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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직 필름이 남아 있을 때 - <스트로보> 개정판
심포 유이치 지음, 권일영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7년 9월
평점 :
품절
어린 시절 사진에 관심을 좀 가져본 사람이라면 사진작가의 삶을 자세히 꿈꿨을 겁니다.
새로운 도시를 간다던가, 자연이 펼쳐진 아프리카로 떠난다던가, 전쟁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소식을 전하는 종군기자를 떠올린다던가. 그러나 현실은 사진으로 밥 벌어 먹기
위해 모델들의 가식적인 모습을 찍을 수 밖에 없고, 내가 원하는 피사체가 아니라 누군가
정해주는 것만을 찍을 수 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그래서 자신의 재능의 유무는 상관없이 그 길로 나갈 자신이 들지 않는, 험한 길인 것도
같습니다. 이 책은 '스트로보'라는 제목으로 출간했던 심포 유이치 책을 재출간한 사진
작가에 관련된 이야기입니다. '포토그래퍼'라는 단어를 요즘은 많이 쓰지만, 왠지 50대
의 주인공에게는 '사진작가'란 표현이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제겐 심포 유이치의 책으론 처음 읽는 것인데 약력을 보니 꽤나 화려하네요. 에도가와
란포 상으로 대뷔하여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요시카와 에이지 문학 신인상, 야마모토
슈고로 상, 일본 추리작가협회 상을 수상했고 이 책으로 나오키상 최종 후보에 올랐다고
합니다만 나오키상과 인연은 아직 없는 것 같습니다. 다 읽고 그의 약력을 보니 충분히
공감이 가고 되려 나오키상을 못받은 것이 이상할 정도 였습니다.
123회 나오키상은 가네시로 카즈키의 'Go'와 국내미출간 작품인 후나토 요이치의
'무지개 골짜기의 5월'이 공동수상했는데 후자는 읽어보질 못해서 모르겠는데 'Go'
에 비하면 이 작품이 더 낫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Go'가 수상한 것은 시대의
교포들의 삶을 반영하고 있는 면 때문이겠지요.
다섯 개의 장으로 구성되어 있고 배치를 거꾸로 해놨습니다. 5장 부터 시작하고 시간의
순서도 역순입니다. 50세, 42세, 37세, 31세, 22세 순입니다. 살짝 추리적인 요소도
포함하고 있습니다. 흔히 20대의 정열로부터 시작해서 테크닉이 늘고 대신 새로움은
없어지는 50대로 차근히 진행되는 성장 소설같은 패턴을 갖거나 혹은 아예 타임슬립
하듯이 회상하는 것처럼 현재와 과거를 넘나는 시간적 패턴을 갖는 소설이 많은 편일
겁니다.
이 소설은 역순으로 배열함으로써 단순히 역순 배치가 아니라 신기하게도 50세에서
이 사진 작가의 열정을 볼 수가 있습니다. 첫장부터 세번째 장까지만 이 소설이 있었다면
단순히 성공한 사진작가의 부인 속썩이는 내용이 되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몇번의 부인 이외의 여자들이 이야기에 등장하면서 너무 당연한듯 쓰여지는 것에
놀랐고, 사진계나 기자계의 현실인가 하면서 괜히 일반화의 오류를 범하기도 했지만,
그런 씁쓸한 내용이 전부인 것만 같았습니다.
정작 불륜에 대한 문제는 전혀 아무렇지도 않고 사진을 위해 애인이 떠나는 걸 참고
부인을 모른척한다는 패턴이 질릴 정도였으니까요. 그럴 땐 과감히 별을 확 빼버리며
평가를 하는 편인데 그런 기분 나쁜, 개인적 취향과 반대되는 이야기를 읽으면서도
이 소설에 별을 다섯 개 매긴 것은 다른 곳에 있습니다.
광고 업계에서 어느 정도 이름이 있고 심지어 새로운 것을 찍을 줄 모르는 나이 든
사진 작가가 되어 가고 있어도 그는 피사체를 찍기 위해 달리는 사람이고 싶다는
점입니다. 안주해도 될 위치이고, 안주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50세의
이야기에서 비를 맞으며 뜁니다. 수많은 렌즈와 카메라들을 둘러매 힘이 들어
한 카메라만을 챙기면서 '사진작가'이고 싶은 주인공.
영정 사진을 찍어주면서 옛 동료의 사랑을 떠올리며 회상하고 부인을 그렇게
속 썩이면서 다른 사람을 만났어도, 그 부인과 헤어진다면 함께 해 온 자신의
세월을 버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이 이야기의 처음에 놓여있는 에피소드
지만 책을 다 읽고 그 부분을 읽으면 이 주인공 기타카와가 얼마나 부인을
사랑하는지는 느끼게 됩니다. 마치 그 느낌이 너무 새로울 정도입니다.
그에게 사진은 단순히 찍는 행위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에 부인에게 영정
사진을 맡긴다는 것은 많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그의 42세는 예전에 만났던 하루미의 죽음을 통해 전개 됩니다. 자신을 이용
했다고 생각한 제자는 자신을 버리고 또 다른 남자를 버리고 그들을 이용해서
더 넓은 세계로 갔다는 사실이 불쾌했는데 사실 그는 그것을 불쾌해한 것이
아니라 그녀의 타고난 재능과 끊임없이 도전하고자 하는 그 열망이 부러움을
인정하지 않은 부분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 그녀에게 마지막으로 해줄 수 있는 일은 자신이 마지막 필름들을 현상
해서 책으로 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라고 부인의 가슴에 못을 박으면서도
그는 그것이 사랑이나 애정의 문제가 아닌 도의라고 생각하는 것 같은 이상한
동료 의식도 있습니다.
그리고 37세에는 모델과의 사진을 찍어 돈을 빌려달라고 하는 옛 스승이
등장합니다. 그의 그런 행동은 구차하거나 불쌍한 것이 아닌, 기타카와의
미래 모습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는 그토록 싫어했던 스승의 모습을 자신이
밟아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서 42세 때의 이야기를 보면 별로 달라
진 것 같지 않지요.
31세때의 이야기는 독립을 하기 전의 모습입니다. 대형 출판사를 다니면서
이대로 안주하여 기사에 맞는 사진만을 찍을 것인가, 아니면 독립을 할
기반을 마련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던 시절. 기타카와 역시 그러했고
어떻게 찍느냐에 관해서 고심하던 때입니다. 이 때는 결혼 전으로
회사에서 만났던 선배가 있었는데 그녀가 자신을 생각해서 그토록 냉정하게
사진을 제대로 찍는 것을 밀어붙였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던 뒷
이야기가 참 씁쓸했습니다.
이 때 부인을 우연히 만나게 되면서 그녀의 사진을 보며 많은 생각을
하게 되어, 둘은 결혼에 이른 것 같습니다. 어떻게 사진을 찍게 되었냐는
그녀의 질문에 마치 회상처럼 마지막 22살의 이야기가 전개 됩니다.
1969년의 이야기인데 학생운동이 강하던 시절인 것 같습니다.
기타카와는 빨리 학교를 그만두고 아르바이트로 실무를 익혔는데
친구 구즈하라는 학생 운동 사진을 찍다가 어느 샌가 그 중심에
서게되고 이상한 행동을 하다가 결국 죽고 맙니다. 그가 남긴 카메라를
받아들고 이상해서 수소문을 하다보니 그의 죽음을 접합니다. 그래서
왜 그가 죽었는지 알아보러 다니는 이야기입니다.
구즈하라에게 사진이란 정말 큰 의미였던 것 같습니다. 그는 살아온
발자취를 담고 싶어했고, 그것을 하지 못하게 되었기에 좀 더 강한
발자취를 찍고 싶어했습니다. 그리고 제대로 그것을 써 줄 친구에게
카메라를 보냈습니다.
기타카와에게 이 마지막 일화가 없었다면 그는 그저 평범한 사진작가
의 이미지로 기억되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구즈하라란 친구의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그가 간혹 타성에 젖은 사진 작가 모습을
하고 있더라도 그의 사진은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부인에게 자신의 영정 사진을 맡긴다던 이야기도 이 부분을
읽고나니 더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에게 사진이란 자신의 인생을 담아온 모든 것입니다. 그래서
부족한 시절도 있었고, 큰 세계를 찍지 못한 것에 대한 질투도
있었고, 부인을 힘들게 했던 시절도, 부끄러운 짓을 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비로소 자신의 삶으로 모든 것이 모아지기에 그런
사진에 더 애정을 갖고 20대와 다른 열정을 품을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요즘은 디지털 카메라의 보급으로 인해서 사진이 너무 친숙해져 있고
예전 필름 카메라 시절만큼 비용도 많이 들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많은
낭비되는 사진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순간의 장면이 모여서
한 사람의 추억을 이루는 것은 그 때와 다른 것이 없겠지요.
단지 사진을 담으려는 행위로 추억을 정리하는 것보다 좀 더 가슴에
담아두는 순간을 기억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원제 : 스트로보)
Sutorobo 2000
랜덤하우스코리아(주)
초판 1쇄 발행 2007년 9월 27일
권일영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