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샤 창비청소년문학 117
표명희 지음 / 창비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우리 막내, 인자 느그 집 가나?”

신혼여행에서 돌아와 친정과 시댁, 양가에 인사를 드리고 신혼집으로 향하는 내게 친정엄마가 말씀하셨다. 이제 니 집으로 가느냐고. 결혼했으니 앞으로 여기, 친정에 자주 못 올 거란 의미. 애정 표현에 서툰 엄마로선 이것이 막내딸과의 아쉬움을 표현한 최대치였다. 하지만 친정엄마가 간과한 것이 있으니 나의 살림 솜씨가 형편없다는 거다. 한동안 친정집 방문이 어려울 거란 예상과는 달리 거의 매일 내 집 드나들 듯 들락거렸다. 같은 도시, 버스로 고작 20분 거리에 불과하지만 사랑 하는 가족, 어릴 적 추억이 가득한 집을 떠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물며 내가 태어난 나라, 조국을 떠난다는 건 어떨까. 얼마나 큰 결심을 하고 얼마나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 할까. 감히 짐작조차 되지 않는다.


 

여기 한 가족이 있다. 한 쌍의 부부, 그리고 그의 네 아이 버샤, 텔민, 세실, 나즈. 남편과 아내는 서로를 아끼고 큰아이는 동생들을 세심하고 돌보는, 그야말로 다복한 가족이다. 하지만 그들을 둘러싼 환경, 머물고 있는 공간을 들여다보면 상황은 완전히 달라진다. 미래를 꿈꾸기 이전에 오늘 하루를 무탈하게, 내일도 무사하게 맞이할 수 있는지조차 장담할 수 없다. 그들이 살고 있는 곳은 하루에도 전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오고 가는 국제공항의 출국장이기 때문이다.


 

나누고 가르는 거라면 정말 지긋지긋하다. 우리가 이런 처지에 내몰린 것도 알고 보면 그런 구분 때문이다. 같은 무슬림도 시아파와 수니파로 나뉘고, 같은 수니파도 강경파와 온건파로 나뉘고…… 그뿐인가? 군인도 정부군과 반군으로 나뉘고, 뒷배가 되는 나라도 미국과 러시아로 나뉘고……. 사소한 나누기에서 시작한 불씨가 결국 같은 민족끼리 총을 겨누는 내전으로 치달아 사람들을 죽음의 구렁텅이로까지 내몰지 않았나. -36.


 

아는 사람 하나 없는, 언어도 통하지 않는 땅에 발을 디딘 그들은 출국장 한 켠에 여행 가방과 휘장을 둘러 임시로 거처를 꾸렸다. 조국에선 부유한 명문가에서 태어나 풍족한 생활을 누렸던 그들이지만 지금은 한 달이 넘는 동안 오직 난민 심사에서 무사히 통과하는 것만 바라고 있다. 하지만 그들이 선택한 나라는 웬만해선 난민을 잘 받아들이지 않았다. 거기다 무슬림에 대한 인식도 최악. 때문에 그들의 난민신청이 받아들여질 가능성은 희박했다. 국경을 몇 차례 넘으면서 자금사정도 악화되었다. 그들에겐 달리 방법이 없었다. 사회에 악영향을 주지 않는 온순한 사람들이란 인상을 주기 위해 어떻게든 우선 사람들 눈에 띄면 안되었다. 그것이 유일한 생존수칙이었다. 하지만 상황은 그들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불회부결정이 내려지고 마는데……


 

어느새 출국장 끝이다. 우리가 몸담고 있는 세상의 마지막 지점에 이른 것이다. 어릴 적 화려한 미로 같던 통로를 지나 이르던 황금 지붕의 모스크처럼 이곳도 내겐 해방구나 다름없다. 유리 벽 너머로 보이는 바깥세상이라야 드넓은 활주로가 펼쳐진 공항 마당이 전부지만……. -190


 

공항 출국장에서 난민처럼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를 읽으며 순간 톰 행크스가 출연했던 영화 <터미널>이 떠올랐다. 모국에서 갑자기 터진 쿠데타로 오갈 데가 없어지자 주인공이 어쩔 수 없이 공항에서 지내는 줄거린데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라고 해서 인상적으로 봤던 기억이 난다. 그 영화처럼 소설 속 가족도 공항에서 살아가기 위해 어렵게 끼니를 해결하고 책을 구해 낯선 언어를 익히고 자신들의 상황을 알리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다. 그리고 그런 그들을 도와주기 위해 다가가는 사람들이 있었다. 하지만 명쾌한 해결책은 쉽게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설상가상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퍼지면서 세계는 공포의 도가니가 되고 마는데...


 

거대한 우주에서 보자면 한낱 벽촌에 지나지 않을 이 지구 위에 살고 있는 우리 인간은 신의 눈에 얼마나 가련하고 가소로운 존재일까. 한쪽에서는 테러와 전쟁으로 울부짖고 다른 쪽에서는 축제와 파티로 환호하는, 어수선하고 모순투성이인 이 행성이 말이다. 엄밀히 따지면 우리는 기껏 지구의 껍데기에 달라붙어 아등바등 살아가는 가련한 피조물 아닌가. -110

 


수수께끼를 푸는 기분으로 소설을 읽었다. 버샤가 실어증을 앓게 된 어떤 이유일까. 이 가족이 안고 있는 비밀은 대체 뭘까. 무슬림에 대한 선입관, 고정관념을 전환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을까. 이어질 이야기가 궁금해서 책장 넘기는 속도가 빨라졌지만 결국 묵직한 숙제가 남겨졌다.

 


국경을 넘는 것 이상으로 어려운 건 마음의 벽을 허무는 것임을 나는 잘 알고 있다. 이 무거운 짐을 내려놓고 살아갈 나라의 국경선 앞에 우리는 여전히 희망을 갖고 서 있다. 그들이 마음의 문을 열어 우리를 맞아줄 날을 기다리며……. -32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고요한 우연 - 제13회 문학동네청소년문학상 대상 수상작 문학동네 청소년 63
김수빈 지음 / 문학동네 / 202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내일이 방학이었으면 좋겠다.”


3월의 첫날 저녁을 먹으면서 아이들이 말했다. 새 학년이 시작되는 날을 하루 앞두고 벌써 방학 타령이라니. 고등학생인 둘째는 그렇다 쳐도 대학생인 첫째까지? 아이들에게 학교는 그렇게나 가기 싫은 장소였던가. 잔뜩 침울해 있는 아이들에게 말했다.

엄만, 대학 졸업한 그해의 3월이 제일 슬펐어.”

왜요?”

더이상 학생이 아니란 걸 알았거든. 엄만 지금도 학교에 가고 싶어. 정 그렇게 싫으면 엄마가 대리출석이라도 해줄까? 고딩은 몰라도 대학 강의실은 가능할 것 같은데?”

에엑? 엄마! 농담도 되는 소리를 해야지! 학교 보내려고 별소릴 다 하셔.”

사차원 엄마가 학교에 와서 무슨 엉뚱한 짓을 할지 모른다고 생각한 걸까? 좀전까지 학교 가기 싫다고 투덜거리던 녀석들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면서 각자 방으로 흩어졌다. 난 살짝 아쉬웠다. 그렇게 어처구니 없는 소리였나?

 


청소년 소설을 읽는 것은 언제나 즐겁다. 아주 오래전에 지나온, 당시엔 두 아들처럼 하루하루가 지겹고 힘들기만 했던 그 시절을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기에 설레기까지 하다.

 


온통 짙은 초록의 숲이 그려진 <고요한 우연>. 표지만 언뜻 보고 숲에서 일어나는 이야기인가 했다. 그러다 표지 아래쪽, 계단에 앉은 소녀가 고양이 두 마리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을 보고 호기심이 일었다. “나는 네가 궁금해졌어. 아주 많이.”라는 부제처럼. ‘가 누굴까? 혹시 고양이?


 

이쪽으로 와서 앉을래?”

괜찮아.”

긴장할 것 하나도 없어.”


책장을 넘기자마자 마주하는 것은 심상찮은 분위기. 학교에서 무슨 일이 생겼다. 아니, ‘누구에게 심각한 일이 발생했다. 즉각 해당 학생과 같은 반 아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가 진행되었다. 그 결과 는 담임 선생님, 학생부장 선생님의 호출을 받고 상담실로 향한다. 음료수를 내어주며 선생님은 그 아이와의 관계에 대해 묻기 시작한다. 평소와 다름없이 행동했던 그 아이가 마치 증발이라도 해 버린 것처럼흔적도 없이 사라졌다고. 극도로 말을 조심해서 건네는 선생님들의 의중은 단 하나. 넌 뭔가 아는 게 없냐는 것.

 


는 머리가 새하얘진다. 외모도, 성적도, 성격도 어느 것 하나 특별하지 않은, 평범하다 못해 스스로도 심심하다고 여기는 자신에게 선생님들의 관심이 쏠리니 어느 때보다 부담스러울 수밖에 없는데. 무엇보다 놀라운 건 그 아이가 사건 사고에 휘말렸을 가능성도 있다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감한 가운데 순간 떠오른 것. 그 아이가 새벽에 자신이 보낸 SNS 메시지를 확인했다는 사실.

 


단 두 장에 불과한 초입 부분을 읽으며 많은 의문이 떠올랐다. ‘그 아이는 대체 누굴까. 왜 사라졌을까. 대체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이가 사라진 지 나흘이나 지났다고? 그 아이는 무사한 걸까?


 

사라진 아이의 행방을 찾는 것으로 시작한 소설은 (이수현)’의 서술로 진행된다. 같은 반 아이들에 대해서, 교실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일들에 대해서. 그런 가운데 왠지 자꾸만 시선이 가고 신경이 쓰이고 마음이 끌리는 아이들을 알기 위해 는 우연한 기회에 알게 된 한 아이의 SNS 계정을 통해 그들과 조금씩 가까워지는데...

 


책은 한 번 잡으면 바로 끝으로 내달릴 만큼 몰입감이 높은 작품이다. 교실 바로 앞뒤로 앉아 있으면서도 카톡으로 대화를 주고받는다는 요즘 아이들의 모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얼굴을 마주하고 눈을 바라보며 나누는 대화나 전화통화 보다 SNS가 친숙한 아이들. 그렇기에 벌어질 수 있는 이야기들이 펼쳐진다.

 


첨엔 고요한 우연이란 제목이 무슨 의미일까. 의문을 품었다. 무엇을 강조하기 위한 것일까. ‘고요함일까. ‘우연일까. 궁금증은 본문에서 직접 확인하시길.

 


 

오늘 일을 장난이라고 해도 되는 걸까. 이건 명백한 괴롭힘이었다. 아이들은 고요가 먼저 미움받을 행동을 했다고 말한다. 미움받을 행동을 하면 괴롭혀도 괜찮은 걸까. 그럴 만한 이유가 있으면 상대를 괴롭힐 권리가 주어지는 걸까.- 59


 

열일곱, 내 인생에 주어진 가장 큰 행운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할 수 있다. 지아, 내 친구 서지아. - 178


 

스스로 빛을 내지 않아도 밝게 빛나는 별이 있다고 말해 주던 다정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자신은 스물세 번째 피규어라고 했던 이우연의 말도 떠올랐다. 나 또한 그 어디쯤 서 있겠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나는 엄마의 특별 한정판은 아니지만 엄마에게 꼭 필요했던 피규어다. 그걸로 됐다. 그러면 충분했다. - 188~189쪽


 

사람들은 달을 올려다본다고만 생각하지, 달이 지구를 보고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하는 것 같아. 단 한 순간도 놓치지 않고 지구를 바라보고 있는 것은 달인데 말이야. - 229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행성 1 고양이 시리즈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전미연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얼마전부터 보기 시작한 미드가 있다. 죽어도 죽지 않는, 좀비로 인해 사람들은 목숨을 잃고 간신히 살아남은 생존자들은 그들끼리 모여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간다. 하지만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간신히 평온을 되찾은 이들을 방해하고 위협하는 세력이 나타나면서 사람들은 이제 좀비는 물론 사람들과도 목숨을 건 치열한 전쟁을 치러야 하는 상황에 놓이고 만다. 자신들의 삶의 터전을 지키고 존립을 위해 좀비가 아닌 사람들을 죽이게 되는 지경에 이르자 사람들은 혼란을 느끼고 서로 갈등을 빚는다. 그럴 때 해결책을 제시하고 앞장서서 달려가는 것은 언제나 집단의 리더였는데 그 장면에서 떠오른 생각은 리더란 역시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란 것이다. 이런걸 드라마를 보고 느끼다니 놀랍다고 해야 할까 의외라고 해야 할까.



미드와 유사한 상황이 소설 속에서 펼쳐졌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문명>은 전염병과 테러, 전쟁으로 인해 황폐해진 지구가 배경이 된 작품이다. 첨단과학의 힘을 빌어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던 인류는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기 시작한 쥐떼의 공격을 받고 문명 그 자체가 송두리째 무너질 위기에 처하게 되는데 그때 짠 하고 등장한 생명체가 있으니 바로 고양이였다. 쥐떼의 공격을 물리치고 지구에 자신들 고양이의 문명을 건설하겠다는 야무진 포부를 가진 고양이 바스테트의 모험이 펼쳐진다.


그 뒷이야기가 최근에 출간된 <행성>에서 이어진다. 쥐떼와 전염병으로 아수라장이 된 파리에서 암코양이 바스테트는 무리와 함께 배를 타고 탈출한다. ‘마지막 희망’호를 타고 바다 건너 닿는 곳은 살기 좋으리란 희망을 품고서. 하지만 눈 앞에 펼쳐진 뉴욕의 풍경에 그는 충격을 받고 만다. 뉴욕 역시 파리처럼 쥐떼가 점령하고 있었던 것. 사방이 온통 갈색 쥐 투성이였다. 바스테트를 비롯한 일행은 할 말을 잃고. 이 상황을 어떻게 풀어갈 것인지 각자 다른 의견을 내놓는 가운데 갑판에서 비상 사이렌이 올려퍼진다. 쥐들의 공격이 시작됐다고. 닻줄을 타고 벌써 갑판으로 올라왔다고.


고양이-인간 엽합군은 돼지와 개까지 힘을 합쳐 맞서지만 한국전에서 중국의 인해전술처럼 끝없이 밀고 들어오는 미국 쥐떼의 공격에 치병타를 입고 만다. 처음 배에 올랐던 이백여 명이 겨우 일곱으로 줄어들었다. 목숨을 잃은 동료와 친구들을 위해 제대로 애도를 가질 여력도 없는 상황, 그때 해안의 한 고층 빌딩 꼭대기에서 반짝 하고 섬광이 비치기 시작했다. 길고 짧은 신호는 바로 모스부호였고 'C.O.M.E'이라는 의미였다. 흐밍호에 계속 머물자니 자신들을 호시탐탐 노리는 쥐떼의 공격을 감당할 수 없고 그렇다고 바다 위에서 해안가의 고층건물까지 어떻게 갈것인가.


소설 <행성>은 이전에 출간된 <고양이>와 <문명>에 이어지는 내용이지만 앞선 작품을 읽지 않아도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본문에 지난 이야기가 간략하게 언급되어 있어서 스토리를 짚어가는데 크게 도움이 된다. 베르베르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의 상상력이 풀어내는 세계와 이야기에 놀라게 된다. 인간이 아닌 동물, 고양이의 시선으로 풀어가는 소설, 2권에선 바스테트 일행에게 어떤 모험이 펼쳐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런던의 마지막 서점
매들린 마틴 지음, 김미선 옮김 / 문학서재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전쟁과 책. 이것만큼 어울리지 않는 것이 있을까. 무자비하고 참혹한 전투가 이어지는 전쟁과 조용히 책장을 넘기며 몰입하는 독서는 정반대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한다. 그래서 결코 한데 묶을 수 없다고 여겨지지만 예측은 여지없이 깨어지고 말았다. 오래전 황석영 작가의 강연회에서 들었던 얘기가 생각난다. 작가는 한국전쟁 때 대구로 피난 갔었는데 모든 것이 부족하던 시절에도 어머니께선 <걸리버 여행기><소공자>를 사다주셨다고. 총성과 폭격이 쏟아지는 가운데서도 책을 인쇄하고 출판하고 또 그것을 읽는 것이 가능한가 싶었지만 그래서 더 기억에 남았다.


 

전쟁과 책. 어쩌면 이 둘이야말로 함께 있어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전쟁터로 간 책들>에서는 2차 대전이 한창이던 때 나치 독일에 대항하고 군인들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책이 필요하다는 걸 깨닫고 전시 도서 진중문고를 보급하는 과정을 다루고 있다. 군인들이 배낭이나 주머니에 간편하게 휴대할 수 있도록 제작된 페이퍼북은 당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고 한다. 그런가하면 <다라야의 지하 비밀 도서관>에서는 내전이 끊이지 않는 시리아에서 정부의 무자비한 진압과 학살로 공포 속에서 살아가던 다라야 시민들이 폐허 속에서 찾아낸 책을 모아 만든 비밀 지하 도서관을 포탄을 피해 드나들면서 희망을 발견해나가는 모습을 이야기한다. 전쟁이라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사람들로 하여금 삶의 본질을 돌아보게 하는 것은 바로 책이었다.

 

 


그레이스는 늘 런던에서 사는 날을 꿈꿨다. 그리고 그 꿈은 예상치 못한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낡은 여행가방을 들고 친구 비브와 함께 런던에 도착한 그녀는 곧장 브리튼가로 향한다. 그녀의 엄마가 세상을 떠나고 삼촌네에서도 쫓겨나는 지경에 이르자 엄마의 친구인 웨더포드 아주머니에게 방을 빌려서 지내기로 한 것이다. 거기다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에번스 씨의 가게에 일하게 되는데, 그곳이 하필 서점이었다. 책에 대한 지식도 책을 읽어본 적도 없었던 그레이스는 실망감을 안고 서점 [프림로즈 힐]을 찾아간다. 하지만 우중충한 외관, 음울한 실내 분위기, 책장 가득한 먼지. 그리고 일하고 싶다는 그레이스에게 퉁명스럽게 대하는 에번스씨. [프림로즈 힐]과는 처음부터 모든 것이 삐걱거렸다. 런던에서 살기 위해 일자리가 절실했던 그레이스는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보조 점원으로 일하게 된다.

 



책에 대해 알지 못하면서 서점에서 일하게 된 그레이스. 그녀의 서점 근무는 첫날부터 우왕좌왕이었다. 에반스씨는 아무 일도 하지 말고 있으라고 했지만 책장의 먼지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던 그레이스는 먼지를 털어내기 시작하지만 이내 감당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그런 가운데 서점을 찾은 손님이 그녀에게 책의 위치를 묻는다. 서가의 위치를 몰라 당황하던 그녀는 다른 손님의 도움을 받아 해결하게 된다. 어렸을 때부터 [프림로즈 힐]에 자주 왔었다는 그는 책 읽을 시간이 많지 않았다는 그레이스에게 <몬테크리스토 백작>을 추천한다. 먼지를 흠뻑 뒤집어쓰고 집으로 돌아온 그레이스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된다. 불길한 예감, 바로 전쟁다.

 



피난을 가고 징집이 이루어지고 등화관제와 공습....전쟁 중에 책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 싶지만 그럴수록 더욱 책은 필요했다. 사람들에겐 즐길 거리가 필요했다. 그레이스는 삼촌네 가게에서의 경험을 되살려서 서점에 손님을 더 끌어모으기 위해 노력하는데...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을 보면서 느낀 것이지만) 금방 끝날 거라 예상했던 전쟁은 몇 년이고 계속됐다. 평범한 일상은 전쟁으로 인해 송두리째 무너지고 말았지만 그런 가운데서도 사람들은 참혹한 전쟁의 공포를 이겨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전쟁으로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 친구 그리고 이웃을 떠나보냈고 삶의 터전마저 잃었지만 절망 속에서도 실낱처럼 가느다란 희망을 찾기 위해 그들은 서로 위로했다. 그레이스가 낭독하는 것을 듣기 위해 사람들은 서점으로 모여들었고 끊임없이 책을 읽어나가는 대목이 인상적이었다. 책이 지닌 무한한 이야기의 힘이란 게 어쩌면 이런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첫 두 문장을 읽을 때에는 혀가 꼬였고,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실수를 알아차렸을까 불편한 마음을 의식했다. 그리고 저 멀리 어딘가에서 폭탄이 터져 굉음이 그레이스의 마음을 마구 어지럽힐 때에는 어디까지 읽었는지 잊어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군중들의 얼굴이 사라지고 오로지 이야기만 머릿속에 들어왔다. 그녀의 세상은 도로샤의 세상속으로 휘감겨 들어갔다. - 269

 


 

제인 에어가 그녀의 무릎 위에 놓여 있었다. 이는 모두를 하나로 묶어주는, 전쟁과 위험에 맞서 그들을 통합하는 상징이었다. 제인 에어에게는 용기가 있었다. 자신과 맞닥뜨린 그 모든 것에 대처할 수 있는 엄청난 용기가. 그리고 그레이스도 그 순간 책 속의 주인공으로부터 많은 용기를 끌어내고자 했다. - 4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낯선 자의 일기
엘리 그리피스 지음, 박현주 옮김 / 나무옆의자 / 2021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추리스릴러 소설, 정말 좋아합니다. 추리소설을 읽기 시작한 건 초등학생때입니다. 셜록홈즈와 루팡에 매료된 후로 아가사 크리스티, 앨러리 퀸, 에드거 앨런 포의 작품을 섭렵했고 성인이 되어 히가시노 게이고, 미야베 미유키, 우타노 쇼고, 스티그 라르손, 요 네스뵈, 존 르 카레, 마이클 코넬리, 헬렌 코벤...국적을 가리지 않고 마구 읽어댔습니다. 그러다 몇 년 전 인문서적을 읽으면서 예전만큼 추리스릴러물을 즐기진 못하고 있는데요. 그럼 관심이 완전히 사라졌느냐 그건 또 아닙니다. 수시로 서점의 신간 코너를 보면서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이나 흥미로운 책을 메모해두곤 하는데요.


 

얼마전엔 표지가 아주 인상적인 책을 봤습니다. 붉은 보름달이 뜬 깊은 밤에 이층집이 그려져 있는데요. 2층 방에 켜진 전등 불빛과 양옆의 어둠, 책상 의자가 순간적으로 투구를 쓴 무사처럼 보이는 거예요. 그리고 그 집을 감시하기라도 하듯 정체를 감추고 있는 검은 그림자 넷과 그 집을 향해 털을 잔뜩 곤두세우고 울부짖는 덩치 큰 개(?) 한 마리. 대체 저 이층집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 걸까. 거기다 에드거 상 수상작’ ‘빼어난 고딕 스릴러와 같은 띠지의 문구가 더해지니 안 읽을 수가 없더군요.


 

괜찮으시면,” 낯선 사람이 말했다. “이야기를 하나 해드리고 싶소.” - 11

 


<낯선 자의 일기>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어떤 남자가 기차여행 중에 만난 이에게 자신의 젊은 시절 얘기를 해주겠다며 말문을 여는데요. 이야기가 막 흥미로워지기 시작하자마자 금방 끊기고 맙니다. 문예창작반 수업을 위해 낯선 사람이란 작품의 도입부로 선생과 학생들은 질문과 답변, 유추하면서 대화를 이어가는데요. 공교롭게도 낯선 사람을 쓴 R.M.홀랜드의 집이 바로 그 학교 건물이었고 수업을 진행한 선생은 그 홀랜드의 전기를 집필 중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곧이어 그 선생, 클레어는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게 됩니다. 같은 학교 동료이자 절친인 엘라가 살해당했다는 것. 어때요, 이것만으로도 예사롭지 않지요? 홀랜드의 생전 집이자 학교에 감춰진 비밀은 없는지, 엘라는 무슨 이유로 살해당했는지, 이런 모든 일이 클레어와 아무런 상관이 없는 건지. 풀어야 할 의문, 속된 말로 떡밥이 한두 개가 아닌 거죠.


 

살인사건이 벌어지면 가장 먼저 하는 건? 피해자의 주변 인물 탐문부터 하지요. <낯선 자의 일기>도 마찬가집니다. 엘라에게 불쑥 두 명의 형사(하빈더 카우어와 닐 윈스턴)가 찾아옵니다. 젊고 체구는 작지만 강한 카리스마의 하빈더는 클레어에게 엘라에 대해 묻는데요. 형식적인 것 같은 질문 속에 사건의 실마리를 찾으려는 하빈더와 다소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는 클레어. 하빈더는 이런 클레어에게 반감을 갖습니다. 그도 그럴것이 엘라의 페이스북에 있는 ‘C는 알고 있다는 글과 시체에서 발견된 쪽지에서 템페스트의 인용구 지옥은 비었다.”는 모두 클레어에게 의심의 눈초리로 향하게 했는데요. 뚜렷한 증거를 발견하지 못한 상태에서 사건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시간만 흐르던 어느 날, 클레어는 자신의 일기장에서 낯선 필체의 글을 발견합니다. 안녕, 클레어. 당신은 나를 모르죠.’

 


소설은 클레어와 하빈더, 그리고 클레어의 딸 조지아 세 명이 차례로 주된 화자가 되어 진행됩니다. 엘라를 중심으로 해서 사건 전후로 세 명의 인물에게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들 각자의 관점으로 풀어가는데요. 사람들은 하나의 일을 동시에 겪어도 저마다 생각과 기억에 약간의 차이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절친이라 해도, 부모자식간이라도 마찬가진데요. 그렇게 전혀 생각지 못했던 것에서 사건의 의문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드러나는 최대의 반전... 대체 엘라를 살해한 범인은 누구일까요?


 

주된 화자인 클레어가 책을 쓰는 작가여서인지 본문 곳곳에는 여러 책이 언급되는데요. 낯선 책도 있었지만 <흰옷을 입은 여인>으로 단박에 애정작가가 된 윌키 콜린스를 만나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하지만 읽는 내내 궁금했던 건 바로 ‘R.M.홀랜드는 대체 누구지?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았나? ‘고딕 스릴러는 뭘까? 궁금했는데요. 중세의 건축물 특유의 폐허와 같은, 공포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는데 거기에 인간의 원초적인 본능과 어두운 심리가 더해진 소설을 고딕문학이라고 부른다고 합니다. 500쪽에 이르는 두툼한 책은 생각보다 금방 읽힙니다. 일상에서 벗어나 몰입해서 읽을 책을 찾으신다면, <낯선 자의 일기>를 들춰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