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12-202305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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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을 연마하려고 돼지국밥을 먹으러 간다

그것도 모자라 정구지 마늘 새우젓이 있다

푸른 물 뚝뚝 흐르는 도장을 찍으러 간다

히죽이 웃고 있는 돼지 대가리를 만나러 간다

돼지국밥에는 쉰내 나는 야성이 있다

어디 그뿐인가 시장바닥은 곳곳에 야성을 심어 놓고 파는 곳

그 따위 현혹되지 않고 오로지 야성만을 연마하기 위해

일념으로 일념으로 돼지국밥을 밀고 나간다

둥둥 떠다니는 기름 같은 것

그래도 남은 몇 가닥 털오라기 같은 것

비계나 껍데기 같은 것

땀 뻘뻘 흘리며 와서 돼지국밥은 히죽이 웃고 있다

목 따는 야성에 취해 나도 히죽이 웃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면 마늘 양파 정구지가 있다

눈물 찔끔 나도록 야성은 시장바닥 곳곳에 풀어 놓은 것

히죽이 웃는 대가리에서 야성을 캐다

홀로 돼지국밥을 먹는 이마에서 야성은 빛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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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에도 선생님들은 바쁘셨지요?

 

밀린 일하느라 출근도 하시고,

다른 학교로 출장 가서 수업도 하시고,

결혼도 하시고,

결혼하는 동료를 축하하러 가시고,

서울에 집회하러 다녀오시고,

가족들과 함께 나들이도 하시고,

운동도 하시고,

이번 주 수업 준비도 하시고……

꽉 채운 지난 일주일, 모두 수고하셨습니다.

 

5월도 벌써 20일을 넘어가는 이 즈음은,

조금은 안온한 일상에 스며들기 좋은 날입니다.

그래서 이번 주는,

치열하게 살다가 5월 하늘의 별이 된,

소설가 박경리, 작가 권정생, 그리고 바보 노무현을 떠올리며

일상에 무뎌진 우리의 야성을 벼려도 좋을 것 같습니다.

 

이번 주는 아무래도 시장에서 돼지국밥, 한 그릇 해야 할까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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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11-2023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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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에 출석부 들고 교실에 들어서면

인상 쓸 일 수두룩하다

앉아라 줄 맞춰라 휴지 좀 주워라

수희 나영이 지각이구나

이슬인 오늘도 결석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째려보고

전달사항 몇 개 툭 던져두고 나오면

아이들 몇 명 쭐래쭐래 따라 나오며

선생님 오늘 야자 빠져야 해요

치과 가야 해요 생리통이 심해요

학원 보충 있어요 엄마 생신이에요

알았어 알았어 점심시간에 내려와

교직 이십년 의욕도 열정도 시들해진 담임 생활

올해 애들은 유난히 천방지축이야 투덜대지만

생각해보면 마음으로 미운 놈 하나 없다

작년 처음 만나 일주일에 두어 시간 수업할 땐

저기 몇 놈들 정말 고운 구석 없이 밉상이더니

담임 맡은 올해 사흘 걸러 지각하고 결석하는 놈도

온 교실 제멋대로 어지르고 다니는 놈도

수업시간 꾸벅꾸벅 잠만 자는 놈도

곁에 와서 뭐라 뭐라 몇 마디 나누다 보면

마음 풀어진다 잔소리하다가도 픽, 웃음 나온다

속속들이 들여다보면 그 녀석들

지각하고 결석하고 농땡이 칠 만한 딱하고 아픈 사정

모르는 척 쌀쌀하게 나무랄 수만 없다

아이들 처음 만나면 그놈이 그놈 같이 보이다가

차츰 얼굴이 보이고 수업 태도 성적도 따지다가

한 일년 아침저녁으로 부대끼다 보면

몇 겹의 옷 안에 가렸던 본디 맨살 드러난다

멀고 아련한 풍경 아니다 사랑은

풀썩이는 먼지 마시며 동거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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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에는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풀썩이는 먼지 마시며 동거하는 일 마다하지 않으시는

훌륭한 선생님이 많이시지요.

 

저는 아직도 아이들이 썩 예뻐 보이지만은 않는 걸 보면,

아이들에게 더 다가가지 못했구나, 하는 생각을 자주 합니다.

아이들의 아픈 맨살을 보듬어 주는 선생님을 보면 부끄럽지만,

그분들 덕분에 저도 옆에서 조금이라도 배우고 있으니

이 시간이 지나면 조금 더 좋은 교사가 되리라는 희망도 생깁니다.

 

저는,

배우고 싶고, 닮고 싶은 선생님이 많은 학교라서

우리 학교가 참 좋은 학교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선생님'이신 모든 선생님들께 고맙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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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10-2023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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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두 마리의 두꺼비를 키우셨다

 

해가 말끔하게 떨어진 후에야 퇴근하셨던 아버지는 두꺼비부터 씻겨 주고 늦은 식사를 했다 동물 애호가도 아닌 아버지가 녀석에게만 관심을 갖는 것 같아 나는 녀석을 시샘했었다 한번은 아버지가 녀석을 껴안고 주무시는 모습을 보았는데 기회는 이때다 싶어서 살짝 만져 보았다 그런데 녀석이 독을 뿜어내는 통에 내 양 눈이 한동안 충혈되어야 했다 아버지, 저는 두꺼비가 싫어요

 

아버지는 이윽고 식구들에게 두꺼비를 보여주는 것조차 꺼리셨다 칠순을 바라보던 아버지는 날이 새기 전에 막일판으로 나가셨는데 그때마다 잠들어 있던 녀석을 깨워 자전거 손잡이에 올려놓고 페달을 밟았다

 

두껍아 두껍아 헌집 줄게 새집 다오

 

아버지는 지난겨울, 두꺼비집을 지으셨다 두꺼비와 아버지는 그 집에서 긴 겨울잠에 들어갔다 봄이 지났으나 잔디만 깨어났다

 

내 아버지 양 손엔 우툴두툴한 두꺼비가 살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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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두 손에 두꺼비를 키우셨다는데,

그런 아버지와 함께 사는 어머니의 손에는 아마도 거북이가 살았겠지요?

 

저도 부모님의 두꺼비와 거북이 덕분에 저는 잘 먹고, 잘 입고, 잘 컸는데,

어릴 때는 그 두꺼비와 거북이가 왜 그리 싫었던가 모르겠습니다.

 

이번 주는 집안의 두꺼비와 거북이가 잘 살고 있나 잘 살펴보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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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09-2023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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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교시 끝난 쉬는 시간에 학교 온 민수

4교시 내내 엎드려 잔다

자려고 왔냐?

옆구리 쿡 찔렀더니

오늘 급식 돈가스잖아

 

4교시 끝나 갈 때 쓱 들어온 준식이

오늘 급식 돈가스라며?

헤벌쭉 웃는다

 

민수랑 준식인

툭하면 지각생

뻑하면 결석생

우리 반 맡아 놓은 꼴찌와 꼴찌서 두 번째

맛난 급식 나올 때만 학교 온다

 

쟤들은 숙제가 뭔지도 모르면서

급식 메뉴는 어떻게 저렇게 잘 아냐?

돈가스를 우적거리며 창대가 묻는다

 

것도 모르냐, 짜샤?

담임이 전화로 알려주잖아

졸업장이라도 받게 하려고

담임이 무지 애쓰는 거 모르냐, 짜샤?

꼴찌에서 세 번째인 나도 오늘

담임 전화 받고 왔다

돈가스 먹으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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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들이 졸업하는 데는 맛있는 급식 노동도 필요하고,

담임선생님의 전화 노동도 필요하군요.

 

학교 안팎에서,

보이는 곳,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우리 아이들의 배움과 성장을 위해

학교 노동자들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오늘은 메이데이(May Day)!

오늘, 일하러 나와서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노동자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보내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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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08-202304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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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있는 것은 흔들리면서

튼튼한 줄기를 얻고

잎은 흔들려서 스스로

살아있는 몸인 것을 증명한다

 

바람은 오늘도 분다

수많은 잎은 제각기

몸을 엮는 하루를 가누고

들판의 슬픔 하나 들판의 고독 하나

들판의 고통 하나도

다른 곳에서 바람에 쏠리며

자기를 헤집고 있다

 

피하지 마라

빈들에 가서 깨닫는 그것

우리가 늘 흔들리고 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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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우리가 흔들리는 것을 느끼고 있다면,

지금 우리가 위태로움에 대해 생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여전히 살아있음을

아직은 건강함의 징후를 보여주고 있다고 믿습니다.

 

지난 한 주도 고생 많으셨습니다.

짧은 쉼표 같은 시험 기간 한 주, 모두 행복하게 지내시기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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