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짜사회학' 대담③] A급 실천가 김규항이 말하는 한국 사회 

지난 28일 <프레시안>, 김영사, 예스24가 공동 주최한 <괴짜 사회학> 출간 기념 공개 대담이 건국대학교 새천년관 대공연장에서 열렸다. 김규항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은 이날 우리는 과연 '잘' 살고 있는지 질문을 던졌다.
김규항 발행인의 대담 내용을
강연 형태로 재구성했다. 

 

"이명박은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내려온 외계인이 아니다"

현재 한국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보면 민주화가 이뤄 진 것은 분명합니다. 내가 초등학교를 다니던 때, 잠깐 동안은 거수경례를 했어요. 학생과
교사가 서로 마주보며 경례를 하고, 이렇게 구호를 외쳤죠. "건설합시다." 더러운 세상이었죠. (웃음) 거기에 모든 남자 교사는 폭력 교사였고, 여자 교사라고 해서 낫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지금 초등학교는 그렇지 않습니다. 함부로 때리는 교사도 없고, 경례는 상상할 수도 없지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민주화를 이룬 셈이죠. 하지만 실제 아이들이 생활하는 모습은 나의 초등학교 때 모습보다 못하다고 느껴지는 건 왜일까요?.

나의 초등학교 시절, 오후 3시에 소재가 확실하게 확인되는 아이는 벌을 받는 아이거나 아파서 병원에 있는 아이였습니다. 나머지는 저녁 때 엄마가 밥 먹으라고 찾기 전까지 놀기 바빠 어디에 있는지 아무도 몰랐죠. 하지만
지금 초등학생이 오후 3시에 소재 파악이 되지 않으면 사고가 났다고 판단하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세상이 험해져서? 아닙니다. 아이들의 공부 스케줄이 빡빡하게 짜여 있기 때문입니다. 초등학생이 이렇게 생활하고 있는 나라는 우리나라 밖에 없습니다. 민주화는 됐는데 아이들이 군사시대보다 더 참혹하게 살고 있는 셈입니다. 정치 민주화만 보고 있기에 놓치는 부분입니다.

김대중, 노무현 10년 동안의 정치적 민주화는 (시민들에게) 정치적 자유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또 한편으로는 자본에게도 자유를 가져다 줬습니다. 생각해 보세요. 어른들의 삶도 아이들의 삶과 다르지 않습니다. 민주화는 진행됐는데 우리 삶은 더 고단하고 바쁘지요.

이명박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금 욕하고 있는 이명박 씨를 우리 스스로가 닮아가고 있어요. 우리 안에도 이명박 씨가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를 들어봅시다. 이명박 씨가 우리에게 하는 모습과 우리가 아이들에게 하는 모습이 똑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명박 씨가
다스베이더, 케로로 중사처럼 외계에서 우리를 괴롭히기 위해 침입해온 존재라고 생각하고 싶지만 사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투표로 뽑힌 대통령입니다. 그 사람이 우릴 괴롭히기 위해서 이렇게 하고 있다는 것은 순진한 생각입니다.

그 역시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의 가치관과 철학이 잘못됐기 때문에 문제가 생기는 겁니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교육을 위해 우리가 '어쩔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나 이명박 씨가 한국 사회의 미래를 위해 고통이 있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하는 것이랑 무엇이 다른가요? 다를 바가 없습니다.

"돈에 대한 욕망이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다"

이명박 대통령을 욕하는 부모들도 정작 자신의 아이들을 경쟁력 있게 키우는 데 목을 메고 있습니다.
결국 부모가 아이를 경쟁력 있게 키우고 싶어 하는 것은 아이들이 돈을 많이 벌고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렇다보니 현재 한국 사회는 일류대학으로만 몰리는 불균형에 시달리는 것이 현실이지요.

똑같이 이건희를 욕하지만 이건희가 지향하는, 즉 돈에 대한 욕망은 한국의 모든 사람이 별반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단지 돈이 없는 이건희일 뿐이라면, 이건희를 욕하는 것은 그의 돈 많음을 시샘하는 것 뿐이지요.

얼마 전 김상봉 선생이 "일류대학을 향한 한국 부모들의 탐욕은 놀랍다"라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 생각엔 지금 부모들의 대학입시에 대한 집착은 탐욕이 아니라 공포입니다. 공포에 사로잡혀 이성도 판단력도 잃어버린 거죠.

한국은 재난영화의 현실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공포의 근간에는 '내가 가난하다'는 의식이 깔려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일순간에 바보같이 변합니다. 이명박 씨가 경제를 살리겠다는 것 하나로 대통령이 된 것도 시민들 스스로에게 가난하다는 공포가 작용됐기 때문입니다.

"대기업 그만 두면 불행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런데 정작 이런 사람들은 먹고 살 만한 사람들입니다. 누가 봐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이 '현실이 어렵다. 우리 아이들이 잘 살았으면 좋겠다' 식의 말들을 합니다. 가난하다는 공포의 근간에는 좀 더 잘살고 싶다는 '욕망'이 내재해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대기업을 다니는 이들도 안정에 대한 공포가 있습니다. 심지어 내가 아는 변호사 부부도 미래를 불안해 합니다. 은행 잔고가 0인 사람은 걱정이 없습니다. 돈이 없으니 걱정할 것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은행 잔고에 100만 원이 있다가 80만 원으로 내려가면 불안해 집니다. 가난하다는 생각, 모자란다는 생각이 가난과 불안을 만들어냅니다.

결국 돈이 중심이 되는 현재 한국 사회의 패러다임을 깨뜨려야 합니다. 하지만 시민들 대부분이 돈 중심의 패러다임이 잘못된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것을 깨기 위한 실천에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는 것이 현실이이기도 합니다. 사교육과 무한경쟁에 반대하는 전국교직원노동조합 교사가 자신의 아이가 돈을 많이 벌어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자식을 사교육 현장에 내보내는 사회가 바로 한국 사회이니까요.

좌파와 우파의 차이가 뭔지 아세요? 우파는 자신의 아이를 떳떳하게 사교육 현장에 보내고 좌파는 부끄러워하며 보낸다는 점입니다. (웃음) 우리가 생각해야 할 부분은 좌파니깐 사교육 시키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도대체 어떻게 사는 것이 행복한 것인가를 이제 고민해야 합니다.

좌파들은 자신의 아이가 좋은 일류대학에 가서 진보적인 엘리트가 되기를 바랍니다. 욕심도 많지요. 노동운동하는 사람이 아이가 노동자나 민중이 되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물론 모든 부모는 자기 아이가 가장 잘 살 수 있도록 최대한 노력을 해야 하는데 문제는 잘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을 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소수 부자들이 잘산다는 관념을 모든 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어떤 삶이 더 충만하고 행복한 삶이라고 생각하십니까?

현재 한국 사회에서는 가난하다는 의식이 가난하다는 것을 만들어 내고 있습니다. 마음을 편하게 하면 오늘의 삶에 감사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는 사람들이 오히려 불행하다고 생각합니다. 마지막으로 대기업을 다니다 그만둔 후배 얘기를 해볼게요. 처음에는 아주 불안해 하더군요. 하지만 지금은 훨씬 더 행복하다고 합니다.

한국 사회를 뒤덮고 있는 이 탐욕의 굴레를 어떻게 벗어날 수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욕심을 버린다면 길들여진 삶을 벗어난 삶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습니다. 그것이 훌륭하게 사는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은 훌륭해서가 아니라 즐겁고 편하기 때문입니다. 먼저 해본 사람들의 증언이 '잘했다, 좋다, 안 죽는다' 등입니다. 다들 겁내지 마십시오. 용기를 내십시오.  

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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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09-09-02 11: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글을 읽고 참 공감이 갔어요.

2009-09-02 12: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9-09-02 18: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Arch 2009-09-03 22:31   좋아요 0 | URL
ㅋㅋ 알겠사와요.

쟈니 2009-09-03 18: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에 대한 욕망과 가난에 대한 두려움이 한국 사회를 휘몰고 있어요... 저도 그 욕망과 두려움을 버리려 하지만, 쉽지않네요... 용기가 필요한 시대입니다. 두려움을 강요하는 저들에게서 우리가 버려야 하는게 두려움일 겁니다.

머큐리 2009-09-04 08:11   좋아요 0 | URL
해법은 간단해 보이는데...그걸 이루기가 어려워 보이는 이유가 바로 그 두려움때문이겠지요.. 안다와 행한다는 역시 간극이 있는 것 같아요...--;
 

 www.hani.co.kr/arti/opinion/column/373339.html

한국은 참 슬픈 사회다. 그토록 오랫동안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싸움과 희생으로 자유를 얻었는데 이젠 그 자유에 의해 정직하게 일하는 사람들이 스러져가고 있으니 말이다. 김대중씨도 참 슬픈 사람이다. 그토록 염원해온 바로 그 자유에 의해 스러져가는 수많은 착한 사람들을 보며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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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8-28 0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홍세화 칼럼 [한겨레 2009.08.26] 

www.hani.co.kr/arti/opinion/column/373109.html 

 

분명 나쁜 정당, 나쁜 신문이지만 다수가 그들을 멀리하기는 쉽지 않다. 윤리적 소비가 그렇듯이 한 사람 한 사람이 양심의 부름에 따라 불편함을 선택할 때 그 길이 조금씩 열릴 것이다. 그런 사회 구성원은 앞으로도 소수에 머물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무릅쓰면서까지 싸워왔는데 이 정도밖에 인간적인 사회를 이루지 못했나”라고 말하는 대신 “이나마 덜 비인간적인 사회를 이룩한 것도 소수의 사람들이 끊임없이 애쓴 결과다”라고 말해야 한다. 단 한 사람이라도 좌절, 절망, 한탄에 빠져선 안 되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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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자의 책을 리뷰해야 하는데...게을러서 정리를 못하고 있다. '왼쪽으로, 더 왼쪽으로'를 읽다가 혁명에 대한 박노자의 생각을 들여다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더불어 지금 현재 반자본주의를 현실적으로 외치는 경우가 드물다는 것...아직 우리의 상상력은 자본주의를 넘어서지는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에 대해서는 이미 많은 비판과 대안이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문제는 한국의 지배계층에게 아직도 신자유주의는 매력적이라는 것이다.  

반자본주의로 까지 진전되지 않아도 좋다. 현재의 모순을 계속 누적시키는 신자유주의적 정책들은 막아야 하지 않겠나.... 혁명의 문제는 단순히 빈곤의 문제로 치환될 수 없는 복잡함이 있다. 소수를 위한 사회를 멈추고 다수가 함께가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한겨레 신문에 실린 박노자의 칼럼이다.  

www.hani.co.kr/arti/opinion/column/371720.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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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애(厚愛) 2009-08-18 1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큐리님 서재에 오면 이상하게 그냥 머물고 싶어져요^^

2009-08-18 18: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인육박람회'가 된 초대형 학회…교수 주도 진보정치는 필패 

그저께 미국에서 어느 지방 주립대에서 교수를 하는 한 동료 분을 만났습니다. 서로 전공하는 분야가 흡사해 한 번 미주의 큰 학회에서 공동의 분과를 꾸며볼까 해서 동료 분에게 제안을 해봤지요. 그 동료 분은 일단 해보자고 긍정적으로 답한 다음 약간 더 생각을 덧붙였습니다:

그런데 말이지 나는 (전미)아세아학회 대회와 같은 거대형 학회가 비상히 싫어요. 어느 누구의 말대로 "인육의 박람회" (meat fair) 같은 것이지요. 젊은 학자들이 거기로 가는 게 학문을 논하러 가는 줄 아슈? 천만의 말씀, 권위자들에게 잘 보이려 가는 것이고, 아부하러 가는 것이지요. 뭐, 그걸 안하면 되는 게 있어야지요. 임명부터 정년 보장 심사 받는 일까지 말씀에요.

인육의 박람회

사실, 저도 미국에서 이와 같은 부분을 대략 눈치 챈 바 있어 새로운 이야기가 아니었는데, 당사자한테 그 솔직한 심정을 들으니 그 소회도 좀 달랐습니다. 권위자에게 '보인트'를 따면서 사는 모양이 본인도 피곤해 죽겠는데, 이것은 세상의 '혼네', 즉 본질이라는 게 그 심정이었던 것 같았습니다.

대체로 국내에서도 큰 학회에서 젊은 학인이 중진, 원로들 앞에서 논문을 발표하는 걸 '신고식'이라 하고 그 때와 그 다음 술자리에서 처신을 잘 하면 나중에 재미를 많이 보고, 잘 못하면 재미가 별로 없는 걸로 알지요.

그런데 국내 인문학 같으면 '문중' 식으로 발전돼 일단 지도 교수와 '문중' 선배들이 잘 챙겨주기만 하면 '문중' 바깥에서 굳이 억지로 '구애'를 하지 않아도 그리 살 만할 수도 있지요. 일본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와 달리 미국에서는 지도교수는 'doktor vater'형이 아니고 '챙겨줄' 도덕적 의무도 없고 하니까 각종의 '시혜자'들을 찾는 데에 더 많은 공을 들여야 하는 판입니다.

모양은 각각 다르지만 논리는 하나입니다. 사적인 관계의 힘에 호소하지 않는 이상 공적인 신분 상승이 불가능하고, 사적인 사회 자본의 축적만이 공적인 신분을 보장해준다는 논리입니다. 이건 대부분의 경우에서 계급 사회 안에서의 신분 이동 법칙에 해당될 거에요.

사적 사회 자본의 축적

이 법칙은, '지배 계급의 음모'라기보다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의 역사적인 발전 경로와 관련이 있는 것이지요. 그 모태인 봉건사회에서 영주와 가신의 사적인 복속 관계는 바로 가장 중요한 공적인 관계망을 동시에 이루는데다 자율 도시에서도 상인, 장인 사회에서의 계급 질서는 철저한 도제식의 피라미드에 의존했어요.

자본주의 국가의 직접 전신인 절대 왕권 국가에서는 귀족사회란 혈연과 각종의 후견-피후견 관계로 철저하게 얼키고 설킨 곳이었으며 왕, 황후, 왕자와의 개인관계야말로 '신분상승'의 관건으로 통했지요. 부르주아 혁명은 일단 관념상 근대적 '공적 영역'의 탄생을 의미했지만 약 70년 전의 영국에서만 해도 특정 public school (귀족 기숙 학교) 색깔의 넥타이를 매지 않는 이상, 즉 '출신 고교 선후배 집단'의 힘에 의존할 수 없는 이상 어디를 가서 사람 노릇하기가 아주 힘들었지요.

결국 '공공성', '합리성'에 대한 오늘날의 욕구란 1950-60년대 고등교육 대중화, 공공영역 확장 이후에 가능해진 것이지요. 그런데 특히 보수성이 강한 학계에서는 지금도 후견-피후견, 추천-피추천 관계를 떠나서는 그 미시적 정치학을 논하기가 힘들지요.

"교수 주도의 진보 정치는 필패"

'음모'가 아닌 역사적인 부르주아 사회 발전의 합법칙적 결과지만, '개인 네트워크 확보 필요성'이란 기득권층에 참 편리한 사회 운영 조건입니다. 대체로 '인육의 박람회'에서 한 번 '권위자'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한 경력이 있는 사람이라면 나중에는 그 신념은 어떻게 되든간에 급진적 행동을 잘 못할 것입니다.

행동이란 생각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보다는 몸으로 훈습된 바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인데, '복종 훈련'을 많이 받은 몸은 그 다음에 반항을 많이 못하지요. 그리고 (저를 포함해서) 교수사회에서 후견-피후견 관계의 경험이 없는 사람이란 존재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에 교수사회란 어디까지나 본질적으로 보수적이지 않을 수 없지요.

그 일부 구성원의 신념적 지향은 진보적이라 해도 그 전체의 아비투스가 또 다르단 말씀에요. 그래서 진보정당 등의 관계자들에게 하는 이야기지만, 제발 교수를 지나치게 믿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적절히 활용하고 아이디어 등을 받으시면 되지만 교수 주도의 진보 정치란 필패의 정치입니다. 노조에서 현장 투쟁의 유경험자들이 주도하는 게 제일 나은 듯해요. 
 

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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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이] 2009-08-04 0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식인 사회만큼 더러운 곳도 없다던데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