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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독서계획
클리프턴 패디먼.존 S. 메이저 지음, 이종인 옮김 / 연암서가 / 2010년 10월
평점 :
책에 대해 얘기하는 책이라면 일단 유심히 살펴보는데, 이 책 <평생 독서 계획>은...뭔가 달랐다. 뭐랄까...새로운 느낌이 들었다. 지금까지 책에 관한 책을 여러 권 읽었지만 제목에서부터 이렇게 확실한 책은 드물었다. 그 어떤 수식어도 없이 그저 ‘평생 독서 계획’이라니. 참으로 정직한, 알기 쉬운, 그러면서도 멋진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게다가 ‘클리프턴 패디먼’. 저자의 이름이 왠지 낯익었다. 이 사람의 이름을 어디선가 봤는데...곰곰 되짚어보니 <서재 결혼시키기>의 저자가 ‘앤 패디먼’이란 게 떠올랐다. 책에 관한 책을 쓴 두 사람의 저자, 대체 이들은 무슨 관계일까? 그 궁금증이 나로 하여금 책을 펼치게 만들었다. 표지를 넘겨 본문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궁금증에 대한 답을 찾았다. 책날개 저자의 소개란 끄트머리에서 발견한 ‘딸 앤 패디먼’. 오, 이런 일이! 아버지에 이어 딸까지! 이렇게 멋진 부녀지간이 다 있나!! 순간 책에서 강력한 포스가 뿜어져 나오는 것 같았다.
그 유명한 <서재 결혼시키기>의 저자의 아버지가 쓴 작품이라 왠지 설레는 기분이었는데 저자 서문에서부터 깜짝 놀랐다. <평생 독서 계획>이 내가 태어나기도 훨씬 전인 1960년에 초판본이 출간되었다는 거다. 그러니까 50년, 딱 반세기가 지났다. 문학작품도 아닌 책이 이토록 오랫동안 사랑을 받다니. 이 책이 단순히 책에 대한 안내서 차원이 아니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책은 고전의 범위를 서양문학에 머무르지 않고 동양문학까지 아우르는 세계문학으로 확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서사시이자 서양 문학의 기초가 되는 작품인 [길가메시 서사시]를 시작으로 현대 예술가들에게 있어 상상력의 밑천으로 통하는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 짧지만 동양고전의 진수를 보여주는 공자의 [논어]로 이어지면서 모두 133명의 동서양 작가들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한다. 소포클레스를 비롯해 아리스토텔레스, 플라톤, 성 아우구스티누스, 단테, 마키아벨리, 셰익스피어, 토머스 홉스, 괴테처럼 누구나 저자와 제목은 알지만 대부분 읽지 않은 고전을 비롯해서 무함마드의 [코란]이나 혜능의 [육조단경]과 같은 종교서적, [천일야화]나 무라사키 시키부의 [겐지 이야기], 조설근의 [홍루몽]과 같은 동양고전, 갈릴레오 갈릴레이의 [2대 세계 체제에 관한 대화],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토머스 쿤의 [과학 혁명의 구조] 같은 과학서적에 이르기까지 각각의 책마다 간단한 내용과 함께 해당 책이 무엇을 전하고자 하는지 알려준다.
반세기동안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은 책이니만큼 인상적인 대목도 많았다. 예전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를 완역본으로 읽으면서 고역을 치렀는데 책은 이렇게 말한다. ‘소설 중간에 끼어있는 시들은 모두 건너뛰어라. 세르반테스는 현대에서 가장 신통치 못한 시인들 중 하나(138쪽)’라며 재치(?)있는 말을 건네고. 노골적인 성적 묘사로 에로틱한 소설로 알려진 실명씨의 [금병매]에서는 ‘이 책이 세계 문학의 고전으로 자리매김 되는 이유는 그 탁월한 사회 풍자와 비판 때문.(152쪽)’이라고 짚어주며 주로 어린 시절 오락용으로 읽었던 대니얼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는 ‘나중에 나이 들어 재독해보면 이 소설이 왜 불후의 명작인지 깨닫게 된다.(185쪽)’고 현대의 우리가 왜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를 되새기게 해준다. 하지만 가장 기억에 남는 대목은 역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였다. 저자는 ‘침투 불가능한 소설’이라는 [율리시스]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지 그 방법들을 세세하게 조언하면서 ‘[율리시스]를 읽으려고 시도했다는 것만으로도 하나의 모험.(366쪽)’이라며 용기를 북돋워주기도 했다.
작년 한 해 220여 권의 책을 읽었다. 아이의 동화가 포함되어 있긴 하지만 원래의 계획보다 훨씬 많은 양이었다. 문제는 그 책들을 마치 백 미터 달리기에서 전력질주 하듯 읽었다는 것. 물론 그때마다 나름 기록으로 남기기도 했지만 그 책들을 통해 과연 나 자신이, 나의 삶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돌아봤을 때 나오는 대답은...‘글쎄올시다’였다. 그래서 다짐했다. 올해는 단단한 음식을 먹듯 책도 꼭꼭 씹어서 읽고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난 것처럼 주위를 찬찬히 둘러보며 그 정취에 깊이 빠져보자고. 고전도 챙겨 읽자고. 이 중에서 적게, 천천히 읽자는 건 어느 정도 이뤄지고 있는데 문제는 고전이었다. 읽어야 할 고전이 너무 많고 방대해서 무얼 먼저 손에 잡을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평생 독서 계획>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고 행운이었다. 내게 남겨진 날들, 반평생동안 함께 할 책들로 어떤 책을 선택해야 할지 엉성하게나마 틀을 잡을 수 있었다. 저자가 소개한 책을 모두 읽지는 못하겠지만 그가 알려준 독창적 사상을 가진 133명의 동서양 작가와 더 읽어야 할 작가 100명의 작품들을 바탕으로 내게 맞는, 나이기에 가능한 ‘나만의 평생 독서 계획’을 세워야겠다. 그리고 정든 친구를 만났을 때 다정하게 대화를 나누듯 책과의 만남도 친구처럼 마음을 담아봐야지. 앞으로 만나게 될 나의 정든 친구들, 과연 누구일까.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대기 시작한다.
여기에 다루어진 책들을 다 읽기까지는 50년이 걸릴 수도 있다. (...) 이 책들은 평생을 따라다니는 길동무이다. 한번 당신의 내부에 자리 잡으면, 당신이 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당신의 내부에서, 외부에서, 그리고 대인관계에서 꾸준히 작용한다. - 1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