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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
고은우 외 지음, 따돌림사회연구모임 기획 / 양철북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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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폭력을 부추기고, 폭력에 젖어 있는 나라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7] 《이 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



 지난주 토요일 낮, 대안교육 이야기책을 펴내는 민들레 출판사에서 강의를 하나 맡아 하기로 해서 전철을 타고 서울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혼자 갈까 하다가 옆지기하고 아기도 함께 갑니다. 인천 맨 끄트머리 전철역에서 타니, 처음 길을 나설 때만큼은 조금은 수월합니다. 세 사람이 나란히 자리에 앉을 수 있으니까요. 잠깐조차 쉬지 않고 이리저리 움직이고 서며 앉으며 노는 아기를 달래며 복닥이고 있는데, 조금 늙은 아저씨 한 사람이 옆지기보고 ‘비키’라면서 당신 아주머니를 앉히려 합니다. 어처구니가 없어 멀거니 쳐다보다가 “앉으시려면 이쪽에 앉으셔요.” 하고 제 자리에서 일어섭니다. 그때 바로 옆에 다른 자리가 납니다. 아주머니는 그리 앉습니다. 그지없이 어처구니없는 노릇인데, 드물게 이런 일을 겪습니다. 옆지기한테 ‘아기를 무릎에 앉히고 그 자리를 당신한테 달라’는 어르신이 있기도 합니다만, 이날은 ‘머리를 짧게 깎은 옆지기’를 어린 학생쯤으로 보며 얕잡았기 때문입니다. 옆지기는 올해로 나이가 서른이지만 얼굴로는 퍽 어리게 보이는지(제가 보기엔 나이 서른이면 생기는 주름이 퍽 많다고 느끼는데) 애 엄마한테 막 구는 어르신이 때때로 있습니다. 옆지기가 아이하고 경주에 있는 생채식수련원에 들어갔다가 돌아올 때 기차에서 겪었다는데, 어느 할머니가 옆지기를 보며 ‘고등학생이 사고 치고(?) 애 끌어안고 다니는 줄’ 엉뚱하게 생각했다더군요.

 그런데, 옆지기가 서른이 아닌 열여덟 살 고등학생이라 하더라도, 버젓이 앉아 있는 사람한테 자리를 내놓으라고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앉은 자리는 ‘장애인노약자영유아보호자 자리’라는 데가 아니었으니까요. 초등학생이건 중학생이건 다리가 아프면 앉을 권리가 있습니다. 또한, 아무리 어르신이라 하더라도 자리에 앉고 싶다 할 때에는 ‘고운 말’로 “여보게, 내가 많이 힘드니 자리를 내어줄 수 있나?” 하고 물어야 합니다. 다짜고짜 비키라고 하는 일은 폭력입니다.

 그리고, 아무리 젊은 애 엄마라 할지라도, 애 엄마한테 아이를 무릎에 앉히고 자리를 비키라는 일은 어르신으로서 할 노릇이 아닙니다. 아이는 ‘작은 짐가방’이 아닙니다. 아이는 어른하고 똑같은 목숨입니다. 아이들이 몸피가 작다 하여도 어른하고 마찬가지로 한 자리를 차지하고 앉을 권리가 있습니다. 아이들이 몸피가 작기에 아이 둘이 어른 한 사람 앉는 자리에 나란히 앉을 수 있겠지요. 그렇지만 이 자리에 몸피가 큰 어른이 찡겨 들어오면 모두한테 고달픕니다. 아직 무릎이며 뼈며 관절이며 단단히 여물지 않은 아이보고 서라 하고 어른이 앉으려 하는 일 또한 올바르지 않기도 합니다. 힘이 여린 아이한테 힘이 있는 어른이 참으라고 윽박지르는 일이란 더할 나위 없는 폭력입니다.


.. 작년 동균이 담임은 동균이가 친구 사귀는 방법을 모르고 이기적으로 변해서 걱정이라고 했다. 나 역시 걱정이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같이 놀려고 하지 않고 말도 걸지 않는데 동균이가 친구 사귀는 방법을 어떻게 배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  (25쪽)


 어쩌는 수 없이 요사이 한 주에 닷새는 꼬박꼬박 아침저녁으로 지옥철을 탑니다. 이렇게 지옥철을 타면서 숱한 ‘서민’을 부대낍니다. 이들 서민은 지하철에서 서로를 헤아리는 마음결이 퍽 옅습니다. 서로를 헤아리는 마음결이 따스한 분이 틀림없이 있지만, ‘아무리 홍보를 하고 아무리 말을 많이 해도’ 전철 걸상에서 다리 쩍 벌리는 남자 젊은이와 어르신이 참으로 많습니다. 이들 남자 젊은이와 어르신은 당신들 매무새를 고칠 생각이 하나도 보이지 않습니다. 어르신들은 어르신들대로 어릴 적부터 남자를 섬기고 높이는 터전에서 살아오면서 익숙합니다. 젊은이들은 젊은이들대로 오늘날에도 남자를 드높이고 모시는 터전에서 지내 왔기에 자연스럽습니다.

 제아무리 값비싸구려 양복을 차려입고 있어도 마음씨가 착하거나 다소곳하지 못한 사람이 퍽 많습니다. 이런 전철, 아니 지옥철을 날마다 타고다니려니 제 마음이 나날이 거칠어지고 메말라 갑니다. 제가 착한 사람이 아니라 하더라도, 제가 모진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런 지옥철에서 시달리는 동안 착한 마음을 이어나가기란 꿈 같은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이리하여, 서로서로 먼저 타고 먼저 내리고 먼저 쑤시고 들어가며 자리를 차지하면 더 널찍하게 즐기려고 어깨를 펴고 다리를 벌리고 신문을 쫙 펼치는 일은 아무렇지도 않은 일 같다고 느낍니다. 따로 학교에서 가르치지 않았어도, 따로 집에서 일러 주지 않았어도, 모두들 저절로 시나브로 배우고 깨닫습니다. 알게 모르게 서로한테 또다른 폭력을 휘두르는 ‘얼굴과 이름 없는 깡패’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 준혁이도 어린 아이일 뿐이다. 아무리 거칠고 못되게 굴어도 아이는 아이인 것이다 … 할 일이 차고 넘치는 교사들은 당장 눈에 보이는 문제들과 씨름하느라 다른 것은 보지 못한다. 따돌림의 뿌리에 조금도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다. 갑갑하고 불행한 일이다. 갈수록 아이들은 다른 사람의 아픔에 공감하는 능력이 떨어지고 있다. 아니, 점점 기회를 얻지 못하고 있다. 내 아픔을 느끼지 못해서 다른 사람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게 될 때 과연 어떤 일이 벌어질까? ..  (54, 137쪽)


 어제와 오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자연일기》라는 그림일기 책을 아침길에 읽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이란 꾸밈말이 좀 낯간지럽지 않느냐 싶고, 책을 읽으며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까지는 아니라는 느낌이지만, 꽤 사랑스럽고 살가운 자연일기를 담고 있습니다. 넘겨읽기에는 좋은 판짜임이 아니라 눈과 목이 좀 아픈데, 그래도 아침길을 즐겁게 열어 준다고 느낍니다.

 그렇지만, 어제와 오늘 아침 이 책을 읽으며 안타깝기도 하고 슬프기도 합니다. ‘이 도시에서 이런 자연일기를 읽는 뜻이 있을까?’ ‘모시나비이고 네발나비이고 긴꼬리나비이고 호랑나비이고 노랑나비이고 흰나비이고 하나 찾아볼 길이 없는 서울로 일하러 오가는 주제에 이런 책을 읽어서 내 마음이 얼마나 살찔 수 있을까?’ ‘내 오른쪽에 선 아가씨가 읽는 처세책을 읽어야 하지 않나? 내 왼쪽에 선 젊은 사내가 읽는 영어책을 보아야 하지 않나?’ ‘부질없는 지식조각만 잔뜩 집어넣는 꼴사나운 책읽기가 아닌가?’ ‘그예 겉치레 겉발림에 지나지 않으며 겉맛만 부리는 짓이 아닌가?’

 광화문 세종로이든 새문안길이든 볼거리가 하나도 없다고 느끼며 걷습니다. 앞사람들 담배연기를 쐬기 싫어 더 빨리 걷습니다. 잰걸음을 놀리며 담배연기 풀풀 피우는 양복쟁이는 때려잡고 싶습니다. 일본에서 놀러온 손님이 어느 비싸구려 밥집으로 줄지어 들어갑니다. 저 일본 손님은 저 밥집에서 먹은 밥으로 ‘한국 밥은 이렇구나’ 하고 생각하겠지요. 물결치는 자동차가 끊이지 않습니다. 손에 들고 있던 책을 펼칩니다. 책을 읽으면서 걷기로 합니다. 저로서는 서울에서 눈둘 데가 없어 아무것도 보지 말고, 땅이며 건물이며 사람이며 차며 보지 말자고 생각합니다. 그저 책에다 눈을 처박자고 생각합니다.

 몇 분 걸어 한글회관에 닿고, 5층까지 계단을 타고 오르며 책을 내처 읽습니다. 책상에 가방을 내려놓고 셈틀을 켭니다. 오늘치 할 일을 돌아보며 숱한 공공기관 누리집을 드나듭니다. 중앙부처이든 지자체이든 옳고 바르게 말글을 다루며 누리집을 건사하는 곳은 없습니다. 이들 공무원은 나라에서 주는 돈을 받고 공공기관 누리집을 마련하고 있을 텐데, 더욱이 이들 공무원은 하나같이 ‘좋다는 대학교’를 제법 높은 성적을 거두며 나왔을 텐데, 스스로 말글을 알맞고 싱그럽게 간수할 줄을 모릅니다.


.. “어떻게요? 저 못할 것 같아요. 휴…….” “아니야. 해야 해. 개새끼라고 해. 다른 욕도 필요없어. 아이들은 쉴 틈 없이 욕을 하면서 더 센 척을 하잖아. 그런데 이 선생이 아무리 큰 소리로 혼낸다고 해서 먹히겠어? 아무런 위험도 느끼지 않을 거야. 그러면 그럴수록 우습게 보이겠지.” … 개새끼 소동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준혁이가 몰라보게 순한 양이 되었다. 놀라운 변화였다. 교실에는 평화가 찾아들었다. 수업 시간에도 아이들은 조용히 집중했다. 이 년 만에 평범한 일삼을 맛보고 있었다 … 세화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힘과 권위로 아이들을 제압해서 얻은 평화가 과연 올바른 것이었을까? 우리 반은 진정으로 폭력으로부터 벗어났던 것일까? ..  (66, 72, 78쪽)


 지지난달에 다 읽은 《이 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라는 책이 떠오릅니다. 책이름에도 나오는 ‘이 선생’은 학교에서 아이들이 서로서로 주먹다짐을 할 뿐 아니라 따돌림을 아주 밥먹듯이 하고 있다면서 골머리를 앓습니다. 모르기는 몰라도, 이 나라 초중고등학교 어느 ‘이 선생’들이든 이 같은 일로 골머리를 앓고 있으리라 봅니다. 어쩌면 골머리를 앓지 않고 선생들 스스로 주먹다짐과 따돌림을 스스로 나서서 펼쳐 보이고 있는지 모르고요.

 학교에서 수많은 ‘이 선생’들은 교과서에 적힌 대로, 또는 스스로 아는 대로 아이들한테 서로 사랑하고 아끼고 믿고 돕고 어깨동무하면서 지내라고 가르치리라 봅니다. 몸소 사랑과 믿음을 보여주기도 하리라 봅니다. 집에서는 어버이들이 서로 착하게 놀라고 이야기할 테며, 마을에서 어르신들은 아이들한테 서로서로 잘 지내라고 이야기할 테지요.

 그런데 이 나라 이 삶터 이 학교 이 회사 이곳저곳에서 주먹다짐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따돌림이 사라지지 않습니다. 이런 모습으로든 저런 모습으로든 끝없이 불거집니다. 온갖 모습 온갖 크기로 주먹다짐과 따돌림이 판을 칩니다. 밥그릇 지키기와 밥그릇 빼앗기가 춤을 추고, 헐뜯기와 비아냥거리기가 넘실거립니다. 하느님을 믿든 부처님을 섬기든 예배당에서만 노래하고 눈물짓는 사랑으로 그치고, 예배당 바깥에서는 서로를 사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학교폭력은 다스릴 수 있을까요? 학교폭력은 다스려야만 할까요? 학교폭력은 왜 터져나올까요? 학교폭력은 어떻게 털어낼 수 있을까요? 아이들이 학교에 들기 앞서도 폭력에 물들어 있지는 않나요? 아이들한테 폭력 기운이 없어도 학교 바깥에서는 언제나 폭력에 둘러싸여 있지 않나요? 아이들이 잘 배워서 학교에서 폭력을 씻어냈다 할지라도 학교 밖으로 나오거나 사회로 나오면 또다시 폭력에 젖어들어야 하지는 않는지요?


.. “짐작했는지 모르겠지만 중간고사에서 우리 반이 1등을 했다.” “와!” “깜지 덕인 줄이나 알아.” “우…….” 강 선생은 3월부터 깜지를 시키더니 끈질기게 밀고 나갔다. 아이들과 강 선생 중 누가 더 센가 내기하는 것 같다. 고래 심줄이라는 표현이 딱 맞을 것 같다. 강 선생은 목표를 정하면 뚝심 있게 밀고 나가는 사람이다. 강 선생의 채찍질 때문인지 아이들 모두 중간고사는 그럭저럭 봤다 ..  (198쪽)


 《이 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는 학교에서 몸소 학교폭력을 부대껴야 하는 선생님들 눈길과 눈높이에 맞추어 이런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고, 이 모습을 가다듬으려는 몸짓을 있는 그대로 드러냅니다. 참 괜찮구나 하고 느끼며 책장을 처음 넘겼는데, 뒤쪽으로 갈수록 글머리가 어영부영 흐트러집니다. 한 사람이 아닌 여러 사람이 쓴 탓이라 하겠으나, 아무래도 학교폭력이란 똑부러지게 말하거나 잡아채어 뜯어고칠 수 없는 탓이겠지요. 학교에서 주먹다짐과 따돌림이 사라지게 한대서 폭력이 사라질 일이란 없을 테고요. 우리 마음에 폭력이 남아 있고 따돌림이 남아 있는데 학교폭력이 자취를 감출까요? 우리 스스로 ‘더 높은 대학교에 우리 아이만큼은 들어가야 해!’ 같은 생각이 깃들어 있는데 학교폭력을 뿌리뽑을 수 있을까요? 우리가 하는 일은 ‘남들은 몰라도 나 혼자 정규직이면 되고, 내가 비정규직이더라도 이주노동자 아픈 일까지 마음쓸 겨를이 없단 말이야!’ 같은 생각이 또아리를 틀고 있는데 따돌림을 없앨 수 있을까요?

 국가보안법을 없애지 못한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국가보안법 폐해를 고스란히 물려줍니다. 원자력발전소와 핵폐기장 문제를 풀지 않을 뿐더러 더 많은 전기를 더 펑펑 쓰고 있는 어버이는 아이들한테 망가진 이 나라 삶터와 자연을 남김없이 물려줍니다. 아이들한테 아파트와 자가용만 물려주려는 어버이는 아이들끼리 서로 치고박고 괴롭히고 들볶는 배움터 골칫거리를 언제까지나 이어가게 합니다.

 세상은 평화가 아닌데 학교만 평화로울 수 없습니다. 세상은 온통 폭력과 따돌림이 판치는데 학교만 조용할 수 없습니다. 세상은 돈타령이요 무시무시한 싸움터인데 학교만 얌전하고 다소곳하며 사이좋은 어깨동무가 뿌리내릴 수 없습니다. 우리 어른들이 보내는 하루하루가 우리 아이들이 다니는 학교에서 늘 되풀이됩니다. (4342.10.29.나무.ㅎㄲㅅㄱ)


 ┌ 《이 선생의 학교폭력 평정기》(양철북 펴냄,2009)
 ├ 고은우, 김경욱, 윤수연, 이소운 씀
 └ 책값 : 12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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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칸타빌레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 7
윤진성 지음 / 텍스트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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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랗고 작은 책에 담긴 한 사람 삶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5] 윤진성, 《다시, 칸타빌레》



 새벽 한 시 반에 잠에서 깨었지만, 이때 일어나서 밀린 글을 쓰고 기저귀 빨래를 하면 한 번 잠들어야 하고, 그러다가는 아침에 못 일어날 듯해서 다시 잠듭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아기 기저귀를 갈고 밀린 글을 씁니다. 그러나 글은 두 꼭지 겨우 다듬다가 그치고, 이따가 한글학회에 일을 나가서 해야 할 일을 붙잡습니다. 글을 쓸 만큼 마음이 느긋하거나 풀어지지 못했으며, 곧 집을 나서야 한다는 생각에 괜히 바쁩니다. 뭣도 하고 뭣도 챙기고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새벽 여섯 시 반쯤까지 학회 일을 보다가 퍼뜩 정신을 차립니다. ‘이런, 아까 머리를 감았어야 다 마르는데.’ 오늘은 머리를 안 감기로 하고 빨래를 하자고 생각합니다. 어제 아기하고 옆지기가 씻고 남은 물로 기저귀 여덟 장을 빨고 한 장은 삶는 빨래를 담는 통으로 옮겨 놓습니다. 그제부터 담가 놓고 못 빨고 있던 포대기도 빱니다. 포대기는 물이 떨어지니 씻는방 빨래줄에 널어 놓습니다. 기지개를 켜며 마루로 나오니 아침 일곱 시 이십이 분입니다. 빨래하는 데에 오십 분쯤 걸렸습니다. ‘늦었구나.’ 서두르다가 또 뭔가 놓치고 갈까 싶어 느긋하게 마음을 추스르며 가방을 꾸리고 옷을 갈아입습니다. 잠에서 깨어나지 못하는 두 사람한테는 먼발치로 인사를 하고 집을 나섭니다. 말리려고 어젯밤에 펼쳐 놓은 우산을 접어서 문간에 들여놓습니다. 대동문구상가 앞까지 달려갑니다. 이곳부터는 걷습니다. 그냥 달려도 되지만, 고등학생 아이들이 어기적어기적 걸어서 올라가는 이 길을 거슬러 달리기보다는 여느 걸음으로 마주 걸으며 아이들 차림새를 눈여겨봅니다. 지난해에 일민미술관에서 ‘청소년’을 사진감으로 삼는 사진찍기 일을 맡은 뒤로 청소년 아이들하고 스칠 때에는 잠깐 스칠지라도 곰곰이 살피거나 눈여겨보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전철역으로 들어서니 오늘은 ‘차 없는 날 행사’를 한다며 전철삯을 안 받는답니다. 처음에는 표 끊는 데에 다 종이로 뒤집어씌워 놓았기에 망가져서 이러나 하고 놀랐는데, 무슨 알림판이라도 세워 놓든지 알려주는 일꾼(또는 공익)이라도 나와 있든지 해야지, 이렇게 하면 어떡합니까. 부랴부랴 전철 타는 곳으로 올라갑니다. 용산 가는 빠른전철이 문을 닫고 막 떠납니다. ‘이런, 된장. 표 끊는 자리에 저거 없었으면 곧바로 올라와서 탔을 텐데. 1500원 아껴 준다며 차를 놓치게 했네.’

 서울처럼 전철이 자주 있지 않은 인천이니, 앞으로 칠 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서울은 출퇴근 때에는 전철이 바로바로 있지만 인천은 안 그렇습니다. 그나마 출퇴근 때이니 칠 분만 기다리지, 출퇴근 때를 넘기면 십오 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씁쓸하게 서 있는데 김밥 파는 아주머니가 보입니다. ‘도시락도 못 싸고 나왔는데 김밥을 사라는 뜻인가?’ 마음을 느긋하게 먹자고 다짐합니다.

 코앞에서 전철을 놓쳤으니, 칠 분 뒤에 들어오는 전철은 자리를 얻어서 앉습니다. ‘뭐, 이렇게 자리를 얻어도 나쁘지는 않군. 그러나 일터에는 조금 늦겠네.’ 인천에서 서울 가는 지옥철은 다른 날과 다름없이 어마어마하게 손님들이 들어차고 저마다 밀리고 밀고 밟히고 밟으며 이런저런 끅끅 소리가 들립니다. 저는 자리에 앉았으나 사람들은 서로 밀고 밀리며 제 무릎 위까지 앞사람 몸뚱이가 포개질랑 말랑입니다. 서 있어도 책을 읽기 어렵지만 앉아 있어도 책을 읽기 어렵습니다. 그저 눈 딱 감고 잠들기만 해야 합니다.

 몸은 고단하고 잠은 모자랍니다. 그러나 겨우 몸을 살짝 비틀며 책장을 펼치고 한 줄이라도 더 읽으려고 악을 씁니다. 그야말로 악과 깡으로 ‘지옥철 책읽기’를 이어갑니다.

 역곡을 지나 구로를 거쳐 신도림에 닿으니 비로소 숨통을 틉니다. 어제는 신도림역에서 전철이 망가져 이십 분 가까이 오징어떡이 된 채로 멈추어 있어서 죽는 줄 알았는데, 오늘은 다른 말썽이 없습니다. 늘 이렇게 말썽이 없어야 하지만, 출퇴근길에 곧잘 전철이 망가져서 점검하고 고친다고 하기 때문에, 이렇게 다른 말썽이 없는 날은 한숨을 돌리며 ‘오늘은 잘 지나갔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 내 기억에 H를 처음 본 것은 그날이었으나 나중에 듣고 보니 그는 나를 입학식이 있기 전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봤다고 했다. 1박 2일로 진행된 오리엔테이션은 나에게 무척 지루한 것이었다. 모두들 술에 취해 못 일어나고 있는 이른 아침에 혼자 공터로 나가 그네를 탔는데, 그네 타는 나를 멀리서 지켜봤다고 했다 ..  (8쪽)
 


(아기가 아빠도 제대로 못 보고 고생이 많다! -_-;;;; 옆에서 엄마가 참 힘들구나!)


 지난주까지는 신길역에서 5호선으로 갈아타서 서대문역에서 내렸습니다. 어제부터는 용산역까지 가서 1호선으로 갈아타 시청역에서 내립니다. 아무래도 신길역 기나긴 길을 걷기보다는 용산역에서 구름다리 건너 시청역부터 걷는 길이 제 몸이나 마음에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리라 생각하고 있습니다.

 용산부터 시청까지는 거리는 짧은데 사람들 붐비기는 여의도를 지나는 5호선하고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그래도 ‘이만하면 어디냐?’ 싶고, 제법 널널하기에 퍽 느긋하게 책을 펼칩니다. 지난 7월 29일에 처음 손에 쥔 《다시, 칸타빌레》라고 하는 책을 서울역을 지날 무렵 다 읽고 덮습니다. 야금야금 맛보듯 읽다가 갑작스레 서울로 일하러 나오면서 한동안 못 읽고 있었는데, 오늘 비로소 마무리를 짓습니다. ‘그래, 오늘도 한 권 아침에 다 읽었나? 아침저녁으로 고달프지만, 그런 가운데 아침저녁으로 책을 한 권씩 읽어치울(?) 수 있어서 기쁘지?’

 사람들이 붐벼 몸뚱이로는 기지개를 못 켜고 마음으로만 기지개를 켭니다. 시청역에서 내리니 다시금 숱한 사람들이 우루루 몰리고, 밖으로 나와도 사람물결은 출렁입니다. 조선일보사 앞을 지나고 면세점 옆으로 지나다가 안쪽으로 틉니다. 늘 그늘 자리로만 걸었는데, 오늘은 볕을 쬐는 뒷길로 걷습니다. 뒷길에는 사람이 뜸하고 조용합니다. ‘광화문 한복판에 이런 뒷길이 다 있네?’ 그러나 담배 태우는 사람이 하나 지나가자 확 담배 냄새가 끼치며 재채기가 납니다. ‘제기랄 양복쟁이들! 담배 먹고 얼른 하늘나라로 떠나 주시지!’ 다시 큰길로 나오니 건널목 불이 바뀌어 뜀박질로 건넙니다. 1층에 앉아 있는 지킴이 아저씨한테 인사를 하고 계단을 타고 5층으로 올라갑니다. 9시 3분. 3분 늦었습니다. 가방을 내리고 물병에 물을 뜨고 낯과 손을 씻은 다음 자리에 앉습니다. 오늘도 눈 아프고 머리 지끈거리는 일을 엽니다.


.. 그 너구리 인형은 먼지를 뒤집어쓴 채 아직도 나와 함께 있다. 그러나 지금은 너구리 인형에 대한 기억보다 그 인형을 사 줄 때 자랑스럽고 뿌듯해 하던 아빠가 더 생각난다. 아빠는 백화점에서 인형을 사 줄 수 있는 처지가 된 자신이 매우 자랑스러웠던 것 같다 ..  (49쪽)


 낮밥 먹을 무렵에 마음을 쉬고 몸을 다스립니다. 숨을 한번 크게 쉬고, 텅 빈 일터에서 신문도 슬쩍 들춥니다. 정운찬 님 소식을 신문사마다 어떻게 기사로 다루는지 넘겨보다가 아침에 챙겨 온 책을 살짝 펼쳐 봅니다. 이달까지는 마무리지어 넘겨야 하는 책 원고를 살핍니다. ‘나는 이렇게 일을 한다며 나와 있지만, 옆지기는 아기한테 꼭 붙들려 일이고 놀이고 뭐고 아무것도 못할 테니 얼마나 갑갑할까?’ 작은 학회나 일터에서는 ‘아이 돌보는 방’을 따로 마련할 수 없다지만, 아이가 어버이 있는 일터에 함께 나와서 어울리거나 쉴 수 있도록 제도가 마련되어 있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떨치지 못합니다. 그리고, 어떤 어른이든, 집하고 식구가 가까운 곳에 있는 일터를 나가거나 일터에서 ‘일터와 가까운 데에 있는 집’을 얻어 주어야 하지 않을까 하고 생각합니다. ‘참, 꿈 같은 꿈이나 꾸고 있군.’


.. 천천히 걸으며 물이 내는 소리를 듣는다. 나뭇가지나 이파리들이 내는 소리를 듣는다. 내 걸음이 내는 소리를 듣는다 … 비닐하우스에 비 떨어지는 소리가 그렇게 좋았다. 어떤 음악도 필요없었다. 노동이 주는 침묵과 비가 주는 음악으로 충만한 하루였다 … 좋은 곳에서 좋은 사람들과 좋은 노래를 들으니 내가 절로 좋은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좋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용기도 생겼다 ..  (97, 166, 170쪽)


 아침에 다 읽은 《다시, 칸타빌레》를 다시 들춥니다. 글쓴이 동무가 제주섬에서 귤농사를 짓고 있는데, 제주섬 동무네 어머님이 글쓴이한테 복을 빌어 주며 “조만간 큰돈이 들어올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며, 글쓴이는 “혹시 지금 쓰고 있는 이 책이 아주 잘 팔리는 건 아닐까 자판을 두드리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간다(171쪽)”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지만 안타깝게도, 《다시, 칸타빌레》는 영 안 팔리는 줄 알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글쓴이 스스로도 생각했겠지만, 곧바로 이렇게 말을 돌립니다. “나는 초 사진을 보고 마음이 든든했다. 큰돈이 들어온다는 말 때문이 아니라 누군가 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다는 것 때문에, 누군가 나를 생각해 준다는 것 때문에 넓고 평평한 곳에 편안하게 앉아 있는 기분을 느꼈다(171쪽).”

 연극을 하며 틈틈이 글을 쓰는 윤진성 님은 이 책 《다시, 칸타빌레》에서 연극과 같지만 연극하고 다른 당신 삶이 어떠했는가를 조곤조곤 풀어 놓았습니다. 웃음도 풀어 놓고 눈물도 풀어 놓았습니다. 기쁨도 풀어 놓고 슬픔도 풀어 놓았습니다. 무엇보다도 당신이 품은 꿈을 풀어 놓았고, 당신이 접은 꿈을 풀어 놓았습니다. 그러면서 당신이 새로 품거나 끝까지 껴안을 꿈을 들려줍니다.


.. “머뭇거린다면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이 아닐 수도 있어요. 한 번 더 생각해 보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 “윤진성이라는 사람이 타인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는 별로 신경 쓰지 않아요. 윤진성이 맡은 배역이 관객들에게 어떻게 보이느냐를 신경 쓰죠.” ..  (192∼193쪽)


 《다시, 칸타빌레》는 ‘책이야기만 하는 잡지’ 〈텍스트〉를 펴내는 ‘텍스트’ 출판사에서 “우리 시대 젊은 만인보”라는 이름을 붙이며 펴낸 일곱째 책입니다. 이 책에 앞서 《신호등 건너기 게임》(신민영), 《그늘 속을 걷다》(김담), 《키보드워리어 전투일지 2000-2009》(한윤형), 《멜로드라마 파이터》(김남훈), 《출발, 3%》(김종철), 《붕어빵과 개구멍》(서영교)까지 여섯 권이 나왔습니다. 다음달쯤 ‘기선, 배만호, 김민하, 황승미’ 네 분 이야기가 잇달아 나오지 않으랴 싶습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젊은 사람들(스물∼마흔 사이) 삶과 생각과 말을 돌아보는 책묶음으로, 앞으로 100권이나 200권, 또는 300권이나 400권까지 이러한 이야기가 우리 앞에 선보이지 않으랴 싶습니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더 젊거나 어린’ 사람들한테, ‘젊은 또는 늙어 가는 사람’으로서 ‘남들과 똑같이 안 살’고 ‘내 깜냥껏 내 길을 내 마음’에 따라 걸어가는 사람들 목소리를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껍데기 노란 자그마한 책입니다. 원고지로 치면 700쪽쯤? 책 쪽수는 200쪽 남짓? 책값은 9000원 안팎(아직까지는 9000원이지만 종이값이 오르면 오를 수 있겠지요)?

 우리 세상에 크게 이름이 나 있지 않은 수수한 사람들 이야기책이라, 한비야 님 책처럼 잘 팔릴 리 없고, 공지영 님 책처럼 수많은 기자들이 소개해 줄 리 없으며, 전여옥 님 책처럼 숱한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 리 없습니다. 다만, 때때로 술동무가 되어 주는 이야기벗이 되어 주는 책이며, 길에서 뜻하지 않게 만나 반가운 옛동무 같은 책이요, 나 스스로 조용히 좋아하면서 품에 꼬옥 안을 수 있는 책입니다.

 책은 꼭 많은 사람이 사서 읽어 주어야 하지 않습니다. (4342.9.22.불.ㅎㄲㅅㄱ)


 ┌ 《다시 칸타빌레》(윤진성 씀,텍스트 펴냄/2009)
 └ 책값 : 9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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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토르 하라 -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
조안 하라 지음, 차미례 옮김 / 삼천리 / 2008년 9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119 ― 고단한 삶이라 아름답고, 끝낼 수 없는 노래
 : 조안 하라,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


- 책이름 :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
- 글 : 조안 하라
- 옮긴이 : 차미례
- 펴낸곳 : 삼천리 (2008.9.11.)
- 책값 : 18000원



 (1) 내가 발을 딛는 이곳에서


 5층짜리 한글회관은 1960년대에 온나라 사람들이 푼푼이 그러모은 돈으로 지은 집입니다. 한글학회는 이 집 5층에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1970년대 첫머리에 지은 이 집은 그무렵 얼마나 높은 집이었는지 모르겠으나, 2010년을 앞둔 이즈음, 광화문 새문안길에서 한글회관은 아주 조그마할 뿐 아니라, 이웃 높다란 집에 막히거나 가려 잘 안 보입니다. 그예 파묻혀 있는 집이라 할 텐데, 어쩌면 이런 집은 허물고 높다랗게 다시 지어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지 않으랴 싶기도 합니다.

 한글회관이 선 옆으로는 새집 하나 올릴 만한 땅이 비어 있습니다. 얼마나 오래 비어 있었는지 모르는데, 빈땅 둘레로 높은 울타리를 쳐 놓아, 안쪽이 어떠한지 알아볼 수 없습니다. 다만, 한글회관 5층 뒷간에서 잠깐 바람을 쐬면서 내려다보면, 빈땅에는 곳곳에 풀이 우거지고 나무가 뻗습니다. 제법 자란 나무가 있으니, 몇 해는 묵어 있는 땅이 아닐까 싶습니다.

 문득 빈땅에서 무슨 지저귐소리가 들린다 싶어 가만히 내려다봅니다. 참새가 떼를 지어 이리저리 노닐고 있습니다. 온통 아스팔트와 대리석과 시멘트로 덮인 광화문인데, 그 광화문 한복판이라 할 만한 자리에 빈땅이 남으면서, 이 빈땅에서 참새 같은 작은 목숨붙이가 숨을 쉬고 있다고 할까요. 이 조그마한 빈땅에서 새로 뿌리 내리고 씨앗 내리며 이룬 수풀이 살짝이나마 맑은 바람을 낸다고 할까요. 어느 나라 대사관 한 곳이 여기에 새집을 짓는다고 하던데, 부디 느즈막하게 미루고 늦추어 한참 나중에 삽질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삽질을 아예 안 하면 더 좋고) 하고 꿈을 꿉니다.
 





.. 빅토르는 가정에서 벌어진 이런 폭력 장면을 보면서 평생 지울 수 없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심을 가지게 되었다. 아직 조그만 어린애였지만 빅토르는 어머니를 부양하고 돕는 것이 자기 의무라고 느끼기 시작했다. 어머니의 심한 노동, 그 낙천주의, 그리고 온순함이 가족들을 하나로 묶어 주며 빅토르의 표현처럼 “어려운 일들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어 주었던” 것이다 … 빅토르는 밤마다 자리에 누운 채, 어머니가 죽도록 일을 한다는 사실 때문에 가슴 아파했다. 그리고 그토록 오래 집을 비우다가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나 짐승같이 구는 아버지를 원망하는 마음으로 속을 태우곤 했다 … (어머니) 아만다는 이제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시간이 없기도 했지만 아무도 그녀의 노래를 청하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도시에서는 집집마다 라디오가 있었고, 사람들이 주로 듣는 노래는 볼레로, 맘보, 탱고, 페루 왈츠, 멕시코 코리도 같은 직업 가수들이 부르는 노래들이었다. 아직 미국으로부터 음악적인 침략은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 직업가수 그룹들은 한두 개의 감상적인 칠레 민요들만을 프로그램 속에 끼워 넣은 채 끊임없이 노래를 되풀이하고 있었다. 그것은 곧 지주들의 눈으로 본 농촌 풍경을 노래한 ‘관광객용 민요’였다. 푸른 하늘과 충직하고 멋진 목동들, 어여쁜 소녀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나라에서 지내는 태평세월 따위를 노래한 내용이었다 ..  (62, 70∼71, 99쪽)


 며칠 앞서, 하루일을 마친 다음 서울시청 앞에 잠깐 가 보았습니다. 마침 ‘돌아가신 대통령 일기’를 책으로 찍어 나누어 준다고 하기에 설렁설렁 나들이를 해 보았는데, 따로 일기책을 나누어 주는 곳은 찾아내지 못했습니다. 다만, 퍽 많은 사람들이 손전화로든 사진기로든 끊임없이 사진을 찍는 모습을 구경합니다. 꽃을 바치는 줄은 길게 이어지고, ‘광장을 시민 품으로 돌려 주자’는 설문받기를 하며, 한쪽에는 큼직한 화면을 세워 놓고 옛 대통령을 기리는 이야기를 보여줍니다. 길 건너에서 바라볼 때에는 넓은 찻길을 오가는 자동차 소리에 막혀 이렇게 많은 사람이 이렇게 온갖 모습으로 부대끼고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주 딴 세상 딴 느낌이었습니다.

 서울시청 앞 너른터에서 빠져나와 전경숲을 살짝 지나 전철역으로 들어옵니다. 지옥철에 시달리며 집으로 돌아옵니다. ‘전철 또한 참으로 딴 세상 딴 느낌이구나’ 하고 생각합니다. 아침저녁으로 이렇게 서로서로 악다구니처럼 짓눌리고 낑기는 채 시달리다 보면 사람과 사람으로 서로를 마주하는 매무새를 저절로 잃지 않으랴 싶고, 우리 스스로 우리 사람됨을 잃는 가운데 우리들 넋과 얼은 제자리를 놓치거나 쉽게 놓아 버리지 않으랴 싶습니다.

 앞뒤옆으로 찡기는 가운데에도 책을 손에서 놓지 않으려 애쓰지만, 신도림역부터 역곡역을 지나 부천역까지는 책을 펼치기 어렵습니다. 십 분쯤 가쁜 숨을 몰아쉽니다. ‘나만 힘들겠나. 다들 힘들겠지. 그런데, 다들 무엇을 생각하고 있으려나.’ 






.. 1954년 말쯤 빅토르에게는 새로운 자각이 싹텄다. 어느 날 그는 일자리를 걷어치우고 얼마 안 되는 예금을 찾았다. 곧 합창단에서 사귄 친구들과 함께 칠레 북부 지방으로 민요를 조사하고 채집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그는 어머니 아만다한테서 물려받은 음악적 유산을 재발견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 그는 농사꾼을 우상화하는 일을 그만두고 농민들을 현실 속의 남녀들로 보게 되었다 … 불쌍한 빅토르, 그는 본의 아니게 지배계급의 경직되고 위선적인 도덕성에 깊은 상처를 입히고 말았던 것이다 … 수탈당하는 사람들과 꾸준히 만나고 있었기 때문에, 빅토르는 같은 문제로 무척 근심이 많았고, 그들이 고민하고 있는 문제와 맥이 닿아 있는 노래를 여러 곡 작곡하게 되었다 ..  (79∼80, 92, 168∼169쪽)


 지난 8월 23일, 일민미술관에서 사진잔치 하나가 끝났습니다. 6월 19일부터 이어온 사진잔치에 저도 사진 열두 점을 내놓아 함께 걸었습니다. 사진을 처음 걸 때에는 인천에서 사진 여섯 점씩 두 손으로 나누어 들고 낑낑거리며 전철을 옮겨 타며 들고 갔습니다. 틀을 끼운데다가 테두리를 가늘게 해야 해서 뒷판을 두껍게 대다 보니 사진틀 하나만 들어도 무게가 만만하지 않았는데, 여섯 점씩 묶어서 들고 나를 때에는 팔이 빠지는 줄 알았습니다. 이번에 사진잔치가 끝난 뒤, 미술관에서 사진을 찾아가는 연락이 와서 가 보니, 택배나 뭘로 집으로 부쳐 주지 않고 손수 들고 가라고 이야기합니다. 이 녀석들을 또 어떻게 싸서 어찌 들고 가나 걱정을 하는데, 열두 점 가운데 석 점은 미술관에 기증해 달라고 이야기합니다.

 이번 사진잔치를 앞두고 저를 생각해 주는 선배 한 사람이, “야, 미술관에서 사진을 팔거나 가지겠다고 하면 그냥 주면 안 돼. 네 마땅한 수고와 대가를 받아야 해.” 하고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문득 그 이야기가 떠올라 ‘미술관에서 사진을 사지 않고 기증을 바란다고요?’ 하고 물으려다가 그만둡니다. 열두 점을 도로 들고 돌아가기란 새삼스레 까마득하기 때문입니다. 그나마 석 점을 덜어(?) 주니 내 어깨와 팔뚝이 조금 수월해지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삼십 분에 걸쳐 끈으로 친친 싸맵니다. 계단을 타고 내려와 광화문네거리 건널목을 건넙니다. 건널목을 건너는데 전화가 와서 사진은 오른손으로 모두어 들고 왼손으로 전화를 받습니다. 곧바로 집으로 들고 가기 무거워, 한글학회 한켠에 세워 두고 조금씩 가져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땀을 뻘뻘 흘리며 짐을 나르는데, 길을 오가는 사람은 아주 많아도 어느 누구 도와줄 낌새는 없습니다. 아마, 제가 나서서 길 가는 사람을 붙잡고, “저기요, 이것 좀 같이 들어 주시겠어요?” 하고 말을 걸면 도와주었을까요. 한글학회 건물에 닿았을 때에도 건물을 지키는 아저씨는 그저 텔레비전 보는 데에만 바쁘고 손을 거들어 주지 않습니다. 

 




.. 우리는 아무 거리낌 없이 촌뜨기가 된 기분으로 입을 크게 벌리고 경탄하면서 사방을 구경하기도 하고, 그런 식으로 런던의 명소들을 팔짱을 낀 채 섭렵했다. 칠레사람들이 겪는 빈곤과 고립된 생활에서, 부와 풍요의 절정에 서 있는 발달된 소비 사회의 한가운데로 밀쳐 넣어진 것이 우리에게는 대단한 충격이었다. 우리는 지구 구석구석에서 일어나는 모든 뉴스를 생생하게 보도하는 컬러텔레비전과 상업광고의 일제 사격에 현기증이 났다(칠레에 관한 뉴스만 빠진 것 같았다) … “미국의 손아귀에 쥐어져 있다는 것과 다른 몇 가지 결점을 빼고 본다면, 칠레는 아직 빵은 빵이고 흙은 흙일 수 있는 나라예요. 아직은 진짜 삶, 자연스러운 삶의 나침반을 가지고 자기 자신을 찾거나 다른 사람들을 찾아낼 수 있는 나라입니다. 나는 그들이 우리를 결코 그들 식으로 ‘문명화’시키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나는 차라리 지금 그대로의 칠레, 다듬어지지 않고 개방적이고 야성적인 칠레 쪽을 더 좋아합니다 ..  (212, 216쪽)


 그제는 집으로 가는 길에 신촌을 살짝 거쳤습니다. 맛이 간 렌즈를 고쳐 달라고 맡길 생각이었습니다. 종로3가로 갈까 하다가, 인천 쪽으로 가는 길목이 한결 나으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신촌에 있는 ‘서비스센터’ 문을 들어설 때부터 이곳 일꾼들은 저를 뿔이 나게 했습니다. 예전에도 그랬지만, 저처럼 ‘후줄근한(?)’ 차림으로 다니는 사람은 살짝 얕보는 그런 말씨를 쓰는 일꾼이 아직 버티고 있는데다가(잘 차려입거나 비싸고 큰 장비를 어깨에 걸치고 있거나 양복을 입거나 한 사람한테는 깍듯이 구는), “저희 제품이 아니면 수리를 맡기실 수 없는데요?” 하고 내뱉었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 되쏩니다. “이봐, 고장난 렌즈를 달고 다니는 사진가가 어디 있어? 고장난 녀석은 가방에 넣고 다니지.” 되쏘는 말에 아무 대꾸가 없습니다.

 서비스센터라는 데를 찾아가면서도 렌즈 때문에 성이 바짝 나 있었습니다. 지난 열 해에 걸쳐 이 회사 장비를 쓰고 있는데, 어김없이 ‘제품보증기간 1년’이 지나고 얼마 안 있어 사진기며 렌즈며 말썽을 일으켜 왔습니다. 어디가 부러지거나 끊어지거나 하면서 삼만 원에서 오만 원이 들도록 다시 고쳐야 했습니다. 한두 번이었다면 그러려니 하지만, 사진기나 렌즈를 떨어뜨리지 않고 부딪히지 않았음에도 이렇게 말썽이 나면, 정작 제가 사진을 한창 찍고 있을 때 ‘찍어야 할 모습을 찍지 못하니’ 왈칵 짜증이 솟습니다. 사진기 회사에서는 ‘고장 수리’를 해주며 품값을 받을 생각일 테지만, 곰곰이 따지면 ‘사진기를 다루는 사람은 돈으로 헤아릴 수 없는 큰 손해를 입었’으니, 사진기 회사가 사진쟁이들한테 피해보상을 해 줄 노릇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사진기 몸통이나 렌즈는 얼마든지 다시 사거나 고칠 수 있지만, ‘사진쟁이가 바라보는 자리에서 그날 그때 찍어야 할 모습’은 그날 그때를 놓치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뿐더러 다시는 되찾을 수 없으니까요.

 지난해까지는 제품 수리를 맡길 때 길어도 한 주였습니다. 이번에 맡기니 열흘쯤 걸린다고 이야기합니다. 히유. 한숨이 나옵니다. 그렇다면 저보고는 열흘 가까이 사진을 찍지 말라는 소리가 됩니다. 그나마 다른 렌즈 하나를 부랴부랴 장만해 놓아, 아쉬운 대로 사진찍기를 이을 수는 있지만, 이 또한 제 사진길에서는 가슴시리고 고된 나날이 되고 맙니다. 




 (2) 내가 아이와 함께 사는 이 나라에서


 아기가 태어난 뒤로 늘 아기와 옆지기 세 식구가 함께 지내고 있는데, 보름쯤 앞서부터 아기 아빠는 서울로 출퇴근을 해야 하는 몸이 됩니다. 되도록 아기가 잠든 채 조용히 집을 나서려고 하는데, 처음 며칠 아기는 ‘아빠 아빠’ 하면서 저를 찾았다고 합니다. 요즈음은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 며칠 지났다고 익숙해져서 안 찾을는지 모르지만, 또 하루하루 커 가면서 혼자서 노는 새로운 재미에 빠져 엄마까지 덜 찾는지 모르지만, 옆지기 혼자서 아이를 보는 일이란 퍽 고단합니다. 어느 누구라도 혼자서 아이 보고 집일 하기란 벅차고 고될밖에 없습니다. 더구나 아기 엄마이든 아기 아빠이든 ‘무쇠로 만든 사람’이 아닌 터라, 아침에는 어느 만큼 기운을 차린다 해도 저녁이면 파김치가 되기 일쑤입니다.


.. 우리는 춤추는 방법만 배운 게 아니라, 인간이 하는 모든 동작을 분석하여 춤과 연결시키는 방법을 배웠다 … 첫 공연을 한 장소는 푸에르토몬트에 있는 어떤 체육관이었다. 그곳은 남극에서 불어오는 찬바람이 깨진 유리창 틈으로 휘파람 소리를 내며 들어오고, 마을 개떼들이 연습장에 드나드는 황량한 장소였다. 그러나 관중들은 다정했으며 열광적이었다. 어떤 종류의 무대 공연도 아주 희귀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 마을 사람들에게 우리 공연은 일대 사건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준비한 철저한 유럽식 레퍼토리는 누가 봐도 이런 환경에서 도무지 어울리지 않았다 … 여전히 우리들한테는 무용가들을 민중한테서 분리시키고 민중 스스로 춤에 참여하기를 꺼리도록 만드는 요소들이 남아 있었다. 그때만 해도 현대무용은 더욱더 추상적인 표현으로 기울고 있었고, 동작을 위한 동작 자체의 연구에만 더 집착하는 경향이 지배하던 때였다 ..  (28, 43, 266쪽)


 사람들이 묻든 묻지 않든, 아빠나 엄마는 아이를 키우는 삶이 고단합니다. 그러나 고단하다고만 말하지 않습니다. 고단하면서 즐겁습니다.

 생각해 보면, 제가 스스로 좋아서 떠맡는 여러 가지 일거리는 제 살을 갉아먹고 제 목숨을 잡아먹습니다. 동네 도서관을 꾸리든, 혼자서 잡지를 하나 만들든, 책이야기를 쓰고 말 이야기를 쓰든, 골목 사진과 헌책방 사진을 찍든, 품과 땀과 시간과 돈을 바칩니다. 골목마실이나 헌책방마실 한 번 하고 집으로 돌아오면 기운이 쪽 빠집니다. 그렇다고 집에서 드러누워 쉴 수 없습니다. 마실을 다닐 때에도 혼자 다니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아이를 안거나 걸려 함께 다니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아이를 씻기고 빨래를 하고 우리 먹을 밥을 차리고 아이를 먹이며, 아이가 누는 똥오줌을 치우고 걸레를 거듭 빱니다. 잠들 녘에는 모기를 잡느라 부산을 떨고, 아이를 새근새근 재우려고 불을 다 끄고 드러눕다 보면, 아이가 잠든 뒤 이것저것 하려고 생각하던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채 나란히 잠듭니다. 이러다가 새벽 네다섯 시에 일어나 새 하루를 열 채비를 하며, 다시 전철 타고 서울로 일하러 나가고, 또 같은 하루가 그예 되풀이되고.

 저로서는 퍽 여러 해, 여느 제도권 회사에 몸을 안 담고 지낸 나날이 있기는 했습니다만, 오늘날 우리 삶터 거의 모든 사람들은 여느 제도권 회사에 몸을 담고 돈 버는 일을 안 할 수 없도록 짜여 있습니다. 알바이든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아침 일찍 일어나 제복을 갖춰 입고 대중교통이든 무어에든 시달리며 회사로 나아가, 저녁에 밤일까지 하느냐 마느냐로 갈팡질팡하다가 느즈막하게 다시금 대중교통이든 무어에든 들볶이며 집으로 돌아와 어수선한 집에서 가득 쌓인 살림거리를 돌봅니다. 이러는 쳇바퀴가 고단해 집밥을 해먹기보다 바깥밥 사먹기나 시켜먹기를 하게 되고, 자연스레 바깥일로 돈을 더 버는 데에 힘을 쏟을밖에 없습니다. 





 이런 쳇바퀴 나날은 어른이 되고 난 뒤에만 겪는 일이 아닙니다. 이 나라 모든 사람들은 유치원에 들거나 초등학교에 들 때부터 쳇바퀴가 됩니다.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 들 무렵부터는 어김없이 학원 몇 군데를 돌아다니며, 이렇게 학교와 학원을 돌아다니다 보면, 초등학생임에도 ‘해 보고 학교 가서 해 보고 집에 오는 삶’이 아닌 ‘별 보고 학교 가서 별 보고 집에 오는 삶’이 될 수 있습니다.

 예닐곱 살부터 정년퇴직을 하는 날까지 거의 예순 해를 이와 같이 살아간다고 할까요. 하늘을 잊고 날씨를 모르며 이웃을 잃고 동네를 알지 못한다고 할까요.


.. 당시 기독교민주당 운동원들은 포블라시온에 들어와서 ‘마을 평의회’와 ‘어머니 센터’ 같은 것들을 결성시켰다. 내가 편견에 치우친 시선으로 봐서 그런지는 모르지만, 그 여자들은 예쁜 전등갓이나 장난감 인형 만들기를 배우는 데만 정신이 팔렸던 것 같다 … 빅토르는 그럴 때면 몹시 화를 내거나 친구의 부인들과 다투곤 했다. “자선 따위는 필요없어요! 여러분은 원래부터 사람이 살 만한 곳에 살 권리, 아플 때면 근처에서 쉽게 의사를 부를 권리, 자식들을 제대로 교육시킬 권리를 갖고 있는 겁니다. 그런 것을 넣어 둘 집조차 제대로 없는데, 전등갓 따위가 도대체 왜 필요하단 말이에요?” ..  (172쪽)


 돌을 맞이하기 앞서 아이는 아빠가 빨래하는 양을 따라했습니다. 엄마가 몸이 안 좋아 게워내는 양을 따라하며 입에 넣은 먹을거리를 제가 손으로 꺼내기 일쑤였습니다. 엄마가 피리를 불면 옆에서 피리를 따라 붑니다. 아빠가 술을 마시면 제가 술병을 빼앗아 들고 마시는 시늉을 해 보려고 합니다. 돌을 지난 뒤에도 따라하기는 이어집니다. 어설픈 시늉이지만, 기저귀를 저도 개고 싶어 하고, 지가 눈 오줌을 치우는 엄마아빠를 따라 지 스스로 마룻바닥 걸레질을 해 보고 싶어 합니다. 아빠가 일하느라 셈틀 앞에 앉아 자판을 두들길 때에는 저도 자판을 두들겨 보고 싶어 발버둥입니다. 그러나 꼭 한 가지, 엄마아빠가 밥먹는 모습만큼은 따라하지 않습니다.

 엄마아빠가 늘 책을 읽고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그림을 그리고 하니, 아이는 틀림없이 이 모습을 고스란히 지켜보면서 배우거나 따라하리라 봅니다. 엄마아빠가 고단한 일이 쌓여 짜증을 부르거나 거친 말을 하거나 게으름을 부린다면, 이 또한 아이는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배우거나 따라할밖에 없다고 봅니다.

 뒷날, 아이가 제도권 학교에 가고 싶어하든 제도권 학교에는 안 가겠다고 하든 마찬가지입니다만, 아이는 학교에 갈 때에는 학교에서 어울리는 동무와 언니오빠와 교사들 매무새를 바라보거나 지켜보면서 제 매무새를 어떻게 다스리면 좋을까를 배우기 마련입니다. 학교에 안 간다면 집이나 동네에서 부대끼는 어른과 또래 동무들 매무새를 살피면서 제 매무새를 추스를 테고요.

 학교에 간다고 더 낫다거나 학교에 안 간다고 좀더 좋다고 할 수 없습니다. 어디에서 어떻게 무엇을 하든, 스스로 갈피를 어찌 잡고 줏대를 어찌 세우며 주제를 어찌 마련하느냐에 따라 다르다고 봅니다. 우리 아이이든 다른 집 아이이든, 제도권 학교를 다니면서도 제 마음밭을 알뜰살뜰 일굴 수 있습니다. 제도권 학교가 아닌 집배움을 하면서도 제 마음밭을 조금도 못 일굴 수 있습니다. 마음밭을 알뜰살뜰 일구는 가운데 제 몸과 마음을 꾸밈없이 들여다보며 제 둘레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살필 테고, 제가 디딘 터전을 곰곰이 헤아리겠지요. 마음밭을 조금도 못 일군다면 아무리 좋다는 책을 읽혀 지식을 많이 쌓았어도 제 몸과 마음을 느끼지 못하고 제 이웃을 있는 그대로 못 살피며, 제가 디딘 이 나라 삶터를 꿰뚫어보는 눈길 또한 기르지 못하리라 봅니다. 






.. 아옌데 정부는 지나칠 만큼 표현의 자유를 허용했고, 역사에서 유례가 없을 만큼 많은 자유를 보장했다. 우익은 자기들이 탄압 속에 놓여 있으며 칠레의 언론 자유는 위기에 처해 있다고 허위 사실을 주장하며 국제적인 선전활동을 했다. 아옌데 정부는 그것을 막지 못했다 … 사회주의 정부 때문에 일어난 일 가운데 하나가 굶주림이라는 것을 상징하기 위해서 부인네들이 모두 나무숟가락으로 빈 냄비를 드럼 치듯 두들기면서 행진을 벌이는 것이었다. 그 행진은 완벽하게 준비가 잘 되어 있었다. 바리오 알토에서 카드놀음이나 하던 게으른 야회복 차림의 여자들이 드디어 할 일을 발견했던 것이다 … 이들은 자기 집 냉장고 안에 값비싼 식료품을 가득 채워 놓고 살면서 평생 동안 냄비라고는 한 번도 제 손으로 건드려 보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주 잘 차려입고 살이 많이 찐 부인네도 이번에는 자기들의 특권인 안락한 생활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는 현실적인 위험을 깨닫게 된 것 같았다. 그러나 영양실조로 충분히 자라지 못해서 왜소한 자기 자식들을 보거나, 진짜 굶주림이 어떤 것인지를 잘 알고 있는 아낙네들 눈에 그들의 모습은 구역질이 나고 모욕적으로까지 느껴졌다 … 이제 반대 세력들은 민주적인 절차로는 아옌데를 쫓아낼 희망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  (316, 322∼323, 380쪽)


 아이는 공무원이 될 수 있습니다. 월급쟁이 공무원이 될 수 있고, 훌륭한 공무원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는 농사꾼이 될 수 있습니다. 슬기로운 농사꾼이 될 수 있고, 풀약과 비료를 듬뿍 치는 농사꾼이 될 수 있습니다. 아이는 글쟁이나 사진쟁이가 될 수 있습니다. 돈이 아닌 사람을 보고 이름이 아닌 자연을 보는 글쟁이나 사진쟁이가 될 수 있고, 사람 아닌 돈을 보며 자연 아닌 이름만 보는 글쟁이나 사진쟁이가 될 수 있습니다.

 옆지기하고 저는 우리 아이가 무슨 일을 하든 저 스스로 즐겁게 찾기를 바랍니다. 우리 몫은 아이가 튼튼하고 맑은 마음을 착하게 가꾸면서 제 몸마음과 이웃 몸마음을 한결같이 사랑할 수 있도록 손길을 내미는 데에 있다고 느낍니다. 어떠한 정치니 사회니 교육이니 종교니 문화니 예술이니 과학이니를 떠나, 아이가 나중에 대통령이나 시장을 누구를 뽑도록 이끌어야 하느니를 떠나, 우리는 우리 깜냥껏 우리 앞일을 옳고 바르게 내다보는 삶을 붙잡아야 하며, 아이는 아이 깜냥껏 아이 앞일을 환하고 싱그럽게 내다보는 삶을 껴안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3) 《끝나지 않은 노래》에서 《빅토르 하라》로 






 1988년에 《끝나지 않은 노래》라는 책이 나왔습니다. 그 뒤 스무 해가 지난 2008년에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가 나옵니다. 조안 하라 님이 쓴 《끝나지 않은 노래》는 제법 입소문을 탔다고는 하나, 새책방에서든 헌책방에서든 애물단지처럼 잘 안 팔리는 책이었습니다. 읽는 사람이 드물었고, 읽고 즐겁게 삭여내는 사람은 훨씬 드물었습니다.


.. 그는 내가 마음의 긴장을 늦추고 서서히 녹아서, 과거에 대한 고통스러운 강박관념으로부터 스스로 해방되도록 도와주려고 애썼다 … “내 사랑이여, 너무 두려워 말아요. 우리가 유일하게 두려워해야 할 것은 서로가 깊이 이해할 수 없게 되거나, 서로의 소박한 마음을 발견할 수 없게 되는 것뿐입니다 … 나는 가슴으로 살아가지, 머리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  (113, 133쪽)


 돌이켜보면, 1988년에 처음 나온 《끝나지 않은 노래》는 아주 알맞춤하게 나온 책이었습니다. 1980년대를 국민학생과 중고등학생으로 보낸 저로서는, 1980년대 이때만큼 대중노래와 민중노래가 엄청나게 터져나오며 싱그럽고 아름다운 때는 다시금 없었다고 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남자 가수든 여자 가수든, 노래패를 이룬 사람들이든, 발라드든 트로트든 락이든 메탈이든 푸짐하게 넘쳐나던 노래가 아니었느냐 싶습니다. 군부독재 정권이 우리들을 세 가지 에스라는 허울로 쌈싸먹기하려고 노래 문화를 제법 풀어놓았는지 모르지만, 이러하든 저러하든 ‘제도권 안팎’으로 노래문화와 노래운동은 이때 비로소 봇물이 터지면서 우리 모두를 흐뭇하게 보듬어 주었다고 느낍니다. 그래서, 이러한 노래물결이 치는 가운데 《끝나지 않은 노래》 같은 책은 훨씬 더 잘 읽힐 수 있었고, 이 책에 담긴 목소리와 이야기는 노래판 사람들뿐 아니라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과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픈 사람들한테 남다른 빛줄기로 스며들 수 있지 않았으랴 생각합니다.

 그런데 1980년대에는 노래는 노래대로 봇물이 터지고, 책은 또 책대로 봇물이 터졌습니다. 1970년대까지 꽁꽁 틀어막혀 있던 울타리를 어느 만큼 풀어 놓자, 노래뿐 아니라 갖가지 책들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져 나오면서, 《끝나지 않은 노래》 같은 책한테까지 눈길을 뻗치고 손길을 내밀어 마음길로 받아먹는 분은 퍽 드물었습니다. 






.. 1965년, 칠레 북부 지방의 엘살바도르시에서 광부들과 그 가족들을 학살하는 데 사용된 무기들이 ‘미국 원조’에 의해 제공되었던 것처럼, 시위 진압을 위해 훈련된 칠레의 특수경찰 부대 ‘그루포 모빌’ 역시 그 장비나 전술을 오로지 미국에 의존하고 있었다. 파나마를 비롯한 라틴아메리카의 여러 지역에 훈련소가 세워졌다. 거기에는 라틴에마리카 군대의 장교나 하사관들, 경찰들이 차출되어 와서 국내의 반란, 혁명, 또는 반체제 분자들을 저지하기 위해 자기네 국민들과 맞서 싸우도록 교육을 받았고, ‘내부의 적’이라는 개념을 갖도록 세뇌되었다 … 대중매체들은 ‘미국식 생활방식’을 선전하느라 정신이 없었고, 신문 판매대에는 싸구려 미국 만화들이 판을 쳤다. 라디오에서는 온통 미국 팝송들이 쏟아져 나왔고, 텔레비전에는 미국의 삼류 멜로드라마들이 가득했다. 영화관들까지도 헐리우드의 3류 영화들만 상영하고 있었다. 가장 가난하고 가장 심하게 수탈당하는 사람들일수록 생활에서 라디오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런 선전에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 칠레는 아직도 피노체트 집권 시기에 만들어진 헌법에 묶여 있다. 그 헌법에 따르면 상원은 국민에 의해 선출되지 않는 임명직 상원의원들이 차지하고 있고, 그들 중에는 군사쿠테타 당시에 피노체트의 ‘동지’였던 퇴역 장군들이 포함되어 있다 … 피노체트 정권을 통해서 엄청난 재산을 긁어모은 것은 피노체트의 소수 지지자 그룹뿐이다. 그들은 민주주의 제도의 견제를 전혀 받지 않는 이른바 자유시장 경제 체제를 통해 이익을 거둬들였다 … 증오를 품고 계속 살아간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지만, 아무도 용서를 구하는 사람이 없고 뉘우치는 기미조차 보여주지 않는 마당에 그런 범죄를 용서한다는 것도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칠레는 아직도 극도로 양분된 나라이다 ..  (224, 226, 481∼482쪽)


 2000년대 오늘날은 어떠할까 모르겠습니다. 피노체트를 독재자라고 말할 수 있고, 우리 나라 옛 대통령 가운데 한 사람인 박정희 님이 일으킨 ‘5ㆍ16’은 달력에서 아예 기념일로조차 들어가지 못하고 있는 2000년대 오늘날 우리 삶터는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를 얼마나 읽어낼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버젓이 외칠 수 있고, 꽤 많은 ‘박정희 지지자’들조차 “그래, 당신들 말마따나 박정희는 독재자였다. 그렇지만 우리가 먹고살게 이러쿵저러쿵” 하고 말할 만큼, 우리 말길은 아주 조금 트였습니다. 이러한 우리 2000년대 오늘날은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를 읽을 만한 터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러한 2000년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은 먹고살기 바쁜 짬을 내고, 돈벌기 고단한 하루하루를 덜어내며 만팔천 원짜리 두툼한 인문책 하나를 가슴에 꼭 부둥켜안으면서 눈물콧물 질질 짤 마음밭이 마련되어 있을까요?


.. “힘들여서 개인의 영광을 쫓거나 순진하고 순수한 사람들한테서 이익을 얻는 가수들은, 노래란 자갈돌을 씻어내리는 물과 같으며 우리들을 깨끗하게 해 주는 바람과 같으며 우리를 하나로 만들어 주는 불과 같은 존재라는 것을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그 노래가 우리 안에 살아 있을 때 우리가 더 나은 사람들로 변화되리라는 것도 모를 것이다.” ..  (397쪽) 

 





 511쪽짜리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는 지난날과 견주면 꽤 많은 매체에서 소개글을 써 주고, 칭찬을 해 주었습니다. 책이 새로 나온 지 어느덧 한 해가 다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책은 아직 1쇄가 다 팔리지 않았습니다. 2009년이 가기 앞서 2쇄를 찍을 수 있을는지 없을는지 아리송합니다. 《빅토르 하라, 아름다운 삶 끝나지 않은 노래》 1쇄에는 오탈자가 꽤 많아, 이 잘잘못을 하나하나 바로잡아 주어야 합니다. 저는 이 책을 읽는 동안 삼백 군데가 넘는 곳을 짚어냈는데, 더 많이 짚어낸 분이 있다고 합니다.

 다만, 이런저런 오탈자가 꽤 많기는 해도(좀 지나치게 많습니다), 빅토르 하라와 조안 하라 두 가시버시가 독재정권 칠레를 민주정권 칠레로 뜯어고치는 길에 어떻게 힘을 모두고 애썼는가 하는 줄거리를 톺아보는 데에는 걸림돌이 되지 않습니다. 하루빨리 1쇄가 다 팔리고 2쇄를 찍는 기쁨을 맛보며 이런저런 자질구레한 말마디를 바로잡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42.8.26.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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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감독 김기덕 - 김기덕 바이오그래피 1996-2009
마르타 쿠를랏 지음, 조영학 옮김 / 가쎄(GASSE)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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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쁜 감독’ 김기덕 이야기를 아르헨티나 작가가 썼네
 [잠깐 읽기 52] 마르타 쿠를랏, 《나쁜 감독》



- 책이름 : 나쁜 감독, 김기덕 바이오그래피 1996-2009
- 글 : 마르타 쿠를랏
- 옮긴이 : 조영학
- 펴낸곳 : 가쎄 (2009.6.29.)
- 책값 : 9000원



 (1) ‘거북하게’ 이끄는 영화들


 〈어느 날 그 길에서〉라는 영화가 있습니다. 길에서 죽는 짐승 이야기를 하나하나 좇아다니면서 담아낸 영화입니다. 저는 이 영화를 보기 앞서도 길에서 죽는 짐승을 숱하게 보고 느끼고 알고 있었으며, 영화를 보고 난 다음에는 길에서 죽는 짐승을 바라보는 이웃사람 눈길을 새삼스레 느끼거나 깨닫고 있습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난 다음 당신 삶을 바꾸었는지 모르나, 도심지이든 시골길이든 고속도로이든 자동차 빠르기를 5킬로미터나마 줄이려고 애쓴다고 하는 사람은 찾아보지 못합니다. 아예 자동차를 버리겠다고 외치는 사람을 찾아보지는 못합니다.

 영화 〈어느 날 그 길에서〉는 우리한테 ‘자동차를 멀리 하라’고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길에서 짐승을 치여 죽이는 사람들이 ‘나쁘다’고 이야기하지도 않습니다. 길에서 차에 치여 죽는 짐승을 놓고 마냥 ‘불쌍하다’고 이야기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죽음을 보여주고 죽임을 보여줍니다. 그예 앞으로도 죽음과 죽임이 끝없이 이어지도록 하려는 이 나라 공무원들 매무새를 보여줍니다. 이 나라 공무원들과 하나도 다를 바 없는 ‘여느 사람들 모습’을 나란히 보여줍니다.


.. 하나의 이미지가 수천 개의 단어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닐 수 있다. 이 글에서 〈악어〉가 여성에게 미치는 영향을 소개하기 위해 우선 그와 관련된 피상적인 플롯만 소개한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윗글에서 드러난 사실만으로도 폭력은 거의 참을 수 없을 정도이고, 그로 인해 영화를 본 대부분의 여성들은 실제로 그 저변에 깔린 개인적, 사회적 메타포들을 읽지 못했다. 그저 스크린 밖의 그들을 노려보는 야만성과 타락상에 시선을 빼앗겼을 뿐이다 … 다른 한편, 침묵도 언어라는 개념은 보수적인 언어학자들을 펄쩍 뛰게 만들지는 몰라도 어쨌든 진실 중의 진실이라 할 수 있다. 침묵은 빈칸이 아니다. 오히려 그건 화자에게 허용된 의미 모두를 함축한 백과사전에 가깝다. 의미를 선택하는 건 온전히 대화를 하고 있는 상대방의 몫이 되며, 두 사람이 동일한 주파수를 공유할 경우에만 소통이 가능해진다고 말할 수 있다. 아니, 더 나아가 소통은 처음부터 불가능할 수도 있겠다. 그 말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김기덕의 영화에서, 언어는 오해 또는 소통의 부재를 촉진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 〈시간〉의 일부 장면들이 대표적이다. 영화 속에서 침대에 누운 두 연인의 대화는 비극으로 끝나는데, 그들이 마침내 (언어의 한계 밖에서) 소통을 이루게 된 건 바로 길고도 고통스러운 침묵이 이어지고 난 후였다 ..  (39, 47쪽)


 여러 해 앞서 〈고추 말리기〉라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이 영화를 보았거나 아는 사람이 많지 않아, 이 영화를 놓고 이야기하기는 어렵습니다. 곧 문을 닫고 사라진다는 ‘아트큐브’인가요? 이곳에 조용히 걸리고 그야말로 조용히 보여진 영화 〈고추 말리기〉는 아파트 옥상에서 고추를 말리려는 어머니 심부름을 따르는 ‘시집 안 가고 영화 찍는다며 깝죽댄다는 딸내미(감독 스스로)’ 이야기를 꾸밈없이 보여줍니다.

 영화이름 그대로 고추를 말리는 모습이 나오고, 주인공 딸내미가 식구들하고 복닥이면서 살아가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다른 목소리는 없습니다. 다른 어떤 주제가 있다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한국땅에서 ‘여자’로 태어나서 무슨 꿈을 꾸고 무슨 삶을 꾸리며 무슨 생각을 할 수 있는가를 수수하게 보여줄 뿐입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길에서〉나 〈고추 말리기〉는 이 영화를 본 사람을 ‘번거롭게’ 하거나 ‘거북하게’ 한다고 합니다. 자꾸자꾸 무엇인가 생각하도록 하고 돌아보도록 하며 곱씹도록 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런 영화가 달갑지 않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으며 ‘계몽’이니 ‘교훈’이니 또 무어니 하는 이름을 붙이는 분들도 있습니다.


.. 여성 비평가들은 그를 끌어내리기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남자 평론가들은 아예 무시해 버린다 … 이런 식의 잔혹함은 관객들을 괴롭히지 못한다. 그런 것들이 결국 디즈니월드와 ‘바넘과 베일리 서커스단의 거짓세계’에 속한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그들은 스크린의 장면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다. 그리고 실제 생활에서라면 아무도 그렇게 무자비하게 고문하거나 살해할 수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그런 화면에 대해 얼마든지 관용을 베풀 수 있다. 다른 한편, 구타와 강간 등 일상적인 형식의 폭력과 가슴을 찢어내는 미묘한 심리적 고문은 관용의 수준을 현저하게 끌어내리게 된다. 직접 이런 식의 폭력을 겪어 본 적이 없다고 해도, 약간의 상황변화만으로도 얼마든지 자신이 피해자 또는 가해자가 될 수 있음을 관객들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언제든 자신의 자아가 행사하거나 당할 가능성이 있는 상황에 대한 잠재의식적 공포는 리얼리티에 가까운 폭력형태에 대해 절대적인 반감을 유발하게 된다 … 물론 일반적으로 영화팬들은 여가를 즐기고 고민을 달래기 위해 영화관을 찾는다. 때문에 쓰라린 심장과 잔뜩 꼬인 머리로 영화관을 떠나는 걸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사실 정도는 그도 잘 알고 있다. 관객들은 수저로 떠먹여 주기를 원한다. 그렇지만 김기덕은 깊은 사고를 자극하는 노력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  (42, 68, 69쪽)


 저한테는 비디오가 없고 텔레비전 또한 없어 다시 보기 쉽지 않지만, 제가 퍽 여러 차례 본 영화로 〈안드레아스 라인〉이라는 네덜란드 영화가 있습니다. 네 번쯤 보았다고 떠올리는데, 볼 때마다 늘 사람들이 북적북적했습니다. 언제나 무슨 모임에서 여럿이 함께 보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안드레아스 라인〉을 ‘안 잘린 판’으로도 보았고 ‘잘린 판’으로도 보았습니다만, 여러 차례 보아도 질리지 않고 나중에 다시 보고프다고 생각했습니다. 좀더 나이가 들고 내 삶이 다른 자리에 들어섰을 때 새롭게 보고프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한 아이를 키우는 애 아빠 자리에 있는 만큼 요즈음 다시 〈안드레아스 라인〉을 본다면 어떤 느낌일는지 궁금합니다. 이 영화를 같이 보던 적잖은 사람들은 졸거나 자거나 딴청을 피우거나 나가 버리거나 하기 일쑤였는데, 저는 한결같이 눈이 아프도록 들여다보며 한 대목 두 대목 찬찬히 곱씹었습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숱하게 눈물을 흘리기도 했고요. 학자 같은 어머니한테서 사랑스러운 눈길을 받고 싶어 계집아이가 일부러 그네에서 손을 놓고 바닥에 쿵 떨어지는 대목에서도 눈물이 찔끔 나왔고, 차츰 크기가 커지는 공동체 식구들 밥차림과 왁자지껄 수다 떠는 대목에서도 눈물이 왈칵 나왔습니다. 그러나, 좋은 ‘씨’를 받으려고 남자를 꼬드기는 대목에서는 웃음이 싱긋 나오고, 화면을 넷으로 나누어 집집마다 사랑을 불태우는 대목에서도 웃음이 히죽 나왔습니다.


.. 어쩌면 그도 시나리오, 촬영, 편집이 모두 끝난 후에야 겨우 해답을 얻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그건 그의 개인적 해답이고, 그걸 관중과 공유할 필요는 없다. 관객들도 나름대로의 결론을 도출해 내거나 아니면 무지한 상태로 남아 있으면 그만이다 … 더 좋은 선택은 영화를 보는 것이다. 아름다운 화면과 스크린에 펼쳐진 계절의 변화는 그 어느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기 때문이다 … 주변 환경에 대한 김기덕의 관심은 빈틈없는 관찰력과 더불어, 감수성보다 지성이 발달한 사람들이 책에서 얻을 수 있는 것보다, 사람들과 사람들의 삶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우도록 해 주었다 … 그는 다른 감독들이 모교의 배지를 가슴에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요컨대 영화학교에서 교육받은 사람들은 모두 같은 방식으로 일하고, 때문에 차이를 구분하기 어렵다 ..  (49, 64, 88, 91쪽)


 영화 〈집으로〉를 볼 때처럼, 영화 〈선생 김봉두〉를 볼 때에도 ‘영화에 그려지는 마을 모습’에 오래도록 눈이 멎었습니다. 〈선생 김봉두〉가 그리 잘 찍은 영화는 아니었다고 할지라도, 저로서는 강원도 동강 둘레에 문닫은 작은 학교를 바탕으로 찍어 놓아 ‘작은 학교 삶터와 삶매무새’가 고스란히 사라지거나 잊혀지기 앞서 이렇게 하나 남겨 놓은 대목이 참 반가웠습니다. 2010년이나 2020년에도 〈선생 김봉두〉 같은 영화야 얼마든지 찍을 수 있지만, ‘강원도 동강 둘레 맑고 파란 하늘빛과 물빛’은 이 영화를 찍던 지난날만큼 싱그러이 되살려낼 수 없습니다.

 그래서 〈책상서랍 속의 동화〉라든지 〈집으로 가는 길〉이라는 영화에 나오는 드넓은 산마을과 자연을 보면서 속울음을 삼켰고, 우리 집 아이한테는 이제 더 보여줄 수 없는 깨끔한 자연이란 무엇인가를 마음속으로 자꾸만 삭여야 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스스로 우리 나라 자연 터전을 되찾을 수 있을까 모르겠지만, 끔찍한 물질소비문명이 언제쯤 끝날는지 모르겠지만, 영화에서나마 이 모습이 살아남아 준다면, 우리 아이가 나중에 커서 ‘엄마 아빠, 이 영화에 나오는 저 하늘빛은 뻥 아냐? 거짓말 아냐? 꾸민 그림 아냐? 뽀샵질로 만들지 않았어?’ 하고 물을는지 모르겠지만, …….


.. 서구 사회에서라면 계급이동은 더 이상 관심거리가 아니다. 인도의 카스트에 버금갈 정도로 엄격한 계급체계도 없다. 하지만 분명한 건, 가난한 가정에서 태어난 사람들은 결국 감옥이나 시체실에서 인생의 종말을 맞이하는 식의 악순환의 저주에 시달리는 것 같다는 사실이다 ..  (50쪽)


 홀로 골목동네를 거닐며 사진을 찍을 때, 옆지기와 나란히 골목동네를 거닐며 사진을 찍을 때, 그리고 이제는 아기를 안거나 이끌고 골목마실을 하면서 사진을 찍을 때, 마음속으로 숱하게 되뇝니다. 저는 제가 발딛고 살아가는 이 동네를 이 모습 그대로 담아낼 뿐이라고. 더 잘난 모습도 아니요 더 못난 모습도 아닌, 그저 이 모습 그대로를 담아낼 뿐이라고.

 꽃그릇을 마련해 꽃씨를 심었으니, 이제 막 움이 틀 때부터 줄기가 오르고 잎이 돋으며 꽃이 피고 열매 맺고 씨가 떨어질 때까지 한 해 내내 끊임없이 담아냅니다. 볕 좋은 날 빨래가 나부끼는 모습을 고스란히 담아냅니다. 따로 동네 할매 할배를 불러 앉히고 얼굴 사진을 찍지 않더라도, 골목마다 놓인 걸상과 평상을 담으면서 할매 할배 손길과 손끝을 느끼도록 합니다. 나무문패를 쓰다듬으면서, 나무전봇대를 어루만지면서, 나무로 짠 대문을 쓸어 보면서, 한 동네에서 오래도록 뿌리내린 사람들 발자취를 더듬습니다.

 뒷날 우리 아이가 이 동네에서 살아갈 수 있을는지 모르지만, 또 뒷날 우리 아이가 제가 태어나 자란 동네 모습을 떠올리고 싶어할는지 모르지만, 아비 된 사람으로서 할 몫이라면 이 동네가 더는 다치거나 망가지지 않도록 힘쓰면서 오늘 모습을 차근차근 담는 데에 있다고 느낍니다.


 (2) 김기덕 감독 영화를 생각한다


 《나쁜 감독, 김기덕 바이오그래피 1996-2009》라는 긴 이름으로, 줄여서 《나쁜 감독》이라는 이름으로, 김기독 감독 한삶을 다룬 책 하나가 조그맣게 나왔습니다. 책은 그야말로 조그맣습니다. 2/3쯤이 몸글이고 1/3쯤은 글쓴이 ‘마르타 쿠를랏’ 님이 김기덕 감독과 주고받은 이야기입니다.

 “김기덕은 인간의 조건을 존중할 것을 요구한다.(82쪽)”는 이야기를 적바림한 마르타 쿠를랏 님은 아르헨티나사람입니다. 아르헨티나에 김기덕 감독 영화가 걸리기란 몹시 어려운 일이라고 하는데, 이이는 김기덕 감독 영화를 하나하나 찾아서 보고 생각하고 곱씹고 세상을 바라봅니다. 아주 많은 한국 ‘영화관 손님’은 못마땅해 하거나 거북해 하거나 몸둘 바를 몰라 하거나 손가락질을 하거나 등을 돌리지만, 한국 아닌 나라에서는 여러모로 섬기고 이야기하며 차근차근 파헤치기까지 하는 김기덕 감독 영화가 참말 무엇을 보여주거나 이야기하고자 하는지를 있는 그대로 나누려고 아르헨티나 작가이자 교수인 마르타 쿠를랏 님은 조곤조곤 생각주머니를 펼칩니다.


.. (김기덕) “프랑스에만 있었던 게 아니고 유럽에 있는 대부분의 미술관을 다 다녔고, 많은 그림과 조각 사진을 보았고, 그 모든 게 저의 영화 작업에 영감을 주었습니다. 특히 미술관의 작품보다는 거리의 동상이나 과거의 흔적들이 저에게 큰 영감을 주었습니다.” … “저는 영화로 철학자나 권력자가 되고 싶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슬퍼하고 분노하며 이해하고 노력하고, 그러면서 결국 초월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영화를 만들고, 영화를 만드는 시간 동안 너무나 고통스럽고 슬프며 행복합니다.” ..  (30, 44쪽)


 책을 읽으며 헤아려 보니, 제가 본 김기덕 감독 영화는 몇 가지 없습니다. 〈수취인불명〉하고 〈파란 대문〉쯤? 둘 모두 누구 작품인지 모르면서 보았고, 〈파란 대문〉을 보고 난 다음에는 ‘이 잘 찍은 영화를 잘 읽어낼 사람은 거의 없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우리네 ‘영화관 손님’뿐 아니라 ‘책읽는 사람’들도 당신들을 ‘거북하게’ 하는 책을 꺼립니다. 당신들을 거북하게 하는 책을 놓고 ‘교훈적’이라느니 ‘계몽적’이라느니 하는 꼬리말을 달아 놓으면서 깎아내리기 일쑤입니다. 재미가 있으면 재미가 있다고 받아들이면 되고, 나를 가르쳐 주면 넉넉히 배우면 될 텐데, 재미를 재미 그대로 못 느끼는 가운데 가르침은 가르침 그대로 못 받아들인다고 할까요. 우리 삶에서 어느 하루 어느 누구한테고 서로 가르치거나 배우지 않는 일이 없건만, 영화와 책에서만큼은 ‘저눔이 날 가르치려 들어? 건방지게?’ 하고 생각해 버립니다.


.. (김기덕) “가족들은 생계비를 벌지 못할까 봐 내가 시나리오 쓰는 것을 반대했고, 저는 길거리에서 사람들의 초상화를 그려 주면서 거리에서 타자기를 안고 시나리오를 썼습니다. 사람들이 대학 나온 사람들도 못하는 것을 한다고 포기하라고 한 적도 많습니다.” … “이제 저는 다수가 행복한 것보다, 한 나라가 행복한 것보다, 어떤 집단이 행복한 것보다 개인이 자유롭고 행복한 것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그 행복은 물질적 만족이 아니라 깨달음으로 반복하는 것입니다.” … “인정받지 못했다고 제가 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럴 때마다) 더 단단하게 제 생각을 고집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여전히 영화를 만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34∼35, 79, 97쪽)


 《나쁜 감독》을 읽다 보니, 김기덕이라고 하는 영화감독은 고작 ‘국졸’이고, 영화판에 따로 선후배나 스승이라 할 만한 줄이 하나도 없다고 합니다. 이런 까닭 때문에 찬밥이나 미운털이지는 않을 테지만, 거꾸로 생각하면, 오늘날 우리들은 ‘너무 많이 배우고, 너무 많은 가방끈을 움켜쥐고 있느’라 영화이고 책이고 사람이고 삶이고 스스럼없이 바라보며 껴안는 매무새를 스스로 놓쳐 버리지 않았느냐 싶습니다.

 머리속에 어떤 지식으로 가득가득 차 있으면 새로운 지식이 들어서지 못합니다. 머리속이 텅 비어 있어도 아무런 지식이 뿌리내리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우리 머리에 자질구레한 지식을 꽉 채워 놓고서 우리 둘레 사람들을 살갑고 넉넉하게 껴안지 못합니다. 또는, 우리 머리에 아무런 생각을 담아 놓지 않고서 우리 둘레 사람들을 깊고 너르게 살펴보거나 헤아리는 품이 없습니다.

 꽉 차서 야무진 듯 보이지만 갑갑하게 꽉 막혀 있는 셈이고, 확 트이거나 열린 듯 보이지만 썰렁하게 메말라 있는 셈입니다.


.. (김기덕) “저는 제 영화에 꼭 맞는 배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누구든 제 시나리오를 이해하고 시간이 맞는다면 가능합니다. 유명한 배우가 출연해서 영화가 잘되는 것보다 그 배우가 누구인지 모르고 영화를 다큐멘터리처럼 보는 게 저는 더 중요합니다.” … “저의 가장 큰 스승은 자연입니다. 제가 학교에서 지루하게 유럽 영화사를 외웠다면 다른 감독들과 다름없거나 감독이 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가 아는 한도 안에서 그냥 자유롭게 표현하고 싶습니다. 저는 아직 모르는 게 많다는 게 참 행복합니다.” ..  (54, 87쪽)


 다만, 김기덕 감독 영화가 빈틈없이 잘 짜이거나 훌륭하게 잘 엮이기만 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태까지는 잘 짜이거나 엮였다 할지라도 앞으로도 잘 짜거나 엮을지는 모르는 노릇입니다. 그저, 김기덕 감독은 김기덕 감독대로 온힘을 다해 당신 영화를 알뜰살뜰 일구어 선보이면 될 뿐입니다. ‘영화관 손님’은 영화관 손님대로, 영화관에 가는 까닭이 ‘영화를 보고 싶기’ 때문임을 잊지 말아야 할 뿐 아니라, 곰곰이 생각해야 합니다. 시간 때우기를 하러 가는 영화관입니까. 사랑놀이를 하려고 가는 영화관입니까.

 뭐, 사람에 따라, 또 때에 따라 시간을 때우거나 사랑놀이를 하려고 영화관에 마실을 갈 수 있어요. 언제나 어디서나 자유란 있으니까요. 그런데 영화관이 시간만 때우러 가는 곳은 아니요, 책방이나 도서관이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쐬러만 가는 곳은 아닙니다. 책을 보러 가면서 책 하나로 마음밥을 얻도록 하자는 책방입니다. 영화를 보러 가면서 영화 하나로 내 삶밥을 곱씹도록 하자는 영화관입니다. (4342.8.1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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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민주의와 언어 - 대만.인도.한국에서의 동화와 저항
손준식.이옥순.김권정 지음 / 아름나무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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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 하나 114 ― ‘식민지 한국’에서 못 벗어나는 우리들 말글
 : 손준식ㆍ이옥순ㆍ김권정, 《식민주의와 언어》


- 책이름 : 식민주의와 언어
- 글 : 손준식, 이옥순, 김권정
- 펴낸곳 : 아름나무 (2007.8.20.)
- 책값 : 12000원



 (1) 말글과 우리 삶


 날마다 ‘우리 말 이야기’를 꾸준하게 쓰고 있습니다. 날마다 살림을 꾸리고 아기를 함께 보고 책도 읽고 도서관도 추스르고 다른 여러 일을 보느라 눈썹이 휘날릴 판인데, 그렇다 해도 언제나 몇 꼭지나마 우리 말 이야기를 쓰면서 살아갑니다.

 저한테 밥벌이일 수 있으나, 밥벌이라기보다 일거리이고, 또 일거리라기보다는 제 삶입니다.

 처음부터 우리 말과 글을 생각하면서 살자고 마음먹지는 않았습니다만, 처음부터 우리 말 이야기 쓰는 삶에 제 모두를 맞추지 않았습니다만, 하루하루 살아가는 가운데 좀더 단단하고 튼튼하게 이 한길을 걷고 있는 모습을 봅니다.

 책을 읽으면서, 사람을 만나면서, 여러 일을 하면서, 다른 누구보다 저 스스로 늘 쓰는 말과 글을 얼마나 제대로 안 살피고 있었는가를 깊이 느꼈습니다. 둘레에서 말글과 얽힌 일을 하는 사람들이 얼마나 당신들 말글을 하나도 안 돌보거나 내팽개치는지를 뚜렷이 느꼈습니다.

 국어학자만이 아니라, 국어교사만이 아니라, 기자만이 아니라, 작가만이 아니라, 책쟁이만이 아니라, 또 지식인만이 아니라, 누구나 매한가지입니다. 연예인이나 노래꾼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정치꾼이나 공무원이라고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언제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든 한결같이 말글로 우리 뜻을 펼치고 나누고 일을 벌입니다. 막일을 하는 공사판 일꾼이라 하여 말글 하나 없이 일을 하겠습니까. 막일판에는 막일판 말이 있습니다. 학자님들이 좋아하는 ‘어려운 말’로 하자면 ‘건축 전문 용어’라 하는.


.. 학부모들은 ‘식민지 사회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영어를 선호했고, 그런 수요자의 요청으로 지역어로 가르치는 지방 초등학교에서조차 영어를 학과목에 포함했으며, 때로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로 개편되기도 했다 … 1930년대 간디가 제창하여 도입된 실생활에 근거한 ‘기초교육’은 소득과 사회적 상승이동이 전제되는 성공의 언어-영어로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에 환영받지 못했다 ..  (88, 93쪽)


 출판사에서 일할 때, 또 출판사 바깥에서 출판사 사람들을 만날 때, 예나 이제나 까마득하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합니다. 모두들 당신들 일터에서 너무 많은 일에 얽매인 나머지 당신 삶이며 말글이며 옳게 가누지 못하는 모습을 보기 때문입니다. 우리네 어느 곳이 안 그러겠습니까만, 책마을에도 숱한 일제강점기 찌꺼기말이 넘실거리고 있습니다. 편집을 하든 디자인을 하든 제본을 하든 인쇄를 하든 무얼 하든, 하나같이 일본말로 일을 합니다. 그리고, 늘 일본말로 일을 하면서 일본말로 생각하고 일하는 당신들 모습을 깨닫지 못합니다. 이러는 가운데 책 하나가 날마다 수없이 세상에 태어납니다.

 제가 몸담았던 곳은 퍽 생각깊고 괜찮다는 소리를 듣는 출판사였습니다. 그러나 이곳 또한 다른 출판사와 매한가지로, 사장님부터 관리영업 하는 사람들까지 하나같이 일본말 버릇을 떼어내지 않았습니다. 오랫동안 길든 탓이 있는 한편, 남 앞에서 꿀리기 싫고(일본말을 전문용어인 듯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일본말을 안 쓰면 꿀린다고 느낍니다), 괜히 ‘새로운 말(일본말을 털어낸 우리 말)’을 배우는 데에 품과 짬을 바치기 싫은 가운데, 처음부터 이런 데에는 아무런 마음이 없습니다.

 한낱 월급쟁이일 뿐이라고 할까요. 그저 다달이 회사일 알맞게 해 주고 다달이 빠짐없이 일삯 받아 가면 그만이라고 여긴다고 할까요.


.. 실제 신식교육을 받은 자제들 중 민족운동과 사회운동에 투신한 소수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식민통치의 유력한 협력자가 되었다 … 식민지 지배가 장기화되면서 타이완의 아동과 청소년들은 학교생활 적응과 상급학교 진학을 위해, 성인들은 취업과 생활상의 필요에 의해 일어를 배우지 않을 수 없었다. 즉 일어는 사회적 신분상승과 입신양명의 필수능력이 되었으며, 일어교육을 받은 타이완인 가운데 일어로 쓴 문학작품이 출판되거나 일본 유명 잡지의 문학상을 수상한 사람도 생겨났다 … 식민지인을 지배국의 언어로 가르쳐야 하는 이유는 매콜리가 영어교육을 받은 인도인이 머지않아 신심이 가득한 ‘갈색 피부의 기독교인’, ‘갈색 피부의 영국인’이 될 것을 굳게 믿은 데서 드러난다. 그의 말은 영어교육을 받은 인도인이 ‘피와 피부는 인도인이지만, 견해와 감각 그리고 도덕과 지성은 영국인’이 될 것이라는 낙관적 신뢰에 근거했다. 그는 영어교육을 통한 정치적 지배와 경제적 이용의 추구가 용이할 것이라고 믿었다. 통치를 받는 ‘갈색 피부의 영국인’은 자연스럽게 영국산 상품을 선호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  (30, 34∼35, 80쪽)


 바쁘고 힘드니까 어쩔 수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바쁘고 힘드니까 아무 말이든 함부로 해도 되는가 궁금합니다. 바쁘고 힘드니까 아이들을 대충 먹이고 입히고 씻기고 가르쳐도 되는가 궁금합니다. 바쁘고 힘드니까 학교에서 아이들을 대충 몽둥이찜질을 하고 교칙으로 옭아매면서 성적만 잘 나오게 길들이면 되는가 궁금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하느라 바쁠까요. 우리는 무슨 일을 해야 하기에 그리도 힘이 드는가요.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하고, 우리는 무엇을 하며 살아야 하는가요. 우리가 살아가는 뜻은 어디에 있고, 우리한테 목숨 하나 내려진 값은 어디에서 찾는가요.

 오늘 아침에는 ‘聖스럽다’와 ‘거룩하다’ 두 마디를 헤아리는 가운데, ‘屈하다’와 ‘굽히다’ 두 마디를 곰곰이 되짚어 보았습니다. 이렇게 네 마디를 낱낱이 돌아보는 데에만 해도 여러 시간이 걸렸습니다. 온갖 국어사전을 뒤적이고, 사람들 말씀씀이를 살피며, 제가 어릴 적부터 들어온 말마디를 되짚으면서, 우리가 오늘과 앞날에 걸쳐 가장 알맞고 즐겁게 쓸 말투와 말결을 찾느라 어느새 새벽이 밝고 아침해가 뜨고 골목길이 시끄럽습니다. 이제 아기가 깨어날 때가 다가오고, 아기한테 아침을 어떻게 먹일까 걱정해야 하며, 오늘 하루는 또 무슨 일을 하면서 보낼까 하는 생각이 가득합니다.

 허울좋게 ‘우리 말 다듬기’를 한다는 저부터, 말마디 한둘을 붙잡는 데에 온 하루가 꼬박 들어갑니다. 그러니, 따로 우리 말글을 돌아볼 겨를이 없이 우리 말글을 다루는 일을 하는 분들로서는 쉽게 엄두를 못 낼 만하다 싶습니다. 신문기자 가운데 당신 기사를 쓰면서 국어사전을 열 번쯤 뒤적이는 사람이 있기는 있겠습니까. 책 열 권 읽어 보고 쓰는 사람이 있기는 있겠습니까. 열 사람쯤 만나 보고 쓰는 사람이 있기는 있을까요.


.. 일제 때 학교교육을 받은 대부분의 타이완인은 대화시 많은 일어 어휘를 섞어야만 자신의 의사를 제대로 표현할 수 있었다 … 영국은 영어교육과 영문서적을 통한 인도인의 동화에 만족하지 않고 인도의 고전어인 산스크리트를 연구하여 식민주의 목표에 부합하도록 인도의 제도와 전통을 평가절하하는 정치작업도 병행하였다 … 영어와 서구를 가르치는 중등학교와 대학의 설립이 줄을 이었다. 기존의 교육기관은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개편되었고, 유럽과 영국의 역사를 가르치고 서양 정치이론을 소개했다. 영어교육은 식민통치를 이해하고 충성을 바칠 인재들을 창출하기 위해 물질적 진보와 정치적 진보, 도덕적 진보를 칭송했다.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와 대학에 들어간 인도 젊은이들은 점차 영국에 동화하였다. 영어와 서구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은 1857년 세포이항쟁에 가담하지 안고 식민정부를 편들었다. 영어를 배운 그들은 기득권이 걸린 식민체제를 지지하였다 ..  (43, 83, 84쪽)


 대여섯 살 아이들이 쓰는 말마디는 500∼700 낱말이라고 합니다. 초등학교 1∼2학년쯤 되는 여덟아홉 살 무렵이면 1200∼2500 낱말쯤을 쓴다고 합니다. 초등학교 3∼4학년 무렵이면 5000 낱말을 넘어서고, 초등학교 5∼6년에 이르면 1만∼2만 낱말을 아우른다고 합니다. 중학생이라 할 열넷∼열여섯일 때에는 5만을 넘어갈 테고, 고등학생이라 할 열일곱부터는 10만쯤 될 테지요. 여느 어른은 20만 낱말쯤을 ‘알아듣는다’고 이야기합니다. 말풀이를 줄줄 읊을 만큼 ‘안다’가 아니라, 이런 낱말 저런 낱말을 들려주었을 때 ‘어렴풋이 뜻이나 느낌을 알아듣는다’고 합니다.

 이런 흐름을 조금이나마 짚을 줄 안다면, 어른문학을 하는 이들이 섣불리 어린이문학을 해서는 안 되고, 할 수도 없습니다. 마땅한 노릇이지만, 20만 낱말을 아는 머리와 가슴으로 500 낱말이나 1000 낱말을 아는 아이들 눈높이에 알맞춤하게 문학을 한다는 일은 하루아침에 이룰 수 없을 뿐더러, 알맞지 않습니다. 어린이 눈높이라 한다면, 500 낱말만 가지고도 우리 삶터와 사람과 세상을 두루 읽어내고 헤아리고 꿰뚫고 나눌 수 있도록 내 매무새와 눈길을 다스린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우리 지식인 가운데, 우리 문학쟁이 가운데, 우리 교사 가운데, 우리 부모 가운데, 이와 같이 아이들 눈높이에 따라 말을 하고 글을 쓰고 이야기를 나누는 어른은 얼마나 되겠습니까.

 괜히 ‘쉬운 말’을 쓰라고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모든 아이가 모두 아이큐가 아주 높거나 똑똑하지는 않으니까요. 더구나 모든 사람이 대학생입니까? 모든 사람이 대학원까지 다녀야 합니까? 초등학교만 나오고 사회살이를 하면 안 됩니까? 아예 아무 학교도 안 다니면서 우리 세상을 슬기롭고 씩씩하게 살아가면 안 됩니까?

 말이란, ‘말하는 사람 자리’가 아닌 ‘듣는 사람 자리’에서 해야 합니다. 글이란, ‘글쓰는 사람 자리’가 아닌 ‘읽는 사람 자리’에서 써야 합니다.

 나 혼자 아는 이야기를 용두질을 하듯 주절거리는 말이나 글이 아니라, 내가 먼저 알아챈 이야기를 어깨동무를 하듯 살갑고 구수하게 나누는 말이나 글이 되어야 합니다.


.. 정신적 측면의 중요성을 간파한 일본은 일본어를 식민사회의 동화를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삼았다. 왜냐하면 식민사회에서 언어는 식민통치 권력과 차별의 정치와 연계된 정신적 지배의 다른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식민지 사회에서 언어문제와 관련된 정책은 늘 가시적인 억압인 물리력을 동원하기보다 비가시적인 장치로, 이른바 ‘문명화’라는 인도주의적 프로그램으로 위장하여 사회 통제의 틀을 조성하는 효율적인 수단이 된다 … (식민지 정부는) 일본어는 근대사회의 무지몽매한 야만에서 깨어나 근대적 지식을 학습하고 계몽하는 문명화의 도구일 뿐만 아니라, 문명사회에서 뒤처지지 않고 개인의 사회적 지위를 상승시키는 수단임을 역설했다. 일제는 강점 말기까지 시종일관 이런 논리를 주장했다 … 일제는 3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갖고 있으며 조선민족이란 명확한 자각심을 갖고 있는 조선인을 어떻게 일본 천황에게 목숨을 바칠 수 있을 정도의 일본국민으로 동화시킬 것인가라는 문제의식 속에서, 장기적으로 일본어야말로 그러한 세계관과 이념을 전달하고 내면화시킬 최적의 수단임을 확신하며 일본어 동화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 나갔다 ..  (131, 136, 138쪽)


 머리를 식히거나 몸을 쉬려고 보리술을 사다 마십니다. 나라안에서 빚은 보리술을 마신답시고 가게에 들르는데, 가게마다 놓고 있는 어느 보리술이건, 한글 이름이란 없습니다. 모조리 알파벳을 드러내어 적습니다. 나라밖으로 내다 파는 보리술 같지는 않지만, 나라밖으로 내다 판다는 보리술이라 할지라도, 우리 스스로 우리 글을 좋아하거나 섬기는 모습이란 눈꼽만큼도 없습니다.

 영국사람이나 미국사람은 마땅히 알파벳으로 영어 이름을 적습니다. 독일사람은 독일글을 붙이고 프랑스사람은 프랑스글을 붙이며 벨기에사람은 벨기에글을 붙입니다. 중국사람 또한 중국글로 딱지를 붙입니다. 그런데 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은 한국글과 일본글을 좀처럼 안 붙입니다. 그나마 일본사람은 일본말로라도 이름을 짓는데, 한국사람은 한국말로조차 이름 지을 생각을 안 합니다.

 이런 매무새는 자동차 앞에서도 똑같고, 가전제품 앞에서도 거의 같으며, 과자 이름 앞에서도 매한가지입니다. 옷이름이나 신발이름은 어떻습니까. 손전화에 붙이는 이름이나 아파트에 붙이는 이름은 어떠하지요? 관공서와 학교에서는 어떤 말마디로 우리 삶을 다스리려고 합니까?


 (2) 힘있는 사람 말과 힘여린 사람 말


 제가 하는 ‘우리 말 다듬기’에서는 웬만한 ‘한자말’은 다 덜어내려고 합니다. 작은따옴표를 ‘한자말’에 달았습니다만, 곰곰이 따지면 한자말이라고 덜어내야 하는 말이 아닙니다. ‘웬만한’ 한자말일 때에 덜어내야 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한자말이든 일본말이든 미국말이든 서양말이든 중국말이든, 우리가 ‘꼭 써야 할’ 말이라면 어김없이 받아들일 노릇이기 때문입니다. ‘살살이꽃’이라는 우리 이름이 있습니다만, ‘코스모스’ 같은 꽃이름을 받아들이는 일은 그렇게까지 얄궂지는 않습니다. 저는 ‘셈틀’로 다듬어 쓰지만 ‘컴퓨터’를 영어라고 느끼는 사람이 얼마나 있겠습니까. 그냥 써도 괜찮습니다.

 그러나, ‘찾기’를 굳이 ‘검색(檢索)’으로 적어야 하겠습니까? ‘고침/고치기’를 구태여 ‘수정(修正)’으로 적어야 합니까? “버스에 타다”면 되지 “버스에 승차(乘車)하다”라 해야 할 까닭이란 없습니다. “자전거를 타다”면 넉넉하지 “자전거를 이용(利用)하다”라 해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웬만한’ 한자말을 덜어내려고 합니다. 털어내려고 합니다. 씻어내려고 합니다. 벗어던지려고 합니다. 솎아내려고 합니다. 몰아내려고 합니다.


.. 타이완총독부의 교육정책은 타이완인 자체를 진심으로 교육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타이완인들이 일어를 알아듣고 말할 수 있게 하여 일본인으로 동화시키는 데 최종 목적이 있었다. 이런 점에서 한문 교육은 단지 타이완인 학부모가 자녀를 공학교에 보내도록 유혹하는 일종의 미끼에 불과했다 … 식민당국은 타이완인을 ‘충량(忠良)’한 일본신민으로 동화시키기 위해 일어 보급을 시정의 최대 목표로 삼고, 한문화의 생장 기회를 제거하고자 … 타이완 각지에서 올라와 서로 다른 방언을 사용하는 학생들이 모인 도시 학교에서 일어는 수업시간만이 아니라, 아이들 간의 놀이와 교제에 필요한 공동 언어였다 ..  (19, 21, 26∼27쪽)


 우리는 ‘어느 만큼 쓸 만해서’ 쓰는 바깥말을 들여와서는 안 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참으로 쓸 만할’ 때 비로소 들여와야 한다고 느낍니다. ‘무엇보다 쓸 만하’고 ‘더없이 쓸 만하’지 않고서야 들여와서는 안 된다고 느낍니다.

 ‘시니컬’이니 ‘아우라’니 ‘태스크 포스’니 하는 말을 왜 써야 할까요? ‘에너지’야 이제는 영어로 느끼기 어려운 들온말이 되었습니다만, ‘태양에너지(太陽energy)’ 같은 말마디는 얼마든지 ‘햇볕힘’으로 걸러낼 수 있다고 느낍니다. 사진쟁이들은 사진을 놓고 ‘사진’이 아닌 ‘포토’라 하고, 스스로를 가리켜 ‘사진가’나 ‘사진작가’가 아닌 ‘포토그래퍼’라 할 뿐더러, 아예 알파벳으로 끄적이기까지 합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한테는 ‘사진기-필름사진기-디지털사진기’입니다. ‘카메라-필름카메라-디지털카메라’가 아닙니다.

 반드시 우리 삶으로 받아들여야 할 낱말이 아니라면 한자로 된 말이든 알파벳으로 된 말이든 물리칠 노릇입니다. ‘사진기’라는 낱말 하나 들여왔으면 이 낱말로 넉넉하지, 다시금 ‘카메라’로 고쳐서 두 가지를 뒤섞어 쓸 까닭이란 없습니다. 이럴 바에는 우리 깜냥껏 우리 말로 ‘사진기’를 풀어내는 데에 힘을 쏟고 땀을 바쳐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 식민지배자의 언어를 가르침으로써 식민지인을 그들의 사회와 전통으로부터 소외시키고 식민지배의 문화구조로 흡수하고 동화하려면 목표는 “일단 전함과 외교관을 보낸 뒤에 영어교사를 보낸다.”라는 익명의 영국인 국제기관 책임자의 말에서 명확하게 드러난다 … 고조된 배일감정과 달리 상당수의 조선인은 별다른 거부감 없이 이에 편승하고 있었다. 일본인이 성립한 강습소ㆍ야학에 대한 호응이 당시 이러한 상황을 반증하는 부분이다 … 1910년 이전의 일본어 보급은 친일세력의 육성을 통한 침략의 일환에서 추진이 이뤄지고 있었다 ..  (73, 140쪽)


 그러나, 오늘날 우리들은 우리 슬기를 빛내어 우리 말을 아끼고 사랑하는 일에는 모래 한 줌만큼이나마 마음을 쏟지 않습니다. 사회가 그렇습니다. 정치와 경제가 그렇습니다. 문화와 예술이 그러하고, 교육이 그렇습니다. 서울 강남까지 가지 않더라도, 시골마을이나 도시골목이나 마찬가지인데, 집집마다 아이들한테 영어를 얼마나 일찍 더 많이 가르치느냐에 마음쏟지, 아이들한테 얼마나 싱그럽고 아름다운 자연을 선사하면서 아이들이 얼마나 착하고 바르고 훌륭하고 튼튼하고 씩씩하게 크느냐에는 마음쓰지 않습니다.

 그나마 저는 어릴 때 ‘밥을 가려먹어’ 몸이 안 좋은 탓에 공부보다는 ‘씩씩하고 튼튼하게 커 다오’ 같은 말을 더 자주 들었고, 틈만 나면 골목길이나 동네 놀이터에서 뛰놀았습니다. 이제는 허물리고 없는 인천공설운동장 안쪽 빈터에서 동무들하고 야구놀이를 했고, 대나무 낚시대를 500원에 사서 바닷가 갯벌로 망둥이 낚시를 다니곤 했습니다.

 집에 전집책이 몇 가지 있기는 했으나, 이 책을 읽기보다는 바깥에서 뛰어놀기를 좋아했고, 해질 무렵까지 학교 운동장에서 동무들하고 놀다가 선생들한테 쫓겨나기 일쑤였습니다.

 이리하여 제가 쓰는 말은, 또 제가 ‘우리 말 다듬기’를 하는 바탕으로 삼는 말은, 이렇게 신나게 뛰놀던 어릴 적 제 삶에 따라서 살피고 헤아리고 생각합니다. 어릴 적 동무들하고 나누던 말마디와, 어릴 때 동네 어른들이 들려주던 말마디 가운데 가장 싱그럽고 살갑다고 느끼는 말마디를 곱씹습니다.

 가장 어린 사람들 말마디를 아끼려 하고, 가장 적게 배운 사람들 말마디를 돌보려 하며, 가장 힘이 여린 사람들 말마디를 보듬으려 합니다. 곰곰이 따지면, 한자말이든 미국말이든 또 무슨 다른 바깥말이든, 한결같이 힘이 있는 사람들이 쓰는 말이기도 하거든요. 가방끈으로 힘이 있든 돈으로 힘이 있든 권력자리에서 힘이 있든 하는 사람들은, 여느 사람들 말마디를 쓰지 않습니다. 어린이들 말마디를 쓰지 않고, 늙은이들 말마디나 달동네 사람들 말마디를 쓰지 않아요. 이를테면 반지하나 옥탑방을 모르면서 ‘서민 집 정책’ 읊는 정치꾼들은 ‘서민’이라 하는 가난하고 힘없는 사람 살림집을 돌보는 일을 어떻게 해야 하는 줄 제대로 모르면서 정책을 꾸리는 셈인데, 많이 배워서 안다는 분들(지식인이나 공무원) 또한 여느 사람 삶자리를 거의 모르는 가운데 당신들 눈높이에서만 말마디를 내놓습니다.


.. 우선 조선총독부는 일본어의 명칭을 ‘국어’로 변경하고, 조선인의 언어를 ‘조선어’로 낮추는 동시에, 이를 하나의 ‘지방어’ 내지 ‘주변어’로 규정했다 … 당시 일본어 습득에 필요한 교재 확보가 쉽지 않았던 반면, 신문 구독은 지방관에 의해 마을 주민 전체를 대상으로 널리 이루어졌다. 신문 보급은 식민정책을 선전ㆍ홍보할 뿐만 아니라 일본어 보급의 주요 수단이 되었다 ..  (140, 142쪽)


 우리는 지난날 오래도록 중국한테 식민지처럼 눌려 왔습니다. 이른바 ‘사대주의’라는 이름으로. 삶과 문화와 살림살이 죄다. 그 기나긴 사대주의를 거친 다음 일본제국제의한테 짓눌리며 식민지로 지냈습니다. 그러고 나서 곧바로 미국한테 정치권력을 내어주면서 경제며 사회며 정치며 문화며 교육이며 예술이며 과학이며 기술이며 송두리째 얽매인 삶을 꾸립니다.

 이 세 가지 식민지 가운데 일제강점기만 ‘대놓고 식민지’였고, 대놓고 식민지였던 그무렵 쓰던 말을 놓고만 ‘일본말 찌꺼기 털어내기’를 말할 뿐입니다. 오래도록 사대주의였던 중국에서 들여온 말과 글을 털어내어 우리 말과 글을 찾는 데에는 마음을 기울이지 못하는 우리들입니다. 또한, 모든 곳에서 미국말이 스며들고 미국 문화가 배어드는 모습을 느끼지 않거나 좋게만 느끼며 조금도 씻어낼 마음이 없는 우리들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모습 찾는 데에는 눈을 두지 않고 생각을 쏟지 않으며 뜻을 새기지 못합니다.


 (3) 《식민주의와 언어》라고 하는 책은


 군대힘으로 다른 나라를 억누르면서 돈-땅-사람-자연을 어질러 놓고 울궈간 힘센 나라들이 어떻게 ‘식민지로 삼은 나라를 옭죄려 했는가’를 말글 테두리에서 살핀 책 《식민주의와 언어》를 읽습니다. 이 책은 세 갈래로 나누어 놓았습니다. 먼저, 대만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 다음은 인도를 식민지로 삼은 영국. 그리고 한국을 식민지로 삼은 일본.

 대만과 인도와 한국은 퍽 긴 나날에 걸쳐 식민지로 눌려 있었고, 식민지로 눌려 있는 동안, 지식인이건 여느 사람이건 ‘식민지 나라에 마주하는 매무새’가 꼭 닮았다고 합니다. 군대힘이 없어 식민지가 되었으니 하루아침에 다시 홀로설 날을 맞이하기 힘들다고 여기며 ‘권력자(식민주의자)’한테 빌붙는 길로 접어들었다고 합니다. 힘과 돈과 이름을 누리는 사람들은 굳이 ‘해방-독립’을 꿈꾸지 않을 뿐 아니라, 힘과 돈과 이름이 없는 사람들조차 해방이나 독립을 꿈꾸지 못하는 가운데, 낮은자리에서 솟구쳐오르는 저항이 있기는 해도 높은자리 사람들은 이 흐름에 어깨동무하지 못하곤 했답니다.

 그나저나 이 책 《식민주의와 언어》를 읽는 마음이 썩 가볍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이 책에 쓰인 온갖 말글은 다름아닌 우리가 지난날 일본제국의자한테 억눌려 있을 때 그네들이 쓰던 낱말이요 말투이거든요.


.. 당초 일어 학습에 부정적이었던 타이완인들이 유창한 표준 일어 사용을 자랑스럽게 여기기까지 채 50년도 걸리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 영어를 배운 인도인은 지배자의 문화와 가치를 우수한 것으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미래와 실용성ㆍ우월성과 연계되지 않는 자신들의 과거와 언어를 가치없는 것으로 폄하하였다 … 영어로 서구의 근대를 배운 그들은 모국어에서 소외되고 식민지배자가 소지한 개화와 진보, 근대성을 선망했다 ..  (35, 98∼99쪽)


 이 책을 쓰신 분들만 일제강점기 찌꺼기말에 길들여 있지 않습니다. ‘식민주의와 말’을 다루는 분들이라고 해서 말마디를 남달리 추스르거나 다스릴 수 있지 않습니다. 여느 학자와 마찬가지이고 여느 교수와 마찬가지이며 여느 지식인하고 똑같습니다. 우리 삶터는 이와 같은 말마디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리 생각은 이와 같은 말마디로 주고받습니다. 우리 넋과 얼은 이와 같은 말마디로 가득 차 있습니다.


.. 이들이 해방 이후 한국사회의 엘리트 지식인으로 자리잡아 문화적 헤게모니를 장악하였고, 그들에게 내면화된 식민지 의식들이 각종 문화적 담론 및 매체들을 통해 재생산 및 복제되고 있는 점을 보면, 일제의 언어 동화 정책은 장기적으로 성공한 것이었다고도 볼 수 있을 것이다 ..  (174쪽)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어느 하나 틀리지 않습니다. 더구나, 책 끄트머리에서 말하듯 “식민지 일본 언어 동화 정책은 멀리 내다보았을 때 성공”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다만, 이런 흐름을 헤아리는 사람이 몹시 드물고, 이런 흐름을 헤아렸다고 하더라도 우리 스스로 우리 생각과 삶과 말을 고치려 하는 사람은 더욱 드뭅니다. 이런 이야기를 ‘학문으로 다루는 책’은 나올지온정, 하나하나 낱낱이 삭이고 가다듬고 갈고닦으면서 우리 스스로 달라지거나 새로워지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합니다.

 그예 책으로 그칩니다. 그저 지식이나 교양으로 머뭅니다. 한낱 학문에서 맴돕니다. 책도 좋고 지식과 교양도 좋으며 학문도 좋습니다만, 삶이라는 테두리에서 우리 온몸과 온마음에 스며들지 못합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앞으로 쉰 해나 백 해쯤 흐른 다음에는, 《식민주의와 언어》에서 다룬 ‘인도와 영국’ 이야기가 ‘한국과 일본’ 또는 ‘한국과 미국’ 이야기하고 한동아리처럼 다루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겉으로는 독립된 나라 한국이지만, 속으로는 홀로서기까지 한참 먼 한겨레입니다. (4342.7.2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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