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 서툰 사람들
박광수 지음 / 갤리온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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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뭘 해도 엉성해보여. 서툴러 보인다. 이런 말 주구장창 들어본 사람이라면 어떤 기분이 드는지 알까?  가끔은 억울하다. 난 그렇게 엉성하지도 서투르지도 않다. 보이는 것만 그렇게 보일뿐이야 라는 혼자만의 발악을 하기도 하면서 집어든 책이 박광수의 <참 서툰 사람들>이라는 책이다.  

심승현의 '파페포포' 책은 물론 박광수의 '광수생각' 모두 좋아한다.  짧고 이쁜 이야기들의 카툰집.  

<참 서툰 사람들>도 마찬가지로 술술 넘어가는 국수 면발 같이 쉽게 읽혀지는 책이다. 박광수 작가의 여전한 그림과 뭔가 달콤하고 따뜻한 이야기들도 여전하다. 그러나 별 하나 뺀 점은 조금 너무 쉽게 술술 넘어간다는 점이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이 작가의 매력인 것을... 

 왜 책을 읽으면서 나도 이런 비슷한 거 생각한 적 있었는데, 비슷한 글 낙서한 적 있었는데 하는그런 생각을 해봤다. 움베르트 에코처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작가도 있지만 사실 만만하게 와닿는 작가도 있다. 만만하게 와닿지만 감동을 받는 것, 그게 바로 작가의 힘이다.  

개인적으로는 '광수의 서툰 인생 이야기'라는 부분이 마음에 든다. 직접 찍은 사진과 짤막한 글들로 이루어져 있는데 자신의 이야기를 솔직하게 보여주는 거 같은 느낌? 그리고 '광수 왼손으로 그리고 왼손으로 생각하기' 라고 왼손으로 그린 그림과 인상적인 글 부분도 좋다.  

멀리서 바라보는 바다.   

바다를 처음 봐서인지 

저 멀리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가  

그저 생경하고 신기할 뿐입니다. 

호기심이 날 이곳까지 오게 만들었습니다. 

(...) 

'이 정도 경계선만 유지하면 되겠구나' 생각하며  

바닷가를 걷고 있을때  

내 신발을 젖게 만든 파도보다 훨씬 더 큰 파도가  

순식간에 내 허벅지까지 덮쳤습니다. 

나는 충격으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습니다. 

난 그 파도와 이내 사랑에 빠졌고, 그후 결혼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언제나처럼 아이를 품에 안고  

바닷가를 산책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행복한 걸음을 내딛고 있을 때  

어느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어 뒤를 돌아봤습니다. 

단 한 번도, 내 평생 한 번도 묵도한 적이 없는  

집채만한 파도가 나를 덮치려 하고 있었습니다. 

얼마쯤 지났을까. 

눈을 뜨고 정신을 차려보니 

나는 혼자 덩그러니 바다 한가운데에 있었습니다. 

나는 겁이 났습니다.  

어떻게든 육지로 가야겠다는 생각에  

죽을힘을 다해 헤엄치기 시작했습니다.  

재수가 좋다면 육지로,  

아니면 더 먼 바다로 갈 수 있는 상황에서 

방향을 잃고 말입니다. 

사랑이란 내가 가진 모든 것을 전복시키는 것,  

그것이 이 나이에 내가 느끼는 사랑입니다.  

조금 머리를 쉬게 하고 편안하게 읽을 수 있기를 바란다면 딱 좋다. 하지만 작가는 일반인들보다 좀 달라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읽고 나서 조금 허탈할 수 있으니 주의하길.

가끔 잘 넘어가는 국수가 땡기기도 하고, 어떨 때는 먹어보지 못한 이국적인 요리가 땡기기도 한 것처럼 책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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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삼관 매혈기
위화 지음, 최용만 옮김 / 푸른숲 / 200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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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가장 좋아하며 읽은 책은 뭔가요? 라고 물어본다면 나는 위화의 <허삼관 매혈기>라고 몇 번이고 말할 수 있다. 때로는 작가의  매력적인 문체, 지적인 수사, 독자가 미처 생각지 못한 반전들을 풀어내는 책들을 읽으면 반갑고 대단하다는 생각에 경외감을 느낀다.그러나 무엇보다도 나는 '휴머니즘'이 가장 좋다.  

인간으로 태어나 사람을 사랑하고, 인간에 대한 깊은 관심이 예술로서 탄생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 같다. 사람에 대한 속깊은 이해와 연민을 갖고 있는 작가를 꼽는다면 위화가 생각난다. 위화의 초기작 <가랑비 속의 외침>, 살아간다는 것만으로 충분히 위대할 수 있다는 <인생>, 그리고 삶의 고단함과 슬픔을 유머와 해학으로 풀어내는 <허삼관 매혈기>까지 모두 사랑한다. 

그러나 내가 <허삼관 매혈기>를 제일 먼저 읽어서 그런지, 아니면 불평등한 현실 속에서도 꿋꿋히 웃으며 평등을 부르짖는 허삼관의 캐릭터를 가장 가까이에 느껴서 그런지 몰라도 이 소설만큼 내 마음을 훔친 소설은 근래 6개월 이내에 감히 없었다. 

결혼을 하기 위해, 아들을 살리기 위해, 굶어가는 가족들을 위해, 삶의 중요한 순간순간마다 피를 팔아 살아가는 고단하고 가난한 한 중년 남자, 허삼관이 있다. 그러나 그는 울거나 짜증 내거나 세상을 향해 가래침을 뱉으며 불평불만하지 않는다. 그는 피를 팔고 돼지 간볶음 한접시랑 황주 두냥이면 마냥 세상이 행복하단다. 그리고 말한다.

제가 공장에서 일해 번 돈은 땀으로 번 돈이고, 오늘 번 돈은 피 흘려 번 돈이잖아요. 피 흘려 번 돈을 함부로 쓸 수는 없지요. 반드시 큰일에 써야죠. _33p

지긋지긋한 가난과 삶의 무게 속에서 허삼관의 아내 허옥란은 피를 팔아 매번 고비를 넘기는 허삼관을 바라보며 안쓰럽기만 하다. 아니 이 고생이 언제 끝날 수 있을까... 깊은 한숨만 나올뿐 이다.  

일락이, 이락이, 삼락이의 아버지 허삼관의 부성애는 따듯하고 지극하다. 특히 친아버지가 아니라는 소문이 돌아 마음 고생을 시킨 일락이에 대한 허삼관의 태도는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가슴을 찡하게 울리기도 한다.  

국수를 먹고 싶어 집을 나간 일락이를 찾은 허삼관은 "이 쪼그만 자식, 개 같은 자식, 밥통 같은 자식.... 오늘 완전히 날 미쳐 죽게 만들어놓고.... 가고 싶으면 가. 이 자식아. 사람들이 보면 내가 널 엽신여기고, 만날 욕하고, 두들겨 패고 그런 줄 알거 아니냐."고 투덜거린다. 그러나 그는 투덜거리면서도 일락이를 업고 승리반점을 향해 걸어간다.  "아버지, 우리 지금 국수 먹으러 가는 거예요?" 라고 물어보는 일락이를 향해 온화한 목소리로 대답한다."그래." 이 장면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이다.  

일락이를 향한 깊은 부성애는 동화 <마당을 나온 암탉>의 모성애와도 연관된다. 부성애, 모성애 모두 하나로 통한다. 바로 '사랑'이다. 이렇게 추운 날이면 떠오르는 사람, 가족이든 연인이든 가장 먼저 떠오르는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닐까 싶다. 사랑이야말로 이 지긋지긋한 가난도 삶의 무게도 잠시 쉬었다 갈 수 있는, 힘이 되어주는 원천이다.

허삼관에게는 허옥란에 대한 사랑과 그의 아들들에 대한 부성애가 삶을 지탱한다. 아니 그의 삶을 더욱 멋지게 완성시킨다. 피를 판다는 것에 초점을 맞추는게 아니라 삶의 현실안에서 살아가는 허삼관이라는 존재를 통해 나는 우리 현실 속의 이 시대의 아버지를 발견하고 그 안에서 내 모습을 본다.  

일락아, 오늘 네가 한 말 꼭 기억해둬라. 사람은 양심이 있어야 한다. 난 나중에 네가 나한테 뭘 해줄 거란 기대 안 한다. 그냥 네가 나한테, 내가 넷째 삼촌한테 느꼈던 감정만큼만 가져준다면 나는 그걸로 충분하다. 내가 늙어서 죽을 때, 그저 널 키운 걸 생각해서 가슴이 좀 복받치고, 눈물 몇 방울 흘려주면 난 그걸로 만족한다... _205p 

이제 예순이 된 노인 허삼관은 돈이 필요해서가 아닌 단순히 돼지간볶음과 황주 두잔에 대한 그리움을 갖고 피를 팔려고 찾아간다. 그러나 이제 나이 든 피는 필요없다고, 죽은 피라고 가구 칠감으로 딱 맞는다는 멸시와 모욕을 듣고 서러움이 복받친다. 나이들어 이제 내 피는 팔지도 못한다고 꺽꺽 울어대는 허삼관을 아들들은 이해 못하지만 허옥란은 이해를 하며 돼지간볶음을 사주며 같이 욕을 한다.  

"그 자식 피가 돼지 피지. 그 자식 피는 칠장이도 안 쓸걸.(중략) 삼락이보다도 어린자식이 감히 그렇게 말하다니, 우리가 삼락이를 낳았을 때 세상에 있지도 않았던 자식이 말이야. 이제 와서 감히 어느 면전이라고 으스대기는..."  

이 말을 들은 우리 허삼관은 마지막에도 날 웃긴다.  

"그런 걸 두고 좆 털이 눈썹보다 나기는 늦게 나도 자라기는 길게 자란다고 하는 거라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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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테일의 힘 - 작지만 강력한, 우리에게 부족한 1%는 무엇인가 디테일의 힘 1
왕중추 지음, 허유영 옮김 / 올림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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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적 어른들이나 선생님들이 꿈을 물어봤을 때 아이들은 흔히 과학자, 의사, 대통령과 같은 대답을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사람들은 꿈을 크게 가져야 하고, 큰 일을 해야 성공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평범한 일상 속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소시민'이라고 부르며 조금은 낮춰서 생각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하루키의 소설 '태엽감는 새'에서 작가의 사고관처럼 세계를 움직이는 게 반드시 큰 손이 아닌, 소시민들의 개인의 한 명, 한,명이 모여서 세계를 지탱한다는 생각에 동의한다. 이 책도 마찬가지이다. 디테일한 부분을 무시하지 말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세심하게 제 일을 다할때, 큰일은 자연스레 이룰 수 있다.

 사람들은 디테일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한다. 적당주의나 대충주의에 너무 쉽게 젖어 있다. 사실  나도  일을 할 때 디테일에 충실하지 못하고 넘어가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반성하고 돌아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디테일은 그렇게 만만하고 작고, 불필요하고,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디테일한 부분 하나 하나가 모여서 큰 결과를 낳는다. 작은 부분에 대한 불만들이 쌓여서 고객이 어떤 브랜드의 회사에 등을 돌린다. 마찬가지로 업무도 작은 부분에 대한 리스크들이 쌓여서 나중에 엄청난 결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이를테면 월마트의 성공과 케이마트의 파산 같은 경우도 결국은 디테일이 결정한 경우다. 먼저 월마트는 작은 마을부터 상권을 장악해 도시로 진출하는 방식을 택했으며 고객제일주의에 앞장섰다. 한 고객이  믹서를 사서 몇 번 쓰지도 않고 고장이 났다며 월마트로 찾아왔다. 월마트 직원은 곧 믹서를 새 것으로 교환해준 것은 물론, 믹서의 가격이 내렸다며 5달러를거슬러주는 친절을 베풀었다. 이러한 세심한 배려와 디테일한 요구에 귀 기울이는 자세는 월마트의 압도적인 승리로 나타날 수 밖에 없는 원인이다.   

 어떤 일이나 시스템이든 무수히 많이 세분화된 과정이 서로 얽혀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소홀해서는 안된다. 중국의 아오싱 로켓 발사가 실패로 끝난 것도 역시 디테일한 부분의 결함 때문이었다. 배전기에 알루미늄 물질 0.15밀리미터가 초과되어서 폭발로 이어진 경우다. 분업의 세분화와 전문화과 점점 더 심화되면서 관리도 이제는 점점 정밀한게 필요한 시대가 온 것이다.  

총리 노릇이 동네 이장 노릇보다 하기 낫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큰 오산이다. 직위가 높으면 그만큼 책임이 따르고, 책임이 크면 그만큼 걱정할 것도 많은 법이다. 게다가 책임과 직무를 다하지 못하면 자리를 온전히 지킬 수도 없다. 중요한 것은 작더라도 현재 자기 앞에 놓인 일을 제대로 처리하는 것이다. 성공이란 평범함 속에서 남다른 인내심을 발휘하는 사람에게 돌아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p.166~167

이 책은 사원, 관리자, 기업의 임원 등 모든 사람들이 한 번씩 읽어보아도 좋을 내용들을 외국의 각 기업의 실례를 들어서 알기 쉽게 풀어서 쓰고 있다. 겉으로 포장된 모습이나 규모가 아닌 그 내부를 찬찬히 들여다보고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문득 내가 하고 있는 일이 너무 작고 소소하게 느껴질 때 이 책을 읽으면 '그게 아니구나' 라는 자각으로 이어진다. 타성에 젖는 것을 막을 수 있도록 도와준다고 할까. 그래서 아주 뛰어나게 잘 쓴 책은 아닐지라도 읽기 쉽고 나에게 경각심을 일깨우기 때문에 내 책장에 꽂아놓고 가끔 다시 읽어보고 그렇는데 부담이 없다.

자신의 직업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작은 일이란 없다. 그리고 작고 간단한 일이라고 해도 하기 쉬운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일이라도 전력을 다하고 세심한 주의를 기울이는 노력이 필요하다.  (...) 옛말에 '닭 잡는 일에 어찌 소 잡는 칼을 쓰는가?' 라는 말이 있다. 작은 일을 경시하는 말이다. 하지만 나는 '닭을 잡을 때에도 반드시 소 잡는 칼을 쓰라'고 말하고 싶다. 작은 일이라도 많은 노력을 들여 세심하게 처리해야만 제대로 완수할 수 있는 것이다. -p.178~1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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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다니엘 글라타우어 지음, 김라합 옮김 / 문학동네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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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끔 책에 관한 다른 사람들의 리뷰들을 찾아서 읽을 때가 있다.

어떤 사람들이 어떤 이유를 가지고 각기 다른 책들을 권하고 좋아하는지 문득 궁금해지는 순간에는 다른 사람들의 글을 찬찬히 들여다 보는게 책을 읽는 것보다 더 즐거운 시간들도 있다.

이 책을 읽게 된 계기는 절대적으로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읽고 '아, 내가 읽음 정말 좋아하겠구나'라는 생각으로 읽게 된 경우다.  

 결론을 말하자면, 난 사실 그리 만족하진 못했다. 내가 생각하는 사랑은 결코 글로 지은 사랑이 아니다. 물론 그렇기 때문에  더 애틋하고 한없는 행복감을 안겨준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사랑은 결코 글이나 말이 아닌 눈빛이고, 행동이고, 몸이고, 실체이다.  

 존재 그 자체를 바로 마주보고 시작하는게 사랑이라고 생각한다.  

 굉장히 참신한 설정이다. 에미와 레오의 단 두 명의 인물이 서로를 만나지 않고 이메일로만 전적으로 서로에 대한 사랑을 키워 나가는 이야기가 줄거리이다.  

에미의 빠르며 정열적인 문체를 따라가다 보면 서른 두 살의 매력적인 여자가 그려진다. 레오의 지적이며 논리적인 문체는 차분하면서도 내면에 깊은 애정을 감추고 있는 남자가 연상된다.  

 사랑의 시작은 똑같다. 존재에 대한 관심에서부터 되는 것!

 저로 말하자면... 음, 그러니까, 이제부터 고백입니다. 저는 에미, 당신에게 미친 듯이 관심을 느낍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럴 만한 계기가 분명히 있었다는 것은 압니다. 또한 이 관심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것인지도 압니다. 당신이 어떻게 생겼든, 나이가 몇이든, 그 무시할 수 없는 당신 이메일의 매력을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실제 만남에서 얼마만큼 보여주든, 글에서 묻어나는 재치가 당신 성대, 눈동자, 입 꼬리와 콧잔등에도 배어 있든, 이런 걸 다 떠나서 우리의 만남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을 겁니다.  _p.34 

상대에 대한 호기심은 결국 만나고 싶은 욕망으로 이어지게 마련이다. 레오와 에미도 마찬가지로 서로가 서로를 알아볼 수 있는지에 관해 이야기하다 결국 일요일 오후 후버 카페에서 만나기로 결정한다. 서로 아는 척 안하고 누군지에 관해 짐작만 하기로 약속한 상태, 그리고 이어지는 이메일의 내용은 이제 서로의 현실에 조금씩 다가오기 시작한다.

남편한테 아쉬운 게 뭡니까? 

없어요, 전혀 왜 제가 남편한테 아쉬운 게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당신이 나한테서 무언가를 원한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방식에서 그걸 읽었어요. 당신이 나한테서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나를 만나고 난 다음에야 말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당신이 무언가를 원한다는 사실만은 자명합니다. 달리 말하면 당신은 뭔가를 찾고 있는 겁니다. 그걸 모험이라고 합시다. 모험을 찾는 사람은 정작 모험을 하지는 못합니다. 맞죠?

행복한 결혼생활, 완벽한 배우자를 곁에 두고도 에미는 이메일 안의 레오를 통해 자신의 에미라는 존재에 대해 눈을 뜨게 된다. 이제 막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의 공통적인 약간 들뜨고 몽롱한 상태로 항상 레오의 이메일을 기다리고 그의 이메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  

에미는 북풍이 불면 잠이 안온다며 레오에게 이메일을 보내며 그리워하고 간절함은 더욱 치닫는 듯 하다. 그러나 정작 레오와의 만남에서 물러서는 건 에미이다. 블라인드 속에 사랑의 달콤함이 깨지는 것이 두려운 걸까? 아니면 자신의 이메일 안의 레오를 현실의 레오보다 더 사랑하게 되버린 걸 까? 결국 만남으로 이어지지 못하는 둘의 모습은 안타깝고 나중에는 '이게 뭐야'라는 약간의 허탈감도 느껴진다.  

 레오,무슨 일인가가 일어났어요. 제 감정이 모니터를 벗어난거예요. 전 당신을 사랑해요. 그리고 베른하르트는 그걸 알아차렸어요. 추워요.북풍이 불어오고 있어요. 이제 우리 어떡하죠?

만나지 못하는 공간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에미와 레오가 풀어내는 사랑의 언어는 풍요롭고 충만하고 아름답다. 그러나 아름다운 게 꼭 마음에 와닿는 건 아니다. 오히려 베른하르트의 간곡한 이메일이 마음을 울린다.  

제가 드리려는 부탁은 이렇습니다. 라이케씨, 제 아내를 만나주십시오! 이 소동에 종지부를 찍을 수 있도록 이제 제발 아내를 만나주십시오!  

라이케씨, 당신은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존재입니다. 만질 수 없고, 따라서 실재하는 존재가 아닙니다. 당신은 제 아내의 환상이 만들어낸 존재일 뿐이지요. 한없는 행복감, 세상과의 절연 상태에 기인하는 몽롱함, 글로 지은 사랑의 유토피아.... 이런 것들이 만들어낸 환상 말입니다. 저는 그걸 막을 힘이 없습니다.  

독일의 독특한 로맨스 소설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 는 감성을 자극하는 서정적인 분위기가 안개처럼 자욱한 책이다. 그러나 안개를 걷어 올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게 더 맑고 선명하다.  가까이에서 바라보는 것, 뒤에서 숨는 게 아니라 앞에서 서로 손을 잡고 시작하고 싶다. 블라인드 사랑은 이제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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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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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구가 이 책을 선물해 줬을 때 기뻤다. 읽고 싶다고 생각하던 책이 이렇게 내 손으로 쏙 들어올 때 나는 감사하고 책과도 분명 인연이 있는 거라고 믿고 싶다. 어렸을 적에도 이상 문학상이나 동인 문학상 같은 문학상 작품집에 '김연수' 라는 이름을 한번쯤은 꼭 봤던 기억이 난다. 2009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에도 <산책하는 이들의 다섯 가지 즐거움>이라는 단편을 읽었었고 작가의 문체가 시적이고 유려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용은 풀지 못하는 수학 문제처럼 나에게 남겨졌다.

 이번 <세계의 끝 여자친구>는 그의 9편의 중단편을 모은 소설집이다. 쉽게 읽히는 내용은 분명히 아니었다. 하지만 중독성이 있어서 읽고 또 읽고 싶게끔 만드는 힘이 강하다. 특히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이라는 단편과 '내겐 휴가가 필요해', '달로 간 코미디언' 세 작품을 통해 작가가 독자에게 손을 내밀고 소통하고자 하는 의지가 와닿았다고 할까. 그러나 다른 단편들도 너무 잘 써서 나는 이 책을 읽고 결심했다. 이 작가의 다른 장편 소설들도 꼭 읽어보고 싶다고. 그만큼 난 <세계의 끝 여자친구>가 좋다.  

 책을 처음 본 소감은 기획력에 조금(?) 감탄했다. 표지는 분홍색 바탕에 사막 한가운데에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는 여자의 옆 모습이 무언가 상상력과 구매 욕구를 자극했으며, 이는 여자의 얼굴이 보이지 않아 더 궁금하고 호기심을 자극했다. 더구나 책 제목은 시 제목같기도 하고 또는 사랑 이야기가 연상되기도 하는 <세계의 끝 여자친구>란다. 그러나 그 속에 담긴 알맹이, 이야기, 스토리는 더 나를 감동시켰다. 뜨겁고, 뜨겁고, 뜨거운 감동이다. 물론 적어도 나라는 사람한테는 그렇다. 죽음이나 누군가의 부재, 사랑의 상실, 세계가 흔들리는 아픔을 겪었던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에서 여자는 엄마가 고통속에 죽어갈 때 자신이 그 고통을 이해할 수 없었다는, 같이 공감할 수 없었다는 것에 상처를 받는다.  

전적으로 개인적인 고통. 엄마가 죽던 그 순간까지 나는 정신을 잃은 엄마의 손을 어루만지며 침이 마르도록 사랑한다고 말했으나, 그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는 엄마의 고통만은 이해할 수 없었다. 고통보다는 죽음이 이해하기 더 쉬운 모양인지, 막상 엄마가 숨을 거둔 뒤에는 그간 병상에 누워 있던 엄마와의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_177p 

엄마의 육신이 점점 식어가던 그 날 오후 여자는 구름이 낮게 깔린 하늘로 붉은 노을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노을을 바라보며 "이상한 노을이다. 그치?" 라고 소리친다. 하지만 남편과 오빠는 그녀가 본 노을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런 순간이 있다. 내가 본 슬픔과 감정과 기억, 추억들이 투영된 풍경들을 다른 사람들은 같이 바라보지 못한다. 그 순간이 그렇게 고독하고 외롭고 쓸쓸할 수가 없다. 고통과 마찬가지로 슬픔도 함께할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에 여자는 더 깊은 절망에 빠진다.   

그러다 자신이 바라 본 슬픔처럼, 너울거리는 붉은 빛을 찍은 '흑두루미와 함께한 날의 노을 시리즈'라는 사진을 발견하게 된다. 누군가 자기와 본 것과 같은 노을을 봤다는 사실은 분명 충격이자 위안이자 온 존재가 떨릴 만큼 놀라운 일이다. 그리고 그 사진작가의 일생에 관한 이야기, 평전을 써보고자 마음 먹고 그의 사진집은 물론 인터뷰, 그의 행적을 따라가 본다.  

"저는 많은 것을 기억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많은 것을 망각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습니다."라고 말하는 사진작가의 슬픔을 이해하기 위해. 일본 후쿠오카 공항까지 간 그녀는 김경석을 만나 흑두루미를 바라보며 사진작가에 관해 듣는다,

그날 본 노을을 자신은 평생 잊을 수 없다고 하더라구요. 왜 그런지는 애기하지 않았어요. 제 말이 별 도움이 되지 않았죠? 아니요. 계속 얘기해봐요. 그리고 여기 와서 그 사람이 어떻게 했어요? 내가 김경석씨에게 다그쳤다. 해가 질 때까지, 둘이서 기다렸어요. 저기쯤인가? _197p  

 여자는 그가 찍고자 했던 사진들 속의 친구와 가족들, 그리고 그의 말을 빌리자면 '평생 잊지 못할 노을'을 이해한다. 노을을 기다리며. 다시 집으로 날아가는 새들을 기다리며 소설은 끝난다. 그의 다른 단편들도 마찬가지로 결말은 항상 확실한 결말을 던지지 않고 끝난다. 그 다음에는 어떻게 흘러갈까. 독자가 남은 상상력으로 마침표를 찍는 기분처럼 나는 그렇게 소설을 하나씩 하나씩 몸이 떨리는 감동으로 마침표와 쉼표를 찍으며 읽었다.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 너는 상상하는 대로 세계를 볼 수 있어'라고 되뇌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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