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에 실린 조국교수의 시론이다.

최근 가장 활발하게 의견을 개진하고 있는 조국교수의 글들은 음미할 가치가 있다.
어쩌면, 이념적 논쟁보다 그 이념을 구현할 실천의 방도가 더 시급한 것은 아닐까?
상대방을 말로 깍아내리기는 쉽지만... 상대방을 압도할 수 있는 실천을 실행하는
것은 어렵다. 부족한 것은 이념이 아니라 실천일수도.... 

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 

   
  한편 진보·개혁세력은 이명박 정부를 향하여 “너희는 가짜 공정사회야”라고 비난하는 것으로 그쳐서는 안된다. 무엇이 ‘공정’이고 ‘정의’인지, 그 가치가 실현되려면 어떠한 사회변화가 있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밝히는 쪽으로 달려가야 한다. ‘공정한 사회’를 위한 진보와 보수의 공정경쟁과 한판 승부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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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라는 말을 너나 없이 가리지 않고 사용하다 보니 그 말의 원뜻까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신자유주의자들까지 '진보'를 들먹이는 시대에 진보라는 가치를 가늠하는 기준은
무엇일까? 

홍세화의 칼럼은 '진보'라는 기준점을 다시 한번 생각하게 한다.
사회에서 가장 최하위층을 배려하지 않는 '진보'라는 것은 가당키나 한 것일까?

 www.hani.co.kr/arti/opinion/column/439443.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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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0-09-13 12: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기에 더욱 오늘 통합을 주장하는 진보 정치인들은 무엇을 위해 누구와 통합할 것인지 분명히 밝혀야 마땅하다. 조직되지 않은 비정규직 노동자들이고 그래서 표로 계산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 편에 서지 않는다면 진보는 거추장스런 구호에 지나지 않는다.


저도 주먹 불끈 쥐고 읽었어요.
홍세화 님 글이 점점 응축되어 가고 있는 것 같아요~^^

마녀고양이 2010-09-13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세화 님의 책에 홀랑 빠졌던 때가 기억납니다.

요즘 들어, 중도라는 이름으로 민주당을 지지한 제가
얼마나 순진한가에 대해서 생각합니다. 그렇다고 진보란 이름을
잘 알지도 못 하니, 그저 헤매고 있는 중입니다. ^^
 

 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

슬라보예 지젝의 <시차적 관점>을 읽다가 ‘유물론적 신학’이라는 표현을 만났다. 신학과 유물론의 모순적 결합을 지젝은 이렇게 정당화한다. “데리다는 (…) 오늘날에는 오직 무신론자들만이 기도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 수사법에 반하여 우리는 신학자들만이 유일하게 진정한 유물론자라는 라캉의 주장이 가진 진리를 주장해야 한다.” 이 역설은 일상적인 것이다. 사실 돈의 전능을 인정하는 강남 부자 교회의 목사들이야말로 진정한 유물론자이며, 세상엔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믿는 좌파들이야말로 진정한 관념론자가 아닌가.

하지만 이 흥미로운 모순의 저작권은 사실 지젝이 아니라 발터 베냐민에게 돌아간다. 흔히 ‘역사철학테제’라 불리는 베냐민의 에세이 <역사의 개념에 관하여>에는 아직까지도 학자들 사이에 분분한 해석을 낳는 베냐민 특유의 알레고리들이 등장한다. 대표적인 것이 파울 클레의 그림과 함께 등장하는 우울한 역사의 천사, ‘앙겔루스 노부스’. 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고 또 아리송한 것이 바로 ‘역사철학테제’의 서두에 등장하는 자동인형의 알레고리다.

유토피아적 발상에 대한 역설


“널리 알려지기를 상대가 수를 두면 맞수를 두어 늘 승리하도록 만들어진 자동인형이 있었다. 터키 옷을 입고 입에 수연(水煙) 파이프를 문 인형이 커다란 테이블 위에 놓인 체스판 앞에 앉아 있다. 테이블은 거울 시스템을 이용하여 안이 비어 있는 것처럼 보이나, 실은 그 안에 체스에 능한 등 굽은 난쟁이가 들어앉아 끈으로 인형의 손을 조정하고 있다. 철학에서도 그런 것을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사람들이 ‘사적 유물론’이라 부르는 인형은 늘 승리해야 한다. 그 누구와도 싸워서 이기려면 그것은 신학의 힘을 빌려야 하나 오늘날 신학은 왜소하고 추해져서 들여다보여서는 안된다.”

그 난쟁이의 이름을 베냐민은 ‘신학’이라 부른다. 그 누구와도 싸워 이기기 위해 과학적 유물론은 신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단다. 이게 무슨 뜻일까? 지젝의 책에서 ‘유물론적 신학’이라는 표현과 마주치는 순간, 불현듯 내가 5, 6년 전에 어느 인터넷 게시판에 올렸던 글이 떠올랐다. 자기 인용을 통해 그리로 다시 돌아가보자.

이 알레고리에서 등 굽은 난쟁이, 즉 ‘신학’은 곧 유토피아의 철학을 가리킨다. 유토피아적 발상이 없었다면 세상은 오늘날 우리가 가진 것만큼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또한 몇몇 몽상가의 유토피아가 세상을 디스토피아로 만들어버린 경험을 갖고 있다. 여기서 유토피아는 있어야 하되, 동시에 있어서는 안된다는 역설이 성립한다. 이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베냐민의 자동인형은 바로 그 해결책으로 제시된 것이리라. 즉 난쟁이(유토피아)는 실제로 작동해야 하나, 그의 작업은 결코 겉으로 드러나서는 안된다.

역사의 텔로스(telos), 즉 인류의 최종 목적이 되는 이상사회를 그려놓고 현실을 강제로 그리로 옮긴다는 발상은 시대착오다. 우리는 이미 ‘역사이후’(posthistoire)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유토피아를 포기할 수는 없다. 우리가 현실로 누리는 것이 한때는 실현 불가능한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문에 이상사회의 꿈은 존재해야 하되 동시에 존재해서는 안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가 터키 인형이 되어 하는 말, 쓰는 글, 하는 행동은 유토피아의 열망에 조종되어야 하나, 그 꿈 자체는 난쟁이처럼 가려져 있어야 한다.

존재하면서 부재해야 하는 유토피아


과거의 유토피아는 완성태로 존재했다. 어떤 이들은 이 설계도를 그대로 현실로 옮기려 했다. 하지만 오늘날 ‘유토피아’가 아직 살아 있다면, 그것은 존재하면서 부재해야 한다(데리다라면 ‘존재하는 동시에 부재하면서’ 작동하는 이것을 ‘디페랑스’라 부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냐고? 존재하면서 부재하는 것은 과학적으로도 가능한 현상이다. 가령 촉매를 생각해보라. 화학반응에서 촉매는 그 자체론 화학적 결합물에 들어가지 않으나 그것 없이는 화학반응이 일어날 수 없다. 유토피아는 촉매와 같은 것이어야 한다.

내가 좌파 바바리맨을 싫어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21세기에 여전히 긍정적 유토피아 문학을 하는 그 지적 게으름도 맘에 안 들지만, 대중 앞에 옷 홀딱 벗고 빨간 자지, 노란 자지 심판하는 행태는 내 성 취향을 심히 거스른다. 현실은 무섭게 돌아가는데, 거기에 결합될 생각은 하지 못하고, 제 자지 색깔의 원색성을 근거로 남들에게 ‘자유주의자’니, ‘프티 부르주아’니 딱지나 붙이는 것은 그냥 중세적 악습일 뿐이다. ‘종교재판’(inquisition)의 어원은 라틴어 1인칭 ‘내가 묻노라’(inquisitio), 즉 남의 신앙적 정체성을 묻는 질문이었다.

언어 게임에서 ‘유토피아’가 하는 역할을 정확히 이해해야 한다. 역사에 텔로스는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에서 어떤 정치적 목적을 설정하는 것 자체가 불필요하거나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유토피아는 구체적으로 터져나오는 사안을 판단하는 데에 나아가 사안에 대처하는 대안을 만드는 데에 은밀히 작동해야 한다. 마치 촉매처럼. 이번 선거를 통해 이루어진 무상급식을 생각해보라. 그것은 사실 그리 급진적인 요구가 아니나, 평등사회의 유토피아를 향한 중요한 한 걸음이 아니던가.

우리는 결코 유토피아에 도달할 수 없다. 그것은 ‘아무 데도 없다’를 의미하는 그 낱말의 뜻 속에 이미 함축되어 있다. 우리는 거기에 그저 무한히 근접할 수만 있을 뿐이다. 그것도 현실에서 유리된 실험실에서 사유하는 한두 사람의 레토르트 몽상을 통해서가 아니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들을 가지고 씨름하는 수많은 사람들의 이론과 실천을 통해서. 유토피아를 그림에 비유하자면 그것은 삶에서 유리된 정치적 수도원에 사는 몽상가들이 그리는 유화 작품이 아니다. 그것은 삶을 사는 수많은 이들의 꿈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퍼즐이다.

이른바 ‘좌파’에 부족한 것은…


불행히도 우리는 지금 우리가 추구하는 유토피아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 하지만 언젠가 오랜 세월이 지나 되돌아보면 우리의 꿈이 이미 실현되어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된다. 유토피아의 모습은 한 몽상가의 ‘비전’ 속에서 미리 보이는 것이 아니라, 먼 훗날 투쟁하는 세대의 집단적 꿈속에서 ‘기억’으로 뒤늦게 현현하는 것이다. 유토피아라는 이름의 난쟁이는 거울의 반사를 이용해 등을 구부리고 책상 속에 숨어야 한다. 현실에서 우리는 은밀히 그의 조종을 받는 터키 인형이 되어야 한다.

유물론적 과학이 왜 신학의 조종을 받아야 하는가? 그것은 유토피아의 실현이 과학으로 대체할 수 없는 세속 종교적 신앙, 과학으로 설명할 수 없는 비합리적 열정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지젝은 말한다. “신학적 차원- 베냐민에 따르면 이것 없이는 혁명이 승리할 수 없다- 이 바로 충동 과잉의 차원, ‘지나치게 많음’의 차원이 아닌가?” 사실 광적인 예수쟁이들의 문제는 열정의 과도함에 있는 게 아니다. 그들의 문제는 시도 때도 없이, 아무 데서나, 아무한테나 드러내는 데에 있다. 이는 좌파 신학자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신학은 타인을 심판하는 기준이 아니라, 자기를 움직이는 동력이어야 한다. 목소리 높은 좌파들이 번번이 그들이 ‘주사파’라 경멸하는 이들에게 패배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른바 ‘좌파’에 부족한 것은, 홍세화 선생이 지적했듯이, 자기를 움직이는 열정이다(지젝은 이를 프로이트-라캉의 ‘충동’으로 해석한다). 또 다른 이유가 있다면 이른바 ‘주사파’들은 자기의 난쟁이를 감춰놓고 터키 인형으로 행동할 줄 안다는 것이리라. 불행한 것은, 그 훌륭한 습성이 심오한 철학적 이해가 아니라 국가보안법의 현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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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규항이라는 이가 <한겨레>에 기고한 글에서 진중권을 “진보신당의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라 불렀다. 그의 구별에 따르면, 진보신당에는 한편으론 “제 정체성을 간직한 당원들, 사민주의적 전망으로 이 추악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진지한 당원들”이 있다. 다른 한편에는 자유주의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촛불광장에서 활약한 덕에 당원이 늘었다”고 자랑하나, “그렇게 입당한 사람들이 지금 진보신당을 아예 자유주의 정당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근데 내가 아는 한 촛불당원들은 노선투쟁 같은 데에는 별 관심이 없다.

그의 언급 중에서 “제 정체성을 간직한 당원들”이라는 표현은 ‘사회주의자’를 가리키는 것 같다. 한편 “진지한 당원들”이란 표현은 정체성에는 문제가 좀 있지만 그래도 이 추악한 세상을 변화시키려 해서 나름 갸륵한 ‘사민주의자’를 가리키는 듯하다. 한편, 촛불 때 입당한 당원들은 일거에 ‘자유주의자’로 분류된다. 그들은 계급의 적, 즉 김규항의 표현을 뒤집으면 제 정체성을 잃고 추악한 세상을 그대로 온존시키려고 드는 진지하지 못한 당원이 된다. 아무 데서나 붉은 살 드러내는 이 좌파 바바리맨 쇼는 그냥 웃어넘기자.

흥미로운 것은 ‘자유주의자’라는 표현의 독특한 의미론이다.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함께 이른바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근간을 이룬다. 이른바 북구의 사회국가들도 정치적으로는 자유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있다. 그런데 ‘자유주의자’에 대한 이 생뚱맞은 적의는 대체 어디서 나온 걸까? 내가 보기에 그것은 80년대 이념서적에 난무하던 어법이다. 이렇게 21세기의 한국을 졸지에 멘셰비키와 볼셰비키가 다투던 러시아 혁명기로 만들어놓았으니, 내친김에 차라리 ‘자유주의자’ 숙청하라고 선동을 할 일이다.

정체성의 폭력


여기서 우리가 보는 것은 이른바 근대적 강박관념이다. 가령 “제 정체성을 간직한 당원들”이란 표현을 보자. 그는 이들의 정체성이 곧 진보정당의 정체성이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물론 이들만으로 진보정당을 구성해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그가 편협한 것은 아니다. 정체성에 조금 문제는 있지만, 사민주의자들은 당에 좀 있어도 된다(이른바 ‘견인’을 해서 끌고 가면 되니까). 그런데 왜 진보신당의 당적을 갖기 위해 그의 개인적 정체성을, 혹은 그가 “제 정체성을 간직”했다고 판단하는 그 사람들의 정체성을 받아들여야 할까?

사실 진보정당에 들어온 사람들 중에서 이념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사회주의가 뭔지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그 사람들도 모른다고 하고, 사민주의가 뭔지는 직접 유럽에 살아보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매우 낯선 개념이다. 촛불당원들은 대부분 그저 한나라당이 싫고, 민주당은 구리고, 그나마 진보정당이 제 취향에 맞는다고 생각해서 입당한 이들이다. 그들은 자기들의 지향이 여러 가지 면에서 민주당보다는 좀더 진보적이라고 믿는다. 이런 사람들은 진보정당에 들어오면 안되는가?

여기서 “제 정체성을 간직한”이라는 표현의 폭력성이 드러난다. ‘정체성’(identity)은 동시에 ‘동일성’을 의미한다. 다른 모든 당원들을 제 형상대로 찍어내야 비로소 당의 정체성이 유지된다는 강박관념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한다면 차라리 당원 받을 때에 아예 이념조회를 하는 게 낫겠다. “당신은 사회주의를 믿습니까?” “아뇨, 전 공산당이 싫어요.” “그럼 사민주의라도 믿습니까?” “글쎄요. 그게 뭔데요?” “흠, 당신은 어쩔 수 없는 자유주의군요. 민주당으로 가세요.”

“진보신당의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라는 딱지는 아마도 모욕을 위한 표현으로 보인다. 하지만 나는 그게 왜 문제인지 모르겠다. 내가 ‘자유주의자’라는 것은 나를 아는 이라면, 누구나 아는 사실. 워낙 천성이 리버럴해서 국가가 개인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을 못 봐주는 편이다. 한편, 진보정당에 적을 둔 것은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 특히 강력한 사회 복지적 개입이 필요하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여러 체제 중에 유럽식 사회국가 시스템을 선호한다. 그래서 진보정당에 남아 있는 것이다.

유학 시절에 만난 독일의 한 여학생은 내가 기독교인이면서 무신론자라는 사실에 혼란스러워 했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이고, 철학적으로는 무신론자이고, 윤리적으로는 쾌락주의자고, 논리적으로는 금욕주의자고, 경제적으로는 사회주의자고, 정치적으로는 자유주의자고, 문화적으로는 무정부주의자다.” 그는 그 모든 규정들이 어떻게 머릿속에서 하나가 될 수 있냐고 물었다. 하지만 정체성을 왜 패키지로 가져야 하는가. 그러는 김규항도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며 자본주의 시장경제에서 예수 족보 팔지 않던가?

진보정당 안에는 다양한 생각이 공존한다. 거기에는 유신론자도 있고 무신론자도 있다. 자유주의자도 있고 집단주의자도 있다. 사회주의자도 있고 사민주의자도 있으며, 심지어 한-미 FTA에 찬성하는 당원도 있다. 선거연합에 찬성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자후보를 고집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른 당과 통합하자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독야청청 나 홀로 걸어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진보신당에 정체성이란 게 있어야 한다면 그것은 이 모든 생각들의 총합, 혹은 교차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나는 묻는다


“진보신당의 당적을 가진 자유주의자”라는 표현은 아마도 ‘좌파를 가장한 우파’라는 뜻일 거다. 내가 이런 소리를 듣는 근거는, 중도에 사퇴했다고 비난을 받는 심상정씨의 말도 일단 경청할 필요가 있다고 했기 때문이다. 그는 진보신당이 더이상 이대로 갈 수는 없다고 믿는다. 거기에 찬성을 하든 반대를 하든 일단 그로 하여금 말은 말할 수 있게 해줘야 할 터. 이 당연한 요구를 했다고, 남의 이마에 함부로 딱지를 붙여댄다. 도대체 그 딱지 붙이기로써 내 주장의 뭘 반박하려 한 건지 알 수가 없다.

우파가 좌파를 가장해 무슨 영광을 볼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언젠가 이와 똑같은 비난을, ‘듣보잡’이라는 이름으로 마침내 유명해질 수 있었던 어느 불행한 청년에게도 들은 바 있다. 이 우익 스토커는 내가 한-미 FTA에 대해 반대한 적이 없다는 것을 근거로 들었다. 실은 여러 차례 FTA에 반대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아무튼 ‘무슨 말을 했다’는 게 아니라, ‘무슨 말을 안 했다는 것’을 정체성 판단의 근거로 삼는 그 아스트랄함에는 설명하기 힘든 묘한 매력이 있다.

왼쪽과 오른쪽, 서로 방향은 달라도 멘털리티는 동일하다. 그래서 나온 게 바로 ‘포스트모던’의 근대비판이다. 90년대 이후 20년 동안 모두들 나서서 지겨울 정도로 근대를 반성했건만, 이 모든 지적 유행의 물결도 80년대 이념서적을 유일한 교양으로 간직한 고고한 정신만은 전혀 건드릴 수 없었나 보다. 그 포스트모던도 유행이 다 지나 이제 회고를 하는 시절. 그 시점에 마주친 이 비난의 형식(“그는 양가죽을 쓴 늑대다”)은 너무 복고적이어서 그런지 언캐니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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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주미힌 2010-07-26 13: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건 누가 쓴거에용

앗.. 찾았어용
http://www.cine21.com/Article/article_view.php?mm=005003029&article_id=61413

머큐리 2010-07-26 13:59   좋아요 0 | URL
진중권이요...

역시 검색마왕...ㅎㅎ

라주미힌 2010-07-26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댓글 중에 제일 눈에 띄는게 씨네21에 저런글이;; ㄷㄷㄷ
 

 www.hani.co.kr/arti/SERIES/57/425949.html

진보신당의 지방선거 결과는 참담하다. 노회찬 씨가 3퍼센트 남짓의 표를 얻고 심상정 씨는 아예 선거 직전 사퇴했다. 두 사람은 지난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낙선했지만 이번보다는 나았다. 진보신당의 사정은 점점 더 나빠지고 있다. 대체 왜일까? 여러 원인이 있겠지만 나는 그 가장 결정적인 원인이 대중성 강박으로 인한 ‘프레임 오류’에 있다고 본다.

물론 모든 정치는 대중성이 중요하며 분당을 통해 만들어진 진보신당은 더욱 그렇다. 그러나 진보신당의 대중성은 진보정당으로서 최소한의 정체성을 지키는 한도 안에서만 중요하다. 그걸 넘어서버리면, 다시 말해서 당장의 대중적 호응에 집착해 자유주의적 의제에 몰입해버리면 대중들은 ‘굳이 진보신당을 지지할 이유’를 잃게 된다.

한나라당 같은 극우정당 혹은 민주당, 국민참여당 같은 자유주의 정당은 애써 그 정체성을 설명할 필요가 없다. 두 세력은 이미 반세기 이상 독재/반독재 혹은 여야로 존재해왔고 대중들은 어쨌거나 그 정체성에 매우 익숙하다. 그러나 진보신당은 그 정체성을 대중에게 처음부터 설명해야 한다. 자신들의 정치가 기존의 반독재/민주세력과 어떻게 다른지를, 굳이 자유주의 정치가 아니라 진보정치여야 하는 이유를 말이다.

그렇지 않으면 기존의 구도가 몸에 밴 대중들은 당선 가능성도 적은 그들을 굳이 지지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좋은 뜻에서든 나쁜 뜻에서든, 많은 사람들은  완주한 노회찬 씨는 진보정당의 정체성을 끝까지 지켰다고 보는 것 같다. 그러나 노회찬 씨 역시 제 정체성을 지켰다고 하긴 어렵다. 이를테면 선거 직전에 열린 그의 인터넷 토론은 시종 오세훈 조롱 경연으로 일관했다. 오세훈을 막는 게 그리 전적으로 중요하다면 당연히 한명숙을 찍어야 한다는 말 아닌가?
그 토론은 ‘한명숙이 아니라 굳이 노회찬이어야 하는 이유’에 집중되어야 했다. “반이명박 반이명박  하는데 당신들 집권했을 때 서민과 노동자 입장에서 이명박과 뭐 그리 달랐습니까?” “부자정권 비판하는 당신들은 삼성공화국 만들지 않았습니까?” “새만금 삽질한 사람들이 4대강 삽질 욕해도 되는 겁니까?” 등등으로 말이다.

그 에피소드는 대중성 강박에 빠진 진보신당이 보여 온 무수한 프레임 오류 가운데 한 예일 뿐이다. 심지어 진보신당은 진중권 씨를 비롯한 진보신당 당적의 자유주의자들이 그나마 진보신당의 정체성을 간직한 ‘전진’ 같은 그룹을 마치 스탈린주의자들이라도 되는 양 마구잡이로 조롱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 자유주의자들이 촛불광장에서 활약한 덕에 당원이 늘었다지만, 그렇게 입당한 사람들은 지금 진보신당을 아예 자유주의 정당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2008년 11월 노무현 씨가 “한미 FTA 재협상을 준비할 때”라는 내용의 글을 인터넷에 올리자 심상정 씨가 “민초들이 노 전 대통령에게 기대하는 건 이명박 정권에 대한 ‘재협상’ 훈수가 아닌 한미 FTA 체결에 대한 고해성사”라는 글을 올리면서 논쟁이 시작되었다. 노무현 씨의 중단으로 논쟁이 끝까지  이루어지진 않았지만 내가 기억하기론 진보신당 역사에서 그 정체성을 드러내는 가장 또렷한, 아니 거의 유일한 사건이었다.

바로 그런 사건이, 극우와의 싸움뿐 아니라 자유주의자들과의 경쟁이 진보신당의 주요하고 일상적인 활동이 될 때 비로소 대중들이 ‘굳이 진보신당을 지지할 이유’가 생겨난다. 그렇게만 된다면 진보신당은 여전히 희망이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진보신당엔 자유주의를 진보정치라 강변하는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 제 정체성을 간직한 당원들, 사민주의적 전망으로 이 추악한 세상을 변화시키려는 진지한 당원들도 많이 있기 때문이다. (한겨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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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6 1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7-27 00:3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