채우면 며칠 더 걸어서 채워야 합니다.


  날마다 죽살이를 갈마드는 곳에서 1997년 12월 31일에 눈밭을 헤치면서 빠져나왔습니다. 다시는 강원도 양구도 안 쳐다보겠노라 다짐한 이튿날부터 책집과 책숲에 파묻혔어요. 이태 남짓 바깥얘기를 하나도 들은 바 없으니, 책숲에서는 묵은 새뜸을 뒤적이고, 책집에서는 몇 해 사이에 나온 책을 들추었습니다. 이무렵에 《오래된 미래》를 처음 만납니다.


  갓 싸움터에서 벗어난 젊은이는 피식 웃었습니다. 라다크하고 우리나라는 다르거든요. 라다크 젊은이는 우리나라 젊은이처럼 ‘총알받이 땅개’로 끌려가지는 않습니다. 다만, 사내로 태어나더라도 돈이나 이름이나 힘이 있으면 다 샛길로 빠져요. 돈도 이름도 힘도 없는 밑바닥 사내가 바로 쇠가시울타리 코앞으로 끌려가서 뒹굽니다.


  몇 해 지나서 다시 《오래된 미래》를 읽어 보았습니다. 이 책이 들려주는 줄거리를 속속들이 짚거나 느낄 이웃이 얼마나 될는지 가늠하기 어렵다고 느낍니다. 무엇보다도 옮김말부터 엉성합니다. 우리나라가 얼마나 곪거나 시들거나 앓는지 안다면, 얄궂은 일본말씨로 안 옮겼으리라 생각합니다. 스웨덴 아줌마는 “스웨덴 어린이가 알아듣고 생각을 펼 만한 눈썰미로 글을 썼을” 텐데, 한글판은 “웬만큼 머리에 먹물이 깃들지 않고서야 알아먹을 수조차 없도록 망가뜨렸”습니다.


  라다크‘로부터’ 배우지 않습니다. 라다크‘에서’ 배웁니다. 사람이라면 “아무개한테서 배운다”라 말하고, 어느 곳이라면 “시골에서 배운다”라 말합니다. 책이름을 “오래된 미래”라 했으나, 이 대목에서 ‘-된’은 군더더기입니다. “오랜 앞날”이나 “오랜 모레”쯤으로 붙여야 어울립니다.


  이러구러 《오래된 미래》에서도 다루는데, 우리가 스스로 ‘어른’이라고 말하고 싶다면, 어린이한테 높임말을 쓰게 마련입니다. 어린이한테 함부로 말을 놓는 이는 꼰대입니다. 나이가 적다고 여겨 말을 놓는 이들도 고약합니다. 우리가 어른이라면 언제 어디에서나 “말을 놓을 일도 까닭도 없”습니다. 어른은 누구한테나 말을 높입니다. 그리고 어른이라면, 나랑 믿음이 다르대서 손가락질을 안 합니다. 어른이라면, 내가 미는 이가 우두머리로 안 뽑혀도 저쪽을 삿대질하지 않습니다.


  어른이라는 자리는, 어린이가 스스로 깨우칠 때까지 상냥하게 나긋나긋 풀어내어 사랑으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길입니다. 비아냥이나 비웃음을 치는 무리는 그저 꼰대에 멍텅구리입니다. 이러면서 생각해 보아야지요. 모름지기 모든 집안은 엄마아빠랑 아이들 나이가 다 달라요. 다 다른 사람이 한집을 이루면서 사랑을 나누고 새롭게 배워요. 그런데 배움터나 일터는 거의 나이로 함부로 끊습니다. 오늘날 어린이는 어린이집이라는 데에 발을 딛자마자 ‘어울림’을 빼앗깁니다. 모든 나이가 함께 배우고, 모든 나이가 함께 이야기하고, 나아가 나이를 내려놓고서 마음으로 얼크러질 적에 비로소 ‘마을’이란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숲을 보셔요. ‘자연’이 아닌 숲을 보셔요. 바다를 보셔요. 하늘을 보셔요. 들을 보셔요. 들숲바다에서는 “크기도 나이도 힘도 이름도 돈도 안 따지는 어울림”만 있습니다. 크고작은 나무가 어우러집니다. 크고작은 풀꽃이 갈마들면서 피고 집니다. 오랜 앞날은 먼발치에 없습니다. 바로 우리 누구나 스스로 오래빛이요 오래꽃입니다. 스스로 잊은 씨앗을 돌아볼 노릇입니다. 순이돌이가 어깨동무하는 사랑으로 살림빛을 짓도록, 어리석은 싸움터(군대·전쟁)를 몽땅 걷어치울 노릇입니다. 총칼을 때려짓느라 애먼 돈을 들이붓는 바보짓을 멈출 일입니다. 아름다운 책을 읽으면 배울 수 있기는 하되, 머리에 먹물만 집어넣을 적에는 오히려 시커멓게 갇히더군요.


ㅅㄴㄹ


나는 논쟁을 해결하는 사람이 관련된 당사자들과 잘 알고 있을 때에는 그들의 판단이 편견에 치우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도리어 이 친밀함이 그들이 더 공정하고 건전한 결정을 하도록 돕는다. (56쪽)


누구라도 아이들에게 화를 내지 않는다. 아이가 조르고 보채도 … 아이는 쉬지도 않고 계속해서 똑같은 것을 물어대었다. 우리가 하려는 일에 집중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다. 그런데도 예쉬는 전혀 화를 내지 않았다. 아이가 책을 움켜잡을 때마다 부드럽게 그의 손을 떼어내며 “그건 책이야, 그건 책이야, 그건 책이야.” 하고 대답을 했다. 그는 계속 똑같이 조용한 어조로 그 말을 백 번은 했을 것이고, 나와는 달리 우리의 일에 정신을 집중하는 데 아무런 어려움이 없는 것이었다! (72쪽)


물질문화에 대해서 관광이 끼치는 영향은 광범위하고 파괴적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람들의 마음에 끼치는 영향이다. (99쪽)


나이별 집단으로 나누어지는 일은 학교에서 그치지 않는다. 이제 사람들은 자기의 동년배들끼리만 같이 지내는 경향이 있다. 그 결과로 젊은이와 늙은이들 사이에 상호관용이 줄어든다 … 새로운 중앙집중의 구조속에서 일자리와 정치적 대표자를 위한 경쟁이 갈수록 라다크를 분열시키고 있다. 종족과 종교의 차이가 정치적 차원을 갖게 되었고, 전례없는 규모로 불행과 반목을 일으키고 있다. (134쪽)


개발과정이 라다크를 변화시키는 것을 지켜보면서, 나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삶을 변화시키고 있는 힘에 대하여 얼마나 무지한지를 깨닫기 시작했다. (162쪽)


라다크의 언어를 통해서 나는 그들의 사고방식을 이해하게 되었고, 그 사회에 통합되었다. (176쪽)


문화적 다양성을 진정으로 존중한다는 것은 우리의 문화를 남들에게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이국적인 문화를 우리의 소비를 위해 꾸러미로 만들어 이용하고 상업화하는 것도 아니다. (188쪽)


눈에 띄지는 않지만 오늘날의 중앙집중체제가 더 많은 공간을 차지한다. (189쪽)


+


생태적 마을(에코빌리지)를 건설하려는 움직임이 스웨덴을 휩쓸고 있다

→ 스웨덴은 푸른마을을 지으려는 바람이 분다

→ 스웨덴은 숲마을을 가꾸려는 바람이 불어댄다

196


사람들은 자연과의 보다 나은 균형을 추구하고 있다

→ 사람들은 숲과 얼크러지려고 한다

→ 사람들은 푸르게 어울리려고 한다

196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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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좋아하는 것들, 소설 내가 좋아하는 것들 11
김슬기 지음 / 스토리닷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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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4.1.18.

인문책시렁 318


《내가 좋아하는 것들, 소설》

 김슬기

 스토리닷

 2023.10.31.



  《내가 좋아하는 것들, 소설》(김슬기, 스토리닷, 2023)을 읽었고, 덮었습니다. 열아홉 살까지는 ‘소설’이라는 이름인 글을 읽었으나, 스무 살부터는 등졌습니다. 마흔 살이 훌쩍 넘어서 다시 몇 자락을 읽기는 했으나, 영 손이 안 갑니다.


  우리나라에서 나오는 숱한 글자락은 “삶을 담는 글”이라기보다 “삶이 미운 글”에 쏠려요. “삶을 짓는 꿈을 그리는 글”이 아닌 “삶은 굴레라고 쏘아대는 글”이기도 합니다. 이른바 ‘막장 연속극’하고 소설은 나란합니다. 둘은 늘 한동아리 같아요.


  요즈막에는 ‘수필’이라는 이름인 글마저 “삶을 풀어내면서 스스로 마음을 푸근하게 품는 글”이 아닌 “삶이 괴롭다고 미워하면서 가르고 싸우고 쪼개는 굴레”로 치닫습니다. 여기에 ‘시’라는 이름인 글은 “삶에 가락을 입혀 나누는 노래”가 아닌 “삶을 저버린 채 꾸미고 덧씌우고 자르는 글장난”에 갇힙니다.


  낱말책을 짓는 일을 하니, 어느 갈래 어느 글이건 아무튼 읽기는 하되, 소설이라는 글은 마음도 말도 마을도 꽁꽁 뭉개는 얼거리가 넘쳐나기에, 글쓴이부터 스스로 수렁에 잠길 뿐 아니라, 읽는이도 덩달아 쇠고랑을 차야 하는 듯싶기까지 합니다. 언제부터 소설이라는 글은 이렇게 바닥을 칠까요?


  어느 모로 보면, 글을 쓰면서 ‘글쓰기’라 안 하고 ‘문학 창작’이라고 씌우면서 망가지는 지름길로 접어들지 싶습니다. 글이란, 말을 담은 그림이자 무늬입니다. 말이란, 마음을 담은 소리입니다. 마음이란,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를 그린 이야기입니다. 그래서 글이건 말이건, 마음이요 이야기를 담는 그릇인데, 글을 글이라 않고 ‘소설’이나 ‘수필’이나 ‘시’라고 하면서 다 뒤집혔구나 싶어요.


  말이란, 좋은 말이나 나쁜 말이 없이, 그저 삶을 누리는 마음을 담아낸 소리일 뿐입니다. 말을 옮기는 글도, 삶이라는 이야기를 간추려서 담는 글도, 언제나 좋은 줄거리나 나쁜 줄거리가 없습니다. 쥐어짜거나 뚝딱거리거나 짜맞출 적에는 삐걱거릴밖에 없어요.


  서울살이를 쓰든, 시골살이를 쓰든, 웃음살이를 쓰든, 눈물살이를 쓰든, 가시밭길을 쓰든, 꽃길을 쓰든, 꾸미지 않으면 됩니다. 고스란히 쓰면 넉넉합니다. 아픈 삶이니 아프게 눈물을 흘린 그대로 쓰면 됩니다. 기쁜 삶이니 기쁘게 웃음을 터뜨린 그대로 쓰면 돼요. 이러면서 언제나 꿈과 사랑과 숲을 바탕에 놓을 줄 아는 눈썰미라야, 비로소 글이요 말이 빛날 테지요.


ㅅㄴㄹ


소설을 읽고, 더 자유로워진 마음으로 쓴다. 그러다 보니 일기 쓰기도 달라졌다. 암호처럼 쓰던 일기가 솔직해졌다. 더 수다스러워졌다. 이런 생각은 옳지 않다, 여기며 마음에서 지우기 급급했던 생각들도 귀하게 기록한다. (28쪽)


20대 중반이었던 나는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산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몰랐다. (43쪽)


1만 2천 원 하는 책을 판다는 건, 이토록 무덥고, 부끄럽고 또 애타는 일이구나. 글을 쓸 때 몰랐던 것들을 …… (61쪽)


+


손바닥을 바지 위에 비벼댔다

→ 손바닥을 바지에 비벼댔다

21쪽


소설 쓰고 앉아 있다

→ 이야기 쓰고 앉았다

22쪽


누군가는 겨울에 굶어 죽고야 마는 베짱이라며

→ 누구는 겨울에 굶어죽고야 마는 베짱이라며

22쪽


8차선 위에서 벌거벗고 춤을 추는 것과 같다

→ 여덟길에서 벌거벗고 춤을 추는 셈이다

23쪽


대망의 질문 시간

→ 기다린 물음틈

→ 바라던 이야기

→ 손꼽은 얘기꽃

27쪽


C조, 준비, 땅!

→ 셋째, 자, 가!

31뽇


대충 느낌적인 느낌으로만 추측할 뿐이었다

→ 얼추 헤아릴 뿐이다

→ 그냥 어림할 뿐이다

→ 그냥 짚어 본다

32쪽


초보 습작생이었던 내겐

→ 풋내기이던 내겐

→ 풋글을 쓰던 내겐

33쪽


인생의 숙제를 덜 한 것만 같은 찜찜한 마음이 커지면

→ 살아가는 짐을 덜 한 듯해 더 찜찜하면

→ 삶이라는 길을 덜 간 듯해 확 찜찜하면

44쪽


친한 언니와 식사하는 자리에서 그녀는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 가까운 언니와 밥먹는 자리에서 혀를 끌끌 차며 말했다

45쪽


소설을 좋아하는 충실한 독자로만 남고 싶은

→ 글꽃을 좋아하는 이로만 남고 싶은

→ 글꽃을 즐겨읽기만 하고 싶은

55쪽


노트북을 여닫는 사이 영영 글 쓰는 일로 돌아가지 않아도 좋을 문장들을 만난다

→ 무릎셈틀을 여닫는 사이 끝내 글 쓰는 일로 돌아가지 않아도 좋을 글을 만난다

58쪽


나는 저항군처럼 역행한다

→ 나는 거스른다

→ 나는 맞선다

64쪽


내가 불안에 천하무적인 긍정맨일까

→ 내가 걱정을 다 이기는 웃음이일까

→ 내가 근심을 안 두려운 활짝이일까

69쪽


한 장 분량의 아주 짧은 소설(엽편 소설)을 쓰는 것이었다

→ 한 쪽짜리 잎글을 쓴다

→ 한 바닥짜리 잎새글을 쓴다

75쪽


반짝반짝 잘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 반짝반짝 잘하는 일을 잊지 않아야 한다

77쪽


엄마의 말은 희한하게 내 마음의 급소 어딘가를 정확히 파고들어 치명타를 날리곤 한다

→ 엄마는 남달리 내 덜미 어디를 확 파고들어 주먹을 날리곤 한다

→ 엄마는 뜬금없이 내 마음 복판을 훅 파고들어 뻥 날리곤 한다

→ 엄마는 놀랍게 내 명치를 똑똑히 파고들어 모질게 날리곤 한다

79쪽


평범한 이야기였던 것이 MSG가 잔뜩 가미되어, 흥미진진한 이야기가 되어갔다

→ 수수한 이야기에 가게앙념을 잔뜩 넣어, 재미있는 이야기가 되어갔다

81쪽


냉장고는 온갖 곰팡이들을 배양하는 실험실이 됐다

→ 싱싱칸은 온갖 곰팡이를 키워 두는 곳이 됐다

104쪽


달콤한 떡볶이는 완벽한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다

→ 달콤한 떡볶이는 어쩔 길 없다

→ 달콤한 떡볶이는 사랑이다

→ 달콤한 떡볶이는 안 먹고 못 산다

→ 달콤한 떡볶이는 홀린다

→ 달콤한 떡볶이는 사로잡는다

→ 달콤한 떡볶이는 죽인다

142쪽


정리만 되면 내려갈 거야

→ 추스르면 가

→ 다스리면 가

→ 다독이면 가

190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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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치마가 빛났다
안미선 지음 / 오월의봄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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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3.12.25.

인문책시렁 335


《그때 치마가 빛났다》

 안미선

 오월의봄

 2022.10.4.



  《그때 치마가 빛났다》(안미선, 오월의봄, 2022)는 치마하고 얽힌 삶길을 들려줍니다. 그런데 글쓴이는 여러 가지를 놓치거나 등돌리려고 합니다. 치마가 워낙 순이옷일까요, 아니면 누구나 두르던 옷일까요? 오늘날 치마는 어떤 옷가지일까요?


  오늘날은 누구나 바지를 뀁니다. 치마를 입고 싶다면 치마를 두르고, 바지를 꿰고 싶다면 바지를 뀁니다. 순이뿐 아니라 돌이도 치마를 두르고 싶으면 즐겁게 두를 노릇입니다. 그저 옷이거든요. 이렇게 해야 하거나 저렇게 갈라야 하지 않습니다.


  웃사내질로 순이를 억누르는 짓은 언제부터 누가 어디에서 일삼았을까요? 이 대목도 곰곰이 짚을 일입니다. 조선 오백 해는 어떤 틀이었고, 조선이 사라진 지 백 해 남짓 지나는 동안 우리 삶터는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우두머리는 한자·중국글을 ‘수글’로 여기고, 훈민정음을 ‘암글’로 여겼습니다. 중국말을 한자로 담아서 써야 ‘참글(진서)’이라고까지 여겼어요.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쓰는 글은 ‘무늬만 한글’이지는 않나 돌아볼 노릇이에요. 우리 삶과 넋과 마음을 우리말에 알뜰히 담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숱한 순이가 억눌리고 짓밟히고 고단하게 살았고, 숱한 돌이도 짓눌리고 뭉개지고 고달프게 살았습니다. 순이돌이로만 가를 굴레가 아닙니다. 가난하고 힘없고 이름없는 이는 순이돌이 안 가리고 모두 벅찬 나라입니다. 그리고 돌이를 바보로 내모는 단단한 담벼락 가운데 하나인 싸움터(군대)를 잘 보아야 합니다. 싸움터는 뭇사내를 바보로 내몰면서 총칼과 주먹힘으로 이웃을 괴롭히는 짓을 길들입니다. 배움수렁은 모든 어린이하고 푸름이가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하지 말라고 닦달하면서, 밥그릇 지키기로 몰아세웁니다.


  돌이도 엄마아빠가 나란히 있어야 태어납니다. 순이도 아빠엄마가 함께 있어야 태어납니다. 멍청한 나라를 바로세우려면 순이돌이가 사랑으로 어깨동무하면서 우리 보금자리부터 바꿀 일입니다. 자그마한 살림집에서 깨어난 사랑씨앗이 집안과 마을을 달래면서 나라를 갈아엎습니다.


  이제 우리가 서로서로 낼 목소리란, 순이돌이가 참사랑으로 만나서 참살림을 가꾸려면 서로 무엇을 배우면서 함께 어떤 하루를 지어야 하느냐라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함께 배울 일입니다. 함께 밥짓고 옷짓고 집지으면서, 같이 아이를 사랑으로 낳아 돌보는 길을 처음부터 다시 배울 일입니다.


  어깨동무가 빠진 목소리는 허전합니다. 사랑이 아닌 갈라치기만 남은 목청은 덧없습니다. 사내들한테 치마를 입힙시다. 사내랑 가시내가 함께 치마를 두르고서 천천히 마을을 거닐고 집안일을 즐기면서 아이한테 살림말을 물려주고 사랑노래를 부릅시다. 붕뜬 말은 모두 내려놓고서, 번지르르한 글도 다 접고서, 순이돌이가 아이 손을 나란히 잡고서 해바라기랑 별바라기랑 숲바라기를 하는 길을 느긋이 걸어가기를 바라요.


ㅅㄴㄹ


치마를 입는 날에는 마음이 좀더 편했다. 바지처럼 몸의 윤곽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합으로 엎드려뻗쳐를 할 때 치마를 입고 온 날이면 난감했다. (55쪽)


결혼하지 않고도 여성이 의지대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이모는 자기 삶으로 보여줬다. (76쪽)


국어국문학과에 다니며 나는 책을 읽었고 작가가 되는 것을 꿈꾸었다. 어머니는 책장에 꽂힌 책을 보면 “책을 사지 말고 돈을 벌 궁리를 해라!” 하고 타박을 주었다. “서울은 사람 살 데가 못 된다. 공기도 안 좋고 교통도 복잡하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어머니는 바닥에 흩어진 책을 구석으로 치웠다. (89쪽)


어머니는 내 교복을 최근까지 간직하고 있다가 이사 오면서 정리했다며 아쉬워하는 목소리로 말했다. 대신 교복에 달려 있던 단추를 짚어 내게 보였다. “이게 모두 우리 역사야.” 어머니가 웃으며 말했다. (282쪽)


+


그날 나는 치마를 입고 있었고

→ 그날 나는 치마를 입었고

6쪽


그들의 표정은 나의 표정의 원천이었다

→ 그들 얼굴짓대로 내 얼굴이 되었다

→ 그들 낯빛대로 내 낯빛이 태어났다

7쪽


치마의 수런거림을 모두 받아적을 수 있다면

→ 치마가 수런거린 대로 받아적을 수 있다면

8쪽


치마에 대한 첫 기억이 있다

→ 첫 치마를 떠올린다

→ 처음 치마를 생각한다

13쪽


급기야 눈앞에 늘어선 시종들의 모습까지 상상했다

→ 그리고 눈앞에 늘어선 머슴들 모습까지 그렸다

→ 더구나 눈앞에 늘어선 마당쇠 모습까지 떠올렸다

14쪽


정확하고 날렵한 손 솜씨로 개어

→ 꼼꼼하고 날렵하게 개어

→ 빈틈없고 날렵한 손길로 개어

17쪽


치마의 종류는 여러 가지였다

→ 치마는 여러 가지였다

19쪽


밤에 산고를 치르느라 비명을 지를 때

→ 밤에 배앓이를 치르느라 소리지를 때

21쪽


자신의 몸도 성당에 비유했다

→ 제 몸도 거룩하게 여겼다

27쪽


세례명도 있어서 어머니는 집에서 우리를 그 이름으로 종종 불렀다

→ 새이름도 있어서 어머니는 집에서 우리를 이 이름으로 으레 불렀다

→ 빛이름도 있어서 어머니는 집에서 우리를 이 이름으로 곧잘 불렀다

27쪽


작은 단을 놓고 그 위에

→ 작은 칸을 놓고 여기에

→ 작은 시렁을 놓고서

29쪽


양이 많을 땐 유축기로 짜냈다

→ 많이 나올 땐 젖손으로 짜냈다

→ 많이 나올 땐 젖짜개를 썼다

47쪽


위태위태한 감정의 줄다리기도 끝이 났다

→ 아슬아슬 보던 줄다리기도 끝이 났다

→ 기우뚱 바라보던 줄다리기도 끝이 났다

58쪽


자족한 듯 목을 움츠리고 교탁을 짚으며

→ 흐뭇한 듯 목을 움츠리고 시렁을 짚으며

→ 즐거운 듯 목을 움츠리고 자리를 짚으며

68쪽


관객들이 포복절도했다고 했다

→ 사람들이 까무라쳤단다

→ 사람들이 뒤집어졌단다

77쪽


염려하며 미리 훈수를 두었다

→ 걱정하며 미리 타일렀다

83쪽


추위도 피하고 안전하게 있을 요량이었다

→ 추위도 긋고 아늑하게 있을 셈이었다

84쪽


동네의 정보를 얻는 데 능했다

→ 마을 이야기를 잘 얻었다

→ 마을 얘기를 거뜬히 얻었다

85쪽


서울 지리는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 서울길은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 서울은 아무것도 모른다면서

86쪽


요령 있게 사람들과 완급을 조절하면서 자기 식대로 살아가고 있었다면

→ 구스르고 사람들과 맞추면서 제 결대로 살아갔다면

→ 꾀바르게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나답게 살아갔다면

109쪽


임신중단 시술도 흔했다

→ 아기막이로 흔히 쨌다

121쪽


울상으로 있는 몇 명의 하객들이 있었다

→ 울낯으로 있는 손님이 몇 있다

→ 미어지는 손님이 몇 분 있다

126쪽


어머니의 제안에 나는 난처했다

→ 나는 어머니 말이 버거웠다

→ 나는 어머니 얘기가 벅찼다

143쪽


함 받는 일은 인륜지대사에서 마땅히 치러야 할 일이라고 했다

→ 고리 받는 일은 큰잔치라서 마땅히 치러야 할 일이라고 했다

144쪽


정해진 날짜를 당기자고 재촉했다

→ 잡은 날짜를 당기자고 닦달했다

→ 고른 날짜를 당기자고 몰았다

147쪽


나무의 잎들이 떨궈졌다

→ 나뭇잎이 떨어졌다

191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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닮다
최하현 지음 / 부크크(bookk)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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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 인문책시렁 2023.11.30.

인문책시렁 286


《닮다, 나와 비슷한 어느 누군가에게》

 최하현

 부크크

 2020.10.8.



  《닮다, 나와 비슷한 어느 누군가에게》(최하현, 부크크, 2020)를 곰곰이 읽었습니다. 속으로 품은 생채기를 한 올씩 꺼내는구나 싶은데, 생채기마다 피고름이 응어리로 졌다고 합니다.


  속으로 묻은 생채기를 들출 적에는 누구나 으레 “왜 그랬어!” 하고 따지고 싶어요. “왜 몰라!” 하고 묻고 싶습니다. 따지거나 묻는들 후련할 만한 말을 듣기는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따지려고 첫 마디를 뱉는 날부터 조금씩 바뀌어요. 불타오르듯 물어보는 날부터 어느새 달라집니다.


  여태껏 제대로 말로도 몸짓으로도 마음을 드러내지 못 한 사람은 글쓴이뿐 아니라, 글쓴이 어버이에 여러 이웃입니다. 다들 마음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 하면서 오늘까지 살아왔어요.


  우리 마음은 다치는 일이 없습니다. ‘마음이 다쳤다’고 여길 수 있을 뿐, 막상 우리 마음은 언제 어디에서라도 안 다칩니다. 우리 마음은 모든 느낌을 고스란히 담기만 합니다.


  담기만 하는 마음인 줄 알아볼 수 있다면, 남이 아닌 나부터 바꿀 수 있어요. 남들더러 바꾸라고 할 까닭이 없거든요. 남들이 바꾸건 안 바꾸건 내가 바꾸면 될 뿐이에요.


  다르기에 담습니다. 다르기에 담아서 닮습니다. 닮은 사이라면 서로 담았다는 뜻이요, 담기는 했지만 다르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같은’ 사이라면 담지 않아요. ‘같을’ 적에는 오롯이 하나입니다. 우리가 서로 오롯이 하나가 아니니, 담고 닮으면서 다릅니다.


  이제 생각해 볼 수 있을까요? 닮거나 담는다고 할 적에는 다르다는 뜻이에요. 서로 닮거나 담았지만 바탕이 다르니, 말이나 삶이 엇갈리거나 부딪혀요.


  그리고, 닮거나 담으면서 다른 둘은, 머잖아 ‘다다르’려고 합니다. ‘다 다르기’에 ‘다다르(닿으)’려고 합니다. 다른 둘은 한참 벌어진 채 살아왔지만, 다 다르게 살아온 길이 닿을(다다를) 곳을 살피는 몸짓이라고도 할 만해요. 걱정할 일도 까닭도 없이, 그저 마음에 사랑을 담으면 됩니다. 사랑이 싹트도록 다독이고 달래면 됩니다.


ㅅㄴㄹ


그 시절 담임 선생님이 내 이름을 개명하는데 훼방을 놓았다. 나의 이름이 너무 예쁜데 왜 바꾸려 하냐며 엄마와 나를 설득했다. 나는 그 설득에 넘어간 아주아주 어린 어린이였다. (7쪽)


이걸 쓰면서 느끼는 건 내가 나한테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 말을 들어주는 이의 말을 내가 먼저 잘 들어줘야 한다는걸. (15쪽)


우리 부모님은 왜 그렇게 나를 그런 순간들에 놓이게 했을까? 왜 그렇게 방임과 무시 속에서 아이를 놓아둔 것일까? 부모님은 분명 진짜 열심히 사셨다. (32쪽)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안다는 건 정말 축복과도 같은 일이다. (46쪽)


나는 멀리서 소식을 접하면서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며 미친 자에게는 그곳을 떠나지 않는 이상 벗어날 수 없음을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길게 쓴 이유는 나와 같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이다. 그런 상황에 놓였다면 꼭 버티려고 노력할 필요가 없다고 말해 주고 싶다. 아무도 나를 상처 입히고 못살게 굴 권리는 없으며, 그런 사람에게 비굴해질 필요도 없다는 걸 나는 두 번의 미친 자를 만나면서 배웠다. (73쪽)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말이 뭐예요?》,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밑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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