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아나키스트의 고백
안토니오 알타리바, 킴 지음, 해바라기 프로젝트 옮김 / 길찾기 / 2013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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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내전, 아나키즘... 한 개인의 역사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자살로 마무리되는 일생을 만화로 출간되었다.

 

출간 시 19세 이상으로 되어 있어 출판사에서 항의했다는 설이 있었고 논란이 되었던 까닭으로 사실상 판매는 나쁘지 않았다고 들었다. 하기사 아직도 이 땅에서는 무언가 금지 당했다고 하거나 검열당했다고 하면 호기심이 급상승하는 사회니까...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좀 있는 사회이다 보니 검열이나 금지는 판매를 촉진하는 노이지 마케팅일 수 있다.

 

청소년들이 보지 말아야 할 장면이 성애적인 장면인지 이 사회를 지탱하는 자본주의적 가치관에 대한 반대와 좌절에 따른 냉소인 것인지 잘 모르겠지만, 최소한 이 체제를 옹호하는 사람들에게는매우 불편한 만화임은 틀림없다. 또한 좌편향의 사상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불편한 만화임은 틀림없다. 역사는 좌와 우를 뚜렸하게 구분하지 않았다. 최소한 그 역사를 살아간 사람들에게 좌와 우보다는 생존이 항상 문제였던 것이다.

 

농촌의 가부장적인 환경에서 자란 주인공이 청년이 되어 도시로 나가고 군대를 갔다왔더니 세상이 달라졌다. 인민전선이 정권을 잡고 공화정을 수립한 그 격동의 시기에 프랑코를 주축으로 한 군부세력과 우익이 쿠데타를 일으켜 스페인이 내전으로 들어갔다. 이때 주인공은 징집 후 군대를 탈영하여 인민전선의 의용군으로 전쟁에 참여한다.

전쟁을 겪으면서 주인공은 아나키스트 사상에 동조한다. 프랑스나 스페인에서의 노동자들과 급진사상가들은 마르크스주의보다 아나키즘에 더 많은 지지를 보냈다. 당시에 인민전선의 주축을 이루던 노동조합의 주도권도 아나키즘이 대세였다. 이는 나중에 스페인 내전에 참여했던 소련의 붉은 군대와 불화를 일으키는 요인이 되었고, 그 내분에 대한 기록은 조지 오웰의 '카탈루니아 찬가'에서도 다루어지고 있다.

 

모든 계급을 부정하고 국가와 민족을 부정했던 아나키즘에 경도된 주인공은 내전의 패배 후 세계대전의 참혹함을 겪은 후 다시 스페인으로 돌아 온다. 스페인으로 돌아왔을때는 프랑코 독재가 자리를 잡은 후였고 같이 인민전선에서 싸우던 사람들은 예전의 기억을 잊어버리고 생존에 침잠해있다. 오히려 아무것도 모르던 젊은 시절 주인공을 가르쳤던 많은 지식인들과 동료들이 프랑코체제에 적극적으로 동조하고 살고 있었다.

 

사상이 밥을 대신하지 않는다는 뼈아픈 현실에 적응하는 주인공은 바뀐 사람들과 시대를 비판적으로 바라보지만 그 역시 체제내에 동화되어 간다. 가족, 사회, 국가의 견고한 틀 속에서 하나의 부품처럼 지내는 주인공의 말년은 결국 배금주의와 배신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말년에 양로원으로 노구를 의탁한 주인공이 선택한 자유는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 시대의 역사를 관통하는 어는 평범하면서 평범하지 않은 사람의 일생이 지금의 사회와 겹쳐보이는 것은 그 당시 세상을 변혁하려는 '진정성'이 광주사태 이후 현대를 관통하는 한국의 변혁적 시기를 닮았기 때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내면의 성찰과 사회의 변혁을 위한 '진정성'이 시대의 굴곡에 따라 어떻게 변질되고 변화되어 가는지 한국 사회도 많은 반성적 사고를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진정성이 부담스러운 시대... 자본에 복종하던가 사회를 내파시켜버릴 폭력으로 경도하던가... 적군파와 테러리즘의 노선이 폭력으로 경도 되었다면 신자유주의의 신도로 뉴라이트의 등장은 자본에 항복한 대표적인 태도일테다. 어느 경로를 택하건 미래를 밝혀줄 이데올로기는 사망하고 자본주의 체제내에서의 계속되는 삶이 있을 뿐이다. 그 역사적 경로를 지나오면서 선택해야 할 것이 죽음밖에 없다면 그것 자체로 암담하다. 그럼에도 이 개인의 고백 속에서 우리가 다시 찾아야 할 건 변혁에 대한 '진정성'인지 삶에 대한 '진정성'인지 알 수 없다.

 

세상은 다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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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nt236 2013-10-10 14: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생각에는 성애 장면을 가장하였지만 자본주의 체제의 어두운 면을 까발렸기 때문이라고 생각이 드네요.

머큐리 2013-10-11 10:23   좋아요 0 | URL
이 땅에서 제일 음란한(?) 사람은 검열을 담당하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요..작품을 보는게 아니라 띄엄띄엄 뭔가 상상을 자극하는 것만 보는 것 아닌지...문학도 영화도 만화도...ㅎㅎ

무해한모리군 2013-11-05 10: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구입하러 들어왔다 마침 머큐리님 리뷰가 있어 땡투를 누릅니다.
좌절하는 것이 삶인데 그 좌절에 맞서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요즘 생각합니다.
 
자유란 무엇인가 (반양장) - 벌린, 아렌트, 푸코의 자유 개념을 넘어
사이토 준이치 지음, 이혜진.김수영.송미정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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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자기를 통치하는 자유

 

 문제의식

18세기 말 이후의 리버럴리즘은 '간섭의 부재'라는 영역을 확정하는 일에만 전념했던 것이 아니라 동시에 어떻게 과잉통치 - 가령, 칸트와 훔볼트가 가부장주의를 비판했던 국가의 내무행정 = 경찰과 같은 - 를 억제할 수 있는가에 관심을 기울임으로서 피통치자 자신에 의한 자기 통치의 실천을 추구해 왔다. 그렇다면 현재 자유롭다고 간주된 개인에게는 어떤 자기통치 [각자에 대한 자신의 지도(指導)]가 요구되어야 할까

 

자유에는 자기 규율이 수반되어야 한다는 견해는, 가령 '자유통치'를 지지하는 사람들의 성격을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 '자조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견해는 밀에서 부터 하이예크에 이르는 리버럴리즘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사고 방식이다.

 

로즈나 딘의 지적처럼 현대의 통치는 국가에 의한 직접적 일원적 통치에서 개인에 의한 능동적인 자기 통치에 작용하는 간접적 다원적 통치로 급속하게 변화화고 있다.

 

자기통치의 주체는 변화된 통치하에서 어떻게 자유의 규율을 수행하고 있는지 그 특징을 세가지로 지적해 보면

첫째, 현대의 자기통치에 요구되는 것은 유연한 자기개발 자기실현이다.

둘째, 자기의 행위에 대한 자기 평가의 시선이다.

세째, 자기 책임의 강조다.

즉, 자기의 능력을 모두 끌어내 자신이 소유한 잠재력을 성공적으로 실현하고, 자신의 행위에 대한 평가를 자기 / 타자 / 사회에 적극적으로 맡기면서 자기가 선택한 결과를 개인적으로 수용하는 것을 긍정하는 선택의 주체. 이것이 바로 현대의 '자유의 규율'이 추구하는 주체상인 것이다.

 

2. 자기 통치의 문제성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잇는 것은 자기 통치의 주체는 자기 통치와 자신의 삶에 대해 항상 불안과 불만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자신을 평가해야 할 척도가 절대적인 안정성을 담보하지 않는 이상 그 척도가 바뀔 수도 있다는 점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릴 수 없으며, 또 무엇보다 앞으로 자신을 자기 통치의 주체로 유지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좀 더 근본적인 불안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두번째 문제는 자기 선택에 대한 자기 책임이 당연한 것으로 수용되는 환경에서는 사회적 문제가 개인적 문제로 환원됨으로써 사람들 '사이'에 있어야 할 문제가 사람들 '내부'의 문제로 전환되는 경향이 강화된다는 점이다.

 

세번째 문제는 자기선택 - 자기책임의 윤리는 이렇게 문제를 개인화하는 태도를 조장하는데, 이런 태도는 타인의 삶에 대한 관심의 방식에도 영향을 미친다. 각 개인에게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타자의 책임을 물을 수 없기 때문에 타자의 좌절이나 실패는 - 조금 안타깝기는 하지만 - 나와 '관계 없는'일이 된다.

 

마지막으로 자기를 통치하는 주체의 관심의 방식은 이러한 상호 배타성뿐만 아니라, 특히 '자유의 규율'에 복종하지 않는다고 간주된 타자에 대해 징벌적인 태도를 갖는 다는 특징이 있다.

'의존적 상황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적의와 증오는 그/ 그녀들이 의존하고 있는 '공적인 것' 일반에 대한 멸시와도 관련이 있다.

또한 바우만과 모리스 스즈키가 지적한 바와 같이, 자기 책임이 과잉적으로 강조되는 정치 문화와 '공통의 적'으로 간주되는 사람들 - 범죄자나 어떤 부류의 외국(인)등 - 에 대한 '공동체적 증오'의 고조 사이에는 분리하기 힘든 관계가 있다.

 

자기선택 - 자기 책임의 논리가 타당한 권역에서 탈락한 사람들은 한편으로는 재교육이나 직업훈련 등과 같은 좀 더 직접적인 규율 대상, 즉 자기 통치의 주체가 되는 것을 저해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기 위한 교정/치료의 대상이된다. 그/ 그녀들은 능동적인 '자조'의 주체로 취급되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적 간섭으로 통치되어야 할 '피통치자'의 위치에 놓이는 것이다.

 

다른 한편 대체로 자기 통치능력이나 의욕이 부족해 보이는 사람들은 감시/ 치안 관리의 대상이 된다. 실제로 대도시 저변의 하류층은 이동의 자유, 통신의 자유, 또는 프라이버시까지 침해 당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러한 시민적 자유에 가해지는 제약은 실제로 안저의 확보라는 이유로 정당화 되고 있다. 공권력에 의한 직접적인 치안관리의 대상이 되지 않는 경우에도 그들은 거주공간의 분리, 격리 및 상업시설 등의 경비 강화를 통해 실질적으로 이동 = 접근의 자유를 제약 받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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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을 기도하라 - 죽어도 죽지 않아
한승훈 지음 / 문주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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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의 표지를 보면 예수의 초상과 체 게바라의 초상이 반쪽씩 나누어져 있다. 이 책의 주제를 잘 표현해 주는 경우이다. 더구나 2013년 광주에서 호출된 체 게바라는 아직도 그 혁명성을 의심받고 있다. 때문에 보수적인 신문들은 체 게바라의 티셔츠를 입고 공연한 일을 가지고 빨간 칠을 하고 있다. 이미 자본주의 아이콘으로 변질되어 혁명성이 사장되었다고 믿었던 나는 보수주의자들의 과격한 게바라의 호출에 놀랐다... 진심으로....

 

이 책은 크게 두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편은 예수와 예수가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야훼'를 설명하면서 예수가 살았던 지역의 역사적 사실과 그에 따른 예수의 생애를 기술하고 있다. 예수의 생애를 모르는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예수에 대한 기록들이 예수의 행적을 기록한 4대 복음(마태, 마가, 누가, 요한)내에서도 충돌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기독교인들도 잘 모를 것이다. 더구나, 예수가 행햇던 행적과 발언이 역사적 사실과 화학적 결합을 일으킬때 그저 평범하게 느껴지거나 뭔가 심오해 보이던 말씀이 얼마나 전복적이고 혁명적인지 알게 된다. 저자가 주장하고픈 것이 그것이다. 예수는 당시의 변방에 위치한 경계인이고 당시의 체제를 위협하던 혁명가 였다.

 

후반부는 이 땅에서의 기독교의 역사와 사회적 위치에 대해 논하고 있다. 물론 이 땅 교회의 역사를 돌아보면 부정적일 수 밖에 없다. 왜 그럴까? 예수를 통해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하는 이 땅의 교회는 과연 어떤 원리를 통해 움직이고 있을까? 이에 대한 필자의 답변은 초지일관되게 예수에 대한 왜곡 및 배반의 역사로 읽힌다. 지금의 교회의 행태는 2000년전 유대의 왕으로 십자가에 예수가 매달렸듯이 예수가 21세기의 이 땅에선 빨갱이로 몰려 국가보안법으로 탄압받을 것이라 한다. 그만큼 예수가 살았던 식지민 유대와 분단의 현실은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으로 유사한 면이 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 알았던 것은 사막의 떠돌이들의 잡신인 '야훼'와 이를 정치적으로 포획하려 했던 유대 지도층의 신인 '야훼'의 충돌이었다. 개인적으로 구약의 신과 예수가 말한 신은 차별이 있다고 생각했기에 부족신인 야훼가 곧 예수가 따르던 신이라는 저자의 견해는 뭔가 갸우뚱하긴 하다. 그럼에도 군사적 메시아와 체제를 극복하고,  온 세상에 평화를 주려고 온 메시아는 결국 충돌하는 이상일 수 밖에 없다.

 

후반부의 기독교 비판은 전반의 예수에 대한 평가로 부터 도출될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예수의 가르침 자체를 현재의 교회가 따른다고 보았을때 예수라는 사람이 원래 그런 인물이라면 교회를 비판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 교회는 예수를 배신했기에 비판을 받는다. 그들은 예수가 모시는 아버지 야훼를 버리고 재물신이니 맘몬을 모시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유대 예언자의 전통을 이은 인물로 그려져 있다. 예언자들은 광야의 잡신이자 구속으로 부터 유대민족을 구원한 야훼를 모신다. 사막의 잡신은 야훼는 국가나 정치적으로 구속된 신이 아니다. 사막에서 떠돌아 다니는 모든 비천한 자들의 신이다. 그리고 그 신은 자신의 형상을 만들어 어느곳에 가둬두는 걸 거부하는 신이기도 하다. 그는 성전에 거하는 자가 아니고 자신을 애타게 찾고 잇는 비천한 자들과 함께 하는 신이기도 하다. 그리고 예수는 그런 신을 아버지로 부르고 그 신이 사랑하는 소외받은 자들과 함께 했다. 그들은 죄인이고 병든자고 세리이고 창녀이고 거지이고 불구자였다. 이른바 사회적 약자였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결국 예수는 유대왕을 사칭한 죄로 십자가에 매달렸다. 이른바 정치범 이었던 것. 예수가 증오한 자는 야훼를 성전에 가두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신을 팔았던 사두개인들이고 유대땅을 로마의 지배하에 놓은 왕권이고, 이들에게 저항하고 진정한 유대의 문화를 지키겠다고 자신만의 율법을 남들에게 강요한 바리새인들이었다.

이들에게 예수는 '독사의 자식들'이라 불렀다.

 

정권을 장악하고 군대의 통수권조차도 상국에게 바치겠다는 권력자들, 교회만이 모든 것이라고 주장하는 목사들, 교인으로 진리를 독점한 듯이 사람들에게 불신지옥을 외치며 일반사람들을 죄인취급하는 기독교인들... 저자가 보기에 이들은 모두 '독사의 자식들'이다.

 

예수가 누구일까... 그 혁명적 영성을 어떻게 이어 나갈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치열하고 차분하다. 체제를 깨뜨릴 영성과 그 후에 구축될 새로운 체제와의 영원한 갈등을 지적하고 언제나 체제 내의 모순을 깨버릴 상징으로서의 예수는 소환하지만...사람들이 소환하는 예수는 언제나 그렇게 혁명적 영성을 가진 예수는 아니다.

 

예수는 누구일까.... 그건 결국 호출하는 사람들 맘에 있다. 그게 불행하지만 기독교가 가진 한계이자 가능성이다. 문제는 예수가 아니다 그를 호명하는 사람들이다. 그것이 이 책이 나에게 던져준 최고의 답이었다.

 

뱀발) 기독교인들이여 동성애 혐오 좀 그만하자... 성경대로 산다고 하면 재산 다 버리고 예수가 가던 길을 가라...그대들의 신은 그대들의 지갑에 돈을 넣어주는 신이 아니다. 돈 있는 자가 천국에 못들어가게 하는 신이다. 성경를 일점일획도 틀림이 없는 신의 말씀으로 믿는 다면 재산과 건강과 명예를 요구함은 죽은 다음 지옥으로 보내달라고 기도하는 꼴이다. 그렇지 않다면... 성경의 말씀으로 동성애에 대한 죄악과 혐오는 그만 좀 하자... 그들도 하느님이 아끼는 그 분의 자식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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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혹을 팝니다 - 담배 산업에서 지구 온난화까지 기업의 용병이 된 과학자들
나오미 오레스케스 외 지음, 유강은 옮김 / 미지북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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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연가로서 요즘의 세태는 참으로 곤혹스럽다. 담배를 피울 수 있는 공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아니, 거의 탄압이라 부를 수 밖에 없는 상황이다. 담배를 피울 공간이 줄어들어도 항변할 수 없다. 그건 간접 흡연이 타인에게 심대한 건강상의 위해를 끼칠 수 있다는 과학적인 결과가 있기 때문이다. 이런 명확한 결과에 따라 흡연행위를 공공장소에서 제한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기 힘들다. 사실을 알고도 이의를 제기한다는 건 나의 쾌락을 위해 타인에게 공공연하게 폭력을 행사하겠다는 의사표시에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간접흡연 자체가 타인에게 피해를 입힌다는 사실이 명확한 것이 아니고 실제적인 인과관계가 없다면...또는 매우 부족하다면.... 흡연자인 나는 어떤 행동을 취할까? 아마도 흡연을 제한하는 정부의 방침에 대놓고 반대하거나 암묵적으로 저항할 것이다. 타인에 대한 죄책감도 경감될 것이다. 담배연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이 과장되게 주장하는 것일 뿐이지 실제 피해를 주는지 알 수 없는데 오버한다고 되려 화를 낼 것이다.

 

이 작은 사례에서 나오듯이 명확한 결과가 나와있는 과학적 사실들을 비틀고 왜곡해서 과학적 확증이 부족하다고 주장하거나 명확한 인과관계가 결여되었다고 주장함으로서 긴급하게 대처해야 할 사안을 논쟁이 필요해서 더욱 더 조사가 필요한 사안으로 만들어 국가의 정책적 개입을 저지하거나 국가의 정책을 강화하는 과학자들이 있다. 이들은 맨하턴 프로젝트를 통해 과학적 업적을 쌓고 국가의 과학 행정업무를 처리하다 다국적 기업의 후원에 따라 사설 연구기관을 만들어 조직적으로 업계의 이익을 대변하는 과학자들이다.

 

이들이 영향을 미치는 분야는 다양하다. 담배산업, 미국의 핵억제 정책인 스타워즈 정책, 산성비에 대한 사안, 지구 온난화에 대한 사안 등등... 이들은 초기에 논란이 되었다가 점차 과학적 결과물들이 누적이 되어 현실적으로 대처가 필요한 사안들마다 개입하여 논점을 흐리고 결과물의 근거가 완전치 않다는 주장을 하여 사람들을 혼란에 빠뜨리곤 한다. 그리고 그들이 주장하는 근거는 바로 '과학'이다.

 

이 책은 이렇게 기업의 용병이 되어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과학자의 양심을 저버리고 교묘한 궤변으로 사람들을 기만하는 과학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전문분야가 아님에도 기업의 후원으로 사설 연구소를 차리고 언론과 홍보회사를 끼고 대대적인 반과학적 선전을 수행한다. 그 목표는 기업의 이윤을 침해하는 정부의 규제를 막아내고 기업의 이윤을 지켜내기 위해서 이다. 더 근본적으로 자유시장의 근본적 질서을 막아내기 위한 전투의 최선전의 용병으로서 활약하는 것이다.

 

왜 한때 저명한 과학자로서의 명성을 구축한 인물들이 과학을 부정하는 행위까지 저지르게 되었을까? 그리고 그런 행위들이 사회적으로 용인받고 스며들게 되었을까?

 

이 책에서 분석하기를 첫째로 표현의 자유에 대한 언론의 기계적 균형에 있다고 본다. 언론은 소수의 의견이라도 그 의견에 대한 표현을 존중해야 한다고 인식했다. 따라서 과학적으로 명확하게 밝혀진 일이 아니라면 소수의 의견에 대한 표현을 존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제는 소수의 의견이라도 사태가 명확하게 밝혀져 인정받지 못하는 의견까지 존중해야 할 것인가에 있다. 오리려 소수 의견 존중은 사회적 소수자가 자신의 의견을 피력할 힘이 없을 경우에 언론의 공공성을 위해 배려해야 하는 원칙일 뿐이다. 그러나 기업의 후원을 받고 있는 이들은 소수의견자들이라 보기보다는 과학적인 근거가 밝혀진 사안에 대한 거의 개인적 의견에 불과한 경우였다. 이것을 언론이 기계적으로 적용한 것이다. (그럼에도 책에서는 자세히 다루지 않았지만, 기업의 후원을 받는 이들에 대한 언론의 대접은 동일하게 기업의 영향력에서 자유롭지 못한 언론 환경의 영향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더구나 우익저긴 논조를 싣는 언론들은 이들의 의견을 의도적으로 확대 재생산하고 있었다.

 

둘째로 자본의 힘이 그만큼 강하다는 얘기다. 담배회사나 정유회사는 자신의 의도와 일치하는 과학자들과 손잡고 막대한 자금을 투여하여 사설연구소를 만들고 그것을 기반하여 기존의 과학적 성과를 부정하는 선전을 시행했다. 연구소의 논문으로, 신문의 칼럼으로, 소책자의 발간으로... 막대한 물량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한 방어를 해온 셈이다. 물론 그 주장들은 과학적 검증을 받지도 않았고 기존 성과물을 왜곡하거나 자신이 유리한 부분만 짜집기한 과학이라 말할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덴마크의 정치학자 비외른 롬보르의 '회의적 환경주의자:세계의 실재상태를 평가한다'는 책은 통계를 잘못 사용한 교과서적인 사례로 비판을 받고 있다. 2002년 저명한 과학자 네명이 '사이언티픽 아메리카'에 기고한 글에서 롬보르가 사용한 수학이 어떻게 현실을 오도했는지를 자세히 설명했다. 덴마크에서는 이 책을 둘러싸고 열띤 논쟁이 벌어졌으며, 롬보르는 과학적으로 정직하지 못하다고 비난을 받았다. 결국 덴마크 과학기술혁신부는 롬보르에게 과학적으로 부정직한 행동을 했다고 물을수 없다고 결정했다. '회의적 환경주의자'가 과학저서임이 입증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P479 

 

이들은 심지어 레이첼 카슨의 '침묵의 봄'을 비난하기까지 한다. DDT의 환경영향을 고발한 레이첼카슨이 무해한 DDT를 음해하여 말라리아의 창궐을 용인하여 제3세계의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으로 몰아 넣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히틀러보다 더한 학살자로 묘사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러한 주장은 버젓하게 인터넷에서 쉽게 검색되고 있는 것이다.

 

이들은 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과학에 대한 불신을 퍼트린다. 그 근본정신은 '자유시장'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에 있다. 그러나 이들이 공격하는 산성비 문제나 온난화 문제는 자유시장의 작동이 외부로 비용을 전가하는 전형적인 사례이고 실제로 '자유시장'의 실패를 증명하는 사례들이다. 이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오히려 자유시장의 외부비용을 지적하는 환경주의자를 사회주의나 공산주의자로 몰아 붙이고 과학적 사실을 이념적 공포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거기에는 '개인적 자유에 대한 신화'가 자리잡고 있다. 환경주의자들이 미학적 환경보호에 머물지 않고 환경보호를 위해 규제적인 방안을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규제에 반대하고 시장의 자유를 지키는 것이 자유를 보호하는 행동이라 여기고, 과학자임에도 불구하고 반과학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현재의 시스템을 수정하거나 파괴할 수 밖에 없는 민감한 사안에 대해 과학적으로 명확하지 않다는 이유로 반대하고 오히려 위기를 과장하여 자유시장을 파괴하려는 환경주의자의 음모론으로 몰아가고 있는 것이다.

 

과학은 명확한 무엇인가를 증명한다는 편견이 이들의 행위를 정당하다고 인정하게 하는지 모른다. 그러나 과학은 무엇인가를 명학하게 증명하기 보다는 있는 그댈의 사실을 밝히고 그것이 동료들에게 검증받고 확증할 수 있는 사실을 이야기할 뿐이다. 그 사실에 기반하여 대책을 세우는 것이지 모든 것이 명증해야 과학적인 사실은 아닐터이다.

 

결국 자본과 언론과 이데올로기가 결합하여 과학적 결과물을 무위로 만들고 인류가 시급하게 대처해야 할 문제를 자본의 이익에 봉사하는 일부 과학자들에 의해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못하게 하고 위기를 심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은 이 땅에서도 보여지고 있다. 황우석 사건과 사대강의 진실은 수많은 과학자들이 아니라고 말한 사실이 어떻게 왜곡되어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환경을 파괴하는지 보여주는 일각일 뿐이다. 황우석의 연구도 자본적 이익이라고 포장되었고 사대강 개발도 환경의 보호라는 명분으로 건설자본의 이윤을 보장했을 뿐이라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이 책의 장점은 결국 과학과 자본과 언론과 국가의 연결고리 속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하는지를 경험적으로 깨닫게 해준다는데 있지 않을까? 주로 미국의 사례들이 나오지만 매우 흥미진진하며 얻을 수 있는 교훈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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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13-08-22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감을 누를 수 밖에 없는 리뷰이네요^^

머큐리 2013-08-22 21:52   좋아요 0 | URL
^^;;
 
아주 사적인 시간 노리코 3부작
다나베 세이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이란 영화로 다나베 세이코를 알게되었다. 원작이 단편이라는데 놀랐고 그 단편집에 포함된 단편소설들이 왠지 모르게 끈적이면서도 쿨한 것에 놀랐다.

여성의 성과 섹슈얼리티...라는 주제에 대한 모호한 의미들이 난무 하면서 이 작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단편집의 소설들이 이제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시점에서 세이코의 장편을 골라든다.

난 이 소설이 또 다른 단편집이라고 생각했고 작가외에는 아무런 사전 정보없이 골라든 책이라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읽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는 책을 읽었던 터이고 그 책을 통한 일본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성의 규정과 섹슈얼리티의 변화를 나름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결혼과 사랑과 일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여성이라는 주제는 꽤 친숙햇다.

 

문제는 친숙함이 곧 앎으로 이어지지 않는 다는 사실.

페미니즘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곤혹스러움은 내가 남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이해가 한계를 가진다는 점이다. 또한 남성으로서의 사회적 권력에 문제의식이 약하고 페미니즘의 주장에 대해 매우 공격적으로 느끼는 면도 있다는 점... 즉 너무 약자인 남자를 몰아 붙인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긴 예전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서평을 쓰는 기자들이 집으로 가져가지 않은 책이란 말이 있었다. 집에 있는 옆지기가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불안해서 그랬다나 뭐라나...

 

이 소설에서도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딜레마가 그대로 드러난다. 일부일처제 안에서 남편의 소유물로 전락한 듯한 자신의 처지와 사랑과 결혼제도가 양립하기 힘든 사실들.... 그 속에서 결혼전에 꿈꾸던 자신의 미래상이 어느 덧 사라지고 남편의 통제속에 인간관계마저 왜곡되고 통제되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

 

또 다시 문제는 그러한 여성의 내밀한 독백과 남성에 대한 평가들을 난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있다.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을까? 아님 내심 공감하고 있을까? 공감하면서도 인정하기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나?

 

사적인 생활에 대한 이야기... 그 속에 담긴 일말의 진실과 여성이 바라보는 남성에 대한 생각과 그 생각이 과연 많은 여성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인지에 대한 의문점... 등이 난마처럼 뒤섞여 읽는 내내 혼돈스러웠다.

 

사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 잡글을 쓰는대신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 대한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이 감성적인 소설을 읽고 느낌을 이해하려는 것 보다 나에게 더 적합할지 모르겠다.

여성... 남성인 나로서는 사춘기 시절의 열망했던 소녀에서 지금의 옆지기 까지... 알 수없는 미스테리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적 구조에 따른 남성만들기로 인한 것이라고 그 장벽을 넘어 여성을 이해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감이 안온다.

 

그래도.... 남성연대여... 니들의 주장은 너무 허접하고 찌찔하다는 거.... 혹시 남성연대 분이 이 글을 읽고 동일한 느낌을 갖는다고 한다면... 아... 정말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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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08-13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큐리님, 너무 오랜만이세요~ ^^
더운 여름 잘 지내시나요?

전여, "아내가 결혼했다"를 읽으면서 진짜 이해가 안 가는거예요.
그건 남자의 눈으로나 가능한 줄거리다, 어떤 여자가 희생 다 해가면서 시댁을 두개,
남편을 두명 모시냐.... 이런 생각에 전혀 공감을 못 했답니다. 큭큭.

어쩔 수 없는 한계같아요. 각자 입장이 다른거, 그래도 이해하려고 노력(!)은 한다는거... 노력만. ㅋ

머큐리 2013-08-15 18:30   좋아요 0 | URL
마고님도 더운날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신가요? ㅎㅎ
'아내가 결혼했다'를 보시고 시댁에 의문을 가지신거 보니 역시 관점이 다른네요..
남자인 저는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독점하지 않고 공유할 수 있는지가 정말 의문이었거든요...

역시 남녀의 관점은 어디가 틀려도 틀린 모양이에요...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