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
올리버 색스 지음, 조석현 옮김, 이정호 그림 / 알마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다고? 이게 뭔 말이래?"



처음 이 책이 출간되었을때 제목을 보고 어이없다고 여겼다. 대체 '아내'라는 존재를 얼마나, 어떻게 여겼기에 평생 함께 살아갈 반려자인 아내를 외출할 때 머리에 쓰는 일상용품인 모자쯤으로 여기나 생각했다. 



하지만 우연히 보게 된 미국드라마에서 의문의 실마리를 발견했다. 어떤 남자가 한 의사에게 진료를 받기 위해 찾아왔는데 그 남자가 매번 의사의 머리에 모자를 툭 올리는 것이었다. 마치 집에 들어오자마자 착용했던 윗옷과 모자를 옷걸이에 걸어두는 것처럼. 그러기를 몇 번 반복하자 의사는 남자에게 당신의 뇌에 이상이 있다고 얘기하는데 그걸 보는 순간, 아하!했다. 그 책이 말한 것이 바로 저것이었어!! 



궁금하거나 호기심이 생긴 책은 당장 구입해야 직성이 풀리는 난 호기롭게 책을 구입했다. 하지만 초반 몇 장을 읽다가 덮은 이후로, 오래도록 책은 책장 한켠에서, 높게 쌓은 책탑 무더기에 갇혀 있었다. 



대체 '병의 본질'이라든가 '새로운 병'이란 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일까?



올리버 색스의 책은 뇌와 음악에 대해 다룬 <뮤지코필리아>, 저자 자신은 물론 편두통을 앓는 사람들을 위해 썼다는 <편두통> 이후 오랜만에 만났다.



신경학자이자 의사인 저자는 오래도록 인간이 병 없이 살아갈 수는 없을까? 의문을 가졌다. 병으로 고통받는 수없이 많은 환자들을 만나면서 그는 환자가 환자이기 이전에 자신과 똑같은 살아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들의 아픔에 진심으로 공감하고 어떻게 하면 고통을 덜어줄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된다.



<아내를 모자로 착각한 남자>는 뇌 혹은 신경에 크고 작은 이상으로 인해 일상생활이 힘들어져서 때로 기관이나 병원에 격리된 사람들을 만나 그들을 면밀하게 관찰하면서 써내려간 기록이다. 때문에 본문 곳곳에서 인간의 '뇌'와 관련된 전문용어를 심심찮게 만나게 된다. 첨엔 대체 무슨 의미지? 궁금해서 검색하는 정성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가뿐하게 '패스'하는 요령을 터득했다. 뇌부위의 명칭이나 호르몬까지 일일이 체크하다가는 또다시 책을 덮어버릴 것 같았으니까.



신경학에서는 '결손'이라는 개념을 즐겨 사용한다. '결손'은 어떠한 기능장애에 대해서도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신경학 용어이다. 기능은 정상 아니면 비정상 두 가지 가운데 어느 하나이다.



소설처럼 흥미진진하지도, 에세이처럼 정돈된 문장으로 마음을 다독이는 것도 아닌 글. 뇌의 여러 병증을 정리한 보고서를 일종의 에세이처럼 적어나간 글을 매일 조금씩 읽어갔다. 인간의 뇌에 대해 알게 된다는 기대나 흥미보다 이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된 병증이 너무나 많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노화로 인한 치매부터 뇌경색, 사회적으로도 논란이 되고 있는 정신질병 외에도 너무나 많은 병증이 있고 그로 인해 고통을 받는 사람들도 그만큼 많다는 게 충격적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때에 따라 '병증을 가진 사람'이라기보다 그저 행동이 평범한 우리에 비해 조금 '독특하고' 조금 '다른' 사람들일뿐이라는 점에 마음이 복잡해졌다. 



우리는 환자의 결함에 너무 많은 주의를 기울였던 것이다. 그래서 변화하지 않는, 상실되지 않고 남아있는 능력을 거의 간과했다.



그들은 정말 그렇게 희귀한 존재일까? 아니면 우리가 단지 무심하게 지나쳤을 뿐일까?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장애인 특수학교 설립을 간청하기 위해 그 부모들이 설립을 반대하는 지역 주민들에게 무릎을 꿇었던 장면이 생각났다. 



뇌의 병증으로 인해 소소한 일상을 이어가기 힘든 사람들, 부모나 가족이 아니면 제대로 보살핌 받지 못하고 외딴섬처럼 살아야 하는 사람들을 언제까지 그들 부모와 가족만의 책임이라고 할 것인가. 그들 역시 인간이기에 이제 우리 사회가 어떻게 보듬을 수 있을지 깊이 고민해봐야 하지 않을까.



그는 능력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해심이 아주 깊은 사람이 그를 고용해서 정성스럽게 지도하지 않으면,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낯선 자의 일기
엘리 그리피스 지음, 박현주 옮김 / 나무옆의자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리스릴러 소설, 정말 좋아합니다. 추리소설을 읽기 시작한 건 초등학생때입니다. 셜록홈즈와 루팡에 매료된 후로 아가사 크리스티, 앨러리 퀸,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섭렵했고 성인이 되어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우타노 쇼고, 스티그 라르손, 요 네스뵈, 존 르 카레, 마이클 코넬리, 헬렌 코벤...국적을 가리지 않고 마구 읽어댔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 인문서적을 읽으면서 예전만큼 추리스릴러물을 즐기진 못하고 있는데요. 그럼 관심이 완전히 사라졌느냐 그건 또 아닙니다. 수시로 서점의 신간 코너를 보면서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나 흥미로운 책을 메모해두곤 하는데요.


 

얼마전엔 표지가 아주 인상적인 책을 봤습니다. 붉은 보름달이 뜬 깊은 밤에 이층집이 그려져 있는데요. 2층 방에 켜진 전등 불빛과 양옆의 어둠, 책상 의자가 순간적으로 투구를 쓴 무사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그 집을 감시하기라도 하듯 정체를 감추고 있는 검은 그림자 넷과 그 집을 향해 털을 잔뜩 곤두세우고 울부짖는 덩치 큰 개(?) 한 마리. 대체 저 이층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거기다 에드거 상 수상작’ ‘빼어난 고딕 스릴러와 같은 띠지의 문구가 더해지니 안 읽을 수가 없더군요.


 

괜찮으시면,” 낯선 사람이 말했다.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고 싶소.” - 11

 


<낯선 자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떤 남자가 기차여행 중에 만난 이에게 자신의 젊은 시절 얘기를 해주겠다며 말문을 여는데요. 이야기가 막 흥미로워지기 시작하자마자 금방 끊기고 맙니다. 문예창작반 수업을 위해 낯선 사람이란 작품의 도입부로 선생과 학생들은 질문과 답변, 유추하면서 대화를 이어가는데요. 공교롭게도 낯선 사람을 쓴 R.M.홀랜드의 집이 바로 그 학교 건물이었고 수업을 진행한 선생은 그 홀랜드의 전기를 집필 중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곧이어 그 선생, 클레어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같은 학교 동료이자 절친인 엘라가 살해당했다는 것. 어때요, 이것만으로도 예사롭지 않지요? 홀랜드의 생전 집이자 학교에 감춰진 비밀은 없는지, 엘라는 무슨 이유로 살해당했는지, 이런 모든 일이 클레어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건지. 풀어야 할 의문, 속된 말로 떡밥이 한두 개가 아닌 거죠.


 

살인사건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하는 건? 피해자의 주변 인물 탐문부터 하지요. <낯선 자의 일기>도 마찬가집니다. 엘라에게 불쑥 두 명의 형사(하빈더 카우어와 닐 윈스턴)가 찾아옵니다. 젊고 체구는 작지만 강한 카리스마의 하빈더는 클레어에게 엘라에 대해 묻는데요. 형식적인 것 같은 질문 속에 사건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하빈더와 다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클레어. 하빈더는 이런 클레어에게 반감을 갖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엘라의 페이스북에 있는 ‘C는 알고 있다는 글과 시체에서 발견된 쪽지에서 템페스트의 인용구 지옥은 비었다.”는 모두 클레어에게 의심의 눈초리로 향하게 했는데요. 뚜렷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건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시간만 흐르던 어느 날, 클레어는 자신의 일기장에서 낯선 필체의 글을 발견합니다. 안녕, 클레어. 당신은 나를 모르죠.’

 


소설은 클레어와 하빈더, 그리고 클레어의 딸 조지아 세 명이 차례로 주된 화자가 되어 진행됩니다. 엘라를 중심으로 해서 사건 전후로 세 명의 인물에게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들 각자의 관점으로 풀어가는데요. 사람들은 하나의 일을 동시에 겪어도 저마다 생각과 기억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친이라 해도, 부모자식간이라도 마찬가진데요. 그렇게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에서 사건의 의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드러나는 최대의 반전... 대체 엘라를 살해한 범인은 누구일까요?


 

주된 화자인 클레어가 책을 쓰는 작가여서인지 본문 곳곳에는 여러 책이 언급되는데요. 낯선 책도 있었지만 <흰옷을 입은 여인>으로 단박에 애정작가가 된 윌키 콜린스를 만나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읽는 내내 궁금했던 건 바로 ‘R.M.홀랜드는 대체 누구지?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나? ‘고딕 스릴러는 뭘까? 궁금했는데요. 중세의 건축물 특유의 폐허와 같은,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거기에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과 어두운 심리가 더해진 소설을 고딕문학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500쪽에 이르는 두툼한 책은 생각보다 금방 읽힙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몰입해서 읽을 책을 찾으신다면, <낯선 자의 일기>를 들춰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제프리 삭스 지리 기술 제도 - 7번의 세계화로 본 인류의 미래 Philos 시리즈 7
제프리 삭스 지음, 이종인 옮김 / 21세기북스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전부터 벽돌책 깨기를 시도하고 있다. 700쪽이 넘어 보기만 해도 위압감이 느껴지는 벽돌책을 첨엔 모으는데 몰두했다. 그러다가 올해부터 일주일 몇 번씩 횟수를 정해두고 조금씩 느리게 읽어가고 있는데 은근히 재미가 있다. 어쩌다 읽는 간격이 뜸해지면 다시 앞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그렇게 읽은 벽돌책이 한 권씩 쌓여갈 때 느낌은 실로 특별하다.


 

‘7번의 세계화로 본 인류의 미래란 부제가 달린 <지리 기술 제도>. 제목을 보고 언뜻 떠오르는 책이 있었다. 인류는 왜 민족 간에 서로 정복하고 지배하는지, 왜 대륙마다 문명이 탄생하고 발달하는 속도가 다른지를 총기와 병균과 금속이 인류에 미친 영향을 통해 분석한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총 균 쇠>. 유럽이 15세기 대항해시대를 맞아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는 게 된 것은 대포로 무장한 범선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하는 카를로 치폴라의 <대포 범선 제국>. 이들 책의 공통점은 ‘3’. 인류의 전체 혹은 일부의 역사 중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것을 핵심 키워드 세 가지를 통해 이야기를 이끌어간다는 점이다. 이번엔 대체 어떤 것으로 전개될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다.


 

제프리 삭스하면 천재란 말이 떠오른다. 하버드대학을 최우등으로 졸업해서 20대에 하버드대학 최연소 정교수가 되었다는,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경제학자로 꼽힌다. 그의 <빈곤의 종말>을 호기심이 발동해서 덥석 집었다가 다 읽지 못했던 쓰라린 기억이 있다. 그래서 최근에 출간된 <지리 기술 제도>도 내가 다 읽어낼 수 있을까? 염려가 됐지만 제목의 끌림이 더 강력했다. 책의 원제는 <The Ages of Globalization>, ‘세계화의 시대. 여기에 ‘7번의 세계화로 본 인류의 미래라는 부제를 더해 추측해보면 저자는 인류의 역사를 7번의 세계화, 시대로 그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바로 지리, 기술, 제도가 아닐까. 역사서를 읽는 기분으로 도전했다.


 

이 책은 세계화의 복잡성을 다루고 있다. (16)


 

저자는 먼 과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류는 역사를 바꾼 일곱 번의 세계화의 시대를 거쳤다고 한다. 구석기 시대, 신석기 시대, 기마 시대, 고전 시대, 해양 시대, 산업 시대, 디지털 시대. 이렇게 구분한 다음 각 시대의 특징과 어떻게 해서 다음 시대로 진행되었는지 지리, 기술, 제도가 서로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 서술한다.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지만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해서 인구과잉은 곧 식량부족의 문제로 이어진다는 멜서스의 인구론을 학계는 대체로 빗나간 예언이라고 하지만 저자는 이 멜서스의 비판을 전면적으로 부정하지 못하는 실정이라고 짚는다. ‘유라시아에 대한 저자의 생각도 인상적이다. 유럽과 아시아를 하나로 묶어서 부르는 유라시아에 저자는 경제적 개념을 도입해서 설명한다. 기후나 자원의 측면에서 유라시아는 다른 지역에 비해 유리한 조건들을 갖고 있다고 말이다. 현재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가 어떤 경로를 통해 진화하고 어디로 이동했는지 후기 구석기에 이르러 인류가 어떤 획기적인 변화를 맞았는지, 신석기 시대에 인류가 정착생활을 하며 경작을 하게 되는데 이때 목축, 농업에 최적의 조건인 행운의 위도가 바로 유라시아였다고 말한다.


 

평이한 문장에 본문 곳곳의 지도와 그래프 덕분에 책장이 술술 넘어가던 책은 5정치의 세계화부터 내용이 복잡해지기 시작된다. 여러 나라가 등장했다가 사라지고 대륙을 가로질러 동서양의 물자가 이동하고 그 결과 제국주의로 열강의 대열에 오르는 나라가 등장한다. 유럽의 몇몇 나라에서 시작된 본격적인 식민지 개척과 그로 인한 희생된 나라를 서술한 대목은 우리가 일제식민지를 겪은 아픈 역사를 지녔기 때문인지 마음이 아팠다. 일곱 번째 맞는 세계화로 저자는 디지털 혁명을 꼽는다. 지금 내가 살아가고 있는 현재의 이야기여서 빈부격차와 불평등 문제는 갈수록 심화된다는 것에 시종일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읽었다. 중국의 급부상으로 인해 앞으로 맞이하게 될 일은 앞으로 풀어가야 할 문제가 아닌가 싶다.


 

저자는 말한다. ‘인류는 온 세상의 구석구석까지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여러 가지 아이디어를 공유하고 다양한 문화를 즐기고, 광범위한 지역을 관통하여 특색 있는 다양한 상품들을 교환할 수 있다(16)’. 이 말을 우리는 작년부터 시작된 코로나19로 인해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다. 해결하기 쉽지 않은 문제들이 곳곳에 산적해 있지만 저자는 그럼에도 희망을 말한다.


 

때때로 우리는 서로 잘 돕거나 화합하지 못하지만 여전히 10만 년 전 아프리카의 사바나 지역에서 형성한 추론과 협력의 능력을 지니고 있다. 오늘날의 인류는 서로 간의 이해관계를 전보다 더 명확하게 깨닫고 있다. 이와 함께 인류의 희망은 공동의 역사와 인간 본성에서 오는 교훈을 활용하여 세계적 규모의 새로운 협력 시대를 구축하는 일에 있다. - 326.

 

 

인류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이야기하는 책을 읽으면서 이런저런 생각이 떠올랐다. 지나온 과거를 통해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듯 다가올 미래 또한 그렇지 않을까.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경험이 결국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게 될지도 모른다. 작은 나비의 날갯짓처럼 미세한 변화가 폭풍우 같은 커다란 변화를 일으킨다는 나비효과란 말이 지닌 의미를,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에서 벌어진 일이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에게도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왜 살아야 하는가 - 삶과 죽음이라는 문제 앞에 선 사상가 10인의 대답
미하엘 하우스켈러 지음, 김재경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왜 사는가란 질문에 단박에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농담인지 진담인지 태어난 김에 그냥 산다” “죽지 못해 산다고 답하는 사람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쉽게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이에 비해 어떻게 살고 싶은가란 질문엔 저마다의 생각과 바램을 꺼내놓는다. 남한테 피해 주거나, 욕먹지 않고,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공통적인 답변에 추가로 후회하지 않고, 미리 걱정하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고 털어놓는다. 비슷한 듯 맥이 닿아있는 두 질문에 대한 상반된 반응을 보면서 생각해보게 된다. 삶의 철학, 삶에 대한 근원적인 질문에 대한 해답은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왜 살아야 하는가>삶과 죽음의 의미(The meaning of life and death)’라는 원제목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독일 철학자 미하엘 하우스켈러가 사상가와 작가 10명의 작품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의미를 풀어보는 책이다.


 

삶과 죽음의 의미를 모색하기 위해 저자는 쇼펜하우어, 키르케고르, 허먼 멜빌, 도스토옙스키, 톨스토이, 니체, 윌리엄 제임스, 프루스트, 비트겐슈타인을 불러내었다. 이름만으로도 너무나 유명한 철학자와 작가들. 그들의 저작을 모두 읽지는 않았지만 사상에 대해서는 학창시절 배웠던 것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물론 그들의 철학이나 사상의 이해 정도와는 전혀 상관이 없지만. 세부적인 내용은 조금씩 다르지만 기본 구성은 흡사하다. 철학자와 작가의 주된 주장과 사상을 소개한 다음 그의 생애를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과 사상이 어떤 배경과 흐름을 갖게 되었는지 작품을 바탕으로 풀어내고 있다.


 

이 세계의 근본을 이루는 것은 부조리하고 맹목적인 의지라고 주장했던 쇼펜하우어는 삶을 고통과 고난 그 자체로 여겼다. 인간은 살면서 끊임없이 욕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것으로도 고통을 겪는다고 주장했다. 이런 내용을 칸트, 라이프니츠의 사상과 더불어 설명하고 있는데 쇼펜하우어의 저작을 읽지 않았기에 어려웠다. 그저 인간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것은 본성에 기인한다는 걸 기억하는 정도에 그쳤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에는 자살과 죽음이 주된 소재로 등장ㅡ도스토옙스키의 걸작들에는 최소한 한 번 이상의 자살 혹은 자살 시도와 한 번 이상의 살인사건이 등장한다(143)ㅡ하는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의미를 찾아본다. 허무주의에 반박하기 위해 대안으로 작품 속에 불멸인 신의 존재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는 것이다.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일부만 읽어서 내용 모두를 이해할 순 없었으나 일부 잘못된 부분이 눈에 띄었다. 158쪽 둘째 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중 셋째인 이반은이라고 되어 있으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에서 셋째는 알로샤이고 이반은 둘째이다. 저자가 잘못 알고 있는 건 아닌가 싶다.

 

필사와 독서모임을 통해 <인생독본> <이반 일리치의 죽음> <전쟁과 평화>을 읽고 있어서 톨스토이의 부분이 기대가 됐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풍족한 삶을 살았던 톨스토이가 개혁자로서의 삶을 걸었던 게 인상적이었는데 저자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에 죽음이라는 소재가 잘 드러나 있으며 그 작품을 통해 죽음에 대한 생각으로 절망하고 우울증에 빠지기도 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전쟁과 평화>의 베주호프(피예르)란 인물을 통해 삶의 의미와 목적을 찾으려고 몰두했다고 짚어주었다. 어쩐지 <전쟁과 평화>를 읽으면서 피예르가 톨스토이의 내면을 투영한 인물은 아닐까 생각했는데 역시! <이반 일리치의 죽음>을 읽고 나서 죽음을 앞둔 사람의 심리, 공포가 어떠할지 짐작해보곤 했는데 여기에 톨스토이의 죽음에 대한 공포, 두려움이 녹아들어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책은 삶의 목적은 무엇일까?’란 질문으로 시작한다. 인간이라면 모두 죽을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언가를 이루려 하고 의미 있는 삶을 사는 것이 가능한지 의문을 갖는다. 삶과 죽음에 의미를 다루는 의문을 저자는 가장 답하기 어려운 궁극의 의문이라고. 그러면서 아들이 자신에게 건넸던 말을 전한다. [무엇이든 결국엔 죽으니까 삶의 목적은 죽음이라고. 하지만 죽음의 의미는 삶이라고. 죽음 없이는 삶도 있을 수 없기 때문에]. 이 말에 깜짝 놀랐다. 어린 아이에게서 이런 말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에. 철학자의 자식이어서 그 영향을 받은 것일까 생각했다. 하지만 이게 해답일까? 저자는 말한다. 이 책에서 궁극의 의문에 대한 해답을 찾을 거라 기대하지 말라고. 그렇다면 어떻게 하란 말인가. 어쩌면 이 책은 저자가 깔아둔 ''일지도 모르겠다. 삶과 죽음의 의미, 삶과 죽음에 대한 해답의 언저리로 향하는 길을 저자가 안내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남겨진 것은 분명하다. 저자가 깔아둔 길을 걸으면서 보물찾기를 하듯 '왜 살아야 하는지' '삶의 의미와 목적은 무엇인지'에 대한 나만의 해답을 찾아야 하는 것. 쉽지 않겠지만 그래서 더 고심해볼 만한 가치가 있지 않은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명작을 읽는 기술 - 문학의 줄기를 잡다
박경서 지음 / 열린책들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한때 무수히 책탑을 쌓았던 적이 있다. 하루에도 무수히 쏟아지는 신간들을 살펴보는 데서 재미를 느꼈다. 그러다 나의 책을 읽는 속도는 고려하지도 않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책이나 흥미로운 책, 지적 허영을 채워줄 수 있는 책, 어쩐지 읽어야 할 것만 같은 책들을 부지런히 장바구니로 옮겨 담았다. 나름의 기준을 갖고 책을 구입했지만 모두 성공했다는 기분은 들지 않았다. 동기나 목적이 분명하지 않아서인지 많은 책들이 금방 관심에서 멀어져갔다.


 

책읽기 역시 마찬가지였다. 매일 틈나는 대로 책을 읽었지만 그럼에도 허기가 가시지 않았다. 1년에 200권이 넘는 책을 읽어도 만족스러운 느낌이 들지 않았다. 돌아서면 허물어질 모래성을 끊임없이 쌓고 또 쌓고 있는 기분이랄까. 내가 지금 뭐하는 거지, 나의 책읽기는 분명 문제가 있어, 고민해보아도 뚜렷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가장 먼저 시도한 것이 속도 늦추기였다. 빠른 속도로 달리는 차 속에서는 주변 풍경이나 모습을 자세히 볼 수 없듯이 책읽기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책을 한 번 잡으면 끝까지 내달리던 것에서 일정 간격을 두고 잠깐 멈춤하기도 했고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문장을 한동안 붙잡고 있기도 했다. 읽고 있는 책의 배경이나 작가의 자서전을 곁들여 읽기도 했다. 책읽는 속도가 느려지니 읽는 책의 양이 줄었다는 점은 아쉽다. 그럼에도 책읽고 나서 느껴지는 헛헛함이 예전보다 줄어든 건 확실하다. 이것만해도 어딘가.


 

<명작을 읽는 기술>이 처음 출간되었을 땐 제목의 기술이란 단어가 마음에 걸렸다. 책을 읽는 기술이란 게 있을 수 있나 싶다가 지난날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어떤 책이든 거기엔 저자가 의도한 바가 분명 있을 것이고, 당시 배경이나 사회적인 분위기가 녹아 있을텐데 예전엔 그런 부분에 미처 신경쓰지 못했다. 그제야 눈에 들어온 것이 문학의 줄기를 잡다는 부제였다. 저자가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짐작할 뿐이지만 마음에 들었다.


 

수박 겉핥기식의 개론서도, 전문 독자를 위한 이론서도 아니라 깊이 있는 독서의 대중화를 지향한다는 저자는 문학의 뿌리에서부터 시작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문학의 줄기를 잡아서 명작을 제대로 읽어보기를 바란다는 의미가 아닐까 싶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1부 문학은 시대를 반영한다’ ‘2부 문학을 한다는 것’ ‘3부 문학은 삶에 대해 알고 있다이것만 보면 어쩐지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다루는 문학입문서 같은 느낌이 들었다.


 

저자는 서구 문화의 뿌리가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현대 문학은 그리스로마신화에서 시작된다거나 고대 그리스의 희비극에 인간이 살면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이야기가 담겼다는 이야기는 주변에서 종종 들었지만 헤브라이즘? 학창시절 헬레니즘이나 헤브라이즘은 미술이나 건축양식을 설명할 때 들었지만 문학과 무슨 상관일까. 처음 듣는 말이었다. 나처럼 생각하는 독자가 많다는 걸 아는지 저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을 뜻하는 헬레니즘과 유대교, 기독교에 바탕을 둔 문명인 헤브라이즘은 건축뿐 아니라 문학에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 두 가지를 알아야 서양 문학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고 강조한다. 순간, ! 하고 무릎을 쳤다. 지금까지 내가 유독 종교와 관련된 부분, 특히 중세는 거의 죽음, 읽어도읽어도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는데 그게 모두 헤브라이즘에 대한 이해가 부족했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됐다.


 

문학을 이야기하는 책에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나게 될 줄이야! 특히 플라톤이 의외였다. 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이해하려면 그의 스승인 플라톤의 철학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이다. 플라톤의 서양철학에 미친 영향에 대해 영국 철학자 화이트헤드가 서양의 2000년 철학은 플라톤의 각주에 불과하다고 했듯이 수많은 작가들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손꼽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토마스 모어 <유토피아>를 아직 읽지 못했는데 그 유토피아가 소설에 등장하는 섬 이름이었다는 점도 놀라웠다. 어원을 살펴보면 어디에도 없는 곳이란 뜻이어서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최고의 이상향을 유토피아라고 했다고 한다. 더불어 3대 유토피아 소설과 3대 디스토피아 소설을 알려주고 있는데 이 중 아직 읽지 못한 작품이 있어서 곧 만나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다룬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사실 <노인과 바다>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운이 없는 늙은 어부가 바다에 나가 모처럼 청새치를 잡지만 상어한테 다 뜯어먹히고 만다는 내용이다. 사실 <노인과 바다>는 헤밍웨이가 200번이 넘는 탈고를 한 끝에 탄생한 작품이고 노벨문학상과 퓰리처상을 수상한 작품이다. 하지만 막상 소설을 처음 읽을 땐 감동이란 걸 느끼기 어려웠다. 그점에 대해 저자는 ‘<노인과 바다>를 문학적으로 온전히 이해하려면 빙산 이론과 하드보일드 문체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217)’고 짚어준다. 작품의 의미를 직접적으로 묘사하지 않았기 때문에 빙산의 일각처럼 겉으로 쉽게 드러나지 않고 문체에 감정을 배제하고 간결하게 비정한 문체로 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결론은 내가 책을 겉핥기로 읽었다는 거다.


 

책에 대한 책, 책을 이야기하는 책을 읽을 때면 항상 본문에 언급된 책 중에 내가 읽은 건 몇 권일까 세어보게 되는데 매번 내가 읽은 책이 몇 권 되지 않아서 실망했었다. 하지만 이 번엔 읽은 책이 읽지 않은 책보다 많았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 괜히 기분이 우쭐했지만 곧이어 든 생각은 다시 읽어야겠다는 거다. 이번에 읽을 땐 좀 제대로 짚어가며 읽어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