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살고 있었네
황석영 지음 / 시와사회 / 1993년 9월
평점 :
절판


사랑하니까 알아야 할 사람과 삶
― 황석영, 《사람이 살고 있었네》



- 책이름 : 황석영 북한 방문기, 사람이 살고 있었네
- 글 : 황석영
- 펴낸곳 : 시와시학사 (1993.9.17.)



 사랑하는 사람이 무엇을 좋아하거나 싫어하는지를 모른다면, 참말 사랑한다 말할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어디가 아프고 어디가 힘든지 헤아리지 못한다면 참으로 사랑한다 얘기할 수 없습니다. 서로서로 즐겁게 어우러져야 하는 한편, 서로서로 조금 더 깊이 살피어 받아들이는 가슴이어야 합니다.

 내가 먹는 밥을 내가 손수 지었는지, 누군가 지은 쌀을 돈으로 사다가 먹는지를 곰곰이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내가 손수 지은 쌀로 한 밥이라면, 내가 쌀 한 줌 얻기까지 흙이랑 햇살이랑 비랑 바람이랑 얼마나 고마운가를 알아야 하고, 돈으로 사먹는 쌀이라면 내 몫을 애써 일구어 준 농사꾼이 어떻게 고마운가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 우리는 말로는 국가보안법을 철폐한다고 하면서도 철저하게 그에 맞추어 우리 생각의 한계까지 그어 놓고 있습니다. 그것은 거의 잠재의식적입니다 … 한참 동구권이 변혁의 소용돌이 속에 있을 때에 신문·잡지마다 사회주의가 망했다느니 안 맹했다느니 하루 걸러서 서로 업어치고 메치고 하는 글들을 읽으면서 많이 배우기도 했지만, 이런 노력의 십분의 일만큼이라도 덜어서 북한을 알려는 노력을 했으면 싶었습니다 ..  (232∼233쪽)


 꽤 여러 해 앞서, 공중전화로 전화를 걸고 나서 책 하나를 그만 전화기에 올려놓고 돌아나온 적 있습니다. 한참 지나서야 책을 놓고 온 줄 깨닫고는 부랴부랴 먼길을 거슬러 찾아갔는데, 한 시간 남짓 지나 공중전화로 돌아와 보니 제 책을 누군가 가져가고 말았습니다. 한 시간 사이에 책을 가져간 이는 공중전화에 얹힌 책임자가 찾으러 돌아올 줄을 몰랐으려나요.

 이때 잃은 책이 《사람이 살고 있었네》입니다. 이 책을 잃고 나서 영 쓸쓸하고 씁쓸해서 좀처럼 되사지 못하며 여러 해를 보냈습니다. 한동안 헌책방 책시렁에서 이 책이 안 보이더니 이제는 곧잘 보입니다. 여러 차례 되살까 말까 망설이면서 되사지 않았습니다. 이동안 황석영 님이 보인 매무새가 몹시 달갑잖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끝내 이 책을 되사서 못 다 읽은 대목을 마저 읽습니다. 퍽 두툼할 뿐 아니라, 남녘과 북녘으로 갈린 두 나라 삶자락이 살가이 만날 수 있기를 바라는 이야기를 읽습니다. 가만히 보면, 황석영 님이 만난 북녘사람은 ‘수많은 북녘사람 모습 가운데 1/1000이나 1/10000’일는지 모릅니다. 어쩌면 1/십만이나 1/백만일는지 몰라요. 그렇지만 황석영 님은 북녘땅을 밟았고 북녘사람을 만났으며 북녘마을을 거닐었습니다. 몸으로 겪는다 해서 더 잘 알지는 않으나, 적어도 몸으로 겪으면서 알아보려고 했습니다. 남녘땅 모든 사람이 황석영 님처럼 할 수 없는 노릇이요, 이렇게 하며 모두들 국가보안법 사슬에 걸려 감옥살이를 할 테니까 선뜻 나서기는 어려울 텐데(어쩌면 이렇게 한다면 문익환 목사님 말마따나 쇠울타리가 싹 걷힐 수 있겠지요. 백만 천만 사람들이 기나긴 줄을 이루어 북녘에서 남녘으로 또 남녘에서 북녘으로 걸어가서 만난다면 쇠울타리를 지키는 군인들도 총을 내려놓겠지요.), 적어도 “남녘사람은 북녘사람을 알려고 애쓰기”라도 해야 합니다. 북녘사람은 남녘사람이 쓴 책이나 글을 거의 못 읽는다지만, 남녘사람은 이래저래 북녘사람 이야기를 책으로나 글로나 드문드문 마주할 수 있습니다. 마르크스도 읽고 헤겔도 읽고 체 게바라도 읽고 지젝도 읽고 홍세화도 읽고 진중권도 읽으면서, 왜 북녘사람 삶자락은 읽을 수 없을까요. 남·북녘이 하나되기를 바라거나 꿈꾼다면, ‘남녘 만세!’나 ‘북녘 만세!’가 아니라 남·북녘 한겨레 눈물과 웃음을 읽어 알며 살아야 합니다. (4343.12.14.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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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
양희은 / 우석출판사 / 1993년 9월
평점 :
절판



 스무 살 색시 양희은과 마흔 살 아줌마 양희은
 [헌책방에서 만난 책 4] 양희은,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



 1952년에 태어난 양희은 님은 곧 예순에 접어듭니다. 지난 1991년은 양희은 님이 노래꾼이 된 지 스무 돌이 되는 해였고, 다가오는 2011년은 당신 노래 삶이 마흔 돌이 되는 해입니다. 양희은 님은 노래꾼으로나 라디오 사회자로나 널리 사랑받습니다. 이렇게 널리 사랑받는 연예인 가운데에는 이름값을 내세우거나 대필을 해서 책팔이를 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지만, 양희은 님한테서는 이런 모습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그나마 1993년에 당신 노래살이 스무 해를 돌아보는 산문책 하나를 내놓았는데, 이 책은 그리 사랑받거나 눈길을 모으지 못했다고 느낍니다.

 생각이란 생각하는 사람 마음이라 했으니, 이 책이 꽤 잘 팔리거나 두루 알려졌다고 생각해 봅니다. 이때에 양희은 님 삶은 어떻게 바뀌었을까요. 콧대를 세우거나 어깨를 우쭐거렸을는지요. 그러거나 말거나 한결같았을는지요. 어쩌면 당신 글쓰기가 퍽 괜찮다고 여기어 다른 산문책을 몇 권 더 써냈을는지 모릅니다. 쉰을 앞두고 책 하나 더 내놓는다든지 예순을 앞둔 이즈음 다시 새로운 책을 하나 더 내놓을는지 몰라요.

 1993년에 나온 뒤 그예 새책방 책꽂이에서 사라진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을 지난 2009년 12월에 서울 홍제동에 있는 헌책방 〈대양서점〉에서 만났습니다. 12월 11일이었다고 떠오르는데, 이날 이 책을 아주 뜻밖에 만나 집어들며 속으로 놀라워 했습니다. ‘양희은 님이 언제 이런 산문책을 다 냈을까? 참 놀랍구나. 난 참 모르는 책이 아주 많구나.’ 이때 옆에서 제 모습을 지켜보던 헌책방 일꾼이 넌지시 말을 건넵니다. “이 책(양희은 님 책) 꽂아 놓으면 금세 나갈 줄 알았는데 아무도 쳐다보지도 않데요. 종규 씨가 처음으로 보는 거예요.” 다시금 놀라며 헌책방 한켠에 서서 책장을 넘깁니다. “이젠 웃을 수 있겠지요? 돈 때문에 그렇게 어두운 얼굴이었다면 돈을 갚은 뒤에는 웃을 수 있는 것 아니에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이다음에 어른이 되어서 지금의 미스 양과 같은 처지의 젊은이를 만나게 되면 스스럼없이 도와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 두 가지가 우리가 받으려는 이자예요(38쪽).”

 두 달쯤 뒤 다른 헌책방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을 한 권 더 만나고, 다시 한 달쯤 뒤 또다른 헌책방에서 이 책을 한 권 더 만납니다. 두 권을 더 장만했습니다. 한 권은 고마운 분한테 선물로 드립니다. 한 권은 인문책을 힘써 펴내는 출판사 편집자한테 2011년을 맞이해 양희은 님 새로운 책 하나 길어올리거나 이 책을 다시 펴내시면 어떻겠느냐는 기나긴 이야기와 보탬말(기획안)을 달아서 건넵니다.

 그 뒤로 일곱 달쯤 지나는데, 다른 헌책방에서는 양희은 님 산문책이 잘 안 보입니다. 어쩌면 서너 달 사이 세 군데 헌책방에서 세 권이나 만난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은 바로 이무렵 저한테 찾아온 고운 무지개였을는지 모릅니다. 말없이 말을 건네는 좋은 말동무였을는지 모릅니다. 양희은 님 노래만 들어서는 도무지 알 길이 없는 속내를 살피면서 내가 걸어가는 내 삶길을 나 스스로 어떻게 추스르며 다스려야 좋을까를 북돋아 주는 밥 한 그릇이었다고 느낍니다.

 한 줄을 읽고 두 줄을 읽으면서 늘 되뇌었습니다. 나와 내 둘레 사람들한테 이 책에 실린 이야기들은 고운 마음밥이 되어 주지 않겠느냐고. 내가 이 책을 읽으며 고운 마음밥을 얻었으면 나는 한결 고운 삶을 일굴 기운을 얻는 셈이요, 나 스스로 한결 기운을 내어 곱게 살아가고자 한다면 내 둘레 사람들은 나한테서 고운 기운을 얻을 텐데, 바로 이러한 기운은 헌책방에서 뜻밖에 만난 책 하나에서 비롯합니다.

 야금야금 읽어 2월 7일에 책을 덮습니다. 이때에도 홀로 생각에 잠깁니다. ‘나는 이 책을 곁에 놓고 읽으며 마음밥을 얻었는데, 다른 사람은 마음밥을 얻기가 어려울까. 출판사로서는 양희은 님 책보다는 노무현 옛 대통령이나 김대중 옛 대통령 책을 내놓아야 돈도 들어오고 이름도 알릴 수 있으려나.’ 그러나 모든 사람이 모든 책을 좋아할 수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은 책 하나를 좋아해 줄 수 없습니다. 한 사람이 좋아하는 책을 모든 사람이 좋아할 수 없고, 모든 사람이 좋아하는 책이랄지라도 한 사람은 안 좋아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는 헌책방이라는 곳을 ‘추억을 사먹는 곳’으로만 여깁니다만, 아무개는 헌책방이라는 곳에서 ‘고운 책 하나 만나 고운 내 삶을 일굴 힘’을 줄곧 얻습니다. “김민기는 작사·작곡·편곡·연주의 모든 일을 아무 계산 없이 식구에게 하듯 내게 베풀어 주기만 했다. 내가 얼마짜리의 일을 너에게 해 주었다는 식의 계산이 그에게는 도무지 없었다(46쪽).”

 지난밤, 아이가 기저귀에 오줌을 누어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데 “엄마, 기저귀.” 하고 잠결에 읊습니다. 엄마보고 기저귀를 갈라는 뜻입니다. 엄마는 힘들어서 몸을 거의 못 움직이는데 엄마한테 해 달라며 칭얼칭얼입니다. 여느 때에 아빠가 제대로 못하는 터라 아빠가 기저귀를 갈면 싫다는 소리일 테지요. 잠들 때에 언제나 엄마한테 안겨서 자고, 엄마 등짝이 한결 따스하다고 느끼니 아주 마땅한 칭얼칭얼이겠지요. ‘그래, 아빠가 잘 못하는구나. 미안하다. 추운데 얼른 아빠가 기저귀 갈아 줄게. 찬찬히 살며시 갈아 줄 테니 얌전히 있어 주렴.’ “동네 이 집 저 집 형편도 빤하고 구경거리도 많던 시절, 비 온 뒤 언덕에 서면 가회동에서 남산 중턱에 걸친 선명한 일곱 빛깔의 무지개를 볼 수 있었고, 운 좋으면 쌍무지개도 볼 수 있었다(99쪽).”

 동이 트고 아침이 밝습니다. 애 아빠 홀로 일어나 조용히 글을 씁니다. 이른아침 아이가 일어날 때까지 애 아빠가 홀가분하게 글을 씁니다. 아이가 아침잠을 삼십 분 더 즐기면 애 아빠로서는 삼십 분 더 글을 쓰고, 아이가 아침잠을 안 즐기고 새벽같이 일어나면 애 아빠로서는 글을 더는 못 씁니다. 애 아빠는 노상 아이가 아침에 조금 더 자 주기를 바랍니다.

 아침에 먹을 밥을 해야 하니 부엌으로 조용히 가서 쌀을 씻습니다. 물 흐르는 소리를 내지 않도록 살살 천천히 움직입니다. 밥을 하거나 빨래를 하거나 이불을 털거나 방을 쓸고닦거나 하다 보면 하루는 참 금세 지나갑니다. 만화책 《꽃과 모모씨》(삼양출판사,2010)를 보면 밥상 하나를 차리느라 하루를 온통 다 쓰는 스물다섯 살 새색시 이야기가 나오는데, 굳이 만화책 이야기를 빌지 않더라도 집살림을 하는 이라면 누구나 밥상 하나 차리느라 온 하루를 다 쏟습니다. 밥하고 반찬만 내놓는다고 밥상 차리기가 끝나지 않을 뿐더러, 날마다 새로 밥을 하고 반찬을 하기까지 품이 퍽 많이 드는 한편, 손수 텃밭을 길러 푸성귀를 얻는다면 그야말로 온 하루를 다 바치고도 일은 끝나지 않습니다.

 집식구하고 얘기하면서 어린 날 어머니 삶을 가만히 곱씹곤 합니다. 홀로 볼일 보러 도시를 오갈 때이든 아이 손을 잡고 읍내로 마실을 다녀올 때이든, 내 어린 날 우리 어머니는 무엇을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어찌 보냈을까 곰삭이곤 합니다. “당시는 미니스커트가 유행이었지만 내 처지에 비싼 스타킹과 하이힐, 그리고 미니스커트가 무슨 해당 사항이었을까? 물론 나 역시 청바지를 무척이나 좋아했지만 무엇보다도 그 옷이 내 분수에 맞았기 때문이다.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우선 옷을 사 입을 형편이 못 되는데다 얻어 입는 옷마다 청바지였기 때문에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149쪽).”

 우리 어머니는 당신 아이한테 어떤 사랑을 나누어 주면서 당신 고운 삶을 보내었을까 생각합니다. 우리 집식구는 어떤 사랑을 둘레에 나누면서 당신 고운 삶을 셋이 함께 보내는가 헤아립니다. 생각만 한다고 알 수 없고, 헤아린다 해서 조금 더 읽을 수 있지 않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이 생각을 않는 사람보다 낫다 여길 수 없습니다. 생각은 있되 몸으로 움직이지 않는다면 한결 덧없으며 슬픈 노릇입니다. “자기 부엌에서 자기 식으로 밥을 해 먹는 일, 제철 야채를 사다가 나물을 무치고, 맑은 국을 끓이고 제철 생선을 두어 마리 굽는 일, 그게 무슨 대수냐고 웃을지는 몰라도 나는 대단히 중요하다는 생각이다(245쪽).”

 스무 살 어머니를 생각하고 마흔 살 어머니를 떠올립니다. 이제 우리 어머니도 예순 살입니다. 어머니가 마흔 살이었을 때에 저는 열여섯이었습니다. 제가 마흔이면 어머니는 일흔에 가까운 나이이고, 우리 딸아이는 일곱 살이 됩니다. 제가 예순이 되면 우리 딸아이는 스물일곱 살이 되겠군요. 이때까지 어머니가 살아 계시면 여든네 살일까요. 어떤 분들은 백 살까지 살면 말벗 할 만한 이웃이 없어 쓸쓸하다 하는데, 백 살까지 살 수 있으면 내 또래는 거의 모두 죽어서 없을 테지만 내 한몸이 씨앗이 되어 힘차게 살아가는 숱한 어리고 젊으며 푸른 넋을 마주할 수 있습니다. 함께 말을 섞지 않고 바라보기만 하여도 흐뭇한 곱고 예쁜 나무들이 곳곳에서 무럭무럭 튼튼하게 살아가니까 참말 기쁘며 사랑스러웁지 않으랴 싶어요. 그저 마주보고 있어도 그예 즐겁습니다. “미국에선 어떤 한 가지 물건이라도 회사마다 줄줄이 다른 상표로 만들어 내니, 어느 걸로 고르지? 고민하다가 날이 새는 것 같다(247쪽).”

 양희은 님은 당신 노래 삶자락 마흔 돌이 되는 2011년에 무언가 새로우며 남다른 잔치를 벌일까 궁금합니다. 앞으로 스무 살을 더 살아내어 여든 살이 될 무렵 당신 노래 발자취 예순 해를 곱씹으며 고운 노래잔치나 책잔치 하나 베풀어 줄는지 궁금합니다. 예순잔치까지는 힘들다면 쉰잔치여도 좋습니다. 잔치는 누가 차려 주지 않으며, 남이 차려 주는 잔치가 늘 기쁘지만은 않아요. 반드시 많은 사람을 불러모아야 하거나, 꼭 많은 사람한테 사랑받아야 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살림살이라서 떡국 하나 올려놓고 설날 차례상 차릴 수 있습니다. 버거운 살림이기에 밥 한 그릇과 미역국 하나로 생일잔치상을 수수하게 마련할 수 있습니다. 어찌 되든 잔치는 잔치요 명절은 명절이며 삶은 삶입니다. 고운 넋에서 고운 말이 샘솟고, 고운 말이 샘솟는 넋으로 고운 삶을 일구며, 고운 삶을 일구는 가운데 고운 노래를 줄기차게 부릅니다. 양희은 님 마흔 돌 노래잔치를 만나고 싶습니다. (4343.10.17.해.ㅎㄲㅅㄱ)


― 이루어질 수 있는 사랑 (양희은 글/우석,1993.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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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
김수미 지음 / 샘터사 / 199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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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픈 넋, 슬픈 사람, 슬픈 꿈
 : 김수미,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



- 책이름 :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
- 글 : 김수미
- 펴낸곳 : 샘터 (1987.10.10.)
- 판 끊어짐


 (1) 꿈꾸지 못하는 슬픈 넋


 충청북도 충주시 신니면 광월리 부용산 중턱에 이오덕자유학교 하나 서 있습니다. 이곳은 이름 그대로 아이들이 자유롭게 우리 누리를 맞아들일 수 있도록 마음을 기울이는 배움터입니다. 아이들은 이 배움터에서 배우고 어우러지며 뛰놀고자 저희들 집에서 대중교통으로 음성 읍내나 면내로 와서는 시골버스로 갈아타고 마을 어귀에서 내린 다음 이삼십 분을 씩씩하게 걸어서 찾아옵니다. 한창 배우는 철에는 아이들 스스로 주마다 이와 같이 오갑니다.

 여름과 겨울에는 방학이 있으나 방학에는 계절학교를 열어 학교 아이 아닌 여느 아이를 한 주씩 맞아들이곤 합니다. 엊그제까지 여름철 두 번째 계절학교가 있었습니다. 첫 번째와 두 번째 계절학교를 마칠 무렵 아침에 한 시간씩 ‘말을 살리는 글쓰기’를 이야기감으로 삼아 아이들하고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말을 살리는 글쓰기’라는 이야기감은 이오덕 선생님이 살아 있을 적에 글쓰기교육연구회 선생님들한테 글쓰기 이야기를 나누고자 마련해 두었으며, 이오덕 선생님이 손글씨로 배움판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저는 이 배움판으로 예닐곱 살 어린이부터 열서너 살 어린이한테까지 글쓰기 이야기를 나눕니다.

 엊그제 이야기자리에서는 아이들한테 손바닥만 한 쪽지를 하나씩 나누어 준 다음 ‘우리 어린 동무들이 이루고픈 꿈이나 앞으로 하고 싶은 꿈을 적어 보셔요.’ 하고 말합니다. 그러고는 저도 제가 이루고픈 꿈이 무엇인가를 조그마한 쪽지에 찬찬히 적바림합니다. 난데없이 꿈 이야기를 적으라 했다고 할 수 있는데, 꿈이란 늘 생각하는 내 빛줄기요 언제나 떠올릴 수 있는 내 길잡이입니다. 그래서 난데없다 할 만하더라도 아이들이 예닐곱 살 나이부터 열서너 살 나이에 무엇을 헤아리거나 살피는가를 곰곰이 곱씹으며 돌아보고 싶었습니다.


.. 그때 기도하는 동안 나는 너무나 또렷한 아버지의 목소리를 환청으로 들었던 것이다. 아버지가 평소 목소리 그대로 대답하시는 것이다. ‘영옥아, 너 한 사람의 죽음이 너 한 사람의 죽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네가 그렇게 죽어 버리면 네가 사랑했던 그 남자 가슴에 대못을 박는 일 외에 아무것도 아니다. 네가 그토록 사랑한 사람의 등에 비수를 꽂아서야 진정 네가 사랑했달 수가 있느냐.’ … 부모님이 안 계신 것도 슬픈데, 부모님 없다고 싫다는 것에 너무나 화가 났다. 그리고 남처럼 많이 배우지 못해서 늘상 걸리는데 학벌 없어 싫다는 것도 화딱지 나는 거였다. 그러나 너무 말라서 애 낳기도 어렵겠다는 얘기엔 차라리 웃음이 나왔다 … 나훈아 씨가 불렀던가. 〈울긴 왜 울어〉 노래 제목을 읊조리며 나는 실연의 상처를 쓰다듬었다. “내 젊음을 그냥 싸구려로 보낼 순 없지. 늙어가도록 그저 눈물 한숨으로 펌프질이나 할 순 없어!” 나는 그야말로 발바닥에 힘을 주고 일어났다. 더운 밥을 짓고, 김치 넣어 찌개 끓여 한 남비 밥을 다 먹었다. 실로 오랜만에 지어 먹은 밥이요, 찌개였다 ..  (33, 37, 38쪽)


 아이들이 적은 쪽지를 하나하나 돌려받으며 읽습니다. 마흔 남짓 되는 아이들은 ‘꿈’을 적으라 했으나 꿈을 적지 않고 ‘직업’을 적습니다. 더욱이 여느 직업조차 아닌 ‘돈 버는 직업’을 적습니다. 나아가 그냥저냥 돈 버는 직업마저 아닌 ‘돈 많이 벌고 이름 높이 얻는 직업’을 적습니다.

 아이들이 적은 꿈 아닌 직업으로는 운동선수가 가장 많습니다. 다음이 과학자나 발명가이고, 다음으로 의사나 선생님이 있으며, 다음으로 대통령이 있습니다. 아무 꿈이 없다고 적은 아이도 제법 있습니다. 아예 ‘평범한 직장인’이라 적은 아이까지 보입니다.

 서울에 볼일이 있어 낮에 부랴부랴 시골버스와 시외버스를 갈아타며 서울에 닿았습니다. 볼일을 마치고 인천으로 전철을 갈아타며 들어옵니다. 이렇게 인천으로 오는 길에 나이 일흔이라는 할배 한 분을 만납니다. 할배는 우리 딸아이를 바라보며 ‘아이들은 어른이 하는 모습을 보고 배운다’고 이야기합니다. 이 할배 말씀이 아니더라도 우리 식구는 노상 느낍니다.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이 앞에서 무엇을 어떻게 하는가를 가만히 들여다보는 아이는 아이 아버지와 어머니가 하는 몸짓을 고스란히 따릅니다. 살가운 몸짓이든 짓궂은 몸짓이든 스스럼없이 따릅니다.

 곰곰이 곱씹자면, ‘꿈을 적으라’ 했으나 꿈이 아닌 ‘돈 많이 버는 직업’을 생각하며 적은 아이들은 바로 아이들 어버이가 바라보는 삶을 고스란히 적은 셈이 아닐까 싶습니다. 아이들은 스스로 꿈을 꿀 줄 모를 뿐 아니라 스스로 꿈을 꾸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결마저 가로막혀 있지 않느냐 싶습니다. 아이들을 낳아 가르치고 돌보며 어루만지는 어버이부터 스스로 사랑스러우며 믿음직스레 꿈을 꾸지 않는 나날을 이어오고 있지 않느냐 걱정스럽습니다. 아이들 어버이부터 착하고 참되며 고운 길로 돌아서지 않고서야 아이들은 꿈을 꿀 수 없는데다가 꿈을 키울 수 없는 노릇이 아닌가 근심스럽습니다.


..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대학의 꿈은 멀어져도 내 생각은 써서 남겨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내 일기를 쓰고 단상이 떠오르면 잊지 않으려고 기록했다. 만일 내가 행복하기만 한 삶을 살았다면 글을 쓰겠다는 동기도 결심도 없었을 것이다 … 공부를 많이 못해서 늘 찜찜한 나는 대신에 독서를 통해 못 배운 것을 보충하곤 한다. 독서만큼 사람을 풍부하게 해 주는 것이 이 세상에 없다고 생각한다 ..  (66, 69쪽)


 꿈이란 “가수가 되고 싶어요.”가 아닙니다. 꿈이란 “노래를 잘하고 싶어요.”입니다. 꿈이란 “의사가 되고 싶어요.”가 아닙니다. 꿈이란 “내 동무를 사랑하고 싶어요.”입니다. 꿈이란 “대통령이 되고 싶어요.”가 아닙니다. 꿈이란 “착한 사람으로 지내고 싶어요.”입니다.

 우리는 우리 꿈을 이루어 가는 길에 내 밥벌이를 하거나 내 살붙이 밥벌이를 하고자 ‘돈 버는 일’을 할 뿐입니다. 어떤 일자리를 찾을 때에는 내 꿈을 이루고자 하는 뜻이 아니라, 내 꿈을 곱다시 붙잡으며 키우는 가운데 내가 디디고 선 이 터전을 좀더 깊이 들여다보려는 뜻입니다.

 그러나 아이들하고 꿈 이야기를 좀더 제대로 나누지 못하고 맙니다. 저한테 주어진 말미가 퍽 짧았고, 내 꿈이 어떻게 내 글 하나로 스며드는가 하는 글쓰기 이야기를 더 풀어놓아야 했기 때문에 그만 꿈 이야기는 이쯤에서 마무리를 짓고 맙니다. 아이들한테 “꿈이란 내 마음이 좀더 따스하거나 넉넉해지면 좋겠어요.” 하고 바라거나 “꿈이라 할 때에는 나처럼 아프거나 나보다 훨씬 아플 많은 동생이나 언니 오빠 누나 형들이 맑고 밝은 마음을 잘 건사하면 좋겠어요.” 하고 바라야 하는 마음가짐이라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합니다.


.. 몽마르트에서 그림 두 점을 산다. 나는 내 마음에 드는 그림은 무조건 좋은 그림이고, 내 맘에 별로인 그림은 그냥 그런 그림이다. 그림에 대해서는 내 감정에 전적으로 의지할 뿐, 남의 의견에 따라가지 않는다 ..  (158쪽)


 돌이켜보면 제 어린 나날부터 제대로 꿈꿀 수 없던 하루하루가 아니랴 싶습니다. 깊이 생각하지 않으며 신나게 뛰어놀 꼼수만 찾던 국민학교 무렵에는 노느라 바빠 꿈을 살피지 않았습니다. 일찍 철이 든 동무들이 “넌 어쩜 그렇게 생각이 짧니? 실망했어.” 하고 핀잔할 때에야 겨우 ‘어, 내가 왜 그랬지?’ 하고 부끄러워 했습니다. ‘내가 이렇게 살아도 되나. 아직 어린 내가 이렇게 해도 되나.’ 하며 ‘난 어떻게 살아야 하나.’ 하는 생각줄기를 가까스로 붙잡았습니다. 동무들한테서 핀잔을 받고 또 받으며 비로소 “나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와 같은 꿈을 꾸었습니다.

 그러나 집이나 동네나 학교 어디에서고 저한테 꿈을 꾸라고 일러 준 어른은 만나지 못했습니다. 저뿐 아니라 제 동무들 또한 꿈을 꾸라는 이야기를 좀처럼 듣지 못하면서 한 살 두 살 나이를 먹었습니다. 어느덧 서른여섯이라는 나이를 맞이하고 있는 저와 동무들이지만, 서른여섯이라는 나이를 즐거이 맞아들이면서 기쁘게 얼싸안는다고는 느끼기 어렵습니다. 두 번 다시 찾아올 수 없는 서른여섯 나이임을 똑똑히 바라보지 못한다고 느끼는 내 둘레 사람이요 동무입니다. 서른다섯 나이에도 매한가지였고 서른일곱 나이에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싶은 내 둘레 사람이요 동무입니다.

 마흔여섯인 사람들은, 쉰여섯인 사람들은, 예순여섯인 사람들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가요. 모두들 저마다 당신 나이를 고맙게 맞아들이며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나요. 마흔여섯에 스물여섯을 꿈꾼다든지 쉰여섯에 서른여섯을 꿈꾸는 부질없는 나날을 보내고 있지는 않는지요. 일곱 살에는 일곱 살에 할 수 있는 일놀이를 즐기고, 열일곱 살에는 열일곱 살에 할 수 있는 일놀이를 즐길 노릇입니다. 열일곱에 열일곱 나이를 안 즐기면 스물일곱에 열일곱 나이를 즐길 수 있겠습니까. 스물일곱에 스물일곱답게 살아가지 않고서야 서른일곱에 서른일곱다운 삶을 즐길 수 없습니다.


.. 사람이란 어느 정도 나이 먹어 가면 지식이니 기술이니 직업이니 하는 게 몽창 별거 아닌 게 되는 걸까 ..  (244쪽)


 돈 많은 사람들이 불쌍합니다. 그 많은 돈을 붙잡느라 당신 삶을 사랑하지 못하는 돈 많은 사람들이 불쌍합니다. 이름 높은 사람들이 안쓰럽습니다. 그 높은 이름을 건사하느라 당신 삶을 따사롭게 돌보지 못하는 이름 높은 사람들이 안쓰럽습니다. 힘이 센 사람들이 딱합니다. 그 센 힘을 지키느라 당신 삶을 넉넉하게 보듬지 못하는 힘이 센 사람들이 딱합니다.

 우리가 이룰 삶은 진보나 보수가 아닙니다. 우리가 이룰 삶터는 자유나 민주나 평화나 통일이 아닙니다. 우리가 이룰 삶꿈은 개혁도 혁신도 변혁도 발전도 개발도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삶을 이루고 믿음직한 삶터를 일구며 따사롭고 넉넉한 삶꿈을 가꿀 노릇입니다.


 (2) 땀흘리지 못하는 슬픈 사람


 저는 ‘추천도서 목록’이나 ‘권장도서 목록’을 만들지 못합니다. 아직 철없던 예전에는 용을 쓰며 무슨무슨 목록을 만든답시고 깝죽을 떨곤 했습니다. 참말 철없는 바보스런 책벌레들이나 추천도서 목록 따위를 만듭니다. 참으로 책을 아끼거나 사랑하는 책쟁이들은 권장도서 목록뿐 아니라 ‘읽을 만한 책 소개’조차 하지 않습니다. 아니, 읽을 만한 책으로 무엇이 있다고 들 수 없습니다. 모든 책은 읽기 나름인데 무슨 책을 읽으라고 어떻게 선뜻 말하겠습니까.

 책 좀 읽은 사람이든 책 좀 안 읽은 사람이든 ‘무슨 책을 읽어야 좋다’라는 말이나 ‘좋은 책으로 무엇이 있다’는 말은 도무지 할 수 없습니다. 어떤 사람을 만나야 좋다라든가 좋은 사람으로 누구를 사귀어야 한다는 말 또한 함부로 할 수 없습니다. 어느 대학교에 가야 한다 같은 말이나 무슨 사진기를 써야 한다 같은 이야기나 어느 나라나 도시나 시골에 보금자리를 틀어야 한다 같은 소리 또한 섣불리 꺼낼 수 없습니다.


.. “모다 안녕하신가유? 일용 엄니 여기 왔슈우우!” 그러니까 가득하게 모여 있던 거제도 분들이 환성을 지르고 손뼉을 치고 좋아라 웃어댄다. 꼭 선거 유세장 같기도 하고, 텔레비전에서 본 티나 터너 공연장 같기도 하다. 너무나 고맙고 감사하고 황송하고 즐거워서 나는 있는 힘껏 내 능력을 다해 그들과 얘기하고자 한다. 김수미가 대관절 뭐길래 밭농사 짓던 손 털고, 그물 손질하던 손 털고 나와 구경한단 말인가. 김수미가 뭐길래. 그냥 탤런트일 뿐이지 않은가 … 나를 보려고 온 분들과 일일이 악수를 한다. 그분들의 손은 한결같이 거칠고 마디지고, 때때로 손톱 끝에 새까맣게 때가 끼고, 손가락 한두 개가 없기도 했다. 모두들 열심히 일하는 사람들이다 … 내 고향 전라도 지방을 가면 나는 고향에 내려온 시집간 딸 취급을 받는다. 우리 아버지 같은 할아버지가 더덕을 꾸려 놓았다가 가지고 올라가 상에 올리라며 내어준다. 나는 그 값진 더덕을 그냥 받을 수가 없어서 만 원짜리 지폐를 두 장 꺼내 드린다. “워매, 와 이런당가. 파는 게 아녀. 내 딸 같아 그냥 주는 거란 말여.” ..  (45, 46쪽)


 땀흘려 일하는 사람한테는 실컷 흘리는 땀방울이 곧바로 책입니다.

 땀흘려 노는 사람한테는 신나게 흘리는 땀방울이 곧 책입니다.

 땀흘려 어깨동무하는 사람한테는 기꺼이 흘리는 땀방울이 바로 책입니다.

 땀흘려 일하지 않으니 스스로 읽을 만한 책을 찾아내지 못합니다. 땀흘려 일하지 않으니 애써 좋다는 책을 장만했어도 새겨읽지 못합니다. 땀흘려 일하지 않고 있으니 어떤 책을 제아무리 많이 갖추어 놓고 있다 할지라도 멍텅구리 밥통 짓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땀흘려 놀지 않으니 스스로 삶을 가꾸는 책 하나 깨닫지 못합니다. 땀흘려 놀지 않으니 몹시 재미난 만화책을 보고 나서도 뭐가 재미난 줄거리인지 알아채지 못합니다. 땀흘려 놀지 않고 있으니 책 하나로 아름다울 수 있는 길을 들여다보지 못합니다.

 땀흘려 어깨동무하지 않으니 스스로 사랑스러운 사람이 되도록 돕는 책을 바라보지 못합니다. 땀흘려 어깨동무하지 않으니 도서관과 새책방과 헌책방을 알뜰살뜰 즐기는 책길을 걷지 못합니다. 땀흘려 어깨동무하지 않고 있으니 남이 쓴 거룩하고 훌륭한 글을 받아들이지 못할 뿐 아니라, 누구나 스스로 얼마든지 거룩하고 훌륭한 글을 쓸 수 있음을 알지 못합니다.


.. 나는 박은수 씨와 한 가족이라기에 부부 배역인 줄 알았다. 그랬더니 박은수 씨가 씨익 웃으며 말한다. “김수미는 내 엄마 역할야.” “뭐, 뭐라구? 박은수 씨 엄마라구?” … 이제 겨우 삼십이 될락말락 하는데 할머니라니. 빌어먹을! 배역도 배역이지만 가만 보니 나는 고정 멤버도 아니었다. 고정 멤버인 김 회장댁 이웃집에 사는 이웃 할머니였다 … 제기랄! 오랜만에 주는 배역이 깍두기라니 … 나보다 한 해 선배인 김자옥 씨, 박원숙 씨도 안방극장의 사랑받는 여자 탤런트들인데. 겨우 서른 살인 내게 시골 무지렁이 육순 노파역이라니 … 연출가 이연헌 선생님이 배역 성격을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 중에도 나는 혼자 씩씩대며 분을 삭이느라 바빴다 … (집으로 돌아와 늦은 밤에) 한참 울근불근 성질을 내다가 다시 한 번 대본을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까지 방구석에 누워 있는 대본을 집어들고 커피 한 잔을 더 마시며 읽어 보았다. 처음부터 찬찬히, 냉정한 마음으로. 대본을 읽어 가면서 차츰차츰 성질이 풀렸다. 나는 어디 가도 ‘촌년’이라 대본 전편에 깔려 있는 농촌 분위기가 우선 가슴에 와닿았다. (김 회장, 밭두렁에 앉아 풀을 뽑고 있다) 그 대목에선 우리 아버지 생각이 났다. 아버지는 흙을 떠나 살면 안 되는 줄만 아시고 흙고랑을 내 집처럼 여기고 사시지 않았던가. (일용이네 할머니, 아들의 머리를 쥐어박으며 우스갯소리를 퍼담는다) 이 대목에서 나는 “아! 그래~ 바로 이거야!” 하며 속으로 무릎을 탁 쳤다 … 내가 어렸을 때 우리 동네엔 ‘딸 그만’이란 별명의 할머니가 있었다 … 우리 동네에서 딸 그만 할머니는 최고 가는 인기스타였다. 겉으로는 주책없어 보이지만, 속으로는 감성과 감정이 풍부한 딸 그만 할머니 … 미국 할머니가 된 나는 드라마 중간쯤 내 신이 오기를 기다렸다. 그때까지 어느 누구도 내가 맡은 일용이 할머니 배역에는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저 깍두기 배역일 뿐이니 잘해도 그만 못해도 할 수 없는 정도였다. 내 신이 오자 나는 연습에선 전혀 보여주지 않았던 비장의 연기를 쏟아냈다. “야아아! 일용아아아! 해가 중천에 떴다아아! 오살할 노옴! 또 집 나갈 궁리냐아아?” 연습에선 보여주지 않았던 노인네 소프라노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  (177∼180쪽)


 땀방울만큼 좋은 열매가 없습니다. 땀방울만큼 좋은 책이 없습니다. 땀방울만큼 좋은 영화나 연극이나 연속극이 없습니다.

 거침없이 뛰어노느라 바쁜 두 돌 지난 우리 딸아이는 언제나 온몸이 땀범벅입니다. 그러나 땀범벅이든 뭔 범벅이든 달리기를 멈추지 않습니다. 춤추기와 노래부르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제풀에 겨워 곯아떨어질 때까지 아낌없이 노는 우리 어린 딸아이입니다.

 그러고 보면 요즈음 어버이들은 아이하고 함께 놀아 주지 않습니다. 아이가 놀지 못해 갑갑해 하거나 셈틀놀이에만 푹 빠져 있다면서 ‘따로 놀아 주는 어른이 마련한 놀이터(캠프라든지 수련회라든지 뭐라뭐라 하는 곳)’에 목돈을 들여 보냅니다. 때로는 더 큰 목돈을 들여 나라밖으로 나들이를 가거나 아예 나라밖에 배움터를 마련해 놓습니다. 어떤 아이이든 제 아버지와 어머니 삶을 보고 배우는데, 오늘날 어떤 어른이든 아이 앞에서 아버지다움이나 어머니다움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오늘날 어떤 어른이든 아이 앞에서 ‘돈을 더 많이 버느라 용쓰고 애쓰고 떼쓰는 모습’만 죽어라 보여줍니다. 우리 어른 스스로 ‘아이야, 네 엄마가(아빠가) 얼마나 땀흘리며 이렇게 아름답고자 하는지 알겠니?’ 하며 살아가지 않습니다.

 옳고 바르며 아름다운 길을 걷지 않는 우리 어른들입니다. 착하고 참되며 고운 길을 찾지 않는 우리 어른들입니다. 맑고 밝으며 싱그러운 길하고는 등돌리는 우리 어른들입니다.

 이리하여 슬픈 어른들입니다. 삶을 모를 뿐더러 삶을 잊는데다가 삶을 내동댕이치고 있으니 이 얼마나 슬픈 어른인가요. 게다가, 어른만 슬픈 삶이 아니라 이 어른이란 이들이 낳아 키운다는 아이는 얼마나 더 크게 슬픈가요. 우리는 우리 아이들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습니까. 우리는 우리 어른 삶뿐 아니라 우리 아이들 삶까지 송두리째 망가뜨리고 있지 않나요.


.. 둘째 딸아이가 태어났을 때는 나도 잠깐 방송일을 잊고 살 수 있었다. 두 돌이 지날 때까지 나는 우리 딸애에게 빠져 방송이고 뭐고 생각나지 않았다 … 딸애가 쌕쌕 잠이 들면 그 옆에 앉아서 아이 얼굴을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너무 뛰어놀아 다리가 아픈지 꽁꽁 아픈 소리를 내기도 한다. 꿈에 우스운 일이 있는지 쌔액 웃기도 한다 … 우리 나라는 아직 여자가 많이 밑지는 나라라, 딸애 세상 살 일도 걱정이 됐다. 잘 먹이고 잘 가르치고 잘 키워도 아이가 세상 나가 살 일까지 죄다 잘해 줄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엄마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가정 안에서 울타리를 둘러쳐 줄 뿐, 세상 바깥 찬바람을 막아 줄 울타리까지는 치지 못한다는 것을 생각했다. 세상의 찬 비바람을 견딜 울타리는 아이 스스로 겪어 가며 쳐야 하는 것이다 … 딸아. 나의 딸아. 착하고 이쁘고 아름답고 씩씩하고 강인한 여자가 되어라. 딸아. 나의 딸아. 세상 사람들이 네 길과 다른 길을 가더라도 너는 네 길을 가면서 낙담하지 말아라. 네가 가고 싶은 길, 네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을 씩씩하게 선택해라. 그리고 네 길과 다른 길을 가는 사람들을 사랑하고 받아들여라. 무엇보다도 사랑하는 법을 배워라 … 가다가다 너의 넓은 마음을 이용하려는 사람도 만날 것이다. 그러면 좀 이용당해 주어라. 네가 네 자신을 잃지 않는, 네 자신을 상실하지 않는 정도에서 이용당해 주어라 ..  (97∼98, 100∼101, 103쪽)


 저는 대학교를 집어치웠습니다. 그렇지만 중·고등학교 아이들이나 대학교 아이들을 바라보며 ‘너희도 얼른 대학교 집어치워.’ 하고 말하지 않습니다. 이런 말은 할 수 없기도 합니다. 제가 아이들 앞에서 할 수 있는 말은 ‘너희는 너희 삶과 하루를 사랑하면서 너희 꿈을 곱게 키우면 좋겠어.’ 한 마디입니다. ‘너희 스스로 믿음직한 사람이 되고, 너희 스스로 따스한 사람으로 거듭나며, 너희 스스로 너그러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는 꿈을 꾸면 기쁘겠어.’ 한 마디를 덧보탤 수 있습니다.


 (3) 한국땅에서 살아가는 슬픈 꿈


 1951년에 태어난 김수미 님이 1987년에 세상에 내놓은 책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는 당신이 서른여섯 즈음에 쓴 글을 담고 있습니다. 이 수필책 하나를 내놓은 다음 《너를 보면 살고 싶다》는 소설책을 하나 냈고, 1993년에 《나는 가끔 도망가 버리고 싶다》는 수필책을 잇달아 내놓습니다.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가 서른을 지나 마흔으로 달리는 김수미 님 삶을 담은 책이라면, 《나는 가끔 도망가 버리고 싶다》는 마흔을 지나 쉰을 바라보는 삶을 묻은 책입니다. 2003년에 나온 《그해 봄, 나는 중이 되고 싶었다》는 쉰 살 고개를 넘긴 삶이 새록새록 깃든 책이고, 지난해에 나온 《얘들아 힘들면 연락해》는 예순을 코앞에 둔 자리에서 당신 삶을 되짚은 책입니다.

 이제는 어엿하게 할머니 소리를 듣는 김수미 님인데, ‘할머니 김수미’가 아닌 ‘서른여섯 젊은 김수미’가 쓴 수필책 하나라니, 당신 나이와 삶과 길을 하나둘 되뇌노라면 참으로 새삼스럽고 남다른 책 하나입니다. 한국땅 도서관에서 김수미 님 수필책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를 갖추고 있을는지 없을는지 궁금한데, 이 소담스러운 글모음 하나를 헌책방에서 만날 수 있고 읽을 수 있으며 새길 수 있으니 더없이 반가우며 고맙습니다.


.. 어머니의 꾸중이 지나가자, 이번에는 시누이와 시누이 남편이 그를 병원 복도로 끌고 나가 한 시간도 넘게 나무랐다. 그날 집에 돌아온 남편은 여전히 남의 집에 온 손님처럼 굴었다. 나는 9일 간 못 자고 못 먹어서 기운이 빠져나간 목소리로 말했다. “위스키 한잔 안 할래요?” 위스키 잔을 내밀고 잔소리를 시작했다. “해도 해도 너무했어요. 자기 어머니 혈압 높은 거 잘 알죠. 나 며칠 안 남았어요. 해산할 날. 어쩜 그렇게 무책임할 수가 있어요.” 한참 잔소리하는데, 갑자기 미끈미끈한 물이 밑으로 주르르 흐른다. 양수가 터진 것이다. 그길로 잔소리고 뭐고 집어치우고 병원으로 갔다. 그날 입원해서 일곱 시간을 진통한 끝에 다음날 새벽 나는 아이를 낳았다. 딸이었다. 남편이 바라고 바라던 딸이었다. 그러나 남편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삼일째 되어 퇴원하는 전날까지 얼씬 그림자도 비치지 않았다. 생각하면 정말 나쁜 사람, 형편없는 남자였다 … 아이 백일이 닥쳐 왔다. “백일잔치 해야죠. 돈 좀 주어요.” “나 요즘 돈 없는데. 어머니에게 달래서 잔치하지.” 그리고 덧붙여 “조용히 간소하게 차려.” 한다. 나는 조용히 간소하게 차리란 말에 화딱지가 났다 … 백일잔치에 필요한 음식들도 메모했다. 그러는데 친구 한 사람에게서 전화가 왔다. “수미니? 나야, 나.” “어머, 오랜만야. 왠일이니?” “너 놀래지 마. 좀 전에 한강맨션 부근에 외제옷 파는 집에 갔었거든. 거기 명호 아빠가 와 있더라. 키는 작은데 눈이 크고 이쁜 여자를 데리고 말야.” … 나는 다리힘이 빠져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런 나쁜 놈. 지 딸애 백일이 내일 모레인데, 떡 한 말 값 안 주고 나가더니. 그러더니 여자한테 이탤리제 부츠를 사 줘? 뭐 코트도 사 주고 잠옷까지 사 줘? 외제옷이 얼마나 비싼데 … 살아 보려고 악착같이 군 내 꼴이 우스워 보인다 ..  (217∼222쪽)


 김수미 님 수필책에는 김수미 님 삶이 고스란히 묻어 있습니다. 김수미 님 수필책에는 김수미 님 눈물와 웃음이 남김없이 담겨 있습니다. 김수미 님 수필책에는 김수미 님 땀내가 짙게 배어 있습니다.

 그지없이 마땅한 이야기인데, 김수미 님이 쓴 책이니 김수미 님 냄새가 납니다. 김수미 님 스스로 당신 삶을 들려주고 있으니 김수미 님 빛깔이 납니다. 김수미 님 스스로 걸어왔고 앞으로도 굳세게 걸어갈 길을 보여주고 있으니 김수미 님 맛과 멋이 납니다.


.. 이 복잡미묘한 세상을 살아가면서 매양 좋아하는 사람만 있기를 바라는 것은 바보스런 짓이라고 생각한다 ..  (62쪽)


 열 해 만에 노래판 하나 새로 내놓은 디제이 디오씨 님 노래를 들으며 생각했습니다. 김창렬 이하늘 정재용 이 세 사람은 참 재미나게 살아가는구나 하고. 이 땅에서 거리낌이나 아쉬움 하나 남길 까닭이 없음을 스스로 잘 보여주며 살아가는구나 하고.

 김수미 님 수필책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를 읽으면서도 생각합니다. 김수미 님은 참 맛깔나게 살아가는구나 하고. 이 땅에서 슬픔이나 기쁨을 따로 살피기보다 당신 스스로 꾸밈없이 온몸을 부딪히며 살아가는구나 하고.


.. 딸애는 새 필통을 사내라고 생어거지다. 이미 멀쩡한 필통이 서너 개가 넘는데도 말이다 … 아이는 또 쥐어짤 태세다. 할 수 없이 나는 또 필통을 사 주고 말았다. 작은 눈을 이쁘고 쬐꼬마하게 찡그리는 모양이 이 엄마의 결심을 다시 허물어뜨린 것이다 … 나는 우리 딸아이가 (집에 또) 있는 물건을 사 달라고 할 때는 내가 자랄 무렵의 얘기를 하곤 한다. 한데 아이는 말끝마다 따지고 들며 계속 반문이다. “왜 이런 것두 못 샀어?” “늬 할아버지가 안 사 주셨어.” “왜?” “음, 그땐 이런 것이 귀했어. 그리구 돈두 많지 않았구.” “왜 돈이 없었어? 왜 귀했어?” “흉년이 심했거든.” “왜 흉년야?” “하느님이 비를 안 주셔서.” “왜 비를 안 주신 거야?” “…….” … (어릴 적 도시에서 전학 온 동무) 유란이가 가지고 있는 것 가운데 내가 꼭 갖고 싶은 게 딱 하나 있었다. 분홍 빛깔의 장미 꽃송이가 약간 도드라지게 무늬 놓인 플라스틱 필통이었다. 내가 가진 것은 아버지가 대패로 나무토막을 밀어서 깎아 준 것이었다. 윗뚜껑은 미닫이 문처럼 밀고 닫고 하는, 작은 목침만 한 필통이었다 … “엄니, 나 필통 사 줘 잉!” 그래도 대꾸가 없으면 칙간 앞에서 마구 뒹굴었다. 엄니는 칙간 문틈으로 뒹굴고 있는 내 꼬라지를 내다보곤 한심스럽다는 듯 빽 소리치셨다. “보릿고개에 먹네 굶네 하는 통에 필통은 뭔 필통! 후딱 저리 가지 못해?” ..  (21∼22, 25, 26쪽)


 어떤 못난 글쟁이들은 어린이문학을 우습게 압니다만, 바로 이렇게 우습다고 여기는 어린이문학만을 즐겁게 붙잡으면서 살았던 권정생 할아버지는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 하루하루를 보냈습니다. 당신 스스로 오물덩이가 되어 이곳에서 딩굴고 저곳에서 구르며 하루하루를 이었습니다. 권정생 님 당신은 언제 어디에서나 오래도록 쓸쓸하게 오물덩이처럼 딩굴었기에 비로소 새앙쥐 동무를 만났고 뱀 벗을 사귀었으며 바람 솔솔 새는 창호지 문을 바른 조그마한 집에서 옹크리면서 글 하나 뱉어냈습니다. 콜록콜록 아픈 재채기를 하면서 글 하나 조곤조곤 뱉어냈습니다. 권정생 님이 오물덩이처럼 딩굴지 않았다면 당신은 틀림없이 “평범한 직장인”이 되어 시골에서 안 살고 도회지로 나와 공장 일꾼이 되거나 큰회사 일꾼으로 한삶을 마무리했겠지요. 그러나 권정생 님 당신은 아픈 몸에다가 오물덩이처럼 딩군 나머지 《오물덩이처럼 딩굴면서》라는 책을 비롯해 《강아지똥》과 《슬픈 나막신》과 《우리들의 하느님》에다가 《랑랑별 때때롱》까지 뱉고는 《어머니 사시는 그 나라에는》 무엇이 있나 살피러 하늘나라 마실을 떠났습니다.

 평론가이든 전문가이든 교수이든 무엇이든 수필을 문학으로 치는 일은 드뭅니다. 수필문학을 알알이 아로새기며 사람들하고 곱게 나누는 길을 여는 일은 드뭅니다. 모르는 노릇이나 아무래도 마땅한 노릇이 아닐까 싶은데, 김수미 님이 내놓은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 같은 책을 ‘문학’으로, 또는 ‘수필문학’으로 치면서 비평을 하든 평론을 하든 뭐를 하는 교수님이나 전문가는 한 사람이라도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니, 평론이니 비평이니에 앞서 이 책 하나 즐거이 읽으면서 가슴으로 삭일 만한 책쟁이가 몇 사람이나 될는지 궁금합니다. 김수미 님 삶을 이 책 하나로 들여다보거나 어깨동무하면서 내 삶은 얼마나 아름답거나 빛나는가를 알뜰살뜰 돌아볼 만한 여느 어른이 이 나라에 몇이나 있을까 궁금합니다.


.. 성형수술한 뒤 훨씬 더 젊어 보이는 친구들을 보면 약간은 마음이 흔들리나, 전 겉보기보다는 상당히 봉건적입니다. 순리·자연적인 걸 거부하는 억지가 싫습니다. 요즘 세태에 안 맞는 여성일진 모르나 최신의 의학보다는 눈밑이 약간 처지고 눈가에 주름살이 접히는 제 마흔의 얼굴이 자꾸만 교만해지는 마음을 자제해 줄 것 같습니다. 제 성격에 한 십 년 더 젋어 보인다면 얼마나 더 설치겠읍니까? ..  (270쪽)


 군대가 있을 뿐 아니라 군대가 꽤 크고 이 나라 가난하고 힘없는 모든 젊은이는 강아지처럼 목줄에 매여 끌려가야 하는 틀이 단단히 잡혀 있는 대한민국은 참 슬픈 나라입니다. 경제성장률을 비롯해 올림픽이나 월드컵 등수뿐 아니라 토익·토플 점수와 수학능력시험 점수에 목매달아야 겨우 숨통을 트는 듯 여기는 대한민국은 아주 슬픈 나라입니다. ‘아름다운 삶’이 아닌 ‘최저생계비’라든지 ‘최저임금’ 같은 숫자에 매일 뿐 아니라 ‘억대 연봉’과 ‘수십억대 아파트’에 눈과 마음을 팔아치우는 대한민국은 끔찍히 슬픈 나라입니다.

 무더위에 에어컨은커녕 선풍기조차 들이지 않고 부채로만 살아가는 시골집에서 팔이 빠지도록 부채질을 하면서 딸아이 더위를 식히는 애 아버지는 꿈을 꿉니다. 애 아버지는 낮이고 밤이고 아이한테 부채질을 해 줄 뿐입니다. 아이는 늘 부채질을 해 주느라 아예 선풍기처럼 몇 시간을 지치지 않고 부채질을 할 수 있게까지 된 아버지를 바라보며 저도 부채질을 해 주겠다며 빙그레 웃습니다. 아이를 바라보고 아이 어머니를 바라보며 생각을 가다듬고 내 꿈을 곰곰이 되짚습니다. 살림이 버겁고 살림에 매여 저부터 제 꿈을 자꾸 잊고 있었다고 깨닫습니다. 내 하루를 나부터 곱게 사랑하고, 내 한삶을 나부터 든든히 믿으며, 내 목숨을 나부터 맑게 껴안자고 꿈을 꿉니다. 나는 참말로 어른이 되고 싶으니까 어른이 되자면 서른여섯 이 나이에, 김수미 님으로서는 《그리운 것은 말하지 않겠다》 같은 책을 내놓은 서른여섯 이 나이에, 내 몸을 빛내고 내 마음을 살찌울 삶을 야무지게 일구자고 꿈을 꿉니다. 비록 매우매우 슬픈 나라에서 살아가는 넋이지만, 이토록 매우매우 슬픈 나라 한구석에 예쁘게 땀내 나는 손길 하나 있어 텃밭 조용히 일구고 있음을 우리 어여쁜 딸아이와 함께 즐기자고 꿈을 꿉니다. (4343.8.21.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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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그 예술
야나기 무네요시 지음, 이길진 옮김 / 신구문화사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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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건호 님이 우리 말로 옮긴 책은 판이 끊어졌기에, 신구문화사 판으로 유통되고 있는 책에다가 이 글을 붙입니다. 아무쪼록 신구문화사 판은 꾸준히 읽힐 수 있기를...)





- 책이름 : 한민족과 그 예술
- 글쓴이 :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
- 옮긴이 : 송건호
- 펴낸곳 : 탐구당(1976.3.20.)



 야나기 무네요시 님 책이 우리 나라에 몇 가지가 있는가 하고 더듬어 봅니다. 얼마 앞서 나온 《수집이야기》(산처럼,2008)는 당신이 손수 쓴 글입니다. 지난해에 나온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 굴》(지식산업사,2007)은 정일성이라는 분이 쓴 비평입니다. 《조선과 그 예술》(신구문화사)이 2006년에 새 번역으로 나왔고, 일본사람 나카미 마리라는 분이 쓴 《야나기 무네요시 평전》(효형출판)이 2005년에 나왔습니다. 야나기 무네요시 님이 쓴 《미의 법문》(이학사)은 2005년에, 《조선공예개관》(동문선)은 1997년에, 《다도와 일본의 미》(소화)는 1996년에, 《조선을 생각한다》(학고재)는 1996년에 나왔습니다. 그 사이, 야나기 무네요시 님을 비평하는 책으로 《이데카와 나오키-인간 부흥의 공예》(학고재,2002)와 《이인범-조선예술과 야나기 무네요시》(시공사,1999)가 나왔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는 예전 책을 살피면, 1970년대 첫머리부터 1980년대 첫머리까지, 몇 가지 야나기 무네요시 님 책이 우리 말로 옮겨졌습니다. 《한국과 그 마음》(지식산업사,1974)이라든지, 《공예문화》(신구문화사,1976)라든지, 《광화문의 마음》(소금,1980)이라든지 하면서.

 짤막짤막하게 읽히는 글은 많고, 교과서에서도 야나기 무네요시 님을 다루기도 합니다. 그러나, 야나기 무네요시라고 하는 한 사람이 조선이라는 나라를 어떻게 바라보았는가를 두루 돌아볼 만한 글이나 책은 마땅치 못합니다. 또한,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사람이 바라본 ‘일본 사회와 문화’ 이야기는 더더욱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1976년에 나온 《공예문화》하고 1996년에 나온 《다도와 일본의 미》에다가 2005년에 나온 《미의 법문》 세 권이, 모자라나마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사람이 어떻게 살고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가를 돌아보도록 도와줄 뿐입니다.

 조금 더 알아보니, 야나기 무네요시 님은 1910년에, ‘무샤노코지 사네아쓰(武者小路實篤)’라는 분하고 ‘시가 나오야(志賀直哉)’라는 분과 《시라카바(白樺)》라는 문예잡지를 엮었다고 합니다. 1961년에 ‘무샤고오지 사네아쓰 인생론집(이때는 ‘무샤고오지’라고 적혀서 나왔습니다)’ 여섯 권이 나오기도 했습니다. 또한 이분이 쓴 《석가의 생애와 사상》(현암사)이 1963년에 나오기도 했고, 그 뒤로 이분이 쓴 불교 이야기가 여러 곳에서 몇 가지 나왔습니다.


.. 일본에는 아직도 옛날의 식민주의적 잔몽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우리를 업신여기거나 재진출을 꾀하는 층이 있음에 비추어, 그들에게 저자세로 영합하는 친일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 한편 일본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두 나라의 참된 우호를 위해서는 실로 우리 민족을 이해하고 협조를 아끼지 않는 양심적 인사들이 많다는 점에서, 일본을 무조건 증오하고 배격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일본의 대한 태도에 있어 무엇을 경계하고 무엇을 환영하고 고맙게 받아들여야 할지를 분명히 식별할 줄 알아야 한다 ..  (옮긴이 말)


 고작 스무 해밖에 안 된 일이지만, 제가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이름을 처음 듣던 때,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생각이 짙게 들었습니다. 중고등학교에서 이분을 가르치는 교사들 목소리에는 ‘조선을 이해한 사람’인 한편, ‘조선 예술을 한쪽으로 얽매어 놓은 사람’ 두 가지였습니다. 저로서는 교사와 교과서가 말하는 이 두 가지 목소리가 마음에 안 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조선을 이해한 사람’으로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사람을 들면서, 정작 ‘조선을 이해한 조선사람’은 누가 있었는가를 가르치지 않았거든요. 고유섭도, 이능화도, 백남운도, 전형필도, 조자용도, 예용해도 말하지 않았을 뿐더러, 띄엄띄엄 이름은 말해 주었어도 이분들 책과 발자취는 한 마디도 들을 수 없었습니다. 모두 다 저 혼자서 헌책방을 돌며(새책방에서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었기에) 찾아낸 책을 옥편을 뒤져 가면서 읽으며 알아갈 뿐이었습니다.

 나라안에서 야나기 무네요시 님 이야기가 나오는 모습을 헤아리면, 이분 책이 좀더 낱낱이 여러 갈래로 옮겨졌어야 할 텐데, 참 보잘것없을 만큼 번역이 되었습니다. 그나마, 번역된 책도 제대로 읽힌다고는 보이지 않습니다. 하물며, 나라안에서 문화를 하니 예술을 하니 뭐를 하니 하는 사람들 가운데 고유섭, 이능화, 백남운, 전형필, 조자용, 예용해 같은 이름을 아는 이가 몇이나 되겠으며, 책이나마 한두 권 뒤적여 보기라도 했을는지요. 게다가 이분들 책은 하나같이 판이 끊어졌거나, 지나치게 비싸게 묶여서 쉬 찾아 읽기 어렵게 되어 있거나, 옛날 한문투 글월을 요즈음 말투에 알맞게 풀어내지 못하곤 합니다.


.. 부끄러운 이야기이나, 역자는 우리 민족의 예술에 대해 별로 아는 것도 없고 큰 관심도 없는 일개 무식꾼에 지나지 않았으나, 이번 유종열 씨의 글을 통해 비로소 눈을 크게 뜨게 된 것은 무엇보다 다행스럽게 생각한다. 8ㆍ15 해방과 독립 후 만약 뜻있는 인사라도 있었으면, 그를 한 번쯤 이 땅에 초청함직도 했었으나, 6ㆍ25 등 민족적인 불행이 거듭되는 가운데 사랑하는 민족이 바다 건너에서 전란 속에 신음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선의 예술’의 나라 땅을 다시 밟지 못한 채 1960년 73세를 마지막으로 영면의 객이 된 것은 생각할수록 애석한 일이다 ..  (옮긴이 말)


 ‘조선 예술을 한쪽으로 얽매어 놓은 사람’이라는 목소리, 또 ‘야나기 무네요시는 조선 독립을 바라지 않았다’는 목소리는 어느 한편으로 옳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또 곰곰이 헤아릴 대목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런 목소리를 내는 우리들로서는 ‘우리 스스로 이 나라가 참된 독립을 바란다고 할 때, 참된 독립이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하나와, ‘우리가 참 아름다움과 기쁨을 찾아서 가꾸어 나갈 우리 삶과 문화란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두 가지를 먼저 슬기롭게 풀어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식민지가 아닌 2008년 오늘날 야나기 무네요시를 이야기한다면 어떤 뜻에서 이야기를 하는가 곰삭여야 하며, 우리들은 우리 스스로 우리 땅과 사람과 삶을 얼마나 가까이에서 살갗으로 느끼면서 펼쳐내고 있는가를 되새겨야지 싶습니다. 나라안 사람이 문화와 예술을 한다고 할 때에도 ‘잘못 보’거나 ‘엉뚱하게 보’거나 ‘권력자 입맛에 맞게 보’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목소리와 눈길을 한 자리에 놓고서 야나기 무네요시를 받아들이거나 따져야 한다고 느낍니다.

 제가 야나기 무네요시를 읽는 뜻은, 이분 책에 여러모로 아쉬움이나 모자람이 있기도 할 터이나, 아쉬움은 아쉬움대로 고맙게 새길 수 있고, 모자람은 모자람대로 제가 채워서 익히면 되고, 고마움은 고마움대로 잘 받아먹으면서 이 땅에서 튼튼한 한 사람으로 살아갈 길을 곱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꼭 차례를 두어야 하지는 않겠지만, 야나기 무네요시를 읽는다고 할 때에는, 《공예문화》와 《다도와 일본의 미》와 《미의 법문》을 먼저 읽은 다음, 《조선과 그 예술》하고 《조선을 생각한다》를 읽어야지 싶습니다. 이분은 조선 문화와 예술‘에도’ 마음을 쏟은 사람이지, 조선 문화와 예술‘에만’ 마음을 쏟은 사람이 아닙니다. 깜냥이 깊다면 깊다고도 할 터이나, 깜냥이 얕다면 얕은 우물에서 헤어나지 못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앞뒤를 살피고 생각깊이를 돌아보며 발자취를 더듬어야지 싶습니다. 그리고, 이분이 미처 넘지 못한 울타리라 한다면, 이 울타리가 무엇인지를 우리 나름대로 좀더 꼼꼼히 들여다보면서, 우리 스스로 갇힐 수도 있었을 울타리는 남김없이 허물거나 훌쩍 뛰어넘으면서, 우리 문화와 예술을 껴안고 사랑할 수 있으면 넉넉하다고 느낍니다.

 그나저나, 1976년에 탐구당에서 펴낸 손바닥책 《한민족과 그 예술》은, 1975년에 〈동아일보〉 편집국장 자리를 스스로 물러난 송건호 님이 우리 말로 옮겼네요. 회사에서 후배 기자를 자꾸자꾸 억지로 내쫓는 모습을 견딜 수 없었기 때문에, 기꺼이 사표를 낸 송건호 님은, 그 뒤 외국어대와 국민대에 강의를 나갔고, 한양대에서도 강사로 일합니다. 대학 강사로 일할 때 무엇을 가르쳤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때 부지런히 책을 써내었습니다. 어린이 위인전을 쓰기도 했는데, 이처럼 나라밖 책을 우리 말로 옮기는 일도 하셨군요. (4341.7.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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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응노
가나아트갤러리 편집부 엮음 / 가나아트갤러리 / 1994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은 알라딘 목록에도 없고, 교보 목록에도 없기에, 아무 책에다가 걸어 놓을 수밖에 없다.

 사진이라도 보시라고, 겉그림을 긁어서 붙인다.)





 이응노를 모르는 한국, 이응노를 모르게 하는 한국
 [사라진 책 25] 이응노,박인경,도미야마 다에코, 《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



- 책이름 : 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
- 이야기 나눈 이 : 이응노, 박인경, 도미야마 다에코
- 엮은이 : 도미야마 다에코
- 옮긴이 : 이원혜
- 펴낸곳 : 삼성미술문화재단(1994.4.30.)



 (1) 사라진 책 만나기란


 판이 끊어진 책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는지 생각해 봅니다. 헌책방에서? 헌책방에 간다고 해도, 판이 끊어진 책이 ‘팔렸던 부수’만큼만 있을 테고, 또 ‘그 책을 사 갔던 사람이 집에 모셔 놓지 않고 내놓아 주어야’ 만날 수 있습니다. 더욱이, 여러 가지 조건이 맞아서 바라던 책 하나가 헌책방에 들어왔다손 치더라도, 그 책이 들어온 그날 내가 그 헌책방에 찾아가서 만나지 않는다면 헛일입니다. 다른 책손이 먼저 알아보고 가져가면 물거품입니다.

 이응노(1904∼1989), 박인경(1926∼ ), 도미야마(1921∼ ), 이렇게 세 사람이 프랑스에서 두 달에 걸쳐서 만나서 나눈 이야기, 그러니까 당신들 살아온 이야기와 그림 이야기를 풀어낸 책 《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를 헌책방에서 뜻하지 않게 만났습니다. 천천히, 아주 더디게 곱새기면서 읽습니다. 보기 드문 책을 만나서 반가운 마음으로, 그러나 다시 찾아보기 어려운 책이구나 싶은 아쉬운 마음으로.

 반 해에 걸쳐서 야금야금 읽어냅니다. 책을 다 읽은 뒤, ‘이 책을 다시 만날 수 있나, 아니, 도서관에는 이 책을 갖추고 있을까’ 궁금해집니다. ‘전국 도서관 찾아보기’를 합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딱 한 권 뜹니다. 이곳에 가면 이 책을 빌려서 읽을 수 있군요. 아예 없지는 않네요. 그러면, 대전에 있는 이응노미술관에 가면 구경해 볼 수 있을까요? 아니, 구경을 넘어서 두고두고 읽을 수 있도록 한 권 살 수 있을까요?

 새책방에서 만날 수 있는 이응노 선생 책은 몇 가지 없습니다. 목록에는 여러 권 나오지만, 품절과 절판이라는 딱지가 또렷하게 새겨져 있습니다. 어린이책 한 가지만 있는 셈입니다. 그나마 어린이책으로 한 권이라도 있으니, 아이들이 ‘이응노라고 하는 그림쟁이 삶’을 살짝이나마 맛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이 한 권으로 이응노 님 삶을, 그림세계를, 발자취를 찬찬히 헤아리거나 돌아볼 수 있을는지요.

 작은 발자국을 남겼든 굵직한 발자국을 남겼든, 가까이하기에느 그지없이 어렵겠구나 싶은 한편으로, 그림 공부를 하는 젊은이들은 이응노라고 하는 그림쟁이 발자취를 어떻게 짚어 나갈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대학생들이 논문을 쓴다고 할 때에는 얼마나 많은 자료를 갈무리해서 쓸 수 있을는지요. 그나마 그림은 제대로 살펴보고 쓸 수 있을는지요.


 (2) 우리 곁에 있는 그림이란, 또 그림책이란


 ‘이응노’ 이름을 내건 미술관에서 내부직원이 저질렀다는 의심을 받는 ‘이응노 선생 그림 도둑질’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홀어미 박인경 님은 지아비 이응노 님 그림 삼백 점을 믿고 맡기려고 하다가 주춤했다는 소식이 이어집니다. 이렇게 된다면, 이응노 님 그림세계를 좀더 두루 살피거나 헤아리거나 맛보기는 한결 어려워지기만 하는 셈인지.

 이렇든 저렇든, 이응노 님은 당신을 기리는 미술관이 만들어졌습니다. 복받은 몸입니다. 이 나라에는 제대로 기림을 못 받은 채 숨죽이는 그림쟁이가 많잖아요. 기림을 받더라도, 여느 사람들이 넉넉히 당신들 그림세계를 돌아볼 수 있도록 즐길 수 있는 터전이 마련되어 있지 않잖아요.

 서울 아닌 곳에서 느긋하게 그림을 즐길 만한 곳은 어디에 얼마쯤 있을까요. 도시에서는 중심지 말고 변두리에서도 그림을 즐길 수 있을까요. 시골마을에서는 얼마나 가까운 곳에서 살풋이 그림을 맛볼 수 있을까요. 학교에서는, 그러니까 초중고등학교에서는 얼마나 그림을 자기 삶 가까이에 놓고서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학교마다 ‘미술 수업’이 있기는 합니다만, 이 미술 수업 때에는 어떤 그림을 살펴보면서 배우고 자기 스스로 그림그리기를 하도록 이끌어 주고 있는가요.

 오늘날 우리 세상은 엄청나게 많은 사진과 그림에 들러싸여 있습니다. 글만 담는 책은 아주 드뭅니다. 사진이 없으면 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아이들 이야기책에도 그림을 잔뜩 곁들이지 않으면 팔기 어렵습니다.

 어린이 그림책은 수도 없이 쏟아집니다. 어린이 그림책에 그림을 담는 새로운 그림쟁이는 날마다 태어납니다. 손으로 그림을 그리는 이가 있고, 셈틀 화면을 보며 그리는 이가 있습니다.

 그림쟁이를 이야기하는 책도 무척 많습니다. 비록, 거의 모든 ‘그림을 이야기하는 책’은 서양 그림쟁이 몇몇 사람을 다루는 쪽으로 치우쳐 있지만. ‘한국 그림을 이야기하는 책’조차 역사책에 오르내리는 몇몇 사람을 다루는 쪽으로 몰려 있지만.

 이렇게 어마어마하게 많은 사진과 그림에 둘러싸인 우리들은, 또 온갖 이야기책을 가까이할 수 있는 우리들은, 사진을 어떻게 생각하고 그림을 어떻게 헤아리고 있습니까. 자기 마음에 와닿는 사진이란 무엇이며, 자기 마음을 움직이는 그림이란 무엇이라고 받아들입니까.

 넘치는 사진과 그림이지만, 가슴을 울리는 사진과 그림은 안 넘치다 못해 모자라지는 않나 하고 생각해 봅니다. 자기 스스로 가슴을 울린다고 생각하지만, 유행에 따라서 몸이 굳어지거나 흔들린 탓은 아닌가 하고 생각해 봅니다. 삶을 담는 예술에서 멀어지고, 예술에 담는 삶이 사라지는 오늘날, 우리가 마음 느긋하게 즐기는 그림이나 사진이란 무엇인가, 하고 자꾸자꾸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를 따뜻하게 감싸거나 우리 가슴을 시원하게 쓸어내리는 그림쟁이는 누구이고, 이분들 그림을 얼마나 손쉽게 마주할 수 있을까, 하고 거듭거듭 생각하게 됩니다.


 (3) ‘이응노를 알 수 없게 하는’ 한국땅에 남아 있는 말


 《이응노―서울ㆍ파리ㆍ도쿄》를 읽는 동안 제 가슴에 와닿았던 대목에 밑줄을 그었습니다. 이 가운데 몇 대목을 옮겨 봅니다. 생각있는 어느 분이 있다면 앞으로 언제가 되더라도 이 책을 되살려 주시겠지, 하고 믿으면서. 이 책 하나 헌책방에서 캐내는 분은 캐내는 분대로 즐거움을 마음껏 누리시고, 끝내 못 찾아내는 분은 못 찾아내는 아쉬움을 씁쓸히 곱씹더라도 이 몇 마디 말이라도 만나보시길 바라면서.


[도미야마] 정말 놀라셨겠군요. 감쪽같이 속인 납치극이에요.
[이응노] 내 나라니까 철석같이 믿은 거지요. 난 뭣 땜에 그러는지 전혀 모르겠다고 했어요. 그러자 조사하던 사람 중 하나가, “들어야 할 얘기가 있으니까 여기 오게 한 거다. 그러니 솔직히 다 털어놓으라.”고 하더군요. “도대체 뭘 듣고 싶은 겁니까?” 그랬더니 커다란 나무몽둥이를 보여주었는데, 고문할 때 쓰는 거였지요. “이것 봐요, 이 몽둥이로 한 번 맞았다가는 목숨 건지기도 힘들어요. 여긴 프랑스가 아닙니다. 노인네라고 봐주는 줄 알아요?”라고 소리치며 겁을 주더군요. 하지만 나는 정말 뭣 땜에 그러는지 몰랐었지요. 그러자 KCIA가 “당신, 평양 갔었지?” 그러는 겁니다. “간 적 없다”고 하자, “안 되겠군. 맞아야 털어놓을 거요?”라며 협박을 하더군요. 가지도 않았는데 뭘 털어놓느냐, 그렇다면 증인을 불러내라고 하니까, 동베를린엔 왜 갔느냐, 정치자금은 얼마나 받았느냐, 무엇에다 썼느냐, 누구누구에게 얼마나 건네줬느냐, 5만 달러냐, 10만 달러냐 등등, 이런 식의 취조가 저녁 7시부터 한 새벽 2시쯤까지 계속되었어요 ..  (19∼20쪽)

[이응노] 옥중에서 가장 괴로웠던 것은 그림쟁이인 내가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부터는 간장을 잉크 대신으로 화장지에 데생을 하기 시작했지요. 또 밥알을 매일 조금씩 아꼈다가 헌 신문지에 개어서 조각품도 만들기 시작했어요 ..  (22쪽)

[도미야마] 선생님의 인생에서 옥중 생활은 과연 어떤 의미였는지요?
[이응노] 나는 형무소에 수감될 때까지는 정치에 대해서 그다지 관심이 없는 편이었어요. 일제 때는 한국인으로서의 여러 가지 생각도 했지만, 해방 후엔 오로지 그림만이 관심의 대상이었습니다. 형무소에서 처음으로 알게 된 것은, 비리를 저지르고 들어오는 부자의 수감 생활이란, 그야말로 형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외떨어진 독방에서 마치 호텔 같은 생활을 하고 있었어요. 매일같이 불고기가 나오고 외제 고급 위스키를 마시고, 간수들도 그 덕을 보니까 그들은 간수들을 마치 종 다루듯 했지요 ..  (25쪽)

[이응노] 형무소야말로 사회를 배우게 해 준 학교였답니다. 한국사회는 사람들을 나쁜 길로 가게끔 만들어요. 아니, 한국이라기보다는 미국을 등에 진 군사정권 아래에서는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금권정치의 부패겠지요. 일본인들 역시 마찬가지겠지만, 그래도 일본엔 민주주의가 있잖습니까? ..  (28쪽)

[도미야마] 근대로 향한 첫걸음은 그런 가부장적인 가정과의 대결로부터 시작되는 것이지요. 일본은 그런 면에서는 훨씬 수월했던 것 같습니다.
[이응노] 유교적인 가족제도는 아직도 남아 있지요. 바꾼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나는 결혼 같은 것에는 흥미가 없었고, 그보다 내 자신의 인생에 관한 것을 차츰 생각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을 친구들은 학교에 다니면서 일본말을 하고 서양식 양복도 입고 있어서 내가 보기에 시대를 앞서가는 신사처럼 보였어요. 그런 모습이 부러워서가 아니라, 나는 이대로 있어도 좋은 것인가라는 자문을 수없이 하게 되었지요 ..  (55쪽)

[이응노] 그때서야 내가 왜 그동안 낙선만 하고 있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첫 작품이 입선을 하기는 했지만, 그 7년 동안 내 그림은 완전히 죽어 있었던 겁니다. 나는 선생님의 그림을 모방만 하고 있었던 거지요. 대나무 가지 치는 것도 전통적인 방식으로만 애쓰고 있었어요. 선생님께서, “좋아, 입선감이다.” 하셨더라도 심사위원은 여러 사람이었으니까요 ..  (69쪽)

[도미야마] 저도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고, 결국 그림을 택했기에 자식 둘과 함께 전쟁 뒤의 참담하고 궁핍한 생활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렇지만 여자로서도 그림으로 먹고살 수 있는 길은 있어서, 그럭저럭 살아오게 된 것이지요.
[박인경] 나는 지금 여류작가 박경리 씨의 대하소설 《토지》를 읽고 있습니다. 김지하 씨의 장모 되는 사람의 글인데, 정말 훌륭한 작품입니다. 그런데 그에 비해서 우리 나라 여류화가들은, 나를 포함해서입니다만, 사상성이나 문제의식이 없는 것 같아요. 애를 쓰지 않아요 …… 동양화 수업이란 것이 그야말로 전통적인 모방기술에 불과했으니까요. 예술이란, 진정한 전통이란 이런 것이 아닌데, 감동도 창작도 타오르는 열정도 없는, 마치 타고 남은 재 같은 분위기였답니다 ..  (94쪽)

[도미야마] 저도 그렇답니다. 그 시대에 저는 아직 병아리 화가였고 미술학도였으니까 전쟁화를 그리지 않아도 되었지요. 그러나 만약 생활고에 시달리는 화가였다면 대체 어떻게 되었을까 하고 자문자답을 해 보게 됩니다. 부양가족을 둔 가난한 화가는 소년잡지에 〈황취(荒鷲) 전투도〉 같은 것을 마지못해 그리곤 했지요. 반면에 부유한 화가는 값비싼 프랑스제 물감을 쌓아 놓고 아틀리에에서 우아하게 정물화 같은 것을 그리고 있었어요. 전쟁화를 그렸느냐의 여부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려는 것은 아닙니다. 문제는 전쟁에 대한 책임을 어떤 식으로 받아들여서 그 후의 출발점으로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전쟁을 고무시키는 것에 협력한 화가들이 스스로 그것을 감추고 오히려 화폭에 민족적인 소재를 담는 것으로 대가의 자리에 앉아 있거든요 ..  (102쪽)

[이응노] 국전이란 대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일반 사람들을 위한 전람회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여긴 나는, 혼자 버티면서 국전을 비판했지요. 정치 세계든 미술 세계든 간에 모두 사기꾼 같은 자들이 멋대로 설치고 있었어요. 나는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습니다 ..  (120∼121쪽)

[이응노] 1955년에 그린 〈취야〉는 자화상 같은 그림이었지요. 그 무렵 자포자기한 생활을 하는 동안 보았던 밤시장의 풍경과 생존경쟁을 해야만 하는 서민 생활의 체취가 정말로 따뜻하게 느껴졌답니다. 1954년에 그린 〈영차, 영차〉도 마찬가지입니다. 노동자들이 일하면서 내는 소리가 있는데, 서까래 하나를 4명이서 들처메고 ‘영차, 영차’ 입을 맞추면서 옮겨가고 있었지요. 역시 나는 권력자보다는 약한 사람들, 함께 모여 살아가는 사람들, 움직이는 사람들, 일하는 사람들, 뭔가 말할 수 있는 사람들 쪽에 관심이 갔고, 그들 속에 나도 살아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어요 ..  (144쪽)

[이응노] 옛날 사람의 문자가 아무리 아름답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따라서 흉내내기만 한다면 그건 단지 모방에 지나지 않아요. 만약 혁명가라면 새로운 해석을 통해 창조적인 자기 것을 만들어 표현하겠지요 …… 그렇지요, 고전의 기술만을 배우는 것이 아니라 고전으로부터 무엇을 끌어낼 것인가 하는 정신과 사상이 문제가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 나라의 동양화는 아직도 옛날사람들이 했던 것 그대로 틀만을 지키고 있는 것 같아요 ..  (145, 146쪽)

[이응노] 그림이란, 벽에 거는 장식품으로만 그쳐서는 안 돼요. 사회의 모습, 순수한 인간에 대한 애정……, 이런 피끓는 발언이 없어서는 안 되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비로소 그림에 생명이 깃들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167쪽)

[이응노] 그게 바로 파리의 한국인과 베를린의 한국인의 차이점이지요. 파리에도 많은 한국인 유학생들이 와 있지만, 그들은 모두 돈 많은 집 자식들이고, 또 귀국 후의 일을 생각해서인지 민주화운동 같은 것에는 일절 관여하지를 않아요 ..  (170쪽)

[이응노] 내 인생은 36년 간을 일제 지배하에서 보냈고, 해방이 되자 이번에는 분단국가와 독재정권 속에서 내 나라에도 돌아갈 수 없는 상태로 30년을 지내 왔어요. 우리들은 그리고 싶은 것을 그려 발표하면 박해를 받게 되니, 표현의 자유도 없는 겁니다 ..  (175쪽)



(4341.5.27.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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