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에서 소외된 노동자... 이제는 아예 노동할 자유도 잃어버린 노동자...

영화 카트에서 무엇을 보아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영화를 못 만들어서 하는 얘기가 아니라 영화 속 현장과 현실이 겹치면서 우리는 도대체 어떤 세상에서 살고 있는지가 답답해서 였다. 


얼마전 대법원에서 쌍용자동차 대량해고가 합법적이라 판결했다. 회사의 거짓말을 모두 인정하여 당시 정리해고가 법에 어긋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러한 판단의 옳고 그름은 한편으로 밀어 놓고 대량으로 정리해고가 아무런 윤리적인 판단없이 이루어지는 현상에 대해 이야기 한다면 이 영화는 꼭 봐야한다. 

영화 처음에도 나왔듯이 실화를 바탕으로 한다고 한 그 '실화'에 주목해야 한다. 그 '실화'의 시대적 배경 역시 빠지면 안된다. 그 이유는 영화의 시대적 배경이 참여정부 시절이기 때문이다. 


보수들이 잃어버린 10년이라 지칭했던 그 시절, 계약직 노동자들에게 닥친 해고의 칼날은 자칭 좌파정권 하에서도 자행되었던 것이다. 자본의 이윤을 위해서라면 언제든지 소모품처럼 사람을 해고해도 괜찮다고 신호를 준 것이 그나마 이 땅에서 가장 진보적인 정권이 들어선 시기에 일어났다고 하는 점에서 이 영화는 하나의 상징를 보이고 있다. 

이러니 '쌍용자동차 정리해고'에 대한 이 정부의 대법원의 판단을 그저 보수적이라 비판할 수 있을까? 최소한 노동에 관한 한 이 사회는 보수적 시각을 버린 적이 없었다. 


영화의 극적 구성이나 리얼리티는 잘 살려져 있다. 다큐멘터리처럼 투박하지 않고 연기자들의 연기도 좋았다. 몇번씩이나 눈시울을 붉히는 장면들도 감동적이었고 ...


그럼에도 무언가 석연치 않다. 이만한 성취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평범한 마트 노동자가 대기업과 정면으로 맞붙어 싸우는 투사가 되는 것조차 자연스럽게 연출된 이 영화에서 무언가 빠진 것이 있어 불편해 진다. 아마도 나의 편협함도 한 몫햇으리라. 


그래서 이쉬움을 토로한다. 당시의 싸움은 홈에버 노동자들의 단독 싸움이 아니었다. 노동자들과 연대하기 위해  민주노총을 비롯해 수많은 사회단체들이 함께 했다. 그들의 파업이 사회적 이슈가 되었던 것은 여러 사람들이 결집해서 이루어진 '연대'에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연대는 이후에도 이 사회에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더불어 영화를 보는 이들에게 가장 먼저 제시해야 할 것은 바로 연대의 정신이었다. 


영화에서 '연대의 정신'이 빠지자 관객의 시선은 연민과 동정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다. 단치 처참하게 싸우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그 싸움의 종말은 항상 패배였다. '연대'를 했었지만 패배 했었다. 그러나 그 패배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지금의 영화 속에서 희망을 찾기란 요원하다. 아니 어쩌면 감독은 아직도 희망을 찾을 수 없다고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가끔 노동에서 해방된 세상이 아니라 노동에 종속되는 세상을 꿈꾸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노동을 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세상에서 노동에 종속되지 않으면 살 수 없는 세상에서 노동운동이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본다. 이전에는 노동을 착취하는 세상을 뒤엎는 것이 노동운동이라면 이제는 최소한 노동이라도 보장해 달라고 싸우는 것이 노동운동이 되었다. 그리고 세상을 뒤엎지 못해도 인간 답게 대접해 달라고 노동을 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것도 빨갱이가 되었다. 


비정규직 문제가 심각해지니 이제 정규직을 유연화하여 비정규직과 비슷하게 만들어야 한다고 새누리당에서 이야기한다. 정규직, 비정규직의 분열이 자본의 의도였지만 노동을 이를 극복하지 못했다. 노동자는 모두 노동자였지만 분열되고 갈라진 노동계급은 스스로 몰락하고 있는 중이다.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 모른다. 모든 노동자들에게 비정규직이란 딱지를 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는 결국 노동자들의 단결 밖에 없다. 그리고 단결과 더불어 연대가 필요하다. 이 영화에서 보지 못했던 연대가 아쉬운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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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겨레신문 책소개 :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613492.html

 

<광신>
알베르토 토스카노 지음, 문강형준 옮김, 후마니타스

 

알베르토 토스카노의 <광신>을 관통하는 열쇠어는 ‘복수(複數)의 계몽주의’다. 지은이가 이의 제기하는 일차원적 계몽주의(소박한 계몽주의, 표준화된 계몽주의) 이해는 계몽주의를 이성이나 합리주의라는 일관된 도식으로 설명한다. 그러나 계몽주의는 처음부터 하나가 아닌 이중(doubling)의 기원을 가지고 있다. 계몽주의는 단수가 아닌 ‘계몽주의들’이라고 해야 할 만큼 내적으로 분열되어 있었다. 이성과 합리주의에 대한 숭앙을 ‘계몽주의1’이라고 한다면, 비타협적이고 즉각적인 방식으로 평등과 해방을 실현하려는 사회 변혁 열정을 ‘계몽주의2’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혁명은 계몽주의 1과 2가 합세한 결과물이었으나, 프랑스 혁명 이후의 서양 정치나 정치철학은 항상 ‘계몽주의1’이 ‘계몽주의2’를 악마화하고 배격했다. ‘계몽주의1’을 물신처럼 떠받드는 자유주의 이론가들은 프랑스 혁명의 전리품인 대의 민주주의를 보검인 양 휘두르며, 합의와 숙의라는 매개(의회)를 거치지 않은 날것의 ‘정치적인 것’은 모조리 정치 바깥에서 벌어지는 광신으로 매도한다.

 

용산과 강정을 거쳐 밀양에서 벌어지고 있는 투쟁을 비난하는 위선적이고 기회적인 자유주의자들은 ‘계몽주의1’이라는 반(反)광신의 방패 뒤에 숨어 ‘계몽주의2’에 광신이라는 딱지를 붙인다. 하지만 대의 민주주의 어디에도 강정과 밀양의 광신자(?)들이 앉을 ‘협상 테이블’은 없다.

 

‘자유민주주의가 아니면 아무것도 안돼!’라고 외치는 사람들은 ‘가스통 우익’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다. 대의 민주주의가 자유민주주의의 모든 것이 됨으로써, 대한민국에서는 일찌감치 ‘자유민주주의=전체주의’라는 대립물의 일치가 완수되었다. 이 기묘한 ‘이중’과 역설은 그것과 정반대인 ‘전체주의=자유민주주의’라는 위험한 등식마저 사유하게 만든다. 즉 전체주의 속에도 분명 평등이나 해방과 같은 자유민주주의적인 계기가 있다는 것. 박정희의 ‘유신정권’이나 김일성의 ‘주체사상’이 그 나라 국민의 열띤 지지를 받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광신>은 소박한 계몽주의가 봉쇄해 놓은 새로운 전체주의의 출구로 광신을 호출한다. 광신은 ‘나는 이 정권이 싫어!’라면서 고속도로 중앙선을 역주행하는 것을 뜻하지 않는다. 정치적 광신은 반드시 ‘당파적 열정’으로 결집된다. 이 책에 충실한 해제를 쓴 번역자가 이 점을 부각시키지 않은 것은, 그가 문화비평가라는 초월적인 자리에 있기 때문일까? 우리나라 지식인은 ‘당파’라면 무조건 질색팔색을 해야 진짜 지식인이라고 믿고 있지만, 프랑스 혁명 이전에는 존재하지 않았던 ‘당파적 지식인’은 ‘계몽주의1’이 아닌 ‘계몽주의2’의 적자다.

 

지은이가 말하는 ‘당파적 기질’ 또는 ‘격정적 당파성’이 곧바로 당으로 수렴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모든 광신자는 당으로 모이며, 모든 당이 광신자의 결집체라는 것은 진실이다. 실제로 박근혜 후보가 당선하면서 새누리당은 자코뱅보다 더 자코뱅적이고, 볼셰비키보다 더 볼셰비키적이 되었다. 이것은 결코 비난할 게 아니다. 민주당은 새누리당만큼 강력한 대의가 없기도 하지만, 새누리당만한 광신으로 뭉치지도 않았다. 표준적 계몽주의로는 전체주의라는 광신을 이겨낼 수 없다. 그래서 당신들은 새누리당의 ‘빵셔틀’인 거야!

 

장정일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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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A 최고 요원 토빈 프로스트(덴젤 워싱턴)는 조직을 배신하고 불법적인 정보거래상으로 변신해서 살고 있다. 각국에서 수배중인 토빈프로스트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 나타나고, 정보거래 도중 습격을 받아 미 대사관으로 제발로 걸어들어가는데...

 

한편 CIA요원으로 남아프리가 공화국에서 미국의 안전가옥을 지키는 매트 스웨턴(라이언 레이놀즈)는 매일매일 지루한 일상을 보내다 토빈 프로스트가 안전가옥으로 끌려와 조사를 받게 되는 상황에 직면하는데...누구도 알수없는 이 안전가옥이 습격 당하고... 토빈 프로스트와 매트 스웨덴은 가까스로 습격자로 부터 탈출하게 되는데...

 

그냥 액션 영화다.

줄거리도 흔한 편이다. 전직 CIA출신의 정보 상인... 어떤 정보인지 몰라도 공개되면 파장이 커다란 정보 때문에 추격당하고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상황에서 신참 요원의 도움으로 위기를 탈출하고... 위기를 같이 겪으면서 두 주인공은 마음이 통하고...블라블라...

 

이 뻔한 영화를 왜 너절하게 늘어 놓는가 하면.. 요즘 국정원 국정조사 때문에 그렇다.

이 영화 마지막에 문제가 된 정보가 공개되어 CIA국장이 국회 청문회에 불려 나가고 정보를 입수한 언론은 공개된 정보에 대해 비중있게 다룬다.

영화 속에서 주인공들이 피튀기며 지켜낸 정보가 마지막에 사회를 위해 위정자들을 곤경에 몰아넣는다는... 그래서 비록 CIA라는 첩보단체가 불법적인 행위를 했어도 진정한 애국자들이 그것을 바로 잡는다는 환타지를 넣어주기 위해 액션으로 도배한 영화다.

 

대한민국에서는 정보요원이 저렇게 사명감을 위해 헌신하지도 과도한 액션을 하지도 않고 그냥 인터넷에 댓글을 단다. 불법적인 댓글질에 청문회에 나와도 국가의 안위만을 생각하지 국민의 권리는 생각하지도 않는 국회의원님 덕분에 편안한 심문을 받는다. 언론은 중요하게 다루지도 않고 국민들이 촛불이라도 들어야 겨우 몇글자 써주는 정도고...

 

그래서 미국은 대한민국보다 민주적일까? 천만의 말씀일테다. 미국도 국가의 이익을 위해서 이라크전쟁을 미화하는 언론이 있다. 이미 자본에 잠식된 미국의 언론도 대한민국과 다를게 없다. 다만, 영화에서만 민주적인 척할 뿐이다.

 

민주주의는 영웅적인 전사가 가져다 주지 않는다. 체제가 잘못되어다는 양심과 제대로 국가기관을 통제하겠다는 시민의 의지로 만들어지는게 민주주의다. 그래서 더디고 힘들다. 결과물도 시원치 않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그것이 현실인 것을...

 

이 영화의  장점은 단 하나... 부패한 권력으로 부터 안전한 곳은 없다는 것을 교훈처럼 알려준다고 해야하나? 안전해 보이는 곳도 부패한 권력이 다가오는 순간 가장 불안한 곳이 된다. 이건 은유가 아닌 현실 그 자체다...

 

더위에 청문회보다 열받아 죽을지도 모를... 생명의 위협을 느끼는 하루 하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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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08-21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선서를 거부하는증인이라. 이건 참 참신(?)하더군요. (얼마나 웃겨줄려고 그러나 했는데 생각보단 진부했어요..)

머큐리 2013-08-22 21:50   좋아요 0 | URL
그 재미없는 개그를 정권 내내 봐야 할 것 같아 더 짜증나요...ㅎㅎ

마녀고양이 2013-08-21 11: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우, 저도 생명의 위협을 하루하루 느낍니다, 진짜 열받아 죽을지도 모를....
가림막에 김직원, 큭큭, 거기다 광주 경찰? 우아.............. 대체 어느 나라인지 쪽팔려 죽습니다.

머큐리 2013-08-22 21:50   좋아요 0 | URL
그래도 지치지 말고 이 여름 건강하게 지내야지요... ^^;;

카스피 2013-08-21 21: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우리는 댓글 수준이지만 CIA는 그보다 더 무시뭇힌 공작을 많이 펼치지요ㅡ.ㅡ

머큐리 2013-08-22 21:51   좋아요 0 | URL
댓글 보다 더 많은 공작이 많을 거에요...우리가 알지 못해서 그렇지...ㅎㅎ

yamoo 2013-08-22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이 영화 저번주에 봤었는데! 우와~~리뷰가 올라오다뉘..@_@
이 영화 그냥 그럭저럭 봤습니다. 덴젤 워싱턴...나름대로 괜찮은 캐릭터였는데...플롯의 긴장감이 별로 없었다는 게 좀 영화의 약점이지 않았나 생각이 듭니다.
주인공 이름을 까묵었는데, 주로 멜로 영화에만 나오다가 처음 첩보 액션 주연을 맡은 거 같은데...안 어울리는 옷을 입은 거 같기도 하고....다음 액션 작을 봐야 판단이 설 것 같습니다.

그나저나 머큐리님이 이 영화를 국정원 사건과 연결 짓은 거에 와우! 했습니다. 그런 생각 하지 못했거든요~ 암 생각 없이 봤다는..ㅎㅎ

머큐리 2013-08-22 21:51   좋아요 0 | URL
이 영화뿐만 아니라... 첩보 영화만 보면 모조리 연결했을거에요...^^;;
 

본의 아닌 스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여름이다. 날씨도 덥고 시원하게 스릴러 영화 한 편 보겟다고 한다면 이 영화가 나쁘지는 않을 듯 하다. 도시의 빈집... 그 빈집 속에서 숨어사는 사람들... 숨어사는 만큼 비밀도 많고 공포스러운 일도 많다. 더구나 요즘처럼 안전에 대한 강박적인 관념을 지닌 사회에서는 더 섬찟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이 영화의 키워드는 무엇일까? 집? 소외? 혐오? 안전 강박증?

 

난 혐오라고 생각한다. 혐오... 무엇인지 모르지만 꺼림칙하면서 배척하게 만드는 감정.

영화의 장점인지 단점인지 모르겠지만 영화속의 부차적인 캐릭터 중에는 떠돌이들, 부랑자들이 보여진다. 그들은 낯설고 위험한 무엇으로 그려지고 일상에서 일탈된 존재인 그들의 모습은 자연스런 거부감을 느끼게 만든다. 그리고 그들이 일상으로 들어오는 것에 대한 꺼려함이 느껴지도록 배치된다.

 

상대적으로 주인공은 고층의 깨끗한 아파트, 고급승용차, 좋은 옷... 그리고 강박적인 신경증을 가지고 있다. 그릇 하나 하나 깨끗하게 닦여 있어야 하고, 진열해 놓은 물건들은 위치와 각도가 정확하게 맞아야 한다. 그의 삶은 질서정연하며 청결하다. 그러나 실종된 형은 허름하고 곧 재개발 될 아파트에 살고 있다... 물론 실종된 상태이지만....

 

실종된 형이 살고 있는 주거지를 살피다가 이상한 사실을 알게 된다. 아파트인 집들이 연결되어 있고 아파트 출입문 현관마다 이상한 표식이 낙서처럼 표시되어 잇다. 사라진 형은 이 건물 어딘가에 살고 있어 보인다. 과거의 사건으로 인해 형이 자신에게 악감을 갖고 있음을 안 주인공... 위협은 사실상 가족을 향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리고 실질적인 위협이 시작된다.

 

영화는 곧 철거될 듯한 아파트와 새로 지은 고급아파트를 대비하고 각 아파트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대비시킨다. 그리고 가난하게 사는 사람들에 대한 익숙한 공포를 조장하는 듯하다. 그들의 무질서함과 지저분함 무언가 냄새가 날 듯한 더러움이 주인공의 강박관념과 충돌하며 전반적인 혐오감을 가중시킨다. 그리고 그러한 혐오감은 어느덧 공포로 전환된다. 저... 사람들이 나를 공격한다면... 그리고 내가 가진 자리를 빼앗는 다면....

 

'설국열차'는 꼬리칸에서 사람을 잡아먹을 수 밖에 없는 환경을 극복하기 위해 봉기한다. 그 봉기에는 설명할 수 있는 정당함과 정의를 가지기에 폭력이 낯설지 않다. 오히려 탄압하는 자에 맞서는 더 커다란 폭력을 갈망하게 된다. 그러나 '숨바꼭질'에서는 꼬리칸의 인간들이 얼마나 더럽고 무식하며 위협적인 사람들인지 앞칸의 사람들 시각에서 그려지고 있다. 스스로 안전을 지키기 위해 그 사람들을 차별하는 것...노골적은 아니더라도 자신의 살고 있는 경계안으로 들이지 않고 그들을 피해 다니는 것이 당연함을 보여준다.

 

두 세계과 충돌하면서 공포가 형성된다. 충돌에서 벌어지는 폭력은 원시적이고 투박하다. 그 만큼 잔인하다.

 

혐오스런 감정은 어디서 부터 발흥하는가? 원초적인 질문을 던지게 만든다. 그건 주인공이 버젓하고 깨끗한 환경에서 살고 있지만, 그가 가진 환경과 강박은 어린시절 형을 배신한 것으로 부터 시작된다. 그 배신의 결과가 강박증이라면..... 혐오는 자신의 배신을 지우려는 감정은 아닐런지...

타인에 대한 혐오를 공포의 기반으로 삼았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보수적이다.... 그러나 그 혐오감의 진정한 탐색이 어디 있는지를 묻고 있다면 이 영화는 다른 메시지를 던져준다. 너는 타인의 입장에 대하여 얼마나 진실할 수 있는가? 물론 이 질문은 나의 상상일 뿐이다.

 

뭐...영화보는데.... 이런저런 복잡한 생각할 거 무엇있겠나.. 극장은 시원하고 영화는 스릴이 넘쳐 소름끼친다... 여름이면 이것으로 만족해도 좋을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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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러라.... 9.11 이후 테라라는 단어는 거의 공포스러운 단어가 되었다.

일상의 안전을 침해하고 무고한 생명을 가차없이 빼앗아 버리는 테러는 그 자체로 범죄시 하고 죄악시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이 세계의 구조적 결함으로부터 필연적으로 발생할 수 밖에 없는 것인가?

 

'테러 더 라이브'라는 영화는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치안이 잘되어 있어 한밤중까지 술에 취해 길거리를 돌아다녀도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여겨지는 대한민국에서 채택하기는 참 껄끄러운 소재를 긴박감 넘치는 하정우의 일인연기로 영화 끝까지 긴장감있게 펼쳐 보인 착한 영화다.

 

워낙 허리우드의 테러영화를 많이 보았기에 테러가 상징하는 압도적 폭력은 잘 보이지 않고 테러가 끼치는 심리적 갈등 요소를 주된 네러티브로 삼은 것은 틈새시장 전략적인 측면에서도 매우 영리한 방법이었다. 거창한 그림없이도 테러의 공포를 생생하게 전달했다는 점에서도 착한 영화임이 틀림없다.

 

더구나 시청율에 매여 테러에 대한 경고보다 방송국의 이익을 위해 고분분투하시는 미디어 제국의 속살을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착한 영화다. 정말 그런지는 알 수 없으나, 자본의 이익을 최우선적으로 생각하고 자본의 전사가 가장 많은 이윤을 획득하고 상층으로 진입하는 이 승자독식의 사회의 우화로 읽는 다면 무리한 설정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해드셋 폭탄 등... 무리한 설정이 없는 건 아니다. 그리고 비판적으로 보면 영화의 완성도에 대한 시비가 없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긴박한 스토리보다 이 영화가 나에게 던져준 것은 '정당한 항의'와 '억울한 자의 목소리' 였다.

 

금융, 정치, 언론의 중심지인 여의로로 통하는 마포대교가 폭탄테러를 당한다. 테러범의 요구는 금전적인 것도 있었지만, 과거 마포대교 보수공사를 하던 인부들의 사고... 산재사고에 대한 억울함을 국가가 사과하라는 것이다. 대통령이 사과하면 테러는 중지할 것이라 한다. 여기서 문제는 국가가 과연 사과할 것인가에 있다. 이 영화의 긴박함은 바로 국가가 결코 사과하지 않으리라는 뻔한 결말에서 발생하게 된다. 숨어있는 국가를 대신해 테러범과 마주하는 윤영하(하정우)의 고분분투가 예상되기 때문이다.

 

테러는 이중적인 속성을 지녔다. 테러라고 규탄하는 행위는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선전하는 기회이거나 해방투쟁이기 때문이다. 이 영화의 장점이자 한국적인 면은 바로 소외되고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지금까지 묻혀왔다고 주장하는 점이다. 만일 어떤 거창한 이념이나 정치투쟁을 그렸다면 난 실망했을 것이다. (물론 이건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소박하고 열심히 살지만 그 삶에 대한 정당한 보답을 받기 힘든 사람들... 누구도 이들에 이야기를 하지 않고 그저 인생의 패배자로 여기는 사람들... 이 사람들을 마지막까지 보살펴야 할 국가마저 이들을 내팽겨쳤을때 이들은 과연 어떻게 해야 할까?

 

테러는 국가에게 이중적인 과제를 던져준다. 자신이 보호해야 할 국민들의 생명이나 재산을 파괴함으로 국가의 권위를 실추시키고, 오로지 국가만 행사할 수 있는 폭력을 국가가 아닌 개인이나 단체가 행사함으로 국가의 질서를 마비시키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는 테러를 용납할 수 없다. 용납하는 순간 자신의 존재기반이 무너져 내리기 때문이다.

 

테러의 원천은 사실상 국가의 신화로 부터 발생한다. 국가는 자신이 보호하는 국민들에게 공평하고 정의롭게 대해야 한다. 이러한 신화가 무너져 내리는 순간 국가는 테러의 위협으로 부터 안전하지 못하다. 오히려 국민이 양도한 폭력을 사용해서라도 국가의 존립을 지켜야 한다. 국가로 부터 안전해야 할 국민이 국가로부터 위협을 받는 역전 현상이 발생하는 것이다. 그건 국가가 전체 국민의 의사보다 계급적 도구로 사용되기에 그렇다. 그러나 국가를 지배하는 계급은 국가를 중립적인 도구로 포장하고 자신의 이득과 이해를 관철시킨다. 여기서 소외 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묻혀 버린다. 여기에 묻힌 목소리들은 어떻게 대응해야 할까?

 

목소리를 내는 방법이 여러가지 있겠지만... 테러도 그 중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어쩌면 비용대비 가장 효과가 좋은 방법은 테러일테다. 시청광장에서 아무리 촛불을 들고 시위를 해도 아마 테러 한 방이 가지는 위력을 가지긴 힘들거다. 물론 민주주의 속에서 폭력을 배제하고 합리적인고 지루한 절차가 보다 올바른 사회를 건설할 수 있는 토대가 됨은 물론이다. 그럼에도 당장 억울한 사람들의 목소리가 반영되기 힘든 것도 사실이다. 이렇게 소수로 몰린 사람들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 있다. 테러의 기원은 국가인 까닭이 여기에 있다.

 

지금 비정규직이 1000만이 가까워 오고 있다. 영화평을 잘 읽어보지 않았지만, 억울하게 사고로 죽은 노동자에게 사과를 요구하며 테러를 요구하는 범인의 행태에 대해 너무 무리한 설정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국가가 가지는 폭력성을 이 영화는 잘 잡아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용산참사에서 드러났듯이 과연 테러는 누가 저지르고 있는 것일까? 국가가 가진 공권력의 그림자만 벗기면 국가 역시 국민들에게 심대한 테러를 저지르는 주체가 되지 않을까?

 

오늘 현대차 비정규직의 정규직화를 위해 철탑위에서 296일 동안 농성하던 노동자가 건강악화로 내려왔다. 이들이 농성하던 중에 현대차 비정규직 지회 박정식 사무장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쌍용차 노동자들은 또 어떤가? 이 땅에 무수한 노동자들이 자본의 탈법과 불법을 용인하고 있는 국가로 인해 죽음으로 몰려가고 있다.

 

영화의 구성이나 내러티브도 좋았지만... 테러의 기반이 된 소재가 지금의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에 더 공감이 갔다.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 무거운 마음으로 극장문을 나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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