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봉 교수가 대담하는 자리에 참석했다. 장소는 진보신당 부천시당협의회 사무실이었고 날짜는 6월 25일 이었다. 당대회 전날이고 통합에 대한 논의가 뜨겁다 못해 터질 것 같은 분위기였다. 더구나 김상봉 교수는 진보신당 내에서 이른바 독자파로 분류되는 분이라 대담은 미묘하고 뜨거웠다. 그리고 진보신당 당원이 아닌 나는 그 흐름을 옆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진보신당이 출범하면서 당헌, 당규에 직접적으로 개입했던 김상봉 교수로서는 이번 통합사태에 대해 많은 감정을 느끼는 듯 하다. 일단 대의를 떠나 공식적으로 당이 해산하지 않고 남아 있는 당원들이 있다면 자신은 그 당을 지켜야 하는 숙명이 있음을 토로했다. 그것은 당 이념을 정초한 사람의 원죄와 같은 것이리라. 그럼에도 사실상 당 강령에 의하면 통일에 대한 규정등을 봐도 사실상 통합에 반대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점도 설명했다. 통합에 대한 논의의 복잡함과 모순이 그대로 드러나는 듯하다.
문제는 과연 진보신당과 민주노동당이 무엇을 위해 통합하는 것인가이다. 어떤 가치로... 이전으로 회귀하는 것이 아닌 새로운 진보의 비젼과 가능성을 가지는가에 대한 의문은 이러한 통합논란의 근저에 자리잡고 있다. 그러나 아무도 그러한 비젼에 대한 확답을 내 놓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당위적인 진보의 통합은 새로운 패권주의에 대한 의심과 기존 관계들에 대한 냉소로 빛이 바래지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는 통합에 대한 어떠한 실질적 논의도 불가능해 보인다. 다만, 자신의 의견을 주장하고 남의 의견을 배척하는 제로섬게임만이 존재하고 있다.
새로운 진보의 길은 무엇일까? 새로운 진보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김상봉교수는 먼저 맑스 주의 부터 버리라고 한다. 사실상 진보의 실천을 보면 이미 사회주의 강령은 폐기되고 (물론 견결하고 고수하는 분파도 있다) 기껏 사회민주적인 사회개혁 활동으로 전화되고 있음을 이제는 고백하자는 것이다. 두번째로 자신을 보다 올바르게 성찰하는 자세가 필요하다고 한다. 이번 사태에서 보여주는 진보신당의 모습은 민주노동당을 극복하겠다고 나온 그때의 모습이 아니고 오히려 극복하려했던 부정적인 모습의 확대 재생산에 다름 아니라고 보는 듯 하다. 여기에 무슨 새로운 진보가 가능할 것인가에 묻는다.
새로운 진보에 대한 고민에서 우선적 과제는 재벌해체라고 한다. 재벌의 경영권 소유권을 민주화하지 않고는 사회를 민주화 할 수 없다. 자본주의 체제에서 일상은 기업을 중심으로 움직이고 기업내에서 독재적 지배구조를 무너뜨리지 않고서 전체 사회의 민주주의는 더이상 진보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념적으로 아무리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실천하더라도 기업에서 먹고살기위해 독재를 수긍하는 이중적 정신을 지닌다면 결국 민주주의는 진전될 수 없는 것이고 자본주의의 가장 첨예한 모순은 역시 노-자간의 모순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해법은 기업의 민주화다. 경영권은 누가 가지는가? 주주들? 경영자들? 노동자들? 이해관계인들? 일반적으로 경영권은 기업의 경영자가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그 근거는 희박하거나 아예없다. 대주주가 경영권을 가져야 한다면 삼성의 경우 연기금이 경영권을 행사해야 한다. 이건희 일가의 주식이 3%정도라 할때 연기금의 삼성주식은 7%를 상회하기 때문이다. 경영자는? 주주에 의해 경영을 위탁받은 사람이지 경영권을 쥐고 흔들 주체가 되지 못한다. 노동자는 당연 배척해 버린다. 노동자는 회사를 위해 일하는 사람임에도 기계나 원료의 부속품 취급을 당한다. 그러니 구조조정에 의한 살인적 해고를 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이다. 자본가가 못쓰는 원자재를 폐기한다고 누가 시비를 걸겠는가? 이해관계인 조차 그 기업에 감놔라 배놔라 하지 못하는 건 당연하다. 그럼 소유에 기초한 경영권은 누가 가지고 있는가? 그리고 실체도 없는 경영권으로 노동자를 탄압하는 이 시스템을 누가 용인하고 유지하고 있는가?
김상봉 교수의 논지는 간단하다. 기업의 경영권은 기업구성원 전체가 투표를 통한 대표를 선출하고 그 대표에 의해 발휘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건 노동자의 경영참여가 아니라 경영권을 창출하기 위한 아래로부터의 민주적 재조직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새로운 진보의 시작이라고 한다. 왜 경영권이 이렇게 창출되면 안되는지에 대한 주장도 필요없다. 지금까지 경영권을 행사하는 자들에게 되물어야 한다. 도데체 너희들이 행사하는 경영권의 근거는 무엇이냐고? 너희들이 살인적 해고를 마음대로 하는 권리는 어디로 부터 나오는 것이냐고...? 그 대답은 자본가가 해야한다.
김교수의 주장과 비스한 논지의 기고문이 레디앙에 올라왔다. 그리고 옳고 그름을 떠나 이것 역시 정치의 문제라는 주장에 동의한다. 무엇을 위해 어떻게 실천해야 이 사회를 극복하고 좀더 나은 사회를 건설할 수 있을 것인가.... 모호하지만 가야할 길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레디앙 기사 :
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
한진중공업, 노동자 그리고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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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 "누가 기업의 주인인가, 진지하게 따져 물어야 한다"
한진중공업이 조씨 일가의 것인가, 주주들의 것인가, 노동자들의 것인가? 이 질문의 대답이 무엇이냐에 따라 '정리해고의 문제에 대한 해답을 제시할 수 있는가' 여부가 달려 있다. 또한 '이 세상이 만들어져 나갈 방향은 어느 쪽인가'에 대한 문제도 걸려 있다.
한진 중공업은 조씨 일가의 것인가?
이에 대해 가장 쉽게 나옴직한 답변은 돈을 투자한 사람, 즉 주주들의 것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하지만, 주주들이란 사실 매우 무책임한 존재들이다. 그들은 번 돈에 대해서는 절대적 권리를 요구하지만, 잃은 돈에 대해서는 매우 제한적인 책임만을 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하준은 책임지고 경영을 해나가는 오너의 중요성을 주장한다. 하지만, 오너들이 과연 그럴 권리가 있는 존재들인가? 무엇보다도 그들은 그럴 권리를 가질 만큼 충분히 투자하지 않았다. 기이한 지배구조를 통해 주주들이 투자한 돈을 전용하고 때로는 횡령하는 존재가 바로 그들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들 또한 제대로 책임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업이 실패했을 때 그들은 정확히 보유한 주식량만큼의 책임만을 진다. 그리고 사실은 횡령을 통해 비자금을 비축해 두었기 때문에 그보다 훨씬 덜 책임지는 것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그렇다면 노동자들은 어떠한가? 자본주의 경제에서 노동자는 자본의 소유자가 아니라, 자본의 일부이다. 기계와 마찬가지로 생산수단의 한 종류일 뿐이다. 따라서 법적으로 노동자들의 기업에 대한 권리란 전혀 없다.
하지만, 노동자는 '실질적'으로 상품을 생산하고 기업을 만들어내는 존재이다. 더구나 기업이 실패했을 때 노동자는 그의 생존의 모든 근거라고 할 수 있는 일터를 잃어버림으로써, 사실상 이에 대해 가장 강력한 책임을 진다.
"소유는 절대적인 게 아니다"
소유란 절대적인가? 그렇지 않다. 세상에 원래부터 내 것이 어디 있는가? 소유는 상대적인 개념이고 역사적으로 다른 의미를 부여받아 왔다. 이는 기업이 누구의 소유라는 것에 대해 자연법적으로 정해진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얼마든지 새롭게 조정할 수 있는 것이다. 기업이 법적으로는 주주의 것이고, 실제적으로는 오너 일가의 소유인 것이 현재의 실정이지만, 노동자의 것이 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이는 결국 세계를 어떻게 만들어나려고 하는가에 대한 입장과 의지에 달린 문제일 것이다.
주주 이익을 중시하는 것이 재벌 지배에 대한 가장 세련되고 정치한 비판이라는 <시사인> 이종태 기자 식의 논리가 신자유주의적이라면, 주주의 도덕적 무책임에 대한 대안으로 오너에 대한 존중이라는 태도를 제시한 장하준의 생각은 초기 자본주의 시기의 부르주아적 자율성에 대한 환상을 담고 있다. 실제적으로 기업을 만들고 이에 대해 책임지는 존재가 노동자라면, 노동자가 기업을 소유해야 한다고 얼마든지 주장할 수도 있으며, 이것이 바로 사회주의다.
분명해 알아야 할 것은 앞의 두 입장으로는 기업의 정리해고를 결코 제대로 비판할 수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오너나 주주가 기업을 소유한다면, 그가 단지 생산수단으로 구매하고 소모하는 노동력에 대한 자유로운 처분을 행하는 것은 당연한 권리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오직 노동자의 기업에 대한 소유권을 인정하는 태도만이 해고를 근본적으로 비판할 수 있게 한다. 당장 노동자들이 혁명을 일으켜 기업을 접수하자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끔찍한 재앙을 불러올 수도 있다.
관점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기업에 대한 노동자의 소유권을 인정하는 관점은 결코 포기될 수 없으며, 따라서 이에 입각한 제도적 장치들을 만들어 나가는 지속적인 노력은 절실히 필요하다. 그리고 그러한 관점을 주장하고, 변화를 만들어나가는 실천을 가리켜 우리는 사회주의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떻게 생각하는가보다는 어떻게 실천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이 관점이 중요하지 않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민주노동당/통합진보정당이 사회주의를 강령에서 삭제하는 것에 대한 당내의 비판은 존중되어야 한다. 이와 함께 범야권과의 차이 때문에 통합을 거부하는 진보진영의 입장 또한 존중되어야 한다. 그런 관점들이 있기 때문에 한진중공업과의 근본적인 투쟁이 가능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