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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가의 요람
유미리 지음 / 고려원(고려원미디어) / 1998년 4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39 ― 아픈 삶, 아픈 사람, 아픈 집
 : 유미리, 《물가의 요람》


- 책이름 : 물가의 요람
- 글 : 유미리
- 옮긴이 : 김난주
- 펴낸곳 : 고려원 (1998.4.10.)
- 판이 끊어져 헌책방에서만 만날 수 있음.



 (1) 아프면서 꾸리는 삶이란


 엊그제 낮, 헌책방에서 《戶部けいこ-光とともに》(秋田書店)라는 만화책 5권(2004년 나옴)을 만났습니다. 책 겉에 ‘자폐증 아이’라는 말이 적혀 있어 덥석 집어들었습니다. 책에 담긴 그림결은 순정만화인데 저로서는 그닥 좋아하지 않는 투입니다. 그러나 장애 있는 아이를 다룬 만화책은 모조리 사들이고 있는 터라 이 만화책도 함께 셈을 했습니다. 줄거리를 읽을 수는 없으나 그림만 넘겨 보면서도 ‘일본은 우리와 견주어 문화며 사회 얼거리이며 몹시 앞서 있지만, 사람들 하나하나를 놓고 들여다보면 우리하고 매한가지로 엉터리인 사람도 많음’을 새삼 느낍니다. 이는 일본이 아닌 미국이나 독일이나 프랑스라고 할 때에도 크게 다르지 않겠지요.

 이날 저녁, 터덜터덜 홍대 앞 만화가게에 들렀을 때에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자음과모음) 1권(2003년에 옮김)을 장만합니다. 이날은 다른 볼일 때문에 서울 마실을 했습니다만 이모저모 일이 틀리면서 하루가 어긋나 버렸습니다. 굳이 서울로 나오지 않아도 되었지만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간을 모두 버리고 말았습니다. 저를 부른 분이 당신 형편만 헤아리느라 저로서는 온 하루를 잃었는데 그분은 당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모릅니다. 씁쓸하고 허전하여 만화가게에 들렀는데, 뜻밖에도 《光とともに》가 우리 말로 나와 있음을 알았습니다. 게다가 2003년에 나와 있었군요.

 집으로 돌아와 두 가지 책을 쓰다듬으면서 너털웃음을 웃습니다. 이날 얄궂게 약속을 잡은 그분이 아니었다면 시간죽이기를 하느라 헌책방 나들이를 하지 않았을 터이고, 저녁에 다시 만화가게를 찾지 않았겠지요. 아이와 함께 씨름할 하루를 빼앗아 준 그분이 아니었다면 씁쓸하거나 허전한 마음이 아니었을 터이며, 씁쓸하거나 허전한 마음이 아니었다면 일부러 만화가게 구석구석을 살피며 아쉬움을 달래지 않았을 터입니다. 앞으로도 이렇게 제 삶을 고단하게 하는 매무새를 고치지 않는다면 그분하고 어울리거나 엮일 일은 만들지 않을 생각인데, 앞날이 어찌 되든 저로서는 제 삶을 단단히 붙잡아야 한다고 새삼 깨닫습니다. 만화책 《사랑하는 나의 아들아》 1권 246쪽을 보면, ‘장애 아이를 따뜻하게 반기며 슬기롭고 사랑스레 잘 가르치는 일반 초등학교 여자 교장 선생님’이 ‘자폐 아이를 어느 초등학교로 보내야 할지를 놓고 몹시 걱정하고 힘들어 하는 주인공 엄마’한테 기운을 북돋워 주면서 ‘아이 엄마 당신을 괴롭히는 몹쓸 공무원이라 하더라도 그 사람까지 설득을 해서 당신 아이를 이 학교로 넣을 수 있도록 정식 서류를 받아내도록 하십시오’ 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 아이가 제 옆에서 아빠 따라 책을 보고 있는 동안 아빠는 만화책을 보며 이 대목에서 눈물이 글썽했습니다. 이 대목 하나에서 조용히 피어오르는 숨결을 느끼면서, 아픈 삶은 아픈 삶대로 아름다울 수 있다고 깨달았습니다. 아프기 때문에 더는 아프지 않으려고 용을 쓰고, 아프기 때문에 생채기를 어루만질 수 있으며, 아프기 때문에 내 생채기와 마찬가지로 다른 사람 생채기를 느끼고 돌아보고 어루만질 수 있습니다.

 이리하여 성경이든 불경이든 가난만큼 우리한테 좋은 벗님이 없다고 이야기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우리한테 주어진 가난만큼 우리를 일으키거나 일깨우는 고마운 스승이 없다고 이야기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그러나 오늘날 숱한 예배당과 목회자들은 가난하고 동떨어져 있기 일쑤입니다. 좋은 벗님인 가난을 곁에 두지 못합니다. 고마운 스승인 가난을 옆에서 섬기지 못합니다.

 가난뿐 아니라 아픔을 벗님으로 사귀거나 스승으로 모시지도 못합니다. 돌아가신 권정생 할아버지나 이오덕 할아버지는 가난이든 아픔이든 힘겨움이든 고단함이든 모두 좋은 벗님으로 사귀었고 고마운 스승으로 모셨습니다. 권정생 할아버지는 당신을 찾아오는 사람 누구한테나 “제발 내 대신 아파해 달라.”고 끊임없이 이야기했습니다만, 이 말마디를 옳게 받아들이거나 삭이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그저 할배가 나이들고 많이 아프니까 투정부리듯 되뇌는 말이라 여기며 한귀로 흘리기 일쑤였어요. 당신은 온삶을 가난과 아픔을 곁에 두면서, 아니 온몸으로 살아내면서 참으로 버겁고 힘들었지만 이렇게 버겁고 힘든 까닭에 좋은 사람도 알게 되고 글쪼가리도 끄적이며 아이들하고도 가까이 지낼 수 있었으며 좋은 곳도 구경하고 맛난 밥도 먹어 본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굳이 먼 나라로 찾아가야만 아름다운 풍경을 구경할 수 있는 삶이 아니요, 애써 나라밖 이야기를 찾아 읽어야만 아름다운 마음씨를 기를 수 있는 삶이 아닌데, 우리들이 머리나 눈이나 손을 모두 바깥으로만 돌리고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부터 제 삶을 살찌우는 이야기를 먼 데에서 찾고 싶지 않습니다. 제가 하루하루 걸어가는 이 길만큼 저한테 아름다울 길이 없다고 느낍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아픈 옆지기를 만나 아웅다웅 툭탁툭탁 지내면서 날마다 새롭게 배우며 깨닫습니다. 집삯과 도서관삯으로 달삯을 다달이 칠십만 원 내야 하는 팍팍한 살림을 꾸리며 한 달 벌이가 백만 원이 채 되지 않으니 모이는 돈은커녕 나가는 돈 맞추기에 힘들지만, 이러면서 하루하루 골치아픈 모든 삶자락이 꽤나 재미있고 보람찹니다. 아이가 나중에 무럭무럭 크고 난 다음에는 우리들(저와 옆지기)하고는 안 놀고 다른 좋은 동무나 세상을 찾아 떠나겠습니다만, 아직까지는(앞으로 열 살 때까지는) 엄마나 아빠 곁에 찰싹 붙어 함께 놀고 싶고 안기고 싶으며 노래를 부르거나 장난질을 하거나 책을 읽고 싶어합니다. 아이하고 함께 지내는 동안 그야말로 아무 짓도 못합니다. 지금은 옆지기가 바느질을 하면서 노래를 불러 주니 아이가 엄마 곁에서 옹알옹알거리면서 놀아 주기에, 저는 고마운 말미를 얻어 이렇게 글을 쓸 수 있습니다(그렇지만 이렇게 놀기는 잠깐, 아이는 아빠 둘레에서 안기고 뛰고 어지르며 놀고 있습니다). 그러면 저는 이따가 손빨래를 하면서 아이하고 함께 물놀이를 하고 아이를 씻기고 머리를 감기면서 옆지기가 느긋하게 쉴 말미를 마련해 주어야지요. 딱히 서로 일을 나누거나 시간을 쪼개어 아이를 보기로 하지 않고, 늘 복닥이면서 알맞게 맞추어 줍니다. 집에서 아이를 함께 돌보지 않는 수많은 아빠들은 잘 몰라서 그렇지, 집에서 하루 내내 아이하고 복닥이고 씨름하며 얼크러지는 나날이란 우리한테 더없는 아름다움이며 기쁨이 됩니다. 아이하고 복닥이며 아무 일을 못하지만, 아무 일을 못하도록 할 만큼 아이는 쉴새없이 나댈 뿐 아니라 귀엽습니다. 아이하고 씨름하며 팔다리 쑤시고 결리고 저리지만, 쑤시고 결리고 저리는 만큼 아이와 어버이는 살갗과 살갗을 거쳐 따스함을 몸에 새기며 사랑을 나눕니다. 아이하고 얼크러지며 이제까지 이루어 온 모든 삶고리가 흐트러지지만, 이렇게 이제까지 이루어 온 모든 삶고리가 흐트러지면서 세상을 새롭게 바라보고 깊이 들여다보며 널리 헤아리는 눈썰미를 얻습니다. 아이하고 지내는 만큼 책방마실이든 골목마실이든 덜 할 수밖에 없는데, 바깥마실을 덜 하면서 그동안 장만하여 읽던 책이란 지식조각만 담긴 책이 많았음을 새롭게 알아채고, 굳이 더 많은 사진을 찍지 않아도 내 보금자리가 깃든 골목동네가 얼마나 고운가를 보여줄 수 있음을 익힙니다.

 누군가는 아이를 두고 하늘이 내린 선물이라 하고, 누군가는 아이를 가리켜 세상에 둘도 없는 보배라고 합니다. 아이키우기만큼 나를 키우는 일이 더 없다 할 터이고, 아이키우기를 하는 집만큼 나를 가르치는 배움터가 더 없다 할 터입니다. 세상 숱한 어머니들은 아이키우기를 거의 도맡으면서 ‘책을 못 읽’고 ‘학교도 못 다니’며 ‘일터도 못 나간’달지라도 아이키우기를 조그마한 집에서 하는 동안 누구보다 크고 깊고 거룩한 사랑과 앎과 슬기와 믿음을 온몸으로 받아들인다 하겠습니다. 세상 숱한 아버지들은 아이키우기를 어머니한테만 맡기고 바깥으로 나돌면서 이름을 얻고 돈을 벌고 힘을 키운다지만, 정작 한 사람으로서 나를 북돋우며 옳고 바르고 맑고 싱그럽게 이끌어 가는 참다운 길은 만나지 못한다고 하겠습니다. 제아무리 수많은 책을 읽으면 무엇하겠습니까. 바로 우리 식구한테 쏟을 사랑이 어디에서 어떻게 샘솟는지를 모르는데요. 제아무리 크나큰 돈을 벌면 무엇하겠습니까. 내 식구와 이웃 식구를 두루 껴안고 아끼는 씀씀이를 기르며 주머니를 기쁘게 열어젖히는 나눔을 펼치지 못하는데요. 제아무리 팔뚝힘이 세고 두루두루 안 다닌 곳이 없다 할 만큼 골골샅샅 누벼 보았다 한들 무엇하겠습니까. 정작 우리 식구들 뿌리내리고 있는 동네가 어떠한 곳인지를 제대로 살피지 못하는데요.

 누구나 죽는 삶이요, 누구나 새로 얻은 삶입니다. 누구나 흙으로 돌아가는 삶이요, 누구나 흙에서 목숨을 얻는 삶입니다. 다른 목숨을 먹으며 내 목숨을 지키고, 내 목숨을 다른 목숨한테 내어주면서 세상은 차근차근 돌아갑니다. 아프면서 크고, 크면서 아프며, 아프면서 손을 잡고, 손을 잡으며 아픕니다. 아픈 가난이면서 가난한 아픔이요, 아픈 가난이기에 하루하루 더 살뜰히 붙잡으며 보듬고 이웃하고 어깨동무를 합니다.


 (2) 아픈 사람 유미리


 유미리 님 산문을 모은 책 《물가의 요람》을 읽었습니다. 재일조선인으로 글을 쓰는 손꼽히는 한 사람인 유미리 님인데, 이분이 쓴 책은 여태껏 한 권도 읽지 않았습니다. 이름 널리 난 글쟁이 작품은 그리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일본에서 무슨 문학상을 받았다는 이름값을 겉에 큼직하게 내세우는 작품 또한 그리 좋아하지 않는 탓입니다. 그런데 《물가의 요람》은 읽었습니다. 이 작품은 소설이 아닌 수필이었기에 눈길이 갔고, 이제는 저 멀리 사라지고 만 출판사 고려원에서 일찌감치 옮긴 작품이기에 손길이 갔습니다.

 고등학교에서 쫓겨난 유미리 님이 들어간 연극단을 맡고 있던 분은 유미리 님한테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당신의 가족, 지금까지 있었던 일 전부 다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마이너스적 요소라고 생각하겠지만 연극을 하게 되면 그 모든 것이 플러스 요인으로 뒤바뀔 겁니다. 그것을 당신의 재능이요, 자랑으로 여기는 편이 좋을 것입니다(199쪽).”

 문득 궁금해서 유미리 님과 얽힌 이야기를 찾아보니, 요즈음은 우리 나라에 옮겨지는 책이 거의 없으며 그다지 읽히지 않습니다. 여러 해 앞서 유미리 님 이야기를 다룬 취재 기사 하나가 뜨기에 주욱 읽어 보니, 유미리 님은 당신한테 새 삶을 보여준 연극단장 히가시 씨를 곁에서 돌보며 죽는 날까지 지키 주었고, 애 있는 남자와 사귀어 아이를 낳아 고양이 열한 마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답니다. 취재 기사에서 “아기를 낳고 그랬지요. 그때까지는 ‘관념’이었지요. 10대 때 자살을 시도하고, 학교에서 퇴학 처분을 받고, 막다른 길을 걸어갈 때, 삶과 죽음을 생각할 수밖에 없다는 기분은 들었지만 관념적이었지요. 하지만 히가시씨를 죽음으로 보내고, 젖먹이를 껴안고, 살아갈 수밖에 없다는 것을 절감했을 땐 관념이 아니었지요. 이런 경험이 없었다면 결국 글을 쓰지 못했을 거예요. 다케하루를 낳지 않고 히가시가 죽지 않았다면.” 하고 이야기를 하는데, 취재 기사를 읽으며 고개를 절로 끄덕였습니다. 제 몸으로 아이를 낳지 않았으나, 옆지기가 아이를 낳는 날부터 내내 함께 지내 오고 있는 동안 ‘아이를 낳아 기르기 앞서까지는 오로지 생각’이었고 ‘아이를 낳아 함께 돌보며 살아가는 오늘은 바로 삶’이라고 느낍니다.

 일본에서 당신 작품 《돌에서 헤엄치는 물고기》가 실제 한 사람 삶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해서 재판을 받았고 판매금지 처분을 받았다는 유미리 님입니다. 세상 어느 작품이 ‘누군가 살아온 이야기를 안 다루’고 있겠습니까마는, 유미리 님은 사랑 잃은 법으로 생채기를 받았습니다. “글을 쓴다는 것은 밟고 상처를 입히는 과정이 아닌가 생각해요. 곱고 예쁜 일은 아니지요. 쓴다는 것은 ‘쓰는 사람’과 ‘쓰여지는 사람’이 모두 일어설 수 없을 만큼 상처를 입는다고 할까, 상처를 입히지 않으면 쓸 수 없고, 밟지 않으면 쓸 수 없어요. 자신을 상처를 입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쓰고 싶다는 원망(願望)이 아니라 쓰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을 때, 그땐 쓸 수밖에 없지요. 누구를 상처 입히든….” 하는 이야기를 읽으며, 《물가의 요람》이라는 책을 읽었을 당신 아버지나 어머니나 동생들이나 예전 초중고등학교 적 동무나 교사 들이나 유미리 님을 성폭행했던 이웃집 아저씨는 어떤 얼굴이요 마음일는지 궁금합니다. 다른 한 사람 삶에 생채기를 남긴 이들은 당신들 삶 발자국이 책 하나에 고스란히 담기는 일을 어떻게 받아들일는지 궁금합니다.

 《물가의 요람》이라는 책에서 유미리 님이 아버지와 어머니 이야기를 쓴 대목을 옆지기한테 소리내어 읽어 줍니다. 어떻게 유미리 님 아버지나 어머니는 이렇게 생각이 없이 살아가며 아이한테 생채기를 줄 수 있을까 하고 물었더니, 옆지기는 유미리 님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외롭고 아픈 사람들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유미리 님이 아닌 유미리 님네 아버지와 어머니가 외로운 사람? 아픈 사람?

 옆지기하고 곰곰이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합니다. 유미리 님뿐 아니라 유미리 님을 둘러싸고 당신을 괴롭히고 따돌린 숱한 또래 동무나 이웃이나 집식구 모두 ‘마음을 살뜰히 터놓으며 어우러지지 못하는 굴레’에 갇혀 있구나 싶습니다. 이네들 모두 마음 한 자락에 생채기가 있는데 이 생채기를 살가이 어루만져 주는 벗님이 없습니다. 아니, 스스로 제 생채기를 보듬을 수 있으며 처음부터 생채기가 나지 않게끔 삶을 다스릴 수 있었으나, 이와 같은 길을 걷지 않습니다. 걷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요. 좋은 벗님 가난을 내치기만 할 뿐이요 고마운 스승 아픔을 손사래치기만 합니다. 나를 사랑하는 길은 나한테 있는데 엉뚱한 데만 찾고 있습니다. 나를 아끼는 길은 나한테 있으나 얄궂은 곳만 쑤석이고 있습니다.

 유미리 님은 아프디아프면서 ‘아프다’ 하고 말하며 당신 삶을 보듬으며 사랑하는 길을 차근차근 찾아나서는데, 유미리 님 둘레에서 시끌벅적 왁자지껄인 사람들은 당신들 스스로를 사랑하고 보듬으며 아끼는 ‘내 길’을 잃거나 잊고 있습니다.


 (3) 아픈 이야기 되새겨 읽기


 판이 끊어졌고 다시 나올 낌새가 없는 《물가의 요람》을 차근차근 되읽어 봅니다. 스스로 겪어 온 아픔을 아무렇지 않은 듯이 적바림했다고 볼 수 있지만, 유미리 님이 당신 삶을 글로 옮겨낼 때에 틀림없이 무척 아팠겠다고 느낍니다. 그리고 이 아픔을 숨기거나 감추거나 지우려 하지 않고 꾸밈없이 적바림했기에 아픈 글이요 아픈 삶이요 아픈 발자국이지만, 아프면서 아름답고 아프면서 맑으며 아프면서 싱그럽다고 느낍니다.

 아픔을 아픔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에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랑을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을 때에 삶을 삶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픔이 가득한 집에서 살고 있는 유미리 님 다른 한손에는, 사랑이 한 가득 놓여 있습니다. (4343.2.23.불.ㅎㄲㅅㄱ)


[12쪽] 한국 국적을 갖고 있으면서 일본 이름처럼 유미리라는 이름을 얻어, 재일 한국인이 겪어야 하는 곤란한 문제로부터 어느 정도 보호를 받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내가 김○○처럼 한국인임을 분명하게 알 수 있는 이름이었다면, 내 의식의 흐름은 지금과 아주 달랐을 것이다.

[38∼39, 55∼56, 69, 179쪽] 실수를 하면 선생님은 옆구리를 꼬집었다. 점차 피아노 학원에 다니는 것이 고통스러워져 빠지는 날이 많아졌다 … 어느 날 뒤꿈치를 들고 종종걸음을 걷고 있는데 선생님이 학원 앞에 팔짱을 끼고 우뚝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선생님이 싫으니?” 나는 할 수 없이 학원으로 들어가 가방에서 바이엘을 꺼내 들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선생님은 혹 꾸중을 듣지 않을까 쭈뼛거리며 피아노를 치는 내 귀에 대고 속삭였다. “너, 고즈에한테 선생님이 아기 낳으면 그 아기가 불쌍하다고 그랬다면서?” … 선생님은 내 옆구리를 힘껏 꼬집었다. 여느 때보다 두 배는 세게 … “또 미리구나!” 선생님은 고양이 새끼 잡듯 내 목덜미를 잡고 단상 앞으로 데리고 나갔다. 2학년과 3학년 선생님들이 입을 모아 말했다. “얘가 그 1학년 3반의 미리야?” “네, 그 문제아예요.” … 3학년 때 담임 선생님은 내 독후감을 형편없는 감상문의 전형으로 모두들 앞에서 읽었는데, 오노 선생님은 내 국어 실력을 ‘아주 좋음’이라 평가해 주었고, 빨간 펜으로 ‘독해력과 문장력이 뛰어남’이라고 덧붙여 쓰기까지 했다 … 아버지는 바닥에 이마를 대었다. 교장은 한참이나 어이없다는 듯 아버지를 내려다보았다. “아버님의 심정은 모르는 바가 아닙니다. 따님은 다른 학생들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상자 속에 썩은 사과가 하나 있으면 상하지 않은 다른 사과까지 썩기 시작하죠.”

[42쪽] 그(친구 고즈에네 아버지)는 자기 무릎 위로 나를 안아올렸다. 위 속에서 시큼한 예감이 끓어올라, 나는 사탕을 우물거리던 입놀림을 멈췄다. 여자 손처럼 창백하고 가느다란 손가락, 그 손가락이 내 치마를 걷어올리고 팬티 위로 음부를 더듬었다. 그러고 다른 손으로는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편평한 가슴을 간지럽혔다 … “저기에 눕자.” 그가 가리킨 곳에는 카펫처럼 풀이 돋아 있었다. 나는 새로 판 무덤 같은 흙 냄새를, 물기를 머금은 풀잎 냄새를 맡았다. “지금부터 아저씨가 하는 거, 엄마나 아빠한테 말하면 절대 안 돼. 아저씨하고 미리하고만의 비밀이다. 약속할 수 있지?” 나는 보지 않으려 애썼던 그의 눈을 직시했다. 검은 눈동자에 내가 조그맣게 비춰 있었다.

[48, 49, 97∼98쪽] 딱 한 명 혼자 남아 있는 비참한 자신의 얼굴을 가리기 위하여 국어책을 펼쳤다. 처음에는 억지로 페이지를 넘겼지만, 아직 배우지 않은 〈꼬마 여우, 곤〉을 읽는 사이에 마음이 진정되었다. 책을 읽으면 현실 세계에서 도피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된 경험이었다 … 다른 아이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싶은 마음은 강렬했고 그런 마음이 간절하면 할수록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누군가 말을 걸어 주었으면 좋겠다고 바라면서 책을 읽었던 것이다 … 내 탓에 우리 반은 꼴찌가 되었다. 자살을 생각한 것은 그때부터였다. 그러나 죽어서는 기짱과 반 아이들한테 복수를 할 수 없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기짱과 그 패거리들의 짓거리를 극명하게 기록했다. 내 공책은 친구들의 괴롭힘 때문에 자살하는 아이들의 유서와도 달랐고, 일기도 아니었다. 내 ‘이야기’였다. 조심하지 않으면 현실로부터 버림받고 세계와 어긋나고 만다. 그 골을 메우기 위해서는 쓰는 길밖에 없었다.

[103, 110쪽] 엄마는 내 일기장을 읽은 일이 없다. 내가 얼마나 아버지를 증오했는지……. 나는 내가 밖에서 놀고 있는 동안 엄마가 일기장을 훔쳐 읽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니 그러길 애타게 바랐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내게 관심이 있다면 반드시 그럴 것이라고. 내가 숨기고 있는 마음을, 내 일기를 읽고 소중하게 엄마의 가슴에 간직해 두고 있을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엄마는 내 피비린내 나는 마음의 아픔 따위는 눈꼽만큼도 염두에 었었다 … ‘부모’라는 자신의 역할에 전혀 현실감을 느끼지 못하여 뭘 어찌해야 좋은지 몰랐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자식을 학대하는 부분은 필경 그의 아버지를 모델로 했을 것이다. 그러나 아버지 역시 어렸을 적에는 할아버지한테 어리광을 부리고 싶어하고, 용서받기를 간절히 바랐을 것이다.

[148∼249쪽] 나는 어째서 자전 비슷한 에세이를 이리도 빨리 쓴 것일까. 물론 과거를 매장하고 싶다는 동기도 있었다. 내가 쓴 희곡의 주제는 ‘가족’이었으며, 그 후에 쓰기 시작한 소설도 역시 ‘가족’ 이야기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나는 이 에세이를 씀으로써, 나 자신으로부터 멀리 벗어나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이렇게 긴 에세이를 쓴 이유라고 생각한다. 나는 나의 과거에 비석을 세우고 싶었던 것이다. 비록 지나치게 이르다 할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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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나리도 꽃 사쿠라도 꽃
사기사와 메구무 / 자유포럼 / 1998년 1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38 ― 고운 꽃, 고운 사람, 고운 책
 : 사기사와 메구무, 《개나리도 꽃, 사쿠라도 꽃》



- 책이름 : 개나리도 꽃, 사쿠라도 꽃
- 글 : 사기사와 메구무
- 옮긴이 : 최원호
- 펴낸곳 : 자유포럼 (1998.1.20.)
- 책값 : 6500원 (판 끊어짐)


 (1) 딸을 바란 마음


 지난 2008년 8월 16일, 우리 집 아이가 딸로 태어나서 가슴을 쓸어내렸습니다. 아이 엄마와 저는 병원에 한 번도 가지 않았기에 태어나는 날까지 아이가 딸일는지 아들일는지 알 길이 없었습니다. 아이를 집에서 낳으려고 여러모로 마련하고 애썼지만, 한여름이었음에도 간밤에 비바람이 거세게 몰아붙이는 바람에 옆지기가 배앓이를 하고 아이를 낳으려 할 때에는 집안 온도가 뚝 떨어졌고, 힘이 빠진 옆지기는 거의 쓰러졌습니다. 어쩌는 수 없이 구급차를 불러 산부인과로 가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아빠 된 사람으로서 좀더 제대로 알아보고 살펴보고 다스렸으면 집에서 낳을 수 있었을 텐데, 더없이 미안한 일이었습니다.

 아이가 딸로 태어난 지 어느새 스무 달이 훌쩍 지났습니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면서 헤아립니다. 아이를 낳을 무렵이든 아이를 낳아서 함께 키우는 요즈음이든, 내가 아빠 된 사람으로서 얼마나 집살림을 알뜰히 가꾸고 있는가 하고.

 딱 어디에서 어디까지 금을 그어 놓고 일을 하지 않는 터라 집에서 들여다보는 책들이 여기에 쌓이고 저기에 쌓여 있습니다. 어느 만큼 일하고 어느 만큼 쉬며 어느 만큼 어느 때에 집일을 하는지도 틀을 세우지 않았습니다. 아빠 된 사람으로서는 오늘 해야 할 만큼 일을 하지 못했다고 느끼기 마련이고, 엄마 된 사람으로서는 도무지 어디에서 어디까지 손을 잡아야 하는가를 느끼기 힘들기 일쑤입니다. 아빠는 아니라고 말할지라도 집살림 흐름은 아빠한테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런 판에 아이가 아들이었으면 더 아빠 흐름으로 쏠리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아빠 된 사람은 제 삶이나 식구들 삶을 알맞고 따스하게 추스르는 데에 익숙하지 못하고 슬기롭지 못합니다. 세상 모든 아빠들이 익숙하지 못하거나 슬기롭지 못하지 않을 테지요. 알뜰한 어버이와 함께 살아오면서 몸에 아름다움을 깃들인 아들이었다면, 이들이 아빠가 된 다음에도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집살림을 꾸리리라 봅니다. 아름다움을 모르거나 사랑스러움하고 동떨어진 채 살아온 터전이었다면, 이러한 느낌이 옆지기와 아이한테 고스란히 이어간다고 봅니다.

 옆지기가 묻습니다. 제 이빨이 언제부터 안 좋았느냐고. 저는 망설이지 않고 말합니다. 군대에 있을 때 망가졌다고. 왜 그때에 망가졌느냐고 다시 묻습니다. 그때 군대에서 이를 닦을 수 없어 망가졌다고 이야기합니다.

 한참 뒤, 틀림없이 군대에서 이빨이 망가졌으나 군대를 마친 다음 내 망가진 이빨을 알뜰히 되살리고자 애쓴 적이 있는가 돌아봅니다. 이태 남짓 망가진 이빨이라 할지라도 차근차근 되살리려 애썼다면 더 망가지지 않거나 조금이나마 살아나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너무 손쉽게 군대 탓으로 돌리지 않느냐 싶습니다.

 더 헤아려 보니, 군대라는 곳에 있을 때에도 더 애썼다면 이빨이 그예 망가지지 않도록 다스릴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스스로 더 부딪히지 않았으면서, 몸소 더 힘쓰지 않았으면서 무슨무슨 탓이라고 핑계를 늘어놓지 않느냐 싶습니다. 따지고 보면, 아이가 아들이 아니고 딸이기를 바란 데에는 아들이면 ‘학교를 아예 안 가야 군대도 안 간다’는 까닭 때문입니다. 아이를 군대에는 도무지 보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는 우리 말과 글을 다루는 일을 하는 사람이기에, 군대에 있는 동안 몇 가지 군대 말투를 일본제국주의 군대 말투가 아닌 우리 말투로 돌려놓는 데에 살짝 이바지를 했습니다. 그러나 고작 이런 일만 깨작거렸습니다. 더 밑바탕에 있는 고름을 짜지 못했고, 더 밑바닥에 있는 생채기를 건드리거나 감싸지 못했습니다. 나는 내가 앞사람한테 얻어맞거나 욕을 먹었어도 내 뒷사람한테는 주먹질이나 욕질을 안 하겠다고 다짐했으나 상병 6호봉 때에 이 다짐이 무너졌습니다.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고, 내 마음밭을 내가 더 알차고 사랑스레 지킬 길이 있었으나 고스란히 무너지는 길을 걸었습니다. 비무장지대 안쪽에 있었건, 강릉에 잠수함이 넘어왔대서 다시 비무장지대에 들어가 한 달 반쯤 다시 살아야 했건, 훈련을 뛴다며 허구헌날 바깥에서 맴돌았건, 나한테는 내 삶을 돌아볼 겨를이 없이 뺑이를 쳐야 했건, 하루에 1분을 못 쓸 노릇이었을까 하고 곰곰이 되씹어 보면, ‘하루에 1분이 없어 하루에 꼭 한 번이라도 이빨을 못 닦을 일은 없었겠지’입니다. 아마, 아이가 아들로 태어나고 군대로 끌려간다 할지라도 어버이 된 저와 아이 된 아들내미가 제 마음을 튼튼하고 맑게 건사한다면 외려 군대라는 곳을 거친 삶이 더욱 튼튼하고 한결 해맑을 수 있습니다. 가난이란 하느님이 내려준 선물이거든요. 가시밭길이란 우리한테 주어진 고마운 지름길이고요.

 우리 아이가 딸로 태어나 주기를 빌던 아빠 마음은, 아빠 스스로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거듭나고자 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다른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조금 더 알맞고 싱그럽고 튼튼하고 믿음직한 곳으로 이끌고자 하지 않고, 그저 이대로 내멋대로 살아가겠다는 어리석은 배짱이었다고 느낍니다. 함께 식구를 이루는 고운 사람을 앞으로도 곱게 목숨줄 잇도록 한손을 따숩게 내미는 일은 굳이 안 하겠다는 등돌림이었다고 느낍니다.


 (2) 글쟁이를 바란 삶


 1993년에 우리 나라에 처음 옮겨진 《진짜 여름》(작가정신)부터 《거리로 나가자 키스를 하자》(문학사상사,1994), 《레토르트 러브》(문학사상사,1994), 《돌아가지 못하는 사람들》(문학사상사,1995), 《그대는 이 나라를 사랑하는가》(자유포럼,1999), 《뷰티풀 네임》(북폴리오,2006), 《웰컴 홈》(북폴리오,2006) 모두 새책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사기사와 메구무 님 작품입니다. 1998년에 우리 나라에 옮겨진 《개나리도 꽃, 사쿠라도 꽃》 또한 새책방에는 없고 헌책방에만 있는 책입니다. 그러나 헌책방이라고 이 책을 늘 갖추어 놓고 있지 않습니다. 새책으로 팔린 만큼 남아 있으며, 새책으로 팔린 책 가운데 책임자가 기꺼이 헌책방에 내놓은 만큼 만날 수 있습니다. 책을 더 안 찍은 지 제법 되었고 아예 판이 끊어진 지 한참 된 만큼, 이 책들을 우리가 헌책방에서 다시 만날 수 있다 한다면 대단히 고마운 노릇이요 몹시 반가운 일입니다.

 저는 《개나리도 꽃, 사쿠라도 꽃》을 2004년 12월에 헌책방에서 만났습니다. 그무렵에 처음 만나 1/3쯤 읽다가 덮어 놓았는데, 요즈음 유미리 님 판끊어진 산문모음을 찾아 읽으며 새삼 떠올라 이 책을 처음부터 다시 읽었습니다. 책을 덮고 나서 사기사와 메구무 님 발자취를 더듬어 보니, 2004년 4월 11일에 스스로 목숨을 끊고 세상을 떠났더군요.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남자와 여자’라는 나눔과 ‘조선사람(한국사람)과 일본사람’이라는 나눔이 없는 세상을 바란다는 말을 남겼다고 합니다. 1968년에 태어나 2004년에 숨을 거두었으니 고작 서른 몇 해를 보낸 삶입니다. 고등학생 2학년인 1987년에 글쟁이 문턱에 들어섰으니 당신 삶 반나절은 글쓰기로 보냈다 할 수 있습니다. 짧다면 그지없이 짧은 삶이요 길다면 제법 긴 삶일 텐데, 글을 쓰는 사람이었기에 우리한테는 작품으로 오래오래 남아 언제까지나 숱한 이야기를 아로새겨 주겠지요.

 모르는 노릇이지만,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글을 쓰는 일을 하지 않았으면 당신 할머니가 평안도 사람임을 알 수 없었습니다. 당신 아버지한테는 한쪽에 한국사람 피가 흐르고 있었는 줄 생각할 수 없었으며, 당신한테 한국사람 피가 1/4 섞여 있음도 알 길이 없었습니다. 글을 안 쓰고 살았다면 서른다섯에 스스로 목숨을 끊을 일이 없었다 할 수 있습니다. 글을 안 쓴다고 세상을 덜 생각하는 삶은 아니요 글을 쓰는 삶이라 하여 세상을 더 생각하는 삶은 아니나, 사기사와 메구무 님이 쓰는 글 매무새로 볼 때에는 날마다 마음앓이가 깊은 삶이었구나 싶습니다. 어쩌면 이런 매무새로 글을 안 쓰는 ‘수수하다는 삶’을 꾸렸을 때에도 어지럽고 어수선한 세상이 슬프고 괴로워 새삼스레 스스로 목숨을 놓았을 수 있겠지요.


.. “재미있잖아요?” 혜자의 말이다. 모처럼 이리저리 궁리한 끝에 희생까지 치르고 한국에 와서 생긴 것이 고작 원형탈모란다면 ‘재미있는’ 일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야 당신은 지문날인을 하지 않아도 되고, 외국인등록증을 가지고 다니지 않아도 되며, 결혼과 취직에서도 아무 문제가 없다. 그러니 바보처럼 그 따위를 따져서 무엇에 쓰겠어? 나는 당신의 친구니까 당신이 하는 말이나 괴로운 심정도 알아줄 수 있지만, 아마도 앞으로 수많은 사람을 만나야 되고 온갖 소리를 다 들어야 할지도 모르잖아? 그러니까 그 따위야 우리 교포들 모두가 겪어 온 ‘가슴앓이’라고 제쳐두면 그뿐이야. 지금에 와서야 우리 역시 그렇게 힘겨웠다고 여기지도 않아. 그러므로 그때 ‘그만둬 버릴걸’ 하는 마음을 먹었더라도 이미 소용이 없는 일이잖아? 뭐니뭐니 해도 당신은 작가니까 ‘말할 수 있는 사람’이고 ‘전할 수 있는 사람’이야. 그러니 내버려 둬! ..  (175쪽)


 《개나리도 꽃, 사쿠라도 꽃》은 뜻하지 않게 당신 뿌리를 알고 만 사기사와 메구무 님이 남녘땅 연세어학당에서 여섯 달 동안 한국말을 배우면서 살던 이야기를 갈무리한 글모음입니다. 당신 할머니는 ‘국적을 밝히지’ 않았고 당신 아버지는 ‘국적을 몰랐’으며 당신은 ‘국적을 따지지’ 않아도 좋을 나날을 보냈습니다. 뿌리를 알고 난 다음에도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일본사람으로 살아가’지 조선사람으로든 한국사람으로든 바뀔 몸이 아닙니다. 한국말을 배우고 한겨레 문화를 익힌다 할지라도 ‘살아가는 곳’이 다릅니다. 왜냐하면 일본이라는 나라는 외국인등록증을 따로 만들어 재일조선인을 푸대접하고 따돌리거든요. 한국이라는 나라에는 외국인등록증이 따로 없습니다만, 이주노동자가 받는 대접은 아주 모집니다. 이주노동자한테는 당신들 땀방울을 바칠 의무만 있을 뿐, 땀을 바치는 동안 누릴 권리란 없습니다. 게다가 이주노동자가 아닌 한국에서 태어나 한국말을 나누며 한국사람으로 살아가는 이들한테도 사람다운 대접을 누릴 권리가 많이 억눌려 있습니다. 이 나라 학교는 사람이 사람답도록 가르치는 터전이 아닌 시험점수 높이는 입시지옥입니다. 이 나라 일터는 사람이 사람다이 어울리며 일하는 보람을 맛보는 터전이 아니라 그저 더 많은 돈을 벌도록 내몰리는 사육장입니다.

 사기사와 메구무 님은 마음앓이를 견디지 못해, 아니 마음앓이를 풀어낼 길을 찾고자 스스로 목숨을 내놓았습니다. 당신으로서는 목숨을 내놓으면서까지 무언가를 밝히고 따지고 말하고 드러내고 싶었습니다. 당신은 ‘말할 수 있는 사람’이요 ‘남길 수 있는 사람’이거든요. 여느 회사원이 목매달아 죽는다고 이이가 남긴 쪽글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거나 읽힐까요? 여느 농사꾼이 농약 마시고 죽는다고 이이가 남긴 외침이 세상에 두루 퍼지거나 들릴까요? 사기사와 메구무 님이기 때문에 당신이 목매달아 죽으며 남긴 외마디소리가 여러 해 지난 오늘까지도 고스란히 남아 있습니다. 당신이 떠나고 없는 자리이지만, 당신이 몸부림을 치면서 종이에 아로새긴 이야기는 우리 가슴으로 스며들 수 있습니다. 당신이 가고 난 빈 자리이지만, 당신이 발버둥을 치면서 종이장에 꾹꾹 눌러 적은 글줄이 우리 마음으로 다가올 수 있습니다.

 떠나는 사람은 남아야 할 사람한테 짐만 잔뜩 안긴다고 하는데, 남아서 살아가는 사람이란 늘 짐을 지면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짐이 없이 살고자 한다면 떠나야 할 노릇입니다. 살아가면서 내 몸에 얹힌 짐이 너무 고달프고 무거우면 떠날밖에 없습니다. 떠나는 길은 여럿이라, 깊은밤에 보따리 싸들고 몸뚱이만 내빼는 떠남이 있습니다. 모든 연락을 끊고 조용히 고속버스나 기차에 몸을 싣고 멀리멀리 돌아다니는 떠남이 있습니다. 나라밖으로 떠날 수 있고, 내 목숨줄을 놓을 수 있습니다. 이렇게 떠나고 말면 떠난 사람 자리에 누군가 들어와서 먼지를 털고 흐트러진 물건을 갈무리하면서 이이가 남겨 놓은 짐을 짊어집니다. 살아가고 싶기 때문에.

 그런데 이래저래 떠난 길은 다시 돌아올 길이 있다지만, 목숨줄을 내려놓는 떠남은 다시 돌아올 길이 없습니다. 그리워도 이쪽에서 찾아가서 만날 수 없고, 애닲아 울어도 내 울음소리를 들어 줄 수 없습니다. 그저 책 몇 권 종이 몇 장 더듬으면서 손자국을 헤아려 봅니다. 그나마 글쟁이였기에 작품 여럿 남아 있어 이 작품을 하나하나 쓰다듬으면서 말없이 말하고 말있이 말한 이야기를 짚을 뿐입니다.


 (3) 아껴 읽는 글


 돌아가신 권정생 할아버지 책을 다 갖고 있습니다. 맨 처음 낸 《강아지똥》부터 맨 마지막으로 나온 《랑랑별 때때롱》까지 갖고 있습니다. 이 가운데 《랑랑별 때때롱》만 아직 안 읽었습니다. 이제 권정생 할아버지 다른 작품을 만날 수 없기 때문에 이 하나를 펼치면 모두 읽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끼고 아끼면서 읽고 싶은 마음입니다.

 이원수 님 문학을 읽을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저로서는 문익환 님 시와 편지를 읽을 때에도 마찬가지이고, 묵은 잡지 《뿌리깊은 나무》에서 한창기 님 글을 찾아 읽을 때에도 비슷합니다. 세상일은 모르는 터라, 제가 앞으로 얼마나 목숨을 이어갈 수 있을지 모르니, 읽을 수 있을 때에 읽어야 하는데, 그래도 아쉬워서 좀처럼 더 손을 대지 못합니다.

 《개나리도 꽃, 사쿠라도 꽃》을 금세 읽어치우면서 가슴이 짠했습니다. 다시금 넘겨 읽으면서 서운했습니다. 그러다가 이 책 일본판 《ケナリも花, サクラも花》(新潮文庫,1994)를 서울 동묘앞에 있는 헌책방에서 보았습니다. 일본글은 읽을 줄 모르지만 《개나리도 꽃, 사쿠라도 꽃》하고 맞대어 놓고 한 줄씩 새겨 보곤 합니다. 그러다가 한글판 《개나리도 꽃, 사쿠라도 꽃》에는 군데군데 ‘한 줄씩 번역을 안 하고 빠뜨린 대목’이 있음을 알아챕니다. 책을 읽으며 때때로 어딘가 아귀가 안 맞는다거나 끝맺음이 아리송하다고 느끼곤 했는데, 군데군데 번역을 빼먹은 데가 있는 탓이었습니다. 다시 올 수 없는 사람이요 다시 나오기 힘든 책인데, 애써 묶였던 책 하나를 일군 번역이 이러하다니 ……. 우리 나라에서는 책을 사랑하는 사람 스스로 바깥말을 익혀서 아예 처음부터 번역책이 아닌 외국책으로 읽어야 하는가요? 쓴 입맛을 다시며 책을 덮습니다. (4343.2.21.해.ㅎㄲㅅㄱ)


[26∼27, 29쪽] 일본인은 지독한 외국어 콤플렉스를 가진 인종이다. 패전 후 모두가 녹초가 되어서 의지할 곳이 없는 상태에서, 너무나도 강하게 보인 ‘미국’의 환상을 아직도 좇고 있는 것이다. 먹을것이 없어 굶주리던 당시의 일본인에게 미국은 너무나도 멋지고 강력한 존재로 보였다. 그래서 일본인이 영어에 대해서 갖고 있는 일반적인 인식도 멋지고 강대한 미국의 부속물과 같았다. 이것은 현재까지 계속되고 있는 일관된 관점이므로 일본에서는 영어를 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국제인의 면허를 받을 수 있다는 착각에 너도나도 영어를 잘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지금도 영어를 할 수 있는 사람은 대단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 미국인은 인간이라면 당연히 영어를 해야 한다는 매우 오만한 의식을 품고 있으므로 ‘일본어를 할 줄 모르는 자신’에 대해서가 아니라 ‘영어도 할 줄 모르는 역무원’에 대해서 안달한다. 이런 광경을 보고 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는 일본이야. 누구나 영어를 할 수 있다고 여겨서는 안 돼!” 하는 분노를 가져야 마땅하다. 그러나 나는 많은 일본인이 그 ‘어휴, 어쩔 수 없다’고 하는 몸짓을 도리어 부럽게 여기지나 않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 … ‘외국에 나가면 모국어가 통하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는 지극히 일반적인 상식을 미국인은 깨닫지 못했지만, 앞으로 점점 확실하게 형성될 ‘세계의 아시아’ 속에서 일본인이 그것을 답습하지 않기를 나는 간절히 바란다. 아시아에서 일본이 ‘미국의 미니어처’가 되지 않기를 진심으로 빈다.

[48쪽] “서교동!” “서울역!” “이대 후문!” 하고. 차가운 바람이 불어대는 길가로 튀어나와 모두 목청껏 외쳐댄다. 나도 외친다. 게다가 손님이 타지 않은 빈 차도 행선지에 따라 승차거부를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므로 차에 올라타기 전에 반드시 행선지를 말해야만 된다. 그래서 거리가 언제나 소란스럽다 … 재일동포인 혜자와 같은 사람들은 오사카에 돌아가서 택시를 타려고 할 때 무심코 조수석 문을 자신이 직접 열고서 “통천각!” 하고 외친다고 한다. 게다가 이어서 나오는 말이 “안 가요?”라니.

[56, 58∼59쪽] 얼토당토않은 이상한 영어로 인터뷰를 시도하는 사람이 많았다. 만약 내가 거기에 응했을 경우, 도대체 그들은 어떤 식으로 기사를 쓸 셈인지, 그것이 나에게는 수수께끼였다 … 단지 내 감각으로는 그 여기자가 내가 3개월 만에 돌아가려고 한다는 점, 일본은 나의 조국이 아니고 바로 여기가 나의 조국이라고 당당히 말하지 않는 점에 ‘불만’을 느꼈으리라는 기분이 들 뿐이다. 그러고 나서 그녀는 재일동포 3세를 주인공으로 쓴 《진짜 여름》이라는 내 소설에 대해서 언급했다. “어떤 내용인지 알려주십시오.” 그녀는 아무런 의문이나 주저함 없이 분명하게 이렇게 물었다. 인터뷰에서 자신의 작품 ‘내용’을 알려 달라는 질문을 받은 것은 처음이었다. 물론 이 사실만으로도 상당히 놀랐다(더구나 그녀는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60∼61, 64쪽] 그들(한국사람)은 일본에서 살아가는 한국인의 사정은 알지 못한다. 그렇지만 그것을 말로 한다면 끝도 한도 없으며, 또 누구인들 다른 사람의 슬픔과 고통을 자신의 일처럼 이해해 주려고 들지는 않는 법이다 … ‘민족’, ‘조국’이라는 대단히 크고 추상적인 말과 연관지어 판단하기 전에, 우선 인간은 매일매일을 살아가야 되는 사회적 동물인 것이다 … 남의 ‘아픔’, 남의 ‘사정’을 상상하는 힘만 있다면 조금이라도 거리를 좁힐 수 있다 … “아, 알았다. 메구무 씨의 이야기가 어쩐지 생소하지 않더니, 우리가 일본에 있으면 일본인과 다르고, 한국에 있으면 한국인과 다르다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 아닌가요?”

[70, 82쪽] 그러나 그 순간, 행인지 불행인지 대경 씨의 귀는 형들의 입에서 나온 ‘쪽발이’라는 말을 놓치지 않았다. “알잖아? 교포들이 그런 말에 민감하다는 사실 말이야.” 그래서 울컥 치밀어오른 대경 씨는 형들에게 대들게 되었는데, 그때 대경 씨가 한 말이 걸작이다. “이 멍청한 자식들아! 교포에게 함부로 싸움을 걸어도 되는 거야? 재일 대한민국 거류민단에서 가만 있지 않을 거라구!” ‘뭐라고……? 그래, 아마 가만히 있을 거야.’ 역시 어딘지 모르게 장난감 로봇을 닮은 동작으로 어젯밤의 일을 재현해 보이는 대경 씨의 그 말을 들으며 다들 배꼽을 잡고 웃었다. 나는 너무 웃어서 눈물이 나올 지경이었다 … “그렇지만 좀 알아 달라고 매달릴 수는 없잖아요.” 그렇다. 알아 달라고 매달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 대목이 필시 꽤 오래 전부터 내 신경을 날카롭게 만든 원인의 하나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나의 이 거친 말을 받아서 대경 씨가 여느 때와 다름없는 어조로 말했다. “그래, 알아 달라고 할 수도 없지만, 그렇지만 적어도 이런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알아 주었으면 좋겠네요.”

[97쪽] “한국에서는 말이야, 모두가 잘났어.” 일본에서 한국어를 가르쳐 주시던 선생님의 이런 말씀을 어렴풋이 기억해 내곤 한다.

[115쪽] 한국은 스스로의 ‘사정’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라다. 도대체 흘러가 버린 시간의 저 너머에 고통스런 추억과 슬픈 과거, 그렇지 않으면 수치와 잘못을 저지른 수많은 ‘마이너스’의 역사가 없는 민족이나 국가가 있을 수 있겠는가?

[143쪽] 하지만 역시 일반적인 일본인은 재일 한국인이라는 문제에 흥미가 없다. 상대에게 흥미가 없는 이야기를 구태여 말할 필요는 없다. 게다가 미묘한 ‘아아, 역시 알아주지 않는군.’ 하는 느낌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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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전
김규항 지음 / 돌베개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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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단한 사람한테 빛줄기 선사하는 책이 되려면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23] 김규항, 《예수전》


 이삿짐 나르기를 거들려고 인천에서 일산까지 다녀왔습니다. 아침 아홉 시에 집을 나섰고, 밤 열두 시 반이 되어서야 가까스로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옆지기는 아침부터 밤까지 홀로 집에서 아이를 보면서 지냈습니다. 요즈음은 바느질로 인형 만들기를 하면서 하루를 보내고 있는데, 혼자 아이를 보자면 바느질하기란 만만하지 않으며 밥 차리기에다가 밥 먹이기가 무척 버겁습니다. 둘이 함께 아이를 보아도 버겁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기 앞서도 언제나 집일을 많이 맡아서 하기는 했으나, 아이를 키우면서 맡는 집일이란 더없이 고단합니다.

 다만, 아이를 키우는 하루하루가 오로지 고단하지만은 않습니다. 몸은 지치고 마음은 무거워도 아이 볼따구를 쓰다듬고 궁둥이를 어루만지며 “우리 돼지야, 우리 돼지야.” 하고 노래를 부르는 동안 즐겁습니다. 아이한테서 새 얼굴을 보고 아이와 함께 새 모습을 느낍니다. 고단하게 아이를 보기 때문에 얻는 보람은 아니나, 아이는 아이대로 늘 맑고 웃는 얼굴이 되면서 스스로 목숨을 지킬 수 있는 한편, 어른들이 잃기 쉬운 웃음과 느긋함을 되찾도록 도와주는 길동무가 아니랴 싶습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어른이 된다는 말이란, 아이를 낳는 경험이 몹시 크기 때문에 하는 말이기도 할 터이나, 이보다는 우리 스스로 더욱 고단한 새삶을 열면서 더욱 고단하기에 더욱 기쁘며 새삼스러울 수 있는 새길을 보여주기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왜냐하면 무엇보다도 크고 아름다운 우리들 목숨이기에, 이 목숨값이 얼마나 크며 거룩하고 아름다운가를 깨닫는 일은, 나 스스로 어버이가 되는 데에 있을 테니까요. 나를 낳은 어버이를 생각하고, 나 스스로 어버이가 된 뒤, 내 아이 또한 어버이가 될 앞날을 헤아리면서, 우리들은 저마다 우리 목숨이 얼마나 곱고 거룩하며 놀라운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 ‘민주화 정권’ 10년 동안 한국 사회는 온전한 부자들의 천국이 되었다.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의 삶 속에서 참혹한 풍경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슬픈 일은 우리의 영혼이 파괴되고 있다는 것이다 … 중세 교회는 실제로는 매우 타락했지만 공식적으로는 돈과 물질적인 부를 영혼을 더럽히는 짓이라고 여겨 경계하고 죄악시했다. 그러나 개신교는 그런 종래의 관점을 완전히 뒤집어 ‘돈과 물질도 하느님의 축복’이라 주장했다 ..  (9, 160쪽)


 하루하루 쉬지 못하고 보내는 나날인 채 일요일 아침부터 이삿짐을 나른다며 먼길을 나선 다음 밤늦게 집으로 돌아오니, 전철길에서 도무지 눈을 뜨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3호선 첫역 대화역에서 자리를 잡고 앉았으니 눈이라도 감기는 감았으나, 인천으로 돌아가자면 종로3가에서 갈아타야 하니 느긋하게 눈을 붙이지도 못합니다. 무릎에는 책 하나 올려놓고 잠깐 잠들었다 깼다를 되풀이합니다. 안국역에서 가까스로 깨어나 무거운 몸을 일으키고 종로3가에서 인천 가는 전철을 겨우 잡아탑니다. 막차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전철을 올라탑니다. 빈자리가 있으나 앉지 않습니다. 자칫 동인천역에서 못 내리고 인천역까지 가 버리지 않을까 걱정스럽습니다. 눈두덩을 손가락으로 꾹꾹 누르고 졸음을 멀리하면서 책을 붙잡습니다. 어떻게든 한 시간 이십 분을 책읽기로 버티어 보자고 다짐합니다. 마침 오늘 들고 나온 책은 ‘읽다가 잠들기 좋은 지루한’ 책입니다. 그나마 마음에 쏙쏙 스며드는 이야기책이었다면 잠이 확 깰 수 있으련만, 더 고됩니다.

 후들거리는 다리와 무거운 몸으로 동인천역까지 잘 버티어 냅니다. 드디어 전철표를 끊고 밖으로 나옵니다. 자정을 훌쩍 넘고 한 시로 달려가는 때이니 술집을 빼놓고 문을 연 가게가 없습니다. 술 얹힌 사람들 시끄러운 소리를 뒤로 하며 고요한 골목을 걷습니다. 우리 집이며 이웃집이며 모두 불이 꺼져 있습니다.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갑니다. 가방을 내려놓고 옷을 벗습니다. 먼지 잔뜩 묻은 옷은 모두 벗어 담가 놓습니다. 살금살금 방으로 들어가는데 옆지기가 깼습니다. 오늘 있던 일을 짤막하게 들려주고 옆지기 다리를 조금 주무릅니다. 곧바로 곯아떨어져야 하지만, 오늘 하루치만큼 밀린 일이 있어서 셈틀을 켭니다. 한 시간 반쯤 다시금 졸린 눈을 비비며 일을 하고 나서야 자리에 드러눕습니다. 제 깜냥으로는 곯아떨어진다고 곯아떨어지지만, 간밤에 아이가 오줌을 누어서 잠을 깰 때에 함께 깨고, 새벽 다섯 시에 아이가 똥을 눌 때에도 함께 깹니다. 어제도 새벽에 똥을 누더니 오늘도 새벽에 똥을 누는군요.

 아침 여덟 시에 눈이 번쩍 뜨입니다. 부시시 일어나서 조금 일손을 붙잡자니, 아이는 어느새 따라서 깨어 납니다. 함께 놀자며 엄마한테 붙고 아빠한테 붙습니다. 거의 아무런 일손을 붙잡지 못한 끝에 아침 열한 시 넘어갈 때에 아침밥을 마련합니다. 어제 새벽에 해 놓은 밥에다가 떡과 당근과 고구마를 썰어 넣은 볶음밥을 합니다. 아이는 어제처럼 밥은 안 먹겠다고 도리질을 하고, 두부만 낼름낼름 집어먹습니다. 죽을 줘도 밥을 줘도 왜 이렇게 안 먹는다고 떼를 부리는지 힘겹습니다. 그래도 용케 콩은 아주 좋아하고 두부나 묵은 신나게 잘 먹습니다.


.. 예수에게 하느님은 권위적인 아버지가 아니라 다정한 엄마와 같은 존재다 … 우리가 예수를 따르거나 예수에게서 배우는 일 역시 ‘모든 고통받는 사람에 대한 애끊는 마음’을 갖는 일에서 출발한다 … 예수는 특이하게도 바느질, 술 담그기 등 여성이 전담한 노동의 매우 구체적인 사례를 통해 자신의 이야기를 전한다. 여성 노동을 부각함으로써, 그리고 남성보다 여성이 훨씬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는 비유를 사용함으로써, 자신이 어떤 사람들에게 집중하는가를 좀더 분명히 드러낸다 … 예수는 마음의 귀가 열려야 한다는 것, 진리를 받아들이고 삶에 새기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거듭 강조한다 … 힘을 가진 소수가 지나치게 많이 갖고 많이 먹기 때문에 힘없는 다수가 모자라고 배고픈 것이다. 그래서 무소유의 추구, 자발적 가난의 추구는 하느님 나라의 가장 기본적인 태도다 ..  (32, 39, 52, 77, 98쪽)


 머리가 지끈지끈하다고 느끼며 낮나절에 다시금 일손을 붙잡습니다. 이웃 누리집 마실을 하다가 김규항 님 누리집에서 “《예수전》 읽은 분들께 감사드리며, 정중히 부탁합니다. 천천히 한 번 더 읽어 주시길.”이라는 짤막한 글월이 며칠 앞서 올라와 있습니다. 피식 웃고는 책상맡에서 노란 책 《예수전》을 다시금 들춥니다. 책을 읽으며 제 나름대로 밑줄을 그은 대목을 처음부터 끝까지 찬찬히 훑습니다. 이 책을 한 번 다 읽었던 지난 11월 25일에 적바림한 한 줄이 맨 마지막 쪽에 남아 있습니다. ‘시간 남아돌면 딱 한 번 슥 읽어 줘도 되는 책이란. 참 얕다.’

 김규항 님이 쓴 《예수전》을 놓고 섣불리 ‘얕다’느니 ‘깊다’느니 하고 따지는 일은 알맞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예수전》을 다 읽고 나서, 이 부피 자그마한 책을 이렇게 엮어내어 만삼천 원이나 붙여야 했는가 싶어 몹시 슬펐습니다. 글부피도 적은데 굳이 양장으로 꾸며야 했느냐 싶습니다. 이 책을 이렇게 엮거나 꾸민 뜻은 알겠으나, 더 낮은 자리로 내려와서 사람들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믿음을 나눌 수 있어야 “그 교회들이 이미 ‘교회가 아니’라, 교회를 가장한 상점 혹은 기업이라면, 그것은 비판과 개혁의 대상이 아니라 부인의 대상일 뿐이다(180쪽).”라는 꾸지람을 꾸지람 그대로 나눌 만하지 않느냐 생각합니다.

 책을 한결 보기 좋게 꾸미거나 엮는 일은 나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하느님을 돌아보는 책이라고 하여 반드시 수수하거나 풋풋하거나 단출하게만 엮거나 꾸며야 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이야기하거나 하느님을 돌아보는 책이라 할 때에 좀더 수수하거나 한결 풋풋하거나 더욱 단출하게 엮거나 꾸밀 수는 없는지 궁금합니다.

 어제 아침에 일산으로 가는 길에 다 읽은 《양희은-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우석,1993)이라는 책에서, 양희은 님은 “왜 성당들은 번쩍이는 장식,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하는 걸까? 엄청나게 꾸며진 성당에 들어가면 사람이 새끼손가락만 하게 찌부러져서 초라해만진다. 그 엄청난 장식들이 사람과 창조주 사이에 오히려 두터운 벽을 쌓고 있는 것 같다. 예수께서 많은 이들과 같이 계셨던 곳은 들판이나 언덕 위였을 텐데. 들꽃 내음이나 밀 내음이 은총처럼 퍼지는 야외였다는데(264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양희은 님은 “비싼 장식으로 화려한 교회를 지을 그 돈이면 많은 가난한 이웃들을 도울 수도 있건마는(264쪽).” 하고 말을 잇습니다.

 저 또한 책을 만들고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책 하나 만들거나 내놓을 때에 늘 ‘책 하나에 드는 돈’과 ‘이 책 하나에 붙이는 값’을 안 헤아릴 수 없습니다. 책값 500원이나 1000원을 더 붙이면 저한테 떨어지는 고물은 조금 더 커집니다. 반양장이 아닌 양장을 하고, 겉종이에 코팅을 입히거나 금박을 넣거나 누름글자를 넣으면 그만큼 인쇄ㆍ제작ㆍ편집ㆍ디자인에 돈이 더 들기도 하지만, 그만큼 ‘책값을 조금 더 올려붙여도 사람들은 덜 투정’합니다. 뭔가 ‘고급스러움’을 느끼고 ‘책꽂이에 꽂았을 때에 품위가 느껴진다’고 하니까요.

 책 줄거리를 놓고 따지는 말이 아니라, 책 만듦새를 놓고 따지는 말이란 부질없을 수 있습니다. 아니, 부질없습니다. 그리고 다양성이나 개성을 건드린다는 손가락질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책 줄거리가 괜찮은 책이라 할 때에는 책 만듦새 또한 안 살필 수 없습니다. 더 너른 사람한테 더 낮은 삶자락 이야기를 나누려 하는 책이 껍데기를 더 들쓰고 있다면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지요? 더 속깊은 사람한테 좀더 너른 마음씀을 바라는 이야기를 펼치려 하는 책이 겉치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면 어떻게 생각해야 하지요? 《예수전》 같은 글부피라면 만삼천 원짜리 책이 아닌 만 원짜리 책이나 팔천 원짜리 책으로 얼마든지 꾸밀 수 있습니다. 책 줄거리에 앞서 책 만듦새를 돌아볼 때에, 이 책이 참으로 안타깝다고 느꼈습니다.


.. 하느님을 섬긴다는 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려 힘닿는 데까지 노력하면서도 미처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지 못한 부분이 있을 수 있음을 겸손하게 인정하는 태도이지, 앙상한 교리와 신학을 내세워 자신이 하느님의 권한을 완전히 위임받은 양 구는 태도가 아니다 … 말을 알아듣는다는 것은 그 말을 이해하고 느끼는 건 물론이려니와, 삶에 새겨 실천하는 것이다 … 잘 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오히려 그 사람의 가치를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이다 … 껍데기를 벗을 가능성이 없는 사람에게, 마음의 귀를 닫아 놓은 사람에게 매달려 내내 시간만 보내는 건 현명하지 않다 ..  (69, 73, 96, 103쪽)


 옆지기와 함께 《예수전》을 읽었습니다. 나 혼자 외곬로 바라보는 눈길이 될까 걱정하면서 옆지기 이야기를 묻고, 내 생각을 들려주면서 우리 세상에서 예수님과 하느님을 어떤 매무새와 눈길로 헤아리며 받아들이고 곰삭이는 삶이어야 좋을까를 돌아보았습니다. 옆지기는 말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아주 마땅한 이야기를 아주 마땅하게도 알아듣지 못하기 때문에 이러한 책을 쓰는 사람이 있을 수밖에 없지만, 이러한 책을 애써 써냈어도 제대로 읽는 사람은 많지 않으리라’고.

 옆지기와 책 이야기를 나누며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우뚱하다가는 ‘그렇구나’ 하면서 고개를 끄덕입니다. 세상은 참다운 길보다는 유행이라고 하는 물결에 쉽게 휩쓸립니다. 김규항 님은 ‘사람들이 성경읽기를 너무 못한다’고 느끼며 《예수전》을 썼는데, 김규항 님이든 미우라 아야코 님이든 우찌무라 간조 님이든 김교신 님이든 하는 사람들이 풀이한 ‘성경읽기 책’을 읽지 않고 ‘우리 스스로 성경을 옳게 읽으’면 되는 노릇입니다. 성경에는 온갖 빗대는 말로 ‘맑고 밝은 목소리’가 담겨 있다고 합니다만, 한결 쉽게 알려주고자 빗대는 말로 ‘맑고 밝은 목소리’를 다루지, 무슨 꿍꿍이가 있다거나 무슨 속셈이 있어서 빗대는 말로 ‘맑고 밝은 목소리’를 펼치지 않습니다. 누구나 제가 살아가는 결을 고스란히 받아들이면서 성경말씀을 꾸밈없이 헤아리면서 살아가면 됩니다. 가슴이 따끔하도록 건드리는 대목에서는 가슴이 따끔하다고 느끼고, 눈물겨운 대목에서는 눈물을 흘리며, 웃음이 터지는 대목에서는 웃으면 됩니다. 내 잘못을 뉘우쳐야겠다 싶은 대목에서는 내 잘못을 뉘우치면 됩니다. 내가 잘하고 있는 일이나 제대로 못 느끼고 있었다면 ‘자랑이 아닌 자연스러운 삶’으로서 내가 잘하는 일을 흐뭇하게 섬기면 되며, 앞으로도 꾸준히 잘해 나가면 됩니다.

 성경뿐 아니라 교과서도 매한가지입니다. 교과서에 이런저런 말썽거리가 있습니다만, 말썽거리가 있는 책이라 한달지라도 이 교과서를 다루는 사람이 슬기롭게 다루면서 올바르게 가르치는 도움이로 삼으면 됩니다. 우리한테는 빈틈과 모자람 하나 없이 옹근 책이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빈틈없이 훌륭하거나 거룩한 길을 모르거나 지나치거나 등돌리지 않으니까요. 책을 책 그대로 받아들일 뿐 아니라, 성경은 성경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람은 사람 그대로 받아들이면 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잘하는 일이 있으면 잘한다고 북돋우면 됩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잘못하는 일이 있으면 잘못한다고 나무라면 됩니다. 잘한다고 북돋우되 눈먼 채 뒤따르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잘못한다고 나무라되 그이 마음밭을 깎아내리거나 비아냥거려서는 안 됩니다. 이는 조선일보 김대중 주필을 마주할 때에도 마찬가지이고, 한겨레신문 홍세화 님을 마주할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를 더 섬겨야 하지 않고, 누구를 마냥 깎아내려야 하지 않습니다. 왼날개이든 오른날개이든, 옳고 바르고 아름답게 잘한다면 손뼉칠 일이요, 그릇되고 엉터리에다가 어줍잖게 하고 있으면 따끔하게 꾸짖으며 바르게 접어들도록 도와줄 노릇입니다.


.. 하느님 앞에선 누구든 귀하다. 흑인이든 백인이든 여성이든 남성이든 아이든 어른이든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힘없는 사람이든 권력자든 차별 없이 귀하다. 하느님 앞에서 빈부 격차는 그 자체로 악이다. 그런데 빈부 격차란 왜 생기는가? 고루 나눠 갖지 않기 때문에, 남들보다 많이 가진 사람들 때문에 생긴다 … 부자가 하느님의 축복을 받았다고 말할 때 이미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의 저주를 받았다는 말을 하는 셈이다. 그런 사고방식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가난은 단지 불편한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게 된다. 가난한 사람은 가난으로 겪는 불편함에 더해 인간적으로 무시당하고 차별받아야 하는 것이다 … 그러나 돈과 물질이 쌓이면 쌓일수록,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될수록 이상하게도 정작 자유는 점점 멀어져 간다 … 사람이 자유를 누리기 위해 필요한 부는 생각보다 적다. 그걸 넘어서는 부는 실은 사람에게서 자유와 평화를 앗아 간다 ..  (162∼165쪽)


 김규항 님은 《예수전》이라는 책을 비롯해 강연자리나 다른 책에서 빠짐없이 ‘우리 마음속에 깃든 이명박(또는 대운하)’를 잊어서는 안 된다고 힘주어 말합니다. 저어기 노옾으신 자리에 궁뎅이 붙이고 있는 양반 한 사람한테 손가락질을 한다고 풀리는 우리 삶터 말썽거리가 아니라, 바로 우리 스스로 우리 삶을 옳게 가꾸며 아름답게 일구어야만 풀리는 우리 밝은 앞날이라고 힘주어 거듭 말합니다. 이는 권정생 님이 쓴 《우리들의 하느님》을 비롯한 모든 책에 어김없이 나와 있는 이야기입니다. 권정생 님뿐 아니라 이오덕 님이나 이원수 님도 늘 펼치던 이야기요, 송건호 님 글이나 리영희 님 글이나 성내운 님 글에서도 한결같이 읽을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내가 게을러서 가난뱅이가 되었’으니 ‘내가 부지런해야 부자가 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가난이든 넉넉한 살림이든 스스럼없이 받아들이며 스스럼없이 나눌 수 있으면 좋은 삶’이라는 소리이고, ‘나는 내 자리에서 내 몫을 다 하면서 아름다움을 이웃들과 꽃피우면 좋다’는 소리입니다.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꾸어 낸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루하루 꾸리는 삶을 늘 즐겁고 아름다이 붙잡는 바탕이 먼저 튼튼하게 서 있은 다음에 하루아침에 세상을 바꾸든 백 해나 즈믄 해에 걸쳐 세상을 바꾸든 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옳은 삶이 무엇인가를 깨달은 다음 혁명을 외치든 개혁을 말하든 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맑은 길을 찾고 밝은 꿈을 품으며 고운 넋을 건사하면서 정치를 하든 학문을 하든 운동을 하든 문학을 하든 해야 한다는 소리입니다.


.. 구원은 가진 게 없는 사람, 가진 것을 스스로 모두 비운 사람들만의 것일 수밖에 없다 ..  (114쪽)


 《예수전》을 다시 덮으며 생각해 봅니다. 김규항 님은 사람들한테 당신 책을 다시금 천천히 읽어 주기를 바라지만, 천천히 다시 읽어 주기를 바라기보다는 ‘두 번째 예수전’과 ‘세 번째 예수전’을 더욱 낮은 목소리로 들려주면 되지 않을까 하고. ‘네 번째 예수전’과 ‘다섯 번째 예수전’을 더더욱 낮은 매무새로 조곤조곤 들려주면 넉넉할 테고, ‘여섯 번째 예수전’과 ‘일곱 번째 예수전’은 훨씬 더 다소곳하면서 쉽고 부드러운 우리 말글을 한껏 빛내면서 수수하고 풋풋하게 나누는 길을 찾으면 되리라 봅니다. (4343.2.8.달.ㅎㄲㅅㄱ)


 ┌ 《예수전》(돌베개 펴냄)
 ├ 글 : 김규항
 └ 책값 : 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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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오드리 설킬드 지음, 허진 옮김 / 마티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이제야 비로소 이 책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참 오래 걸렸다...) 

 


 이 책 하나 120 ― 백두 살 할머니한테서 읽는 삶
 : 오드리 설킬드,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 책이름 :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 글 : 오드리 설킬드
- 옮긴이 : 허진
- 펴낸곳 : 마티 (2006.5.25.)
- 책값 : 2만 원



 (1) 주부습진에 걸리며 읽는 삶


 아기는 엎드려 자기를 좋아합니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 아기는 한참 자다가 슬슬 몸을 돌리며 엄마아빠하고는 거꾸로 엎드려 있습니다. 자면서 이리 뒹굴 저리 뒹굴 합니다. 엄마와 아빠 사이에 아기를 눕히지 않으면 언제나 이 방 끝 저 방 끝까지 굴러가 있습니다. 저는 떠오르지 않으나, 아마 저도 우리 아기하고 똑같이 어렸을 때에 이렇게 데굴데굴 구르며 잠을 잤으리라 봅니다.

 지난주부터 제 두 손을 제대로 쓰기 어렵습니다. 엄지와 검지 사이 접히는 자리가 쩍쩍 갈라졌기 때문입니다. 물건을 쥘 때마다 따끔하고 물잔이나 병을 손아귀로 쥐기 힘듭니다. 새끼손가락이 다칠 때에도 무슨 물건을 쥐기 어려웠는데, 이 자리가 갈라져도 참 힘듭니다. 그러나 집일을 안 할 수 없기 때문에 아픔을 견디면서 밥을 하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하고 걸레질을 합니다. 엊그제 알아보니 제 손가락 사이사이 갈라지는 일은 주부습진입니다.

 주부습진이라니. 주부습진인가. 주부습진이구나. 무언가 다른 데가 아파서 이러나 하고 걱정했는데, 주부습진이라는 말을 들으며 한숨을 놓습니다. 그렇지만, 앞으로도 집일은 조금도 줄 턱이 없는데, 이제부터 주부습진이면 어찌 견디면서 살아가나 근심입니다.

 하기는, 날마다 두 시간 남짓 아기 옷가지 빨래를 하는 삶을 열아홉 달째 꾸리고 있으니 주부습진에 안 걸릴 수 있겠습니까. 안 걸릴 수 없는 노릇입니다.

 그러면 우리 어머니는 어떠했을까요. 우리 어머니는 주부습진에 안 걸렸을까요. 우리 어머니도 틀림없이 주부습진에 걸렸겠지요. 아니, 우리 어머니는 저보다 훨씬 오래 물을 만지며 더 많은 집일을 했으니 저보다 더 어렸을 때에 주부습진에 걸렸겠지요. 온몸 구석구석 안 쑤신 데가 없었을 테며, 손이며 발이며 온통 주부습진으로 쩍쩍 갈라졌겠지요.

 꾸덕살투성이에 핏기 없이 누리끼리하던 어머니 손을 떠올려 봅니다. 빨래기계를 쓸 수 있던 날부터는 손빨래가 줄었다지만, 오로지 맨손으로 여름이며 겨울이며 이불과 옷가지를 주물러댄 나날이 어머니 손에 오롯이 배어 있었습니다.

 이 꾸덕살투성이에 핏기 없이 누리끼리하던 어머니 손이 어떠한 손이었던가는, 저 스스로 우리 어머니와 같이 아이를 키우는 삶길을 걸으면서 비로소 알 수 있습니다. 딱히 빨래기계를 안 쓰려는 마음은 없었으나, 굳이 내 옷가지를 빨래기계를 써 가며 빨아야 할 까닭을 느끼지 못해서, 스물한 살에 혼자 집을 나와서 살아갈 때부터 손빨래를 했습니다. 스물예닐곱 살까지는 겨울에도 찬물로 손빨래를 했습니다. 그러나 혼자 꾸리는 살림살이에 빨래는 그리 안 많아, 주부습진이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옆지기를 만나 함께 산 뒤에도 두 사람 몫 빨래는 얼마든지 손쉽게 해낼 수 있는 노릇이었으니, 이때에도 주부습진은 꿈도 꾸지 않았습니다. 날마다 빨랫거리를 쉴새없이 쏟아내는 아기를 낳아 키우며 비로소 손가락이며 손바닥이며 ‘달라진다’고 느꼈습니다. 아이키우기는 빨래만이 아니니까요. 오줌을 싸거나 똥을 지리면 그때그때 치우고 씻기도 닦습니다. 아기 먹을 죽을 끓이고 먹이고 입 닦고 하면서 하루 내내 잠잘 때를 빼놓고는 손이 마를 겨를이 없습니다.

 우리는 아이키우기를 온통 어머니한테만, 그러니까 여자한테만 맡기고 살고 있으니, 남자들이 주부습진에 걸려서 아파하고 힘겨워한다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이 나라 글쓰고 사진찍고 그림그리는 사람은 으레 남자요, 예술이나 문화 한다는 여자들 또한 여느 남자와 매한가지로 집일은 돌보지 않거나 집일은 남한테 맡기며 예술하고 문화에만 모든 힘과 품을 바치고 있습니다. 이들한테서도 주부습진 때문에 ‘창작하며 힘들어요’ 하는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오늘날 지식인 지성인 문화인 예술인 과학인 체육인 연예인 …… 들은 주부습진에 걸리지 않습니다. 이리하여, 지식인 지성인 문화인 …… 들이 주부습진 이야기를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거나 노래로 부르거나 춤으로 추거나 영화로 찍는 일 또한 없습니다.

 그런데 주부습진뿐이겠습니까? 빨래하기를 시로 쓰고 소설로 쓰며 영화로 찍는 사람이 있을는지요? 아이키우기를 동화로 쓰는 사람은 더러 있으나, 동시로 쓰는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아기 먹을 죽을 끓인다거나 아기한테 죽을 먹인다는 이야기를 사진으로 보여주거나 그림으로 나타내는 사람이 있는지요? 기껏(?) 나온다는 창작품은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입니다. 아기한테 젖을 물리는 어머니를 아름답게 그리는 모든 지식인 지성인 문화인 …… 들은 이 ‘아름다운 모습’ 뒤에 가려진 그늘자리를 읽지 못하거나 읽지 않습니다. 삶으로 받아들일 틈이 없으니까요. 삶으로 받아들이려고 자리를 마련하지 않으니까요.

 창작을 할 때에 ‘집일 이야기’를 반드시 그려내거나 담아내야 한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우리네 창작밭이 너무 한쪽으로 쏠려 있다는 소리입니다. 우리네 창작꾼들 삶과 눈길이 너무 한쪽에만 맞추어져 있다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라도 밥을 안 먹고는 못 살고 물을 안 마시고는 못 살며 바람을 들이쉬고 내뱉지 않고는 못 사는데, 사람이라는 목숨이 있을 수 있는 밑바탕을 헤아리면서 그려내거나 담아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를 키운 삶과 손길을 못 보고, 또 내가 키우는 삶과 손길을 못 봅니다.

 이야기란 바로 우리 삶에 깃들어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삶이 곧바로 이야기입니다. 머리로 지어낼 수도 있으나, 굳이 머리로 지어내지 않더라도 어디에서나 보고 느끼고 담아내어 펼치면 되는 이야기입니다.

 멀리 프랑스로 날아가야 배울 수 있는 그림이나 사진이 아닙니다. 멀리 독일이나 오스트리아나 폴란드로 날아가야 배울 수 있는 피아노나 바이올린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터전에서도 우리 동네에서도 우리 집에서도 얼마든지 ‘우주를 만나’거나 ‘세계를 읽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얼마나 고맙게 얻으면서 누리는 목숨인가를 느낄 수 있으면, 늘 즐겁고 신나게 일하며 놀 수 있습니다.


 (2)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 읽기


 1902년에 태어난 독일사람 레니 리펜슈탈은 2003년에 숨을 거둡니다. 백 살에다가 두 살을 더한 삶을 꾸린 이이는 처음에는 춤꾼이 되고자 했으나 다리를 다쳐 춤꾼이 되는 꿈을 접습니다. 그러다가 영화배우라는 새로운 길을 걸었고, 이에 그치지 않고 영화감독이라는 또다른 길을 찾습니다. 배우에서 감독으로 자리를 바꾸는 일이 얼마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영화감독으로 걷던 길은 독일 정치권력을 붙잡은 히틀러가 일으킨 전쟁 소용돌이를 거치며 송두리째 가로막힙니다. 유럽을 불태운 전쟁이 끝난 뒤에는 당신이 찍은 영화 필름이며 집이며 사회활동이며 모조리 잃거나 빼앗깁니다. 전쟁통에 여러모로 아끼며 돌봐 주던 사람들이 나치 부역자라는 이름에 얽히지 않겠다며 등을 돌리거나 손가락질을 하는 동안 빚과 소송에 시달리면서도 가느다란 삶줄기를 놓지 않습니다. 삶과 죽음은 종이 하나만큼 다를 뿐이라 하는데, 날마다 죽고픈 마음이었을 텐데 갑갑하고 슬퍼서라도 죽을 수 없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레니 리펜슈탈이라고 하는 한 사람 마음속에는 뜨거움이 늘 솟구치고 있었으니까요.

 영화 촬영기를 붙잡을 수 없는 몸으로 사진기를 쥐어든 레니 리펜슈탈은 ‘촬영기로는 담아내지 못하는 아쉬움을 사진기로 풀어내는 응어리’로 이어갑니다. 그런데 사진기를 쥔 레니 리펜슈탈한테는 지난날과 똑같은 ‘짓궂은 뭇칼질로 범벅된 글 공격’이 끊이지 않습니다. 밑바닥에서도 짓밟히는 레니 리펜슈탈 님한테는 죽음보다 못한 삶이었을 터이나, 이러한 ‘죽음보다 못한 삶’에서도 삶자락을 붙잡습니다. 이리하여, “90대가 된 지금(1990년대)도 레니는 다이빙을 즐긴다. 레니는 아마도 전 세계에서 최고령 다이버일 것이다. 무언가에 매혹되는 능력과 더 나은 사진을 향한 노력은 전혀 줄어들 줄을 몰랐다 … 그 엄청난 열정과 추진력, 길고 날씬한 다리를 보면 (아흔을 넘긴) 레니는 아직도 소녀 같다. 레니는 처음 다이빙을 한 이후로 수년간 해저의 서식지가 파괴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며 슬퍼했다. 또다시 사라져 가는 존재를 기록할 운명이 주어진 듯했다. 그래서 레니는 열렬한 환경보후주의자이자 자크 쿠스토의 지지자이며 그린피스의 회원이 되었다(530∼531쪽).”고 합니다.

 우리 이웃동네에 여든일곱 나이로 수채그림을 그리는 할머니가 살고 있습니다. 틈틈이 할머님 댁을 찾아뵈며 인사를 올리고 말씀을 귀담아듣곤 합니다. 할머님은 당신 딸아들한테 보살핌을 받으며 다른 걱정 없이 마지막 삶을 이을 수 있다고 하지만, 할머님으로서는 ‘당신이 손을 놀리며 그림을 그릴 수 있는’데 도움 손길을 받을 까닭이 없다면서, 여든일곱 나이로 동네 아주머니와 할머니한테 그림을 가르쳐 주면서, 이 가르침삯으로 살림을 꾸립니다.

 예술쟁이로 한삶을 마감한 레니 리펜슈탈 님과 이웃동네 그림할머님을 나란히 견줄 수는 없습니다. 서로 사뭇 다른 길을 걸었고, 서로 다른 넋으로 예술(영화나 사진하고 그림)을 붙잡기도 했지만, 한 분은 예술길에 어린 날부터 젊음과 늙음을 모두 바쳤다면 다른 한 분은 어머니로서 살림살이 꾸리기를 예순 넘어까지 한 끝에 비로소 느즈막하게 당신 예술길을 걸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두 분을 함께 생각해 보고 싶습니다. 누가 무어라 해도 꿋꿋하게 당신들 길을 걷기 때문입니다. 세상에 나고 지는 이름이 아닌, 당신들 뜻과 길을 애틋하게 여기기 때문입니다.

 다만, 먼발치에서 지켜보는 눈길로 돌아본다면, 레니 리펜슈탈 님한테는 당신이 세상살이와 세상흐름을 옳고 바르고 싱그럽고 곱게 보여주거나 이끌 만한 길동무가 보이지 않습니다. 사랑을 나누거나 쏟거나 바칠 만한 짝꿍은 있었으나, 이 짝꿍들 가운데 레니 리펜슈탈이 한창 뜨거운 젊음을 불사를 때에 슬기롭고 눈밝도록 거든 사람은 없었구나 싶습니다. 따끔하게든 부드럽게든, 히틀러가 움켜쥐던 그무렵 독일 삶터를 바르게 읽고 바르게 도와줄 벗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도와주지 않고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이름을 등에 업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전쟁이 끝난 다음 잽싸게 얼굴과 몸짓을 바꾸면서 레니 리펜슈탈한테 손가락질을 하면서 새롭게 살아남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둘레에서 함께 영화를 만들건 일을 하건 했던 사람들이 어떠했는가를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을 읽으며 헤아리면, 다들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사람 얼굴과 이름에 기댈 뿐, 레니 리펜슈탈 마음속 깊이 파고들면서 우리 삶터를 튼튼하고 씩씩하게 일구는 길로는 접어들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이러한 레니 리펜슈탈도 나이 예순을 넘긴 다음 만나 서른 해 넘게 함께 살아간 길동무가 있었기에, 늘그막에는 당신 젊은날 매무새에서 한껏 거듭나며 새로워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끊이지 않는 뭇칼질에도 견디어 내는 힘이나, 끝없는 손가락질을 살며시 흘려보내면서 빙긋 웃을 수 있는 느긋함을 찾을 수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저한테는 머나먼 나라 사람이요, 만나본 적 없는 사람이기에, 참말로 레니 리펜슈탈이라는 분이 늘그막에는 느긋하며 한결 즐겁게 마지막 삶을 꾸렸는지는 알 길이 없습니다. 그저, 650쪽이 넘는 두툼한 책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을 읽다 보니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불꽃이 아닌 우등불 같은 뜨거움을 늘 가슴속에 담으면서 활활 태운 레니 리펜슈탈이었다고 느낍니다. 이 뜨거움이 있기에 히틀러 나치당 정권에서는 ‘사회와 정치를 읽지 못한 바보’였으면서도 영화예술 새길을 닦을 수 있었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을 쓴 오드리 설킬드 님은, 두툼한 책 마무리를 지으며, “외국의 뛰어난 정치가들조차 징후를 정확히 포착하지 못했을 때, 레니 리펜슈탈만이 미래를 예견했어야 하는 걸까(577쪽)?” 하고 묻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님이 세상을 못 읽고 바보짓을 했다고 나무랄 수 있겠으나, 레니 리펜슈탈한테만 바보짓을 했다고 나무랄 수 없는 법입니다. 어쩌면 여느 세상사람들은 레니 리펜슈탈이 스스로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조용히 뉘우치면서 부끄러움을 씻어내는 새길을 걷지 못하도록 가로막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저 영화예술 하나에만 온힘을 바친 레니 리펜슈탈이었기에, 당신이 일군 창작은 창작 그대로 바라보면서 받아들이는 한편, 이러한 창작은 훌륭하지만 이러한 창작 뒤켠에는 또다른 삶이 있었음을 이제라도 깨달으시오 하고 일러 줄 수 있는 어르신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돌이켜보면, 이처럼 넓고 푸근하게 껴안으면서 부드러이 일깨워 주는 어르신은 우리 사회에도 몇 사람 없습니다. 처음부터 착하기만 하거나 잘나기만 하거나 아름답기만 한 사람들로 이루어진 우리 터전이 아니라, 처음에는 얄궂기도 하고 잘못하기도 하며 미웁기도 한 사람들이 하루하루 조금씩 깨닫고 배우면서 우리 터전을 일구어 간다고 한다면, 우리는 ‘넌 잘못했어. 넌 나빠. 그러니까 넌 죽어야 해.’ 하는 말마디로 사람 가슴에 못을 박아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그래, 이 일은 이렇게 되었구나. 다음 일은 다르게 해 보자.’ 하면서 부둥켜안으며 기다릴 수 있어야지 싶습니다.

 재주가 있고 솜씨가 뛰어났기 때문에 레니 리펜슈탈 님을 감싼다거나, 마음씨는 짓궂고 눈썰미는 형편없으며 친일부역을 했지만 문학은 아름답다며 누군가를 우러르자는 소리는 아닙니다. 농사짓는 사람 마음이 되자는 소리입니다. 농약과 비료로 찌든 논밭일 때에, 농사꾼이 이 논밭을 그냥 내버려 둘까요? 그예 내팽개칠까요? 참 농사꾼은 농약과 비료로 찌든 논밭을 기름진 논밭으로 돌려놓으려고 여러 해에 걸쳐 땀을 흘리고 흙을 갈고 풀을 심고 갈아엎기를 되풀이합니다. 짧으면 대여섯 해, 길면 열 몇 해에 걸쳐 바보밭이나 묵정밭을 기름지며 좋은 밭이 되도록 힘씁니다. 우리는 우리 둘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한테도 따스한 사랑과 넉넉한 믿음을 나누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리 가르고 저리 가르는 금긋기가 아닌, 모두 아름다우며 고운 목숨이라는 생각으로, 차근차근 일깨우며 우리 스스로 옳고 바르게 살아야지 싶습니다.

 왜 초등 여섯 해, 중고등 여섯 해, 모두 열두 해에 걸쳐 어린이와 푸름이를 가르치겠습니까. 대학교에 보내려고 가르치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한 목숨이 올바르고 싱그러우며 아름다운 한 사람이 되도록 하려고 차근차근 섬돌을 디디듯 가르치고 일깨웁니다. 이 열두 해 동안 한 아이는 엉뚱한 길로 빠지거나 샛길로 접어들기도 할 텐데, 이렇게 흔들리거나 떠돌 때에 우리 어른들은 지긋이 바라보며 포근히 감싸고 기다려야 합니다. 기다리되 손놓고 기다리지 말고, 손을 맞잡으며 기다려야 합니다. 지켜보며 팔짱낀 채 지켜보지 말며, 어깨동무하며 지켜보아야 합니다.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이라는 책에서 다루는 레니 리펜슈탈이라고 하는 한 사람 삶이란, 이이를 헐뜯는다든지 추켜세운다든지 깎아내린다든지 섬긴다든지 하자는 삶이 아닙니다. 이이 삶을 꾸밈없이 바라보면서, 잘한 일은 잘한 대로 받아들이고 잘못한 일은 잘못한 일대로 받아들이는 가운데, 우리가 저마다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우리 삶은 어떤 모양 어떤 몸짓인가를 깨닫자고 하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우리들 가슴속에는 어떠한 뜨거움이 어떠한 크기로 어느 때에 있는지를 돌아보자고 하는 이야기라고 느낍니다. 오르락내리락하는 우리 삶을 우리들부터 있는 그대로 껴안으면서 사랑하자는 이야기라고 봅니다. 지나온 발자취뿐 아니라 바로 오늘과 앞으로 다가올 나날을 바라보는 눈썰미가 흐트러지거나 흐리멍덩하지 않도록 다스리며 다독이자는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한 사람 발자국을 찬찬히 짚으며 내 발자국을 찬찬히 되짚는다고 하겠습니다. 한 사람 춤사위를 가만히 바라보며 내 몸짓을 가만히 헤아린다고 하겠습니다. 한 사람 땀방울을 오롯이 살피며 내 땀방울은 어떠한가를 오롯이 살핀다고 하겠습니다.

 책을 덮으면서 간기를 살피니, 이 책은 1996년에 처음 나왔고, 우리 나라에는 2006년에 옮겨졌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님은 2003년에 죽었습니다. 당신이 아흔다섯 살일 때에 나온 책인데, 레니 리펜슈탈 할머님은 당신 삶을 낱낱이 파헤치고 되짚으면서 다룬 이 책을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궁금합니다. 이 책을 들여다보고 나서, 당신 마지막 일곱 해는 어떤 매무새와 넋으로 일구었는지 궁금합니다. 한 사람을 다루는 평전이라고 한다면, 이 한 사람이 아직 살아 있을 때에 써서 함께 읽고 더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으면 더없이 좋겠구나 싶습니다.

 스콧 니어링이 백 살을 맞이하고 세상을 떠났을 때에 이웃동네 사람들은 스콧 니어링 난날을 기리면서 ‘당신이 살아 주어서 고맙다’고 이야기했다는데, 저는 스콧 니어링도 그렇고 레니 리펜슈탈도 그렇고 우리 이웃동네 그림할머님도 그러한데, 모두들 오래오래 살아가면서 숱한 이야기를 보여주어서 고맙습니다. 저한테는 당신들 모두가 고마운 이슬떨이요 스승이요 길동무입니다.


 (3) 길디긴 이야기 꾹꾹 눌러담기


 2006년에 읽은 책을 지난해에 다시 한 번 읽고 다섯 해 만에 느낌글을 적바림합니다. 2006년 무렵, 이 책을 펴낸 ‘마티’ 출판사에서 다른 책을 내놓았는데 오탈자가 다섯 군데 나오는 바람에 애써 찍은 책을 모조리 거두어들이고 다시 찍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쉽사리 느낌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저는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을 읽으며 오탈자를 스물다섯 군데 찾았는데, 자그마치 650쪽이 넘는 책을 또다시 거두어들여 새로 찍는다면, 1인 출판을 하는 사장님이 알거지가 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습니다. 650쪽짜리 책에 오탈자 스물다섯 군데라면 퍽 적게 나온 셈입니다.

 드디어 이 책을 놓고 느낌글을 쓰는구나 하고 지난 다섯 해를 돌아봅니다. 다섯 해 앞서 이 책을 놓고 느낌글을 썼다면 아무래도 ‘다섯 해만큼 덜 배우고 덜 깨닫고 덜 생각한’ 채로 느낌글을 썼으리라 봅니다. 다섯 해가 지난 오늘이라 해서 더 배우고 더 깨닫고 더 생각하며 느낌글을 쓴다고 내세우기 힘들지만, 다섯 해를 곰삭일 수 있는 세월이 고맙습니다. 아마, 앞으로 다섯 해를 더 곰삭인 다음 이 책을 새로 돌아본다면, 그만큼 저 스스로 ‘오늘은 읽어내지 못한 이야기를 그때에 읽어낸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앞으로 새로 맞이할 다섯 해를 생각하면서,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에서 제 가슴으로 살며시 파고든 대목을 하나하나 눌러담아 봅니다. 눌러담고 또 눌러담아도 많디많은 이야기가 깃든 책입니다. 이 책을 마주하고 싶은 분이라면, 다른 책도 마찬가지인데, 며칠 만에 다 읽으려 하든지 한두 달 만에 끝내려고 하지 말고, 차근차근 천천히 새기고 돌아보면서 1900년대 첫무렵부터 1900년대 끝무렵까지 우리 세상 이야기를 곰곰이 살펴보면 좋겠습니다. 《레니 리펜슈탈, 금지된 열정》은 20세기를 통째로 살아낸 한 사람 발자취이자 20세기 인류문화 발자취라고 할 수 있습니다. (4343.1.28.나무.ㅎㄲㅅㄱ)


[18∼20, 118, 129쪽] 여기서 리펜슈탈은 중요한 것을 배웠다. 당대 최고의 장비와 최고 실력을 갖춘 기사들이 있다 해도 훌륭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 리펜슈탈은 적절한 사람을 적절한 곳에 배치함으로서 각 촬영기사들이 재능을 자유롭게 발휘하도록 했다는 뜻이다 … 레니는 형식과 내용이 일치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자신이 직접 그런 영화를 위한 발라드나 전설 같은 이야기를 쓰고 싶다는 욕구가 점점 더 강해졌다. 무용을 할 때처럼 말이다 … 레니는 마을 여관에 방을 잡고서 마을 사람들이 자신의 뜻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까지 머무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라고 결정했다. 이런 계획을 털어놓자 여관 주인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듯이 고개를 저으며 … 하지만 레니는 겁먹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너무 먼 길을 왔다. 레니는 하루 종일 거리나 산허리에 띄엄띄엄 모여 있는 집들로 다니면서 만나는 사람 모두에게 인사를 했고, 특히 여자와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한 주가 지나자 차가운 분위기가 한결 누그러졌고, 레니가 자신이 찍은 사진을 돌려가며 보여주자 곧 사람들은 웃으며 사진을 보려고 애썼다.

[32∼35쪽] 리펜슈탈은 그동안 스포츠 고위 관리들 모두와 한 사람씩 모두 돌아가며 싸운 것만 같았다. 어쨌거나 그 때문에 레니는 높이뛰기 경기장에는 구멍이 두 개, 멀리뛰기, 장대높이뛰기, 삼단뛰기 경기장과 100미터 트랙 결승선 끝에는 각 하나씩의 구덩이를 확보했더 … 레니 자신은 운동선수에게든 영화 관객에게든 운동과 영화의 관계가 매우 깊은 의미를 지닌다고 굳게 믿었다. ‘아름다운 모든 것들’에 대한 무의식적인 끌림과 ‘구성에 대한 관심’이 바로 레니의 동력이었다. 물론 리펜슈탈은 개인의 의지로 육체를 완전히 장악한다는 개념도 좋아했지만, 이와 같은 경쟁의 중심에 있는 우정도 좋아했다 … 리펜슈탈은 또 “나는 매우 현실적인 것, 삶을 그대로 잘라낸 부분, 평균적이고 일상적인 것에는 관심이 없다. 특이한 것, 특별한 것만이 나를 흥분시킨다. 나는 아름다운 것, 강한 것, 건강한 것, 즉 살아 있는 것에 매료된다. 나는 조화를 추구한다. 조화가 이루어지면 나는 행복하다”고 말했고, 적대적인 비평가들은 그녀를 맹렬히 비난했다. 마음만 먹으면 리펜슈탈의 발언에서 초월적 존재에 대한 섬뜩한 울림이나 초월적인 질서에 대한 갈망을 읽어내기란 매우 쉽다. 하지만 제3제국과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여겨지는 사람이 이런 말을 한다면 이와 같은 의혹을 갖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영화가 삶을 양식화한 것이 아니라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나치 전범재판이 연달아 열렸으나 레니는 유대인 학살에 직접적 관련이 없다는 무죄 판결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녀를 비난하는 사람들은 기어이 그녀의 작품 활동을 막았다. 레니는 결코 영화계에서 환영받지 못했다. 반세기 동안 수많은 다큐멘터리가 레니의 다큐멘터리를 부분적으로 인용했지만, 그녀의 영화가 공개적으로 상영되거나 텔레비전을 통해 무삭제로 방송된 적은 없었다. 영화사의 그 어느 부분에서도, 심지어 여엉의 업적을 다루는 부분에서도 리펜슈탈은 아예 언급되지 않거나 부정적으로 언급될 뿐이었다. 리펜슈탈은 거의 전 세계적인 공모에 의해 역사의 각주로 쫓겨났다. 프로파간다와 예술을 구분할 방법이나 구분하려는 의지는 어디에도 없는 듯했다. 그것은 공평한 일이었을까?

[134∼135, 146, 286∼287, 349∼350쪽] 몽블랑의 방랑자 야보르스키는 리펜슈탈과 함께 영화를 만들던 힘든 나날을 이렇게 회상했다. “…… 단 한 쇼트를 찍기 위해서 장비를 전부 등에 짊어지고 8시간 동안 산을 오른다고 생각해 보세요. 케이블카도 없으니 말입니다. 우리는 장비를 모두 등에 지고 다녔습니다. 그런 식으로 일을 하려면 ‘이상주의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 일을 사랑해야 하지요.” … 리펜슈탈은 할리우드를 고려하지 않고 있었다. 리펜슈탈은 스튜디어가 원하는 이름, 그것도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손에 넣고 싶어하는 이름이었다. 그토록 고된 환경에서 영화를 찍으려는, 찍을 능력이 있는 여배우가 어디 있겠는가? 거절하면 할수록 영화사는 점점 더 높은 출연료를 제시했다. 리펜슈탈이 보기에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큰 금액이었다. 결국 레니는 영화사의 제안을 수락하고 말았지만, 돈 때문에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레니의 말에 따르면 이것은 소중한 동료들과 다시 한 번, 어쩌면 마지막이 될 모험을 할 기회였기 때문이다(1932년 무렵) … 리펜슈탈은 영화에서 전체적인 조화를 끌어내고 단일한 목소리를 내려면 반드시 한 사람이 편집을 해야 한다며, 영화에 대한 아이디어를 낸 본인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편집한다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 … 리펜슈탈은 직접 꼼꼼하게 정찰하여 최상의 카메라 위치를 찾아냈고, 또한 정확히 어떤 앵글을 원하는지 자세히 설명했으며, 심지어는 어떤 렌즈를 사용할지까지 직접 결정했다. (1936년 올림픽에서) 각기 다른 경기에 차별을 두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새로운 방법을 추구해야 했다 … 리펜슈탈은 각기 다른 경기를 모두 다르게 다루면서 각 경기에 알맞은 속도와 스타일을 적용했고, 능숙한 편집 솜씨로 이런 각 경기를 근사하게 하나로 엮어 전반적인 리듬감을 완성했다.

[149∼150, 452, 458∼459쪽] 레니는 〈푸른 빛〉 작업에 몰두하느라 정치에는 전혀 관심도 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제외한다면, 독일 경제가 가라앉고 있으며 실업이 널리 퍼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레니가 별 걱정을 하지 않는 사이, 아버지는 사업 규모를 줄이고 전 직원의 60퍼센트를 해고한 후 어머니와 함께 자그마한 아파트에 세를 얻어 이사해야 했다 … 레니가 전쟁에 활발하게 참여한 기간은 채 3주도 안 됐지만, 이 경험은 몇 십 년 동안이나 레니를 따라다니며 괴롭혔다 … 레니는 전쟁 기간 내내 〈저지대〉뿐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일을 통해서 동료 촬영기사들과 조수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었다. 레니가 야보르스키에게 말했다. “최대한 몸을 사려요. 더도 덜도 말고 딱 그들이 시키는 대로만 해요. 살아남는 데만 신경 쓰라고요.” 물론 레니도 그렇게 하고 있었다.

[151∼153, 233, 236, 277쪽] 레니는 히틀러의 주장을 잘 이해하지 못했지만 히틀러라는 존재 자체와 그가 청중을 사로잡는 방법에 매료되었다 … 레니는 강한 인상을 받으면 누구든 어느 때든 그 사람을 직접 만나야 직성이 풀렸다 … 레니는 이렇게 직접 부딪히는 방법을 통해 스스로에게 기회를 만들어 주고 자신의 운명을 만들어 나간다고 믿었다 … 민주주의는 죽었다. 리펜슈탈은 베르니나와 베른 알프스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에 아주 가끔만 독일 소식을 들을 뿐이었다. 레니는 5월 10일 베를린 대학 맞은편 보리수 거리에서 ‘반독일적’인 사상을 담았다고 판단되는 저술은 모두 불태웠던 분서 사건도, 최초의 유대인 추방 사건도 알지 못했다고 주장한다 … 리펜슈탈은 수많은 작가와 음악가, 화가뿐 아니라 연극과 영화계의 여러 예술가들이 독일을 떠났다는 소식을 듣고 공포에 질렸다 … 괴벨스의 일기에 따르면 두 사람의 협력 관계가 멀어진 것은 레니의 주장보다 훨씬 뒤였다. 또한 괴벨스는 레니 리펜슈탈이 스위스 알프스에 틀어박혀 있었다고 말하는 시기에 ‘똑똑한 여자’ 레니 리펜슈탈과 몇 번이나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분서 사건이 있은 지 겨우 1주일 후인 5월 17일에 괴벨스는 리펜슈탈을 만나 영화 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고 적고 있다 … 히틀러가 히틀러유겐트 대원들에게 연설을 하는 부분에서 리펜슈탈은 영화에서 가장 기억에 남을 만한 장면을 찍었다. 연단 주변에 설치해 둔 원형 트랙을 따라 히틀러의 주변을 ㅊ너천히 돌면서 밝은 조명 아래에 선 이 민중 선동가를 낮은 앵글 카메라에 담은 것이다.

[260, 263, 274∼275, 276쪽] 히틀러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국민계몽선전부는 계약을 최종 호가인해 주지 않았고, 정부 영화 부서에서 일하는 그 누구도 리펜슈탈에게 촬영기사나 필름을 제공할 권한이 없었다. 리펜슈탈이 공식적인 협조를 받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이 분명했으니 가장 쉬운 방법은 패배를 자인하고 집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포기는 리펜슈탈의 타고난 집요함에 어울리지 않는 일이었고, 리펜슈탈이 히틀러에게 느끼는 의무감에도 맞지 않았다 … 리펜슈탈의 회고에 따르면 히틀러를 비롯한 나치당의 거물들은 다큐멘터리를 보고 매우 만족한 듯했지만, 리펜슈탈 자신이 보기에는 제대로 된 플롯도 대본도 없는 미완성작에 지나지 않았다. 리펜슈탈은 “이미지를 조합해서 시각적인 리듬과 다양함을 만들어 내는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바로 이후의 다큐멘터리에서 그토록 놀라운 효과를 만들어 낸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괜찮은 연습이었던 셈이었다 … 전당대회가 끝난 후에 발행된 다큐멘터리 제작에 관한 책을 보면, 전당대회 준비가 리펜슈탈의 다큐멘터리 준비와 맞물려서 진행되었다는 설명과 함께 사진이 실려 있다. 리펜슈탈은 전당대회는 그녀가 참가하든 참가하지 않았든 마찬가지였을 것이고 자신은 이 장대한 행사와 그 준비과정을 단순히 기록했을 뿐이라고 주장하지만, 이 사진과 설명은 그녀의 주장과 달리 리펜슈탈이 실제 전당대회 연출에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는 증거로 종종 제시되었다 … 어느 쪽이 진실이든 리펜슈탈은 자신이 역사적인 행사를 객관적으로 기록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그녀는 다큐멘터리 제작이라는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을 뿐이며 기록 대상이 무슨 행사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 1933년 전당대회를 기록한 〈신념의 승리〉, 뛰어난 작품으로 평가되는 〈의지의 승리〉, 독일군에 대한 좀더 짧은 다큐멘터리 〈자유의 날〉을 만들기 전에도 전당대회를 기록한 뉴스 영화는 존재했다. 리펜슈탈의 영화는 이렇게 예술적으로 연출된 나치당 전당대회에 바쳐진, 혹은 정말로 마침내 집권한 히틀러에게 바쳐진 ‘장편’이었을 뿐이다.

[309, 312, 314∼317쪽] 리펜슈탈의 영화에서 가장 특징적인 요소는 바로 환상적인 분위기다. 초창기에는 그녀의 연기에서 이런 요소를 엿볼 수 있으며, 나중에 연출을 하게 되면서 특징은 더욱 뚜렷해졌다. 리펜슈탈은 일상적인 관심사나 평범한 메커니즘에 안주하지 않고 양식화된 세상을 만들어 보여준다 … 그녀는 결코 프로파간다를 의도하고 만든 것이 아니었다고 말한다. 오히려 그녀의 의도는 현실을 있는 그대로 그려내는 것이었다 … 히틀러는 전당대회 다큐멘터리를 왜 하필이면 리펜슈탈에게 맡기겠다고 그토록 고집했을까? … 그녀의 역할을 평가할 때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역사적 정황을 접어두어야 하지만, 레니 리펜슈탈이 제6회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다큐멘터리 프로젝트를 거절했다면 무엇이 달라졌을 것인가? … 리펜슈탈은 그 걸림돌로 인해 자신이 영영 영화계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 그녀는 별 가망이 없어 보이는 조각 자료들과 그토록 진부한 아이콘을 가지고 걸작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 전후 비평가들은 리펜슈탈이 이 영화로 사람들을 현혹했다고 비난했다. 이런 비난에 리펜슈탈은 이 영화가 만들어질 당시에는 독일인의 90퍼센트가 히틀러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었다고 응수했다. 이 영화에서 나치 정당의 교조는 별로 드러나지 않으며 나치의 악질적인 인종차별적 교조나 정치적 박해를 암시하는 내용은 하나도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전당대회 자체가 그랬던 것이지 리펜슈탈이 그렇게 만든 것은 아니다. 리펜슈탈은 최면과 같은 의식을 공들여서 훌륭하게 만들어 보여주었다.

[367, 369, 433∼434, 447쪽] 리펜슈탈은 확보한 필름 약 400킬로미터를 보는 데만도 10주가 걸렸다. 레니처럼 전설적인 질서 감각을 가진 사람이 아니라면 그것만으로도 정신을 못 차렸을 것이다 … 레니는 자신이 전달하고 싶었던 것은 “마라톤 주자들의 내면적인 감정”이었다고 여러 번 말했다. 지독한 피로나 빨리 경기가 끝나기를 갈망하는 그러한 감정 말이다. 주자의 무거운 다리는 아스팔트에 들러붙는 것 같지만 의지력이 그를 이끌어 간다 … 지금 이 영화를 역사 다큐멘터리로 감상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영화에서 엿보이는 나치당 지도자들의 모습이 기분 나쁘다기보다는 매력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할 것이다. 이들은 자신이 카메라에 찍히는지 모른 채 솔직한 반응을 그대로 보여준다 … 레니는 시와 영화가 비슷한 표현 수단이라고 생각했고 시와 영화는 언제나 ‘교류 전기’처럼 일종의 파동을 그린다고 생각했다. 또한 관객이 아름다움과 화려함에 압도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대신에 관객은 시퀸스의 표현력에 의해 절정에 이끌렸다가 가라앉았다가 다시 상승하기를 반복해야 한다고 믿었다.

[473, 488∼489쪽]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이 들려온 순간부터 슈네베르거 부부(전쟁 때 레니는 슈네베르거 부부를 숱하게 도와서 목숨을 여러 차례 건져 주었다)는 레니 리펜슈탈을 멀리하려 했다. 그들은 그날 밤 칠레르탈 계곡 꼭대기의 작은 호텔에 레니를 버려둔 채 떠났다. 다음날 레니가 두 사람을 쫓아서 마을 위 언덕에 있는 한 가족 임대별장에 갔지만, 기젤라가 차갑게 레니를 쫓아냈다. “도대체 왜 우리가 당신을 도울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기젤라가 소리쳤다. “이 나치 계집 같으니라고!” 한스 역시 따뜻한 말을 해 주지 않았다. 사랑하는 눈벼룩은 몇 주 전만 해도 그녀에게 도움을 청했고, 또 원하는 도움을 받았지만, 이제는 레니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했다 … 전쟁이 끝난 지 2년이 지났지만 리펜슈탈의 자산과 권리, 자유는 모두 강제된 채였다 … 리펜슈탈과 히틀러가 친밀한 관계였다는 증언이나 기록이 없었고, 오히려 그런 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총통의 측근들이 증언한 기록은 많았다 … 리펜슈탈은 또한 자기 밑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히틀러식 경례를 강요하지 않았다.

[491, 492, 509쪽] 레니는 끝도 보이지 않는 빚과 소송에 시달렸다 … 법정은 레니의 전쟁범죄 혐의를 풀어 줄 수는 있었다. 하지만 대중들의 적의는 1947년 출판된 지그프리트 크라카우어의 독일 영화 심리분석서 《칼리가리에서 히틀러까지》와 같은 새로운 해설이나 리펜슈탈의 소송을 자극적으로 보도하는 언론에 더욱 부추김을 받았다 … 리펜슈탈은 전쟁이 끝난 후 한 번도 제대로 살아 있다는 느낌을 갖을 수 없었다. ‘인간으로서 가장 밑바닥의 진창’을 뒹구는 기분이었다. 감금당한 것은 아니지만 그 어떤 영화도 만들 수 없다는 점에서 그랬으며, 심문은 끝난 것이 아니라 ‘인터뷰’의 탈을 썼을 뿐이었다.

[520∼521, 524쪽] 레니는 이들(메사킨 퀴사이르 누바족)의 순진함과 때 묻지 않은 관습을 사랑했다. 언젠가는 사라질 존재임을 알고 있었기에 더욱 감동적이었다 … 레니 리펜슈탈은 아프리카에 열 달 간 머무르며 멀리 떨어진 곳까지 여행을 했는데, 대부분 혼자 다니는 경우가 많았다 … 레니는 차도 텐트도 없이 주로 바깥에서 잠을 잤다(1962년 무렵). 이제 레니는 누바족 마을에서 친구로 완전히 받아들여졌고 뱀에 물려죽은 전사의 장례식에까지 초대받았다. 이곳에서 레니는 어디에든 갈 수 있었고 혼자 있을 때도 두렵지 않았으며 모욕을 당하는 일도 없었다. 레니는 지난 몇 년 간 독일에서 악전고투를 하면서 모욕을 참아 왔기 때문에 이곳에서 두려움 없이 자유롭게 다닐 수 있고 친구들로부터 환영받자 짐심으로 행복했다 … 이번에는 사진밖에 찍을 수 없었지만 다음에는 반드시 사랑하는 누바족의 영화를 찍으리라 … 레니는 모든 것을 포기하고 누바족에게 돌아가 영원히 그곳에서 사는 것이 어떨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했다. 레니는 누바족 마을에서 벌집 같은 오두막을 지어 그곳에서 살고 싶었다.

[526, 569, 571∼573쪽] 이때쯤(1968년) 레니의 사진이 유명해졌다. 아프리카 사진을 모은 첫 사진집 《최후의 누바족》이 뉴욕에서 1974년에 출판되었고, 2년 후에는 《카후 사람들》이 나왔다. 레니가 수단에 마지막으로 다녀온 후 1982년에는 《레니 리펜슈탈의 아르피카》가 출판되었고, 곧이어 《사라지는 아프리카》가 나왔다. 이제 사실상 레니가 알고 레니가 사랑했던 누바족은 사라지고 없었다. 레니의 표현대로 ‘문명의 파괴적인 손’은 누바족에게 누더기옷과 정체성의 위기만 가져다준 것이 아니라 돈, 술 그리고 문을 잠글 자물쇠를 가져다주었다. 관광객들이 누바산으로 찾아왔지만 그들이 찾는 이국적인 정서는 사라지고 있었다. 춤과 싸움의 의식은 수많은 렌즈 앞에서 돈을 받고 치러졌다. 레니는 그녀의 사진이 이런 변화에 일부 책임이 있다든지, 그녀는 단지 ‘환상에 사로잡힌 백일’일 뿐이라는 비난에 반박했다. 누바족에 대한 관심이 아름다운 육체에 대한 예의 집착과 숭배를 보여주는 또다른 증거라는 악의적인 비난이 쏟아지자 레니는 깊이 절망했다. 레니가 사진을 찍기 전에 다른 사람들도 누바족의 사진을 찍어 발표해 왔다. 단지 그녀는 사라지는 순간의 목격자이자 기록자가 되는 특권을 누렸을 뿐이다. 레니는 부패해 가는 천국을 보았다 … 리펜슈탈의 사진은 가장 완벽한 인간 육체를 아무 부끄러움 없이 찬미한다. 수전 손택은 《우율한 열정》에서 리펜슈탈이 그려내는 “곧 멸종될 누바족은 리펜슈탈이 만든 나치 작품의 연장”이라고 비난했고 몇몇 비평가들 역시 손택을 따랐다. 하지만 수단 정부는 리펜슈탈이 찍은 수단 사람들의 감각적인 초상에 굉장히 기뻐하며 리펜슈탈이 여행 허가를 요청할 때마다 점점 더 친절해졌다. 1975년 니메이리 대통령은 리펜슈탈의 공헌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수단 시민권을 수여했다. 리펜슈탈은 그런 영광을 누리는 최초의 외국인이었다 … 지적이고 정열적인 탐구로 유명한 손택은 “생각을 자라게” 하는 글로 유명했는데, 리펜슈탈에 대한 그녀의 평가는 오히려 많은 독자들의 생각을 고정시켜 버렸고, 거의 30년 전의 크라카우어의 평가와 마찬가지로 리펜슈탈에게 많은 해를 입혔다. 어쩌면 제일 먼저 밝혀야 할 것은 손택의 글이 전혀 다른 두 작품에 대한 평이라는 점이다. 손택은 짓궂게도 ‘매혹적인 파시즘’이라는 제목 하에 레니의 아프리카 사진집을 《SS 제복》이라는 책과 함께 묶어서 평한다 … 손택은 리펜슈탈이 누바족의 품위를 떨어뜨렸다고 했지만, 그것은 단지 이런 류의 사진에 대한 손택의 해석일 뿐일지도 모른다. 손택의 마음속에 자리잡은 리펜슈탈에 대한 이미지가 사진을 보는 눈을 흐렸을 수도 있다. 다른 예술가들 또한, 리펜슈탈 이전에도 이후에도 비슷한 사진을 찍었다. 리펜슈탈에게 영감을 준 조지 로저는 1948년과 1949년에 씨름을 하는 누바족 사진을 찍었다. 로저의 사진은 걸작으로 평가받았다. 어떤 식으로든 로저의 사진을 파시스트적이라고 해석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손택은) 리펜슈탈의 뛰어난 다큐멘터리 두 편은 “의심의 여지 없이 뛰어나고” 어쩌면 “지금까지 제작된 다큐멘터리 영화 중 가장 위대”할지도 모르지만 “영화의 역사에서는 중요한 작품이”라고 생각할 수는 없다(고 말한다). 이것은 야누스와 같은 관점이다! … 손택은 리펜슈탈에게 언어적인 공격을 퍼붓지만, 그 방식은 프로파간다라는 이론과 비슷한 점이 매우 많다 … 레니는 언제나 누바족을 관찰하는 보이지 않는 관찰자였으며 어떤 방법으로도 카메라 앞에 일어나는 일에 개입하지 않았다. 그런데 무엇이 파시스트적이란 말인가?

[577, 594쪽] 외국의 뛰어난 정치가들조차 징후를 정확히 포착하지 못했을 때, 레니 리펜슈탈만이 미래를 예견했어야 하는 걸까? … 우리는 리펜슈탈을 비난하지만, 리펜슈탈의 재능을 발휘하지 못하게 만듦으로써 사회가 무엇을 잃었는지는 별로 생각하지 않는다 … 하지만 무엇을 믿든 간에, 사회가 리펜슈탈에게 빚을 졌다는 사실은 분명하다. 〈의지의 승리〉가 없었다면 우리는 나치 현상과 나치 현상의 힘(신비화와 볼거리를 통해서 수백만 명의 사람들을 묶어 단 하나의 목적을 향해 나아가게 하는 힘)을 지금만큼 잘 이해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히 이미 반세기나 지난 상황에서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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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
노나리 지음 / 에쎄 / 200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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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땅에 있는 ‘푸른누리(그린란드)’를 찾자
 [애 아빠가 오늘 읽은 책 20] 노나리,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



 엊저녁 서울 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니, 아침부터 아기하고 씨름하던 옆지기는 축 처졌습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서울 볼일을 봐야 하는데 몹시 걱정입니다. 그러나 이 일을 다음달 첫머리까지 해야 하니 어쩌는 수 없습니다. 이 어쩌는 수 없다는 굴레가 참 고단합니다. 아픈 사람을 놓고 집을 나서야 하는 일이란 아프지 않은 사람으로서도 몸과 마음이 나란히 고단하고 괴로운 노릇인데, 어디 하소연할 데란, 아니 어디 도움을 바랄 데란 없습니다. 우리 삶터는 ‘장애’라고 하면 팔이나 다리가 똑 부러졌다거나 한쪽 팔다리가 짧다거나 하는 ‘정상인이라 하는 사람하고 견줄 때에 눈에 보이도록 다른 사람’을 생각하기만 할 뿐이기 때문입니다. 팔이 부러지지 않았다든지 말을 못한다든지 눈이 멀었다든지 하지 않으면 ‘그깟 장애야 뭐 대순가?’ 하는 세상 흐름입니다.

 새벽부터 바지런히 글 몇 자락 써 놓고 신나게 빨래를 한 다음 밥이나 죽을 끓여 놓습니다. 허둥지둥 길을 나서야 하니, 어제 해 놓은 빨래를 갤 겨를이 없습니다. 도시락을 싸들고 헐레벌떡 길을 나서며 전철역까지 달음박질을 칩니다. 겨우겨우 전철을 잡아 타고 떠나도 늘 서울 일터에 늦습니다. 늘 늦어도 무어라 한소리를 안 하니 고맙습니다. 그러나 저로서는 이 일에서 손을 떼도록 해 주어야 참으로 고맙다고 느낄 텐데, 이런 뜻을 내비치면 손을 떼지 말라고 붙잡습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 일자리 얻기가 얼마나 어려운데, 나 스스로 바라는 일자리가 아니더라도 저쪽에서 바라면서 일을 맡긴다고 한다면 얼씨구나 고맙습니다 하고 받아들여야지, 저처럼 어서 그만둘 수 있으면 하고 바란다는 일은 배부른 소리로 여길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참말 집에서 집식구를 돌보면서 지내고 싶습니다. 이제 열아홉 달에 접어든 아이하고 어울릴 또래 동무를 찾아보고 싶으며, 아이가 또래 동무하고 스스럼없이 어울릴 수 있는 조용하면서 바람과 물이 맑은 동네를 찾아보고 싶습니다. 그래야 아이는 아이대로 씩씩하고 튼튼하게 자랄 테고, 옆지기는 옆지기대로 아픈 몸과 마음을 차근차근 추스를 수 있을 테니까요.


.. 마구잡이 개발 우선주의가 기승을 부리는 게 한국 환경문제의 현주소다. 자칫 그린란드가 한국과 비슷한 노선을 밟게 될까 봐, 그래서 그린란드 환경파괴가 자립이라는 명목 아래에 정당화될까 두렵다 … 그린란드 북동부 도시 우페르나박의 그림같이 아름다운 풍경 한가운데 떠 있던 거대한 쓰레기섬의 충격이 아직도 생생하다. 휴지조각에서부터 폐차까지 한데 얽혀 덩어리진 그 섬을 보는 순간, 그린란드에 머물렀던 50여 일 동안 단 한 번도 분리수거를 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  (29쪽)


 어제에 이어 오늘도 아침 일찍 집을 나서야 합니다. 어제에 이어 오늘 하루도 옆지기는 무겁고 힘든 몸으로 집안에서 아이하고 홀로 놀며 어울리며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면, 집을 나서는 발걸음은 그지없이 무겁습니다. 흔히 일컫는 작은식구(핵가족)일 때에는 아이가 없이 둘만 지낸다면 그럭저럭 지낼 만하다 할는지 모르나, 아이를 키우는 삶일 때에는 큰식구가 아니면 서로서로 버거움을 몸으로 깨닫습니다. 꼭 아이키우기 때문만이 아니라, 어른은 어른대로 아이는 아이대로 살아가며 배우고 받아들이고 헤아리는 눈썰미와 슬기를 주고받을 수 있자면, 작은식구가 아닌 큰식구로 지내야 하지 않겠느냐 싶습니다. 또는 살붙이들이 서로 가까이 담장을 맞대고 지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따지고 보면, 공동체마을이든 공동육아이든 달리 대단한 뜻이나 거룩한 얼이 모인 모둠살이가 아니로구나 싶습니다. 큰식구로 올망졸망 복닥이며 아이나 어른이나 어리든 늙든 숱한 사람들이 서로 바라보고 마주하고 살을 섞으면서 사람살이를 배우는 터전을 스스로 잃은 오늘날 도시에서, 우리 스스로 이러한 사람살이를 되찾으려는 조그마한 몸짓이 아닌가 싶습니다. 살붙이가 아니면 이웃사촌이라는 이름으로 마을이 고루 어우러져 있던 우리 터전을 우리 스스로 버린 다음, 좀더 많은 돈을 나 홀로 벌겠다는 마음이 하루이틀 불거지면서, 이렇게 우리 스스로 어린이집을 찾고 보육원을 찾으며 따로 누리모임(인터넷 동호회)을 뒤적이고 ‘사람을 만나거나 사귈 다른 자리’를 찾아나서지 않느냐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 바라면서 우리 삶을 이렇게 바꾸기만 했다고는 보기 어렵습니다. 우리 스스로 바라기도 했겠지만, 어릴 적부터 받은 제도권 교육이 이러한 길로 이끌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제도권 교육에 길들거나 익숙한 어버이들이 아이들한테 삶굴레를 고스란히 물려주었다고 보아야 합니다.

 세상을 밝고 맑은 쪽으로 나아지도록 하겠다는 진보나 개혁이란, 바로 우리 스스로 놓치거나 잃거나 잊고 있는 ‘아름다움’을 찾으면서 ‘사랑’을 참다이 나누려고 하는 몸부림이 아니겠습니까. 우리가 찾을 아름다움이란, 또 사랑이란, 어느 별나라나 달나라 이야기이겠습니까? 바로 우리 스스로 내 삶을 아름답게 일구고 우리 식구 삶을 사랑스레 보듬으며 이웃하고 동무들과 살가이 어울리는 터전을 갈고닦고 보듬는 일이 바로 진보요 개혁이 되어야겠지요.


.. 일 주일이 넘었다. 그동안 제대로 씻지도 못했다. 식량도 다 떨어져 간다. 일각고래가 나타날 만한 곳을 찾아 이리저리 캠프를 옮겨 봐도 별 소득이 없다. 여정 초반, 사흘 안에 일각고래를 잡겠다며 큰소리 쳤던 닐스와 일랑우악은 미안한 표정으로 그만 철수하잔다 … 한국에서 소가 그러하듯, 그린란드인들에게 일각고래는 어디 한 구석 버릴 부위 없는 동물이었다. 옛 이뉴이트들은 껍질과 고기 내장은 모두 먹고, 뼈는 집을 지을 때 골조로 쓰거나 개썰매의 날을 만드는 데 썼으며, 수염은 엮어서 바구니를, 폐의 세포막으로는 북을 만들고, 기름은 불을 밝힐 때 썼다 ..  (85, 88쪽)


 오늘 하루 집을 나선 다음 해야 할 일과 집으로 돌아와서 붙잡아야 할 일을 곱씹으면서 능금 한 알을 우걱우걱 씹어 먹습니다. 아침 일곱 시 이십 분을 지나는데, 아이는 깨어나지 않습니다. 여느 때라면 새벽 여섯 시가 넘기 무섭게 벌떡 일어납니다. 지난밤, 아이는 젖을 안 주는 엄마한테 젖 달라고 낑낑대면서 몇 시간이고 울고불고 했습니다. 그러다가는 엄마 머리맡에 드러누워 두 손에 인형 하나씩 쥐고 쉴새없이 종알종알 옹알옹알대었습니다. 이른새벽이 될 때까지 그리 낑낑대고 놀았으니 아침에 못 일어나겠지요. 간밤에 그리 치대었기에 아침에 안 일어나는 아이한테 고맙다고 여겨야 할까요? 애 아빠는 이 아침나절을 홀로 바쁘게 보낼 수 있으니까 반갑다고 생각해야 할까요?

 아침에 씹어먹는 능금은 엊저녁 신포시장 분식집 아주머니한테서 얻었습니다. 날이 풀려 모처럼 아이를 안고 시장 나들이를 갔더니, 아이가 귀엽다며 분식집 아주머니가 아이 손에 능금 한 알을 덥석 쥐어 주었습니다. 아이는 집으로 돌아와서 몇 번 물어뜯고는 능금을 던져 버렸고, 엄마하고 아빠가 ‘아이가 물어뜯으며 놀다가 버린’ 능금을 나누어 먹습니다.

 오늘은 능금을 씹어먹으면서 반으로 갈라 먹지 않고 통으로 먹습니다. 저는 반으로 갈라야 씨앗 한 톨까지 씹어서 먹고, 반으로 가르지 못하면 깡지를 못 먹어 버릇했는데, 오늘은 용케 통으로 먹으면서도 씨앗 한 톨 한 톨에다가 깡지까지 모두 우걱우걱 씹어서 먹습니다. 요즈음 아주머니들은 능금을 이렇게 먹지 않겠지만, 옆지기가 가끔 저한테 들려주는 말마따나 ‘아줌마가 된’ 셈인가 싶어, 꼭다리 하나만 남긴 채 다 먹고 나서 가만히 고개를 갸우뚱해 봅니다. 서울 볼일 보러 길 나서는 제 옷차림을 보고 ‘아줌마 같다’고 이야기하기도 합니다. 헌옷 싸게 파는 데에서 1500원 주고 산 청바지 차림새가 아줌마 차림새라고 말하며 웃습니다. “뭐, 애 키우는 아빠는 아줌마하고 똑같지.” 하고 대꾸를 하는데, 그야말로 저는 아줌마 같은 아저씨가 되어 살아가는가 봅니다. 이 집에서는 아빠요 옆지기로서, 제가 걸어온 발자국을 돌아보았을 때에는 제가 갓난아기요 어린이였을 때에 저를 돌보고 키운 어머니로서, 이제 이 같은 길을 걷는구나 싶습니다.

 책으로 익힌 지식이 아니라 몸으로 받아들인 삶입니다. 책에서 배운 이야기가 아니라, 손바닥이 온통 갈라지고 꾸덕살 판이 되면서 느끼는 삶입니다. 뜨거운 밥그릇을 맨손으로 쥐어도 뜨겁다고 안 느끼는데, 어제 낮 서울 일터 사람들하고 낮밥을 함께 먹을 때에 펄펄 끓는 냄비 손잡이를 맨손으로 쥐어 보는데, 참말 뜨거움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그래, 밥그릇으로 먹는 나이가 아닌, 이렇게 온몸이 파김치가 되도록 녹아나는 삶을 어느 결엔가 옴팡 짊어지고 나서부터는 그예 아줌마 삶이구나. 이 나라 아줌마들이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나는 이렇게 나 스스로 아줌마가 되어서 배우며 지내는구나.’ 하고 속으로 되뇝니다.


.. 이뉴이트들의 정신을 은근히 말살하는 것이 기독교의 역할이었다면, 이뉴이트들에게 직접적인 압박을 가하는 것은 ‘신문물’의 몫이었다. 덴마크는 그린란드에 ‘왕립 그린란드 무역청’을 세웠고, 이뉴이트들은 곧 무역청에서 구할 수 있는 술, 커피, 담배, 설탕 등의 사치품에 빠져들었다. 이는 이뉴이트들로 하여금 교역소 근처에서 반영구적으로 정착하여 살게끔 부추겨, 사냥하고 유목하는 그들의 전통적 생활방식의 구심점은 급격히 무너지기 시작했다 … 그린란드 자치정부가 수립되고 독립까지 추진중인 오늘날마저도, 나폴레옹 전쟁 이후 제2의 탐사 광풍의 조짐이 보인다 할 만큼 북유럽을 비롯해 세계 강대국들로부터 과학자, 개발자 군단들이 이 섬에 벌떼처럼 몰려들어 그린란드 지하자원 개발 이권 다툼에 여념이 없다. 직접적으로 수탈하는 수준에서 간신히 벗어났을 뿐 제국주의는 여전히 건재하다 … 유일한 (군사기지요 미군기지인) 툴레 기지의 역할이 강화되면서, 1953년 덴마크는 기지 증설 부지를 확보하기 위해 당시 그 근방에 살던 이뉴이트들을 더 북쪽 지방인 까낙으로 강제 이주시켜 버렸다 … 이 갈등 상황은 1968년 1월 21일, 4개의 원자폭탄과 핵폭발 장치를 실은 미 공군 폭격기 B-52가 툴레 기지 부근에서 추락해 대량의 플루토늄이 주변 얼음 위로 무방비로 방출되는 사건이 터지면서 극에 달한다 ..  (161, 180, 193쪽)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라는 책을 읽었습니다. 이 책을 쓴 노나리 님이 머리말에 적었듯 ‘그린란드 이야기’를 다루는 나라안 책은 거의 없습니다. 노나리 님 머리말마따나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는 ‘그린란드 이야기를 다루는 대한민국 첫 책’으로 손꼽아도 넉넉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린란드라는 땅을 헤아리는 사람이 드물 뿐더러, 텔레비전에서도 거의 마주하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이 대목만 보더라도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는 책시렁 한켠에 다소곳하게 꽂아 놓아도 괜찮은 책이라고 느낍니다.

 그런데, 막상 책을 펼쳐서 한 쪽 두 쪽 읽어 나가는 동안, ‘소재와 주제는 남다르다’ 할 만하지만, ‘책이라 한다면 대학생들이 학점을 받으려고 내는 보고서뭉치가 아닐 텐데?’ 하는 생각이 그치지 않습니다. 글쓴이는 이 자료 저 자료를 바지런히 그러모으고 잘 갈무리해 놓았습니다. 글쓴이 스스로 다큐방송을 찍으면서 몸소 겪은 그린란드 삶자락을 알뜰살뜰 풀어 놓았습니다. 쉽사리 만나기 어려운 사진을 책 사이사이 알맞게 넣었고, 여느 사람들은 알 길이 없을 뿐 아니라 잘못 알고 있기까지 한 ‘서툰 상식’을 뒤집거나 바로잡아 주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한테는 ‘책’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다고 느낍니다. 그저 ‘보고서’에 머뭅니다. ‘누리마실(웹서핑) 자료’를 맵돕니다.

 글쓴이가 그린란드에서 보낸 나날이 짧았기 때문은 아닙니다. 한국땅을 밟아 본 적 없이 오로지 ‘일본에 옮겨진 한국 역사책’만 읽으면서도 남북녘 역사를 알차게 써낸 가지무라 히데키 님이 있듯이(이분은 《朝鮮史》(講談社,1977)라는 책을 내고 한참 뒤에야 비로소 한국땅을 밟았습니다), 노나리 님 또한 그린란드를 밟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알차고 훌륭하게 그린란드 이야기를 펼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노나리 님은 자료 모으기는 알뜰히 해냈을지라도, 이렇게 모은 자료로 무엇을 누구한테 어떻게 이야기하면 좋을까 하는 대목에서 어긋났습니다. 아직 갈피를 잡고 있지 못합니다. 아무래도, 노나리 님 스스로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서 아름답고 사랑스럽게 살아가는 길이란 어떠한 모습이요 흐름인가를 단단하고 씩씩하게 붙잡으며 지내고 있지 못한 탓이 아니랴 싶습니다. 남을 바라보기 앞서 나를 바라볼 일이고, 남을 말하기 앞서 나를 말할 노릇입니다. 나 스스로를 송두리째 내보이면서 차분하게 살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내 이웃과 동무를 곰곰이 들여다보고 바라보면서 치우침없이 말하는 들머리에 설 수 있습니다. 내 삶이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모르면서 다른 사람 삶이 아름답다거나 못났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내 손이 일하는 손인지 아닌지 모르면서 다른 사람 손을 보며 일하는 손이니 아니니를 따질 수 있겠습니까.

 자연과 생태와 환경, 지구온난화와 기후협약과 탄소줄이기, 도시와 문명과 기계설비, 공장과 가공식품과 커다란 할인매장, 두 다리와 자전거와 자동차, 기름과 물과 바람, 꽃과 곡식과 나무, 들짐승과 길고양이와 물고기, 남자와 여자와 사람, 아이와 어른과 하느님, 땅과 하늘과 바다, 흙과 시멘트와 아스팔트, 아파트와 골목집과 지하상가 …… 우리를 둘러싼 이음고리를 먼저 하나하나 들여다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린란드는 한국에도 있고, 한국은 그린란드에도 있습니다. 그린란드에서 한국을 읽을 수 있고, 한국에서 그린란드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내 삶을 돌아보면서 내 삶 어느 한 자락에는 내가 몹시 싫어하면서 나무라고 있는 어떤 정치꾼 모습이 드리워져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내 삶을 비추면서 내 삶 어느 한 구석에는 내가 아주 사랑하면서 우러르는 스승님 자취가 아로새겨져 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 현지인들도 그렇게 먹고산다니 우리도 똑같이 따라 먹는 수밖에. 결국 그린란드 체류 50일 내내, 방부제와 첨가제로 범벅된 데다 눈 돌아가게 비싸기까지 한 이 쓰레기들을 위장 속에 꾹꾹 눌러담으며 한숨만 푹푹 내쉰다 … 쓰레기 식단이 혀를 죽여 버린다. 혀는 늘 접하는 음식에 길들여지기 마련이고, 인스턴트식품과 냉동식품에 익숙해진 혀는 저도 모르는 새 언젠가부터 공장에서 조미한 맛을 정답이라 여기며 ‘공장의 맛’을 추구하게 된다. 인스턴트식품과 냉동식품은 또한 ‘요리’하는 과정을 철저히 생략해 버린다. 좋은 재료를 골라 정성껏 다듬고, 향료와 양념의 조화를 추구하며, 마침내 인간 몸의 균형에까지 영향을 끼치는 예술활동 일체가 단번에 부정된다. 미각의 획일화는 음식의 맛과 멋에 대한 상상력을 고갈시키고, 요리의 부재는 요리하는 과정에서 발휘되는 창의성과 새로운 도전의 여지마저 없애 버린다 ..  (210∼211쪽)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는 그린란드를 말하는 지식모둠인가요? 아니면, 그린란드를 찾아가서 느끼고 배운 ‘내 삶’을 보여주려는 책인가요? 좀더 깊숙하게 그린란드를 파헤쳐서 사람들한테 그린란드 참모습을 알리려 하는가요? 그린란드를 바라보면서 우리 삶터를 찬찬히 되짚으며 올바로 살아가고자 하는 이야기인지요?

 이야깃거리로 삼기 좋은 그린란드 삶자락이라고 해서 다 이야깃거리가 되지는 않습니다. 지구 삶터를 돌아보는 길잡이가 되는 그린란드 터전이라고 해서 다 책으로 여밀 만하지 않습니다. 그린란드는 이 지구에서 중심이면서 변두리입니다. 우리 나라 한국은 이 지구에서 변두리이면서 중심입니다. 글쓴이 노나리 님은 수천만 한국사람 가운데 하나일 수 있으나, 한국사람을 대표하는 하나일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머리를 굴리는 지식이 아닌, 몸으로 삭이는 앎이 되면 좋겠습니다. 손가락을 놀려 짧은 나날에 수없이 많은 지식보따리를 등에 짊어지는 삶이 아닌, 온몸과 온마음을 바쳐서 알맞게 긴 나날에 걸쳐 살갗으로 받아들이며 즐겁게 걸어가는 삶이 되면 좋겠습니다. 삶이 묻어나오지 않을 때에는 한낱 종이뭉치입니다. 삶이 묻어나올 때에는 글솜씨가 좀 어줍잖거나 어설퍼도 싱그럽고 알찬 책이 됩니다. 책은 글재주로 태어나지 않습니다. 책은 시나브로 제 얼굴과 몸매를 갖춥니다. (4343.1.20.물.ㅎㄲㅅㄱ)


 ┌ 《그린란드 지구의 중심을 걷다》(글항아리 펴냄,2009)
 ├ 글ㆍ사진 : 노나리
 └ 책값 : 138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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