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아버지가 된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사노 아키라 지음, 이영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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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전 일이다. 평소처럼 출근한 신랑이 낮에 전화를 했다. 다짜고짜 지금 애 잘 있냐?”고 물었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잘 있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알았다하고선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도대체 무슨 일 때문인지 알 수 없었는데 퇴근한 신랑이 이렇게 말했다. 낮에 점심 먹으러 직원들과 이동하는데 어디서 우리 애 우는 소리가 들렸다는 것이다. 깜짝 놀라서 주위를 둘러봤지만 아이가 보이지 않아 급하게 전화했다고. ‘혹시 깜짝쇼한다고 니가 아이 데리고 회사 근처로 왔다가 길을 잃어버린 건 아닌가 놀랐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근데, 진짜 우리 애 우는 소리였거든?” 그땐 웃고 말았지만 나 역시 종종 신랑과 비슷한 경험을 하곤 했다. 길을 가다가 우는 아이를 만나면 마치 내 아이가 우는 것처럼 마음이 쓰였다. 왜 울까? 혹시 엄마를 잃어버렸나? 어디 아픈가? 어떨 땐 가던 길 멈추고 아이 옆에서 말을 건네고 있기를 여러 번.(다행히 매번 엄마가 금방 나타났다) 당시 나와 신랑은 부모가 된다는 건 어쩌면 오지랖이 넓어지는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는 제목을 보고 오래전 일이 떠올랐다. ‘부모가 아닌 아버지’? 대체 무슨 일이지? 아이가 남자의 손을 잡고 있는 모습의 표지는 궁금증을 더해줬다. 활짝 웃는 아이에 비해 남자는 신체의 일부만 드러나 있어서 표정을 알 수 없다. 도대체 이들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힌트를 얻을 수 있을까 해서 본 띠지에 영화 <괴물>의 감독 고레에다 히로카즈 화제의 소설이란 문장이 눈이 번쩍 뜨였다. , <괴물>, 정말 좋았는데. 그 감독 작품이라면!!


 

장난감 인형은 세 개뿐이었다. 아이들은 넷이나 있는데로 시작한 소설은 출생으로 인해 얽혀버린 가족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완벽한 남자라면 이 사람이라고 할 정도로 무엇 하나 빠지지 않는 남자가 있다. 그의 이름은 료타. 가정적인 아내 미도리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아들 게이타와 함께 평범하지만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러던 어느날 걸려 온 한 통의 전화로 인해 그들의 행복은 위기를 맞는다. 전화 발신지는 아들이 태어난 산부인과. 불안한 예감을 가까스로 누르고 찾아간 병원에서 료타와 미도리는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듣는다. 출산 당시 병원측 실수로 아이가 바뀌었다고. 게이타가 료타와 미도리의 진짜 아들이 아니라고.


 

게이타가 잠들자 두 사람은 침대 위에 앉아 아이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봤다,

닮은 곳을 찾는다. 닮지 않은 곳을 찾는다. - 64


 

영화 <괴물>에서 같은 사건을 주인공 미나토의 엄마와 미나토의 담임과 미나토의 시선으로 전개하면서 우리 안에 있는 괴물을 직면하게 해준 고레에다 감독이 풀어낸 또 하나의 가족 이야기. 평범한 일상을 보내던 가족은 어느 순간 균열이 가기 시작하는데.... 문득 제목의 의미가 궁금해진다. 그렇게 아버지가 된다니. 대체 어떻게?



어릴 때 종종 이런 상상을 했다. 나의 진짜 엄마 아빠는 다른 곳에 있을 거라고. 사실 난 부잣집에서 태어났는데 어쩌다 실수로 여기서 살고 있는 거라고, 언젠가 진짜 엄마 아빠가 날 찾으러 올 거라고. 그땐 뒤도 안 돌아보고 갈거야. 두고 봐. 언니들 틈에서 억울하거나 서운한 일이 생길 때면 이렇게 공상하는 것으로 위안을 삼았다. 지금 부모가 가짜라고 할 수 없을만큼 내 얼굴이 엄마와 아빠를 빼다 박았는데도 말이다. 며칠 전 신랑에게 물었다. “자긴 언제 아버지가 됐다는 걸 느꼈어?” 무뚝뚝한 천상 경상도 남자인 신랑은 짧게 답을 했다. “애가 아플 때핏줄이 아니었다. 낳은 정이 아니라 키운 정을 말하는 걸까. 책을 읽으면서 이 책을 원작으로 한 영화가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영화는 어떻게 풀어냈을까. 몹시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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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단편소설 다시 읽기 - 어제의 소설로 오늘을 치열하게 읽어내고 싶은 당신에게
김형준 지음 / 도서출판 해오름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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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소설을 읽었다. 재미로 읽고,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라 읽고, 지인이 강추해서 읽고, 때론 어쩐지 꼭 봐야 할 것 같은느낌에 읽었다. 동기야 어떻든 소설을 읽고 나면 한결같이 드는 생각은 역시 의미가 있다는 거다. 내가 알지 못한 세계, 미처 경험하지 못했던 이야기는 읽는 중에도 읽고 나서도 언제나 나를 매료시켰다. 학창 시절 겉멋에 이해하지도 못하고 읽었던 소설을 중년이 되어 다시 만났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선명하다. 십 대의 설익은 감성에 재미없다고 치부했던 이야기는 두 아이의 엄마가 된 중년에게 완전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게 이런 이야기였어?’하는 충격에 이어 이래서 고전!’이란 하는 수긍과 인정이 뒤따랐다.


 

청소년 책읽기 수업을 하면서 늘 고민이 되었던 건 이 작품을 어떻게 아이들에게 전달할까’ ‘어떤 이야기를 나눌 것인가였다. 해당 작품에 대한 지식이나 해설이 아니라 작품 속 세계, 그 속에서의 인물들 이야기를 통해 21세기의 아이들이 무언가를 느낄 수 있었으면 했다. 마치 자신이 작품 속 인물이 되어 그의 입장에서 사건을 바라볼 수 있기를,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기를 바랬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이렇게 접근해도 될까? 내가 무언가를 놓치고 있는 건 아닌가?


 

뒤늦게 시작한 SNS를 통해 <한국단편소설 다시 읽기>란 책을 알게 됐다. 처음엔 소설을 해설하는 또 한 권의 책일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어제의 소설로 오늘을 치열하게 읽어내고 싶은 당신에게]란 부제에, ‘친숙한 우리 문학, 낯설게 다시 읽는다란 띠지 문구에 시선이 멈췄다. 나의 의문을, 우려를 어쩌면 이 책으로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책을 고를 때 실패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목차를 꼼꼼히 살펴보기라고 하는데 이 책이 좋은 예시가 된다. 21개의 한국단편소설을 [소설, 또 하나의 눈] [‘와 다른 ’] [소설이란 거울에 비친 우리 시대] [지켜야 할 무엇] 이렇게 네 개의 장으로 구성한 책은 각 장의 제목만 봐도 저자가 <한국단편소설 다시 읽기>를 통해 무엇을 전하고 싶은지 목차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이를테면 가장 먼저 소개한 현진건의 <운수 좋은 날>을 통해 우리가 소설을 왜 읽는지, 반드시 읽어야하는지 이야기한다. 한국 근대소설로 여러 교과서에 수록된 작품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좋고 나쁜 운수에 좌우되는 인력거꾼 김첨지의 하루를 떠올린다. 하지만 저자는 그런 천편일률적인 접근이 아니라 그의 삶이 왜 운수에 좌우될 수 밖에 없었는지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병든 사회는 병든 개인을 만듭니다병든 사회란 공동선이 붕괴되고개개인이 인간다운 삶을 누릴 수 없는 곳입니다그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은 생존과 욕망을 위해 서로를 도구화하고진실을 추구하기 보다는 허상에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 17. 


장영희 교수님은 우리가 문학을 읽어야 하는 이유로 내가 남이 되는 연습’, ‘일종의 대리경험을 하게 한다고 했는데 바로 그 점을 부각한 대목이 [2와 다른 ’]이다. 서로 다른우리가 서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김유정의 <동백꽃>을 통해 저마다 넌지시 알려준다. 갈등 없는 소설은 앙코 없는 찐빵이라 할 정도로 갈등은 소설의 중요한 요소이다. 소설엔 창작될 당시의 시대적 상황, 사회의 다양한 모습이 인물 간 갈등의 형태로 녹아있기 때문에 소설을 통해 오늘 우리가 마주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찾을 수 있다는 걸 [3장 소설이란 거울에 비친 우리 시대]에서 짚어준다.



우리가 모르는 것은 동물의 마음뿐만은 아닙니다다른 사람 마음도 우리는 근본적으로 알 수 없습니다왜냐하면 나는 나이고, ‘가 아니기 때문입니다그럼에도 인간은 다른 어떤 동물보다도 다른 존재를 이해해야만 합니다기본적으로 인간은 혼자 살아갈 수 없는 사회적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의 생각과 감정을 이해하고, ‘의 생각과 감정을 전달하는 것은 공동의 삶을 지속시키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과정입니다. -97



매일 숨가쁘게 흘러가는 세상 속에서 지내다 보면 우린 정작 중요한 가치를 잊고 지낼 때가 있다부와 권력명예의 뒤에 가려진 곳에 있는 사람들가난하다고 어리석다고 주목받지 못하고 외면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4장 지켜야 할 무엇]에서 주목한다이 부분에 소개된 성석제의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를 청소년 책읽기 수업 때 활용했는데 아이들에게 의문과 고민을 안겨준 작품이었다.



한 사회의 모습은 대체로 그 구성원들이 누구를 존경하고, 또 누구를 배척하는지를 통해 드러납니다. 한 사회가 존경하는 인물의 구체적인 삶은 추상적이고 모호한 가치관보다도 훨씬 더 직접적으로 그 사회의 지향과 이상을 알려주기 때문입니다. (중략) 그런데 요즘 학생들과 이야기를 하다보면 존경하는 사람에 대한 질문을 제일 어려워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중략) 이것은 곧 많은 학생들이 존경하는 인물을 갖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고, 이것은 곧 많은 학생들이 평소에 누구를 존경해야 한다는 필요성을 못 느끼고 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 210

 

소설은 사실 또는 작가의 상상력에 바탕을 두고 허구적으로 이야기를 꾸며 나간 산문체의 문학 양식이다. 사실이거나 허구이거나 상관없이 작가가 지어낸 이야기다. 하지만 그 이야기는 단순히 이야기가 아니다. 어느 나라, 어느 시대를 벗어나 언제 읽어도 감동적으로, 읽는 이에게 저마다 다른 느낌과 의문을 던진다. 당신은 어떻게 살아왔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하고.



제가 본 풍경이 옳고 그름의 문제에 중점을 두고 있다는 점도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옳고 그름에 대한 논쟁이 대화를 이어가기 위한 좋은 출발점이 된다는 점도 있지만, 소설이 지닌 재미와 감동이 근본적으로 우리의 윤리적 판단과 분리될 수 없다는 믿음 때문이기도 합니다. 좋은 여행은 여행지가 아니라 여행자의 마음에서 완성됩니다. 우리의 대화가 우리 소설을 탐색하는 더 많은 여정을 아름다운 여행으로 완성할 수 있는 작은 디딤돌이 되기를 바랍니다. - [여는 글]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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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이 바꾼 전쟁의 역사 - 미국 독립 전쟁부터 걸프전까지, 전쟁의 승패를 가른 과학적 사건들
박영욱 지음 / 교보문고(단행본)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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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부터 지인과의 독서 모임에서 전쟁에 관한 책을 읽고 있다. 한국전쟁을 시작으로 베트남전쟁, 러시아혁명을 거쳐 지금은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를 지나고 있는데 곧 제2차 세계대전으로 접어들 것 같다. 읽고 있는 책의 주제 때문인지 모르겠으나 평소라면 그냥 지나칠 이야기들도 이전보다 더 눈길이 가는 걸 느낀다. 현재 지구상에서 벌어지고 있는 전쟁에 대한 뉴스나 전쟁을 소재로 한 영화에 관심이 커졌다. 작년에 천재 과학자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핵 개발 프로젝트를 다룬 영화를 봤는데 실화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인지 소름이 돋을 만큼 흥미로우면서도 충격적이었다. 특히 주인공의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다.” “세상은 오늘을 기억할 겁니다.”란 대사는 단 한 번 들었는데도 잊히지 않았다. 세상을 구하는 게 목표였지만 결과적으로 세상을 파괴해버릴지도 모를 위험한 무기가 개발되다니……


 

[미국 독립 전쟁부터 걸프전까지 전쟁의 승패를 가른 과학적 사건들]이란 부제의 <과학이 바꾼 전쟁의 역사>를 읽는 내내 작년의 그 영화가 떠올랐다. ‘인간의 역사에는 창조와 파괴가 끊임없이 교차해 왔습니다(5)’로 시작한 책은 과학이 발전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어떻게 바뀌게 되었는지 24가지의 역사적 장면을 통해 알려준다.


 

가장 먼저 18세기 미국이 영국의 식민지에서 독립하기 위해 벌인 전쟁에 프랑스가 영향을 미쳤다는 걸 전한다. 바로 근대 화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라부아지에가 개량한 화약 덕분에 미국은 영국과의 독립전쟁에서 승기를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1) 뿐만아니라 1차 산업혁명이 일어난 영국이나 유럽 강국에 비해 다소 발전이 늦었던 프로이센은 교육 개혁에 이어 군대 개혁을 통해 신무기들을 보강하게 되는데 군사 강국으로 나아가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 과학 기술을 장려하고 적극 지원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1차 세계대전과 독일 제국주의가 등장하게 된 원인이었다고 한다.(4) 이외에도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넓은 지역에서 가장 많은 국가가 개입해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낸 첫번째 전 지구적 전쟁1차 세계대전에 사용된 대규모 화학 무기를 개발한 화학자 하버를 비롯해서 컨베이어 벨트가 작동과 함께 노동자들이 단순반복적으로 마치 기계의 부품처럼 일하는 작업방식을 포드주의라고 하는데 찰리 채플린의 영화 <모던 타임스>가 포드자동차의 대량생산 시스템을 알리게 된 계기가 되었다거나 영화로 제작된 쪼갠 원자핵으로 원자폭탄을 만들고 뒤이어 핵융합을 거쳐 개발된 수소폭탄 등 획기적인 과학적 발견이나 발명이 전쟁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풀어내고 있다.


 

18세기 이후 과학의 역사이자 전쟁의 역사이기도 한 책을 읽으면서 의문이 들었다. 21세기에 들어서서 과학은 이전보다 더욱 눈부시게 발전했는데 그것이 세계의 권력 판도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경제학이 최소비용으로 최대효용을 추구하듯이 전쟁도 비슷하지 않을까. 한 번의 일격으로 몇십, 몇백 배의 타격을 줄 수 있는 강력한 무기를 개발하는 것. 세계 패권을 다투는 국가의 목표일 것이다. 책의 마지막 부분엔 본문에서 언급된 과학적 사건과 전쟁을 연대순으로 배치해둔 표를 수록해놓았다. 전체적인 흐름을 살펴보고 정리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지만 한편으론 마음이 무거웠다. 이 다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 세상을 구하기 위한 과학이 세상을 파괴할지 모르는 무기가 되었던 지난 과거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배운 것은 무엇일까. 다음에 내딛게 될 발걸음에 어쩌면 인류의 미래가 결정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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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재천의 곤충사회
최재천 지음 / 열림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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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공이 생물학? 정말요?”

날 만나는 이들에게 늘 이런 질문을 받았다. 당황인지 황당인지, 혹은 놀라움인지 알 수 없는 반응에 난 이렇게 답했다. 대학 원서를 쓸 때 친구의 “언니가 생물학과인데 재밌어 보이더라”는 말에 귀가 솔깃했고 평소 TV 프로그램 <동물의 왕국>을 좋아했기 때문에 호기롭게 생물학도가 되었다고. ‘친구 따라 강남 간다’는 말의 다른 버전쯤 되는 얘기에 사람들은 큭큭 웃음을 터뜨리곤 했다. 생물학에 대한 어떤 정보나 예비지식이 없어서 벌어진 일이지만 때론 의문이 들었다. 내 행동이 그렇게 어이없는 것이었나? 그러다 책에서 나와 비슷한 경험을 한 사람을 알게 됐다. 과학자이면서도 깊은 인문학적 식견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고 있는 인물, 바로 최재천 교수였다.

어떻게 척추도 없는 저 작은 곤충이 우리 인간이 이룩해놓은 문명사회와 거의 비슷한 수준의 사회를 구축하고 살까. - 10쪽

얼마전 출간된 <최재천의 곤충 사회>는 2013년부터 2023년까지 최재천 교수의 강연과 출판사 인터뷰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데 가장 먼저 수록된 글에서 그는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미국 유학을 가면서 <동물의 왕국>을 하겠다고 마음 먹었지만 “너 학교 잘못 왔어. 우리 ‘동물의 왕국’ 안 하거든. 우리 생태학 해.”란 대답을 들었다고. 이 말을 듣고 당황한 최재천 교수의 모습이 선하게 그려졌다. 당시 생태학, 진화생물학에 대해 잘 알지 못했던 그는 수강편람을 뒤적이다가 ‘사회생물학’을 접하게 됐는데 거기서 자신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솔제니친 <모닥불과 개미>을 떠올리고 인생의 길을 결정할 수 있었다고 한다.

“가까스로 그 엄청난 공포에서 벗어난 개미들은 방향을 바꾸더니 다시 통나무 둘레를 빙글빙글 맴돌기 시작했다. 무엇이 그들로 하여금 자기 집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일까. 많은 개미들이 활활 타오르는 통나무 위로 기어 올라갔다. 그러고는 통나무를 붙잡고 바둥거리면서 그대로 거기서 죽어가는 것이었다.”- 28~29쪽

‘하버드대학 박사’, ‘저명한 교수’란 타이틀만 보면 ‘천재’가 연상되지만 그가 털어놓은 일화를 보면 ‘엄청난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의 최재천’이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보다 자신이 원하는 연구를 위해 기울인 노력은 놀라웠다. 흰개미의 사회성 진화를 연구하고 싶어서 흰개미와 사촌격인 곤충으로 그 과정을 들여다볼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게 2밀리미터에 불과한 ‘민벌레’라는 곤충을 연구하게 됐는데 ‘개미 박사’로 알려진 그가 민벌레를 연구했다니. <개미제국의 발견>으로 처음 최재천을 알게 되어 <생명이 있는 것은 다 아름답다> <최재천의 인간과 동물> <열대예찬> <통섭의 식탁> 등 많은 책으로 만났음에도 처음 알게 된 사실이다.

자연계에서 우리는 ‘가진 자’잖아요. 우리는 이미 어마어마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그야말로 발자국 하나까지 신경 쓰면서 내디뎌야 해요. - 97쪽

<최재천의 곤충 사회>는 제목만 보면 과학서적 냄새가 물씬 풍기지만 책장을 넘겨 본문으로 들어가면 최재천이 생태학자로서 어떻게 학문의 길을 걸어왔는지 그동안의 경험을 담은 에세이라고 할까. 처음부터 끝까지 쉽게 술술 넘어가는 책을 읽다 보면 마치 커다란 강연장에 사람들이 빼곡하게 앉아있고 그 앞에 선 작은 체구의 웃는 얼굴을 한 최재천 교수의 강연을 실시간으로 듣는 기분이 들었다.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이라는 졸업식에서 축사를 한 내용은 영상으로 먼저 접했지만 글로 읽으니 새삼 더 큰 울림으로 다가왔고 인류의 모든 지식이 담겨 있는 책을 취미로 접하지 말고 모르는 분야를 집중적으로 공략하는 ‘기획 독서’를 하라는 대목에선 나도 모르게 뜨끔했다. 2밀리미터의 민벌레로 연구를 시작한 그의 시선은 어느새 호모 사피엔스에 닿고 있었다. DNA의 존재까지도 알아버린 대단한 존재인 인간이 인류를 위기로 몰아넣고 있다고. ‘이제는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다’는 그의 말이 오래도록 가슴에 남는다.

지구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생물이 사라지는 건 어제오늘 일은 아닙니다. 적어도 다섯 번에 걸쳐 거대한 대멸종 사건이 있었습니다. (...) 지금 제6의 대절멸 사건은 비교적 조용히 벌어지고 있습니다. 천재지변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지구의 막둥이 격으로 태어난 호모 사피엔스라는 한 종이 저지르는 장난질 때문에 생물다양성이 사라지고 있습니다. - 27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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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모
미하엘 엔데 지음, 시모나 체카렐리 그림, 김영진 옮김 / 김영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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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의 말에 귀기울여주는 아이, 인생에 있어 시간의 소중함을 느끼게 해 준 아이 모모. 학창시절 만난 모모를 성인이 되어 그림책으로 다시 만났네요 새로운 감격의 순간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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