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태고의 유전자
뤽 뷔르긴 지음, 류동수 옮김 / 도솔 / 2008년 8월
평점 :
품절
일주일에 한 두 번 장을 볼 때마다 저절로 한숨이 나온다. 호화로운 메뉴가 아닌 기본적인 밥과 국, 반찬으로 식탁을 차리는데도 버거울 지경이다. IMF 버금가는 불경기인데다 물가가 오른 탓도 있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가 있다. 바로 식재료의 절반 정도를 유기농 매장에서 구입하는 것이다. 유정란 계란, 유기농 국산콩으로 만든 두부, 유기농 야채와 과일, 우리밀로 만든 과자와 라면...이런 것들로 인한 지출이 상당한 수준이지만 감히 줄일 엄두를 내지 못한다. 혹시나 아이들이 뒤늦게라도 아토피 증상이 나타나는 건 아닐까...두려워서다.
누군가의 손에 들린 고사리, 뿌리가 DNA 이중 나선모양이다. <태고의 유전자> 이 책이 어떤 내용인지 감히 짐작조차 못하는 상황에서 ‘농약 없이 풍작을 이루는 기술과 이를 둘러싼 음모’란 부제에 먼저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농약 없이 풍작을 이루는 기술. 아니, 그게 정말 그게 가능하단 말이야???
1988년 12월, 내가 대학에서 처음 맞은 겨울방학을 만끽하고 있을 즈음, 멀리 지구의 반대쪽 스위스에선 실로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텔레비전의 가족오락 프로그램에 출연한 스위스의 거대 제약업체 치바가이기 그룹의 구이도 에프너와 하인츠 쉬르히. 두 과학자가 실험을 통해 2억년 전, 공룡들이 지구를 막 정복하기 시작하던 시기의 소금 결정체에서 태고 시대의 곰팡이 유기체를 분리하는데 성공했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즉석에서 ‘관중’이라고 하는 고사리 홀씨를 전기장 안에서 처리한 결과 지금은 멸종해서 찾아볼 수 없는 골고사리로 자랐다고 말했다.
“식물들은 진화 과정에서 재배나 퇴화를 통해 일부 유전적 특질들을 상실하게 됩니다. 그런데 전기장을 이용하면 그 특질을 되살려내 활성화시킬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진화과정을 거슬러가는 것입니다.” - 18쪽. 서막 중에서
후손에게서 선조를 재생산할 수 있다. 이른바 ‘역진화’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는 그야말로 과학계의 대사건, 대변혁이었다. 구이도 에프너와 하인츠 쉬르히. 그들은 전기장 실험기구를 이용해 박테리아나 식용 재배 식물 같은 유기체가 진화 과정에서 더는 사용되지 않아 ‘잠자는’ 유전자의 스위치를 켜는 실험을 계속 시도했다.
옥수수와 밀을 전기장을 이용해 같은 실험을 거친 결과 이미 멸종한 ‘원옥수수’와 ‘원밀’이 자랐으며 수확량도 놀라울 정도였다. 일반 옥수수가 잎줄기에 1~2개의 옥수수가 달리는데 비해 원옥수수는 대의 위쪽 끝에 여러 개, 최 대 열 두 개의 옥수수 자루가 달리기도 했다고 한다. 빛이 충분하지 않은 상태에서도 말이다. 뿐만 아니라 성장 속도도 빨라서 해충으로 인한 피해도 적기 때문에 제초제도 필요없다는 거였다.
그들은 동물실험도 시도했다. 무지개 송어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전기장 처리를 한 송어는 일반 송어에 비해 부화율에서부터 크기나 몸무게, 힘에 있어서 월등했다. 이빨도 두드러지게 날카로웠으며 인간의 접근에 극도로 긴장하는 등 행동에서도 야생형의 면모를 보여줬다.
지금까지의 과학사에 큰 변화를 가져올 만큼 놀랍고 획기적인 실험은 치바가이기 그룹에 의해 갑자기 중단된다. 여러 가지 추측이 난무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살충제와 종자를 생산해서 전 세계에 판매하는 자사의 이익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구이도 에프너와 하인츠 쉬르히, 그들의 실험이 완료는 곧 치바 그룹의 수입 감소로 직결된다는 거였다. 여기에 치바 그룹은 한술 더 떠서 두 과학자의 실험의 특허를 획득한 후 서랍 속에 잠재웠다. 모방은 금지다...는 거였다.
그리고 잠자는 유전자를 깨우는 기적 같은 실험을 이뤄냈던 두 과학자는 다른 부서로 이동되거나 회사를 떠나게 된다. 둘은 개인적으로 전기장 실험을 계속하지만 자신들의 뜻을 채 이루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 후 에프너와 쉬르히의 실험은 검증과 증명을 거치기도 하고 몇몇 과학자가 시도했음에도 학계에서 주목받지 못한다.
그.러.나. 아직 희망은 있다.
구이도 에프너에게 두 아들이 있었다. 부전자전이라고 아버지의 호기심과 열정, 사람들과 지식 나누기를 즐기는 성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큰아들 다니엘 에프너와 평화를 사랑하는 섬세한 자유예술가인 둘째 아들 니쿤야 에프너. 두 형제는 마치 바통을 이어받듯 아버지가 못다 이룬 뜻을 이어 받았다. 아버지가 꽃 피우지 못한 실험을 계속해서 농약 없이도 풍작을 이루는 식량으로 기아에 허덕이는 제 3세계와 아프리카를 위해 쓸 계획이라고 한다.
204쪽. 저자 뤽 뷔르긴이 쓴 책 <태고의 유전자>는 한 장의 호소문을 덧붙이며 끝을 맺는다. 하지만 이것은 곧 또다른 시작을 의미한다. 이미 오래전에 멸종해버린 잠자는 태고의 유전자가 과연 21세기에 깨어날지, 깨어난 후 그 태고의 유전자는 어떤 행보를 나아갈지 궁금해진다.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진 그들의 호기심과 열정에 멀리서나마 힘을 실어보내고 싶어진다.
“우리가 자연의 정신적 능력을 인정한다고 전제한다면, 자연도 마찬가지 반응을 보이겠지요. 자연이 지니는 이러한 정신적 능력은 인간의 정신적 능력을 통해 입증됩니다. 인간 자신이 진화한 자연의 산물이니까요. 그렇기 때문에 생체물리학적 연구는 자연이 지닌 바로 이 자유로운 형성 능력과 그 바탕이 되는 자연의 자유의지를 분석하고 이해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 210쪽. 마치는 글 중에서
<태고의 유전자> 역진화를 통해 멸종된 유전자를 깨울 수 있다는 엄청나게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됐고 더불어 과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자는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나름대로 생각하게 된 책이었다. 그래도 아쉬운 점은 있었다.
먼저 구이도 에프너와 하인츠 쉬르히. 두 과학자의 이름이 몇 번이나 개명절차를 거쳤다. 앞표지 책날개엔 귀도 에프너와 하인츠 히르쉬로 기록되어 있더니 본문에 들어가선 구이도 에프너와 하인츠 쉬르히로 적혔지만 어쩐 일인지 구이도 에프너의 이름은 또한번 귀도 에프너가 되버린다. 또 ‘에프너와 하인츠’라는 식의 표현도 눈에 띄였다. 물론 외국인의 이름이라 실수가 생길 수도 있지만 사소한 부분이라 치부할 것이 아니다. 번역 과정에서의 좀 더 세심한 주의가 아쉬웠다.
또 이 책이 유전자에 대한 과학자의 실험과 연구 성과에 대한 것인데도 ‘각주’나 ‘색인’이 없었다. 일례로 33쪽의 제일 아랫줄의 ‘매질’이란 용어는 과학을 전공하거나 관심있는 사람이 아니면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세계적으로 유전자변형식품 GMO에 대한 우려가 높아가는 요즘 이 책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증가하리라 본다. 책을 읽다가 언제라도 궁금한 점을 찾아볼 수 있도록 작은 배려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