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치, 인간과 괴물의 마음 - 나를 잃지 않고 나와 마주하는 경계의 감정
이창일 지음 / 추수밭(청림출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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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월이었다. 중범죄 등으로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의사의 면허를 취소하는 법안에 대해 대한의사협회가 크게 반발하면서 급기야 코로나19 백신접종에 협력하지 않겠다고 발표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집단행동은 사람의 생명이나 안전보다 자신의 이권과 기득권을 놓치지 않는 데만 몰두한 듯했다. 유치원 다니는 어린아이보다 못한 이기적이고 몰상식한 행동을 일삼는 그들이 사회의 지도층이자 지식인이라 할 수 있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고도 변함없이 존경을 받고 싶은지 묻고 싶었다. 왜 그들로 인한 창피함은 우리들의 몫인가. 그들의 행위가 왜 이토록 수치스러운가.



인간과 괴물의 마음이란 부제의 책 <수치>의 표지를 한참 바라봤다. 흑백의 사람 옆모습이 아래위로 나뉜 표지를 보면서 온라인에서 간혹 볼 수 있는 착시 이미지가 떠올랐다. 젊은 여인의 옆모습이라고 여겼던 그림이 어느새 매부리코의 노파 얼굴로 바뀌고 아리따운 여인으로 보였던 그림은 둥지로 날아드는 새였으며 가운데가 불룩하니 휘었다고 생각한 선은 알고 보면 휘어짐이 없는 직선이었다. 이런 경험을 미루어 짐작해보면 흑백의 두 얼굴이 상징하는 건 어쩌면 뇌의 착시처럼 같으면서도 다른 감정에 대해 이야기하는 건 아닐까 생각했다.



창피함과 부끄러움과 수치는 어떻게 다른가. 같은 감정인가. 늘 궁금했다. 심리학과 철학, 상담심리학의 이력을 지닌 저자는 첫 문장에 나의 궁금증에 대한 해답을 내어놓는다. ‘부끄러움수치와 같은 뜻을 가진다고. 차이점이 있다면 부끄러움보다 수치가 좀 더 부정적인 의미를 띄고 부끄러움은 순 우리말이지만 수치는 한자어라고 말한다. 좋은 감정이지만 나쁜 감정이기도 한 두 얼굴을 지닌 감정 수치. 저자는 수치의 두 가지 얼굴에 대해 세세하게 풀어놓는다.



우리가 앞으로 탐구할 낯붉힘의 감정인 수치는 조금 특별한 감정이다. 수치는 넓이와 깊이를 모두 가진 감정이기 때문이다. - 6.



책은 크게 다섯 부로 나누어져 있다. 그리고 각 부는 다시 주제에 따라 2~4개의 장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를테면 1수치, 감정과 문화부끄러움의 감정부끄러움의 언어문화라는 장에서 부끄러움이 어떤 감정인지 알기 위해 감정이 일어나는 마음의 상태가 어떠한지, 사람의 감정 변화와 관련해서는 뇌의 어느 부위가 영향을 미치는지를 실험을 통해 살펴본다. 부끄러움의 옛말이 붓그럽다붓그리다란 것과 부끄러움이 일차 감정이 아니라 사회감정인 이차감정이라는 걸 처음 알게 됐다. 인간이 감정을 느낄 때 신체적으로 변화가 나타나는데 그동안 여러 문학작품을 통해 접했던 대목이 많아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에 표시해 놓은 부분이 특히 인상적이었고 수치의 의미를 표로 나타내놓아서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기에 좋았다.



이차 감정이 없는 짐승들은 부끄러움을 느낄 수 없지만, 인간은 부끄러움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지각만 한다면 이 또한 인간이 아니다. 그것을 내면에서 다시 불러일으켜서 느껴야 한다. 그래야 인간이다. - 75.



2수치, 아래쪽 얼굴부터 본격적으로 수치를 탐색하기 시작한다. 수치란 감정의 탄생을 이야기하기 위해 저자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이브에게로 포커스를 맞춘다. 너무나 자연스럽게 알몸으로 지내던 그들이 뱀의 유혹과 부추김에 선악과를 먹은 이후 갑자기 수치, 그것도 부정적인 감정을 알게 되는데 그 순간을 저자는 이렇게 말한다. ‘역설적으로 인간이 되는 순간 생겨난 감정이 바로 수치다라고.



수치는 인간으로 살아가는 일이 쉽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며, 그 길은 이전처럼 거저 주어진 것이 아니라는 엄혹한 현실을 알려주는 신호이기도 하다. - 125.



얼마전에 읽었던 <실낙원>이 바로 이 아담과 이브의 이야기인데, 기독교를 믿지 않는 내게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하느님을 불복종한 벌로 에덴에서 쫓겨나게 되자 그들이 서로에게 취했던 행동이었다. 신의 완전함을 추구하고자 했던 인간의 의도가 어떠한 것이었는지보다 서로가 서로를 원망하고 책임을 전가하고 질책하는 장면, 수치스러운 모습이었다.



이후부터 프로이트가 등장한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적인 해석이 동원되고 리비도라는 낯선 용어를 통해 인간의 수치가 신화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 하나하나 살펴보는데 이전만큼 술술 읽히지는 않는다. 브래드쇼는 수치가 인간에게 가장 위협이 되는 악마적인 존재로 일컬었는데 수치로 인한 질병을 언급하는 대목은 아무래도 마음이 무거웠다.



요즘 뉴스를 보면 우리가 수치심에 둔감한 사회가 되어버린 건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한다. 부모가 아이에게 폭행을 가하고 젊은 청년의 안타까운 죽음을 가십거리로 생각하고 정치인은 어제 했던 말을 오늘 뒤집기 일쑤다. 부끄러움, 수치란 감정이 없는 사회는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인간에게 부끄러움을 아는 것은 부정적인 의미만 있는 것은 아니다. 부정적인 부분을 갖고 있지만 그 역시도 인간다움을 찾는 과정이 아닐까. 부끄러운 말과 행동을 했을 때 그걸 재빨리 알아차리고 수정하려고 노력하는 자세, 용기가 그 어느때보다도 필요하다. 인간의 감정의 숨은 이면을 알고자 하는 이가 읽어봄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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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최진석 지음 / 북루덴스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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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됐을까. 5~6년 정도 된 것 같다. 인문고전 독서토론모임을 시작하면서 인문학이 대체 뭔지 궁금했다. ‘그냥 문..이에요,라고 말하는 지인이 있는가 하면 두 말 않고 철학!’이라고 강조하는 이도 있었다. 종합해보면 철학은 기본적으로 포함된 것 같은데 더 이상의 설명이 없어 도서관에 가서 책을 뒤져봤다. 그때 읽었던 책이 <인간이 그린 무늬/최진석>였다.



저자는 인문학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골치 아프고 난해한 이론이나 고차원적인 학문이 아니라 사람이 사는데 꼭 필요한 도구 같은 것이라면서 인간이 그리는 무늬’ ‘인간의 동선라고 생각하면 된다고. 명쾌한 설명이었다. 지인이 인문학을 ..이라고 말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이후로 저자의 책은 챙겨서 읽게 됐다. 노자와 [도덕경]을 바탕으로 인류가 철학을 하게 된 역사적인 배경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가 생각하는 힘을 잃어가고 있다며 세상에서 유일무이한 존재인 자신으로 돌아가려면 생각하는 힘을 길러야 한다고 강조했던 <생각하는 힘, 노자인문학>, 인류 역사에 언제나 위기는 있었다면서 위기를 극복하려면 철학이 필요함을, 그러려면 먼저 철학을 고리타분한 학문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라며 일침을 가한 <탁월한 사유의 시선>까지. 저자의 글을 읽을 때면 느슨하게 늘어지는 마음을 다잡곤 했다.



<최진석의 대한민국 읽기> 출간 소식이 누구보다 반가웠다. 이번엔 어떤 걸 가르쳐주시려나 기대가 됐다. ‘이제는 건너가자. 철학자의 시선으로 본 대한민국!’라고 적힌 띠지를 벗기고 표지를 살펴보면서 깜짝 놀랐다. 왼쪽 아래 귀퉁이에 국회의사당이 뒤집혀 있었다. 비스듬히 그어진 은 단순히 선이 아니라 예리한 칼로 베어버린 것 같았다. 띠지의 건너가자라는 것의 의미가 대체 뭘까 더욱 궁금해졌다.




대한민국에는 정치 공작이 대부분을 차지함으로써 지금은 정치가 사라졌습니다. 철학적으로는 사회 통합이 이상적인 일로 간주되지만, 권력을 잡고 유지하는 데 사회를 분열시키는 것이 더 유리하다면 차라리 분열을 하나의 방법으로 채택해버리는 것이죠. - 9~10.



삼십대 초반의 저자가 홍콩행 비행기를 타는 것으로 시작한 책은 우리나라를 둘러싼 여건이 어떠한지, 중국과의 관계, 북한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제대로 알아야 한다며 강조한다. 친일 청산 문제에서 우리는 독일과 프랑스처럼 전쟁으로 주권을 빼앗긴 게 아니라 눈만 꿈뻑이다가 일본의 속국이 되었고 연합군의 도움으로 해방이 되었지만 우린 마치 스스로의 힘으로 해방이 된 줄 착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국가의 일을 진영의 논리로 다루니, 국가는 표류할 수밖에 없다. 종속적이고 집단적 사고에 매몰되어 있으면, 어떤 문제를 독립적인 사고 능력으로 집요하게 다루지 못하고 바로 반대편을 선택해버리거나 논리를 임의대로 사용하는 특징을 보인다. -88.



촛불집회로 탄생한 정부, 문재인 정부에 대해 날카로운 비판도 풀어놓았다. 대통령이 처음 내세웠던 경험해보지 않은 나라가 어떤 나라이며 약속했던 인사 5대 원칙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대통령의 고유함이 사라지고 있는 현실을 안타까워 하면서 말한다. 과거와 결별하려면 먼저 내 과거와 결별해야 하듯이 적폐 청산도 내 안의 적폐를 먼저 청산해야 한다고. 저자의 <나는 5.18을 왜곡한다>라는 글이 발표되고 나서 논란의 중심에 서야 했던 때를 돌아보면서 자신의 글이 오히려 왜곡 해석되는 현실에 분노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는 세계 모든 나라가 놀랄 정도로 눈부신 초고속 성장을 했다. 하지만 그 이면에 드리워진 어둠은 매우 짙다. 나라의 모든 정책과 노선이 전쟁으로 황폐해진 나라의 재건과 성장에 맞춰져 있다 보니 인권이나 참된 민주화에 대한 의식은 그에 비해 성장하지 못했다. 이미 예전에 폐기했어야 할 낡은 프레임을 갖고 목청 높이는 정치세력이야말로 자기 탈피를 못하는 사람이라며 꼬집는다.



문제 없는 부부도 없고, 문제 없는 국가도 없다. 문제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문제를 미래적으로 풀지 못하는 것이 문제다. 중요한 것은 문제를 다루는 능력이다. 모든 발전은 문제를 해결해가는 노력의 결과다. -175.



목차에 상관없이 매일 조금씩 끌리는 대목부터 읽어나갔다. 뒤표지의 철학자가 낱낱이 짚어낸 대한민국의 문제라는 문구처럼 저자의 예리하고 날카로운 시선이 잘 드러나는 책이었다. 하지만 그동안 저자의 책을 꾸준히 읽어온 나로선 솔직히 아쉬운 마음도 없지 않다. 진정한 민주화를 쟁취하고 다음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 국민을 대표하는 정치인들이 오히려 정쟁에 휘말려 있는 상황이 저자는 매우 답답했던 듯하다. 누군들 그렇지 않겠는가. 일개 전업주부인 나조차 지금의 우리 정치를 보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왠지 고개를 젓게 된다. ‘어느 진영도 미래를 말하는 능력이 없다고 하지만 그렇다면 저자의 생각이 미래인가?



새로워져야 할 때 새로워지지 않으면 현재 가지고 있는 새로움이 계속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급속하게 더 낡아지는 것이 세상의 이치다. - 239.



내겐 말을 지지리도 안 듣는 중학생 아들이 있다. 온라인 수업에 농땡이를 치고 시험을 곱게 말아먹는 아들을 보면 난 답답하기만 하다. 아들 인생이니 내비둬,하고 싶지만 아들의 미래가 어떨지 경험상 그려지기 때문에 자꾸만 다그치게 된다. 중학생을 거쳐온 선배로서 조언과 충고를 한다. 하지만 아들은 나의 모든 얘기가 그저 지겨운 잔소리에 불과하다.



난 저자의 글이 잔소리로 취급되지 않았으면 한다. 온라인에서 검색만 하면 볼 수 있는 흔하디 흔한 정치논평에 그치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자면 글에 가득한 흥분을 가라앉혀야 한다. 철학자의 냉철함으로 짧으면서도 핵심을 꿰뚫는 단 하나의 화살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더불어 각각의 글마다 발표된 시점을 수록하는 것이 좋았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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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인의 인문학 - 삶의 예술로서의 인문학
도정일 지음 / 사무사책방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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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학이 대체 뭔가. 한때 궁금했던 적이 있다. 사전을 찾아보면 언어, 문학, 역사, 철학 따위를 연구하는 학문이라 하고 인간과 인간의 문화에 관심을 갖는 학문 분야하고 한다. 명확한 것을 알고 싶었지만 어디에서도 알아내지 못했다. 지금은 학문의 분야에 칼로 구분하듯 명확함을 바랬던 건 잘못된 접근이었다. 그저 인문학이란 인간과 인간을 둘러싼 문화(..)에 대해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생각한다.

 

문학평론가 도정일 선생의 책이 출간됐다. 예전에 국내의 석학들과 교육, 종교, 사랑, 생명, 문화 등의 주제로 대담을 한 것을 책으로 출간한 것에서 도정일 선생의 글을 처음 만났다. 오래전이라 선명하게 기억이 나지 않지만 도정일 선생은 대담집에서 인문학이 왜 우리에게 필요한지 고전을 읽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 이야기했다. 사람은 누구나 사랍답게 살고 싶어 하기 때문에 인문학적 가치를 추구하며 산다던 말이 인상적이었다. ‘삶의 예술로서의 인문학이라는 부제의 <만인의 인문학>은 저자와 두 번째 만남이면서 동시에 처음 만나는 책이기도 하다.

 

인문학이 의미가 있는 것은 그것이 우리네 삶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삶을 대상으로 하는 인문학을 우리는 삶의 인문학이라 부를 수 있다. 삶의 인문학은 삶을 살아가는 기예이자 예술로서의 인문학을 의미한다. - 책머리에, 4.

 

<만인의 인문학>은 저자가 여러 잡지와 매체를 통해 발표한 글을 모아서 출간한 것이다. 책 뒤쪽에 기록된 날짜만으로 보면 대략 1992년부터로 시기만 보면 오래되지 않았나 싶지만 책을 읽어나갈 때는 전혀 그런 느낌을 받지 못한다. 30년 전의 일이지만 지금에도 변함없이 적용되는 문제이기 때문이리라.

 

책은 만인의 시학’ ‘만인의 인문학’ ‘다시, 인간이란 무엇인가?’로 크게 3부로 구성되어 있다. 1만인의 시학에서는 대체로 언어와 문학과 관련한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이야기하기를 즐기고 모든 것을 연결시킨 것이어서 인간은 말하는 동물이 아니라 이야기하는 동물이라거나 인간의 인생이 과연 문학과 별개이겠냐는 대목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아이들의 반어적 언어사용을 얘기하는 대목에선 대중탕에서 흔히 겪는 일화가 생각났다. 뜨거운 온탕에 몸을 담근 어른이 어유, 시원하다를 연발하자 아이가 온탕에 한쪽 발을 담궜다가 얼른 빼면서 세상에 믿을 놈 하나 없다고 중얼댔다던가. 고놈 참 맹랑하네 라고 생각하고 말았지만 저자는 부모가 그런 아이를 북돋아줘서 그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조언한다. 반대로 말하고 돌러대며 말하면서 더 나아가서는 세상을 새롭게 보는 눈 또한 길러진다는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늘, 부단히, 거꾸로 생각하고 반대로 말하기를 연습시킬 필요가 있다. 창조적 사유와 관찰을 위한 교육, 새로운 눈으로 세상을 보고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게 하는 교육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 62.

 

2만인의 인문학부터 하나의 글마다 해당 되는 키워드를 달아놓았는데 인문학적 탐색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느낌이다. 인간이 왜 동물과 다른지 알기 위해서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야 하는데 그러려면 우선 인간은 무엇인가라는 가장 근본적인 질문을 던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잘먹고 잘사는 건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는 소망인데 그 잘 산다는 것의 의미가 행복이라면 무엇이 행복인지. 인간은 어떨 때 행복한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깊게 고민해봐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답할 수 없는 질문, ‘근원적 질문을 통해 우리 사회에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를 돌아보게 한다.

 

근원적 질문을 잃어버린 개인과 사회는 근원적으로 불행하다. 무엇이 행복인가에 대한 의미의 틀을 갖지 못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가 철학자가 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철학적 반성의 순간을 놓치면 우리는 인간이 아닐지 모른다. - 125.

 

로마황제인 아우렐리우스에게 특별임무를 띤 노예가 있었는데 그의 임무는 바로 하루 중에 몇 번씩 황제에게 폐하, 폐하는 인간이십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가장 높은 위치, 최고의 권력을 거머쥔 황제가 자신이 인간, 그것도 유한한 생명을 지닌 약한 존재임을 망각하지 않도록 취해놓았다는 조치는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한다.

 

여행이 몹시 그리운 요즘이어선지 여행이란 키워드의 글도 인상적이다. 여행자는 흔히 두 가지 만남을 경험한다면서 여행지에서 아름답고 진기한 많은 것을 보지만 그 어느 것도 소유하지 못하고 빈손으로 돌아와야 한다면서 여행이란 소유와 집착으로부터의 자유로움과의 만남이라고 한다. 그리도 또 하나 여행자는 여행지에서 일상으로 돌아오면 문득 자신이 이전과 달라졌음을 깨닫는다는데...

 

남의 고장에서 제 나라를 발견한 사람은 제 나라에서도 남의 고장을 발견한다. 그에게 가장 익숙하고 친숙한 것들에서 그는 그가 몰랐던 타자의 얼굴을 만나는 것이다. - 152.

 

도대체 인문학이란 무엇인가.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무엇이 인문학인가. 인문학이 우리 인간의 삶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인간을 인간이게 하는 것은 무엇이고 나라는 인간은 무엇을 통해 정의할 수 있는가. 이에 대해 저자는 인문학이 인간과 그의 삶에 대한 의미. 가치. 목적을 생각하고 표현하고 실천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다만 이때의 가치는 물질적인 가치가 아니며 어떤 목표나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서의 가치도 아니다. ‘본질적인 가치는 수단적 가치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인 가치라면서 일본에서 취객을 구하기 위해 철로로 뛰어든 의인 이수현의 예를 들어 설명한다. 결국 좋은 삶을 추구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그것을 실천하는 것이 나에게뿐만 아니라 타인에게도 좋은 삶, 행복한 삶일 수 있다는 것이다.

 

인문학의 중요한 사회적 효용의 하나는 그것이 민주주의의 토대를 다진다는 것이다. 인문학이 실패하는 곳에서는 정치가 실패하고, 경제가 실패하고, 사업이 실패한다. () 수단과 목적의 자리가 뒤바뀌고, 어떤 것이 중요한 사회적 가치인가를 따지는 토론도 불가능해진다. 인문학자를 정치인으로 뽑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나는 인문학 같은 것 잘 모른다고 공공연히 말하거나 행동하는 사람에게는 표를 줄 필요가 없다. - 192~3

 

길은 아직 멀어 보인다 () 사회를 구성하는 개인들이 결국 자기 사회의 관용의 수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는 탈레반을 손가락질하고 있지만, 사실 그 손가락은 동시에 우리 자신을 가리킨다. 우리 속의 탈레반은 얼마나 많은가! - 211.

 

평소에 늘 접하는 일상의 예를 들어 이야기를 풀어놓은 곳에서는 고개를 연신 끄덕이게 되지만 사회적인 문제, 세계적 아니 인류가 풀어야 하는 질문, 경고에서는 누가 나의 잘못을 지적하기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뜨끔해졌다. 2015년 프란치스코 교황이 전 세계 카톨릭 성직자들에게 보냈다는 질문을 보고선 둔기로 머리를 세게 맞은 기분이었다. 그야말로 근원적이고 근본적인 질문들이지만 누구도 생각하지 않는 질문들. 나란 존재가 이 지구상에 살면서 적어도 민폐가 되지 않으려면 한동안 깊이 고민해봐야 할 것 같다.

 

인간은 왜 이 지구에 있는가? 이 지상에서의 인간의 삶의 목적인 무엇인가? 애당초 인간이 지상에 있는 이유는 무엇인가?

이 지상에서 우리가 하는 일의 목표는 무엇이며 우리가 기울이는 모든 노력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 지구에 인간이 필요한가? - 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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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일 1수, 대학에서 인생의 한 수를 배우다 - 내 안의 거인을 깨우는 고전 강독
신정근 지음 / 21세기북스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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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어> ‘위정편에 이런 대목이 있다.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뜻이 확고하게 섰고, 마흔에는 인생관이 확립되어 마음에 혼란(유혹)이 없고.’ 사람 나이 마흔 살을 미혹되지 않는다하여 불혹이라 이르는 건 여기서 비롯됐다. 그렇다면 내 나이 마흔 살은 어떠했는가. 미혹되거나 흔들림이 없었나? 천만의 말씀이다. 매사에 고민을 했고 세찬 바람 앞의 갈대처럼 수없이 흔들렸다. 만약 공자선생이 내 앞에 있었다면 아마 한마디 쏘아 붙였을 게 분명하다. 이보시오 공자선생. 무슨 근거 없는 말을 그리 하시오?

 

쉰 살이 되고 난 또다시 깊은 고민에 빠졌다. 공자는 五十而知天命, 쉰에는 천명을 깨달아 알게 되었다고 하는데 천명은 @! 내가 하늘의 뜻을 어찌 아는데? 알수나 있어? 아줌마가 내 천명인건가? ? 씩씩대면서 공연히 하늘을 쏘아보거나 흘겨보곤 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주변을 지나는 이가 없었던 것이 천만다행이랄까. 그저 공자랑 나는 수준이, 차원이 달라인정해버리고 나면 마음이 편해질 것을....

 

신정근 교수의 책을 만난 걸 그래서였다. 나의 무지와 부덕함을 조금이나마 모면하고 싶은 마음이 컸기에 마흔엔 논어, 오십엔 중용이 필요하다는 그의 조언을 받아들였다. <논어>로 하루가 다르게 복잡해지는 삶을 살아가는데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중용>으로 우왕좌왕 흔들리는 일상 속에서 중심을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지침을 찾고 싶었다. 성과는 어땠나 돌아보면 읽을 때 분명 무릎을 쳤으니 성과가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돌아서면 잊어버리니 예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은 것 같은 아리송한 느낌?(그래서 고전인가 싶기도?)

 

<11, 대학에서 인생의 한수를 배우다>의 출간이 그래서 반가웠다. 동양고전으로 한걸음 더 나아가는 계기가 되리라 생각했는데 내 안의 거인을 깨우는 고전강독이란 부제에서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거인이라니 했는데 책날개에서 힌트를 찾았다. ‘큰사람이란 자신을 온전히 지켜 세상을 밝히는 사람이다’. 리더나 지도자처럼 누군가를 이끌어가는 사람뿐만 아니라 현대를 살아가는 누구나 자신의 삶에서 리더, 내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한다면 <대학>을 읽으라는 거였다. 단 한꺼번에 읽지 말고 순서 상관없이 매일 한 문장, 1수씩 꾸준히 읽으라는 게 포인트.

 

사람은 늘 부족하고 불완전하기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상황에서 배우지 않을 수가 없다. 배워야만 이전에 했던 실수를 되풀이하지 않고 내재된 가능성을 찾아내서 미래를 설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글에서

 

책은 이전에 출간된 것과 동일한 형식이다. 우리 인생에서 꼭 필요한 키워드 10개를 추린 다음 각각 5개의 단어를 선별하고 <대학> 중에서 해당하는 오늘의 한수를 소개하고 있는데 단계별로 나아간다. 입문(방에 들어섬)에서 원문이 어떻게 읽히는지, 승당(당에 오름)에서 원문의 독음과 번역을, 입실(방에 들어섬)에서 원문의 한자어 뜻과 맥락을 풀이하고 여언(함께 이야기 나누기)를 통해 삶에서 되새겨보고 적용할수 있는지 알려준다.

 

예를들면 2혁신의 키워드 쇄신편이 오늘의 한수로 일일신, 나날이 새로워지다로 소개한 다음 입문에서 새롭다, 새로워진다는 의미가 살펴보고 승당에서 원문과 독음 苟日新, 日日新, 又日新(구일신, 일일신, 우일신)’, ‘진실로 어느 날 이전보다 새로워졌다면 나날이 새로워지고 더욱더 나날이 새로워져라고 해석을, ‘입실에서는 한자와 문구의 뜻을 풀이하는데 우일신단순히 중복이 아니라 점증을 나타낸다는 것, 조금씩 조금씩 더 나아지는 발전을 함축하고 있음을 짚어준다. ‘여언에서는 현실적용을 다이어트의 과정에 비유해서 설명하고 있어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이제 사람은 단순히 변화의 방향으로 지속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고 성취와 역량이 한 단계 뛰어오르는 비약을 향한다. 비행기에서 우주선으로 나아가는 방식이다. -62.

 

동양고전은 사실 어렵다. 한자도 어려운데 그 뜻까지 헤아려야 한다니. 게다가 이 책은 형식조차 예사롭지 않다. 마치 낯선 이의 집에 처음 들어설 때처럼 처음엔 모든 것이 낯설게 다가온다. 하지만 하루에 한수씩, 마음에 끌리는 것부터 조금씩 읽고 문장의 뜻을 생각하다 보면 50, 50수를 읽어내는건 금방이지 않을까? 물론 순서 상관없이 읽다 보면 헛갈릴 수 있는데 그것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책의 뒷부분에는 부록으로 오늘의 한수 체크리스트도 있다. 사소한 것 같지만 은근 도움이 되는 부분이었다. 다만 본문에서 원문의 한자 크기가 작아서 보기가 힘들었다는게 옥의 티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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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걷다 - 3.1운동부터 임시정부까지 그 길을 걸은 사람들 표석 시리즈
전국역사지도사모임 지음 / 유씨북스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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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댄 계속 나아가시오. 난 한걸음 물러나니

 

본방도 아니고 재방, 그것도 종영된지 한참 지난 드라마를 스치듯 우연히 가슴이 철렁했다. 서로가 서로를 마음속 깊이 담아두고 있음이 분명해 보이는 두 남녀주인공이 가슴 절절한 사랑을 해도 모자랄 판에 나아간다느니, ‘물러난다. 대체 무슨 연유일까.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드라마를 즐겨서 보질 않지만 그 사연이 궁금해서 한동안 문제의 드라마를 찾아보고 알게 됐다. 드라마가 구한말 조선의 의병들의 이야기. 조선의 독립을 염원했지만 끝내 장렬하게 전사하고 말았던 이들의 이야기란 것을. 물론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 실존 인물이 아니란 걸 알지만 그럼에도 알고 싶었다. 불꽃처럼 뜨겁게 타올랐다가 지고 말았던 의병과 독립투사, 그들의 이야기를...

 

일제 식민치하의 역사와 항일 독립운동을 담은 책 중에서 <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걷다>를 선택한 건 저자가 개인이 아니란 점이었다. 전국역사지도사모임에서 공동저자로 출간된 책이어서 신뢰도가 올라갔다. 제목에 있는 표석의 사전적 의미는 어떤 것을 다른 것과 구별하려고 표지로 세우는 돌이란 뜻으로 사람들이 그 장소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인식할 수 있도록 세워둔 것이다. 역사지도사들의 모임에서는 그런 표석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경성한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한 이야기를 책으로 출간했고 이번에는 우리의 독립운동 역사를 담았다.

 

마침내 191928일 일본 도쿄에서 유학생들이 독립선언을 했다. 일명 조선청년독립선언이라고도 하는데, 3·1운동 전후에 발표된 독립선언서 중 2·8독립선언서는 학생들에 의해 작성되었다는 점과 3·1운동 발단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는 데 그 특징이 있다. - 31

 

‘3.1운동부터 임시정부까지 그 길을 걸은 사람들이라는 표지의 문구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책은 3.1운동에서 임시정부로 이어지는 독립운동의 역사와 그 길을 굳건히 걸었던 사람들의 현장의 기록을 담고 있다. 책은 독립운동을 통해 민주공화제가 탄생하는 과정와 자주독립을 위해 목숨을 바쳐 뜨겁게 타올랐던 독립투사들로 나뉜다. 그런 다음 네 개의 장에 걸쳐 해당과정과 인물들의 이야기를 풀어놓고 있는데 내용이 어렵지 않다. 무엇보다 매 장마다 본문에 언급된 표석의 위치를 상세도로 지도에 표시해두어서 직접 찾아가거나 답사할 때 좋은 참고자료가 될 것 같다.

 

본문 중에 특히 인상적이었던 것은 19193.1 독립선언과 관련해서 기미독립선언서가 나오기까지 일련의 과정을 전하고 차분히 전하고 있는데 3.1만세운동의 이틀 전부터의 일들을 마치 일기처럼 기록해놓아서 당시 상황이 얼마나 긴박하게 진행됐는지 짐작해볼 수 있다. 상하이에서 진행된 회의에서 대한민국이라는 국호와 함께 대한민국임시정부라는 명칭이 어떻게, 어떤 의미로 결정되었는지 전하고 있는데 작년 411일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수립 100주년이었던지라 더 눈여겨보게 됐다.

 

3·1운동의 직접적 결과물인 임시정부는 상하이와 한성에서 수립한 두 개뿐이었을까?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무려 8개의 이름이 거론되고 있다. 그중 러시아령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중국 상하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국내의 한성임시정부는 실체가 있고, 조선민국임시정부·대한민간정부·고려임시정부·임시대한공화정부·신한민국임시정부 등 나머지 5곳의 임시정부는 계획 단계에만 머물렀던 것으로 전해진다. - 160.

 

그동안 학창시절 수업이나 역사서적으로도 접하지 못했던 독립운동가 중에 여성들을 소개해놓은 점도 눈길을 끌었다. 상하이 임시정부의 안살림을 도맡고 국경을 넘나들며 밀사 역할을 해내어 한국의 잔 다르크로 불린 정정화를 비롯해서 여자 안중근, 독립군의 어머니란 수식어로 늘 따라다니는 남자현은 영화 <암살>에서 저격수 안옥윤의 실제 모델로 삼은 인물이라고 한다. 이 외에도 최초의 여성 비행사인 권기옥, ‘아무리 여자인들 나라 사랑 모를쏘냐. 아무리 남녀가 유별한들 나라 없이 소용 있나. 우리도 나가 의병 하러 나가보세라는 [안사람 의병가]를 지어 여성들의 의병활동을 장려했던 최초의 여성 의병장 윤희순 등 독립운동에 관련한 역사나 인물들에 대해 처음 알게 된 것들이 많았다.

 

김향화는 2개월의 감금과 고문 끝에 경성지방법원 수원지청에서 징역 6개월의 확정 판결을 받고 서대문형무소로 이감되어 옥고를 치렀다. 영화 <항거: 유관순 이야기>(2019)를 보면, 8호실에 유관순 등 여성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수감된 모습이 나온다. - 297

 

일제의 탄압과 핍박에서 벗어나 자주독립을 위해 치열하게 살아간 이들의 기록을 만날 수 있어 정말 유익했지만 더러 아쉬움도 있었다. 본문 곳곳에는 내용와 관련한 사진이 수록되어 있지만 표석은 눈에 띄지 않았는데 책 뒤쪽에 따로 표석만 모아놓았다. <표석을 따라 제국에서 민국으로 걷다, 서울편>이 아닌데 왜 지방에 관한 내용은 없을까. 의문이 들었다. 지방에서는 독립운동을 하지 않은 것도 아닐텐데 말이다.

 

아쉬운 마음에 책장을 덮자마자 부산의 독립운동을 검색했다. 그랬더니 동래사적공원에는 부산 3.1 독립운동 기념탑’, 중앙공원에는 부산광복기념관이 있고 여성독립운동가를 발굴하고 연구하는 한국여성독립운동연구소란 곳도 있었다. 마음 편히 외출할 수 있는 날이 되면 시간 내어 가족들과 한번 방문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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