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의 배신 - 긍정적 사고는 어떻게 우리의 발등을 찍는가 바버라 에런라이크의 배신 시리즈
바버라 에런라이크 지음, 전미영 옮김 / 부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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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번 생각해보자... 긍정적인 사람들은 확실히 매력이 있다. 우울함이 판치는 세상에서 매사를 밝고 건강한 시각에서 사고하고 판단하는 사람은 돋보이기 마련이다. 더구나 세상은 매사에 긍정적일 것을 요구한다. 이젠 하나의 트렌드처럼 되어 버렸다. 문제는 사실 긍정적으로 사고한다고 해서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에 긍정의 함정이 도사린다. 이 책은 긍정적일 것을 거의 폭력적으로 강요하는 사회의 심층을 보여준다. 자... 자신을 위해 긍정적이라 생각하는게 올바른 것인지 다시 한 번 되돌아 봐야 할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면서 느끼는 점은 과도한 긍정의 찬미는 그만큼 현실이 우울하다는 것의 반증이라는 것이다. 우울한 세상을 건너기 위해서는 밝고 긍정적인 생각과 태도를 지녀야 한다. 이것은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불안과 깊은 연관이 있다. 사람들은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현실에 불안함을 깊게 가지고 있다. 이러한 불안함과 싸우기 위해 자신의 생각을 개조하는 것이다. 긍정적으로 밝게.....신이 사라진 시대에 심리학이 이러한 분위기를 주도하기 시작한다. 인간의 심리를 연구하는 학문이 어느새 인간의 심리를 조작하는 학문으로 변질하기 시작한다. 이러한 변질에는 이유가 있다. 노동유연화를 통한 해고와 불안을 잠재우고 구성원들의 열정과 노동력을 이끌어내기 위한 좋은 방법이 바로 정신적 개선인 것이다. 때문에 미국의 대기업들은 긍정적 사고를 코칭하기 위한 교육예산을 들여 직원들을 교육하기 시작한다.  

과도한 긍정과 과도한 불안의 쌍은 종교적으로도 영향을 미친다. 미국도 마찬가지지만 기복신앙이 강한 한국의 경우 기독교는 이미 맘몬을 섬기는 종교가 되어버렸다. 매번 기도하는 축사는 개인의 건강과 소원성취, 부의 확장을 연설하고 그것은 종교에 귀의함으로 이루어진다. 마찬가지로 미국의 교회들은 신보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한 능력의 확장에 더 무게 중심을 둔다. 신에게 은혜를 받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긍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 자신이 가진 능력에 대한 신뢰를 가져야 신도 축복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신은 그저 인간의 보조물로 전락할 뿐이다. 인간이 강력하게 원하면 들어주는 신.....  

물론 책이 긍정적 삶에 대한 의미를 깍아 내리는 것은 아니다. 다만, 긍정적 삶 이외의 태도에 대한 강한 거부와 배척에는 이데올로기적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그 이데올로기는 노동자의 헌신을 강화하고 모든 사회문제를 개인화하며, 빈곤과 가난의 책임을 개인의 태도로 치환하려는 의도가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간은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과 회의를 통해 더욱 건강하게 사회를 유지해 나갈 수 있음에도 긍정적 태도에 대한 강박이 이러한 비판 정신을 깍아 내리고 있음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가장 어려울 때 긍정적으로 사고한다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긍정의 힘이 내면의 변화와 의식의 평화를 가져다 줄 수 있을지 몰라도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는다. 그러나 사회를 변화시키기 위해서는 개인적 위안과 평화가 아니라 비판과 연대이다. 개인적 평화를 구하다보니 연대는 이루어지지 않고 비판적 시각은 긍정적이지 못한 태도로 배척되기 시작한다. 여기에 비합리성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최근 자본주의 금융위기가 단순하게 긍정적 태도의 문제로 발생한 것은 아닐지라도 위기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거두고 잘못진행되고 있음에도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모든 것이 극복된다는 관념적 기대가 일정부분 기여한 것도 사실인듯하다. 이 책에서 언급하는 리만의 부도는 상징적이다. 긍정적인 희망을 버리지 않되 비판적인 태도를 견지하는 것... 그리고 개인의 안녕과 부의 축적이 아니라 연대에 대한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것.... 결론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이런 연대도 개별화된 개인주의적 긍정이데올로기를 극복하지 못하면 어렵다는 것을 깨닫게 해준다.  

이 책을 읽으면서... '자유의 의지 자기계발의 의지'가 생각났다. IMF 이후 이 땅에서 불어온 자기계발서적 열풍은 어쩌면 어려운 시절을 이겨내기 위해 긍정적 사고로 무장하기 위한 우리들의 처절한 몸부림이 국가와 기업의 이해와 맞아 이루어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제 관념적인 자기계발서를 치우고 현재의 문제에 맞서 같이 가야할 동료들을 규합하는 것이 방법이 아닐까....사회와 개인의 변증법적 상호작용이 필요한 시점인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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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4-14 1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전혀 긍정적인 구석이라곤 없는 인간이어서 인지 모르지만,
부정이 변화를 모색할 수 있고, 그래서 발전의 원동력이 된다...가 더 그럴 듯 한걸요~^^

머큐리 2011-04-14 16:47   좋아요 0 | URL
양철댁이 긍정적이 아니면 누가 긍정적일까요~~~^^

마녀고양이 2011-04-14 2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결론에 동감합니다.
긍정적이어야 한다 행복하고 싶다고 엄청나게 외치는 것은
그만큼 불행하고 힘들다는 반증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네요.
요즘 들어 중용이나 만족이 더 풍요롭다는 생각을 합니다. ^^

머큐리 2011-04-15 08:30   좋아요 0 | URL
'중용'이야말로 정말 고민해야할 가치가 있는거 같아요...ㅎㅎ
 
줄리아의 눈 - Julia's Eye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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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와 스릴러 영화는 당대의 사회상을 반영하는 면이 있다. 하긴... 안 그런 장르가 있겠냐만은...
이 영화를 심야에서 보면서 이런 저런 생각이 뒤섞인다. 어둠에 대한 공포와 보이지 않는 인간이 가하는 폭력과 광기에 대한 두려움이 영화 내내 관객을 압박한다.  

언니의 자살에 의문을 품은 줄리아는 언니의 죽음에 대한 비밀을 찾아가다 보이지 않는 인간에 대한 단서를 잡는다. 결코 죽을 이유가 없는 언니의 자살 뒤에는 보이지 않는 인간의 개입이 있었고 이 인간은 줄리아의 주변을 맴돌면서 그녀의 실명을 유도한다. 방해하는 인물들을 제거하면서 줄리아를 노리는 이 보이지 않는 인간으로부터 줄리아의 목숨을 건 저항과 탈출...이 어둠의 공포와 어우러져 영화를 지배하는 것이다.  

영화는 악인의 종말로 끝나지만, 영화 종료 뒤 남은 뭔지모를 찜찜함이 있다. 나의 삐딱한 시선은 오히려 '보이지 않는 자'라 호명되는 '괴물같은 인간'에 대한 연민에 닿아 있다. 그 연민은 괴물같은 그 살인자에게 붙여진 '보이지 않는 자'라는 호명에 있고 그 호명은 역사상 구체적 인간이 아닌 인간취급을 못받는 '인간이하의 삶'을 감내했던 사람들에게 붙이는 호명이기에 그렇다. 

이런 생각의 끝에는 어쩌면 이 영화는 현 자본주의의 공포를 은유화시킨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즉 줄리아는 현 지배부르주아 계급을 상징하고, 눈은 통치수단 내지 권력을, 보이지 않는 자는 피지배 계급을 상징한다고 하면, 이 영화는 오히려 부르주아의 공포를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구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자'는  피지배계급은 지배계급에게는 있으나 마나한 존재일 뿐이다. 지배계급은 그들의 존재에 대해 없는 듯 통치를 한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자들의 반격이 시작된다면, 그들이 통치계급의 통치수단인 '눈'을 제거하고 자신이 통치계급의 '눈'이 되어 삶을 인도하겠다고 나선다면 과연 통치계급은 어떻게 할까? 줄리아의 눈은 이렇게 이중적이다.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는 도구이자 어둠을 뚫어보는 유력한 수단인 '눈'은 이 영화의 주요한 매개체가 된다. '보이지 않는 자'는 줄리아의 눈을 실명시켜 그녀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하고 줄리아는 눈을 획득하여 자신의 의지와상관없는 삶을 벗어나려 하는 것이다.  

시력이 없다는 사실... 어둠이 지배하는 현실은 결국 한 치 앞도 바라보지 못하는 현 자본주의 상태와 닮아있다. 바로 앞을 바라보지 못하는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의 불확실성은 모든 계급주체들을 장님으로 만들었다. 지배층은 지배층대로 대규모 금융위기 이후 체제를 운영하는데 자신감을 잃었고 더 이상 잃을 것도 없는 피지배층의 위기는 적대적 저항의 형태로 분출되고 있다. 여기에 지역적 무력충돌은 21세기의 인류사회가 그리 낙관적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 현재의 상황이다.  

이러한 상황은 지배계급의 의식적 불안감을 불러오는데... 그 불안감 중의 하나가 바로 자신들의 권력에 대한 상실에 대한 불안감이다. 불안감의 구체적 징후는 바로 '보이지 않는 자'들의 저항이고 그 저항에 직면한 지배계급의 혼란스러운 내면의 풍경이 바로 시력 상실에 대한 은유로 나온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그리고 남들이 무시하고 자신을 드러내지 못하고 무시당하며 언제나 같은 옷만 입고 돌아다니는 고통을 무시하기로 결단한 '보이지 않는 자'의 심경의 변화가 가져오는 저항이 얼마나 잔인하고 맹목적인지를 보여줘 사실상 피지배계급의 권력획득에 대한 저항이 쓸모없음을 증명하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갖게 하는 것이다.  

줄리아의 시력을 회복하기 위해 헌신적으로 자신의 눈을 기증한 남편의 존재는 진정한 사랑이 세상을 구원할 수 있다는 통속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그 사랑이 구한 세상은 결국 줄리아의 세상이고 그 세상이야 말로 지상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메시지는 이 영화를 그저 그냥 스릴러로 읽기 보다는 정치적인 메시지로 읽힌다. 조심하라~~ 저항은 시작되었고 저항 속에는 처절한 피의 복수와 지배가 있다는 지배계급의 절규가 들려온다.  

뱀발 : 이런 정치적 해석을 하지 않고서... 실재로 존재함에도 사람들 눈에 보이지 않는 자의 설정
         은 공포를 유발시키기 위한 억지로 밖에 읽히지 않고, 그 순간 이 영화는 단숨에 3류 싸구려
         공포물로 전락해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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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지코믹스 - 버트런드 러셀의 삶을 통해 보는 수학의 원리
아포스톨로스 독시아디스 & 크리스토스 H. 파파디미트리우 지음, 전대호 옮김, 알레코스 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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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책을 만화로 읽게 될 줄이야...  

버트란트 러셀의 인생을 짚어가면서 그 당시의 주요한 철학자들을 만나보는 행운을 누리게 하는 만화책이다. 당시의 시대 분위기 속에서 진리에 대한 확실성을 추구했던 수학자들과 논리학자들의 열정과 헌신을 볼 수 있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수학에 대한 확실한 토대를 추구했던 러셀과 화이트헤드, 프레게, 무어, 비트겐슈타인, 튜링, 푸앙카레, 괴델 등 당대의 논쟁 속에서 진리의 확고한 토대를 발견하고자 하는 지성을 담아냈다. 현재 우리가 누리는 현실... 특히 컴퓨터와 인터넷은 이들의 노력이 뒷받침되지 않고서는 설명하기 힘들다.  

진리의 굳건한 토대를 찾으려 했던 사람들... 그들의 사고와 실험은 결국 자명한 진리를 규정할 수 없다는 것으로 귀결되어 버린다. 자명함을 찾아 떠난 고행의 결과는 불확실성이 지배하는 현실을 인정하는 것으로 마감되는 것이다. 그러나 순례를 떠나기 전과 떠난 후의 결과가 동일해 보일 지라도 그 동일함에는 분명한 차별이 있다. 인간의 발견... 인간이 가진 비합리성과 합리성의 충돌에 대한 보다 깊은 통찰과 전망을 세울 수 있는 것이다. 러셀의 말년에 수학자나 논리학자로서의 퐁모보다 철학자로서 사회에 대한 적극적인 발언을 한 운동가로서의 풍모는 그런 기나긴 우회를 통하여 얻은 실천이 아닌가 한다.  

사실 만화라는 매체의 특성 상 편하게 읽을 수 있었지만, 이 책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말하기 어렵다. 그 시대의 풍모와 지적 논쟁에 대한 단편적 이해가 전부일 듯하다. 하지만 철학에 대해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훌륭한 입문서가 되지 않을까 한다. 무엇보다 철학은 현실과 따로 떨어져 있지 않다는 점에서... 그리고 합리성과 비합리성의 상호 통일된 정서에 대해서 이 책만큼 설득력 있게 다가서기는 힘들 듯 하다.  

철학의 앞날은 있는 것일까? 완벽한 진리를 찾지 못하는 한 철학은 영원할 듯 하다. 그리고 이 세계를 이해한다는 거대한 인류의 꿈은 그치지 않을 것이다. 역사의 종말을 외치는 것이 아닌 현실의 모순을 이해하려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할 뿐이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도 길 위에 있을 뿐이다. 결과는 낙관적이지도 비관적이지도 않다. 한 철학자의 인생과 그 주변의 학문적 풍경이 보여주는 지적 풍토에 푹 빠져 유한과 무한, 실재와 철학의 여러가지 문제에 대해 생각하게 만들어 준다.  

그럼에도 언제나 철학은 나에게 곁을 잘 내주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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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의 몸값 1 오늘의 일본문학 8
오쿠다 히데오 지음, 양윤옥 옮김 / 은행나무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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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난 이 책을 지레짐작했다. 워낙 유머스러운 소설을 맛깔나게 써대는 작가인지라 이 소설 역시 그 범주를 벗어나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리고 '남쪽으로 튀어'의 매력적인 아니키스트가 등장하지 않을까 살짝 기대까지 했다. 올림픽 개최에 대한 으름짱으로 큰 돈을 벌어 멋지게 외국으로 도망가는 그런 소설이 아닐까....하는  

그러니 가벼운 마음으로 시작했다. 그런데....이건 그렇게 쉽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오쿠다 히데오식의 시니컬함은 없어지지 않았고 속도감은 여전했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이런 식의 전개로 한 사회를 입체적으로 분석해 볼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뻔하게 보이는 패배임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긴장감을 놓지 못하게 하는 흡입력도 만족스러웠다.  

소설의 무대는 도쿄 올림픽... 1964년이 배경이다. 아시아에서 최초로 열리는 올림픽을 준비하느라 정신없는 일본의 일상이 그대로 생생하게 묘사되고 있다. 사실 배경에 확실하게 공감이 가는 부분은 이미 서울 올림픽을 치루느라 우리도 역시 한번은 겪어본 일이기 때문이다. 서울 올림픽을 우리나라가 새롭게 도약하는 하나의 상징으로 삼았다면, 당시의 도쿄 올림픽도 전후 일본의 새로운 부흥을 확인하는 하나의 상징이었다. 이러한 올림픽을 인질로 삼아 도전하는 테러리스트가 있다.  

테러리스트라고 하지만 세기가 바뀐 지금의 테러리스트와는 틀리다. 그리고 전문적인 군사훈련을 받거나 체제에 대한 무조건적 반항을 하는 사람도 아니다. 그는 일본 동복부지역의 가난한 농촌마을에서 머리하나 뛰어난 이유로 도쿄대 경제학부에 재직하는 대학원생일 뿐이다. 그런 그에게 커다란 변화가 일어난다. 바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형이 사망한 것. 원인은 심장마비다. 그 형의 궤적을 따라 올림픽 건설을 위한 현장에서 직접 노동을 수행하면서 그의 인식에 변화가 시작된다.  

전후 한국전쟁을 통해 경제부흥의 기틀을 닦아나가던 일본은 60년데 들어서 본격적인 성장을 일구어 낸다. 전쟁이 끝난 후 19년만에 다시 경제대국으로 일어서려는 기틀을 다진 것이다. 물론 전쟁에 대한 사과도 배상도 없다. 전 국민을 죽음으로 몰아낸 천황도 건재하다. 수도인 도쿄는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고 발전해 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발전을 밑에서 부터 받치고 있는 사람들의 일상은 점점 비참하다. 생산과 발전에 따라 빈부의 격차는 다시 벌어지기 시작하고 이러한 불편함을 가리는 거대한 상징이 올림픽이었다. 그리고 올림픽은 모든 모순과 갈등을 지우는 마법의 지팡이가 되어버린 것이다.  

비참한 바닥인생들을 겪으면서 사회에 비판적인 시각을 견지했지만 순진한 청년이 점점 체제내에서 양같이 순한 사람들을 대변하는 지도자가 된다. 위임받지도 않고 협력하지도 않지만 더 이상 올림픽으로 상징되는 모순된 지배구도를 파괴하기 위한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거기에는 고된 노동으로 죽어간 형과 같이 노동을 하던 동료들... 에 대한 인간적인 동정과 올림픽을 위해서라면 바닥의 인생들이 죽던 다치던 신경쓰지 않는 지배층에 대한 분노가 더해진다.   

한계가 뚜렷함에도 끝까지 자신의 길을 걸어간 한 사람의 이야기 속에서 민족과 계급, 이데올로기의 문제가 중첩되어 진행된다. 그때의 일본이 곧 지금의 일본으로 연결된다. 작가가 보기에 일본은 어떤 사회인 것일까? 그리고그가 바라보는 일본 학생운동과 좌익은 어떠한 사람들인가? 사실 작가의 기준을 알지 못하겠다. 냉소적으로 바라보면서도 따뜻함을 잃지 않는 그들의 행위가 작가가 좌익에게 갖는 애증이 아닐까? 

일본 이야기다 보니 재일 조선인에 대한 이야기가 간간이 나온다. 놀라운 것은 재일 조선인에 대한 따뜻한 시선이 이 소설에 많이 보인다는 것이고, 이것 역시 좌파의 시각에 경도된 작가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은 아닌가 한다. 소설 속에서도 재일 조선인에 대한 평가가 나올때나마 주의 깊게 바라보는 내 자신도 결국 민족적 한계를 벗어나진 못하나 보다.  

평창 올림픽 유치가 국민적 이슈가 되고 있다. 지배층이나 언론이 표를 의식해서 국가적 행사로 만들려고 노력하지만... 이제 21세기다. 쉽게 먹혀들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 영향력은 아직 건재하다. 소설의 주인공의 고향은 이번 원전으로 유명해진 일본 동북지역이다. 가난한 지역이다 보니 원전이 들어선 모양이다. 그리고 우리나도 역시 가난해서 힘든 지역에 원전이 들어서려고 하고 있다. 무엇보다 비핵 평화의 문제에는 계급적 문제가 스며있다. 그리고 지배자들은 자그만 부를 통해 빈자들에게 가장 위험한 물건을 던지려 한다. 그리고 그 전후관계를 모르는 사람은 그저 고마워할 뿐이고 그것만이 살 길이라고 믿어버린다.   

그것이 일본사회와 동일하게 움직이는 우리의 모습이고... 그렇게 무기력하게 끌려가면서도 저항한번 제대로 못하는 양들의 사회가 우리 사회임을 이 소설은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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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슬픔의 원더랜드
정미경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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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하지 않고 집어들었다가 정신없이 빠져 들었다. 그건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그 시대를 견뎌냈던 사람들의 방황이기 때문이며 그 시대를 견뎌내고도 극복하지 못한 자본의 시스템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전정보 없이 그냥 '정미경'이란 이름으로 집어든 책이다. 그녀의 소설 속에서는 항상 비릿한 무언가가 있다. 사랑도 생활도 소비도 자본의 비릿함을 견뎌야 하는 현재의 속성이 잘 포착하고 있는 작가라고 생각한다. 신경숙류의 아련함이나 애상과는 다른... 여성특유의 섬세함 속에서 표현되는 비릿함은 그녀의 매력이다.  

80년대의 회고류의 작품들도 많았고, 얼핏 보면 그저그런 회고담으로 읽힐지도 모르겠다. 패배한 자들의 고백이라는 진부하고 지루함을 넘어서는 또 다른 무언가를 던져주고 있다. 그건 변화하고 있는 사회이고 또 변화해 가는 사회이며 그 사회를 겪어나가는 사람들이 던져지는 문제이다. 그 과거는 잊어버릴 수도 청산할 수도 없는 과거이며,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에게 항상 무거운 짐으로 남아있는 과거이다. 그 부채감과 새로운 길 속에서 방황하는 사람들을 이렇게도 형상화 시킬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들었다.  

한 시절의 아픔을 보내고 다시 새로운 생활에 정착하면서도 웬지 모를 슬픔과 공허함에 빠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 화려함 속에서 텅비어 있는 무언가를 묻고 있다. 그것을 찾아내지 못하면 아마 한 걸음도 진전하지 못할 것이다. 무언인가 잃을 것이 없는 사람은 독기와 오기로라도 버텨낸다. 그러나 가진 것이 많을 경우엔 불안에 떨기 시작한다. 언제 무너질지 모르기 때문이다.  

경쟁이 무서운건 경쟁은 사회를 발전시키기 보다 사회를 정체시키기 때문이다. 경쟁을 통한 빠른 성장과 발전은 초기 효과이고 전체가 고루 발전하지 못하는 경우 기득권자들이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들은 경쟁을 제한하다. 자신이 잃을 수 있는 게임의 룰을 고쳐서 다른 식의 경쟁의 룰을 만들어낸다. 이것이 경쟁에 대한 실체가 아닐까? 경쟁을 외치면서 경쟁을 제한하는 것. 이것이 보수의 본질이 아닐까 한다.  

그들이 다다른 현실은 과거의 암울한 가난도 아니고 핏발선 눈으로 싸워야 할 대상이 뚜렷한 세상도 아니다. 거리는 붉은 물결이 넘실대는 2002년의 월드컵이었고 광장은 싸움이 아닌 축제의 장으로 넘실거린다. 이런 변화의 세월을 쉽게 넘어서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이러한 자유속에 보이는 불온한 느낌을 경계하는 것이다. 그래서 슬픈 것이다. 무언가를 이루었는데 그 실체가 분명하지 않고 오히려 예전이 그리운... 까닭모를 슬픔이 치밀어 오르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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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1-04-03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머큐리님, 정미경을 읽으셨네요! 저도 이 소설 먹먹하게 읽었었어요. 물론 제가 가장 좋아하는 그녀의 작품은 아니지만요. 정미경의 소설은 언제나 슬픔을 '극한의 슬픔'으로 몰아가기 보다는 서늘하게 그려내는 것 같아요. 전 그런점을 참 좋아해요. 슬픔으로 치닫지 않아서요.

머큐리 2011-04-03 13:29   좋아요 0 | URL
정미경은 다락방님 때문에 알게 되었다구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