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학자 “비소 묻은 영성체 빵 먹고 숨져”

 

데카르트는 독살됐다?
www.hani.co.kr/arti/international/international_general/404877.html

‘근대철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르네 데카르트(1596~1650)는 스칸디나비아의 추운 겨울날씨 탓에 폐렴에 걸려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그러나 데카르트 연구자인 독일 에를랑겐대학의 테오도르 에베르트 교수는 파리와 스톡홀름에 보관된 문서들을 검토한 연구보고서에서 “스톡홀름의 자크 비오구에 신부가 건네준 비소가 발라진 영성체빵을 먹고 비소중독으로 죽었다”고 주장했다고 <가디언>이 14일 보도했다. 비오구에 신부는 데카르트의 급진적 사상이 크리스티나 스웨덴 여왕의 가톨릭 개종에 장애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
철학사의 한 획을 그은 인물 치고 너무 허무하게 죽었다고 생각했더니....
그 당시의 격렬한 이념투쟁과 관련이 있었네요...
더구나 두개골만 따로 파리 인류박물관에 전시하고 있다는 것도 처음 알았네...


댓글(3)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무해한모리군 2010-02-17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독살!
데카르트는 영향력 있는 인사였나봐요 오호.
요즘은 독살당할만큼 영향력 있는 철학자를 상상할 수 없는데요.

Mephistopheles 2010-02-17 09: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술의 발달로 요즘은 독살이 아닌 자살을 유도하는 방법으로 대체되는 분위기같아요. 육체적 심리적 압박을 극한까지 몰고 가 생을 포기하게 만든다..차라리 독살이 깨끗해 보이기까지 합니다.

소낙소리 2010-02-17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놀랄만한 일이네요...ㅇㅇ
 

 
검찰이 '용산 철거민참사' 관련하여 전국철거민연합회의 농성 개입 의혹을 수사하고 있는 가운데 지난 1월 30일 오후 서울 한남동 순천향대학교병원에서 남경남 전국철거민연합 의장이 용산 철거민참사에 대해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성당 앞마당에 가을볕이 기분 좋게 내리쬔다. 쌀쌀한 날씨를 따뜻하게 보듬어줄 만큼 맞춤한 볕이다. 겉옷을 벗어 한 손에 걸치고 잠시 성당 뜰 안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참 좋다. 막 겨울채비를 시작한 나무들이 뿜어내는 쓸쓸하면서도 쾌청한 냄새들. 곧 겨울이 오겠구나, 발 아래 뒹구는 나뭇잎들이 이제 곧 맞이할 계절을 알리고 있다. 군데군데 무표정한 얼굴과 굳은 자세로 가을볕과 어울리지 않게 서 있는 사복경찰들만 아니라면, 늦가을 오래된 성당의 뜰 안은 고즈넉하고 평화로운 모습이다.

명동성당의 뒤뜰 입구 한 구석에 자리한 영안실. 그곳에 사람들이 있다. '여기 사람이 있다'는 철거민들의 목멘 아우성을 외면하지 못해 함께 싸우다 갇힌 신세가 된 사람들. 순천향병원에서 이 곳 명동성당으로 농성장을 옮긴 지 이제 두 달이 되어가고, 용산철거민 살인진압참사는 열 달이 되어간다. 특히나 철거 브로커, 극렬용공분자 등 언론에 온갖 극악한 모습으로 보도된 '전국철거민 연합'의 남경남 의장은, 민주화의 성지라는 명동성당에서도 여전히 자신을 사찰하고 감시하는 경찰들과 거칠게 싸우고 있었다. 그는 인터뷰 전 날 단식 중 덜컥 쓰러져 의식불명에 빠진 문규현 신부님에 대한 염려로 낯빛이 어두웠다. 

"아시다시피 문규현 신부님이 단식하시다가 혼수상태다. 별 일이 없어야 할 텐데…. 큰일이다. 다음 주 월요일인 10월 26일부터 범대위(이명박정권 용산살인진압 범국민대책위원회) 대표자들과 성당의 수배자 3인(이종회, 박래군, 남경남)이 단식농성을 하기로 결정을 했다. 단식에 대비해 건강에 신경 쓰고 있어서 우리는 괜찮은데…."
(다행히 다음 날 문규현 신부는 의식을 회복했다 - 글쓴이 주) 

요즘 어떠시냐는 물음에 그는 명동성당으로 옮겨오니 순천향병원보다 여러 모로 낫다고 한다. 

"순천향병원에서 이리로 온 게 9월 4일이니까 한 달 하고 3주 정도 지났다. 거기는 건물 안 실내에서만 움직일 수 있었는데, 여기는 한정적이긴 해도 돌아다닐 수 있어 그쪽보다 나은 편이다. 영안실이 지하여서 습도가 좀 높은 점이 불편하긴 한데 건강에 크게 이상은 없고, 훨씬 좋다."  

가장 노릇 제대로 못해 죄스럽다

인터뷰는 성당의 뒤뜰 벤치에서 이뤄졌다. 성당 곳곳은 사복경찰로 보이는 사람들이 계속 감시를 하고 있었다. 인터뷰를 하는 도중에도 그는 계속 긴장된 몸짓을 보였다. 작은 움직임에도 예민하게 둘레를 계속 의식하면서 날카롭게 바라보기도 했다. 이틀 앞으로 예정된 단식농성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용산참사 문제를 정부가 나서서 해결하라는 요구를 다시 한 번 하기 위해 단식에 들어간다. 정부는 재개발지역 철거민들의 문제는 개인들 간의 관계이기 때문에 공공이 개입해서 해결할 수 없다고 버티고 있다. 그럼 묻고 싶다. 개인과 개인의 문제면 왜 경찰특공대가 개입했는가? 경찰만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었다. 이미 다른 지역의 철거민들은 개인 대 개인의 문제로 생계대책이나 생존권문제를 해결해왔다. 서로 불문율 같은 게 있었다. 그러나 용산은 경찰병력이 이를 가로막았다. 의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 과정에서 철거민 5분과 경찰 1분이 돌아가셨는데, 정부는 문제를 이렇게 만들어놓고 이제 와서 개입할 수 없다고 한다. 실컷 개입해 놓고 문제는 본인들이 알아서 해라 말한다면 이게 어디 정부인가?" 

그의 목소리가 살짝 높아졌다. 열 달 가까이 모르쇠로 일관한 정부에 대해 다시 분노가 이는 듯했다. 잠시 이야기를 돌렸다. 용산 참사가 일어난 후 한 신문의 인터뷰를 보니 그의 아내가 "남편과 나는 거의 남남이다"라고 말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가장 죄스러운 부분이다. (용산)사건이 나고 경찰부터 기자들까지 집 앞에 진을 치고 살았다. 거기에 시달린 아내가 화가 난 채로 날카롭게 쏘아붙인 걸 언론에서 그런 식으로 보도를 했더라. 물론 아내가 화가 많이 났을 거다. 가정에 돌아와 평범하게 가장 노릇 해주길 바랐는데, 어쩌다 보니 이런 생활을 하게 되었다. 딸아이가 혼기에 차 있는데 아빠가 이러고 있으니 결혼생각도 못하고 집에 조금이라도 보태겠다고 비정규직으로 일하고 있다. 미안할 따름이다. 아내가 식당 일을 해서 생계를 꾸려가고 있다. 많이 대화하고 서로 노력해서 지금은 내 활동을 잘 이해해 주고 있다."


 
용산 범대위 대표자들이 지난 9월 8일 오후 서울 중구 명동성당 영안실에서 '용산 범대위 대표자 긴급 기자간담회'를 열어 "추석 전 장례를 치르겠다"고 입장을 밝힌 뒤 용산참사 문제 해결을 위해 수사기록 공개와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하며 구호를 외치고 있다

벼랑으로 떠밀린 철거민들, 어떻게 외면하나? 

철거민 운동 20년. 그는 철거운동 안에서도 가장 강경하다고 알려져 있다. 특히 용산의 참사가 일어난 후 언론과 경찰은 그가 대표로 있는 '전국철거민연합'을 폭력, 테러집단이라며 표적삼아 파헤쳤으나 뚜렷한 증거를 찾지 못했다. 하지만 증거란 있는 게 아니라 우격다짐으로 만들어지는 것임을, 그는 지난 20년간의 철거투쟁에서 경험했다. 

"90년도에 내가 살던 곳이 개발지역이 되면서 세입자대책위원장을 맡게 되어 이 운동을 시작했다. 나 자신이 철거민이었을 뿐, 무슨 의식을 가지고 시작한 것도 아니다. 그때 우리 지역은 2년 가까이 투쟁을 해서 순환식 개발(먼저 철거민들을 내쫓고 대책을 세우는 대신, 임시 주거지 등 대책을 세운 후 철거를 하고 다시 입주하도록 하는 개발 방식)에 근거한 보상과 주거문제를 해결했다. 당시 노태우 정권이 주택 200만호 건설 정책을 추진할 때라 경기도 지역에 엄청난 개발붐이 일었다

우리 사례가 알려지게 되니까 인근 개발지역 철거민들이 많이 찾아와서 어떻게 투쟁했는지 물어보기도 하고, 자기 지역에도 와달라는 요청도 많았다. 철거당했을 때의 그 심정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힘닿는 데까지 돕다가 자연스럽게 철거민 단체를 만들게 됐다. 그런 연대투쟁 과정에서 99년엔 2년 6개월 동안 실형을 살기도 했었다. 

다칠 것을 각오하고 죽음까지 각오하면서 싸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어디 있겠나. 연대해달라고 오는 철거민들이 있을 때마다 전철연 회원들은 수많은 고민을 하게 된다. 자기 일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에 연대한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다. 용산 4지구 철거민들이 찾아와서 도와 달라 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서로 힘을 합쳐야 그나마 용역깡패, 재개발조합, 경찰, 관공서, 건설자본, 정치권 까지 5겹, 6겹으로 둘러싸인 이 부조리한 구조에서, 그나마 철거민들을 지킬 수 있기 때문에 함께 하게 된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을 이렇게 벼랑으로 내몬 사람들은 그들이지 전철연이 아니다."
 

'용산 참사'는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바로 이틀 전에 있었던 재판에서 검찰은 용산 4지구 구속자들에게 징역 8년을 구형했다. 10달 전만 해도 그냥 용산 4지구에 살던 사람들일 뿐이었는데, 갑자기 특수공무집행방해, 살인 등 무시무시한 죄명을 가진 범죄자가 되어버린 그들. 그뿐인가? 8년형을 받은 이충연 용산철거민대책위원장의 아버지는 용산 망루의 희생자 고 이상림씨다. 아들이 아버지를 살해했다는 것이다. 아직 차갑게 누워 있는 아비의 시신. 이 문제가 빨리 해결되어 장례만이라도 치르고 싶은 아들에게, 아비를 죽인 살인죄를 씌우는 검찰. 8년 구형 얘기가 나오자 잦아들던 그의 목소리가 다시 높아진다. 

"폭력이다. 폭력이 아니고는 어떻게 표현할 방법이 없다. 검찰의 기소내용은 자식이 아버지를 살해했고 철거민들이 스스로 자살을 했다는 것이다. 3살 먹은 어린애도 웃을 일이다. 특공대원도 인화물질 때문에 냄새가 너무 진동해서 정신을 잃을 정도였다고 진술했다. 인화물질이 그렇게 많은데다 경찰이 망루를 부숴 쏟아지고 줄줄이 새고 있는데 철거민들이 그 진동하는 냄새를 못 느끼겠나? 살려고 망루에 오른 사람들이 거기에 화염병을 던졌다는 게 말이 되는가? 

특공대원도 망루 안에 화염병을 던져 불이 나는 건 못 봤다고 진술했다. 화재가 일어날 수 있는 여러 원인들을 변호인단이 실험을 통해 재판부에 증거로 제시도 했다. 그런데도 검사가 8년이란 중형을 구형한 것은 그야말로 자본을 위한 폭력이라고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망루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고 여러 곳에서 일어났었다. 하지만 대부분 다 합의로 정리가 된다. 불가피하게 싸움이 벌어지는 지역은 손꼽을 정도다. 그런 지역들도 싸움이 붙은 후에 또 합의하고 자발적으로 내려오고 철거하고 그랬다. 그런데 용산은 이미 망루의 골조가 세워지면서 경찰이 특공대 투입 논의를 했다. 이는 대화를 통해 철거민들과 협상할 뜻은 전혀 없고 무조건 쓸어버리고 보자는 계획부터 세웠다는 것이다. 그런 경찰의 뜻을 받들어 검찰이 그 정도 구형을 했을 거다. 건설사, 철거용역, 경찰, 검찰, 정부가 한통속이 되어서 짜고 치는 고스톱판 같다. 8년이 무슨 애들 이름인 줄 아는가? 40대 50대들도 있는데 8년이면 그 분들은 인생이 끝나는 거다. 8년 소식을 듣고 너무나 분노했다. 앞이 캄캄했고…."

공권력이 공정하다고 생각하는 국민이 과연 얼마나 될까? 공공의 권력도, 공정한 권력도 되지 못하는 권력에게 '공권력'이란 이름을 붙이는 게 과연 온당할까. 용산참사 현장 바로 앞, 성을 구매하는 남성 범죄자들과 포주들이 버젓이 있는 불법 성매매 현장에는 가지 않는 경찰. 권력은 언제나 공정하지도, 공공적이지도 않다. 재벌의 총수가 비리로 구속되면 경제활동에 기여한 점을 참작한다며 언제나 관대했던 사법부가, 그 재벌의 이윤에 아주 조금 흠집을 낸다는 이유로 철거민들에게 이렇게까지 가혹한 것을 보라. 

그런데 우리는 힘이 없다. 재벌처럼 판사나 검사에게 떡값을 줄 수도 없고, 판사나 검사가 될 수도 없다.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당신도 철거민이 될 수 있다'는 말은 그리 와 닿지 않는 것 같아 답답하기만 한데….    

"그렇다. 내가 철거민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 하지만 잘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누구나 철거민이 될 수 있고, 철거문제와 연관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우선 개발 지역 얘길 해 보자. 개발 공고가 나면 거주민들은 인근 지역으로 이주를 해야 한다. 아이들 학교, 직장 등 내 생활권이 그 지역이기 때문에 멀리 가기는 어렵다. 그런데 인근 지역 땅값과 집값이 올라가고 전월세가 폭등하니 이사하기 어렵게 된다. 인근지역의 전월세 거주민들은 그들대로 엄청난 고통을 받게 된다. 폭등한 전월세를 감당하지 못해서다. 거기다 개발지역 거주민들까지 이주하게 되니 방이 모자라 더 값이 뛸 수밖에 없다. 이처럼 개발이란 게 단순히 그 지역 철거민들만의 문제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인근 주민들에게까지 영향을 끼치는 것이다. 

또한 지금과 같은 개발정책이 계속 되는 한은 우리 국민 누구라도 철거민이 될 수 있다. 보통 개발은 주거문화가 낙후된 지역을 먼저 하는데, 한 곳이 새롭게 개발되면 자연히 그 인근지역은 이전보다 더 낙후해 보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면 그 지역도 또 개발을 해야 한다. 예전엔 산동네 무허가 판자촌 등을 싹 밀고 새로 아파트를 지었지만 이제는 개발을 안 하는 곳이 없다. 이촌동 쪽에 가면 정말 멋있는 아파트들도 철거하겠다고 한다. 낙후된 주거문화를 개선하고자 하는 개발이 아니라, 이제 건설자본들이 돈을 벌기 위해 끊임없이 일부러 투기를 위한 개발 수요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국민 누구든 철거민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누구나 철거민이 될 수 있다는 얘기는 다시 말하면 용산참사처럼 누구든 공권력에 의해 죽거나 다칠 수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다."
 

서민에게 고통 안기는 뉴타운 개발 

지금 이런 식의 논리라면 도곡동 타워팰리스도 이십년 후쯤이면 또 개발이 될 것이다. 하지만 자본의 욕심은 그렇다 치고, 뉴타운 공약에 표를 주는 국민들을 어떻게 해야 할까? 다시 또 답답해진다. 

"서울 시민들이 개발 문제를 내 문제가 아닌 것으로 생각한다. 당장 내게 직접적으로 다가오지 않으니까. 뉴타운은 말 그대로 새 동네를 만든다는 건데, 환상을 가지고 있다 보니 표를 던졌던 거다. 실제로 뉴타운 개발이 시작 돼서 쫓겨나보니까 '아, 이건 아니다' 하는 생각을 갖게 된다. 더 중요한 것은 뉴타운 개발이 서울시내 서민들에게 얼마나 고통을 많이 주고 있는가이다. 당장 뛰어오른 전월세 때문에 난리 아닌가?  

오세훈 시장이 강남은 뉴타운을 안 하는데도 전월세가 폭등하는 걸 보면 집값 폭등이 뉴타운 때문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나는 뉴타운이 가장 큰 문제라고 본다. 강남은 뉴타운이 없을지라도 다른 구의 뉴타운들에서 보상받은 지주들이 강남으로 입성하는 거다. 일확천금을 노리는데 투기 1번지 강남만한 보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시장이 그렇게 안일한 생각으로 서울 시민들을 현혹하고 있다. 뉴타운에 표를 찍어준 서울시민들이 골똘히 생각 해봤으면 좋겠다."
 

뉴타운은 한나라당만이 아니라 민주당도 경쟁하듯 내걸었던 공약이다. 인태순 전국철거민연합 연대사업위원장은 한 인터뷰에서 "집 평수를 넓히려는 사람들 마음 속에 폭력이 있다"고 했다. 그 작은 이기심을 부추기는 것이 자본이고, 그 작은 이기심을 이용하는 건 정치권이다. 그건 어느 정치권력이나 마찬가지였다. 노무현, 김대중 정권 때도 지금처럼 쫓아내려는 건설자본과 정부, 이에 맞서 쫓겨나지 않기 위해 싸우는 철거민들은 계속 있어왔다.  

"노무현 정부가 철거민 탄압을 안 한건 아니다. 김대중 정권도 마찬가지고. 내가 그 정권에서 구속 돼서 살고 나왔으니 분명히 탄압은 탄압이다. 그러나 탄압의 방법이나 강도는 달랐다. 김대중 대통령의 일기가 공개되었을 때 나는 솔직히 이중적이란 생각이 들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 철거민들 탄압이 많았었다. '경찰의 난폭한 진압으로 5인이 죽고 10여 인이 부상 입원했다. 참으로 야만적인 처사다. 이 추운 겨울에 쫓겨나는 빈민들의 처지가 너무 눈물겹다'라고 쓰여 있었는데, 모르겠다. 개인적으로 철거민들에 대해 그렇게 연민했을 수는 있지만, 추운 겨울에 쫓겨나건 여름에 쫓겨나건 큰 차이는 없다. 따뜻할 때 철거했다고 해서 이주대책을 세워준 건 아니기 때문이다. 

철거운동은 어떤 정권을 특별히 미워하지 않는다. 물론 특별히 사랑하지도 않는다(웃음). 본질은 자본주의의 구조와 모순 때문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흔히들 제2, 제3의 용산을 얘기하는데 헛구호가 아니다. 지금 같은 개발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언제 어디서든 일어날 일이다. 

민중들이 들고 일어나서 봉기라도(웃음) 일으켜야 하는데, 사실 두 정권이 지나가면서 운동권이 죽었다. 이명박 정권의 탄압을 거치면서 일정 예전 투쟁력들이 복원되지 않을까 기대를 한다. 지금 이 정부는 전철연 죽이기를 하고 있는데, 이윤을 위한 폭력적 개발이 변하지 않는 한 남경남 하나는 죽일 수 있을지 몰라도 전철연은 절대 죽일 수 없다. 대신 민주적 개발로 바꾸면 전철연은 죽이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없어질 것이다. 나는 전철연 없는 세상을 꿈꾼다."



10월 18일 오후 1시에 열린 '용산국민법정'에 용산참사 유가족들이 상복을 입은 채 방청석 앞줄에 앉아있다.

전철연 없는 세상을 꿈꾼다

전철연이 없는 세상을 꿈꾸는 전철연 의장. 나도 그런 세상을 꿈꾼다. 더 이상 땅에서 쫓겨나 망루에 오르는 사람들이 없는 세상을, 생존권 보장을 위해 싸우다 아비를 죽인 살인자로 몰리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열 달이 되도록 장례조차 치르지 못한 유족들의 간절한 몸짓이 방패에 무참히 밟히는 일이 더는 없는 세상을, 이들을 떠나지 못해 감옥 아닌 감옥 생활을 하고 있는 수배자와 그 가족들의 고통이 더 이상 없는 세상을….

"무엇보다 정부의 사과가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이 문제 해결의 출발점이다. 두 번째는 망루에 올랐던 열사들과 구속자들의 뜻이다. 이들은 돈을 많이 달라는 것도, 개발을 중단하란 것도 아니었다. 계속 영업을 통해 생계 대책을 유지할 수 있도록 공짜도 아닌 임대상가를 요구한 거다. 그런데 정부에서 이를 외면하고 있다. 정부사과, 유족문제해결, 임대상가 보장. 장례를 치르려면 적어도 이 세 문제는 해결되어야 한다.

그리고 전철연 죽이기를 중단해야 한다. 예전엔 개발을 하면 분당이나 일산처럼 도시 전체를 하나의 개발지역으로 묶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한 지역을 몇 개 지구로 쪼개서 시행사도 달리 하는 식으로 개발을 한다. 철거민들이 뭉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전철연은 지구별로 나뉜 주민들을 모아내는 작업을 한다. 그렇게 쪼갰는데 전철연이 들어가면 안 먹히니까 우리를 죽이려 드는 거다.

정부는 계속 형평성을 들먹이며 모르쇠로 일관하는데, 얼마 전 열린 국민법정에서 일반 국민들은 경찰간부부터 이명박 대통령까지 그들이 잘못했다고 판결했다. 무작위 신청과 무작위 추첨으로 만들어진 국민법정의 배심원들은 그야말로 일반시민들이었다. 일반 시민들의 눈에도 철거민이 아니라 용산의 참사를 지시한 사람들을 문제라고 본 것이다."


 
10월 12일 오전 용산참사 화재현장에서 재판부와 검찰 변호인 등이 현장검증을 하고 있다. 

용산 이은 또 다른 죽음 없기를... 

전철연 얘기 말고, 용산 얘기 말고 생활인 남경남 얘기를 좀 해달라고 해도 그의 얘기는 언제나 그 두 가지 주제로 끝났다. 부드러운 얘기를 잘 할 줄 모르겠다며 그가 쑥스럽게 웃는다.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분들에게 한 마디 해 달라고 부탁드렸다. 아내에게 한 마디와 함께. 

"가장 가슴 아픈 분들이 유족들이다. 아직 함께 세상을 살아가야 할 날이 많이 남아 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돌아가셨으니…. 언젠가 장례를 치르겠지만 치른 후의 허전함이 얼마나 크겠나. 그분들에게 묵묵히 평생 함께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정말 위로 드리고 싶다. 구속자 분들도 먼 훗날 역사가 다시 재조명을 해서 검찰의 판결을 폭력이라고 규명할 것이다. 아직 선고라는 희망이 남아 있는데 어떤 결과가 나와도 굴하지 않고 항소해서 또 싸우고 그 수밖에 없다. 잘못한 것도 없이 8년씩 구형을 받고 얼마나 분노에 차있을까. 같이 있으면서 함께 분노하지 못해 정말 미안하다. 돌아가신 분들도 있는데, 주저앉을 수는 없고 더더욱 용기를 내서 잘못된 개발정책을 바꿔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개발로 인해 국민들이 피해보지 않고, 다함께  잘사는 세상을 위해 뛸 것이다. 

다음으로 가족 얘긴데, 이 운동을 하면서 아내에게 고통을 주느니 내가 떠나는 게 맞지 않나 하는 생각도 했었다. 그만큼 가족들을 힘들게 하는 게 마음이 무겁다. 지금은 건강하게만 있어 달라고 내게 주문하지만 아내도 그 나이에 일하느라 몸이 많이 힘들다. 쉬는 날에도 나한테 못 올 때가 있다. 하지만 나와 함께 가는 이 길이 우리 가족만의 일이 아니란 걸 아내도, 딸아이도 이해하기 때문에 안도가 된다. 내게 가족은 굉장히 미안하면서, 영원히 함께 할 동지다." 

떠나지 '못하는' 것과 떠나지 '않는' 것의 차이는 무엇일까? 지난 6월 10일, 민주항쟁을 기념하기 위한 날.  빼앗긴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민주당 국회의원들은 시청 앞 광장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다. 그리고 그들은 시청광장에서 1박 2일 노숙농성을 벌였다. 같은 시각 용산살인진압 현장 앞마당에는 참사현장을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140일 넘도록 떠나지 못했던 사람들. 그들은 그곳을 지켜야 한다는 굳은 의지보다, 사람들을 이곳으로 불러 모아야 한다는 의무감보다, 그저 떠나지 못하는 사람들이었다. 서성이고, 또 서성이다, 자연스럽게 발길이 머물던 곳, 그들에게 용산은 그런 곳이었다. 시청에 모인 수만 명 대신 용산에 모여 든 수백 명이 나는 더 커 보였다. 

한 인터뷰에서 남 의장은 희생자들을 생각하면 "내 팔다리가 잘려나간 것처럼 아프다"했다. 그게 어떤 정도의 아픔일지 나는 헤아릴 수 없다. 다만 우리 사회가 타인의 고통, 특히 약자들의 고통을 내 것으로 느낄 줄 아는 마음을 조금만 더 가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불타는 망루에서 악 소리도 내보지 못하고 목숨을 잃은 그들, 뜨거운 불로 고통당한 시신들이 이제는 차가운 냉동고 안에서 300일이 다 되도록 넋조차 기리지 못하고 누워 있다. 이 가슴 아픈 현실에 함께 울어주고, 유족들에게 따뜻하게 손을 내밀어줄 사람 하나가 너무 절실하다. 300일을 향해 달리는 수배 생활, 그의 바람도 나처럼 소박했다.

"순천향 병원은 경찰과 직접 부딪히진 않았는데 여기는 바로 앞에서 지키고 하니까 계속 싸우게 된다. 그래도 운동과 가벼운 산책 정도는 할 수 있으니까 좋다. 낼모레 단식에 들어가면 못하겠지만(웃음). 예전보다 전반적으로 보수화 돼서 그런지 성당 분위기도 옛날 같지 않다. 어떤 신도들은 당장 나가라고 소리치기도 한다. 성당 측과 잘 논의를 해서 지금 우리 처지를 말씀드리고 양해를 구할 생각이다. 천막도 안치고 말 잘 듣겠다고 약속하고 들어왔는데(웃음). 단식을 하려면 안 칠 수도 없고 걱정이다. 

하지만 격려해주시는 분들도 많다. 신부님들도 오시고, 수녀님들도 오신다. 특히 젊은 신부님들은 열심히 하라고 격려해 주고 가는 분들이 있다. 힘이 된다. 300일이라는 긴 시간 동안 온갖 탄압과 매도에도 유가족 분들과 고난을 함께 해 주신 문정현 신부님과 많은 분들이 있어 지금껏 버틸 수 있었다. 그분들을 생각하며 끝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다. 

아쉬움이 있다면 정말 목숨 걸고 단식한 신부님들의 심정을 국민들이 얼마나 헤아릴 수 있을지, 헤아린다면 표현을 해주시면 얼마나 좋을까… 그것이다. 어쨌든 이 문제를 정권이 방치하고 있기 때문에 또 다른 죽음을 만들어 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하시고, 용산 참사는 정권의 책임이라는 말들을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내 바람은 그거다."

출처 : 전철연 없는 세상을 꿈꾸는 전철연 의장 - 오마이뉴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정치권, 50주기 맞아 사상 재조명 

죽산 조봉암. 간첩죄를 뒤집어쓰고 법살(法殺)된 그의 사상과 정치 역정에 대해선 적지 않은 논문과 연구서가 나와 있다. 40주기를 맞은 1999년을 전후해 그의 사회민주주의 노선을 새롭게 조망하는 역사·정치학계의 논의가 봇물을 이뤘다. 조봉암이 떠난 지 50년을 맞는 올해 역시 그와 진보당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활발하다. 10년 전과 다른 점은 그 주체가 학계가 아니라 정치권이란 점이다.   

‘통일 중심 민주정치연합’ 주목
제3의 노선·토지개혁도 재평가
진보당 이념 계승논의들 봇물
  

29일 서울에서는 민주노동당과 진보신당, 사회민주주의연대가 각각 주최하는 조봉암 50주기 토론회가 동시에 열렸다. 세 토론회 모두 조봉암을 다루지만 주목하는 지점이 제각각이라는 점이 흥미롭다. 민노당이 조봉암의 평화통일론과 민주세력 대동단결론에 집중한다면, 진보신당은 조봉암의 이념과 정치노선에, 사민주의연대는 조봉암이 참여한 농지개혁으로 눈길을 돌린다. 말 그대로 ‘3파3색’이다.

민노당 토론회에 발표자로 나선 조영건 경남대 명예교수는 조봉암의 ‘최고 강령’을 “평화통일 민주세력의 정치대연합”으로 꼽는다. 조봉암의 진보정치는 “외세의 간섭과 분단의 질곡 아래서는 진보와 사회주의도 자주독립과 통일을 중심과제로 삼아야 하며, 진보가 민주주의 정치연합을 이끌어낼 때 중추적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는 것이다.

특히 조 교수가 주목하는 것은 조봉암이 1954년 쓴 ‘우리의 당면 과업’이다. 이 글에서 조봉암은 이승만 독재에 대항해 좌우 극단의 정치노선을 제외한 민주세력의 단결을 호소하면서 평화통일론을 처음으로 제시했는데, 이를 두고 조 교수는 “새로운 한국 건설의 케말 파샤로 재평가하기에 충분한 업적”이라고 칭송한다.

“죽산은 진보당 결성 과정에서도 미리 정치노선을 한정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했다. 마찬가지로 통일 논의에 있어서도 모든 자주·민주세력을 대결집을 원리로 삼았지, 통일방안의 경직성에 포로가 되지 않았다.”

진보신당 토론회의 발표자 조현연 성공회대 교수는 남한의 친미 자본주의도 북한의 친소 공산주의도 아닌 ‘제3의 노선’을 추구한 현실주의적 사회주의자 조봉암의 모습에서 ‘21세기형 진보’의 가능성을 탐문한다. 그는 논란이 되기도 했던 진보당의 이념에 대해 ‘민족적 사회민주주의’로 규정한 뒤 그 특징으로 △근로대중의 정당이자 국민의 이익 실현을 위한 투쟁체 지향 △민주적·평화적 방법을 통한 자본주의 지양 △완전한 자주통일과 평화국가 건설 △경제의 계획화·국유화를 통한 자립경제 건설과 사회적 복지국가 추구 등을 꼽는다  

‘북한과 내통’ 간첩죄 쓰고 사형
죽산 ‘사회민주주의’ 사상 새빛
민노·진보신당·사민주의 3색 토론

조 교수는 이를 “계급모순과 민족모순의 해결을 위해 채택한 제3의 노선”이었다고 설명하는데, 그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경제노선이다. 조봉암의 경제구상은 자유방임적 자본주의 경제의 병폐를 교정하려는 사회민주주의적 요소 외에도 제3세계의 후진성을 극복하기 위해 국가 주도의 계획을 통해 압축적 산업화를 달성하려는 발전주의적 요소 또한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계급모순의 해결을 위한 사회민주주의적 문제의식과 함께 민족모순 해결과 자립경제를 지향하는 제3세계적 문제의식이 혼합돼 있는 게 진보당의 민족적 사회민주주의 노선”이며 “이런 진보당의 이념노선은 한국이라는 토양에 맞는 진보이념의 재구성에 도움을 줄 수 있을 것”이란 얘기다.

사민주의연대는 그동안 주목받지 못했던, 정부수립기 농지개혁의 입안과 실행 과정에서 조봉암이 담당했던 역할을 조명했다. 전강수 대구가톨릭대 교수는 농지개혁의 역사적 의미를 “세계 최고 수준의 균등한 토지 소유를 실현함으로써” 농민의 소득수준을 향상시키고 지주층을 소멸시켜 성공적인 산업화의 기틀을 마련한 데서 찾는다. 초대 농림부 장관 조봉암이 입안한 농지개혁안은 북한식 무상몰수·무상분배도, 제값을 치르는 유상매수·유상분배도 아닌 ‘유상징수·유상분배’를 원칙으로 했다. 그런데 입안 과정에서 조봉암의 농림부팀은 지주 보상액과 농민의 지가 상환액을 낮추면서 보상·상환 기간을 최대한 길게 잡아 “단기간에 ‘지주의 나라’를 ‘소농의 나라’로 변모시키는 엄청난 개혁을 저렴한 사회적 비용으로 성공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담당했다”는 게 전 교수의 평가다.

그는 토지개혁에서 관철된 조봉암의 사상이 오늘날의 ‘시장친화적 토지공개념’과 맞닿아 있다고 보는데, 그 핵심은 “토지와 자연자원이 사회적 공공재산이란 성격을 갖고 있는 만큼 그것을 보유하고 사용하는 사람은 토지 가치에 비례해 사용료를 공공에 납부하게 하고 그 수입은 공공 목적을 위해 사용하는 것”이다. 전 교수는 진보세력이 조봉암을 계승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이런 시장친화적 토지공개념을 헌법에 명기함으로써 토지의 투기자원화에 따른 불평등과 양극화를 해소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지난 1999년 <조봉암과 1950년대>라는 책을 펴낸 바 있는 서중석 성균관대 교수는 “진보정치권이 뒤늦게나마 조봉암 노선에 주목하는 것은 다행스런 일”이라며 “특히 서구 사상을 추종하지 않고 한국적 현실에 뿌리내린 사회민주주의를 추구했던 그의 현실감각은 오늘날의 진보세력이 본받아야 한다”고 주문했다. 오는 9월 <조봉암 평전>을 출간할 예정인 김삼웅 전 독립기념관장은 “각 정치세력들이 자신의 입맛에 맞는 ‘그들의 조봉암’을 선택적으로 조명하고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면서도 “그만큼 조봉암의 사상은 넓고 유연했으며, 오늘날까지도 생명력을 갖는 선구적 사상이었다는 점을 방증하는 것 아니겠냐”고 말했다.

이세영 기자 monad@hani.co.kr 
 

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368563.html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마다 명절이 되면,
충남 서산 일대에 사는 독거노인들 집 수십 채 앞에는
맑은 천일염 30킬로그램 들이 포대가 놓여 있곤 했다.
13년째다. 아무도 누군지 몰랐다.

지난해에 ‘범인’이 잡혔다.
“나 혼자 여러 해 동안 소금을 나르다 보니 힘이 들어서-”
읍사무소에 맡기겠다고 소금을 트럭에 싣고 그가 자수했다


강경환(50). 충남 서산 대산읍 영탑리에서 부성염전이라는
소금밭을 짓는 소금장수다.
그런데 보니, 그는 두 손이 없는 장애인이 아닌가.
손 없이 염전을? 또 서류를 살펴보니 그는 7년 전까지
그 자신이 기초생활수급자였던 빈한한 사람이 아닌가.
자기 앞가림하기도 바쁜 사내가 남을 돕는다? 

소금장수 강경환은 사건이 발생한 연월일시를 또렷하게 기억한다.
1972년 12월 24일 오전 9시 40분.
1959년생인 강경환이 초등학교 마지막 겨울방학을 맞은 6학년, 나이는 13세였다.

서산 벌말에 살던 강경환은 해변에서 ‘안티푸라민’ 통을 닮은
깡통을 발견했다.
나비처럼 생긴 철사가 있길래 그걸 떼내 가지고 놀겠다는 생각에 돌로 깡통을 두드려댔다. 순간 앞이 번쩍하더니 참혹한 현실이 펼쳐졌다.
안티푸라민이 아니라 전쟁 때 묻어놓은 대인지뢰, 속칭 발목지뢰였다

폭발음에 놀란 마을 사람들이 집으로 달려와 경환을 업고 병원으로 갔다.
사흘 뒤 깨어나 보니 손목 아래 두 손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리 되었다, 노래 잘해서 가수가 꿈이었던 소년의 인생이

엉망진창이 된 것은.

피를 너무 흘려서 죽었다고 생각했던 소년이 살아났다.
하지만 “남 보기 부끄러워서” 중학교는 가지 않았다.
대신에 그 뒤로 3년 동안 경환은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어머니가 밥 먹여주고, 소변 뉘어주며 살았다고 했다.
소년은 고등학교 갈 나이가 되도록 그리 살았다.
인생, 포기했다.


“어느날 외할머니께서 돌아가셨어요.
어머니가 친정에 가셨는데, 오시질 않는 겁니다. 배는 고프지…
결국 내가 수저질을 해서 밥을 먹었어요.”

3년만이었다. 석달 동안 숟가락질 연습해서 그 뒤로
스스로 밥을 먹었다.

스스로 밥을 먹고 스스로 혁대를 차게 되었다고 해서
인생이 완전히 바뀐 건 아니었다.
“모든 게 귀찮아서 농약 먹고 죽으려고 했다.


“열일곱 살 때부터 주막에 출근했다”고 말했다.
아침 10시에 출근해서 밤 12시에 퇴근했어요.
주막에 친구들이 많이 있으니까, 술로 살았죠.”

어느날 유인물이 하나 왔길래 무심코 버렸다가
“아침에 유인물을 보니까 정근자씨라고,
팔 둘이랑 다리 하나가 없는 사람이 교회에서 강의를 한다는 거예요.
가서 들었죠. 야, 저런 사람도 사는데, 나는 그 반도 아닌데,
이 사람같이 못 살라는 법 없지 않나….”

강경환은 편지를 썼다.
“나도 당신처럼 잘 살 수 있나.”
답장이 왔다. 너도 나처럼 잘 살 수 있다고.
아주아주 훗날이 된 지금, 강경환은 이렇게 말한다.

“손이 있었다면 그 손으로 나쁜 짓을 하고 살았을 거 같다.
손이 없는 대신에 사랑을 알게 되고
마음의 변화를 갖게 되고, 새롭게 살게 되었다.”
  

대한민국에서 장애인으로 산다는 것.
강경환은 훌륭하게 그 방법을 찾아냈다.
술을 끊고, 일을 하기 시작했다. 삽질을 익히고,
오른쪽 손목에 낫을 테이프로 감고서 낫질을 하며
아버지 농사일을 도왔다. 지독한 가난한 집이었다 

 


 

 1994년, 아버지 친구가 그에게 물었다.
"너 염전 할 수 있겠냐?"

이미 1987년 교회에서 사랑을 만나 결혼한 가장이었다.
하겠다고 했다. 피눈물 나는 삶이 시작됐다.
농사 짓는 삽보다 훨씬 무겁고 큰 삽을 ‘손 몽둥이’로
놀리는 방법을 익히면서 해야했다.

정상인만큼 일하기 위해 밤 9시까지 염전에 물을 대고,
새벽까지 소금을 펐다. 하루 2시간 밖에 잠을 자지 못했지만 
보람으로 일을 했다. 
“노력도 노력이지만, 인내라는 게 그리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1996년 그 와중에 그의 머리 속에 남을 돕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으니,
손을 잃은 대신에 얻은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라고 했다.
"소금 한 포대가 1만원 가량 하는데,
여기에서 1000원을 떼서 모았죠.
그걸로 소금을 저보다 불행한 사람들에게 주는 겁니다.”
 
 

한 해도 빠지지 않고 올해까지 14년째다.
한달 월급 받고선 고된 일 마다하고 도망가 버리는
직원들 대신에 부부가 직접 염전을 지으며
실천하고 있는 일이다.

아산의 한 복지단체를 통해 소록도에 김장용 소금을
30포대씩 보내는 것도 빠지지 않는다

 

강경환의 ‘부성염전’은 1만2000평.
한해 소출이 6000만원 정도다.
이거저거 비용을 빼면 순수입은
한해에 1800만원 정도라고 했다. 뭐, 1800만원?
거기에서 10%인 200만원은 꼬박꼬박
남을 위해 쓰고 있으니 이게 어디 이사람에게 쉬운일인가요? 작년에는 400만원 정도 되더라고 했다.

강경환 그는 말했다 

“조금만 마음을 가지면 되는 겁디다.   소금 한 포대 팔아서 1000원 떼면,  5000포대면 500만원이잖아요.  하나를 주면 그게 두 개가 돼서 돌아오고, 그 두 개를 나누면 그게 네 개가 되어서 또 나눠져요. 연결에 연결, 그게 사는 원리지요.” 

그 나눔과 연결의 원리에 충실한 결과,
2001년 그는 기초생활수급자 꼬리표를 뗐다.
작지만 아파트도 하나 장만했다.
그리고 그는 곧바로 시청으로 가서 자발적으로
기초생활수급자 신분을 포기했다.
수급자 수당 30만원이 날아갔다.
장애인 수당도 포기했다. 6만원이 또 날아갔다.   
 
“나는 살 수 있는 길이 어느 정도 닦아졌으니까,
나보다 더 어려운 사람 주라”고 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어렵다.
염전도 남의 염전을 소작하고 있고,
여고생인 둘째딸 학비도 버겁다.
손을 내밀라고, 보이지 않는 사랑의 손을 내밀라고.
작년에는 ‘밀알’이라는 자선단체를 만들었다.
혼자서 하기에는 버거운 일.
그래서 마음 맞는 사람들을 모아서
불우한 사람들을 더 도우려구요~
“한 30억원 정도 모았으면 좋겠는데..
그러면 마음놓고 남 도울 수 있잖아요.  
지금은 형편이 이래서 돕고 싶어도 어렵고….”  

오늘도 부부가 소금밭에 나가서 소금을 거두는데,  
손 없는 남편이 능숙하고 진지한 몸짓으로 
소금을 모으면 아내는 얌전하게 삽으로  
밀대에 소금을 담고, 남편이 그 밀대를 ‘손몽둥이’로  밀어  
소금창고로 가져가는 것이다.  
그 모습, 장엄(莊嚴)했다.  
그리고 너무 아름다운 마음을 보다. 
열심히 사시는 인생의 참모습을 보았다  

늘~건강하시기를....  

 
 
  
 
 
출처 : 좋은글 편지 
 
------------------------------------------------------------------------------------- 
그래도 세상에는 소금이 있다.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후애(厚愛) 2009-07-15 11: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중한 소금이에요.
소금을 볼 때마다 강경환 아저씨를 떠오를 거에요.
정말 아름답습니다..


머큐리 2009-07-16 09:41   좋아요 0 | URL
이런 분들을 볼 때마다, 많이 부끄럽지요...사회가 어려운 사람들을 더 잘 보호해야 하는데...안타까워요
 

[레디앙 인터뷰-김현진] “예술가는 잉여 존재가 아니다” 

김현진을 처음 본 게 1년쯤 전이었는데, 어느 모로나 독특한 기억이었다. 20대 학생이 책 여러 권 내고 여기저기 칼럼 쓴다 하여 놀라웠고, ‘예술하는’ 사람이면서도 비정규직 파업에 함께 해 몇 십 일이나 굶었다는 게 더 놀라웠다.

그때, 내 앞에 마주앉은 김현진이 단식농성장에는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옷매무새와 화장을 하고 있어 속으로는 대경실색하면서도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점잔을 뺐던 것 같다. 1년 만의 김현진은 예의 그대로였으되, 팔 다리에 붕대를 칭칭 감고 있었다.

“제가 오토바이 욕심이 많아요. 타던 50cc를 누가 훔쳐가서, 125cc짜리를 하나 새로 샀는데, 중국제라서 그런 건지 엔진이 과열돼서 오른쪽 다리를 데었어요. 팔은 그때 넘어지다 다쳤고. 3도 화상이라 이식수술 받아야 한다는데, 어차피 왼쪽 다리에도 상처 있으니까 짝맞춤한 거죠, 뭐.”
 

“제가 오토바이 욕심이 많아요”

<레디앙> 독자들에게 자신을 어떻게 소개해줄까 물으니, 요즘 내놓은 『그래도 언니는 간다』(개마고원)의 ‘작가 소개’를 그대로 읊는다.

여아 낙태 1위의 도시 대구에서 출생. 목회자인 부친의 모든 희망에 어긋나게 성장하여 기어코 말 안 듣다가 고등학교를 두 달 만에 퇴학에 준하는 자퇴를 감행하였다. 이후 한국예술종합학교 영상원에 운 좋게 입학했으나 7년 만에 졸업, 간신히 영화 「언니가 간다」의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했으나 전국 관객 18만 8000명으로 종영된 후 좌절하였다.

먹고살려고 아르바이트와 직장생활 등 애써봤으나 여전히 도시빈민 겸 철거민 상태. 현재 비정규직 노동자이며 한국예술종합학교 서사창작과 통합과정 전문사에 진학했으나, 등록금 대출 이자를 갚지 못해 달마다 ‘신불자’가 될 위기에 처한 상태로 휴학 중이며, 일단 살아 있으려고 부단히 노력중이다.

<한겨레> <시사IN> 등에 기고하고 있으며, 지은 책으로 『네 멋대로 해라』 『불량소녀백서』 『질투하라 행동하라』 『당신의 스무 살을 사랑하라』 등이 있다.’

“지금은 까페 노동자죠.” 오토바이 사고로 거동이 불편해지기 전까지 그는 홍대 근처 까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었다. “우석훈 교수가 얼마 받느냐 물어 보길래, 88만 원 못 받아요, 대답했어요.”

“한예종 최연소 입학이라든가, 비정규직 파업에 같이 어울린다든가 그런 건 꽤 알려져 있잖아요. 그 밖에 현진씨 사는 얘기 좀 해주세요.”

“교회가 생명보험 영업 비슷해요. 돈 쓰는 만큼 들어오는 거죠. 처음 아버지가 개척교회 하실 땐 신자가 120명쯤 됐었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할머니랑 저만 남았어요. 그러다 다단계 꼬임에 빠지져서 빚만 지고. 그래서 아버지 카드 빚에, 먼저 당겨 쓴 곗돈이 많거든요. 그런데 아버지는 ‘하나님이 갚아주실 거’라 하시더라고요. ‘하나님이 갚아주긴, 내가 갚아주지’ 그랬죠.

제가 부모님 모셔야 하고, 마이너스 통장도 갚아야죠. 500 벌어 300 기부하며 살아보자는 마음으로 연봉 세고 일 많이 하는 직장 잠시 다녔어요. 사장한테 폭탄주 따라주는 기술, 삼겹살 뒤집는 스킬 배우면서 빚을 거개 갚았어요. 한 3년 다녔어요.”

폭탄주 기술, 삼겹살 스킬

“군대 갔다 온 거네…”

“다루는 일이 여성비하적 면이 있어서 부대낌도 많았고. 내가 여기 왜 다니나? 모든 중소기업 직원들이 다 느끼는 그런 감정 느꼈죠. 그래서 회사 안에 비디오게임 동호회를 만들고 그 이름을 ‘노조’라 붙이고 그랬어요.”  

 

그래도 직장이라는 게 끔찍한 구석만 있는 건 아닐 테고, 김현진은 ‘여성비하적’이고 ‘삼겹살 굽는 기술만 배운’ 그 직장에서 한예종과는 다른 세상을 봤다고 한다.

“제가 그동안 만나왔던 사람들이 교수, 기자, PD, 감독 그런 사람들이잖아요. 그런 사람들하고만 만나다가 회사 중간간부들 처음 보고는 ‘이 사람들 왜 책도 안 읽고 그럴까’ 거만하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보니 ‘정치’ 하지 않고 더 합리적인 측면이 있더라고요.

성추행 문제 같은 거 일어났을 때 예전 사람들은 어떤 식으로든 숨기거나 합리화하려 하는데, 회사 사람들은 그런 문제 잘 알지 못하면서도 오히려 잘 인정하고 나름 합리적으로 풀어나가려 하고. 그래서, 책 백날 읽어봤자 소용없어, 먹물들은 안돼, 그렇게 깨달았죠. 회사 경험이 사회와 공감하고 세상과 소통할 수 있게 해준 거 같아요.”

김현진은, 기륭ㆍ시사저널ㆍKTXㆍ이랜드ㆍ강남성모병원 등 비정규 노동자들의 싸움터에서 살다시피 한 경우가 많고, 스스로는 ‘드나들었다’고 말한다. 그는 자신이 그렇게 한 이유가 ‘좌파여서는 아니고, 가만 있는 건 못 참는 성격, 성질 안 좋은 때문’이라고 말한다.

성질이 안 좋아서…

“이명박, 이건 아니네, 아니어도 심하게 아니네, 라고 생각 들더라고요. 집에서 굴러다니며 뭘 해야지 고민하다가, 나도 가서 쪽수라도 보태자는 마음에서 비정규직 농성장을 찾았죠. 처음에는 하루 정도만 굶으려 했는데, 비분강개해져서 며칠 더 굶고, 그러다 보니 단식 끊으면 쪽팔릴 거 같아서 계속 굶었어요.

그런데 굶은 끼니만큼 그 밥값을 투쟁기금으로 내놓는 거거든요. 38일 굶으니 낼 돈이 없더라고요. 단식농성장에서 민주노동당 이영희 최고위원도 만났어요. 너무 더워서 옷도 최소로 입고 있고, 마스카라 하고 있어서인지 말도 안 붙이더라고요. 8~9일쯤 되니 말 붙이면서 ‘동지, 동지는 옷감에 있어 참 검소하십니다’ 그러시더라고요.”

‘성질 안 좋은’ 김현진이 볼 때 이명박 정부는 어떨까?

“아버지가 남대문 상인 대상 선교회 할 때 이명박이 와서 간증기도 했었는데, ‘제 어머님이 저를 위해 기도하신 적은 없고, 나라를 위해 기도하셨다’고 그러더라고요. 그 어머님이 아들 위해 기도하지 않은 게 문젠 거 같아요.

“이명박은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다”

이명박이 서울시장 할 때 저희 살던 왕십리 때려 부수고, 악연이죠. 대통령까지는 설마 안 되겠지 생각했었어요. 지난 대선 때는 맛있는 거 사주며 식구들 표 매수했어요. 이명박 찍을 거 같으면 아예 등산을 가라고.

이 사람은 기본적으로 대한민국 사람이 아니라 레위(구약성서에 나오는 사람 이름이자 이스라엘 열두 지파 중 하나. 폭력적이고 잔인하며 약탈을 일삼는다)예요. 그리고 사랑의 신약은 읽지 않고 분노의 구약만 읽었을 거예요.”

이명박 정권에 대한 반발은, 그리고 노무현의 비극적 죽음은 특히나 젊은 또래들 사이에서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을 새삼 드높이고 있다. 비평가들이야 노무현이나 이명박이나 '거기서 거기'라고 냉소하지만, 씨알이 안 먹히는 듯하다. 왜 그럴까?

“그리스 비극 같이 드라마틱 하잖아요. 저는 노무현 찍지 않았고, 비정규직이나 FTA, 김선일 생각하면 밉지만, 그래도 황망하더라고요. 젊은 사람들한테는, 쪽 팔린 걸 쪽팔린 줄 아는 마지막 아저씨가 죽은 거예요. 말 통할 거 같은 아저씨를 잃은 거죠.

이제 돈만 아는 아저씨들만 살아남은 거고요. 풍운아의 시대가 끝나고 후안무치한 시대가 열린 거죠. 지지하지는 않았지만 애도할 수밖에 없는 건, 노무현에게 애정과 증오가 같이 있었기 때문이죠. 남은 아저씨들한테는 혐오와 짜증뿐이고.”

“쪽 팔린 걸 쪽팔린 줄 아는 마지막 아저씨의 죽음”

김현진은 학사와 석사를 내리 한예종에서 하고 있고, 한예종의 학생들 중에서는 제법 알려진 축이다. 그는 한예종 사태를 어떻게 보고 있을까?

“예전에도 이런 사태를 봤어요. 2000년이던가 민주정부 아래에서도, 한예종 취업률이 2%밖에 안 된다고 폐교 이야기가 나왔었죠. 명색이 예술간데, 잘 나가는 예술가 몇 제외하면 노동부나 통계청 기준으로는 다 실업자 아니예요?
모짜르트도 하인들과 같이 밥 먹었다는데, 유인촌은 그런 걸 원하는 거 같아요. 자기네들 말 잘 듣는 노리개나 하인 원하는 거죠. 한예종은 그렇게 고분고분하지 않으니 손보려는 거고.

한예종 스스로 고립된 측면도 있어요. 촛불집회 나가자고 하면 학생들이 ‘개인의 정치적 자유’라며 반대하고 그랬어요. 예술가의 의무는 각박한 시대를 위무하는 건데, 그런 의무를 다하지 않고 지금에 와서 연대해달라는 건 이상하죠.

“예술가로 산다는 건, 큰 각오”

유인촌이나 뉴라이트가 무식한 건 맞죠. ‘예술의 죽음’이라고 한탄만 하지 말고, 마음 굳게 먹어야 해요. ‘이명박이 이랬어요, 유인촌 혼내주세요’ 이런 식 넘어서야죠. 이번 기회에 우리 사회에, 예술가가 잉여존재가 아니라는 걸 보여줘야 해요.

우리가 사회에 쓸모있는 존재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해봐야죠. 예술가로 산다는 건 이명박과 싸우는 것보다 더 큰 각오가 필요할지도 몰라요.”

세상이 흉흉해 데모와 단식이 그의 20대를 장식했지만, 어쨌거나 김현진은 학생이고 오래지 않은 미래에는 ‘지원’이나 ‘동참’이 아니라 자신만의 일을 만들어야 하는 운명이이다. 인터뷰 전에 얼핏 전해들은 바로는 영화보다는 다른 곳에서 진로를 찾고 있다고 했다.

“소설 쓰고 싶어요. 시나리오로 영화 만들려면 남들 돈도 끌고 와야 하는데, 소설은 내 품만 팔면 되잖아요. 그런데 지금 시대에는 소설이 안 써지는 거 같아요. 오쿠다 히데오 『남쪽으로 튀어』 같이 재밌는 소설 써보고 싶다는 꿈만 꾸고 있죠.

왕년의 386 이야기 써보면 재밌을 거 같아요. 누구는 메가스터디 사장이 되고, 누구는 맨홀 뚜껑 훔쳐다 팔며 아나키스트 자임하고, 그런 이야기…”

김현진은 KTX 여승원들에게 크리스피크림 도너츠를 사들고 갔었다. 그는 파업 농성장에 찾아드는 드문 학생이고, 언니들이 무얼 바라는지를 아는 진짜 몇 안 되는 투사이며 예술가다. 그가 조금만 더 고생하며 견문을 넓히면, 그리고 그 고생이 지나치지 않아 생각하고 글 쓸 만큼의 여유가 주어진다면, 우리는 꽤 좋은 소설을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 

요즘 나에게 발랄한 치열함을 보여주는 김현진 인터뷰라 퍼왔다. 인터뷰에도 나왔듯이 나도 그녀가 꽤 좋은 소설을 우리에게 던져 주었으면 한다. 계속 기대하게 만드는 그녀....^^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이] 2009-07-01 1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현진 너무 좋아하시네요 ㅋㅋㅋ

머큐리 2009-07-03 20:37   좋아요 0 | URL
무엇보다 성질이 안 좋다는 사실이 너무 좋아요...^^

다이조부 2009-10-10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터뷰가 제법 긴데도 잘 읽히네요. 잘 봤습니다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