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18 - 피렌체 미술의 후원자와 사회적 역할

르네상스

우리는 문화가 발달한 시대를 르네상스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부르기 시작한 것은 15세기부터 16세기 전반에 걸쳐 이탈리아에서 부흥한 예술을 높이 평가하면서 비롯된 것입니다. 르네상스(Renaissance)라는 용어는, ‘다시re’, ‘태어나다naissance’라는 뜻입니다. 중세에 죽었던 문화가 15세기에 다시 태어났다는 의미를 내포한 이 명칭에서 우리는 15세기 문화의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즉 그들의 원형은 그리스·로마의 고대에 있었던 것입니다. 고전을 번역하고 연구하는 학문을 인문주의(人文主義, Humanism)이라 하였으니 고전을 통하여 신(神) 중심의 중세사고에서 벗어나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지향하고자 함입니다. 이 시대는 또한 경험적이고 과학적인 사고의 결과로 지리상의 발견이나 지동설을 밝힌 시대이기도 합니다.

 
 

미술에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등 아마도 미술사에서 가장 천재로 칭송되는 예술가들이 활동하여 인류역사에 귀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르네상스 시대의 미술은 순수 미술품이 아니라 주문을 받아 제작한 것이며 사회적인 기능을 지니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은 수도원 식당의 벽화였으며,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시민들의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공화정 정부가 시청앞에 놓았던 주문한 상입니다. 그 시대에도 많은 돈을 들이는 사업에는 특정한 목적과 그만한 효과를 기대하였던 것입니다. 이 시대의 이탈리아가 특별히 좋은 예술품들을 많이 낳을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의 목적과 효과를 위하여 새로운 방식의 혁신적인 미술을 좋아하고 선택하였으며 미술가는 서로 경쟁적으로 이에 부응하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움직임은 15세기 초 피렌체(지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몇몇 작품들의 주문과 제작을 살펴보면 교회나 상·공업자, 정부 등의 주문자와 미술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을 것입니다.

 
 

피렌체 세례당 문을 위한 부조 공모

피렌체(지도) 대성당의 세례당엔 현재 3개의 청동문이 있습니다. 1401년 교회에서는 그 중 한 문의 작가선정을 위해 공모를 했습니다. 청동문의 부조는 성경의 여러 주제로 구성되어 있는데 공모에서는 아브라함이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주제를 내도록 하였습니다. 그 중 기베르티
(Ghiberti, 1416-1696) 와 브루넬레스키(Brunelleschi, 1377-1446)가 낸 두 작품을 봅시다(도1,2).

도1 브루넬레스키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
1401년, 피렌체 세례당 문을 위한 공모작
 
 
도2 기베르티 <이삭을 제물로 바치는 아브라함>
1401년, 피렌체 세례당 문을 위한 공모작
 
 
여러분은 어느 작품을 선정하겠습니까. 안정감을 중요시하는 사람은 기베르티 것을, 현장감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브루넬레스키 것을 선호할 것입니다. 당선은 기베르티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선정의 기준엔 단순히 미감만 작용한 것이 아니라 기술적인 면도 작용하였습니다. 기베르티의 것은 하나의 부조에 이삭부분만 따로 붙인 것인데 브루넬레스키 것은 7개의 부분으로 주물하여 붙이게 되어 있습니다. 브루넬레스키 것은 한 부분이 잘못되면 그것만 주물을 따로 떠서 붙이면 되는 장점을 지니고 있지만 만약 그의 것을 선정하였다면 주물값이 더 들고, 시간도 더 들었을 것입니다. 심사위원들은 기베르티의 더 발달된 주물기법을 높이 산 것입니다.
 
 

그러나 한편 현대의 학자들은 또 다른 측면에서 두 작가를 평가합니다. 기베르티는 이삭의 묘사에 고전적인 방법을 구사했지만, 아브라함이 이삭을 죽이려는 긴박한 장면의 표현으로는 브루넬레스키의 표현이 더 현장감 있다고 말입니다. 또한 공간 사용의 문제에서도 기베르티는 반원형과 사각의 모서리로 구성된 외곽의 틀에서 한 가운데의 면적만 이용했지만 브루넬레스키는 반원형이 이루는 공간을 모두 이용함으로써 확장된 공간을 만들어 가고 있습니다. 실제로 두 작가의 이후 활동을 보면 근본적인 지향점이 매우 달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기베르티는 이 공모를 계기로 주문을 가장 많이 받는 조각가가 되었지만 조형상에서는 르네상스적이기 보다 후기 고딕의 장식성을 띄었습니다. 반면 브루넬레스키는 이후 조각보다는 건축에 주력하면서 피렌체 대성당의 둥근 지붕을 비롯한 르네상스 건축의 새로운 공간 개념을 실현시킨 것입니다. 15세기 당시의 기준과 현대에서 평가하는 르네상스는 서로 다르다는 점을 알 수 있는 예입니다.

 
 

길드의 수호성인상 주문

피렌체의 대성당과 시청을 잇는 시내 한 가운데엔 오르산미켈레(Orsanmichele)라는 성당이 있습니다. 건물 외벽에 있는 14개의 감실에는 기베르티의 <세례요한>(도3), 도나텔로(Donato di Niccolio di Betto Bardi 일명 Donatello, 1386-1466)의<성 죠르지오>(도6), 베로키오(Andrea di Francesco di Cine 일명 Verrocchio, 1435-1488)의 <도마의 의심>등 당대에 가장 뛰어난 조각가들이 제작한 성인상들이 있습니다. 그럼 이 성인들은 왜 선택되고, 제작에 필요한 비용은 누가 냈을까요. 이 성인들은 모두 카톨릭의 성인들이지만 복음사가라던지, 순교자라던지 하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지는 않습니다.

도3 기베르티 <세례요한>
오르산미켈레 성당 전면, 피렌체
 
 
도4 기베르티 <마태오>
오르산미켈레 성당 측면, 피렌체
 
 
 
 

당시 피렌체의 공식적인 정치와 경제는 일종의 동업자 조합인 모직상 길드, 면직공업자 길드, 갑옷제조업자 길드, 건축가와 조각가 길드 등 길드의 대표자들에 의해 운영되었습니다. 이 성인들은 바로 길드의 수호성인으로, 예를 들면 원래 세리였던 마태오는 은행가 길드의 수호성인이며, 낙타털을 입고 다녔던 세례요한은 모직상 길드의 수호성인이고, 용을 창으로 찔러 공주를 구한 죠르지오는 갑옷제조업자의 수호성인이었고, 이교의 상 제작을 거부하였던 기독교 초기의 순교자 4명은 건축가와 조각가의 수호성인이었습니다. 이들 성인은 종교적인 기능보다 피렌체 사회의 정치, 경제적 역할을 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길드는 거의 공공장소라 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에 자신들의 수호성인을 놓고, 이의 제작비를 부담함으로써 자신들의 조합의 위치를 확고히 한 것입니다.

도5 난니 디 방코, <네 성인>
돌과 나무를 다루는 건축가와
조각가 길드의 수호성인, 1411-13년경,
대리석, 피렌체, 오르산미켈레
도6 도나텔로, <성 죠르지오>
갑옷제조업자 길드의 수호성인
1415년경, 대리석
피렌체, 오르산미켈레
도7 도5의 아래 기단부
 
 
 
도8 도6의 아래 기단부
 
 
 
 
 
 

길드에서는 조각상에 조합의 특성을 넣는 것도 잊지 않았습니다. 면직 공업자들은 그들의 수호성인 마르코에게 면 쿠션을 밟고 있게 하였으며, 건축 조각가 길드는 그들의 작업 광경을 새겨 넣었습니다(도5,7). 각 길드에서는 당연히 다른 길드의 상보다 돋보이는 작품을 놓으려 하였고, 조각가들은 서로 경쟁적으로 새로운 방법의 조각을 제작하였습니다. 은행가 길드는 기베르티에게 <성 마태오>(도4)를 주문하면서 이 작품은 모직상 길드가 주문한 <세례요한>(도3)과 크기가 같거나 더 커야하며, 청동주물은 몸과 머리 두 부분으로 주조해야한다고 계약서에 명시하였습니다. 기베르티는 물론 계약사항을 이행하였고 또한 이 상보다 4-5년 전에 설치된 도나텔로의 <죠르지오>(도6)상이 지닌 양감과 고전적인 구조를 참고하여 그가 전에 만든 <세례요한>(도3)의 약점이었던 장식성을 극복하였습니다. 기베르티가 참고한 도나텔로의 <죠르지오>(도6)는 제작 당시부터 당대의 가장 훌륭한 작품이라고 평가받았습니다. 약간의 콘트라포스트 포즈를 구사한 당당한 자세와 늠름한 양감등은 르네상스인들이 추구하였던 고대 조각의 이상을 충분히 되살렸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조각상 밑의 부조에는 원근법을 적용함으로서 매우 낮은 부조임에도 불구하고 깊은 공간감을 주는 스키아챠토(schiacciato)식 부조기법을 창안하였습니다(도8). 이는 당시의 화가들이 큰 관심을 가지고 연구에 몰두하던 회화의 원근법을 부조에 적용시킨 매우 효과적인 방법이었던 것입니다.

 
 

난니 디 방코의 <네 성인>(도5)의 얼굴 부분을 보면 여러분들도 금방 로마의 초상이 떠오를 것입니다(도9,10비교). 르네상스의 소설가와 철학자들이 고대의 문헌을 참고함으로써 현실을 묘사하였듯이 조각가들 또한 고대 조각을 모범으로 삼음으로써 15세기에 요구되고 있던 사실적 묘사의 방법을 키워나간 것입니다.

도9 도5의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부분
 
 
 
도10 로마시대의 초상조각
 
 
 
 
 

가족 예배실의 벽화

이번엔 회화의 예를 보겠습니다. 르네상스 화가들에게 수많은 기회를 주었던 교회의 벽화들은 무슨 이유로 그토록 수요가 많았고, 주문자들은 무엇을 원했을까요. 르네상스 교회들은 규모가 크건 작건, 양쪽 벽면이나 제단 양쪽에 가족 예배실을 두고 있습니다. 피렌체의 아르노 강가에 가까이 있는 작은 교회 산타 트리니타의 사세티(Sassetti)家 예배실도 그 중 하나입니다(도11). 이를 사세티 예배실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예배실의 벽화 제작비용을 사세티家에서 대고 그 대신 이 공간에 가족의 석관들을 놓았기 때문입니다.

도11 도메니코 기를란디이오
사세티 예배실
피렌체, 산타 트리니타
 
 

 

도12 도메니코 기를란다이오 <목동들의 경배>와 <사세티 부부의 경배> 도11의 부분
1483-85년, 목동들의 경배는 패널에 템페라 기법, 사세티 부부는 프레스코
 
 
 
우선 하단부분을 보면 한 가운데 <목동들의 경배>가 제단화로 그려져 있고, 그 좌우엔 사세티 부부가 기도하는 모습입니다. 그리고 좌우의 벽엔 그들의 석관이 안치되어있습니다(도11,12).
 
 

중앙과 좌우 벽면의 중간과 윗단엔 우리가 주제1에서 살펴 본 성 프레체스코의 일생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중 중앙 윗단의 그림을 자세히 보도록 합시다(도13).

 

도13 도메니코 기를란디오
<교황으로부터 수도원 인증을 받는 프란체스코>
1482-86년, 프레스코, 피렌체, 산타 트리니타
 
 
도14 도13의 왼쪽 부분
 
 
 
도15 도13의 오른쪽 부분
 
 
 
이 그림엔 성 프란체스코와 수도사들 이외에도 많은 사람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중 오른쪽 앞에서 두 번째 인물은 아래 하단에 그려졌던 이 예배실의 주인 프란체스코 사세티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는 이 벽화에 자신의 가족과 가문의 주변을 모두 등장시켰습니다. 왼쪽엔 이미 성장한 세 아들을 두고 아직 어린 넷째 아들은 자기 옆에 그리게 하였습니다(14,15). 자신의 오른쪽에 있는 검은머리의 옆면 인물은 로렌조 디 메디치(Lorenzo di Medici)이며 그 옆은 피렌체에서 명망 있던 안토니오 푸치(Antonio Pucci)로 사세티의 사돈입니다. 그리고 계단으로 올라오고 있는 어린아이들과 젊은이들은 로렌조의 아들들과 그들의 가정교사였던 인문주의자들입니다. 메디치 은행의 제노바 지점장이었던 사세티는 메디치家의 총수인 로렌조를 자신의 옆에 그리고, 그의 가족까지 함께 넣음으로써 그들 가문과의 결속을 과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프란체스코는 로마에서 교황으로부터 인증을 받았지만 이 그림의 배경은 로마가 아닌 피렌체이며, 그 중에서도 정치의 중심인 시뇨리아 광장입니다(도17). 이 그림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어떤 인상을 주었을까요. 지금으로 비유한다면 대기업의 계열사 사장이 시청 앞에서 행해지고 있는 큰 행사에 자신과 기업의 총수 가족이 함께 참가하고 있는 모습 같다고 할까요. TV나 신문이 없던 시대에 교회라는 공공장소는 남에게 자신을 드러낼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을 것입니다. 이 프레스코의 덕분에 우리까지 그의 가족과 위치를 알게 되었으니 그의 주문 목적은 달성된 셈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통해 당시의 종교와 정치, 경제 그리고 미술의 관계를 더 구체적으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시청 앞 광장과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 1475-1564)의 대표작으로 손꼽는 <다비드>(도16)상은 피렌체의 시청 앞에, 넓은 시뇨리아 광장을 바라보며 놓여있습니다(도17,18). 다비드는 구약성경에 나오는 가장 지혜로운 왕으로 어린 목동이었을 때 돌 팔매하나로 거인 골리앗을 처치하여 나라를 구한 영웅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구약성경의 인물이 왜 교회가 아닌 시청 앞에 놓여 있을까요.

도16 미켈란젤로 <다비드>
1501-1504년, 대리석, 높이410cm
피렌체, 아카데미아
 
 
도17 시뇨리아 광장과 베키오 궁 전면
 
 
 
도18 베키오궁 앞에 놓인 <다비드>
원래의 자리엔 복제품이 놓여있으며 원작은
피렌체 아카데미아에 소장되어있다.
 
 
 

이 상은 원래 피렌체 대성당에 놓기로 되어 있었습니다. 다른 어느 조각가도 감당하지 못하던 높이 410cm의 거대한 조각이 당시 스물 여섯 살의 미켈란젤로에게 맡겨지자 이의 완성에 세간의 이목이 집중되는 것은 당연하였습니다. 1504년 작품이 완성되자 이 작품의 위치를 다시 정할 위원회가 소집되었고 이 자리에서 건축가이자 조각가인 안토니오 다 상갈로(Antonio da Sangalo)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습니다.

 

"나는 코지모가 제안한 것처럼 사람들이 지나다니며 볼 수 있는 대성당의 코너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조각상은 공공적인 상이고 대리석은 기후에 약하기 때문에 … 가장 좋은 자리는 시뇨리아 회랑 중앙이라고 생각한다. 중앙 아치 밑에 놓으면 그 주변을 둘러 볼 수도 있고 … 마치 작은 채플처럼 뒤가 어두운 감실처럼 되어서 좋다. 만약 외부에 내놓으면 쉽게 상할 것이니, 지붕이 있는 곳이 더 좋다."

 

조각가인 상갈로는 공공 장소이면서도 미술품으로 더 어울리는 곳, 더 안전하게 보존할 수 있는 곳을 선택한 것입니다(도19).

 

도19 <다비드>를 시뇨리아 회랑에 놓았을 경우의 가상 화면
 
 
 
 
 

그러나 시장 대변인의 의견은 그와 달랐습니다.

 

"내 판단으로는 그 상에 적합한 장소는 두 곳이 있다. 첫 번째는 현재 <유디트>(도20-21)가 있는 곳이고 두 번째는 (도나텔로가 청동으로 만든)<다비드>가 있는 시청 의 중정 한 가운데이다. 첫 번째 장소를 택한 이유는 (도나텔로의)<유디트>가 매우 격렬하게 죽이는 장면이라는 점인데 이는 (붉은) 십자가와 백합으로 상징되는 우리(피렌체)와 어울리지 않는다. 여자가 남자를 살해하는 것이 적합지 않다. 더욱 나쁜 것은 (…)그 상이 그곳에 놓인 이후로는 피사에 패하는 등 나쁜 일만 일어났다는 점이다. 또한 중정에 놓여있는 (도나텔로의)<다비드>는 뒤쪽에 놓인 다리가 매우 어색하다. 따라서 (미켈란젤로의)<다비드>는 이 두 장소 중 한 곳에 놓여야 하는데 나는 <유디트>자리를 선호한다."

 

당시 시청의 문 앞에는 도나텔로의 <유디트>상이 있었는데(도20,21) 이와 교체하자는 의견입니다.

 

도20 <유디트>의 원 위치를 재현한 모습
 
 
 
도21 도나텔로 <유디트>
1453-64년, 청동
피렌체, 베키오궁
 
 
 
 

결국 <다비드>상은 시청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당시 피렌체는 어려움에 놓여 있었습니다. 1494년엔 프랑스에게 공격당하고, 이탈리아 안에서도 로마와 밀라노, 베네치아 사이에서 외교적인 줄타기를 해야했습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피렌체는 나라를 구한 애국적인 영웅이 필요했으며 힘과 지혜를 겸비한 다비드는 방어와 자유를 상징하는 영웅으로 민심을 통일하기에 적합했던 것입니다.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라는 미술품은 광장에서 이렇게 정치적인 역할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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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17 - 13-14세기의 이탈리아 중·북부 미술과 사회

13-14세기의 이탈리아 중·북부(지도) 미술과 사회

프랑스에서 파리와 근교를 중심으로 고딕미술이 발달하는 동안 이탈리아에서는 중·북부 지방(지도)이 새로운 미술의 근원지가 되었습니다. 현대의 이탈리아는 반도 전체가 하나의 국가이지만 당시엔 우리 나라의 도(道)크기 정도의 여러 국가로 나뉘어 있었습니다. 특히 중·북부지역은 남쪽의 교황국가와 북쪽의 신성로마제국(현재의 독일지역)의 다툼 속에서 자치권을 키워나갔습니다. 상·공업중심의 도시국가로 발달하면서 도시엔 시청과 광장이 형성되었습니다. 시청과 광장이 생긴다는 것은 단순히 건물이 지어졌다는 사실을 넘어 다수에 의한 정치와 시민의 모임이 활발해졌음을 의미합니다. “도시는 공기마저도 자유롭다”는 기록은 당시의 활발한 도시 분위기를 잘 말해줍니다.

 
 

종교는 여전히 사람들의 삶에 가장 큰 중심이었지만, 그러나 종교의 태도는 많이 달라졌습니다. 교리에 대한 무조건적인 복종보다는 예수의 말씀을 실천하는 것을 더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예수의 영원하고 절대적인 신성보다는 이 땅에서 고통을 겪은 인간으로서의 예수를 강조하면서 고통에 동참하고자 하였습니다. 1000여 년 동안 지속되어 온 교회의 방향을 바꾸어 놓은 사람은 바로 아씨지의 프란체스코 (S. Francesco d'Assisi)였습니다. 이탈리아 역사에서는 르네상스를 태동시킨 이 시대의 인물로 세 사람을 꼽습니다. 「신곡(神曲)」을 저술한 단테(Dante)와 성프란체스코(Francesco, S. Francesco) 그리고 화가 지오토(Giotto, 1267-1337)입니다. 세 사람은 문학, 종교, 미술에서 위대한 업적을 남긴 분들인데 이들에게서 우리는 공통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즉 현실을 그렸다는 점입니다. 단테는 「신곡」이라는 제목을 붙였지만 이 소설의 지옥과 연옥에 나오는 인물과 사건은 당시 사회의 것이었습니다. 프란체스코는 이 세상에서 산 예수를 되찾아주었죠. 그리고 화가 지오토는 당시 이탈리아에서 행해지고 있던 상징적인 비잔틴 방식의 그림을 현실의 모습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탈리아의 14세기 미술을 우리는 프로토 르네상스(Proto-Renaissance)라고 부릅니다. 원시적인 르네상스라는 뜻이죠. 역사에서 중세 말이라고 부르는 이 시대가 이탈리아에서는 르네상스의 문을 연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상

이제 미술로 들어가야겠습니다. 그럼13-14세기의 그림은 어떻게 그리고 왜 변하였을까요. 여기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를 그린 네 점의 패널화를 비교하면서 생각해보겠습니다. 십자가모양의 나무패널에 템페라기법으로 그린 것으로 교회에 걸려있던 것입니다. 그 앞에서 기도를 하던 성물이죠. 13세기 초에 베를링기에리(Berlinghieri)가 그린 첫 번째 그림은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이지만 마치 팔을 벌리고 서 있는 것 같습니다(도1). 눈도 뜨고 있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써 부활하여 영원하게 된 승리의 예수인 것입니다. 이보다 10년쯤 뒤에 쥰타피사노(Giunta Pisano)가 그린 예수님은 이와는 달리 십자가에 매달려 고통스러운 모습입니다(도2,3). 성프란체스코는 자신도 예수의 고통에 동참하고자 하였는데, 바로 이러한 종교운동은 그들의 기도 대상이었던 예수님의 모습까지 바꾼 것입니다(도3,4). 그리고 이보다 40-50년 후에 치마부에(Cenni de Pepo, 일명 Cimabue, 1272-1302)가 그린 예수는 고통스런 표정과 함께 인체의 볼륨감까지 살린 인간의 형상입니다(도5). 우리가 비잔틴 회화에서 본 금색도 사라졌죠. 예수의 몸도 십자가에 매달려 휘어진 모습입니다. 이제 1290년대에 지오토가 그린 예수상은 더욱 사실적입니다(도6).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면 이렇게 고개는 앞으로 숙여지고, 엉덩이는 뒤로, 그리고 무릎은 앞으로 튀어나올 것입니다. 어깨도 이렇게 아래로 쳐지고요. 13세기의 100여년 사이에 기독교의 예수는 영원한 절대자에서 인간의 모습으로, 회화는 상징에서 사실로 변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종교의 변화, 미술의 변화가 아니고 더 크게 보아서는 사회의 요구였던 것입니다.

도1 베를링기에리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1220-30년경, 나무 패널에 템페라
루카, 빌라 쥬니지 국립박물관
 
도2 쥰타 피사노,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1230-50년경, 나무 패널에 템페라
볼로냐, 산 도메니코
 
도3 도2의 부분
 
 
 
도4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부분
 
 
 
도5 치마부에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1280년경, 피렌체, 산타 크로체
 
 
도6 지오토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1290년경,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마리아 신앙과 제단화

마리아의 모습도 많이 변하였습니다. 13세기 초에 제작된 일명 <눈이 큰 성모>(도7)에서 마리아는 정면으로 앉아 아기를 안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아기이지만 크기만 작을 뿐 어른 형상이죠. 바로 심판하러 오실 예수입니다. 테오토쿠스(Theotokus)라는 이 유형은 어머니로서의 마리아가 아니고 예수의 육화(肉化)를 증명하기 위한 도구로서의 마리아였습니다.

도7 마에스트로 디 트레사 <눈이 큰 성모>
13세기 초, 높이47×67cm
시에나, 오페라 박물관
 
도8 지오토 <옥좌의 성모자>
1300-03년, 높이325×204cm
피렌체, 우피치
 

그러나 14세기 초에 제단화로 제작된 지오토의 <옥좌의 성모자>(도8)는 엄마와 아기의 관계이며, 예수의 비례도 이전의 어른 비례에서 벗어나 4등신에 가까운 아기의 비례로 그려졌습니다. 13-14세기 동안 확산된 마리아 숭배 신앙은 어머니의 미덕을 중요시하여서 바닥에 앉아 젖을 먹이는 <겸손한 마리아>(도9)로 또는 최후의 심판에서 우리를 보호해 주는 <자비로운 마리아>(도10)로 나타내는 것입니다.

도9 죠반니 다 볼로냐 <겸손한 마리아>
14세기 후반, 템페라
베네치아, 갈레리아 델 아카데미아
 
도10 니콜로 디 세냐 <자비로운 마리아>
1331-45년, 템페라
시에나, 피나코테카
 
 

지오토의 회화

이러한 사회의 변화는 중세의 종교개혁자라 일컫는 프란체스코로부터 변화의 계기를 맞이하였는데 그가 죽은 후 아시지는 그의 무덤 위에 교회를 크게 짓고 지오토에게 프란체스코의 일생을 벽화로 주문하였습니다. 교회는 밀려드는 순례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내부의 기둥 없이 단일 한 공간으로 지어졌고, 양쪽 벽 창문 아래엔 프란체스코의 일생이 그려졌습니다(도11).

도11 <바실리카 디 산프란체스코>
윗 성당 내부
아시지, 성 프란체스코
 
도12 지오토 <세상의 물건을 거부하는 프란체스코>
1297-99년, 프레스코, 장면의 크기 270×230cm
아시지, 성 프란체스코
 
25장면의 일화 중 하나인 도12의 그림은 프란체스코가 하느님이 주시는 것을 받기 위해, 현세의 아버지로부터 받은 옷을 아버지에게 돌려주는 장면입니다. 그림의 상하좌우를 보면 위엔 석가래 모양이 아래엔 커튼이, 그리고 좌우엔 기둥이 그려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즉 이 장면은 건물의 창 밖 풍경처럼 그려진 것입니다. 우리가 로마 회화에서 본 창으로서의 회화 개념인 것이죠. 배경의 건물 또한 원근법을 적용시킨 공간감을 느낄 수 있습니다.
 
 

또 다른 두 장면을 봅시다. 도14의 장면은 새들마저도 프란체스코의 설교를 경청하였다는 이야기입니다. 같은 주제를 그린 1235년경의 그림(도13)과 비교해 보면 지오토는 나무와 사람, 그리고 새의 비례를 사물의 크기대로 잡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중요한 것을 크게 그리던 중세의 방법에서 사물외관의 비례를 중요시하는 객관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킨 것입니다.

도13 보나벤투라 베를링기에리 <새에게 설교하는 프란체스코>
1235년, 나무패널에 템페라, <프란체스코 제단화>의 부분
페샤, 성 프란체스코 교회
 
도14 지오토 <새에게 설교하는 프란체스코>
1297-99년, 프레스코
아씨지, 성 프란체스코 교회
 
 
 

지오토는 또한 성경의 주제를 매우 인간적인 감정으로 해석하였습니다. 파도바의 스크로베니 예배당에 그려진 예수의 일생 중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하는 장면을 봅시다(도15).

도15 지오토<그리스도의 죽음을 슬퍼함>
1304-06년, 프레스코, 높이200×185cm
스크로베니 예배당, 파도바
 
 
예수의 시신을 껴안고 고통스러워하는 어머니 마리아, 양팔을 벌린 채 놀라워하는 여인과 두 손을 뺨에 대고 슬퍼하는 여인, 예수의 발을 만지면서 못 박힌 자국을 보며 애통해 하는 여인, 그리고 두 팔을 뒤로 젖힌 채 탄식하는 제자 등에서 우리는 인간의 감정을 풍부히 느낄 수 있습니다.
 
 

시에나의 마리아 신앙과 사회

앞에서 마리아 신앙에 대해 잠시 언급하였습니다만 마리아 신앙이 가장 크게 발달한 곳은 이탈리아 중부 도시 시에나였습니다. 당시의 종교는 단순히 종교적 기능만 지닌 것이 아니고 정치적인 기능도 지녔습니다. 마리아는 시에나의 수호성인이었습니다. 시에나는 전쟁에도 마리아상을 가지고 갔으며, 승전의 기쁨도 마리아와 함께 하였습니다. 화가 두치오(Duccio, 1255-1319)에게 의뢰한 <존엄한 마리아>(도16) 를 대성당으로 옮기던 날 시에나 도시는 상점도 문을 닫고 축제를 벌였습니다. 말하자면 국가행사인 셈이지요. 마리아 제단화는 시에나에서 점점 크게 제작되어서 두치오의 <존엄한 마리아>는 높이214cm에 폭이 412cm에 달했습니다.

도16 두치오 <존엄한 마리아>, 1308-11년
나무패널에 템페라, 높이214×412cm
시에나, 두오모 박물관
 
 

시에나의 경우 마리아는 교회만이 아니라 시청에도 그려졌습니다. 시모네 마르티니(Simone Martini, 1280/85-1344)의 <존엄한 마리아>(도17)는 높이가 713cm에 폭이 970cm에 달하는 거대한 벽화로 시청에서 도시의 수호자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17 시모네 마르티니 <존엄한 마리아>
1315년, 프레스코, 높이763×970cm
시에나, 팔라쪼 푸블리코
 
 
 
 

시에나의 시청과 벽화

시에나의 시청(Palazzo Pubblico)과 그 앞에 펼쳐진 광장은 중세 말에 형성된 공공 건축의 대표적인 예이다. 교회가 생활의 중심이던 중세의 도시는 주로 대성당 주변에 주요기관이 있었습니다. 이러한 시대에 시에나의 9인정부는 시청을 지어 행정, 사법, 경찰서 등의 공공업무실을 모으고 그 앞에 넓은 광장을 마련함으로써 시민사회를 형성한 것입니다.

 

도18 시에나의 시청건물 정면
1297년경 시작
 
 
도19 시에나의 캄포광장
 
 
 
 
 

당시 9인 정부의 회의실이었던 방은 3면이 벽화로 가득합니다. 여기 그려진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의 알레고리와 효과>(도20)는 중세 회화 중에서 드물게 보는 비(非)종교 회화입니다. 벽화는 <좋은 정부의 알레고리>(도21), <좋은 정부의 도시에서의 효과>(도22), <좋은 정부의 시골에서의 효과>, 그리고 <나쁜 정부의 알레고리>(도23), <도시에서의 효과>, <시골에서의 효과> 등 6부분으로 구성되었습니다.

 

도20 암브로지오 로렌제티 <좋은 정부와 나쁜 정부의 알레고리와 효과>
1338-40년, 프레스코, 시에나, 시청
 
 
 
도21 암브로지오 로렌제티 <좋은 정부의 알레고리>
1338-40년, 프레스코, 시에나, 시청
 
 
 
도22 암브로지오 로렌제티 <좋은 정부의 도시에서의 효과>
1338-40년, 프레스코, 시에나, 시청
 
 
 
 
 

도23 암브로지오 로렌제티 <나쁜 정부의 알레고리>
 
 
 
 
탐욕과 불공정과 허영에 둘러싸인 나쁜 정부의 독재자는 거칠음과 사기, 공포와 전쟁을 상징하는 대신들이 보좌하며, 나쁜 정부가 들어서면 도시에는 군인들이 갑옷을 입고 활보하고, 시민을 잡아가고, 길바닥에는 시체가 널브러져 있으며, 농촌은 황폐해 집니다. 반면 좋은 정부의 왕은 믿음과 자비와 희망이 도와주고 있으며 평화와 현명함, 인내와 정의의 대신들이 보좌하고 있습니다. 도시에는 결혼식에 가는 즐거운 춤 행렬과 구두 가게, 포도주 가게가 즐비하며 학교에서는 교사가 학생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좋은 정부의 건물들은 시에나의 실제건물을 닮게 함으로써 좋은 정부는 바로 9인 정부의 시에나임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현실의 사회를 반영하는 듯한 이 그림의 실제 목적은 9인 정부가 평화를 가져왔다는 정치선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벽화는 당시 삶의 구체적인 모습을 전해주는 생생한 이미지들입니다.
 

* 도판을 누르시면 큰 크기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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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16 - 비잔틴 미술

콘스탄티노플과 하기아 소피아
비잔틴(Byzantine)(지도)은 현재의 이스탄불을 가리키는 옛 이름으로, 비잔틴 문화라 하면 1453년 터키에 정복당하기까지의 동로마제국 문화를 말합니다. 현대 정치사에서는 이 지역의 중요성이 약화되었지만, 고대 말에는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즉 동서 무역이 가장 번성한 도시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330년 비잔틴이라는 지명을 콘스탄티노플로 바꾸고 로마제국의 수도를 이곳으로 옮김으로써 이 곳에 동로마제국의 시대를 열었습니다.
역사의 중심이 서로마에서 동로마로 옮겨오던 시대, 고대에서 중세로 넘어오던 시대, 다신교에서 일신교로 전이되던 4-5세기의 전환기는 유스티니아누스(Justinianus: 재임527-565)황제 재임기간 중 확고한 동로마의 기독교 문화를 정착시켰습니다. 즉 532년의 시민폭동을 제압한 유스티니아누스는 제정일치(祭政一致)를 확립함으로써 절대군주일 뿐만 아니라 神이 택한 이 땅의 대리인이 된 것입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폭동 진압 후 바로 건립하기 시작한 하기아 소피아(Hagia Sopia,성스러운 지혜)는 비잔틴 교회양식을 대변합니다(도1,2,3,4). 거의 정 사각형에 가까운 평면에, 중앙엔 거대한 도움을 얹고, 양쪽에 반원의 도움을 둘러쌓음으로써 전체가 마치 거대한 동산같이 보입니다. 파르테논 신전이 아테네의 스카이 라인을 결정하였듯이 하기아 소피아는 바다에 둘러싸인 아름다운 콘스탄티노플의 경관을 돋보이게 합니다. 터어키 지배 후 회교의 모스크로 쓰일 때 사방의 탑이 세워지고, 내부의 모자잌이 많이 훼손되었지만 기본 틀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마치 하늘지붕 같은 거대한 도움은 금으로 도금되거나 반짝이는 모자잌으로 장식되고(도4,5), 대리석 벽과 기둥은 마치 레이스같이 잔무늬로 새겨져 있습니다(도6). 현실의 느낌은 최대한 배제되고 신성함이 감도는 이 공간에서 천장의 작은 창들을 통해 들어오는 빛줄기를 맞으면 마치 하느님이 내리시는 빛과 같을 것입니다(도4). 내부에서의 성스러움이 중요시된 비잔틴의 도움은 실용성보다는 종교적 상징이 강조된 건축물로 이후의 종교건축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도1.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토의 이시도로
하기아 소피아, 532-37, 콘스탄티노플 현재모습
 
 
 
도2. 트랄레스의 안테미루스와 밀레토의 이시도로
하기아 소피아 옛모습
 
 
 
도3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토의 이시도로
하기아 소피아 평면과 입면
 
 
 
도4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토의 이시도로
하기아 소피아 내부
 
 
도5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토의 이시도로
하기아 소피아 도움부분
 
 
도6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토의 이시도로
하기아 소피아 주두 부분
 
 
 
 
 

이탈리아내의 동로마-라벤나
동로마지역의 미술품들은 이후 살펴볼 성상파괴운동으로 많이 소멸되었지만 이탈리아 반도 내의 동로마 영토였던 라벤나(Ravenna)에는 5-6세기의 미술, 특히 모자잌이 온전히 보존되어 있어서 비잔틴미술의 형성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호노리우스(Honorous)의 이복 누이인 갈라 플라치디아(Galla Placidia)의 무덤이라고 알려진 갈라 플라치디아의 묘당(Mausoleum of Galla Placidia)은 외관은 수수한 벽돌집이지만 전체가 모자잌으로 덮인 내부는 영롱하기 그지없습니다(도7,8). 짙푸른 하늘에 별이 반짝이고 그 한 가운데는 예수를 상징하는 십자가가 자리잡고, 네 모서리엔 복음사가의 상징이 새겨졌습니다. 즉 복음사가에 의해 떠받들린 하늘의 예수인 것입니다.

도7 갈라 플라치디아의 마우솔레움
425-50년경, 라벤나
 
 
도8 도7의 내부 천장
 
 
 
 
 

북쪽 벽엔 아직 목자 모습인 예수가 보입니다(도9). 초기 기독교 시대의 도상을 이어 받았으나 이 곳의 예수는 남루한 옷을 걸친 목동이 아니라 그리스 전통의 우아한 자세에, 황금빛 옷을 입고, 두광으로 신성함을 드러내는 예수입니다. 그러나 양들과 정원의 묘사는 고대 미술의 서정성을 그대로 보여주어서 고대에서 비잔틴도상으로의 변천과정을 잘 보여줍니다.
이보다 1세기가 지난 549년경에 제작된 산 아폴리네르 인 클라세(San'Appolinare in Classe)의 후진 천장의 모자잌은 더욱 비잔틴 방식으로 변화된 풍경과 인물묘사를 보여줍니다(도10). 우선 푸른 하늘은 황금색으로 변하고, 나무와 양들은 규칙적으로 배열되어서 매우 평면적입니다. 이 모자익의 주제는 두 가지입니다. 즉 모세와 엘리아에게 나타난 예수의 변신과 라벤나의 첫 번째 주교 성 아폴리네르입니다. 그러나 예수는 몸을 드러내지 않고 밤하늘의 십자가로 상징되어 있습니다. 비잔틴 미술은 현실의 색과 형태를 최대한 거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황금색은 바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시공을 초월한 영원함, 신성함을 상징하는 추상적인 색이지요. 승리의 아치 위에 예수와 함께 새겨진 네 복음사가도 이 땅에 살았던 인간이기 보다 신성한 계시를 신으로부터 받은 네 상징물 즉 사자(마르코), 소(루가), 독수리(요한), 천사(마태)로 묘사되어 있습니다(도11).

 

도9 <목자 예수>, 도7의 내부
 
 
 
도10 <예수의 변신과 성 아폴리네르>
모자익, 549년경
산 아폴리네르 인 클라세, 라벤나
 
도11 <천상의 예수와 네 복음사가>, 도10의 부분
 
 
 
 
 

산 비탈레(San.Vitale)교회의 모자잌 배치는 예수와, 제정 일치의 수장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부부의 정치, 종교적 위치를 실감케 합니다(도11-15). 역시 온 벽면이 모자잌으로 되어있던 비탈레 교회의 후진엔 우주를 지배하고 있는 짧은 머리의 예수가 있고(도13), 제단 양쪽엔 황제부부가 빵과 포도주를 헌납하는 모습으로 새겨졌습니다(도14,15). 우선 모두 정면이며 왕관과 두광까지 한 황제에게 시선이 집중된다는 사실이 인상적이지요? 머리모습만 서로 조금씩 다를 뿐 생김새도 비슷한 인물들은 신체가 길고 양감도 없이 평면적입니다. 신의 대리인임을 자처하는 황제의 모습은 정치가의 모습을 공적인 장소에 남기는 것을 삼가 하였던 그리스 공화정 시기의 페리클레스와 매우 큰 차이를 보여줍니다. 로마말기에 인물들을 획일적으로 묘사하고 황제와 가족만이 로얄박스에 크게 묘사하였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의 황제묘사(5주, 주제3의 도2)나 데오도시우스황제의 오벨리스크 좌대부분의 황제(5주, 주제3의 도6)묘사양식이 그 정점에 이른 듯합니다.

 

도12 <산 비탈레 내부 후진부분>
546-48년경
라벤나
 
 
도13 <우주의 지배자 예수>, 도12의 부분
 
 
 
도14 <우스티니아누스황제와 일행들>
546-48년경
라벤나, 산 비탈레
 
도15 <데오도라 황후와 일행들>
546-48년경
라벤나, 산 비탈레
 
 
 
 
황제그림의 맞은 편엔 황후 데오도라(Theodora)와 일행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황후 역시 왕관과 보석장치, 그리고 두광에 의해 다른 인물들과는 다른 세계의 선택된 존재임을 유감 없이 보여줍니다. 특히 서커스 단원출신의 데오도라는 과단성 있는 정치력을 발휘하여 유스티니아누스의 정치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라고 평가받고 있습니다. 532년의 폭동 때도 황제는 피신하여 도망치려 하였으나 그를 결연히 붙들고 맞서게 하였다고 합니다. 다른 황제 때와는 달리 황후가 특별히 다루어진 것도 그러한 정치적 위치 때문일 것입니다.
다시 산 비탈레의 후진을 보면 하늘아래 예수가 있고, 그 아래 제단 양쪽에서 예수에게 헌납하는 황제 부부상이 있는 배치에서 우리는 황제이면서 또한 교회의 수장인 제정일치제도의 군주상을 볼 수 있습니다.

 
 

초기 성상과 성상파괴운동
그럼 비잔틴 미술을 대표하는 성상, 아이콘(Icon)은 어떻게 형성되었을까요.
아이콘이란 그리스어로 형상이라는 뜻의 단어로, 비잔틴에서 예수와 마리아, 성인들의 상을 종교성이 짙은 특별한 형태로 발달시키면서 '성상'이라는 의미를 갖게되었습니다. 성상은 죽은 사람을 대신하는 초상화의 역할로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초기기독교시대에 본 바와 같이 이미 세상을 떠난 지 5-600년이 된 예수의 초상을 그린다는 것은 불가능하고, 예수를 어떤 분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 그에 적합한 이미지를 만들기 마련입니다. 700년경에 제작된 초기의 예수상은 한 손엔 성경책을 들고, 다른 한 손으로는 우리를 구원하게 하는 구원자, 절대권한을 가진 존엄한 자의 모습입니다(도16). 긴 머리와 턱수염은 당연히 그리스 神들의 아버지인 제우스상을 연상시킵니다. 그러나 초월적인 인상임에도 불구하고 양쪽 눈이 서로 다른 모습에서 미루어 보면 초기의 성상은 현세의 사람을 모델로 하여 그려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됩니다.
역시 같은 지역에서 제작하였다고 짐작되는 <천사와 성인들과 함께 있는 성모자>(도17)상은 당시의 여러 회화양식이 함께 사용되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성모자 양쪽의 성인들은 좌우대칭의 엄격한 자세이지만 그 위의 천사들은 스케치풍의 자유로운 회화양식으로 그려졌습니다. 성모자 또한 자세는 정면이지만 눈은 옆을 바라보며, 양쪽 눈과 눈썹이 서로 다른 초상적인 수법을 보여줍니다.

도16 <예수 그리스도>성상
700년경, 86×45cm
시나이 산, 성 카타리나 수도원
 
도17 <천사와 성인들과 함께 있는 성모자>성상
68.6×49.2cm, 7세기 초
시나이 산, 성 카타리나 수도원
 
 
 

베드로의 초기 성상은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의 남자 초상입니다(도18). 얼굴과 몸통에서 볼 수 있는 명암처리에 의한 풍부한 양감은 고대회화의 방식인 반면 황금색의 두광과, 화면위의 메달등은 상징적인 중세회화의 기법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러한 평면적이고 상징적인 배치를 이미 보았으니 이는 바로 고대말부터 발달된, 주인공을 신성화하는 한 방법인 것입니다(5주 주제2, 도25). 다시 말해 자유롭고 사실적인 고대회화방식과 성상으로서 요구되는 엄격함, 그리고 상징성이 공존하는 것입니다.

도18 <성베드로>성상
6세기 후반
시나이 산의 카타리나 수도원
 
도19 5주 주제2, 도25
<아나스타시우스 영사 딥틱>의 부분
 
 
 
 

성상의 문제는 양식면에서 만이 아니라 상의 쓰임, 효용, 역할의 관점에서 매우 첨예한 논쟁을 야기시킵니다. 초상화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던 성상은 성인의 시신이나 성골을 대신하여 돌아가신 분을 기억하고 기리기 위하여 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일단 성상이 되면 그 앞에서 기도하고 절을 하는 과정에서 그림 자체가 숭배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어떤 성상은 인간의 손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고 주장되기도 하였고, 어떤 성상은 예수의 시신을 쌌던 천의 자국 위에 그린 것이어서 성상 자체가 기적을 행한다고 이에 기도를 하였으며, 성상이 도시를 방어한다고 믿어서 성문에 성상을 놓고 기도하였습니다. 이러한 폐해에 717년 레오3세는 성상파괴(iconoclasm, image-breaking)정책을 결정하였습니다. 고대부터 그리스, 로마의 서방은 사물을 대신하는 이미지에 우호적이었으며 근동지역은 예로부터 묘사정신의 이미지를 거부하여 왔는데 레오3세가 아랍의 국경 근방태생임은 이미지에 대한 그의 근본성향을 짐작케 합니다. 그의 아들 콘스탄틴 5세(ConstantineⅤ: 재임 741-75)기간 중 성상 파괴정책은 더욱 강화되어 실로 많은 조각과 모자익, 성상들이 소실되었습니다(도20,21).

도20 <이교의 우상을 파괴하는 기독교인>
1320년경, 베네치아, 성 마르코사원, 모자익 부분
 
 
도21 <예수의 상을 없애는 성상파괴론자>
살테리오 클루도브 비잔틴 필사본 부분
9세기 후반
모스크바, 역사 박물관
 
 

그러나 이러한 정책이 50여 년 이상 지속되면서 수도원을 중심으로 한 성상 우호론자들의 반대도 거세졌습니다. 성상파괴정책 자체가 처음부터 원칙에 입각한 논쟁이기보다 성상을 제작해 오던 기존의 수도원 세력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정치적인 의도를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문제였습니다. "신성은 완전하게 묘사될 수 없으며 사람(예술가 또는 장인)에 의해 어떠한 재료로도 재현시킬 수 없다."는 파괴론자들의 이론에 우호론자들은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창세기 1:27)하셨으니 인간의 형상에 의해 하나님을 연상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또한 그림은 문맹인에게 글과 같은 역할을 하여서 이를 통해 성경의 말씀을 알 수 있다고 그림의 매개체적인 중요성을 강조하였습니다. 성상파괴가 가장 극심하였던 레오4세(Leo Ⅳ: 재임775-80)가 죽자 황후 이레네(Irene)는 정책을 거두고 콘스탄티노플의 성문엔 60여 년 만에 예수의 성상이 다시 세워졌습니다. 그러나 813년 레오5세는 다시 파괴정책을 강화하였고, 우호정책으로 완전히 선회한 것은 843년 황후 테오도라(Theodora)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그림의 신성여부보다 매개체로의 가치를 인정하는데 두 황후의 힘이 크게 작용하였음은 그 자체가 의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역사에서 여성의 역할은 언제나 주인공이기 보다 중개자, 매개자로서 중요시되었기 때문입니다.

 

 
 

이를 계기로 비잔틴 미술은 제2의 부흥기를 맞이합니다. 제정일치체제에서 정치적인 그림도 강화되고 또한 교리를 해석하는 새로운 이미지들이 완성됩니다. 9세기 말 레오6세는 옥좌에 앉아있는 예수에게 무릎을 꿇고 엎드린 자신의 모습을 하기아 소피아에 새겼습니다. 그러나 그 자신 두광을 지닌 성스러운 존재로 이 그림은 바로 왕은 절대자 神의 대리인임을 다시금 강조하는 정치적인 그림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도22).
그리고 다른 한 벽의 모자익엔 이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바친 콘스탄티누스 대제와 하기아 소피아를 지어 마리아에게 바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를 새김으로써 콘스탄티노플과 이의 수호신 마리아, 그리고 하기아 소피아와 황제들 간의 관계가 하나임을 전달해 줍니다(도23).

 

도22 <그리스도 아래 무릎꿇어 엎드린 레오6세>
9세기 말, 모자익, 하기아 소피아, 콘스탄티노플
 
 
도23 <콘스탄티누스와 유스티니아누스대제 사이에 있는 성모자>
10세기 말, 모자익, 하기아 소피아, 콘스탄티노플
 
 
 
 

성상파괴운동의 시련을 겪은 후 성상은 더욱 성스럽고 교리와 밀접해져야 했습니다. 다프니에 있는 도르미션 교회의 그림들은 중세 미술에서 가장 종교적이고, 상징적인 예라고 생각됩니다. 온통 금빛으로 둘러싸인 천장 한 가운데엔 존엄한 <우주의 지배자>가 무섭게 자리잡고 있습니다. 그리고 네 모퉁이의 설명은 그 분이 바로 마리아의 몸에서 낳고 이 세상에 살았던 예수임을 설명해 줍니다(도24,25).

도24 <우주의 지배자 예수>, 1080-1100년경, 모자익 다프니
도르미션 교회
 
 
도25 (도24)의 부분
 
 
 
 
 

교회의 다른 한쪽엔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가 새겨져 있습니다(도26). 시간과 공간의 묘사가 최대한 배제된 그림이지만 이를 통해 전하고자 하는 가르침은 분명합니다. 예수의 발에서 떨어지는 피가 해골을 적시는 것이 보이죠? 이 해골은 바로 아담의 해골이며, 예수의 피는 아담의 원죄를 씻었다는 교리를 설명하는 그림입니다.

도26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
11세기 말, 모자익, 다프니, 도르미션교회
 
 
 
 
 

비잔틴 성상을 대표하는 <블라디미르 마돈나>(도27,28)를 봅시다. 황금색의 넓은 테두리가 우선 그림을 성스럽게 합니다. 그러나 검은 바탕에 금 장식이 놓인 옷을 입은 마리아는 아기 예수를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슬퍼보이죠? 이 마리아는 바로 예수의 죽음을 알고 슬퍼하는 마리아인 것입니다. 즉 비잔틴 성상은 사실의 설명이 아니라 교리의 전달이며, 시공을 초월한 성스러움을 지녀야 했던 것입니다. 이 강의에서는 충분히 전달할 수 없어서 아쉽지만, 종교성과 서술성을 동시에 지닌 비잔틴 미술은 그리스 정교의 미술로 오랫동안 지속되었을 뿐만 아니라 12-13세기, 즉 중세 말의 이탈리아 미술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도27 <블라디미르 마돈나>
12세기, 나무에 채색, 77.5×53.3cm
모스크바, 국립역사박물관
 
도28 (도27)의 부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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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15 - 초기 기독교 미술의 성립

死後의 세계와 부활에 대한 관심
3세기이후 로마는 급격히 붕괴되어 정치와 경제면에서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어제의 부자도 오늘은 거지"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혼란하였으니 아무도 앞날에 대한 확신을 갖을 수 없었습니다. 현실에서의 이러한 불안감은 내세신앙을 낳게 하였으며 로마말기에 유행하였던 많은 사교들은 내세와 부활을 약속하는 공통점들을 지녔습니다. 크리스트교도 그 중 하나였다고 볼 수 있는데 다른 사교들 보다 도덕적인 설득력이 있고 포교가 조직적이었던 큰 장점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같은 크리스트교도 중세와 현대의 양상이 다르듯이 초기의 크리스트교도 달랐으며 313년에 밀라노 칙령에 의해 공인되기 이전의 박해시대와 이후의 양상 또한 많은 차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박해시대의 사람들은 신, 구약의 많은 일화들 가운데서도 특히 <요나>와 <나자로의 부활>을 주제로 삼아 구원과 부활에 대한 그들의 관심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3세기말에 제작된 <요나이야기 석관>(도1,2,3)에서 이야기는 아래 왼쪽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하느님이 요나에게 니느웨로 가 재앙을 알리라고 명하였으나 요나는 도망치려고 배를 탔습니다. 갑자기 거센 풍랑이 있어 그치지 않자 사람들은 제비뽑기를 하여 요나를 물 속에 던져 하느님께 바쳤습니다. 큰 물고기에 삼켜진 요나가 살려달라고 열심히 기도하자 하느님은 그를 살려주며 니느웨로 가게 하였습니다. 요나가 하느님 말씀을 따르자 하느님은 언덕에서 쉬고 있는 그의 자리를 아주까리 잎으로 시원하게 까지 해주었습니다. 즉 하느님을 믿음으로써 다시 살아난 것입니다(구약성경 요나편 참고). 믿음에 의한 구원과 부활의 주제는 몇몇 일화를 첨가하고 있습니다. 위 왼쪽에 새겨진 나자로의 부활(도2의 왼쪽 위), 바위를 쳐 물이 솟아나게 하여 이스라엘 백성의 갈증을 해소시키는 모세 등등. 석관의 가장 오른쪽에 새겨진 낚시하는 장면은 영혼을 낚는 어부인 예수를 상징할 것이며, 그 위에 작은 크기로 새겨진 양치기도 길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 선한 목자로서의 예수, 즉 구원자의 모습입니다.

 

도1 <요나 이야기의 로마석관>, 3세기말, 로마
 
 
 
 
도2 도1의 왼쪽 부분
 
 
 
도3 도1의 오른쪽 부분
 
 
 
이야기의 전개 방식은 이야기를 시간 순서대로 배치하였던 로마의 역사 부조방식과 사뭇 다릅니다. 풍랑에 흔들리는 배와 요동치는 큰 물고기 그리고 아주까리 그늘 밑의 요나가 화면의 대부분을 차지하며 다른 이야기들은 남는 공간에 하나씩 넣는 듯이 배치하였습니다. 화면 구성의 면에서 서로간의 균형엔 관심이 없으며 조각을 하는 방법에서도 하나하나의 아름다움엔 전혀 개의치 않은 듯합니다. 인물이나 사물을 배경에서 두드러지게 하고 세부를 깊게 선각으로 처리함으로써 이야기를 분명히 전하는 것에 관심을 쏟은 듯합니다.
 
 

그리스도 도상의 성립 - 기독교 공인 이전과 이후

우리에게 예수의 모습을 말해보라 하면 아마 얼굴이 긴 편이며, 구불거리는 긴 머리가 어깨까지 내려오고 턱수염을 길렀다고 말할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습은 화가들이 약간의 자료를 바탕으로 상상력을 동원한 예수의 모습이 점차 전형을 이루며 내려온 것일 뿐 실제 예수의 모습과는 거의 관련이 없습니다. 예수가 세상을 떠난 지 거의 2-3세기가 지난 후 예수의 모습을 그려야했던 로마 말기의 사람들은 무엇을 기준으로 삼았을까요. 생전의 예수를 본 사람도 없고 이전에 존재했던 신도 아니며 또한 신학적으로도 신성과 인성을 함께 지닌 예수를 어떠한 형태로 나타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그들에게 아주 큰 어려움이었을 것입니다. 그리스 조각을 많이 보아온 그들은 제우스나 아폴로 (도5,6), 아름다운 그리스 소년(도4) 이나 철학자 등 예수의 뜻을 공유할 수 있는 신의 도상에 예수의 의미를 부여하고 그들의 바람을 나타내었습니다.

도4 <그리스 청년모습의 그리스도>
3세기, 로마,국립박물관
 
 
 
도5 <아폴로 모습의 예수>
3세기, 쥴리무덤의 천장, 바티칸
 
 
 
도6 도5의 부분
 
 
 
 
 
 
 

예수의 상을 처음으로 그린 것은 3세기경이라고 추측되는데 예수를 마차를 타고 나타나는 태양신 아폴로의 모습을 빌어 나타내고 주변을 포도덩쿨로 장식하여 자신을 '포도덩쿨'이라고 비유한 예수를 나타내기도 하였습니다(도5,6). 이들은 희생양을 어깨에 이고 있는 그리스의 젊은이 도상을 빌어 선한 목자 예수를 나타내고(도7), 디오니소스 신화에 그려지던 포도덩쿨과 포도주를 빌어 예수의 피를 나타내는 등 그리스 미술의 도상을 빌어 크리스트교의 의미를 상징하곤 한 것입니다. 공인 이전엔 그외에도 교사나 철학자로 그리고 물고기 모양으로 예수를 나타내기도 하였는데 이는 '우리의 구원자 예수 크리스트'라는 뜻의 그리스어의 단어 첫 자를 모은 ikthus라는 단어가 물고기라는 뜻이 된데서 기인하는 표시였습니다.

 

도7 로마석관, 4세기, 로마, 라테라노 박물관, "칼리메레야,
우리의 신이 너와 누이동생 힐라라의 심신을 회복시켜주었다."라는 글이 새겨있다.
 
 
 
 
 

313년 기독교가 공인되고 국가의 종교로 자리바꿈하면서 예수의 모습도 전지전능한 우주의 지배자로 또는 옥좌에 앉은 황제의 모습으로 바뀌고 있어서 공인 이전과 큰 대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로마의 고위관리였던 쥬니우스 바수스(Junius Bassus) 석관은 여러 면에서 이 시대 미술을 대변합니다. 가운데 부분인 <우주의 지배자 예수>는 특히 흥미롭습니다(도8,9). 헬레니즘적인 우아함을 지닌 청년모습의 예수는 하늘나라를 뜻하는 콜루스(Coelus)의 의인화, 즉 우주를 발아래 두고 있으며, 베드로와 바울이 양쪽에서 보좌하는 가운데 옥좌에 앉아있습니다.

 

도8 <쥬니우스 바수스의 석관>, 359년
대리석, 118×213.8cm,
로마,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묘소
 
도9 도8의 위 중앙부분
<우주의 지배자 예수>
 
 
 
 

5세기경부터 황제의 후원아래 지어지기 시작한 대규모의 교회에 그려진 예수는 더 이상 우리를 가르치거나 구원하는 예수가 아니고 천상의 세계에 군림하며 세상을 심판하러 오는 절대자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습니다. 산타 푸르덴지아나 교회(Santa Prudenziana) 후진(apse)부분의 모자익 벽화는 천상의 예루살렘에서 사도들과 함께 있는 <존엄한 예수>(Cristo in Maesta, 도10)의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머리엔 황금빛 두광을 둘러 성스러움을 상징한 예수는 주변의 사도들 보다 훨씬 높은 자리에 보석이 박힌 옥좌에 앉아있습니다. 가난하게 살았던 사도들에게 원로원 의원의 옷을 입히고 예수에겐 황제의 모습을 부여하는 발상은 기독교의 권위를 높여야 한다는 그들의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라 짐작할 수 있습니다.

 

도10 산타 푸르덴지아나의 후진 모자익, 390년경, 로마, 산타푸르덴지아나
 
 
 
 
 
 

지상에서의 황제의 개념을 천상의 예수에게 대치시키는 경향은 더욱 가속화되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순교한 자리인 로마의 교외엔 큰 교회가 지어졌습니다. 바오로 교회 후진부분은 <존엄한 예수>뿐만 아니라 승리의 아취가 덧붙여지고 그 한가운데 원형 속엔 예수의 흉상이 무섭게 그려져 있습니다. 위 양쪽에 네 복음사가를 상징하는 동물들이 그려진 것으로 모아 이 예수는 최후의 심판에 나타나는 심판자, 승리자, 지배자의 역할의 하느님임을 알 수 있는데 승리의 아취는 바로 로마황제들이 전쟁에서 이긴 후 개선을 기념한 소위 개선문(Arco Trionfale)의 개념이 교회건축에 적용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도11). 주변의 다른 인물들보다 월등히 크고 엄격한 인상을 지니고 있는 이와 같은 예수의 도상을 우리는 '존엄한 지배자'(Maestas Domini)라 부르는데 5세기에 시작된 이 개념과 도상은 이후에도 계속되어 비잔틴의 판토크라토르(Pantocrator:세상의 지배자) 나 로마네스크 시대의 예수도상으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도11 산 파올로 푸오리 델레무라, 로마
385년 시작하여 완공되었으나 1823년의 화재로
많은 부분이 손실된 후 보수되었음
 
도12 도11의 후진과 승리의 문 부분
 
 
 
 
 

신화와 기독교, 도상과 의미의 혼재
라티나 길가의 카타콤브에 그려진 헤라클레스는 그리스 도상이 기독교적 의미로 변화하는 혼합적인 현상을 잘 보여줍니다(도13,14). 감실 양쪽엔 헤라클레스의 노역이 그려지고, 한 가운데엔 헤라클레스가 알체스티(Alcestis)를 그의 남편 아드메투스(Admetus)에게 데려다 주는 장면이 있습니다. 이교의 신화가 왜 기독교인들의 기도장소에 그려진 것일까요? 이 그림을 자세히 보면 그리스 신화에 익숙했던 고대 말에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를 어떻게 이해하였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스가 노역의 하나로 저승사자 케르베루스(Cerberus)를 잡으러 지옥에 내려갔을 때 그는 남편이 죽은 자리에서 죽음을 택한 알체스티를 다시 살려 역시 되살려낸 남편에게 데려다 주었습니다. 즉 죽음과 부활의 주제인 것입니다. 헤라클레스의 이 일화를 통해 스스로 죽음을 택하고 다시 부활하였으며 만인의 부활을 약속하는 그리스도를 비유적으로 상징하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헤라클레스는 원래 인간세계에 있었으나 수많은 고통을 감내한 후 영원히 사는 神의 영역에 들어갔으니, 사후의 영생으로 보상되는 현세의 고통을 나타내는데 더 이상 좋은 비교가 없었을 것입니다. 카타콤브 의 화가와, 무덤의 주문자, 그리고 이를 보는 이들은 이렇게 그리스 신화와 기독교를 섞어가며 고대 말의 종교를 형성한 것입니다.

 

도13 <알체스티를 남편 아드메투스에게 데려다주는 헤라클레스>
비아 라티나의 카타콤브 벽화, 4세기 후반, 로마
 
 
도14 도13의 왼쪽 그림,
<히드라를 처치하는 헤라클레스>
 
 
 
 

기독교 도상이 형성되면서 그 반대의 현상도 나타나서 매우 흥미롭습니다. 사이프러스에서 발굴된 도15의 모자익을 봅시다. 무엇을 나타낸 것 같으세요. 언뜻 보면 성모자와 경배하는 동방박사들 같죠? 그러나 이는 헤르메스가 어린 디오니소스를 님프에게 데려다주는 장면입니다. 어린 디오니소스는 아기 예수같이 두광을 쓰고, 이를 안고 있는 이는 마리아 같지만 머리와 발목에 날개가 달려있는 헤르메스입니다.
같은 주제를 다룬 그리스 시대의 도기화(도16)와 비교하면 양식의 변화가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스 그림에선 디오니소스가 그림의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강보에 쌓인 작은 아기에 불과하지만 이제 중세초기에 그려진 그림에서는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머리에 두광까지 묘사해 두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성스러움을 눈에 보이는 형태로 나타내고자 하는 중세의 방법인 것입니다.

 

도15 <어린 디오니소스를 님프에게 데려다 주는 헤르메스>
4세기 전반, 사이프러스에 있는 네아 파포스의 바닥 모자익
 
 
도16 <어린디오니소스를 님프에게 데려다 주는 헤르메스>
기원전 440년경, 바티칸 박물관
 
 
 
 

교회건축의 성립


초기의 교회는 두 가지 기능을 가지고 시작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로마나 큰 도시들에서는 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지만 소아시아반도와 중동지역의 발굴 결과에 의하면 순교자들의 무덤에서 죽은 이와 예수를 기념하는 제사를 지내던 곳이 교회로 발전한 예들을 볼 수 있습니다. 또 다른 기원은 기독교가 국교화 되기 전 남의 눈을 피하여 모임을 가져야 했던 신자들은 가정집의 큰 방 하나를 개조하여 모임을 가지며 여러 명이 식사의 제례를 치를 수 있는 공간으로 교회를 대신하였다고 생각됩니다. 그러나 황제 자신과 어머니가 강력한 후원자가 된 콘스탄티누스 시대 이후엔 많은 사람을 한 자리에 모을 수 있는 장소에 대규모의 교회를 짓기 시작하였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그의 일생에서 중요한 시기마다 하느님의 도움을 받았다고 전하고 있습니다. 312년 겨울에 일어난 마센티우스 전쟁에서는 전날 밤 꿈에 키로(Chi-Rho) 형태로 나타난 하느님으로부터 "이 기호로 정복하라"라는 계시를 받고 깃발에 이를 새겨 싸운 후 이겼다고 합니다. 그리고 313년 기독교를 공인하였습니다. 키로는 크리스트를 의미하는 그리스어의 약자인 XP를 한 글자로 만든 기호로 P라고 쓰며 현재도 카톨릭교단에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기독교는 공인과 함께 정치적으로 로마 제정과 밀접해졌으며, 로마말기의 불안정한 사회상황에서 빠른 기간에 국가 종교의 체제를 갖추었습니다.

 
 

그리스의 신전은 원래 신을 모시는 곳이었으며 모든 사람들은 신전 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서 종교행사를 가졌습니다. 반면에 기독교의 미사는 예수의 제사를 지내는 기능을 가지고 있어서 건물 안에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어야 했습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의 공회당인 바실리카형식을 빌어 교회를 설계하였습니다. 바실리카는 원래 로마시대에 재판이나 상인들의 중개, 그 밖에 많은 사람이 모이는 각종 행사에 쓰던 평범한 장방형 건물이었는데 초기 기독교인들은 이 구조를 그들의 필요에 따라 변형하였습니다.
324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현재의 바티칸 언덕부분을 교회에 주며 베드로의 무덤을 보호케 하였습니다. 교회는 이 곳을 찾아오는 많은 순례자들을 수용하고 베드로의 죽음을 기념하며 또 미사를 드려야했습니다. 현재의 베드로 대성당은 15세기부터 17세기에 이르는 동안 개축되어 4세기의 모습은 볼 수 없지만 후대의 연구에 의해 기본원형을 짐작할 수는 있습니다. 도17과 18은 베드로 대성당(Basilica di San Pietro)의 평면도와 원래모습을 짐작케하는 그림입니다. 회랑(nave)과 측랑(aisle)은 로마 바실리카의 원형에서 빌어온 것으로 교회는 이 장방형 부분을 신자들이 앉는 곳으로 사용하였으며 좁은 한쪽 끝을 둥글게 한 후진(apse)은 제단으로 사용하여 이곳은 성직자들만이 들어갈 수 있도록 제한하였습니다. 베드로의 무덤은 후진과 익랑(翼廊, transit)사이의 중앙에 놓이고 무덤 위는 닷집으로 덮어 장엄하게 하였다고 추측되며 팔을 벌린 듯이 좌우를 가로지르는 익랑(翼廊, transit)의 폭을 넓게 하여 이 무덤을 찾는 많은 순례객들이 운집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바실리카를 T자로 변형시킨 것은 십자가의 상징을 도면화 한 것이라고도 해석할 수 있으나 초기 기독교의 교회 모두가 같은 형태는 아니어서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방식은 그 후에도 발전하여 다음주에 살펴볼 로마네스크의 상징적인 평면도로 완성되었습니다. 중정(artrium) 부분은 도19에서 보는 바와 같이 지붕이 없는 옥외 공간으로 바실리카가 지어진지 약 50년 후에 증축한 것입니다.

 

도17 베드로 대성당 평면도
 
 
 
 
도18 베드로 대성당 원래모습
 
 
 
도19 베드로 대성당 중정
페라보스코(1620년경)의 판화
 
 
 
 

385년 경 사도 바울이 순교한 자리엔 <베드로 대성당>과 거의 같은 규모, 같은 구조의 교회가 지어졌습니다. 로마 시내에서 한참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로마 성곽 밖의 바오로 성당>(San Paolo fuori le mura)이라고 부르는 이 교회는 1823년의 화재로 많은 부분이 손실되었지만 18세기 동판화가 피라네지의 에칭을 통해서나마 그 위용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도20). 400년경의 한 기록은 "내부는 궁정 같이 화려하게 빛났으며" 코린트식의 대리석 기둥과 창문사이는 온통 "금빛으로 빛났다"고 당시의 웅장함을 전하고 있습니다.

 

도20 피라네지, <산 파올로 푸오리 델레무라>
에칭, 18세기
 
 
 
 
 

초기의 필사본

파피루스 두루마리 형식이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접는 책으로 바뀐 것은 기원 후 1세기 경이었습니다. 몇 세기동안 두 형식이 공존하다가 4세기 이후에 비로소 책 형식이 더욱 보편화 되었는데 이로써 여러 개의 두루 마리에 써야했던 글도 한 권에 담을 수 있었습니다. 내용은 주로 소설이나 성경의 이야기들인데 삽화를 함께 곁들이고 있어서 이를 통해 우리는 이 시대 회화의 변화를 실감할 수 있습니다.
도21은 베르길리우스(Vergilius: 70-19B.C)의 詩集 중 마흔 네 번 째 장에 그려진 그림으로 <農耕詩>(Georgica)부분입니다. 말과 양들이 풀을 뜯어먹고 있는 한가로운 전원에서 한 목동은 피리를 불고 다른 목동은 이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그러나 형태들이 어딘가 어색합니다. 사물들이 마치 허공에 걸린 듯이 보이는 것은 아마 원근법이 없다는 사실에서 기인한 것입니다. 가능한 한 서로 겹쳐지는 것을 피하였으며 또한 빈 공간도 없이 메꾸고 있습니다. 고전시대엔 얼굴을 3/4각도에서 그림으로써 양감을 나타내던 얼굴묘사 방법은 완전한 측면으로 변하여 도안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도21 <농경시 삽화>
베르길리우스 로마누스의 필사본 삽화
 
 
 

 
 

이 시대 그림들이 나타내는 사물들은 실제 우리 앞에 있는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으로부터 점점 멀어져서 특정 의미 전달을 위한 형식으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도22는 창세기 24장 중 레베카와 아브라함의 종 엘리에제가 만나는 장면입니다. 이야기는 대충 이러합니다. 아브라함이 종을 시켜 자기의 고향에 가서 아들 이삭의 신부를 골라오게 하였습니다. 엘리에제는 낙타 열 마리와 함께 길을 떠나 나홀이라는 성에 다다랐습니다. 성에서 나와 물을 긷는 처녀에게 마실 물을 청하니 처녀는 물을 항아리 채 주고 낙타에게도 물을 길어 주었습니다. 엘리에제는 레베카라고 하는 이 처녀를 이삭의 신부로 택하였습니다.
그림에서 다시 이 이야기를 봅시다. 레베카는 오른쪽 위에 그려진 나홀성에서 나와 물 항아리를 어깨에 메고 기둥들이 늘어선 길을 따라 우물에 이르고 있습니다. 왼쪽에는 반나체로 그려진 샘의 님프가 자기 항아리에서 물을 샘으로 흘려 넣고 있고 물을 기른 레베카는 낙타 열 마리를 데리고 온 아브라함의 종에게 물을 주고 있습니다.
늘어선 기둥들보다 사람을 크게 그린 것을 보면 이 그림을 그린 작가는 실제의 공간감을 나타내는 데 큰 관심이 없음이 분명하며, 연속된 시간에 일어난 레베카의 두 장면을 같은 공간에 그리는 것을 보면 구체적인 시간에도 관심이 없는 듯 합니다. 형상들은 특정 시간과 장소를 나타낸 현실의 모습이기 보다 이야기 전달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도22 <레베카와 엘리에제>, 비엔나 창세기 필사본 삽화
6세기경, 비엔나 도서관
 
 
 
 
 

헬레니즘의 잔존
우리는 지금까지 고대 말과 초기 기독교 시대에 나타나는 미술의 새로운 경향들에 대하여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기존의 방법 또한 뿌리 깊은 것이어서 한 편에서는 매우 세련된 헬레니즘 경향의 미술품들이 6세기경 까지도 제작되고 있습니다.
로마의 옛 귀족 가문인 니코마끼(Nicomachorum)집안과 심마끼(Symmachorum)가문에서는 두 집안끼리 맺어진 결혼을 축하하기 위하여 상아로 된 딥틱(Diptych:두 쪽 병풍)을 제작했습니다. 왼쪽 것은 파리의 클루니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고 오른쪽 것은 런던의 빅토리아와 앨버트 박물관에 있는데 도23은 보관 상태가 좋은 전자의 것입니다. 이 부조의 내용은 기독교가 국교로 정해진 이후 이외의 종교들이 국가의 혜택을 받지 못했을 때에도 옛 귀족들 사이에서는 전통적인 종교의식(儀式)이 행해졌음을 보여줍니다. 바카스의 여사제가 주피터를 상징하는 참나무 아래 놓인 제단에 향을 올려놓고 있으며 작은 시종은 포도주 잔을 사제에게 건네주고 있습니다(도23). 여사제의 모습에서 보이는 헬레니즘 전통의 완벽한 아름다움은 참으로 경탄스럽습니다. 가능한 한 옛날의 아름다움의 세계에 가까이 가고자하는 주문자의 바램과 만든 이의 노력을 우리가 상상해보면 옛 고전문화에 대한 그들의 향수가 강하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마도 옛 품위를 지키지 못하고 변해 가는 사회 속에서 다른 한 편으로 몰리고 있는 옛 귀족들은 그리스 신화를 종교형태로 고수하고 옛날의 고상함과 우아한 아름다움을 자신들이 지켜야 한다고 믿었으리라 봅니다.

도23 <니코마키 심마키 딥틱>
중 왼쪽 부분
4세기말, 상아
파리, 클루니 박물관
 
도24 <성 미카엘 천사>
6세기 초, 상아
런던, 대영박물관
 
 
도25 <아나스타시우스 영사 딥틱>
517년, 상아
파리 국립도서관
 
 
 
 
 

헬레니즘의 전통은 구 세력에게만 옹호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기독교가 안정되게 자리를 잡아가면서 기독교 주제들도 세련된 옛 양식으로 제작되곤 하였습니다. 도24의 딥틱에 새겨진 미카엘 천사 또한 그 세련됨이 놀랍습니다. 도25에서 볼 수 있는 좌우 대칭적이고 평평한 도안과 같은 고대 말의 새로운 양식과는 참으로 대조적입니다. 그러나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다시금 재현시킨다고 해서 고전의 미의식이 그대로 살아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도24의 미카엘 천사의 발을 보십시요. 층계를 세 칸이나 딛고 있지 않습니까. 옛 형식을 옮겨오려고 애를 썼으나 그들이 중요시 여겼던 공간감을 실감하지 못하고 있었던 결과이리라 봅니다.

 

 

 

 

그리스 로마의 신

 

고르곤(Gorgon)
스테노. 에우리알레. 메두사의 세자매로 서쪽 끝 밤의 나라와 헤스페리스(저녁의 딸)들의 동산 가까이 살고 있다. 고르곤의 머리는 뱀이며, 멧돼지의 어금니와 같은 커다란 이빨에, 손은 청동이며, 커다란 황금날개를 가지고 잇다. 그 날카로운 눈초리를 보는 자는 누구를 막론하고 돌로 변하기 때문에 그녀들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3명 가운데 2명은 불사신이었으나, 메두사만이 죽을 운명이어서, 영웅 페르세우스의 손에 목이 잘렸다.

메두사
고르곤이라는 세 마녀들 주의 하나고, 원래는 아름다운 소녀였으나, 여신 아테나의 저주를 받아 무서운 괴물로 변하였다. 얼굴 생김새가 너무 끔찍하여 그것을 본 사람은 돌로 변하였다. 페르세우스가 메두사를 죽이자, 그 피에서 포세이돈의 자식인 날개 달린 천마 페가소스와 크리사오르가 태어났다. 메두사의 잘려진 머리는 아테나의 갑옷에 장식으로 붙여졌다. 또한 고르곤의 머리는 신전이나 다른 곳을 장식할 때 상징으로 널리 사용되었다. 따라서 이런 건물을 '고르고네이온'(Gorgoneion)으로 부르기도 한다.

디오니소소(Dionysos)
로마신화에서는 '바쿠스'라고도 알려져 있는데, 대지를 풍요를 주재하는 신이며, 포도재배와 관련하여 술의 신이 되기도 한다. 제우스와 세멜레 사이에서 태어났다. 세멜레를 질투한 헤라의 속임수에 세멜레는 번개에 타 죽었으나, 내태에 있던 디오니소스는 살아나 제우스의 넓적다리 속에서 달이 찰 때까지 자랐다고 한다. 그는 이후 성장하면서 여러지방을 떠돌아 다니는데, 이때 포도재배를 각지에 보급, 문명을 전달했다고 전한다. 디오니소스에 대한 신앙은 술과 가무를 동반하는 광란의 축제였으며 로마 시대에 와서도 이 신앙은 계속되어 점차 비종교적인 경향이 강해졌다. 술의 신이자 여성스러운 외모를 하고 있는 디오니소스는 그리스 사회의 다양한 분야에서 수 많은 추종자를 거르리고 있었으며, 신화에서는 쾌락적인 사티로스와 마이나데스가 그의 추종자였다.

아마존(Amazon)
사냥과 전투를 즐겼던 여성전사들의 부족으로 트로이 전쟁에서 참가하였다. 전투의 신 아레스의 자손으로 알려져 있다. 여전사들의 이야기는 그리스 신화에서 자주 등장한다. 그리스인들이 이들에게 매혹되는 것은 아마도 여성이 지배하는 세계에 대한 그리스 남성들의 집단적인 두려움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신화에서 아마존들은 아이를 키우고 집안일을 돌보는 전통적인 여성의 역할을 거부하였으며 남성들과 함께 전쟁에 참여하였다. 많은 그리스 영웅들이 아마존과 연관되어 있으며, 특히 아킬레우스, 헤라클레스, 테세우스는 아마존과의 연애관계로 얽혀 있다. 영웅 헤라클레스는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가 가지고 있는 허리띠를 빼앗고자 원정을 하였다고 한다. 아킬레우스는 아마존의 여왕 펜테실레이아(penthesilea)를 죽였는데, 여왕이 죽는 순간 사람에 빠졌다고 한다. 그리스 미술가들은 기원전 6세기초부터 아마존을 집중적으로 나타낸다.

아킬레우스(Achilles)
그리스 신화의 특출한 전사로서 그리스의 트로이 포위기간 동안 그가 보여준 모험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의 중요한 주제가 되었다. 미술가들은 그와 파트로클로스의 우정, 핵토르와의 전투, 트로이의 왕자 트로일로스에 대한 기습공격과, 켄타우로스가 그를 양육한 이야기, 아마존들과의 전투와 같이 트로이 전쟁 회에도 다양한 에피소드를 즐겨 묘사하였다.

아테나(Athena)
아테네의 수호여신. 제우스와 바다의 신 오케아노스의 딸 메티스 사이에서 태어났다. 메티스에게서 태어나는 아들이 제우스의 지위를 빼앗을 것이라는 땅의 신 가이아의 예언에 제우스는 메티스를 삼켜버렸다. 그러나 달이 찬 아테네가 제우스의 머리에서 갑옷을 입은 모습으로 함성을 지르면서 태어났다고 한다. 일반적으로 괴물 고르곤의 목이 달린 방채 아이기스를 든 무장한 처녀의 모습으로 상징되고 있다. 올빼미가 이 여신의 상징으로 이것도 옛 동물숭배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외래에서 전래된 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리스 전 지역에서 숭배되었다. 신화에서는 끝까지 처녀성을 지킨 것으로 묘사되며, 특별히 '처녀신 아테나(아테나 파르테노스)'라 하며 아크로폴리스의 파르테논 신전은 이 처녀신에게 봉헌된 신전이다. 호전적인 면을 지니지만, 여성들이 하는 일을 보호하기도 하며 장인들의 수호신이기도 했다.

페르세우스(Perseus)
제우스와 아르고스의 와녀 다나에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르고스의 왕 아크리시오스는 딸에게서 낳은 자식에게 살해 될 것이라는 신탁을 믿고 다나에를 밀실에 가두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마음을 두었던 제우스가 황금의 비로 변신하여 지붕으로 스며들어가 페르세우스를 낳게 하였다. 페르세우스는 고르곤인 메두사를 죽였으며, 바다 괴물로부터 안드로메다를 구하였다. 그가 죽인 메두사의 머리는 아테나 여신에세 바쳐져 그녀의 방패에 부착되었다.

헤라클레스(Herakles)
그리스의 영웅 가운데 가장 빈번하게 등장한다. 헤라 클레스는 제우스의 서자였으며, 인간처럼 줄을 운명을 가지고 태어났다. 후에 아테나 여신의 도움으로 그는 신이 되어 올림포스에 올라간다. 올림피아에 있는 제우스 신전을 장식하는 12가지 과업은 길고도 복잡한 그의 영웅적인 과업 중 전범화된 것이 어떤 것인지 확인시켜준다. 그 12가지 과엄은, 네메아의 사자퇴치, 레르네에 사는 히드라 퇴치, 케리네이라의 산중에 사는 사슴을 산 채로 잡는 일, 에리만토스산의 멧돼지를 산 채로 잡는 일, 아우게이아스왕의 가축 우리를 청소하는 일, 스팀팔스 호반의 사나운 새 퇴치, 크레타의 황소를 산채로 잡는 일, 디오메데스왕의 사람 잡아먹는 4마리의 말을 산 채로 잡는 일, 아마존의 여왕 히폴리테의 띠를 탈취하는 일, 괴물 게리온이 가지고 있는 소를 산채로 잡는 일, 님프 헤스페리스들이 지키는 동산의 황금사과를 따오는 일, 저승을 지키는 개 케르베로스를 산채로 잡는 일이다. 후에 리디아의 여왕 옴팔레와 결혼하였다. 미술에서 나타나는 그의 모습은 유아기부터 장년기까지 매우 다양하다. 그리고 강력한 남성으로서 궁극적으로 신이 되었기 때문에 헤라클레스는 로마의 황제들은 말할것도 없고, 독재자 아테네의 참주 페이시스트라토스와 알렌산드로스 대왕의 분신으로 모셔졌다.

헤르메스(Hermes)
전령신. 로마 신화에서는 메르쿠리우스로 부른다. 헤르메스는 지팡이(케리케리온 혹은 카두세우스)를 들고 날개가 달린 신발을 신은 모습으로 나타난다. 영혼의 인도자로서 그는 지하세계와도 관련이 있다. '헤름'(Herms)이라는 기둥들 위에 올려진 수염 난 두상들은 본래 헤르메스의 모습을 재현하려는 의도였으며, 주요도로를 표시하는 기능을 하였다.

 

 

 

 

카타콤 (Catacomb)

 

초기 그리스도 교도의 지하묘지로 나폴리, 시라쿠사, 몰타, 아프리카, 소(小)아시아 등의 여러 지방에서 볼 수 있는데, 특히 로마 근교에 많다. 카타콤은 원래 그리스어 ‘카타콤베’로 '낮은 지대의 모퉁이'를 뜻하며, 로마 아피아 가도(街道)에 면(面)한 성(聖)세바스찬의 묘지가 두 언덕 사이에 있었기 때문에 3세기에 이 묘지의 위치를 표시하기 위해 이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다. 중세까지만 해도 지하묘지로서 알려진 것은 이 묘지뿐이었으나, 16세기에 초기 그리스도 교도의 지하묘지가 발견된 뒤로는 모든 지하묘지를 카타콤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와 같이 지하에 묘지를 두는 풍습은 동방에서 전래되었으나 그리스도 교도에 대한 박해가 심해지면서 지하묘지의 풍습이 더욱 성행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피라네지, 지오반니 바티스타(Piranesi, Giovanni Battista ; 1720-78 )
 
18세기 이탈리아의 판화가, 건축가, 이론가. 피라네지는 고전기와 고전기 이후 로마의 건축물과 그 부근을 묘사한 대형 판화를 제작함으로서 로마의 명성을 높였고, 고전 고고학에 대한 관심과 신고전주의 미술운동에 이바지했다.
 
 

피라네지는 20세에 베네치아 대사의 건물화가로 고용되었고, 당대의 판화가들의 작품을 연구하며 1745년에는 로마에 정착했다. 이 시기에 그는 동판에 섬세하고 날카로운 선을 반복함으로서 형성되는 풍부한 질감과 강렬한 명암 대비로 특징지어지는 독창적인 판화기법을 발전시켰다.

그가 평생 제작한 2000여 점의 판화 중 <감옥의 고안Carceri d'Invenzioni>시리즈는 그의 대표적인 작품 중 하나로, 이 작품에서 감옥은 고대 로마 또는 바로크 시대의 페허로 신비로운 단두대와 고문기구들로 가득 찬 환상적이고 비현실적인 공간으로 묘사됐다. 이 외에도 그의 전성기 판화인 <고대 로마>와 <로마 풍경> 등에서 볼 수 있듯이 그는 정확한 묘사, 극적이고도 낭만적인 웅장함의 표현으로 건축을 묘사했다.

 

 

 

 

바실리카(basilica)

 

고대 로마 공화정 시대에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된 대규모 건물을 지칭하며, 고대 그리스 신전을 로마식으로 발전시킨 형식이다. 콘스탄틴 대제가 기독교를 공식으로 인정한 312년 이후에 바실리카는 기독교 의식을 공적으로 행할 수 있는 교회 건물로 사용되었다. 건물의 내부는 돔이 얹혀져 있고 채광창으로 빛을 끌어들이는 원통형의 중심부와 그 주위를 둘러싼 둥근 보행회로(ambulatory)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러한 바실리카는 로마네스크와 고딕 성당의 주요 형식으로 전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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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14 - 중세 미술에 대한 인식과 고대말의 중세적 징후

중세라는 용어
서양의 4세기부터 14세기까지를 일컫는 '中世'(middle age)라는 용어는 말 그대로 중간시대라는 뜻입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사람들이 자신의 시대를 현대(modern era)라 부르고 그들이 모범으로 삼았던 그리스 로마 시대를 고대라고 부르며 그 사이의 시대를 중간시대라 일컬은 데서 유래하는 용어입니다. 물론 역사의 한 구간을 중간에 끼어있는 시대라고 인식한 것은 르네상스인들의 편견이며 자기 시대를 중심으로 한 역사인식의 결과입니다.
천년 이상의 기간에 걸쳐있는 중세를 흔히 암흑기라고 부르곤 했지만 이 또한 인간 중심적인 사고를 중시한 르네상스인들이 神중심적인 중세를 비하한 표현이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의 중세는 지중해 중심의 라틴민족과 유럽북방의 게르만민족이 융합하여 근대의 유럽국가의 원형을 형성하고 그 문화를 낳은 참으로 역동적인 역사의 연속이었습니다.

중세의 기간
중세의 시작 연대는 학자들마다 조금씩 달리 잡고 있습니다. 3세기경에 중세의 징후가 이미 나타나기 때문에 3세기를 시작으로 삼는 이도 있고, 서 로마가 멸망한 476년을 기준으로 삼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세의 공통된 특징이 기독교이므로 기독교가 공인된 313년을 중세의 시작으로 삼는 학설이 일반적입니다. 중세의 끝 경계는 분명히 자를 수 없지만 이탈리아의 경우 르네상스의 시작을 15세기로 삼으므로 그 이전 즉 14세기까지로 볼 수 있습니다.

 

 
 

중세 미술과 오늘의 미술: 사회적인 역할의 차이
중세 미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오늘의 미술을 바라보던 시각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예술 자체에 대한 자각이나, 문명의 진단이나 예견을 요구하는 현대미술과는 달리 중세의 미술은 종교적인 또는 정치적인 필요와 주문에 따라 공방에서 만들어진 제조품입니다. 중세 미술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공예나 조각들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장이의 생산품이었으며 이러한 익명성은 중세미술을 폄하하는 또 다른 요인이 되었습니다.

생활 속의 미술: 부수미술(minor art)라는 용어에 대한 비판
19세기 이후 순수미술 운동이 벌어지면서 미술은 예술자체를 목적으로 한 소위 순수 미술(fine art)과 쓸모를 위해 만들어진 응용 미술(applied art)분야로 크게 나뉘었으며 현대 미술에서 이 분류는 회화, 조각 위주의 소위 주요 미술(major art)과 공예나 상업 디자인의 부수 미술(minor art)이라는 개념과 비슷한 의미로 통용되고 있습니다. 만약 이러한 시각에서 바라보면 중세 미술은 모두 응용 미술이며 대부분이 부수 미술이니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예술은 없는 셈입니다. 그러나 미술의 범위를 넓혀 인간이 사회 생활하는 과정에서 만들어 낸 모든 조형물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중세 미술은 무궁무진한 흥미를 불러일으킵니다. 중세의 미술품은 예술가 혼자의 몸짓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종교와 사회의 주문에 의한 것이어서 당시 사회의 특별한 관심들을 정확히 나타내주기 때문입니다.

 

 
 

중세의 미술이 고대의 것과 다른 가장 큰 특징은 객관적인 사실묘사를 무시하고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힘을 높였다는 점입니다. 19세기까지만 해도 이러한 비사실적인 성격을 부정적으로 판단하였으나 20세기 초의 미술사 연구에서는 큰 전환을 이루어 추상적이고 상징적인 전달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시작했습니다.
사실적 묘사의 거부는 로마말기부터 시작된 현상입니다. 우리는 지난주에 로마황제 초상들을 살펴보면서 4세기 전반에 제작된 콘스탄티누스황제상이 (5주, 주제2, 도26) 비현실적이고 초월적인 황제 상임을 이미 보았습니다.
같은 황제의 <콘스탄티누스 개선문>(도1)에 새겨진 <황제의 훈시>(도2,3)는 같은 개선문에 새겨진 이전 황제시대의 부조(도4)양식과 현격히 다릅니다. 양감은 없어지고 평면에 깊이 새기는 방식의 낮은 부조로 변하였으며, 주변의 인물보다 훨씬 크게 묘사된 황제는 중앙에 정면으로 배치되었습니다. 황제이지만 주변인물과 비슷한 방식으로 묘사한 아드리아누스 황제의 부조(도4)와 비교하면, 4세기의 콘스탄티누스 황제 시대엔 대상을 보이는 대로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부각시키고자 하는 중요성에 따라 크기와 위치를 정하였던 것입니다.

 

도1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312-315년, 로마
 
 
 
 
도2 <황제의 훈시> 부조
 
 
 
 
도3 <황제의 훈시> 도2의 중앙부분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부조
315년경, 로마
 
 
도4 <아드리아누스 황제의 사냥 축하 의식 중
다이아나신에게의 헌주>
130년경, 대리석,,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아드리아누스 황제
로마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4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의 마차 경기장에 세워진 <데오도시우스의 오벨리스 기단부> 부조 (도5,6)를 보면 위의 변화가 더욱 심화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황제와 대신은 소위 로얄 박스로 차별화하고, 황제는 한 가운데 제일 크게 위치해 있습니다. 사실적인 요소는 전혀 없어서 모든 사람은 일률적이고, 따라서 개별화 시킬 수 없으며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은 오로지 크기가 큰 황제뿐입니다.

 

도5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오벨리스 기단부>
39년, 대리석, 콘스탄티노플의 마차 경기장
왼쪽엔 황제와 가족이 로얄 박스에, 오른쪽엔 황제와 대신들이
로얄 박스에 새겨져 있다.
도6 도5의 부분, 마차 경기를 관람하는 장면이며
윗단엔 황제와 대신들, 아랫단엔 관중석이 새겨졌다.
 
 
 
 

로마 말기에 사실성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특별한 존재를 우상화하기 위하여 택한 방법이라고 생각됩니다.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미소리움>(도7)에서는 황제에게 두광까지 씌워서 신성시하고 있습니다. 이제 황제는 보통 사람과는 완전히 다른, 절대적이고 영원한 존재이며, 미술은 그렇게 믿도록 설득하는 매개체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은 기독교 주제가 주를 이루는 중세 미술에 더욱 효과적으로 적용되었습니다. 이제 미술의 양식은 더욱 추상화되고 상징적인 힘은 더욱 강화되었습니다.

 

도7 <데오도시우스 황제의 미소리움>
또는 <데오도시우루스 황제 취임 20주년 기념 쟁반>
388년, 은, 지름 74cm 무게 15kg
마드리드, 왕립 역사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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