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30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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깊은 밤, 사막 한 가운데로 헬리콥터가 날아듭니다. 도심에서 벗어나 휘황찬란한 불빛 대신 잡초만이 무성한 곳. 헬리콥터의 엔진 소리 외엔 어떤 소리도 들리지 않고 사방이 고요합니다. 헬리콥터가 지상에서 900미터 높이의 상공에 이르자 갑자기 문이 열리고 곧 이어서 한 남자가 밖으로 떨어집니다. 남자를 허공 속으로 밀어 떨어뜨린 헬리콥터는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유유히 어둠 속으로 사라집니다.

 

 

<1030>의 첫 부분인데요. 소설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부분은 바로 첫, 도입부분이라고 하지요. 거기에 하나 더 매력적이고 개성적인 주인공도 빼놓을 순 없습니다. 해서 작가들은 처음부터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기 위한 수단을 총동원합니다. 상투적이지 않은 신선한 도입, 되도록 빨리 주인공의 매력을 드러낼 수 있는 스토리를 위해 고심한다고 하는데요.

 

 

<1030>의 도입은 의문으로 출발합니다. 표지를 펼쳐 두어 장 넘기는 동안 밝혀진 건 헬리콥터에서 인정사정없이 내쳐진 남자가 캘빈 프란츠인데, 당시 그의 양 다리는 모두 부러졌다는 것과 캘빈을 사막에 떨어뜨린 일당이 조직적으로 움직이며 이번의 일이 처음이 아니라 비일비재 하다는 사실입니다. 희생자와 베일에 싸인 악의 무리가 드러나는 순간인데요. 이제 남은 것은 악의 무리를 처단할 ‘정의의 용사’, 일명 ‘해결사’입니다.

 

 

‘정의의 용사’, ‘해결사’라고 해서 바람에 망토를 휘날리며 짠~~하고 등장하느냐. 천만의 말씀입니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이 남자, 찌질하기 짝이 없어요. 낯선 곳의 독신자 클럽에서 만난 여자와 지내다보니 빈털터리가 된데다 행색도 초라합니다. 195센티미터의 키에 100킬로그램이 넘는 거구지만 쿨한 해결사라기보다 텁텁한 방랑자가 제격인듯 한데요. 그런 그가 ATM카드로 현금을 인출하려다가 순간 멈칫합니다. 통장에 자신의 예상보다 더 많은 금액이 들어있었거든요. 정확하게 1030달러. ‘1030’이란 숫자는 잠자고 있던 그의 두뇌를 깨우는 스위치가 됩니다. 1030. 그것은 헌병들이 사용하는 암호화된 숫자로 동료들의 지원을 다급하게 요청할 때 사용하는 코드였거든요. 과거가 자신에게 보내는 특별한 메시지에 이 남자, 순식간에 돌변합니다. 최고의 군인이자 최고의 특수부대원, 첩보인 잭 리처(Jack Reacher). 그가 드디어 눈을 뜨는 순간입니다.

 

 

이후부터 소설은 잭 리처가 자신에게 메시지를 보낸 사람, 옛 동료였던 프랜시스 L. 니글리를 추측만으로 찾아가고 그녀에게서 역시나 옛 동료이자 형제와 다름없었던 캘빈 프란츠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되는데요. 그들은 한때 출신성분과 남녀, 계급을 초월해서 탁월한 능력과 끈끈한 전우애로 똘똘 뭉친 최정예 특수부대원들이었습니다. 리더인 잭의 지휘아래 생사의 순간을 넘나들면서 무수히 많은 임무를 함께 수행했습니다. ‘특수부대원들에게 덤비지 마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말이지요. 잭과 니글리는 캘빈의 죽음에 숨겨진 비밀과 처절한 복수를 위해 흩어진 옛 동료들을 찾아 나서는데요. 그런 잭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과연 누구일까요?

 

 

솔직히 잭 리처는 이번에 처음 만납니다. 친절한 톰 아저씨로 불리는 톰 크루즈가 잭 리처 역할은 맡은 영화가 작년에 상영됐지만 미처 보질 못하고 놓쳤는데요. 엄청난 덩치와 카리스마를 내뿜는 고독한 방랑자 같은 거구의 잭을 단신인 톰이 어떻게 연기했을까. 책 읽는 내내 궁금했답니다. <1030> 외에 다른 잭 리처 시리즈와 함께 지금이라도 꼭 챙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리 차일드에 의해 창조된 인물, 잭 리처. 그의 치명적인 매력을 단 한 권의 책으로 알 수는 없겠지요.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합니다. 표지를 펼치는 순간부터 책을 내려놓기는 힘들다는 거. 약속이 없는 금요일 밤이나 다음날의 스케줄이 한가할 때, 잭 리처와의 만남을 시도하시길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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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이좋다 2014-08-05 2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실망입니다.

몽당연필 2014-11-04 01:01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아쉽네요 ^^;;
 
현기증
프랑크 틸리에 지음, 박민정 옮김 / 은행나무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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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혹 그럴 때가 있다. 자다가 설핏 눈을 떴는데 주변이 낯설게 여겨질 때. 방 안의 가구가, 벽에 걸린 사진이 눈에 익지 않아서 내가 잠든 곳이 과연 어딘지 생각하다가 다시 잠들기도 하고 오히려 잠에서 깰 때도 있다. 무의식과 의식, 그 사이의 언저리에서 벌어지는 혼동이나 착각 같은 거라고 생각하는데. 만약 그런 게 아니면? 착각이나 혼동, 악몽이 아니라면?

 

사방이 어둠에 잠겨 있다.…… 이곳은 대체 어디란 말인가?

 

50세의 조나탕 투비에. 그가 기억하는 것은 병원에 입원한 아내 프랑수와즈의 병실에 있다가 집으로 돌아와 너무나 익숙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는 것. 아, 몸이 안 좋아서 역한 맛이 나는 시럽을 마셨다. 이것이 전부였다. 이후 어딘지 알 수 없는 빙하의 동굴에서 잠에서 깬 그가 맞닥뜨린 것은 오른손에 채워진 족쇄였다. 자신이 기르는 체코슬로바키아 울프독 포카라가 함께 있어 잠시 위안이 되긴 했지만 머리에 철가면을 쓴 남자, 미셸 마르퀘를 만나면서 혼돈에 빠진다. 두 사람의 등에 ‘누가 도둑일 것인가?’ ‘누가 거짓말쟁이일 것인가?’라고 적힌 천 조각이 붙어 있는데다 철가면에는 폭발물이 장전되어 있어서 서로 50미터 이상 떨어지면 폭발한다는 내용의 편지가 발견된 것이다.

 

자신들이 왜 이 낯선 곳으로 끌려와 갇혀 있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운 가운데 그들은 또 한 사람을 만나게 된다. 오른쪽 발목에 족쇄가 채워진 남자, 파리드 후마드. 그의 등에 적힌 문구는 ‘누가 살인자일 것인가?’였다. 족쇄가 채워진 두 사람과 철가면을 쓴 사람. 제한된 장소에서 벌어지는 의문투성이의 사건들. 그들은 자신들이 처한 상황에 분노하면서도 살아남기 위한 투쟁을 시작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서로를 의심하기 된다. 급기야 감추었던 비밀이 하나씩 드러나면서 상황은 더욱 파국으로 치닫는데.....

 

어느날 갑자기 극한 상황에 처했을 때 인간은 어떻게 할 것인가. 오로지 생존하기 위해, 살아남기 위해 인간이 취할 수 있는 최악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다. 인간이 어떤 존재인지, 스스로에게 끝없이 질문을 던지고 또 선택을 강요하는 그래서 다소 불편한 소설이었다. 프랑크 틸리에의 작품은 <현기증>이 처음이다. 그의 다음 이야기를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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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소한 풍경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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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아시나요? 우리 인간이 원래는 두 개의 머리와 두 쌍의 팔, 다리를 가졌다는 것을. 서로 같은 性(두 남성 또는 두 여성)이거나 다른 性(여성과 남성)이 등을 마주 대고 있었던 인간의 힘은 무척 강했습니다. 인간은 자만에 빠진 나머지 신에게 도전하기에 이르지요. 교만한 인간을 그냥 둘 수 없었던 신은 인간을 둘로 자르고 마는데요. 인간은 그때부터 평생을 그리워하게 됩니다. 등이 맞붙은 하나의 몸에서 신에 의해 절반으로 갈라진 자신의 나머지 반쪽을……. 플라톤의 <향연>에 수록된 이야기인데요. 다소 파격적이라 할 수 있지만 인간이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사랑에 빠지고 헤어지는 일련의 것들이 모두 태초에 인간이 서로 등이 붙었기 때문이라는 사랑의 근원,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플라톤의 향연이냐! 바로 그 ‘사랑’ 때문입니다. 서로 다르거나 같은 性의 인간들이 보여주는 ‘사랑’. 까마득한 과거에 헤어진 반쪽을 찾아 헤매는 거라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랑’. 사랑이지만 사랑이라 할 수 없고 사랑이 아니라고 할 수도 없는, 그 중간 어디쯤에서 현실인지 환상인지조차 확실한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일렁임으로만 존재하는 몸짓, ‘그들의 사랑’. 바로 <소소한 풍경> 때문입니다.

 

 

소설가이자 대학교수인 ‘나’는 어느날 한 제자의 전화를 받습니다. “시멘트로 뜬 데스마스크 보셨어요?” 뜬금없이 질문에 ‘나’는 순간 당황하지만 이내 제자 ㄱ을 떠올립니다. 자신의 수업시간에 보여준 ㄱ의 소설과 독특한 면모. ‘나’는 ㄱ을 찾아 소소시로 향합니다. 웃으며 선인장의 가시를 이야기하는 ㄱ과 헤어지고 돌아온 ‘나’는 호숫가 외딴 집의 쓸쓸함에 서서히 침잠해갑니다. 이후 소설은 ㄱ, ㄴ, ㄷ의 이야기로 이어집니다. 어린 시절 오빠를 잃고 부모님마저 사고로 잃은 ㄱ은 비슷한 아픔을 품고 있는 남자1을 만나 결혼합니다. 하지만 결혼은 오래 지속되지 못했고 혼자가 된 ㄱ은 소소의 자신의 옛집으로 돌아오지요. 그런 어느날 ㄱ은 낯선 남자를 보게 됩니다. 이웃집 외벽에서 하루종일 물구나무를 서는 그를 ㄱ은 자신의 집으로 들이는데요. 그는 ㄴ입니다. 전남편인 남자1과 정반대의 ㄴ. 그와의 일상이 어색하거나 불편하지도 않은 어느 날 ㄱ은 또 한 명의 낯선 이와 함께 하기 시작하는데요. 자신이 살 곳을 찾다가 ㄱ과 ㄴ이 마무는 집으로 스며들게 된 그녀는 ㄷ입니다. 저마다 가슴에 잊을 수 없는 상처를 품고 사는 그들의 생활이 시작되는 거지요.

 

 

두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 단순히 이것만 보면 서로 엇갈린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질 듯한데 그렇지도 않습니다. 그들은 서로가 서로의 性을 구태여 의식하려 하지 않아요. 서로에게 어떤 요구도 하지 않고 그저 덩어리져서 함께 살아갑니다. 태초의 인간이 두 몸이 붙은 것처럼 그들은 셋이 원래부터 하나인 듯 했습니다. 물이 흐르듯 지극히 자연스러운 형태라고 할까요? 하지만 어느날 ㄴ이 우물에 떨어져서 목숨을 잃으면서 완벽하게 조화로워 보였던 그들의 일상에 금이 가기 시작합니다.

 

 

<소소한 풍경>을 보는 내내 저자의 이름을 확인해야 했습니다. 정말 내가 아는 그 ‘박범신’의 작품이 맞나? 의문을 품었습니다. 기억 속의 박범신은 인간의 욕망과 어둠을 때론 기이할 정도로 깊게 파고 드는 화려하고도 역동적인, 선이 굵은 이야기를 자아낸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만난 박범신은 달랐어요. 물론 최근 몇 년간 그의 작품을 만나지 않아서 그렇게 느끼는지 모르겠지만. 세 명의 남녀가 함께 살아가면서 벌어지는 일상 속에서 드러나는 위험하고도 독특하고 기이한 사랑을 전하는 <소소한 풍경>. 왠지 불편하게 와 닿았습니다. 왜, 무엇 때문일지 알기 위해선 아무래도 그의 다른 이야기를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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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배추 볶음에 바치다
이노우에 아레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문학수첩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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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에서도 변두리의 작은 마을에 가면 ‘코코야’란 이름의 가게가 있습니다. 일본어를 모르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지만 아기자기한 가게 이름만 보면 옷이나 액세서리 같은 작은 소품을 판매할 것 같은데. 아닙니다. 반찬 가게라고 하네요. 놀랍죠? 근데 더 놀라운 게 있습니다. 바로 가게의 주인장인데요. 나이가 ‘환갑’, 60세가 넘었습니다. 사장만 이 아니라 두 명의 점원 모두 60세를 넘겼다고 합니다. 이쯤 되면 ‘할머니’ 소리 들으며 손주들 재롱에 여생을 편히 보낼 때인 것 같은데 이 분들에게 그런 소리를 꺼냈다간 어림 반 푼어치도 없다는 꾸지람을 들을 것 같습니다.

 

‘코코야’의 세 여인, 사장인 코코와 마쓰코, 이쿠코를 보고 있으면 나이를 먹는다는 게 뭔가 의문이 듭니다. 나이 60을 넘기면 누구나가 그렇듯이 그네들 역시 말 못할 사연 하나씩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남편과 이혼했거나 첫사랑을 잊지 못하거나 남편과 사별하여 때로 외롭지만 그것으로 인해 어둡고 우울한 일상을 보내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코코는 인생에서 ‘공격’을 최고의 모토로 삼을 정도로 활달하고 진취적이에요. 좋은 재료로 정성껏 밥을 짓고 맛깔 나는 반찬을 만들어 가게를 찾는 사람들에게 파는 것 자체를 즐기면서 살아갑니다. 시도 때도 없이 재잘재잘 수다를 떠는가하면 때론 감성에 젖어 추억에 잠기고 그러면서도 씩씩하게 가게를 꾸려나가는 모습을 보면 이 사람들 나이가 정말 60세가 넘는 거 맞나 의심스러울 정도였으니까요. 그들이 풀어놓는 살아온 이야기, 음식 얘기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래, 살아온 만큼 슬픔이나 아픔이 생기는 건 당연한 순리니까 거스르려고 하지 말고 지금부터 좋은 사람들과 좋은 추억으로 메우면 되지 뭐. 이런 생각도 듭니다.

 

얼마전 심한 감기몸살을 앓고 난 이후로 입맛을 잃었습니다. 무엇을 먹어도 맛이 없고 무언가 먹고 싶은 것조차 떠오르지 않았어요. 그래도 살아야 하니까 싶어서 억지로라도 먹고 나면 속이 더 거북했습니다. 왜 이럴까 신경은 쓰였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았어요. 오히려 저절로 다이어트가 되겠다고 속으론 웃었어요. 하지만 문제는 다른데서 생기더군요. 제가 입맛을 잃으면서 음식을 만드는 횟수도 줄어버린 거지요. 가족들의 식탁이 점점 초라해지던 어느날 보게 된 책이 바로 이 <양배추 볶음에 바치다>였습니다. 처음엔 표지에 그려진 갖가지 음식 재료를 보면서 그냥 만화<심야식당>처럼 음식을 이야기하는 책인가 보다 했는데요. 평범하게 음식을 만들고 그것을 누군가 맛있게 먹는 일상이 소중한 추억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느끼게 됐습니다.

 

며칠전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한 여배우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우리가 먹는 것 자체가 우리를 구성하고 만드는 것” “앞으로 뭘 먹느냐는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과 직결된다고 생각한다.”고 말이지요. <양배추 볶음에 바치다>를 읽고 나서일까요? 그 말이 화악 와 닿더군요. 혹시 그 배우도 이 책을 읽은 걸까요? 궁금해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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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빛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5
이누이 루카 지음, 추지나 옮김 / 레드박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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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리와 미스터리, 스릴러 소설을 즐기지만 호러소설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읽으면서 수시로 머리카락이 삐죽 서고 소름이 돋는 느낌을 받는다면 결코 유쾌한 경험이라고 할 수 없다. 거기다 읽고 나서도 한동안 뒷덜미가 서늘해지고 모골이 송연해진다면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게 호러물이다. 더구나 요즘처럼 꽃샘추위로 날씨가 싸늘한 때는 더. 하지만 최근 읽은 <여름 빛>은 왠지 끌렸다. ‘호러 여왕의 강림’이라는 문구가 표지에 떡 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건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기이한 푸른빛을 발하는 아이의 서늘한 눈매에 이미 꽂혀 버렸으니까. 난 생각했다. 이건 결코 소름끼치는 공포가 아닐 거라고.

 

제목이자 표제작인 [여름 빛]은 전쟁발발로 인해 가족과 떨어져서 시골의 친척집에 머물게 되는 소년 데스히코의 이야기다. 물자가 부족한 때 타지에서 들어온 데스히코는 마을 아이들의 괴롭힘을 받는다. 하지만 데스히코는 친구 다카시가 있어 외롭지 않았다. 다카시는 한쪽 얼굴에 검은 반점이 있는데 그것을 두고 사람들은 다카시를 임신한 엄마가 바다에 떠밀려온 상괭이라는 물고기를 먹고 저주를 받았기 때문이라고 했다. 또 마을에서 이런저런 사정으로 죽는 사람들이 생길 때마다 다카시가 생전에 그들과 눈을 맞추었기 때문이라면서 다카시를 불길한 아이로 매도해버린다. 그런 어느날 다카시는 데스히코에게 자신의 비밀을 털어놓는다. 자신의 눈빛이 어느 순간 푸른 빛을 내는지. 그리고 데스히코가 엄마를 만날 수 있도록 도와주겠다며 어느 도시로 향하는데 그곳에서 다카시의 눈빛이 어느 때보다 강한 푸른 빛을 발하게 된다. 그 도시에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되는 걸까.

 

[백 개의 불꽃]은 초라한 외모를 한 언니 기미가 아름다운 동생 마치를 시기 질투하여 벌어지는 이야기다. 귀 주위에 작은 구멍 ‘액상’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불행해진다는 얘기를 들은 기미는 자신이 불행에서 벗어나기 위해 동생을 액막이로 삼는다. 매일 하나씩 백일 동안 백 개의 양초를 켜서 그것이 모두 다 타면 소원 성취한다는 것이다. 일생에 한 번밖에 하지 못하는 강력한 저주라는 ‘백 개의 불꽃의 액갚음’을 해버린 기미는 곧 충격적인 소식을 듣는다. 집에 화재가 나서 동생이 심각한 화상을 입었다는 것. 그 바람에 동생은 혼담도 무산되어 버리지만 실망하지 않고 오히려 기미에게 기모노를 선물한다. 그 과정에서 기미는 동생의 귀에서도 ‘액상’을 발견하게 되는데... 선천성 이루공을 잘못 알고 오해함으로써 불행한 일이 벌어지지만 결국 자매는 서로의 진실된 마음을 알게 된다.

 

[이]에서 하세가와는 친구 구마노미도의 집에서 퇴원 기념 저녁을 한다. 회와 맥주, 버섯과 해물을 푸짐하게 넣은 해물탕을 다 먹고도 ‘먹고 싶다’는 생각에 끊이지 않는 것이 하세가와는 이상했다. 그 흰 살 생선 탓일까. 오른팔을 잃는 심각한 부상을 입은 원인이 ‘없어야 할 이빨에 당했’다는 건 또 뭘까. 궁금해 하는 하세가와에게 구마노미도는 말문을 연다. 삿포로 축제의 금붕어 낚시에서 건져 올린 화금붕어로 인해 시작되는 믿기 어려운 기이하고도 소름끼치는 일들을....

 

책은 1,2부로 나뉘어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는데 1부와 2부의 분위기는 판이하게 다르다. 1부가 [여름 빛]을 비롯해서 [쏙독새의 아침] [백 개의 불빛]은 과거를 배경으로 기이하지만 그래도 온기가 느껴졌다면 2부는 현대를 배경으로 한 [이] [Out of This World] [바람, 레몬, 겨울의 끝]을 통해 호러의 본모습, 잔인함과 잔혹함, 공포가 어떠한 것인지 확실하게 드러낸다. 거기에 약간의 여운까지....

 

실로 오랜만에 맛보는 엄청난 몰입감. 표지를 넘겨 덮을 때까지 쉼없이 내달렸다. 저자 이누이 루카는 <여름 빛>을 통해 처음 만났지만 그녀의 작품이라면 이후 언제라도 다시 만나보고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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