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의미를 찾아서
빅토르 프랑클 지음, 이희재 옮김 / 아이서브 / 2001년 12월
품절


섬광처럼 불현듯 머리를 스치는 생각이 있다. 그토록 많은 사상가들이 자신의 삶에서 결론처럼 이끌어낸 지혜의 말, 그토록 많은 시인들이 노래한 진실,그것은 바로 사랑을 통해서만 인간이라는 존재는 가장 귀하고 높은 단계로 솟아오를 수 있다는 진리였다. 인간을 사랑을 통해서만 사랑 안에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문학과 사상과 종교에서 역설해 왔는데,나는 그 궁극적 진리이 의미를 이제야 비로소 깨닫는다!-72쪽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자라 할지라도, 그가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가슴 깊이 간직할 수만 있다면, 비록 짧은 순간에 그칠지라도 구원의 빛이 찾아든다는 걸 뼈저리게 이해한다. 고립무원의 상황에서도, 수용소에 갇혀 아무 뜻도 펼칠 수 없는 처지에서도, 올곧게 고통을 견뎌내는 일 말도는 할 수 있는게 전무한 상황에서도, 사람은 가슴속에 간직된 사랑하는 이의 모습을 그윽이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충만함을 느낄 수 있다-72~73쪽

사랑이란 어떤 사람의 육체적 존재보다는 그 사람의 정신성과 맞닿아 있다는 사실, 지금 내 옆에 있다는 것, 숨을 쉬고 살아 있다는 것이 전제되어야 하는 건 아니란 사실이다. -74쪽

'그대 가슴에 나를 봉인하여 주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리니' 솔로몬의 아가-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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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더 - Mother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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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난 첫 느낌은 기억에 관한 진실이었다. 영화의 전개와 내용과 반전의  모든 기반은 기억에서 시작한다. 첫장면에 엄마의 춤은 마지막 장면의 춤과 연결되며, 그 중간에 기억에 대한 잔인한 진실이 있었다. 영화는 그 진실을 찾아 떠나는 어머니의 모정을 잔인하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마더'는 '모정'과 '살인'에 관한 이야기이다. 예고편을 보면 모자란 아들이 살인의 누명을 쓰고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힘없고 지식없고 오직 자식에 대한 사랑 하나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애쓰는 어머니를 그리는 영화로 보인다. 어쩌면 감독은 예고편부터 본 영화의 반전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기획으로 작업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사람들은 과거의 사실을 밝히기 위해 기억을 더듬는다. 그러나 기억은 쉽게 망각되거나 변형되거나 심지어는 왜곡되기도 한다. 그대로 투명하게 존재하는 기억이란 가능한 것일까? 그러나 '마더'에서의 기억은 단락져 숨어 있을지는 몰라도 재생할 때 왜곡되거나 변형되지 않는다. 그래서 이 영화의 반전이 극적이기 보다 도식적으로 보인다. 여기서 영화의 힘이 빠져 버리는 것이다.   

'마더'의 살인은 잔혹스럽지 않다. 오히려 '마더'에서 드러나는 맹목적 모정이 살인보다 더 잔인하고 독하다. 이미 과거에도 어머니의 '모정'은 잔인했었다. 어렸을때 도준에게 농약을 주고 같이 죽으려던 어머니는 이제 아들과 악착같이 살아 남으려 한다. 이 영화의 비극은 자신이 힘없고 약하기 때문에 당해야 하는 피해자임을 자각하고, 모질게 살아남으려는 모정이 결국 자신보다 더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점이다. 자식을 향한 모정이 자신보다 더 억울한 피해자들을 만들어도 그냥 무시하는 '모정'을 어떻게 봐야 하는 것인지.... 가끔 이 영화보고 감동 먹었다는 분들은 도데체 어디서 감동을 먹었다는 것인지 나는 알 수가 없다.   

'마더'에서 기억은 두가지 역할을 한다. 봉인되어 있는 기억은 진실을 은폐하고 해제된 기억은 진실을 투명하게 드러낸다. 봉인되어 드러나지 않았던 기억이 해제되는 순간 진정한 비극은 시작된다. 여기에 영화의 여운이 남아있다. 영화는 마지막까지 도준의 기억을 봉인해 놓는다. 하지만 도준의 기억은 영화 요소요소에서 드러나듯 어느순간 해제되어 밖으로 튀어나온다. 그리고 그에 대한 도준의 태도는 명확하다. "책임질 일이 있으면 책임을 져야 하는 것"이 도준의 생각인 것이다. 여기에 어머니의 비극이 존재한다.    

피해자였던 모자는 어느새 가해자로 변해있고, 아들은 그 사실을 모른다. 그러나 언젠가 재생될 아들의 기억은 어머니로서는 감당할 수 없는 파국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사실.... 영화의 처음과 마지막에 보여준 어머니의 슬픈 춤사위는 이미 그 비극을 감당하고자 하는 마지막 살풀이 같다.  

봉감독이 아니었음 별을 4개 이상 주고 싶었다. 봉감독 작품이라 3개 준다. 단, 이 영화가 그냥저냥 평균작이란 뜻은 아니다. 오히려 평균작 이상이란 이야길 하고 싶다. 사실 봉감독의 영화를 평하자면 봉테일이란 별명답게 영화 요소요소에 대한 디테일을 이야기 하지 않고서는 제대로된 평을 하기가 힘들다고 보여진다. 스포일러를 최대한 줄이고자 글을 썼더니 추상적인 이야기만 늘어놓게 되고 세심한 부분에 대한 언급을 하지 못했다. 세부적 사항에 대한 보물찾기가 봉감독 영화를 즐기는 관객들의 묘미일텐데.... 별3개는 그냥 내가 너무 봉감독에게 기대했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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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런 2009-06-02 1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리뷰 정말 마음에 드네요. '이 영화의 비극은 자신이 힘없고 약하기 때문에 당해야 하는 피해자임을 자각하고, 모질게 살아남으려는 모정이 결국 자신보다 더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점이다.' 이 문장에서 덜컹 가슴이 내려앉아요. 저도 그 사실이 무척이나 슬펐거든요. 저는 이 영화를 오히려 그 이유때문에 참 좋게 봤어요. 저런 현실들, 망각을 무기삼아 우리가 저지르는 수많은 일상적인 범죄들을 잘 보여주는것 같아서요. 하여간 생각할거리를 많이 안겨주는 영화였습니다.

머큐리 2009-06-02 13:45   좋아요 0 | URL
하하 ^^; 처음 듣는 칭찬이라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해이] 2009-06-03 0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한 영화평입니다ㅋ 제 생각이 바뀌겠어요^^ 하지만 아직도 그의 이야기가 "엉성"하다는 데는 변함이 없지요 ㅋㅋ

머큐리 2009-06-03 08:06   좋아요 0 | URL
ㅎㅎ 그냥 끄적인거구요..요즘 '스토리텔링의 비밀'을 읽고 있는데...읽을수록 더 모르겠더라구요... 언제 신촌에서 헤이님 한 번 뵈야 하는데...ㅋㅋ
 
렛미인 한정판 (디지팩)
토마스 알프레드슨 감독 / 플래니스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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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영화에서 소외된 존재들의 연대를 본다. 소외 되었기에 서로를 이해하는 존재들의 끈끈함을 본다. 피에 대한 욕구가 아무리 끓어 오를 지라도, 뱀파이어에 대한 두려움과 혐오가 아무리 클지라도 두 사람은 결국 서로를 보호하고 기댈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수 밖에 없음으로 ...  

뱀파이어란 존재는 죽음을 통해 살아가는 존재.  생명을 취해야만 살아갈 수 있는 존재이다. 먹이사슬의 최상위층을 이루는 존재이며 생명을 취함으로 인해 무한한 능력을 보유하는 존재이다. . 예전 코폴라 감독의 '드라큘라'에서 드라쿨라 백작이 전률하면서 외치면 소리가 바로  "피는 생명이다." 였다. 그러나 생명을 나눠줄 존재에게 기생해야 하는 것이 뱀파이어다.   

렛미인에서 나오는 뱀파이어는 12살인 채로 몇년이나 살아온지 모르는 소녀 이엘리, 뱀파이어다운 냉정함과 차가움, 잔인함을 가진 존재다. 그리고 그녀와 친해지는 오스칼...학교에서 집단 따돌림을 당해 항상 혼자서 외롭게 지내는 소년이다. 더구나 오스칼은 부모가 이혼한 상태로 어머니와 같이 살고 있고, 아버지는 아들에게 진정한 관심을 가지지 않은 상황이다. 이들이 만남은 서로의 외로움을 이해해 줄 상대를 만난것이고 상대에게 자신이 가진 것을 나누려는 존재로서의 만남이었다. 오스칼은 이엘리를 통해 피해자로서의 자신을 조금씩 극복해 나가고, 이엘리는 오스칼를 통해 최상위 포식자로서 느껴야 하는 고독을 해소한다. 그들에게 외로움을 덜어내고 서로에게 의존하는 것은 상대방의 이질성까지도 극복할 수 있는 절대적 고독이었던 것이다.    

동족이 피해를 입을 수 있음을 알고도 절체절명의 순간에 이엘리를 구해주는 오스칼과 오스칼에게 더 이상의 부담을 주기 싫고 정체가 밝혀질 것이 두려워 떠나는 이엘리, 이별을 고하면서도 오스칼이 위기에 처해 있을때 나타나 오스칼를 구해주는 이앨리... 그러나 문제에 직면한 상대방을 도와주는 해결방식은 언제나 죽음과 피가 연루 된다는 것이다.    

이들의 사랑은 기묘하다. 어린 소년과 소녀가 만나는 순간처럼 순수함도 있지만, 상대방의 잔인함과 나약함에도 서로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 순간 존재로서 인정하는 것 자체가 사랑이 되어버리는 기묘한 순간이 된다. 이질적인 존재로 인정하고 나서 서로가 같이 섞여 살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전까지 이어지는 기묘한 사랑...그리고 이별 후에는 그들의 사랑이 단순한 연대에 따른 사랑인지 남녀간의 사랑인지 모호해진다.  

이들의 관계는 담담하다. 죽음과 피가 연루되지 않는다면, 그저 상대방에 대한 호감을 느끼는 정도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들의 연대와 사랑은 결국 피와 죽음이 보이는 순간 극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박찬욱 감독의 '박쥐'와 대비되는 면이 있다. '박쥐'의 뱀파이어는 실존에 대해 고민하고 생존방식에 따른 갈등의 축이 '렛미인'에서는 그냥 조건으로 긍정된다. 천진난만함으로 인해 차갑게 느껴진다고 할까?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이후 뱀파이어란 존재를 통한 인간적 고뇌를 그린 영화를 오랫만에 두 편을 봤다. 사람들은 왜 뱀파이어에 그리 매혹되는 것일까? 생명? 피? 권력? 극한에 대한 상상? 싸구려 뱀파이어보다 역시 고뇌하는 뱀파이어가 던져주는 건 많다. 상상하지 못해서 그렇지.... 

뱀파이어와의 인터뷰 포토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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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6-01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 Like You Know It All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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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이 작품이 3번째 인가 보다. 아마도 이 영화는 내용보다, 나의 역사적, 생활적 이유로 어떤 영화보다 내 기억에 많이 남을 것 같다. 이 영화를 혹 다른 곳에서 만난다면 이 영화의 내용은 잘 떠오르지 않아도 이 영화를 본 날 (2009년 5월 23일)은 뚜렸하게 기억 날 것이란 얘기다.  5월 23일은 노무현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버린날이고 정말 몇십년만에 혼자 조조영화를 본날이다. 이 사실은 이영화와 함께 나의 기억속에 끝임없이 되뇌여질 것이고 그것만으로 이 영화는 이미 내 인생의 영화가 되어버린 것 같다.  

 

사실 비틀려져 있는 인간관계의 비루함이 이 영화의 처음과 끝을 관통하고 있다. 적당한 허세와 적당한 가식, 적당한 허영, 적당한 정의감이 버무려져 있어, 일상의 비루함이 그대로 투영된다고나 할까? "뜨겁지도 차지도 않아" 뱉어 버리고 싶은 물처럼 영화는 미적거리며 진행해 나간다. 그럼에도 주인공이 밉지만은 않은 것이 그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이기 때문일 것이다.   

주인공은 지방도시에서 친한 후배의 부부와 존경하는 선배의 부부를 만난다. 이들은 모두 자신의 상대방을 통해 새로운 삶을 찾은 사람들이고...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인공이 보기에는 자신과 별로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거나 자신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는 사람들이다.  제천에 사는 후배의 부부는 자의식이 과잉되어 있는 상태에서 자신들의 세계에 갇혀 사는 애벌래 같은 존재들이고, 제주에 사는 선배 부부는 서로의 불륜에 대해 모르는척 무시하고 사는 사이다. 이런 사람들과 만나면서 주인공은 선배의 아내이자 이전에 사랑했던 자신의 후배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마치 선배와 사는 것이 그녀의 불행인 것처럼, 완전한 짝을 만나야 인생이 온전해 지는 것처럼 (이 대목은 자의식이 과잉되어 주인공에게 떠들던 후배의 말이기도 하다.) 그녀의 인생을 통채로 재단하고 간섭하지만, 잘 알지도 못하면서 간섭한다고 비웃음만사게 된다.   

주인공이 구했던 것은 진정 사랑이었나? 나는 홍상수 영화에서 나타나는 사랑이 무언지 모르겠다. 그냥 감정의 과잉을 우리는 사랑이라고 착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육체에서 꿈틀 거리는 욕구 자체를 사랑으로 간주하고 살아가는게 우리들 현실이라는 것인지... 어디서든 사랑을 추구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것은 감정의 과잉이거나 자신의 성적 욕구를 합리화 하기 위한 변명으로서의 사랑일 뿐 그 어디서도 사랑는 보이지 않는다. 그저 비루한 일상만 보일 뿐.... 

이 영화가 비루해도 비천해 보이지 않는 건 숭고미를 추구하는 사람들조차 비루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현실을 날 것 그대로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진실은 때로 일상 속에서 번득이는 법이고 때때로 우린 "인생 머 다 거기서 거기지 별거 있나"라고 외치면서 살고 있지 않은가?  예전 영화보다 많이 약해졌다고 한다. 예전 영화를 전부 보지 못했으니 뭐라 평하진 못하겠지만. 영화 마지막까지 하루 일정을 마치지 못하고 무언가를 다시 마무리해야 할 것 같은 느낌을 주는 건 왜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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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끝나고 나서 일상의 비루함이 비천함으로 까지 추락해버리면 사람은 명예를 위해 목숨을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숭고함을 위해 싸우다 패배하고 퇴임 후 자신을 변호하다 지쳐 쓰러진 고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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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사와 악마 - Angels & Demon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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댄 브라운의 소설을 읽다 보면, 영화와 같은 생생함이 많이 느껴진다. 정말 영화로 제작하면 볼만하겠다는 느낌이 영화로 그대로 재현되었다. 첫번째가 '다빈치코드' 두번째가 '천사와 악마'다. 그럼 '디지털 포트리스'도 제작될까? 댄 브라운의 작품에서 무언가 새로운 인문학적 깨달음을 얻기에는 소설 자체의 한계가 많이 있다. 그러나 사실적으로 보이는 음모론과 그럴듯한 역사성에 기반한 추리와 반전은 독자들에게 '재미'하나 만큼은 보증하고 있다. 더구나 중세를 지배하고 근대로 넘어오면서 격렬하게 권력을 지키기 위해 애쓰던 카톨릭이다 보니 허구라 해도 뒷얘기가 심심치 많은 않을텐데, 거기에 극적 추리적 요소까지 가미하니 독자들이 빨려들만 하다.  

자 여기까지다. 줄거리야 원작에 충실했으니..그냥 보면 되는 것이고. 흠 줄거리 이야기가 나온김에 마지막 장면이 원작에 충실했는지 영화적 재미를 더하기 위해 살짝 변형된 것인지... 책 읽은지가 하도 오래되어 가물가물하다. 내 기억에 따르면 마지막 마무리정도만 원작에 살짝 비껴나간 것 같고 나머지 대부분은 원작에 충실한 것 같은데...나도 내 기억은 신뢰하지 않는다.  

 

영화의 핵심은 종교와 과학의 대립에 관한 큰 줄거리에 과학과 종교에 대한 화합을 사건의 해결을 통해 모색하고 있는 것인데...과학이나 종교나 그 맹목성이 지니는 위험에 대해서 고민하게 만드는 점이 있다. 아무리 대중적 오락영화라도 한 두가지 무거움을 던져주는 주제는 있는 법이다.  

우선 반물질을 생성시키기 위한 과학자들의 노력과 , 과학으로 부터 신앙을 지키기 위한 카톨릭 궁정대신의 맹목적 신앙이 절묘하게 대립되면서 마치 과학과 종교의 평이한 대립처럼 구성되어 있고 카톨릭을 공격하는 주체가 18세기 카톨릭의 박해로 숨어들어간 과학자들의 비밀결사체로 나타나 마치 과학과 종교의 해 묵은 갈등이 사건의 축처럼 보이지만, 그 내부적으로 보면 그리 단순하지 않아 보인다. 현대의 과학은 이미 카톨릭처럼 하나의 보편적인 종교처럼 숭앙받고 있으며, 과학자들은 새로운 성직자들로 그들이 하는 실험이나 행위는 사실 일반인이 통제하기는 너무 전문적이고 난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인류에게 어떠한 치명적 해를 끼칠 수 있는 숱한 실험들을 지금도 어디선가 행하고 있는 것이다. 인류의 아름다운 미래를 위해서 말이다.  마치 사제들이 하나님께 인간의 죄를 구속하도록 기도하듯 말이다.  

 

과학과 종교의 맹목성 모두가 위험하다는 논거 속에서 '천사와 악마'는 그야말로 현대에서 누가 천사고 누가 악마인지 모르겠다는 말투다. 과학도 위험하고 종교도 위험하다는 인식을 가지고 냉철하게 살아야 한다고 설교하는 것은 아닌 것 같고.... 결국 인간이란 천사와 악마의 속성을 모두 가진 복합적 존재라는 의미인건지... 흠 어쩌면 오락영화에 너무 많은 것을 스스로 투사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정말 이 영화가 마음에 들었던 것은, 책에서 느낄 수 없었던 이미지들의 향연, 로마의 성당들, 도로들, 조각들, 그림들이 화려해서 배우의 연기보다 배경으로 나온 건축물과 예술품이 두 눈을 즐겁게 해준다는 것. 이것만으로도 별 세개는 거뜬하게 받고 갈 수 있겠다.  

과도한 액션을 바라는 분은 보지마시라... 좀 있다 개봉하는 터미네이터가  더 만족시켜 줄 것이다. 다만 역사적 미스테리를 즐기시겠다는 분들은 보면 후회하진 않을 것이다. 덤으로 아름다운 에술품들이 그대를 유혹할 것이다.  

아 그리고 사제로 나온 이완 맥그리거는 정말 잘 어울리는 배역이고, 톰 행크스는 많이 노쇠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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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5-21 13:27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