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사람이 더 많은 세상
송언 / 내일을여는책 / 199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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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내미 아빠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 송언, 《좋은 사람이 더 많은 세상》



- 책이름 : 좋은 사람이 더 많은 세상
- 글 : 송언
- 펴낸곳 : 내일을여는책 (1997.5.25.)



 시골에서 살아가는 아이는 시골 땅과 하늘을 바라봅니다. 도시에서 살아가던 아이는 도시 땅과 하늘을 바라보았습니다.

 도시에서는 아이한테 달빛 하나 가르치기 몹시 힘들었습니다. 워낙 갖은 불빛이 많아, 아빠가 제아무리 손가락으로 밤하늘 높다란 자리에 걸린 동그라미 하나를 가리킨다 한들, 달인 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시골에서는 달 둘레에 온갖 별이 반짝입니다. 달은 달대로 가리키며 가르쳐 주고, 별은 별대로 손가락으로 꼽으며 가르쳐 줍니다.

 도시에서 살며 풀과 꽃과 나무를 가르쳐 주기 참 벅찼습니다. 골목동네 곳곳에 예쁘장하거나 앙증맞게 꽃그릇이나 텃밭 일구는 분들 터전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었으니 그럭저럭 가르쳐 줄 수 있었으나, 다른 모든 곳에서는 꽃이니 풀이니 나무이니 만나기 어렵습니다. 도시에서는 그저 ‘빠방(자동차)’하고 건물만 가득합니다.


.. 경기도 땅 덕소의 연립주택 3층으로 이사 오기 전까지 큰놈 이슬이는 어두컴컴한 지하 셋방에서 꼬박 5년을 살았다. 그래서인지 유독 잔병치레가 잦았다 ..  (11쪽)


 도시에서 태어나 자란 제가 어머니와 아버지한테서 무엇을 배웠거나 무엇을 배울 수 있었나 돌아봅니다. 도시에서 태어나 자랐으나, 가까이 바다가 있고 갯벌이 있으며 골목동네 놀이동무하고 어울렸습니다. 바다는 쇠가시울타리로 꽁꽁 막히기는 했어도 요리조리 빠져나갈 구멍을 찾아다니며 바라보았고, 아직 새 건물 들어서지 않은 빈 땅에는 논이나 밭을 일구는 분이 있었으며, 물웅덩이에서 미꾸라지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기찻길 옆 연탄공장 둘레에서 살아가는 아이들이라든지, 바로 이 옆에 붙은 국민학교를 여섯 해 다닌다든지 하면서 철길과 골목집과 판자집 삶을 ‘이런 삶은 이런 모양이다’ 하고 배우지는 않았으나, 내 둘레 사람들 여느 삶은 다 이러했으니 물처럼 스스럼없이 받아들였습니다.

 노느라 바쁜 나날이었고, 한두 시간쯤 되는 길은 으레 걸었으며, 누군가하고 만나기로 했으면 ‘몇 시 몇 분 어디’에서 만난다 하지 않고 ‘언제쯤 어느 둘레’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삼십 분이든 한 시간이든 가볍게 기다리면서 골목골목 쏘다녀 본다든지 다른 동무랑 논다든지, 나중에 중학생쯤 되면 가만히 책을 읽으며 기다린다든지 했습니다.

 도시라지만 도시 같지 않은 인천에서 나고 자랐기에 사람다운 빛을 그럭저럭 잃지 않을 수 있었을까 싶은데, 아주 깊디깊은 도시 한복판 삶터였다면 내 삶은 어떻게 달라졌을는지 두렵습니다. 시골 아닌 도시에서 나고 자란 탓에 도시 아닌 시골에서 나고 자란 어머니처럼 풀이나 꽃이나 나무 이름을 척척 헤아리지 못합니다. 어머니는 시골에서 나고 자라셨으면서 도시로 나와서 시집가고 아이 낳아 기르는 동안 무엇을 생각하고 느끼셨을까요.


.. 어제 저녁 무렵이었다. 지난 일요일에 내려왔으니 덕소에 오신 지 이틀째 되는 날이었다. 어머니가 불쑥 물었다. “얘, 아범아. 요 아래 왜 노는 땅이 있지 않디?” “그런데요?” “내일도 사무실에 나가지 않는다니 함께 텃밭 좀 일궈 봤으면 해서 말이다.” “우리 땅도 아닌데 괜찮을까요?” “어차피 놀고 있는 땅인데 텃밭 좀 일궜다고 설마 뭐라 그럴라구.” “그럴까요, 그럼?” ..  (42쪽)


 도시에서 태어났으나 두 돌이 지나기 앞서 멧골자락으로 옮긴 첫딸 사름벼리는 앞으로 이 시골자락에서 무엇을 받아들이거나 살피거나 헤아릴는지 궁금합니다. 제 아버지는 제 아버지를 키운 어머니한테 없는 여러 가지 길을 찾으며 살아갔다면, 딸아이는 제 아버지한테 없는 여러 가지 길을 살피며 살아갈까요. 제 아버지는 제 아버지를 키운 어머니와 달리 도시에서 시골로 왔다면, 딸아이는 제 아버지와 달리 시골에서 살다가 도시로 가는 삶을 맞아들이려나요.

 어머니는 심부름을 참 많이 시켰고, 저는 심부름하기를 몹시 즐겼습니다. 어머니한테서 이것저것 곧바로 배운 집일은 드물지만, 언제나 곁에서 알짱거리면서 어깨너머로 요모조모 익혔습니다. 딸아이는 제 아버지가 했듯 저 또한 아버지 바지꽁무니 둘레에서 어정어정거리면서 이냥저냥 발치너머로 익히려나요. 어머니 삶이 제 삶이 되고, 제 삶이 아이 삶이 됩니다. 아이 삶을 생각한다면 아버지 된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할는지 아주 또렷합니다. (4344.1.19.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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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앞에 바로 서려는 어른의 이야기
김남선 지음 / 풀빛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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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사람이 아끼거나 보듬을 책
― 김남선, 《아이들 앞에 바로 서려는 어른의 이야기》



- 책이름 : 아이들 앞에 바로 서려는 어른의 이야기
- 글 : 김남선
- 펴낸곳 : 풀빛 (1994.12.21.)


 뜻하지 않게 ‘사진읽기’를 하면서 ‘사진비평’을 한다는 이름을 얻습니다. ‘사진찍기’를 하다 보면 누구나 ‘사진읽기’를 함께해야 하기 때문에 저절로 사진책을 말하기 마련이고, 사진책을 말하던 글이 시나브로 ‘사진비평’이 됩니다.

 아이를 낳아 키우면서 어머니 마음을 조금씩 느끼며 배웁니다. 그러나 어머니 마음을 조금씩 느끼며 배운달지라도 알차거나 아름다이 느끼거나 배우지는 못합니다. 어수룩하고 어줍잖습니다.

 그래도 한 가지는 깨닫습니다. 사진은 누구한테서 따로 배울 수 없고 가르칠 수 없다고 깨닫습니다. 아이키우기 또한 누구한테서 따로 배우거나 가르치지 못합니다. 배우거나 가르치는 사진이나 아이가 아니요, 배우거나 가르치지 못하는 삶입니다. 하루하루 맞아들이며 보내는 삶이면서 사진이고 아이입니다.

 내가 누구를 가르칠 수 없지만, 내가 누구한테서 배울 수 없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선생님’이라며 부를 수 없고, 누군가 나를 ‘선생님’이라며 부르지 못합니다. 서로 같은 자리 사람입니다. 서로 나란히 어깨동무할 사람입니다. 어른은 아이 앞에서 말을 놓는다지만, 어른과 아이가 똑같은 사람이요 삶임을 헤아리거나 곰삭일 줄 안다면, 말이 아닌 마음을 열며 이야기를 나눌 노릇입니다.


.. 김씨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이러저러한 성격과 태도를 가지고 있는 것이 김씨이다. 그런데 김씨가 김씨의 모습을 지녔다고 싫어하고 미워한다. 나 자신의 얼굴 모습도 마찬가지다. 그렇게 생긴 것이 나인데 마음에 들지 않게 생겼다고 스스로 마음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 민주화와 민족자주화에 절실한 갈망을 가지고 있다고 하여 그 사람이 항상 바른 것은 아니다. 그런 사람들의 가슴에도 제국주의 근성, 독재자의 근성이 살아서 해독을 끼치고 있는 것을 내 모습을 통해 보게 된다 … 과거의 교장·교감과의 관계를 생각하면 초인적인 노력과 인내가 필요한 것도 사실이다. 도저히 상식이 통하지 않는 경우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노력이 부질없는 짓이라고 비웃음을 받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도 인간이고 다 바르게 살려고 애쓰는 이들이다. 적으로가 아니라 같이 잘 살아야 할 존재로 애정을 가지고 진심을 다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해 본다 ..  (44∼45쪽)


 《못 다 가르친 역사》라는 책을 써 냈던 김남선 님이 쓴 《아이들 앞에 바로 서려는 어른의 이야기》라는 책을 헌책방에서 만납니다. 이런 책이 나온 적 있구나 새삼스럽게 생각하다가는, 책이 나온 1994년을 더듬으니, 1994년은 제가 고등학교를 마치고 갓 대학교에 들어가 본 해입니다. 대학교는 다섯 학기를 다니고 그만두었는데, 첫 해를 보낸 1994년에 대학교 앞 책방들을 뻔질나게 드나들었고, 이듬해 1995년에는 대학교 도서관과 구내서점에서 일꾼 노릇을 했습니다만, 이때에 《아이들 앞에 바로 서려는 어른의 이야기》라는 책을 보지는 못했습니다.

 왜 못 보았는지 알 수 없습니다만, 못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책을 다 알아볼 수 없을 뿐더러, 모든 책을 다 읽을 수는 없으니까요. 그렇지만, 이렇게 놓치는 책이 있기 마련입니다. 놓치는 책이 있는 줄 자그마치 열예닐곱 해 뒤에서야 깨닫는 책이 있습니다. 어쩌면 놓치는 책인 줄 죽는 날까지 알아채지 못하는 책도 많을 테지요.

 한 사람이 알아채는 책은 몇 가지가 되려나요. 한 사람이 받아들이는 책은 몇 권이나 될까요. 한 사람이 곰삭이며 사랑할 책은 얼마나 될는지요. 한 사람이 아끼거나 보듬을 책은 얼마쯤이면 넉넉한가요.


.. 적당히 살자는 생각이 없어지면서, 얽혀 있던 인간관계도 적극적으로 풀어 가자는 마음이 생겨난 것이다 … 이해는 온정으로 나타났다. 잘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 일었다. 따뜻하게 보아주고 싶었다 … 내 마음에 맞는 사람만 만나기를 바라는 것은 일종의 독재자의 마음이나 도둑의 심보와 같은 게 아닐까 생각하니 내 불쾌감이라는 것이 쓸데없는 감정의 낭비처럼 느껴졌다 ..  (56, 57, 133쪽)


 모든 책은 한 사람 땀방울을 담습니다. 모든 책은 한 사람 꿈을 싣습니다. 모든 책은 한 사람 넋을 통째로 담습니다. 모든 책은 한 사람 사랑을 남김없이 싣습니다. 모든 책은 한 사람 이야기를 송두리째 바칩니다.

 모든 책은 사랑이기 때문에, 책을 찾아서 읽는 사람 스스로 어떠한 사랑을 나누어 받고픈지를 헤아려야 합니다. 모든 책은 믿음인 터라, 책을 살피어 읽을 사람 스스로 어떠한 믿음을 즐기려 하는지를 곱씹어야 합니다. 모든 책은 삶이니까, 책을 장만하여 읽겠다는 사람이 기쁘게 어깨동무할 고운 이야기꽃을 피워야 합니다. (4344.1.17.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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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 한국의시인 2
김수영 지음 / 열음사 / 198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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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시’는 문학이지 ‘입시 문제’가 아닙니다
― 김수영,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 책이름 :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 글 : 김수영
- 펴낸곳 : 열음사 (1984.3.1.)



 국민학교 다니던 때에 읽던 책을 고등학교 다니며 다시 읽을 때 느낌은 같을 수 없습니다. 줄거리를 더 깊이 읽거나 더 두루 읽을 뿐 아니라, 글쓴이 넋을 다른 눈길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남자라면 군대에서 개머리판으로 얻어맞아 내무반에서 모포를 뒤집어쓰고 울다가 읽는 책하고 혼인하여 낳은 아이를 어르며 읽는 책하고 느낌이 같을 수 없습니다. 젊은 날 받아들이는 이야기하고 한껏 무르익는 나이에 맞아들이는 이야기랑 차츰 늙는 길에 살피는 이야기는 때와 곳마다 다릅니다.

 시쓰던 김수영 님은 〈安壽吉〉이라는 수필을 쓰면서 소설쓰던 안수길 님을 놓고 “그가 자기의 작품을 따분한 것이라고 말하는 것도, 또 그의 작품이 실제 그러한 따분한 면을 가지고 있는 것도 그의 곰상스러운 성격이 시키는 오랜 인내에서 나오는 것이다. 따분은 하지마는, 그것은 비료나 진개는 아니다. 그것은 곧 작가 안수길의 예술이기 때문이다(112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예술이겠지요. 이와 함께 삶이겠지요. 문학일 테지요. 이러는 가운데 눈물일 테지요. 소설이며 시라고 말하겠지요. 마침내 목숨일 테고요.


 팽이가 돈다
 어린아이이고 어른이고 살아가는 것이 신기로워
 물끄러미 보고 있기를 좋아하는 나의 너무 큰 눈앞에서
 아이가 팽이를 돌린다
 살림을 사는 아이들도 아름다웁듯이
 노는 아이도 아름다워 보인다고 생각하면서
 손님으로 온 나는 이 집 주인과의 이야기도 잊어버리고
 또한번 팽이를 돌려 주었으면 하고 원하는 것이다
 … (달나라의 장난)



 김수영 님 시를 고등학생 때 처음 읽습니다. 문학 교과서에 〈폭포〉가 실렸다고 떠오르는데, 교과서며 참고서며 교사며 으레 〈폭포〉라는 시가 무엇을 빗대어 나타내려 했는가를 읽어야 한다고 몰아세우는 한편, 싯귀 가운데 한 낱말을 지워 놓고 묶음표를 넣은 다음 알아서 채워 넣으라는 시험문제를 곧잘 내놓았습니다. 시를 통째로 달달 외우면서 어느 자리를 비워 놓아도 묶음표를 채우도록 해야 했고, 〈폭포〉가 아름다운 시인지 아닌지 느낄 겨를이 없었습니다. 논술시험에서 틀리지 않도록 잘 살필 ‘지문(보기글)’으로 여겼을 뿐입니다.

 생각해 보면, 학교 수업으로 있던 고전문법이든 고전문학이든 현대문학이든 현대문법이든, 조금도 수업다이 한 적이 없습니다. 왜 우리 옛 말법을 배워야 하고, 우리 요즈음 말법을 이토록 어렵고 골때리도록 달달 외워야 하는지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우리 말을 우리 말답게 잘하도록 하는 학교 문법 시간이었을까요. 문학을 문학다이 즐기도록 이끌던 학교 문학 시간이었을는지요.

 체육은 체육이 아니라 공놀이였고, 음악은 노래를 즐기는 배움이 아닌 음계에 맞추어 악보를 읽지 못하면 몽둥이로 얻어맞아야 하는 매타작이었습니다.


 무식한 사랑이 여기 있구나
 무식한 여자가 여기 있구나
 평안도 기생이 여기 있구나
 滿州에서 해방을 겪고
 평양에 있다가 인천에 와서
 六·二五때에 남편을 잃고 큰아이는 죽고
 남은 계집애 둘을 다리고
 再轉落한 여자가 여기 있구나
 時代의 여자가 여기 있구나
   한잔 더 주게 한잔 더 주게
   그런데 여자는 술을 안 따른다
     건너편 친구가 내는 외상술이니까
 … (滿州의 여자)



 오래도록 제도권 입시 틀에 얽매인 눈썰미로는 김수영 님 시이든 신경림 님 시이든 신동엽 님 시이든 고정희 님 시이든 읽을 수 없습니다. 시를 시로 읽지 못합니다.

 시를 시로 읽자면 내 삶을 일구어야 합니다. 시를 시다이 껴안으면서 눈물과 콧물과 웃음과 노래로 맞이하자면 내 하루를 사랑해야 합니다.

 아이하고 복닥이면서 아프고 괴로우며 슬픕니다. 아이를 덥석 안고 하늘로 붕 띄우면서 신나고 재미나며 즐겁습니다.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읽는 동안 아빠는 아빠 다른 책을 못 읽지만, 그림책을 더 깊숙이 들여다보면서 그림책 가운데 사랑스러운 이야기와 엉터리 이야기를 찬찬히 알아챕니다. 돈장사 책이랑 사랑나눔 책이 뒤얽힌 이 나라 책마을을 아이랑 살아가는 동안 시나브로 온몸으로 느껴 받아들입니다.


 누구한테 머리를 숙일까
 사람이 아닌 평범한 것에
 많이는 아니고 조금
 벼를 터는 마당에서 바람도 안 부는데
 옥수수잎이 흔들리듯 그렇게 조금
 … (꽃잎 一)



 2011년 1월 15일 겨울 한복판, 도무지 풀리지 않고 꽁꽁 얼어붙은 채 한 달이 훨씬 넘도록 언물이 녹지 않는 멧골마을 작은 집, 고단한 아이는 칼바람 부는 날씨에 아빠하고 자전거를 함께 타겠다며 떼를 쓰다가 울며 잠들고, 아빠는 집에 쌀이 떨어져 큰길가 보리밥집으로 자전거를 타고 다녀오며 사오느라 얼굴과 손이 차갑게 얼어붙습니다. 앞으로 2034년 겨울은 어떠할까 궁금하고, 2034년 겨울날, 우리 첫딸이 서른일곱 나이가 될 무렵, 이때에도 김수영 님 시나 산문은 ‘문학이라는 시’나 ‘문학으로서 산문’으로 사람들한테 읽힐 만한지 궁금합니다. 아니, 뭐, 다른 사람이야 어찌 되든, 아빠가 김수영 님 전집이며 낱권책이며 여러 가지로 알뜰히 건사해 놓았으니, 아이 스스로 김수영 문학을 좋아해 주고 싶거나 읽어 보고 싶다면 언제라도 우리 집 도서관에서 끄집어 내어 펼치겠지요. (4344.1.15.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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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박껍질과 하얀절편
김연희 지음 / 그린비 / 199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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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요리책과 밥책과 이야기책
― 김옥희·김연희·김선희·김미원·김연미, 《수박 껍질과 하얀 절편》



- 책이름 : 수박 껍질과 하얀 절편
- 요리감수 : 김옥희
- 글 : 김연희
- 그림 : 김선희·김미원·김연미
- 펴낸곳 : 그린비 (1995.10.25.)


 어느새 집식구 밥차림을 도맡는 아빠로 살아갑니다. 밥을 잘한다거나 반찬을 잘 내지 못하면서도 어느덧 집식구 밥상을 도맡습니다.

 밥차림을 하는 아빠는 밥차림만 하지 않습니다. 빨래이니 청소이니 아이돌보기이니 도맡아야 합니다. 이러는 가운데 살림돈을 벌어야 합니다.

 혼자 살아가던 때에는 마땅히 혼자 밥을 차려 먹습니다. 혼자 꽤 오래 살다 보니 혼자 냄비 하나만 쓰는 일이 익숙합니다. 굳이 밥그릇에 밥을 푸는 일이 없고, 반찬을 여럿 내는 일조차 드물었습니다. 혼자 먹는 밥차림에 이런저런 반찬 내놓기를 해 보지 않아 버릇했고, 늘 한 가지 국이나 찌개만 끓여도 배부르다 여겼습니다.

 아이하고 옆지기 먹을 밥을 날마다 똑같이 차린다 해서 나쁠 일이란 없습니다. 그러나 아빠가 매운 먹을거리를 못 먹는다 하더라도 김치를 접시나 그릇에 내놓지 않는다거나 찌개 하나만 달랑 끓여서는 아이가 좋아하기 어렵습니다. 어수룩하지만 이럭저럭 새롭게 한두 가지 다른 찬거리를 장만해 보려고 하지만, 늘 뻔한 틀에서 허덕입니다.

 앞으로 한 달이 가고 한 해가 가며 열 해쯤 흐르면 나아질 수 있으려나요. 이냥저냥 힘들고 지치며 바쁘다는 핑계를 대며 허우적거리기만 하려나요.

 밥차림을 할 수 없을 만큼 몸이 아프며 힘든 옆지기와 함께 헌책방마실을 하던 지난해 어느 날, 옆지기는 《수박 껍질과 하얀 절편》이라는 책을 골라서 읽더니 아빠한테 건넵니다. 할머니와 딸 넷이 함께 일군 소담스러우면서 ‘밥차림 자랑’이 한 가지도 없는 요리책 아닌 ‘밥 이야기책’입니다. 밥차림 한 가지를 이야기하기 앞서 다섯 여자가 복닥이며 받아들인 삶을 짤막히 적바림합니다. 대단할 삶이 아니지만 모자랄 삶이 아니요, 놀라울 삶이 아니지만 어설픈 삶이 아닙니다. 수수한 대로 즐거우면서, 투박한 대로 재미난 삶입니다.


.. 어머니의 요리에는 이야기가 들어 있다. 기쁨, 사랑, 감사의 삶이 그려져 있다. 콩과 씨앗, 버려질 뻔한 음식들, 소박한 야채들은 어머니의 언어이다. 그것들은 할머니의 옛이야기를, 어머니의 종교를, 우리들의 사랑을, 때로는 아이들의 기쁜 재잘거림을 들려준다. 치자꽃으로 노랑물 들이고, 맨드라미 빨강 꽃물, 쑥으로 초록물 들여 음식을 만들던 사랑. 자다가 일어나 한밤에 샘물 길어 밤참을 준비하는 정성은, 음식이란 입으로 먹는 것만이 아니라 귀로 눈으로 마음으로 먹는 것임을 일깨워 준다. 결국, 여자가 요리하는 것은 사랑이 아닐까? ..  (머리말)


 요리사가 차려 준다 해서 맛난 밥이지는 않습니다. 밖에서 비싼 값 치러 사먹는다 해서 내 몸이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내 삶이 사랑이듯이 내 밥은 사랑입니다. 받는 밥상이든 차리는 밥상이든 사랑입니다. 사랑 아닌 밥상이란 없고, 사랑을 이야기하지 않는다면 요리책이 될 수 없습니다. 예쁘장하거나 맛깔스럽다 싶은 사진을 잔뜩 넣어야 요리책이 아닙니다. 서양밥이나 일본밥이나 중국밥을 남달리 보여주어야 요리책이지 않아요. 철 따라 먹고 날 따라 즐기는 우리 보금자리 조촐한 살림살이 밥차림을 이야기할 때에 비로소 요리책, 아니 밥책입니다. (4344.1.12.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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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여 침을 뱉어라
이효인 / 예건사 / 199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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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삶으로 껴안으면 한결 따스하겠지
― 이효인, 《영화여 침을 뱉어라》



- 책이름 : 영화여 침을 뱉어라
- 글 : 이효인
- 펴낸곳 : 영화언어 (1995.1.15.)


 생각을 열어젖히는 글을 읽을 때면 반가우며 고맙고 기쁩니다.

 한창 생각을 열어젖히다가 생뚱맞다 싶은 이야기가 나오면 슬프면서 안쓰럽고 기운이 빠집니다.

 영화 이야기를 적바림하는 이효인 님이 쓴 《영화여 침을 뱉어라》를 두 권째 장만하여 다시 읽다가 〈객담 1. 아이를 재우며〉라는 꼭지가 있어 곰곰이 살핍니다. 아이 없이, 또 옆지기 없이, 그예 혼자서 자전거 하나에 기대어 살던 2006년에 이 책을 처음 마주하며 읽을 때에는 그닥 눈여겨보지 않고 지나친 꼭지를 새삼스럽다고 느끼며 차근차근 읽습니다.

 2010년 12월 한겨울을 보내는 오늘은, 저 또한 아이 하나를 재우면서 밤잠이 달아나 깊은 밤에 멀뚱멀뚱 깬 몸입니다. 머잖아 둘째가 태어나 두 아이를 먹이고 입히며 씻기고 재우는 나날을 보내야 할 어버이인 내 삶입니다. 그런데 글이름은 “아이를 재우며”이지만, 막상 아이하고 보내거나 부대끼는 삶 이야기는 나오지 않습니다. 외려 뜬금없는 빗댐말을 읽으며 눈살을 찌푸립니다.

 한숨 한 번 길게 내쉽니다. 이내 눈살을 풀며 헤아립니다. 나는 이런 얼토당토않은 빗댐말을 쓰지는 않지만, 내가 쓰는 빗댐말을 못마땅해 한다든지, 나는 웬만해서는 빗댐말은 안 쓰지만 내가 살아가는 모습을 꾸밈없이 적바림하는 글조차 싫어할 사람이 있을는지 모르겠다고 느낍니다.


.. 요즘 젊은 평자들의 글들이 젊은 여자들의 똥꼬치마처럼 짧게 파닥거리는 것이라면 최 선생의 글은 방귀를 슬쩍 흘러내리고도 겉체면을 유지할 수 있는 깡다구와 품격을 동시에 갖춘 것이다 ..  (189쪽)


 거친 말투를 쓴다고 해서 거친 사람이지 않습니다. 거친 말투로 여린 몸과 마음을 가린다거나 덮는다거나 지키기 일쑤입니다. 말투가 거친 사람일수록 몸이나 마음은 더없이 조그마하며, 말투가 보드라운 사람일수록 몸이나 마음은 몹시 크기 마련입니다.

 거친 말투를 받아들여야 했던 내 지난날을 곱씹습니다. 갖은 욕지꺼리와 주먹다짐이 아니고는 살아남을 수 없던 군대살이를 떠올립니다. 참말 군대에서는 갖은 욕지꺼리와 주먹다짐 아니고는 살아남을 수 없었을는지 새삼 되씹습니다. 어쩌면 욕 한 마디 않고 주먹다짐 한 번 없으면서 잘 살아남을 뿐 아니라 둘레 사람들한테 따스한 사랑을 나눌 만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해 보려는 사람이 거의 없어 이루지 못할 뿐인 꿈일는지 모릅니다만, 나부터, 군대살이를 하던 지난날 착하면서 참다이 지냈어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 문화의 정체성을 가지지 못한 사회에서 가장 위력을 발휘하는 것은 상품 자본의 논리라는 것이다. 상품 자본의 논리는 끊임없이 무차별 대중들에게 적합한 형태의 ‘물건’을 요구한다. 이 물건은 상품으로서의 가치와 수명을 위하여 끊임없이 자기 변신을 꾀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모든 변신은 상품성의 기준을 넘지 않는 것이어야 한다. 요약하자면, 이국적인 것을 선호하는 기호, 자기 문화에 대한 열등감, 상품성을 갖추기 위한 사회적 압박 그리고 이런 풍토에서 파생된 정신분열증 등이 ‘탈권위 쿠테타’와 한국의 ‘천민 자본주의’와 맞물리면서 일본의 영화 문화를 쫓아가고 있다는 말이다 ..  (181쪽)


 《영화여 침을 뱉어라》라는 책은 영화를 좋아하거나 사랑하거나 아끼고픈 이라면 헌책방마실을 하면서 찾아 읽을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만 한 책 하나 찾고자 다리품을 아끼지 말아야 하며, 이쯤 되는 책 하나 차근차근 새겨읽으며 마음닦이를 한다면 더욱 훌륭하다고 여깁니다.

 그러나, 이 책은 징검돌이거나 디딤돌입니다. 길동무이거나 옆지기가 될 만한 책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길동무는 사랑스러운 벗이요, 옆지기는 믿음직한 너나들이입니다. 《영화여 침을 뱉어라》는 틀림없이 깊고 너른 생각과 마음씀을 보여줍니다. 그렇지만 영화라는 문화에 이론이라는 지식을 엮는 데에 그칩니다. 영화라는 삶에 사람이라는 사랑을 여미지는 못합니다.

 영화를 읽으면서 영화를 파헤치는 눈썰미를 갈고닦는 좋은 동무인 《영화여 침을 뱉어라》라 할 만하지만, 영화를 사랑하면서 영화와 함께 살아가려는 길에는 걸맞지 않는 무거운 짐입니다.

 그런데, 우리 둘레에는 영화를 말하는 책이 몇 가지나 있으려나요. 한국 영화를 말하는 책이란, 한국이나 나라밖이라는 틀을 넘어 영화 문화를 다루는 책이란 얼마나 있는가요. 아직 ‘영화 삶’을 바라기는 힘듭니다. 섣불리 ‘영화 누리’를 꿈꿀 수 없습니다. 앞으로 천천히 씩씩하게 이룰 꿈입니다. 낮은 자리가 아니라 여느 수수한 자리에서 서로서로 포근하며 너그러이 감싸안으면서 북돋울 꿈이에요. (4343.12.30.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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