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귀신의 노래 - 지상을 걷는 쓸쓸한 여행자들을 위한 따뜻한 손편지
곽재구 지음 / 열림원 / 2013년 11월
평점 :
품절


인문책시렁 56


《길귀신의 노래》

 곽재구

 열림원

 2013.11.25.



소설가가 될 거예요. 아이들은 잠잠해졌다. 선생님이 물었다. 소설가가 뭐하는 사람이니? ‘세상의 모든 아이들에게 아름답고 신비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라고 아이가 대답했을 때 선생님은 정말 많이 기뻐하셨다. 좋은 꿈이구나. 꼭 꿈을 이루렴. (18쪽)


고등학교 2학년 시절의 풍경 하나가 떠올랐다. 광주의 대인동에 내가 잘 가는 서점 하나가 있었는데 사면을 거의 꽉 채운 헌책들이 가득한 서점이었다. 헌책방이라고는 하지만 그 무렵의 내게는 세상의 모든 꿈과 진리를 다 지니고 있는 것만 같은 공간이었다. (40쪽)


딸기밭에서 사랑에 빠진 아가씨에게서는 딸기 냄새가 나고 마구간을 치우는 사내에게서는 말똥 냄새가 나기 마련이다. 그 순간, 좁은 내 자리가 좁지 않게 느껴졌다. (118쪽)


고등학교 시절 내 가방 안에는 시집과 세계문학전집이 들어 있었습니다. 교과서를 넣을 여백이 없었습니다. (160쪽)



  마음이 맞는 어른을 만나기란, 마음이 맞는 동무를 만나기처럼 아득한 일일 수 있습니다. 한국이란 나라에서는 나이로 금을 긋고서 무턱대고 따라오라고 잡아당기는 물결이 흐르거든요. 오랫동안 나라에서 사람들을 길들인 탓도 있겠고, 나라에서 사람들을 길들이려 할 적에 당차게 떨쳐내지 않은 탓도 있겠지요. 한국에서는 누구나 ‘입시지옥’이 있는 줄 알고 말하지만, 정작 이 입시지옥을 스스로 떨쳐내거나 멀리하거나 아이들을 이 가까이 안 두려고 하는 몸짓은 매우 드물어요. 그냥 이 물결에 같이 휩쓸리는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학교에서 교사가 아이들한테 ‘꿈’이 무엇이냐고 물을 적에 ‘돈을 버는 일자리’가 아닌 참말로 ‘꿈’을 몇 아이쯤 밝힐 수 있을까요? 하나같이 ‘돈벌이 자리’만 말하지 않을까요? 일자리하고 꿈자리가 다른 줄, 꿈이 있고서야 비로소 일을 찾을 수 있는 줄 잊거나 모르지는 않을까요?


  《길귀신의 노래》(곽재구, 열림원, 2013)는 첫머리를 옛이야기로 엽니다. 글쓴이가 어릴 적에 교사한테 문득 터뜨린 말 한 마디하고 얽힌 이야기를 풀어내요. 곽재구 님은 ‘소설가’라는 꿈을 밝혔다고 합니다. 아름다운 이야기를 들려주어 아름다운 삶터로 가꾸는 길에 벗님이 되려고 하는 꿈이 있었다고 해요.


  길에 서면서 노래를 합니다. 이 길이 고된 길이 아니라 꿈길이라고 느끼면서 노래를 합니다. 길을 걸으며 노래를 합니다. 자동차 배기가스로 매캐하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끝없는 자동차 물결로 쩌렁쩌렁 시끄럽든 말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노래를 부르고, 스스로 이 길을 즐겁게 가꾸려는 꿈을 노래로 부릅니다.


  교과서보다는 시집하고 소설책을 등짐에 꾸린 글쓴이는 어느덧 일흔 살 가까이 글길을 걷습니다. 이녁이 걷는 글길이란 오늘도 어제와 같이 꿈길일까요? 스스로 아름답게 거듭나고 이웃이 아름답게 꿈꿀 수 있기를 바라는 길일까요?


  교과서를 손에서 내려놓고 시집하고 소설책을 손에 쥐는 푸름이가 늘어나기를, 시집하고 소설책을 손에 쥔 뒤에는 이 책도 내려놓고서 호미를 쥐는 푸름이가 늘어나기를, 이윽고 맨손 맨발로 맨흙을 밟으며 숲길을 달리는 푸름이가 늘어나기를 빕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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