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샤 창비청소년문학 117
표명희 지음 / 창비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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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막내, 인자 느그 집 가나?”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친정과 시댁, 양가에 인사를 드리고 신혼집으로 향하는 내게 친정엄마가 말씀하셨다. 이제 니 집으로 가느냐고. 결혼했으니 앞으로 여기, 친정에 자주 못 올 거란 의미. 애정 표현에 서툰 엄마로선 이것이 막내딸과의 아쉬움을 표현한 최대치였다. 하지만 친정엄마가 간과한 것이 있으니 나의 살림 솜씨가 형편없다는 거다. 한동안 친정집 방문이 어려울 거란 예상과는 달리 거의 매일 내 집 드나들 듯 들락거렸다. 같은 도시, 버스로 고작 20분 거리에 불과하지만 사랑 하는 가족, 어릴 적 추억이 가득한 집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내가 태어난 나라, 조국을 떠난다는 건 어떨까. 얼마나 큰 결심을 하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할까.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여기 한 가족이 있다. 한 쌍의 부부, 그리고 그의 네 아이 버샤, 텔민, 세실, 나즈.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아끼고 큰아이는 동생들을 세심하고 돌보는, 그야말로 다복한 가족이다. 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환경, 머물고 있는 공간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미래를 꿈꾸기 이전에 오늘 하루를 무탈하게, 내일도 무사하게 맞이할 수 있는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하루에도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국제공항의 출국장이기 때문이다.


 

나누고 가르는 거라면 정말 지긋지긋하다. 우리가 이런 처지에 내몰린 것도 알고 보면 그런 구분 때문이다. 같은 무슬림도 시아파와 수니파로 나뉘고, 같은 수니파도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고…… 그뿐인가? 군인도 정부군과 반군으로 나뉘고, 뒷배가 되는 나라도 미국과 러시아로 나뉘고……. 사소한 나누기에서 시작한 불씨가 결국 같은 민족끼리 총을 겨누는 내전으로 치달아 사람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까지 내몰지 않았나. -36.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언어도 통하지 않는 땅에 발을 디딘 그들은 출국장 한 켠에 여행 가방과 휘장을 둘러 임시로 거처를 꾸렸다. 조국에선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풍족한 생활을 누렸던 그들이지만 지금은 한 달이 넘는 동안 오직 난민 심사에서 무사히 통과하는 것만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나라는 웬만해선 난민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기다 무슬림에 대한 인식도 최악. 때문에 그들의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희박했다. 국경을 몇 차례 넘으면서 자금사정도 악화되었다. 그들에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사회에 악영향을 주지 않는 온순한 사람들이란 인상을 주기 위해 어떻게든 우선 사람들 눈에 띄면 안되었다. 그것이 유일한 생존수칙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불회부결정이 내려지고 마는데……


 

어느새 출국장 끝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의 마지막 지점에 이른 것이다. 어릴 적 화려한 미로 같던 통로를 지나 이르던 황금 지붕의 모스크처럼 이곳도 내겐 해방구나 다름없다.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바깥세상이라야 드넓은 활주로가 펼쳐진 공항 마당이 전부지만……. -190


 

공항 출국장에서 난민처럼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읽으며 순간 톰 행크스가 출연했던 영화 <터미널>이 떠올랐다. 모국에서 갑자기 터진 쿠데타로 오갈 데가 없어지자 주인공이 어쩔 수 없이 공항에서 지내는 줄거린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고 해서 인상적으로 봤던 기억이 난다. 그 영화처럼 소설 속 가족도 공항에서 살아가기 위해 어렵게 끼니를 해결하고 책을 구해 낯선 언어를 익히고 자신들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다가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명쾌한 해결책은 쉽게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설상가상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세계는 공포의 도가니가 되고 마는데...


 

거대한 우주에서 보자면 한낱 벽촌에 지나지 않을 이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은 신의 눈에 얼마나 가련하고 가소로운 존재일까. 한쪽에서는 테러와 전쟁으로 울부짖고 다른 쪽에서는 축제와 파티로 환호하는, 어수선하고 모순투성이인 이 행성이 말이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는 기껏 지구의 껍데기에 달라붙어 아등바등 살아가는 가련한 피조물 아닌가. -110

 


수수께끼를 푸는 기분으로 소설을 읽었다. 버샤가 실어증을 앓게 된 어떤 이유일까. 이 가족이 안고 있는 비밀은 대체 뭘까. 무슬림에 대한 선입관, 고정관념을 전환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어질 이야기가 궁금해서 책장 넘기는 속도가 빨라졌지만 결국 묵직한 숙제가 남겨졌다.

 


국경을 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건 마음의 벽을 허무는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살아갈 나라의 국경선 앞에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갖고 서 있다.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어 우리를 맞아줄 날을 기다리며……. -3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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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의 시간 - 도시 건축가 김진애의 인생 여행법
김진애 지음 / 창비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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괄괄한 음성, 호탕한 웃음소리, 어떤 일이나 상황에서도 뒤에 숨지 않고 당당하게 앞에 나서서 시원하게 일갈하는 배짱 두둑한 모습. 여러 매체를 통해 접한 김진애의 모든 것이 낯설었다. 딸부자집 막내딸로 태어나 여중, 여고를 거쳐 줄곧 어디에서도 만나지 못한 캐릭터였다. 왠지 모르게 씩씩하고 유쾌한 언니 같은 느낌? 건축가이자 정치인, 그리고 <김진애의 도시이야기> 3부작으로 스테디셀러 작가로도 알려진 김진애. 그가 풀어놓은 여행 이야기가 궁금했다.

 


<여행의 시간>도시 건축기 김진애의 인생 여행법이란 부제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저자가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면서 터득한 여행 비법을 담은 책이다. 이것만 보면 딱히 이 책의 특별한 점은 보이지 않는다. 포털에서 검색만 해도 여행에 관해서 세세한 것까지 알려주는 유투버와 블로거들이 얼마나 많은가. 하지만 아직 실망하기엔 이르다. 저자가 바로 김진애가 아닌가.

 


여행에 대한 로망이란 거의 본능적인 것이어서 아무리 누르려 해도 사라지지 않는다. - 9


 

계획했던 포르투갈 여행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무산된 이야기로 책은 시작된다. 바이러스의 위협을 오로지 집콕으로 버텨냈던 날을 지나 어느 정도 일상으로의 회복이 가능해지자 사람들이 가장 많이 했던 것은 바로 여행이었다. 익숙한 공간을 벗어나 낯선 곳으로 떠난다는 건 갖가지 위험과 고생이 예견되는 일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여행을 떠나는 데엔 분명히 그것을 통해 얻을 수 있는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남은 문제는 하나. 어떤 여행을 떠나야 할까.


 

여행이란 우리가 열심히 구축해온 일상의 성체를 깨는 시간이다. 익숙한 일상, 낯익은 사람들, 손에 익은 물건들에서 벗어나서 예기치 못했던 만남, 낯선 사람들과 문물을 마주하면서 새로운 자극을 받는다. -103

 


저자는 가장 먼저 홀로여행을 이야기한다. 유학시절 파리로 떠난 첫 홀로여행은 순탄하지 않았다고 한다. 말도 통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가방을 노리는 소매치기를 만나고 나니 숙소에서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고. 하지만 불안했던 마음이 가라앉고 몸짓으로 소통하는 것이 익속해지자 인생에서 홀로여행은 결코 놓칠 수 없는 것이 되었다고 한다. 드넓은 자연보다 도시를 빨빨거리고 여행하기를 즐기는 저자는 잠깐씩 멍때리는 시간을 가진다는데 그것조차 여행의 묘미가 아닐까 싶다.


 

홀로여행은 나를 발견하게 해주는 최고의 기회다. 나의 가능성과 한계, 나의 기질과 성향, 나의 동기와 목료, 나의 역량과 준비태세, 나의 심리와 행위, 나의 불안과 약점 등을 홀로여행이라는 의외의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알게 된다. ‘나를 발견해주는 태도’, 사실 이것이 여행이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선사하는 것이 아닐까? -42

 


어떤 이를 여행의 동반자로 선택하는지에 따라 여행의 느낌도 달라지는걸까. 저자는 커플여행을 비롯해서 아이들과의 여행, 부모님과의 효도여행, 반려동물과의 여행 경험담을 풀어놓는다. 아이들이 성장한 이후로 부부가 여행을 떠날 때는 유서를 써놓고 비행기에 오른다거나 반려견 울럼과 둘이 떠난 여행 이야기가 눈길을 끌었는데 저자에게 절친한 친구이자 보디가드이자 가족이었던 울럼이 떠났을 때 상실감이 얼마나 컸을까 짐작할 수 있었다. 가난한 여행과 부자 여행을 언급한 대목도 인상적이었다. 전재산인 집을 팔아서, 조기명퇴하고 퇴직금으로 온가족이 세계일주를 하는 이야기를 접할 때마다 대단하다’, ‘용감하다고 생각했는데 저자 역시 마찬가지였나보다. 여행에 있어서 돈과 시간은 필수요건인데 그 두 가지 요건을 만족시키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그렇다면 어떤 여행이 좋을까 고민이 되는데 저자는 가난한 여행을 통해 강한 멘탈과 적응력을 기를 수 있어 두고두고 남는 체험이 된다며 꼭 해보라고 권한다.


 

여행이란 어차피 돈과 시간 사이의 줄타기다. 인생이란, 불공평하게도 또는 아주 공평하게도, 돈이 없을 때는 시간이 많고 돈의 여유가 있을 때는 시간에 쫓길 확률이 높다. -194~195쪽

 


지난 겨울, 오랜만에 가족여행을 다녀했다. 12, 국내 인근 지역을 다녀온 게 전부였지만 다른 점이 있었다. 언제나 음식 재료를 바리바리 싸 들고 갔는데 이번엔 패스하고 근처 식당에서 해결하기로. 차로 이동하면서 느긋하게 둘러보다가 배가 출출해지면 주변 식당을 기웃거렸다. 저녁을 먹고선 바로 숙소로 가지 않고 야경이 아름답다는 곳을 찾았다. 그렇게 짧은 여행을 마치고 돌아오면서 뒤늦게 알게 된 것이 있었으니. 이번에 여행한 도시를 가깝다는 핑계로 몇 번이나 찾았지만 야경을 제대로 감상한 건 처음이란 사실. 의외였다. 우리 가족이 이제야 여행의 재미를 깨닫게 된 건 아닐까. 다시 찾아온 여행의 시간, 기대가 된다.


 

여행에 대한 진짜 에필로그란 여행기나 출장 보고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속에 쓰는 에필로그다. -2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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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잃어버린 사람들 - 뇌과학이 밝힌 인간 자아의 8가지 그림자
아닐 아난타스와미 지음, 변지영 옮김 / 더퀘스트 / 2023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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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내가 아니게 되는 날이 올까 두려워.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나의 이름을 잃어버리고 , 내가 좋아했던 것도, 내가 즐겼던 것도, 감동에 눈물을 흘렸던 책에 대한 감흥도, 무엇보다 사랑하는 가족의 얼굴과 이름과 추억마저 잃어버린다면? 나의 소소한 기억마저 잃어버려서 나의 가족들을 아프게 하고 슬프게 한다면? 모든 걸 잃어버린 나는 과연 일까, ‘가 아닌 걸까.


 

뭘 얼마나 잃어버렸더라도 는 그냥 변함없이 일 뿐이야. 간단하게 생각하고 그치기도 하지만 그럴 때마다 불쑥불쑥 솟아나는 의문이 있다. 그럼 도대체 는 무엇으로 라는 걸 증명할 수 있는 거지? ‘나를 잃어가는 병이란 치매. 대표적인 퇴행성 뇌질환이라고 하지만 노년층에만 발병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이 밝혀지면서 치매는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질병이 되었다.

 


정면을 향한 얼굴의 절반이 마치 석고상처럼 표정 없이 창백하게 굳어 있는 모습에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오페라의 유령]에 등장하는 사람처럼 가면의 절반만 얼굴에 쓴 것일까. 아니면 한 사람의 얼굴이, 삶이 이렇게 차갑게, 딱딱하게 굳어가는 것일까. 최근에 출간된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 표지를 보면서 의문이 들었다. 사람의 모습을 모자이크처럼 표현한 이유는 아마도 부제인 뇌과학이 밝힌 인간 자아의 8가지 그림자를 나타내기 위함은 아닐까 하고 생각해보니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담고 있을 이야기가 궁금해졌다.

 


책은 란 누구인가. ‘는 어떻게 인식되는가를 뇌과학적으로 풀어내기 위해 여덟 개의 장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1. 나는 죽었다고 말하는 남자]에서는 나의 존재를 인식하는 주체, 자아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자신의 뇌가 죽었다고 주장하는 환자의 경우를 통해 코타르증후군을 설명한다. 누군가에게 내 뇌가 죽었소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뇌사상태라고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뇌의 특정 영역이 손상을 입거나 대사활동이 없다면 그렇게 느낄 수도 있다고 한다.

 


라는 것은 무엇인가, 또는 누구인가? 바로 이 질문이 이 책 전체에 스며들어 있다. ‘가 누구든, 무엇이든 그것의 경험의 주체로서의 그 자신을 나타낸다. - 40.

 


[2. 나의 이야기를 모두 잃어버렸을 때]는 바로 알츠하이머로 인해 잃어버리는 기억을 다루고 있는데 평소 고민하던 부분이어서 특히 집중해서 읽었다. ‘라는 느낌을 갖거나 내가 어떤 사람인지생각할 때 앨범 속 사진을 찾듯 지난 기억을 뒤적이게 되는데 그런 것을 서사적 자아라고 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 경험의 주체가 되는 능력이 가장 중요한데 알츠하이머 말기에는 그런 것이 완전히 망가진다는 것이다.

 


알츠하이머병은 당신에게서 내가 누구인가하는 것을 빼앗아가죠. 인간에게 그보다 더 큰 공포가 있을까요? 이 병이 일단 삶에 들어오면 하루하루 살아오면서 축적한 모든 기억과 가치관, 이 세상과 가족, 사회와의 연결고리가 사라져요. ‘인간으로서 내가 누구인가를 사실상 규정하는 경계를 뜯어내버리죠. - 61



자폐증이 자아발달에 미치는 영향을 다룬 [6. 자아의 걸음마가 멈췄을 때]도 인상적이었다. 책과 영화 같은 대중매체를 통해 자폐증을 접하면서도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저 타인과 관계를 맺을 때 어려움을 느낀다는 정도로만 알았는데 그렇게 간단하지 않았다. 우선 나와 타인을 알아차리는 것에서 자아가 출발하는데 20개월 전후의 어린 아기들이 자신의 물건에 대해 내 거야!”라고 표현하는 것에서 잘 드러난다. 그 과정에서 암묵적 자아(I)와 명시적 자아(Me)가 형성되는데 어른의 표정이나 행동을 모방하면서 자아가 발달하고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학습하게 되는데 자폐증이 있는 아이는 선천적으로 이 능력에 손상을 입었다는 것이다.

 


타인의 마음을 읽는 능력과 과거에 내 마음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알아차리는 능력 모두 세 살에서 다섯 살 사이에 발달한다는 사실은 흥미롭다. - 253쪽

 


동물의 신경계를 통합하는 중추가 되는 기관, . 성인 뇌의 경우 무게는 대략 1,300~1,400g, 체중의 약 2%에 불과하지만 그 속에는 약 1000억 개의 신경세포가 존재한다고 한다. 인간의 삶, 일상의 모든 순간은 뇌가 외부 자극을 어떻게 수용하고 반응하는지, 그때 어떤 감정을 느끼는지에 달렸다고 해도 무방하지 않을까. 그만큼 뇌는 인간에게 중요한 기관이지만 21세기 첨단과학으로도 완전히 밝혀진 것은 아니라고 한다. 그 일부나마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통해 접할 수 있었다. 뇌과학에 대해 무지한 탓에, 쉽게 풀어놓았다고 생각을 하지만 그럼에도 본문 내용을 이해하기 어려운 대목도 많았다. 뇌 부위를 알 수 있는 그림을 삽입했더라면 어땠을까 아쉬움이 남으면서도 의미있는 시간이었다.


 

우리는 울기 때문에 슬픔을 느끼고, 싸우기 때문에 화가 나며, 떨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것이지, 그와 반대로 슬프거나 화가 나거나 두려워서 울거나 싸우거나 떠는 것이 아니다. - 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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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한 우연 - 제13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63
김수빈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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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일이 방학이었으면 좋겠다.”


3월의 첫날 저녁을 먹으면서 아이들이 말했다. 새 학년이 시작되는 날을 하루 앞두고 벌써 방학 타령이라니. 고등학생인 둘째는 그렇다 쳐도 대학생인 첫째까지? 아이들에게 학교는 그렇게나 가기 싫은 장소였던가. 잔뜩 침울해 있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엄만, 대학 졸업한 그해의 3월이 제일 슬펐어.”

왜요?”

더이상 학생이 아니란 걸 알았거든. 엄만 지금도 학교에 가고 싶어. 정 그렇게 싫으면 엄마가 대리출석이라도 해줄까? 고딩은 몰라도 대학 강의실은 가능할 것 같은데?”

에엑? 엄마! 농담도 되는 소리를 해야지! 학교 보내려고 별소릴 다 하셔.”

사차원 엄마가 학교에 와서 무슨 엉뚱한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걸까? 좀전까지 학교 가기 싫다고 투덜거리던 녀석들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난 살짝 아쉬웠다. 그렇게 어처구니 없는 소리였나?

 


청소년 소설을 읽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아주 오래전에 지나온, 당시엔 두 아들처럼 하루하루가 지겹고 힘들기만 했던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기에 설레기까지 하다.

 


온통 짙은 초록의 숲이 그려진 <고요한 우연>. 표지만 언뜻 보고 숲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인가 했다. 그러다 표지 아래쪽, 계단에 앉은 소녀가 고양이 두 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이 일었다. “나는 네가 궁금해졌어. 아주 많이.”라는 부제처럼. ‘가 누굴까? 혹시 고양이?


 

이쪽으로 와서 앉을래?”

괜찮아.”

긴장할 것 하나도 없어.”


책장을 넘기자마자 마주하는 것은 심상찮은 분위기. 학교에서 무슨 일이 생겼다. 아니, ‘누구에게 심각한 일이 발생했다. 즉각 해당 학생과 같은 반 아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는 담임 선생님, 학생부장 선생님의 호출을 받고 상담실로 향한다. 음료수를 내어주며 선생님은 그 아이와의 관계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던 그 아이가 마치 증발이라도 해 버린 것처럼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극도로 말을 조심해서 건네는 선생님들의 의중은 단 하나. 넌 뭔가 아는 게 없냐는 것.

 


는 머리가 새하얘진다. 외모도, 성적도, 성격도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평범하다 못해 스스로도 심심하다고 여기는 자신에게 선생님들의 관심이 쏠리니 어느 때보다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 아이가 사건 사고에 휘말렸을 가능성도 있다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가운데 순간 떠오른 것. 그 아이가 새벽에 자신이 보낸 SNS 메시지를 확인했다는 사실.

 


단 두 장에 불과한 초입 부분을 읽으며 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대체 누굴까. 왜 사라졌을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이가 사라진 지 나흘이나 지났다고? 그 아이는 무사한 걸까?


 

사라진 아이의 행방을 찾는 것으로 시작한 소설은 (이수현)’의 서술로 진행된다. 같은 반 아이들에 대해서, 교실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그런 가운데 왠지 자꾸만 시선이 가고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끌리는 아이들을 알기 위해 는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한 아이의 SNS 계정을 통해 그들과 조금씩 가까워지는데...

 


책은 한 번 잡으면 바로 끝으로 내달릴 만큼 몰입감이 높은 작품이다. 교실 바로 앞뒤로 앉아 있으면서도 카톡으로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요즘 아이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바라보며 나누는 대화나 전화통화 보다 SNS가 친숙한 아이들. 그렇기에 벌어질 수 있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첨엔 고요한 우연이란 제목이 무슨 의미일까. 의문을 품었다. 무엇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까. ‘고요함일까. ‘우연일까. 궁금증은 본문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오늘 일을 장난이라고 해도 되는 걸까. 이건 명백한 괴롭힘이었다. 아이들은 고요가 먼저 미움받을 행동을 했다고 말한다. 미움받을 행동을 하면 괴롭혀도 괜찮은 걸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면 상대를 괴롭힐 권리가 주어지는 걸까.- 59


 

열일곱, 내 인생에 주어진 가장 큰 행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지아, 내 친구 서지아. - 178


 

스스로 빛을 내지 않아도 밝게 빛나는 별이 있다고 말해 주던 다정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자신은 스물세 번째 피규어라고 했던 이우연의 말도 떠올랐다. 나 또한 그 어디쯤 서 있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엄마의 특별 한정판은 아니지만 엄마에게 꼭 필요했던 피규어다. 그걸로 됐다. 그러면 충분했다. - 188~189쪽


 

사람들은 달을 올려다본다고만 생각하지, 달이 지구를 보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것 같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달인데 말이야. - 22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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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성 1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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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부터 보기 시작한 미드가 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좀비로 인해 사람들은 목숨을 잃고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그들끼리 모여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간신히 평온을 되찾은 이들을 방해하고 위협하는 세력이 나타나면서 사람들은 이제 좀비는 물론 사람들과도 목숨을 건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만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고 존립을 위해 좀비가 아닌 사람들을 죽이게 되는 지경에 이르자 사람들은 혼란을 느끼고 서로 갈등을 빚는다. 그럴 때 해결책을 제시하고 앞장서서 달려가는 것은 언제나 집단의 리더였는데 그 장면에서 떠오른 생각은 리더란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란 것이다. 이런걸 드라마를 보고 느끼다니 놀랍다고 해야 할까 의외라고 해야 할까.



미드와 유사한 상황이 소설 속에서 펼쳐졌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문명>은 전염병과 테러,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지구가 배경이 된 작품이다. 첨단과학의 힘을 빌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던 인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기 시작한 쥐떼의 공격을 받고 문명 그 자체가 송두리째 무너질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그때 짠 하고 등장한 생명체가 있으니 바로 고양이였다. 쥐떼의 공격을 물리치고 지구에 자신들 고양이의 문명을 건설하겠다는 야무진 포부를 가진 고양이 바스테트의 모험이 펼쳐진다.


그 뒷이야기가 최근에 출간된 <행성>에서 이어진다. 쥐떼와 전염병으로 아수라장이 된 파리에서 암코양이 바스테트는 무리와 함께 배를 타고 탈출한다. ‘마지막 희망’호를 타고 바다 건너 닿는 곳은 살기 좋으리란 희망을 품고서.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뉴욕의 풍경에 그는 충격을 받고 만다. 뉴욕 역시 파리처럼 쥐떼가 점령하고 있었던 것. 사방이 온통 갈색 쥐 투성이였다. 바스테트를 비롯한 일행은 할 말을 잃고.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각자 다른 의견을 내놓는 가운데 갑판에서 비상 사이렌이 올려퍼진다. 쥐들의 공격이 시작됐다고. 닻줄을 타고 벌써 갑판으로 올라왔다고.


고양이-인간 엽합군은 돼지와 개까지 힘을 합쳐 맞서지만 한국전에서 중국의 인해전술처럼 끝없이 밀고 들어오는 미국 쥐떼의 공격에 치병타를 입고 만다. 처음 배에 올랐던 이백여 명이 겨우 일곱으로 줄어들었다. 목숨을 잃은 동료와 친구들을 위해 제대로 애도를 가질 여력도 없는 상황, 그때 해안의 한 고층 빌딩 꼭대기에서 반짝 하고 섬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길고 짧은 신호는 바로 모스부호였고 'C.O.M.E'이라는 의미였다. 흐밍호에 계속 머물자니 자신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쥐떼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고 그렇다고 바다 위에서 해안가의 고층건물까지 어떻게 갈것인가.


소설 <행성>은 이전에 출간된 <고양이>와 <문명>에 이어지는 내용이지만 앞선 작품을 읽지 않아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본문에 지난 이야기가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어서 스토리를 짚어가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베르베르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의 상상력이 풀어내는 세계와 이야기에 놀라게 된다. 인간이 아닌 동물, 고양이의 시선으로 풀어가는 소설, 2권에선 바스테트 일행에게 어떤 모험이 펼쳐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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