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보다 일기 - 서민 교수의 매일 30분, 글 쓰는 힘
서민 지음 / 책밥상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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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105 : 하루를, 마음을, 사랑을 쓰기에 일기


《밥보다 일기》

 서민

 책밥상

 2018.10.29.



글은 배운다고 되는 게 아니라 ‘매일 조금씩’ 써야 늡니다. (29쪽)


자, 그렇다면 일기를 매일 쓴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그날 있었던 일들에 대해 객관적인 시선으로 볼 수 있습니다. (38쪽)


이참에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날 일기를 쓰는 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까요? (73쪽)


이 말을 한 이유는 남이 보기에 사소한 일들도 우리에겐 매우 중요한 일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35쪽)


여러분은 자기 자신에 대해 하루에 얼마나 오래 생각하십니까? (247쪽)



  열두 살 큰아이는 아버지 곁에서 늘 글살림을 지켜보았습니다. 이러다 보니 스스로 한글을 일찍 깨쳤고, 뭔가 끄적이기를 무척 즐겼습니다. 큰아이가 터뜨리는 놀라운 말을 아버지가 수첩에 꼬박꼬박 옮기기를 열 해를 하다가, 이제는 큰아이 스스로 ‘제(큰아이) 말’을 제 손으로 제 공책에 적으라고 이야기합니다.


  우리가 날마다 하는 여러 가지 가운데 하나는 “하루를 남겨요”입니다. ‘일기’라는 말을 굳이 안 씁니다. 굳이 안 쓸 일이 없다고 할 수 있지만, 어린이가 처음 맞닥뜨리기에는 매우 힘겨운 낱말 가운데 하나가 ‘일기’입니다. 한자말이라서 아이한테 높은 울타리가 되는 말은 아니라고 여겨요. ‘일기’라고 툭 내뱉으면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를 하나도 알기 어려울 뿐입니다.


  우리 집 아이들하고 “하루를 남겨요”란 말을 쓰는 까닭은 수수해요. 말 그대로이거든요. “자, 오늘 하루를 남겨 볼까?” 하고 말합니다. 아침이든 낮이든 저녁이든, 어느 때이든 좋습니다. 마음에 남고 몸에 새긴 이야기를 스스로 공책에 옮깁니다.


  글쓰기를 다루는 《밥보다 일기》(서민, 책밥상, 2018)는 무엇보다 “일기를 쓰자”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이 책은 하나를 통틀어 오롯이 ‘일기를 이렇게 쓸까요?’ 하고 묻습니다. 다만 이 책은 어린이나 푸름이 눈높이에 맞추지 않습니다. 적어도 서른 살 즈음 눈높이에 걸맞다고 느낍니다. 또는 마흔 살 언저리에 읽을 만하구나 싶어요.


  학교에서는 ‘일기’라 하고, 군대나 회사나 기관에서는 ‘일지’라 합니다. 말 그대로 “그날그날 있던 일을 적는 글”입니다. 이런 흐름으로 본다면 “하루 쓰기”이기도 하면서 “그날 쓰기”라고도 할 만해요. 살을 붙인다면, 오늘 하루를 살아온 이야기를 쓰기요, 그날그날 생각하고 느낀 모든 삶을 쓰기라 할 테지요.


  글쓴님이 《밥보다 일기》에서 살짝 짚기도 합니다만, 꾸며야 하는 글이 아닙니다. 예뻐 보이거나 멋져 보여야 할 글이 아닙니다. 남한테 자랑하거나 드러내려고 쓸 글이 아닙니다. 누리집 같은 곳에 올리는 글이라 하더라도 ‘남한테 보이려는 뜻’에 앞서 ‘내가 언제라도 다시 읽고서 삶을 스스로 되새기려고 쓸 글’입니다.


  우리 삶을 담는 글이니, 우리가 누리집에 올린 글에 누가 덧글을 남겨도 대수롭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을 기울여서 덧글을 쓰거나 그냥 지우거나 지나가면 되어요.


  사람들이 저마다 오늘 하루를 꾸밈없이 쓴다면, 모든 사람이 스스로 겪고 맞닥뜨리며 느낀 삶을 고스란히 옮긴다면, 아마 우리 삶터는 대단히 달라지리라 생각해요. 속마음을 감추기에 겉치레가 불거지거든요. 속내를 나누지 않기에 허울좋은 겉모습이 커지거든요. 하루를 쓰고, 마음을 쓰며, 사랑을 쓰는 글이 되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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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 벼 쌀 - 겨레의 숨결 국토의 눈물
김현인 지음 / 전라도닷컴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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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110 : 다 같은 논이 아닌, 다 다른 논으로


《논 벼 쌀》

 김현인

 전라도닷컴

 2019.10.31.



논둑을 세우던 날, 하늘을 땅 위에 새기던 날이면 내 육신의 목숨줄도 이 길을 따라 가는 것이니 천지간의 목숨이 복되고도 귀하구나, 굵은 땀에 흔들려 뼛골이 다 닳는들 하나하나 흙을 일으키고 돌을 옮기며 세세연년의 복전을 기약하노라. (47쪽)


벼의 반응은 직선적이다. 너희는 내가 필요한가. 그렇게 벼는 묻고 있는 듯했다. (67쪽)


1962년부터 각급학교에서 보리 혼식을 감시하는 도시락 검사가 전면적으로 실시되고, 이는 향후, 어느 역사에서도 볼 수 없는, 산골 누옥의 밥상머리까지 들여다보는 강력한 국민 통제수단으로 자리잡는다. (142쪽)


어찌 보면 여러분은 똑똑해질 것이 아니라 한없이 다양해져야 하는 것입니다. (217쪽)



  겨울이 저물고 봄이 될 즈음, 해마다 시골마을에서는 마을지기 알림말이 구석구석 퍼집니다. 어떤 알림말인가 하면, 새해에 논에 심을 볍씨를 두어 가지 가운데 골라서 마을지기한테 말해 달라는 알림말이에요. 요즈막은 웬만한 논마다 농협에서 품종개량을 한 볍씨를 내다팔고, 시골 흙지기는 농협 볍씨를 사다가 심습니다.


  가을에 거둔 벼를 농협에 내다팔자면, 봄에 농협 볍씨, 그러니까 씨나락을 사야 하고, 농협에서 내다판 씨나락이어야 농협에 가을벼를 팔 수 있어요. 나라에서 사들이는 모든 벼는 나라에서 심으라고 콕 집어서 흙지기한테 파는 몇 가지 볍씨입니다.


  시골지기로서 흙을 만진 나날을 갈무리한 《논 벼 쌀》(김현인, 전라도닷컴, 2019)을 읽으며 논살림 얼거리를 새삼스레 돌아봅니다. 나라에서는 왜 똑같은 볍씨만 심도록 이끌까요? 지난날에는 고장마다, 고을마다, 마을마다, 또 집마다 다른 볍씨를 심었다는데, 왜 오늘날에는 모조리 같은 볍씨를 심어야 한다고 북돋울까요?


  마을 어르신 말씀을 들으면, 농협에서 파는 볍씨는 심어서 가을알을 거둔 다음에 이듬해에 심으면 그럭저럭 나지만, 이태 뒤부터는 거의 안 난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서, 나라(농협)에서 흙지기한테 팔아서 온나라 논을 채우는 여느 볍씨는 ‘씨알을 거두어 심을 수 없는 씨앗’인 셈입니다. 여느 밥상에 오르는 쌀이란, 여느 밥집에서 다루는 쌀이란, 땅에서 새롭게 자랄 수 없는 알맹이랄까요.


  나라에서 볍씨를 다룬다면, 나라에서는 통계를 내거나 돈을 벌기 쉽겠지요. 그러나 다 다른 고장이며 고을이며 마을에서 다같은 볍씨를 심다가는 비바람이나 가뭄에 쉽게 큰일이 날 수 있습니다. 고장마다 날씨가 다를 텐데 고장마다 엇비슷한 볍씨를 심도록 한다면, 또 한 고장이어도 고을이며 마을마다 날씨가 다르기 마련인데, 모조리 같은 볍씨로 맞추려 한다면 앞으로 어떤 일이 생길까요? 무엇보다도 ‘농협 볍씨를 손수 심고 거두어 새로운 씨나락으로 삼을 수 없도록 품종개량’을 했다면, 이러한 쌀이 우리 몸에 얼마나 이바지할까요?


  흙지기 김현인 님은 《논 벼 쌀》이라는 책을 쓰면서 이 대목을 아프게 밝힙니다. 이러면서 외치지요. “사람들이 똑똑해지기보다는 다 다르게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란다고, 우리가 나아갈 길은 ‘쉬운 관리와 표준화’가 아닌, 고장맛 고을멋 마을살림을 다 다르게 가꾸면서 ‘서로 다르기에 아름답게 새로 어우러지는 사랑’이 될 노릇 아닌가 하고 이야기해요.


  우리가 나아갈 길이란, 우리 삶터를 가꾸는 길이란, 우리 마음이며 몸을 살찌우는 길이란 무엇일는지 돌아봅니다. 밥 한 그릇에 담는 온누리를 흙지기뿐 아니라 나라일꾼도 어린이도 푸름이도 풀내음하고 바람결로 다시 생각해 볼 수 있기를 빕니다. “보리 혼식”을 밀어붙이고 나중에는 ‘혼분식’이라 해서 하루 한끼는 반드시 밀가루를 먹어야 한다고 윽박지르던 새마을운동이었는데, 논뿐 아니라 밥상까지 지켜보며 억누른 그 눈초리는 아직 사라지지 않은 셈이지 싶습니다. ㅅㄴㄹ


+++ 다만, 이 책은 글결이 너무 딱딱하고 덧없는 한자말을 잔뜩 써서 아쉽다. 흙지기님은 왜 이렇게 낡은 중국 말씨에 일본 한자말을 잔뜩 집어넣어서 글을 써야 했을까? 흙말을, 시골말을, 마을말을, 무엇보다도 나락말을 쓴다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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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 여든 앞에 글과 그림을 배운 순천 할머니들의 그림일기
권정자 외 지음 / 남해의봄날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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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103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순천 할머니 스무 사람

 남해의봄날

 2019.2.1.



하루는 남편이 그 집에서 나오는 것을 붙잡아 나는 한 달 동안 뼈빠지게 일하고 왔는데 헛짓거리 하고 있었냐고 했더니 남편은 화를 못 이기고 연탄을 들고 와 나한테 던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연탄에 맞아 걷지를 못했습니다. (31쪽/안안심)


엄마는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했습니다. 나는 동생을 업고 젖을 먹이러 다녔습니다. 쌀을 씹어 죽을 끓여 먹이기도 했습니다. 누덕바지로 만든 기저귀에 오줌을 싸서 내 등이 다 젖었습니다. (79쪽/하순자)


남편은 자기 생일날 밥을 빨리 안 준다고 상을 엎어 밥상이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상을 새로 안 사고 석 달 동안 땅바닥에 밥을 줬더니 그 뒤로는 상을 안 엎었습니다. (127쪽/김영분)


나는 큰아들이 기특했습니다. 그래서 큰아들에게 흙이 너와 잘 맞는 것 같다고 흙을 사랑하고 가까이하라고 했습니다. (143쪽/권정자)



  오늘 마을에서 마주하는 할머니는 그냥 할머니는 아닙니다. 어느덧 아흔 여든 일흔이란 고개를 넘어가는 할머니도 서른 살이나 스무 살 젊은이였던 나날이 있고, 열대여섯 살 푸른 나날이 있었으며, 예닐곱 살 어린 나날이 있었어요. 어린 나날이나 푸른 나날은 어느덧 지나갔고, 젊은 나이도 지나갔으며, 늘그막을 오래오래 보낼 뿐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오늘 여든 살 할머니가 스무 살 젊은이였던 예순 해 앞서는 1960년대요, 오늘 아흔 살 할머니가 열 살 어린이였던 여든 해 앞서는 1940년대예요. 그무렵에는 어떤 젊거나 어린 하루를 누렸을까요. 그무렵 그분들 어머니나 아버지는 어떤 어른스러움을 보여주었을까요.


  순천에서 늘그막을 누리는 할머니 스무 사람이 쓴 글하고 그린 그림으로 엮은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순천 할머니 스무 사람, 남해의봄날, 2019)를 읽기는 수월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 할머니마다 떠올리는 어리거나 젊은 날이 매우 모질거나 아프거나 슬픕니다. 툭하면 맞고, 거친 말소리를 듣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고단하거나 괴롭거나 힘든 나날입니다. 둘째, 모두 시골에서 나고 자란 할머니인데 이 책에 흐르는 글은 모조리 서울 표준말입니다. 매우 아리송했습니다. 시골말로 살아온 시골 할머니가 왜 서울 표준말로 글을 썼지? 스무 할머니는 스무 가지로 다른 삶길을 걸어왔는데, 서울 표준말에 ‘갇힌’ 글은 다 다른 할머니가 다 다른 터전에서 다 다른 삶을 맞닥뜨리면서 헤쳐내거나 이겨내거나 받아들이면서 삭인 숱한 눈물이며 멍울이며 생채기이며 고름이며 앙금을 제대로 담아내기에는 어렵지 싶더군요.


  이 책이 안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무 할머니 살아온 이야기는 매우 애틋합니다. 더구나 지난날을 미움으로 그리지 않아요. 맞든 거친말을 듣든 언제나 가로막혀서 힘겨워야 했든, 할머니는 어리거나 젊은 나날부터 조용조용 한 걸음씩 내딛었습니다. 이녁 아이들은 ‘이녁이 겪은 짓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매우 크셨지 싶습니다. 이녁 아이들을 어떤 사랑으로 돌보고 아꼈는가를 물씬 느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늘그막에 비로소 한글을 깨치고서 스스로 이녁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는 기쁨이 얼마나 큰가도 느낄 만합니다.


  전라남도 한켠에서 벌써 열 해 넘게 나오는 잡지 〈전라도닷컴〉이 있습니다. 이 잡지를 펴면 시골 할매 할배 삶이 시골말 그대로 흐릅니다. 시골 할매 할배가 읊는 말을 굳이 서울말로 바꾸지 않습니다. 곡성 할매라면 곡성말대로, 화순 할매라면 화순말로, 담양 할매라면 담양말로, 부안 할매라면 부안말대로 담더군요.


  시골 할매한테 한글을 가르칠 적에 서울말을 바탕으로 가르치기보다는 할머니마다 어릴 적에 듣고 자란 말씨를 가만가만 받아들여서 그 말씨를 할머니 스스로 그 시골말로, 삶말로, 오랜말로, 사랑이며 아픔이며 이야기가 서린 그 고장말로 나타내도록 북돋우면 한결 좋았으리라 생각해요.


  이 책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에는 빛깔펜으로 담은 그림만 담았는데, 할머니가 연필로 담은 그림이 있는지 궁금해요. 갖은 빛깔을 그야말로 곱게 살려서 빚는 그림이 참으로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연필로도 온갖 빛깔을 나타낼 수 있어요. 때로는 연필로 할머니 이녁 삶이며 눈길을 한결 수수하고 투박하지만 더욱 짙게 나타낼 수 있기도 합니다. 책을 덮으면서 자꾸자꾸 이 생각이 들어요. 시골 할매한테 시골말이 ‘자랑스럽다기보다 사랑스럽다’는 대목을 일깨워 주면 좋겠어요. 빛깔펜으로 빚는 그림도 고운데 ‘연필로 사각사각 찬찬히 빚는 그림도 사랑스럽다’는 대목을 넌지시 짚어 주면 좋겠어요. 시골말로 삶을 노래하고, 시골스러운 빛으로 하루를 나누는 새로운 책을 기다립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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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촛불 - 손석춘 칼럼집 철수와 영희를 위한 사회 읽기 시리즈 4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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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102


《흔들리는 촛불》

 손석춘

 철수와영희

 2019.10.24.



판결문 앞에 부끄럽지 않은가. 다시 정색을 하며 묻는다. 항소심까지 기다려야 했는가? 판결문 앞에서 결국 ‘사실이 밝혀졌다’고 정정보도를 냈어야 옳았는가.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는 사실을 … 기자들은 판결이 있고 나서야 인지할 수 있었단 말인가. (24쪽)


저 대통령들은 자살하는 사람들, 그 국민들에게 누구였을까요.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요. 대통령들은 한결같이 국민을 위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보통사람의 시대,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국민성공시대를 각각 부르댔지요. (39쪽)


언론이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독립할수록, 뉴스 생산구조가 민주적일수록, 그래서 민중이 의견을 자유롭게 표출하며 여론을 형성할수록 선거에서 보편적 복지를 공약하는 정당이 집권한다는 원칙을 도출해낼 수 있다. (71쪽)


현장 노동자와 공사 사이에 소통은 없었다. 중간에 외주업체가 있어서다. 현장의 두 사람은 경주 지진으로 지연된 고속열차가 그 시각에 지나간다는 통보를 받지 못했다. (89쪽)


단적으로 묻고 싶다. 왜 그들과 함께하지 않는가. 고 노무현 대통령 재직 때 ‘인사 폭’을 넓히지 못했다. 내가 아는 한, 성심을 다해 돕고자 한 이들이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도 적잖았다. (123쪽)



  한밤에 바라보는 별은 초롱초롱합니다. 별은 가만히 있지 않아요. 언제나 반짝입니다. 밤마다 별을 바라보다가 ‘초롱’이란 말을 문득 혀에 얹고 생각합니다. ‘초롱’은 촛불에서 비롯한 낱말입니다. 별을 볼 때뿐 아니라 초(촛불)를 볼 적에도 둘레를 밝히는 빛살을 느낄 수 있어요. 별은 온누리를 가르면서 퍼지는 빛줄기라면, 초는 둘레를 밝히는 빛줄기라 할 만합니다. 이 밝음, 이 환함은, 눈망울처럼 밝고 샘물처럼 맑은 기운으로 뻗어요. 별빛을 담고 촛불빛을 안는 마음이 된다면 어둠을 사르면서 곧고 곱게 나아가는 기운이 되지 싶습니다.


  《흔들리는 촛불》(손석춘, 철수와영희, 2019)은 흔들리되 흔들리지 않는 길을 이야기하려 합니다. 바른길보다 바르지 않은 길로 기우뚱했던 정치하고 사회하고 언론에 얽힌 이야기를 짚으려 합니다.


  글쓴님이 짚기도 합니다만, 신문이며 방송이며 돈에 맞추어 흘러온 자국이 참으로 깁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푼푼이 모아서 나누는 돈이 아닌, 몇몇 기업이나 기관(또는 정부)이 광고삯 이름으로 건네는 돈에 맞추어 흘러왔다고 할 만합니다. 신문·방송은 오래도록 짬짜미로 움직였고, 기업하고 기관(또는 정부)은 넉넉히 건넨 광고삯 도움을 톡톡히 입으면서 썩 바르지 않은 길을 나란히 걸은 셈이로구나 싶어요.


  광고가 나쁠 일도, 신문이며 방송이 나쁠 까닭도, 기업하고 기관(또는 정부)가 나쁠 길도 없습니다. 다만, 뒷길이 아닌 앞길을 갈 노릇입니다. 뒷자리 짬짜미가 아닌 앞자리 어깨동무를 할 일입니다. 닫힌 사슬이 아닌 열린 마당이 되도록 슬기를 모을 노릇입니다. 반듯하게 일하는 사람이 손가락질을 받을 까닭이 없어요. 바르게 사랑하는 사람이 나쁠 까닭도 없어요. 아름답고 알찬 일꾼은 어디에나 있으나, 이 아름답고 알찬 일꾼이며 이웃을 바라보지 않거나 품지 않는 신문이며 방송이며 기업이며 기관으로 가기만 한다면, 이때에 촛불은 다시 밀물결이 되겠지요. 어쩌면 촛불물결이 다시 일지 않아도 그들 스스로 주저앉을 수 있을 테고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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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명과 취향 - 철학의 현장에서 기록한 불화의 목소리
김영건 지음 / 최측의농간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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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99


《변명과 취향》

 김영건 

 최측의농간

 2019.9.5.



우리가 원하는 것은 과거의 유산이 아니며, 답답하고 추상적인 논리 풀이나 말장난도 아니다. (17쪽)


나는 우리의 철학을 공부하고 싶다. 나는 외국어가 주인이 되는 그런 철학이 아니라, 우리말로 된 철학을 하고 싶다. (23쪽)


이런 멋부리는 문장이 의미를 제대로 전달해 준다면 그것은 괜찮다. 그러나 언제나 이런 종류의 문장은 우리 자유를 몽롱하고 멍청하게 만든다. (80쪽)


도道라는 한자어는 심오한 철학적 의미를 획득하는 데 반하여 도道의 우리말 표현인 ‘길’은 심오한 의미가 없는 사소한 일상어로서 낮게 취급된다. 그냥 ‘생각’이라고 표현하면 될 것을 ‘사고思考’라는 한자어로 표현한다. ‘나’라고 표현하면 될 것을 ‘자아自我’라고 표현한다. (189쪽)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한다. 마찬가지로 학문적으로 자기 이야기를 해야 한다. (354쪽)



  한국에서 가르치거나 배우는 역사를 살피면, 한국은 꽤 옛날부터 일본에 이것저것 이어주거나 물려주거나 알려주곤 했다고 합니다. 일본은 가장 가까이에 한국이 있는 터라 으레 한국한테서 얻거나 받거나 배우는 살림이었다고 해요. 요새야 비행기나 인터넷이 있으니 나라하고 나라 사이가 훨씬 가깝다지만, 예전에는 아니었겠지요. 그래서 일본은 옛날부터 한국말을 배우는 사람이 무척 많았고, 한국말을 일본말로 옮기는 일을 참으로 오랫동안 했답니다.


  오늘날은 어떠할까요? 오늘날 일본은 한국 문학이나 문화나 과학을 얼마나 받아들이거나 배우는 길일까요? 어쩌면 오늘날 일본은 한국한테서 배우는 길이 거의 없다시피 하지 않나요? 거꾸로 오늘날 한국은 거의 일본 것을 옮기거나 배우는 길이 되지 않았을까요?


  책만 놓고 보아도 일본 문학책이며 그림책이며 만화책이며 인문책이며 과학책이며 …… 갖은 책을 엄청나게 한국말로 옮깁니다. 이제는 한국이 일본한테서 배우는 때라고 할까요? 밉거나 못된 짓을 많이 한 옆나라인 일본이라지만, 한국은 한국 나름대로 더 나아가거나 뻗는 길을 제대로 갈고닦지 못했다고 여겨야지 싶어요.


  《변명과 취향》(김영건, 최측의농간, 2019)을 읽으며 ‘철학자가 늘 부대껴야 하는 근심걱정’을 낱낱이 읽습니다. 틀림없이 겉으로 보기에는 ‘한국말’을 쓴다고 하지만, 무늬로만 한글이기 일쑤라지요. 요새는 한자말을 한자로 새까맣게 쓰는 사람이 없다시피 합니다. 한자말이건 영어이건 그냥 한글로 적습니다. 그런데 철학이란 자리에서 본다면 ‘무늬만 한글’로는 깊거나 넓게 파고들기 어려워요. 한자나 한문이나 영어나 라틴말은 바로 이 나라 한국이라는 터전에 뿌리를 내리고서 태어난 말이 아니니까요.


  한자말이나 영어를 쓰기에 철학을 못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한자나 한문이나 영어는 한국에서 태어난 글이나 말이 아니란 뜻입니다. 우리는 ‘땅’이란 낱말을 종이에 적거나 마음에 띄우면서 이 말이 태어난 깊이하고 너비를 헤아릴 수 있어요. 그러나 ‘地’나 ‘earth·ground’ 같은 낱말을 코앞에 둘 적에는 이 한자나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그곳 사람들이 닦아 놓은 깊이하고 너비를 그냥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슬기를 가꾸지 못하기 마련입니다.


  철학하는 글쓴님은 책이름 《변명과 취향》으로 여러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아무래도 핑계(변명)를 댈밖에 없는 일이 많습니다. 여러모로 좋아하기(취향)에 따라 다 다를 수밖에 없기도 합니다. 핑계를 대면서 그 길을 가고, 좋아한다면서 끊지 못한다지요.


  더 돌아보면 ‘철학’이란 이름도 한국사람 스스로 지어서 쓰는 말이 아닙니다. 우리 스스로 ‘생각·셈·슬기·헤아림·살핌·봄·여김’ 같은 낱말로 삶을 읽는 길을 안 찾으면서 그냥그냥 쓰는 한자말 이름입니다. ‘철학’ 같은 낱말은 깊거나 넓은 듯 여기면서도 막상 한국 철학자 가운데 ‘생각·셈·슬기·헤아림·살핌·봄·여김’이 어떻게 태어난 말이며, 이 말마다 서린 넋하고 숨결이 얼마나 깊거나 너른가를 따지거나 짚거나 찾아내거나 캐내거나 밝히거나 알아보는 사람은 없다시피 해요.


  여기에서 살아가려고 생각을 합니다. 새롭게 키우려고 생각을 합니다. 사랑으로 살림을 짓고 싶기에 생각을 합니다. 이 생각길을 걷는 학자도, 수수한 이웃도, 이제는 우리 두 손으로 가꾸면서 빛내는 길로 접어들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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