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치로 정치하기
박성현 지음 / 심볼리쿠스 / 201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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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참 책을 읽다가 쓰레기 같다고 느껴보긴 처음이네...궤변과 요설의 집합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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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9-19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아이고.
머큐리님 즐거운 한주되셔요~

류동균 2017-07-22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대는 북한에 가서 사시면 될듯합니다. 자유 민주주의의 온갖 달콤한 과실을 지금 이순간에도 의 식 주에서 누리면서, 것멋에 쩔어 비난하는 태도는 매우 비겁한 태도 아닐까요?

머큐리 2017-07-22 1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맘에 안들면 북에 가란 논리야 말로 제일 멍멍이 소리라고 생각하는데... 니가 말하는 자유민주주의가 뭔지 몰라도 민주주의는 아닌듯
 
북촌방향 - The Day He Arrive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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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촌방향이다. 여전히 40대의 찌질함이 일상 속에서 날것으로 드러나는 영화.
홍감독의 영화를 보면 볼때는 낄낄대다가 나올 때는 뭔가 불편한 느낌이 드는데.. 이 영화도 그렇다. 여전히 난 홍감독은 사랑에 대해 철저하게 현실적인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홍감독의 영화를 보다보면 우리나라의 출산률 저하는 사회경제적 시스템도 시스템이지만 그 시스템에 길들여져 인간과 인간의 근본적 사랑이 불임의 지경에 이르른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자고픈 욕망은 충실하나 그 관계를 이어가는 노력에 대한 회피는 여전하다. 그러니 남자들이 찌질해 질 수 밖에 없으리라. 낭만적 사랑을 선택하는 영웅적 서사는 저만치 멀어져 버리고 삶에 지쳐 비루한 일상을 탈출하기 위해 선택하는 섹스를 포장하기 위해 사랑을 읖조리는 시대에 비루하지 않을 수 있을까?  

드라마를 보지는 않지만.. 대부분 막장 드라마라고 비판을 받아도 관계들이 뒤얽혀 있는 와중에서 낭만적 사랑 - 사랑의 영원함과 불멸함에 대해서는 포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홍감독의 영화는 처음부터 그것을 가볍게 넘어서 버린다. 사랑이란 포장을 벗기면 날것으로 드러나는 욕망과 회피가 그럴듯한 언어로 포장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현장은 날것인데 언어로 포장하다 보니 그 장면이 웃길 수 밖에.. 그러면서 씁쓸한 것이다.  

현실적이지만 그렇다고 사랑을 놓지 않는 홍감독의 12번째 영화.
여전히 시간과 공간의 뒤섞임과 인연의 돌발성와 반복성은 반복되는 듯하다. 이 영화를 보면서 결국 찌질하에 대하여.. 사랑에 대하여... 그리고 일상의 놀라운 반복과 변조에 대해.. 그리고 그 변화속에서 드러나는 차이에 대해.. 생각하면서...12번째 영화임에도 내가 홍감독의 영화는 절반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을 발견한다.  

이건 언제 다 챙겨봐야 하는지... 

옛 애인을 찾아간 주인공의 애절한 대사

   
 

너 아니면 안돼.. 다른 사랑은 아름답지 않아.... 

 
   

아름다운 사랑이라.... 반복되는 일상 속에서 찾을 수는 있는 것일까? 

뱀발 : 항상 느끼지만 술자리에서의 리얼함을 홍감독처럼 잘 표현하거나 뽑아내는 사람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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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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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워낙 유명한 시리즈니...그럼에도 진화의 시작을 보면서 느끼는 서사는 좀 특별하다.  

주인공인 원숭이의 이름은 '시저'다. 그러나 서사의 구조는 '출애굽'의 모세와 너무나 흡사하다는 느낌이 엔팅크레딧이 올라오는 순간 내 머리를 스쳐간다.  

모세가 누구인가? 저 옛날 이야기 모음집 성경에 의하면 갓난아기때 버려져 이집트 공주에게 구함을 받아 왕실에서 성장하다, 같은 민족인 유대인의 착취와 학대를 보고 그들을 구하기 위해 일생을 헌신한 민족의 지도자가 아닌가? 그의 영웅적 일대기와 이집트에서 유대인을 데리고 나온 이야기는 그 자체로 스텍터클한 이야기이고 '십계'를 통해 영화로서 성공을 거둔 고전이다.  

진화의 시작에서 유인원들을 이끄는 지도자로서의 시저는 모세를 그대로 닮았다. 어린시절 어미를 잃고 죽음앞에서 인간에게 구원을 받고 특별한 지도를 받으며 성장한 시저는 자신이 애완용 동물(모세식으로 말하자면 노예?)임을 자각한다. 더불어 인간에게 위험한 동물로 인식되어 유인원 보호구역으로 가면서 자신과 동족들인 유인원이 어떠한 처지에 빠져있는지 알게되고 그들을 해방하기 위해 영웅적인 투쟁을 감행하고 결국 그들은 가나안으로 이끈다.   

이런 서사적 동일성은 기독교 서구 문명에게 무척이나 친숙한 내용이며, 친숙한 만큼 이야기의 흡입력이 대단할 수 밖에 없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이야기를 현실성있게 만드는 CG기술은 유인원들의 감정을 생생하게 전달함으로 인간적인 연민까지 이끌어 내고 있다. 그러니까 촬영기술과 서사의 완결성이 스펙터클한 이미지를 넘어서는 긴장과 감동을 이끌어 낸다는 것이다.  

이런 고전적 이야기에 현대적 과학의 종말적 상황을 기입한다. 이 시대를 반영하듯 미래은 언제나 음울하다. 이러한 미래에 대한 우울은 인간의 불완전함에 기인하다. 욕망은 충실하나 그 욕망을 책임지기엔 인간이란 존재는 언제나 불완정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불완정한 존재를 이끄는 욕망의 힘은 인간뿐만 아니라 그 주변에게 엄청난 영향을 미칠 수 밖에 없다. 특히 발전한 생명공학의 파멸적 결과에 대한 묵시론적 전망은 이 영화뿐만 아니다.  

때문에 이 영화를 보면서 자연스럽게 '12 몽키스'와 '20세기 소년'이 연상된다. 바이러스 때문에 인류가 멸망의 길로 가는 이야기...   

모세가 아니고 왜 시저일까? 홍해를 갈라서 이집트 군을 바다에 매몰시킨 모세보다, 주변의 게르만족을 굴복시키고 영토를 점령했던 로마군단의 카이사르가 더 어울렸을까? 그렇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인 '시저'는 단순하게 자신의 동족을 인간으로 부터 구했다는 의미보다 향후 새로운 사회를 이끌게 되는 지도자로서의 위상이 더 종요하다고 감독은 생각했던 것일까? 카이사르의 이름이 독일이나 러시아의 황제를 뜻하는 '카이저'나 '짜르'로 변형되는 과정을 보면 무리한 상상은 아닌 듯하다.   

인간에게 항상 기억해야 하는 양면적인 이야기... 인간은 불완전하기에 끊임없이 상승하려는 존재이고 완성으로 가려는 욕망을 결코 멈추지 않는 존재이자, 그 파멸적인 결과에 대해 결코 책임지지않는 존재라는 사실.. 그 끝없는 욕망의 순환이 멸망으로 가던지 새로운 진보로 귀결되던지 그 미래는 결코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현재의 상상력으로는 미래에 대한 낙관보다 불안이 더욱 크다. 그건 현재가 불안하기 때문이리라. 그 불안의 근저에는 인간에 대한 생각과 그 인간이 현재 저지르는 파괴적 행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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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하(紫霞) 2011-08-21 23: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프리퀄이 싫습니다.
전에 나온 영화 내용을 알아야 하잖아요. 도통 뭔 얘긴지...
그나저나 다음편도 나온다던데...결국 전쟁인가요?

머큐리 2011-08-22 09:51   좋아요 0 | URL
혹성탈출 시작의 이야기는 오리지널 버전은 없는거 같아요..제 기억으론 원작 드라마 마지막에 이계행성인줄 알고 탈출하려고 했는데 결국 이계행성이 지구였다는..충격적 결말로 끝나는데요. 이 이야기의 시초를 어떻게 구상해 내는가는 약간 버전들이 틀린거 같아요.. 그러니까 그냥 뒤를 생각하지 마시고 편하게 감상하심이.. 그리고 후속편은 어찌될지.. 마지막 화면들은 바이러스의 확산으로 보여지는데..거기서 살아남은 인류와 유인원간의 대격돌로 마감되는건지 저도 확신하지 못하겠어요..^^;
 
인어베러월드 - In a Better Worl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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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종료


많은 사람들이 이 영화를 보고 감동을 받은 모양이다. 한 친구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이 영화는 그냥 좋은 영화야. 이러저러 군말이 필요없어..."  

일단 '좋은 영화'라는 점을 전제로 한다.... 나머지는 그냥 나의 변죽일 뿐이다.. 

사실 이 영화를 한 번 보고나서 왜 좋은 영화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총론에서 너무 훌륭한 이 영화를 각론에서는 왠지 불편한 것이다.  그리고 사실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내용은 그런 것이 아니란 것을 알면서도 그냥 불편하다....그건 아마도 그냥 내가 삐딱해서 그런 모양이다.  

이 영화는 강렬한 대비가 돋보인다. 아프리카 사람들의 빈곤한 생활도 뭐든지 풍요로워 보이는 서구 사회.. 벌판에서 뛰어다니는 벌거벗은 어린아이와 넘치는 방을 주체하지 못하고 학교에서 배려받으며 공부하는 서구의 아이들... 이 강렬한 대비속에서도 인간의 밑바닥에 흐르는 폭력에 대한 고찰은 어떤 사회이건 폭력은 끊어낼 수 없는 숙명과도 같은 것이라 이야기 하는 듯하다. 이 영화의 주인공이 영웅적으로 보이는 건 끊어낼 수 없는 인간의 폭력에 대한 저항과 인간애에 대한 확고한 믿음을 보여주기 때문일 것이다.  

'폭력'에 대한 성찰... 과연 인간의 폭력은 어디까지 허용될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물음은 이 영화에서는  폭력이 아닌 비폭력의 가치를 옹호하면서 너무 쉽게 해결해 버리는 듯 하다. 어느 누구도 인간에게 폭력을 휘두르는데 정당함을 가질 수는 없지만, 이미 사회적으로 역사적으로 구조화 되어 있는 폭력에 노출되어 있는 인간에게 저항의 폭력까지 '폭력 일반'으로 수렴하는 것은 더욱 더 잔인한 폭력일터다. 모든 폭력의 근원은 결국 타자를 인정하지 않을 때 발생한다. 타자를 어떻게 인정하고 용인할 것인가는 결국 폭력의 한계를 규정할 것이다.  

두 개의 사회 두개의 강렬한 대비 속에서 과연 폭력은 어떻게 규정되는가? 일상적인 폭력에 시달리는 사회에서는 대항폭력을 사용하는데 주저함이 없다. 아프리카의 난민들을 심심풀이로 공격하던 무장단체의 수괴는 결국 난민들의 폭력 속에 목숨을 잃어야 했다. 그러나 일상적으로 폭력이 저해되는 선진사회에서의 폭력은 과잉 사용하면 어떻게든 제3의 피해자를 양산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으로 결론 내리는 듯 하다. 그러고 사소하건 중요하건 폭력이란 내면의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는 폭발로 규정하는 듯 하다.  

같은 폭력일지라도 대응은 그 사회의 양태에 따라 천차만별이다. 개인의 분노 역시 그 사회가 가지는 구조적 모순에 따라 다양하게 나타날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찰한다면.. 역으로 좀더 나은 세상을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진정한 일은 단순한 용서와 화해가 아니다. 개인적인 특수성으로서의 분노의 정화도 필요하지만 그 사회의 구조적 폭력을 멈출 수 있도록 하는 것도 매우 중요한 일이 될 수 잇다. 

불편함의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개인적 분노의 승화만으로도 좀더 나은 세상을 그릴 수 있는 사회와 그렇지 못한 사회의 대비는 폭력이란 그렇게 단순하게 해결 될 수 없는 문제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그러나 영화는 개인적 분노의 승화를 알려주지만 구조적 폭력의 해결점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아니 침묵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세계적으로 이 땅의 질서를 관장한 백인들의 시각이 주되게 관철되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갖게된다.  

그냥 좋은 영화에... 나는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너무 민감한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불편한 건 불편한거다... 그래서 난 좋은 영화라는 가치 중립적 표현에 대해 긍정하면서도 그걸 넘어서는 뭔가를 욕심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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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을린 사랑 - Incendies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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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편하다는 것... 진실을 직시한다는 것... 그리고 그것을 감싸 안는다는 것...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일을 이 영화는 태연하게 해치워 버렸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가 끝나고 자막이 올라가는 그 순간까지 머리는 멍하기만 하다. 마치 고대 그리스의 비극에 몰입했다가 깨어난느낌... 그 운명적이고 압도적인 비극성에도 불구하고 잘 알고 있는 사실을 눈으로 확인한 듯한 불편함까지... 

어머니 나왈의 급작스러운 죽음과 이해하지 못할 유언으로 쌍둥이 남매 잔느와 시몽은 혼란에 빠진다. 죽은 줄 알았던 생부와 얼굴도 모르는 형에게 편지를 전하라는 어머니의 유언... 그 유언이 지켜지지 않으면 비석도 세우지 말라는 말에 두 사람은 당혹스럽다. 어머니의 유언을 무시하려는 시몽과는 반대로 잔느는 어머니의 부탁을 들어주기 주해 어머니의 고향으로 떠난다. 그리고 거기서 조우하게 되는 어머니 나왈의 과거는 잔느에게 상상하지 못할 고뇌를 던져준다.  

나왈은 종교적 내전이 치열한 땅에서 이교도와 사랑에 빠져 고향을 등지려다 사랑하는 사람을 친족의 손에 죽임을 당하고 명예살인까지 당할 뻔한다. 그리고 낳은 아이가 바로 쌍동이의 형.... 출산 후에 고아원으로 보내지고 내전의 와중에 행방불명이 된다.

고향을 등지고 학교에 다니던 나왈이 겪어야 했던 전쟁은 종교의 이름으로 잔인한 학살이 되풀이되는 지옥이엇고 나왈은 성모 마리아를 소총에 붙이고 여인과 아이들까지 학살하는 기독교 민병대의 잔인한 행위에 충격을 받고 테러리스트가 된다. 기독교 민병대의 지도자를 암살하고 15년이라는 긴 세월을 감옥에서 보낸다. 감옥에서 버티기 위해 끊임없이 노래 부르며 저항하던 여인 나왈... 그녀는 그 곳에서 상상하지 못할 고문을 견뎌내고 캐나다로 이주한다 

종교가 틀린 이민족간의 분쟁으로 인해 개인이 받아야 했던 아픈 상처들... 그 만진창이의 사회속에서 끈질지게 이어가는 생명의 애착이 나왈을 살게 했던 힘이었을지도 모른다. 잃어버린 자식에 대한 죄책감과 회한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던 나왈이 무너져 죽음으로 들어가게 된 것은 비밀을 알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살았던 땅의 운명처럼 자신에게 닥쳐온 운명은 살아서 견디기 힘든 비밀의 폭로였고 그것을 온전하게 감당하기에는 나왈의 상처는 깊고도 길었으리라.  

시몽과 잔느는 생부의 존재와 형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다. 그리고 도달한 진실에 대해서 전률하고 그 운명이 내린 비극에 대해 할 말을 잃는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쌍둥이의 탄생 자체가 비극이었고.. 그 비극은 탄생으로 끝나지 않고 그 긴 인연의 사슬을 끌고 있음을 알았을때의 망연함.  

남편과 자식에게 남기는 나왈의 편지는 운명에 순응하는 인간의 위대함을 보여준다. 아니 순응할 수 밖에 없는 나약함을 보여준다. 거부할 수 없기에 받아들여야 하는... 의지로 해결할 수 없기에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그럼에도 결연하게 거부하고 받아들여야 하는 그 사랑의 결말은 먹먹하다.  

그리스 비극의 카타르시스에 대한 논의를 책 속에서 이해했다면... 어쩌면 이 영화는 정서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주요한 매개체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더불어 어쩌면 서양인들이 가진 비극적 세계관이 너무 그대로 드러난 건 아닌가 하는 회의가 들기도 한다. 하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건 그 빼어난 서사와 점점 고조되는 서정성의 조화가 한시도 눈을 뗄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이다. 결말 부분을 예상하면서도 식상하기보다는 점점 두려워지는 영화...
결말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그렇게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란 운명적 느낌으로 오싹해지는 영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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