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panda78 > 1. 르네상스 : 얀 반 아이크 - 아르놀피니 부부의 초상


얀 반 아이크 (1390 ~ 1441) : 네덜란드 중심의 북유럽에서 활발히 활동했던 화가
 
아르놀피니부부의 초상
 
-르네상스 최초의 그림으로서 갖는 여러가지 의미가 있다
 
 
1)인간의 초상화 (이전시대에는 신 중심의 회화였다)
 
2)작품 주제 또한 인간의 삶이다
 
3)유화가 집대성되면서 정밀묘사, 사실묘사, 성격묘사가 가능해졌다
(템페라나 프레스코로는 세부묘사가 불가능함)
 
4)상징적 체계를 가지고 있다
-신방, 결혼서약,인간의 공간 : 부스제스의 사치스런 부르조아의 공간
-아르놀피니 : 신뢰성 없는 남성의 이미지를 표현하고 있다
 (실제 고증을 통해 그런한 성품이었다고 함)
-지오반니 체나미 : 세속적 여인보다 기독교 상징주의에 속하는 "성녀"와 유사한 모습으로
 그 당시 여인상을 반영하고 있다
-샹들리에에 있는 촛불 :  하느님의 눈과 같은 의미이고, 다산의 의미로 쓰이기도 한다
-창틀의 오렌지 :  주인공은 이탈리아 출신으로, 이탈리아에서 오렌지는 그 당시 수입과일이었다. 부의 상징이기도 하며, 아담의 사과를 의미하기도 한다. 곧 인간의 원죄를 뜻한다.
-벽면의 크리스탈 묵주 : 당시 결혼선물이며, 크리스탈은 순결을 뜻한다
-바닥의 두 켤레의 신발 : 맨발로 서있는 것은 땅과 육체가 만나는 그 당시 의식을 보여준다
-개 : 정절, 애정, 상대방에 대한 충실성 의미
-터키산 융단 : 부의상징
-붉은 색 침대 : 출생, 죽음을 의미하며, 묵주와 함께 부부의 완전한 결합을 뜻한다
-고딕체의 싸인 : 화가의 글씨이며, 결혼 증명서의 역할을 하고 있다
-거울 속에 비친 광경 : 유화로인해 세부적인 묘사가 가능했다
 
 

 
 거울은 인간의 눈과 같은 역할로, 거울 안에 화가 자신과 조수의 모습을 묘사했고 또한 결혼의 증인 역할도 한다.  여기에 자연과 대우주가 있다면 인간과 소우주의 관계처럼 거울과 그림이 그러하다
 거울은 곧 소우주이며 그림은 대우주라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는 서로 상호관계가 되어 인간과 자연의 관계가 표현된 그림이 되며 이것이 바로 르네상스의 정신을 보여주는 부분이 된다
 
마직막으로 이 그림의 역할을 정리해보면
 
1) 결혼을 증명하는 사진의 역할을 대신하였다.
2) 르네상스 정신이 표현된 그림이다.
 
****위대한 그림이란, 종교 문화 과학 철학의 세계관을 가시적 세계관과 합성시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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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최종] 서양미술사 44 - 모더니즘, 모더니티 : 근대 생활의 기록

19세기 후반 서구 문화의 중심지였던 멋쟁이 파리지엔들이 모여 사는 파리(지도)를 우리는 어렵지 않게 상상해 볼 수 있습니다. 그들이 다니던 길, 창가에서 내려다보이는 거리의 풍경, 유원지에서의 물놀이와 야외콘서트, 심지어 극장에서 벌어지는 멋진 쇼와 뒷골목에서 매춘부들이 신사들과 거래하는 장면에 이르기까지 그렇게 생생하게 그려볼 수 있는 것은 마네와 인상주의화가들의 왕성한 작품활동이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도1 카이유보트 <파리, 비오는 날>
1877년, 캔바스에 유채, 212.2×276.2 cm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도2 모네 <카푸신 거리>
1873년, 캔바스에 유채
캔자스 시티, 넬슨 어킨스 미술관
 
 

마네의 화실

이러한 근대성의 기록은 마네를 중심으로 한 1860년 작가들에게서 획기적인 변화를 맞게 됩니다. 나다르의 사진(도4)에서 보듯 마네는 우아하고 세련된 전형적인 도회인이었습니다. 그리고 생계를 위해 그림을 팔지 않아도 되는 처지였습니다. 그의 주위에는 새로운 근대 사회를 호흡하는 미술가들이 모여들었는데, 팡탱 라투르(Henri Fantour, 1836-1904)가 마네에게 경의를 표하기 위해 그린 그룹초상화 <바티뇰구의 스튜디오>(도3)에서 마네를 중심으로 뒷줄의 고개를 숙인 르노와르와 그 곁의 졸라, 키가 큰 바지유, 그리고 오른쪽 맨 끝의 모네 등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19세기 미술에서 마네의 역할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바지유(Jean-Frederic Bazille, 1841-1870)가 그린<콩다민 가의 화실>(도5)에서도 역시 새로운 세대의 화가들이 한가롭게 모여 담소하고 소일하는 광경이 묘사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근대화한 파리의 분위기를 포착하고자 하였습니다.

도3 팡탱 라투르 <바티뇰 구의 스튜디오>
1870년, 캔바스에 유채, 204×273.5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4 33세의 마네, 나다르 사진
 
 
 
 
도5 프레데릭 바지유 <콩다민 가의 화실>
1870년, 캔바스에 유채, 98×128.5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탈신화화

마네의 <올랭피아>(도6)의 도발적인 태도와 시선은 현재에도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합니다. 당시 『일뤼스트라시옹』지에 게재된 삽화(도9)는 당시의 야유와 놀라움의 반응을 잘 보여줍니다. 이 그림이 1865년 살롱에 출품되었을 때 도덕적으로 용인할 수 없는 그림이라는 관객들의 비난과 항의 때문에 경관을 배치하여야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 그림은 16세기 르네상스기의 명작인 티치아노의 <우르비노의 비너스>(도7)에서 영감을 얻었을 뿐 아니라, 이보다 더 외설적인 누드화가 당시에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같은 해 살롱전에 걸렸던 카바넬의 <비너스의 탄생>(도8) 이 대표적인 예라 하겠습니다. 현재에 보아도 거의 포르노에 가까운 이런 그림들이 쉽게 받아들여 진 것은 이러한 작품들이 신화나 역사화의 허울을 쓰고 있기 때문입니다.

도6 에두아르 마네 <올랭피아>
1863년, 캔바스에 유채, 130.5×190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7 티치아노 <우르비노의 비너스>
1538년, 캔바스에 유채, 119×165cm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
 
도8 알렉상드르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1863년, 캔바스에 유채, 130×225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9 베르탈 < 고양이의 꼬리, 바티뇰의 숯검뎅이>
『일러스트라시옹』 1865년 6월 3일자, 목판
 
 
마네의 올랭피아가 파리의 창부라는 사실은 너무나 명백해서 어떤 신화적인 것으로도 가릴 수가 없었습니다. 마네는 이미 1863년의 살롱에서도 <풀밭 위의 점심>을 낙선전에 발표하여 충격을 던진 바가 있었습니다. 그의 작품이 주는 충격은 느슨한 붓질과 생경한 색채, 그리고 평평한 화면의 구조 때문에 더욱 강렬하게 전달됩니다. 캔바스의 표면이 창문처럼 다른 세상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바로 창문의 형식자체를 보여주는 것, 즉 미술의 형식이 중요해지는 것도 매우 현대적인 양상이라 하겠습니다.
 
 

확대되는 도시: 가로와 철도

근대주의의 옹호자였던 보들레르는 1863년 『현대 생활의 화가』라는 글을 써서 인상주의를 '플라뇌르(Flaneur, 소요자)'의 유유자적하고 재빠른 시선과 결부시켰습니다. 쭉 뻗은 멋진 파리시가지가 만들어 진 것은 나폴레옹 3세의 2제정 때였으며, 피사로의 그림에서 보듯 <오페라 거리>(도10)는 바로 이때 만들어진 것입니다. 피사로의 그림에서 멀리 보이는 오페라하우스(도11)는 제 2제정기 때 오스망(Baron Haussmann)의 도시 정비사업의 절정을 이루는 사업으로 파리의 사통팔달의 도로가 이 곳을 구심점으로 모이게 되어있습니다.

도10 카미유 피사로 <오페라 거리, 맑음, 겨울아침>
1898년, 렝스
생드니 박물관
 
도11 파리 오페라 하우스 샤를르 가르니에
 
 
 
 
 

철도망이 확장되면서 도시는 교외선을 따라 더욱 뻗어나가게 됩니다. 힘차게 달려 들어오는 기차는 근대화의 상징이었으며 인간의 진보에 대한 19세기 과학기술의 상징이기도 했습니다. 모네(Claude Monet, 1840-1926)의 인상적인 장면인 <생 라자르>역(도12)은 증기 기관차가 '돈키호테의 심장'같은 굉음과 증기를 내뿜으며 역으로 진입하는 바로 이 순간을 그린 것입니다. 파리의 부유한 시민들은 기차를 타고 근교의 야외로 나가 숲에서 소풍하고, 야외의 음악회를 즐기는 등의 세련된 도시 생활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이 그린 많은 야외의 풍경은 이들의 생활을 잘 보여줍니다. 인상주의 그림들의 배경이 된 라 그르누이유, 상타드레스, 아르장퇴이유 같은 장소는 바로 파리인들이 새롭게 찾게 되던 야외의 유원지였습니다.

도12 모네 <생 라자르 역>, 1877년
캔바스에 유채, 하바드 포그 미술관
 
 
도13 귀스타브 도레 <베시네 야외놀이의 즐거움>
파리 역사 박물관, 1861년
 
 
도14 마네 <기차선로>, 1872-73년
93.3×111.5 cm, 워싱턴 D.C, 국립미술관
 
 
도15 모네 <라 그르누이유>, 1869년
캔바스에 유채, 73×92 cm
 
 
 
 

근대인의 시선

보들레르가 언급한 파리에서의 근대인들의 시선을 따라가 봅시다. 도16의 <카푸신 거리>의 오른쪽 모서리를 보면 이층의 발코니에서 도시화된 가로를 내려다보는 신사의 모습이 눈에 들어옵니다. 이 그림은 제 1회 인상파 전시회가 열렸던 나다르의 스튜디오에서 내려다 본 거리의 풍경입니다. 그러니까 화면의 오른쪽 발코니에 검은 터치로 간단하게 묘사된 신사는 모네의 동료일 것입니다. 아무런 시선의 제약 없이 열린 도시를 조망할 수 있는 시선의 주인공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카이유보트(Gustave Caillebotte, 1848-1894)의 <창가의 젊은 남자>를 보면(도17) 이 시선의 주인공이 한가롭게 거리를 관찰하는 파리 부르조아 남성의 시선이라는 것이 확실해 집니다. 이러한 시선에 대해서 19세기가 남성중심적인 회화라는 여성주의미술가들의 분석과 비판이 있습니다.

도16 모네 <카푸신 거리>(도2) 부분
 
 
 
도17 카이유보트 <창가의 젊은 남자>, 1875년
캔바스에 유채, 116.2×81 cm, 개인소장
 
 
 
 

시각의 주체가 누구인가라는 관점에서 보면 동일한 오페라의 관람석을 그린 그림이라도 여성작가와 남성작가의 그림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재현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마리 카셋의 그림에서 묘사된, 이제 막 사교계에 입문한 젊은 숙녀들은 분명 여러 시선을 느끼고 긴장하고 있는 모습입니다(도18). 다시 말하면 이 그림은 여성의 입장에서 느끼는 경험의 공간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비해 도19의 르노와르의 여인은 너무나 사랑스럽게 그려져 남성화가의 시선 대상으로서, 이 여인을 애무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도18 마리 카셋 <특별성의 두 젊은 숙녀>
1882년, 캔바스에 유채, 79×63.8 cm
워싱턴 DC, 국립미술관
 
도19 오귀스트 르노와르 <특별석>
1874년, 캔바스에 유채, 80×63.5 cm
런던, 코톨드 미술관
 
 
 

쇼쇼쇼: 도시의 볼거리

인상주의는 일반적으로 풍경화가 대부분이지만 에드가 드가는 도20, 21에서 보듯 파리의 오페라나 밤무대의 인공조명아래 놓인 무희들의 모습을 더 즐겨 그렸습니다. 쇼와 음악회와 조명이 어우러진 스펙타클한 공간이 그의 관심이었던 것이지요. 드가는 매우 놀라운 구성능력을 가진 화가였는데 그의 그림은 마치 우연히 잘못 찍힌 사진의 프레임과 흡사합니다. 그래서 그림들은 마치 일상에서 마주하는 단편적인 시각의 조각들처럼 보입니다. 그의 이러한 구성은 물론 사진의 영향이기도 합니다. 사진의 일상화 즉 순간적인 이미지를 포획하여 소유한다는 것은 근대인들의 시각체계에 근본적인 변화를 불러일으켰습니다. 근대인들은 이러한 사진의 시선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인상주의 이후 미술가들의 대담한 화면구성은 19세기 유럽에서 높은 인기를 누렸던 일본 미술 '자포니즘'의 영향을 받은 것이기도 합니다. 도22의 안도 히로시게(Ichiryusai Hiroshige, 1797-1858)의 일본 목판화에서 보이는 예상치 못한 화면의 공간 구성은 19세기 후반 유럽의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배경에 일본판화가 붙어 있는 마네의 그림 <에밀 졸라>(도23)는 이러한 당시의 유행을 잘 보여줍니다.

 

도20 드가 <오페라의 오케스트라>
1870년경, 캔바스에 유채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21 드가 <압상트>
1975-76년, 캔바스에 유채, 92×69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22 안도 히로시게 <비>
1832-34년, 22.3×34.7cm
개인소장
 
도23 마네 <에밀 졸라의 초상>
1867-68년, 캔바스에 유채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인상주의의 정치성

인상주의는 사실을 근대인의 시선으로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기록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집니다. 그러나 확실한 것은 인상주의 회화가 프랑스 근대사에서 가장 끔직한 사건의 하나인 파리 코뮌 진압과 때를 같이 하여 형성되었음에도 이런 사실을 거의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독일과의 전쟁에서의 패배, 굴욕적인 조약, 그리고 폐허로 변한 파리 시가지 등... 프랑스의 인상주의는 제2제정기의 이 끔찍한 내전을 겪은 파리의 모습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몇 년만에 아주 망각한 것처럼 화면에 드러내지 않습니다.

도24에서 보듯 튈르리 궁전은 당시 파괴되어 그 후 15년 간이나 복구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모네의 튈르리 궁전 그림(도25)에서는 그런 흔적을 찾기 힘듭니다. 우리는 이러한 사실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까요. 아름다운 인상파의 풍경에서 어떻게 정치적인 메시지를 읽을 수 있는 것일까요. 인상주의 미술은 분명 우리에게 순수한 미술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나 정치적인 주장만큼이나 비정치적인 무관심도 사실은 나름대로의 이념과 정치적인 토대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인상주의는 19세기 혁명으로 승리한 부르주아들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한편으로 이러한 망각과 은폐는 인상주의 화가들이 1870년 이후에 급등하게 된 프랑스의 국가적인 자존심 회복에 동참한 결과이기도 할 것입니다.

도24 파리 코뮌에 불에 탄 튈르리 궁전
 
 
 
도25 모네 <튈르리의 정원>, 1876년
캔바스에 유채, 54×73 cm, 파리, 마르모탕 미술관
 
 
 
 

"1863년 '낙선전'은 현대미술의 기점으로 그리고 1874년 인상주의화가들의 첫 인상파 전시회는 흔히 주류에 저항하는 아방가르드 미술운동으로 높이 평가되어 왔습니다. 그리고 인상주의는 한동안 그 사회적인 문맥보다는 순수미술 그 자체로 우리에게 기억되어 왔습니다. 20세기 모더니즘의 관점에서 말입니다.그러나 흔히 알려진 것처럼 인상주의 미술이 오랫동안 대중들의 무시를 받았거나 소외되었던 미술은 아닙니다. 듀랑 루엘(Durard-Ruel, 프랑스와 저명한 화상가문으로 Paul Durard-Ruel이 인상파 화가와 관련이 깊음)과 같은 전문 화랑에서 이들의 작품은 이미 활발하게 거래되고 있었으며, 이미 오래전에 아카데미 미술은 시대에 뒤떨어진 그림이 되었습니다. 확실한 것은 이들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에서 '산업사회', '자본주의', '개인주의'와 같은 우리시대의 자화상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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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43 - 리얼리즘과 아방가르드의 탄생

여기 두 노동자가 채석장에서 돌을 채취하고 있습니다(도1,지도). 해머를 두드리는 나이든 오른쪽 인물과 돌덩이들을 힘써 들어 올리는 젊은 남자는 시선을 돌린 채 묵묵히 자신의 일에 열중하고 있습니다. 화면을 꽉 채운 인물들의 단순한 윤곽선과 거친 듯한 무채색의 표면으로 인해 화면에 바짝 다가선 두 인물의 현장감은 더욱 고조됩니다. 오늘날 우리들이 보기에 이 그림에는 '건강한 노동의 모습'이라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사회적인 메시지가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그림이 1850-51년 살롱에 출품되었을 당시에는 노동자의 모습을 화면에 당당하게 그렸다는 것만으로도 큰 문제가 되었습니다.

도1 쿠르베 <돌깨는 사람>, 1849년, 1850-51년 살롱 출품
캔바스에 유채, 2차 대전으로 파괴
 
 
도2 매독스 브라운 <노동>, 1852-63년, 캔바스에 유채
137×197.3cm, 맨체스터 미술관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가 일으킨 스캔들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19세기 중반 서유럽의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1840년대에 이르러 프랑스에서는 산업혁명의 결과가 눈에 띄게 분명해졌습니다. 그 결과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격차는 더욱 벌어지게 되었지요. 노동자들은 프랑스 혁명때부터 봉건질서를 넘어뜨리기 위한 시민혁명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으며, 들르크르와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도3)에서 보듯이 1830년 공화정을 다시 세울 때에도 학생, 지식인과 함께 희생을 감수하였습니다. 그러나 1830년 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루이 필립은 금융가나 사업가들의 이익을 중시하는 금권정치를 펼쳤기 때문에 노동자나 농민들의 불만은 점차 고조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당시 빅토리아시대의 번영을 구가하고 있던 영국 역시 노농자의 문제가 중요했는데, 매독스 브라운(Ford Maox Broun, 1812-1893)의 <노동>(도2)은 바로 이러한 시대를 반영하고 있습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을 발표한 것이 1848년 런던이었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습니다.

프랑스에서의 이러한 갈등은 결국 1848년 혁명으로 폭발하게 됩니다. 메이소니에(Jean-Louis-Ernest Meissonier, 1815-1891)의 <바리케이트>(도4)는 1848년의 노동자 봉기의 현장을 생생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노동자, 농민들의 불만이 점차 사회적인 문제로 등장하던 시기에 그려진 쿠르베의 <돌깨는 사람>은 그 소재만으로도 충분히 위협적이었던 것입니다. 20세기 공산주의의 실험과 실패를 경험한 지금의 상황에서 되돌아볼 때 사회주의 사상이 형성되는 19세기 중반은 매우 중대한 역사적인 지점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도3 들라크르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1830년, 캔바스에 유채, 260×325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4 메이소니에 <바리케이드, 모르텔르거리 >
1849년, 1850-51년 살롱, 캔바스에 유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쿠르베가 자신의 고향 오르낭을 배경으로 그린 대작 <오르낭의 매장>(도5)은 발표 당시부터 너무나 혁신적인 작품으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으며, 그 후로는 19세기 리얼리즘의 대표작으로 인정받아 미술사의 한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오르낭의 시골뜨기들을 이렇게 큰 화면에 그려야 할 필요가 있는가? 이러한 질문은 <돌깨는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던져볼 수 있겠지요. 쿠르베의 <오르낭의 매장>에 등장하는 다양한 부류의 인간군상들을 보면 1842년 발자크의 『인간희극』에 나오는 19세기 전반 부르조아혁명 시기 인간들의 파노라마를 접하는 것 같습니다. 일부러 좌우로 죽 늘어놓는 형식은 영웅을 중시하는 낭만주의 미술의 구성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습니다. 당시에 부상하던 '인민의 미술 (art of the people)', '평등주의(egalitarism)'를 반영하는 것일까요? 이 그림을 의심하는 파리 부르조아 관객들은 시골사람 쿠르베가 부르조아들의 '매장'을 암시하였다고 여겼습니다.

도5 쿠르베 <오르낭의 매장>, 1849-50년, 캔바스에 유채
315×663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19세기 중반 농촌풍경을 즐겨 그렸던 프랑스와 밀레의 노동자상에 대해서도 쿠르베처럼 여러 가지 다른 해석들이 있었습니다. 앞 주제에서 이미 살펴보았던 것처럼 밀레의 풍경화는 여러나라에서 매우 평화로운 전원풍의 복고양식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그런 한편에서 <씨뿌리는 사람>(도6)과 같은 인물화는 노동자, 농민의 힘을 부각시키는 그림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러시아와 같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밀레의 농민상이 찬미되었던 것도 바로 이러한 이유일 것입니다. 어찌되었든 농촌출신의 밀레나 쿠르베의 미술은 본질적으로 세련된 파리인들의 미술운동이었던 인상주의와 그 성격이 다를 수밖에 없었지 않았나 합니다.

도6 밀레 <씨뿌리는 사람>, 1850년
캔바스에 유채, 101.6×82.6 cm
보스톤 미술관
 
도7 밀레 <일하러 가는 길>, 1851년
캔바스에 유채, 55.5×46 cm
 
 
 
 
미술에 있어서 '리얼리즘'이라는 용어는 쿠르베가 1855년 파리 박람회에서 자신의 그림이 거부되자 전시관을 짓고 '사실주의'라는 이름으로 反官展을 열었던 데서 기인합니다. 쿠르베는 1861년 다음과 같이 선언하였습니다.

 

“그림은 본질적으로 구체적인 예술이다. 그러므로 그림은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것을 표현할 수 밖에 없다. (....)추상적인 것, 보이지 않는 것, 존재하지 않는 것은 그릴 수 없다.”

 

'자신의 시대에 존재하는 것'이 리얼리스트들의 구호였습니다. 쿠르베는 오랫동안 비현실적인 종교화나 신화화만을 중시하던 미술을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리얼리티란 눈으로 보고 경험하는 현실을 넘어설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지요. 그런점에서 그의 태도는 당시 콩트나 프루동처럼 실증적이며 유물론적입니다. 쿠르베의 리얼리즘은 '동시대'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사회비판적인 면을 지니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나 보다 정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었던 미술가는 오노레 도미에(Honore Daumier, 1808-1879)였습니다.고야를 연상시키는 풍자적인 힘을 지닌 도미에의 판화와 삽화는 당시의 신문이나 여러 잡지에 개재되어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었습니다(도8,9). 뿐만 아니라 그의 뛰어난 비판적인 시선은 점토로 만든 유명인들의 커리커춰에서 유쾌한 힘을 발휘합니다(도10,11).

도8 도미에 <메넬로사와 빅타>
『고대사』연작 중, 1841년
파리, 국립도서관
 
 
도9 도미에 <런던 회담>
1832년, 채색 석판화,
미시간대학 미술관
 
도10 도미에 <기조의 초상>
1833년, 채색 점토
파리, 오르세이미술관
 
도11 도미에 <기욤의 초상>
1832-33년, 채색 점토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시의 발달, 황폐한 농촌, 심화되어 가는 도시민간의 경제적인 격차는 근대사회가 안고 있는 깊은 모순가운데 하나일 것입니다. 도12의 <삼등열차>에서처럼, 1860년대의 비좁고 열악한 열차 한켠을 묘사한 그림에서는 이러한 사회적인 갈등이 예리한 시선으로 포착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평생 프랑스 근대사회의 모순에 대해서 비판의 시각을 놓지 않았던 도미에는 사회적 사실주의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작업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도12 도미에 <삼등열차>, 1860-63년
캔버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한편으로 쿠르베는 미술사에 있어서 새로운 유형의 미술가상을 보여줍니다. 그는 1855년 사실주의 전시회에 자신의 미술을 회고하는 대작 <화가의 스튜디오, 알레고리>(도13)을 전시합니다. 고향 풍경을 그리는 자신을 중심으로, 진실을 상징하는 누드의 여인, 그리고 화가가 교류하였던 여러 동료들의 초상이 등장하는 커다란 그림입니다. 그러나 그림은 매우 우화적이어서 작가의 의도가 분명하게 드러나고 있지는 않습니다. 쿠르베가 리얼리즘을 주장했음에도 아직 그의 회화는 과거의 역사화와 '근대성의 기록' 사이의 경계에 있음을 새삼 느끼게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러한 쿠르베의 태도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미학적인 선택과 판단에 의해 작업하는 '전위화가(아방가르드)'의 출현을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도14의 자화상에서 느낄 수 있듯이 그는 반항정신으로 가득했으며, 파리 브르주아 예술관객의 엘리트 의식에 정면으로 도전함으로써 기존의 예술에 저항하였습니다. 이러한 저항의지는 현대에 와서 매우 중요한 예술의 속성이 되었습니다. 쿠르베 이후로 예술의 역사는 사회의 '전위'로서 나름대로의 특권적인 영역을 확보해 나가는 과정이기도 합니다.

도13 쿠르베 <화가의 스튜디오, 알레고리>
1855, 캔바스에 유채, 361×598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14 쿠르베 <검은개와 자화상>
1844년, 1842년 사인, 캔바스에 유채
파리 뮤제 드 프티 팔레
 
오늘날 예술가가 사회적인 관례에 앞서 금기의 영역에 끊임없이 도전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것은 예술가들의 의무이자 특권인 것이지요. 과거 르네상스 시기의 미술가들이 인문학적인 식견을 가지고 자신들의 작업을 당당하게 생각했다지만, 교황이나 군주들의 후원을 벗어나 독자적인 기반을 주장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오랜 인류의 역사에서 현대처럼 예술가의 자율성이 이처럼 강조된 시대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쿠르베 이후의 인상주의, 추상회화로 이어지는 '전위미술'이 예술로서 특권을 누리고 있는 것과 비교해 볼 때 도16과 같은 19세기 아카데미 미술은 한동안 키치처럼 취급되었습니다. 이러한 대접은 17세기 푸생이래 다비드까지 이어지는 아카데미 화가에 대한 당시의 융숭한 존경과 접대에 비한다면 격세지감을 느낄 만 합니다. 왕실이나 귀족을 상대로 하는 미술은 시민사회의 부상으로 더 이상 환영받을 수가 없게 됩니다. 이러한 변화는 1830-40년대에 이르러 분명하게 나타났으며 관변미술은 이제 변화를 모색해야 했습니다. 그들은 점차 과거의 지나치게 장엄하고 교훈적인 양식보다는 풍속화적인 요소와 선정적인 장면을 섞어 절충적인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품은 토마스 쿠튀르의 <타락한 로마>(도15)입니다. 이 작품은 아마도 19세기 살롱에서 가장 성공한 작품 중에 하나일 것입니다. 내용은 로마인들이 방탕한 생활에 빠져 몰락하게 되었다는 다소 교훈적인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만, 작품의 중심에는 당시의 고급창부(마네의 올랭피아에서는 더욱 확연하게 나타나지만)가 그려져 있어 역사와 현실묘사의 절충을 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쿠튀르는 당시의 평가와는 상반되게 20세기에 와서 한때 잊혀졌지만, 그의 아틀리에서는 많은 미술가들이 배출되었으며 마네 역시 그 중 한 명이었습니다. 그러나 현재 이 작품은 다시 오르세이 미술관의 가장 눈에 띄는 장소에 걸려있어, 작품에 대한 평가와 관심이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게 됩니다.

도15 토마스 쿠튀르 <타락한 로마>, 1847년
캔바스에 유채,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16 부게로 <님프와 사티로스>
1873년, 캔바스에 유채, 260×180 cm
 
 
 
 

쿠르베의 <돌깨는 사람>(도1)이나 <오르낭의 매장>(도5)과 같은 작품들은 사회의 현실을 다룬다는 점에서 비판적인 내용을 담을 수 있다는 점을 앞에서 살펴보았습니다. 그러나 쿠르베의 리얼리즘은 비판의식이기보다는 주변을 대하는 미술가의 태도의 변화라 하겠습니다. 도15의 <송어>에서처럼 줄에 걸린 물고기를 대상으로 삼아 관찰하고 그것을 화면에 꽉 차게 그려내는 미술가의 의도는 과거 역사화를 그리며 교훈을 찾던 미술가의 그것과는 판이합니다. 또한 도18의 <해변>을 보면 쿠르베가 붓보다는 나이프를 많이 사용하여 두툼하게 물감을 쓰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돌깨는 사람들>이나 <오르낭의 매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렇게 두텁고 밀도 있는 캔바스위의 물감자국은 회화라는 장르 본연의 물질성을 크게 강화시킵니다. 바로 이러한 점은 쿠르베의 <돌깨는 사람>이 같은 노동을 다루면서도 매독스 브라운의 설명적인 작품과 달랐던 이유이기도 합니다(도1.2)

도17 쿠르베 <송어>, 1872년, 캔바스에 유채
52.5×87 cm, 취리히, 쿤스트하우스
 
 
도18 쿠르베 <해변>, 1865년, 캔바스에 유채
53.5×64 cm, 쾰른, 발라프 리카르츠 미술관
 
 
 
 

쿠르베에서 싹이 튼 현실과 사건을 들여다보는 냉정한 리얼리즘의 시선은 '죽음'을 묘사하는 방식에서 가장 잘 드러납니다. 신고전주의나 낭만주의의 미술에 있어서 죽음은 이상화되고 영웅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15주 주제1과 2참조). 그러나 마네의 죽은 투우사(도19)는 보는 사람을 충격 속에 몰아넣는데, 이러한 이유는 숭고한 명분도 없이 죽음 그 자체만을 대면할 때 느끼는 전율과 같은 것입니다. 쿠르베의 미끼에 걸린 송어(도17)를 대할 때의 느낌과 비슷합니다. 쿠르베가 주장하였던 리얼리즘, 즉 '동시대성'과 캔바스의 '표면성'을 보다 현대적인 형태로 진전시킨 장본인은 바로 에두아르 마네(Edouard Manet, 1832-1883)였습니다. .

도19 마네 <죽은 투우사>, 1864년, 캔바스에 유채
76×153.3 cm, 워싱턴, 국립박물관
 
 
도20 마네 <황제 막시밀리앙의 처형>
1867년, 캔바스에 유채, 252×305 cm
만하임, 쿤스트할레
 
마네의 회화는 그 주제를 다루는 방식이나 화면에 물감을 칠하는 형식에서 분명 '우리들의 시대'에 들어선 듯한 느낌을 보다 분명하게 합니다(마네에 대해서는 다음 주제에서 다시 다루도록 하겠습니다). 흔히 마네를 인상파로 여기지만 그는 모네, 르노와르와 같은 인상주의 화가들과 함께 전시회를 여는 것을 꺼렸으며 외광 풍경화를 주로 그리지도 않았습니다. 그는 공화주의자로 루이 나폴레옹의 제2제정에 대해 줄곧 냉소적인 시각을 지니고 있었는데, <황제 막시밀리앙의 처형>(도20)에서 보듯 그의 정치성과 화면의 표면성은 아슬아슬한 경계에 있는 것 같습니다. 쿠르베에서 마네를 거치면서 미술은 바야흐로 현대로 진입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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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42 - 신화에서 풍경으로

풍경화는 다른 어떠한 그림보다도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장르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로마시대의 벽화나 중세의 필사본에서 보면 고대인들은 벽에 장식 삼아 생명감 있는 정원풍경을 묘사하여 즐기기도 하고 성서적인 이야기 중에 배경으로 자연을 세밀하게 묘사하는 등 자연에 대해 끊임없는 관심을 지니고 있었습니다(도1,2). 그러나 화가들이 화구를 메고 야외로 나가 아름다운 자연을 그리는 것이 가치 있는 일이 된 것은 19세기(지도) 이후의 일입니다. 오랫동안 미술의 소재로 비중 있게 다루어진 것은 자연보다는 인간이었습니다. 특히 교훈적 가치를 중요시 여겼던 역사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인체묘사가 필수적이었는데, 17세기 푸생의 작품(도3)에서 보면 자연은 화면의 중심을 차지한 인물에 비해 배경으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을 모든 것의 기본으로 중시한 계몽주의 사상은 19세기 풍경화가 등장하는데 중요한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더군다나 인간의 감정이 도덕적인 이상이나 교훈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되면서 풍경화는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됩니다.

도1 <리비아의 별장 정원그림>, 높이 2m, 기원전 20년경
로마, 테르메 국립박물관
 
 
 
도2 랭부르 형제 <10월>, 1409-15년
『베리 공의 호화로운 기도서』
상티에, 콩데 박물관
 
도3 푸생 <아르카디아 에고>, 1638-40년
파리, 루브르 박물관
 
 
 
 

19세기 풍경화의 만개에 앞서 처음으로 독자적인 풍경화가 등장하였던 곳은 17세기 네덜란드였습니다(13주 주제2 참조). 청빈함을 중시하던 이 지역의 신교도들은 도4의 고이엔의 그림에서 보듯이 자신들의 삶의 터전인 바다와 낮은 구릉들을 소박하고 정감 있게 그린 풍경화를 애호하였습니다. 또한 18세기의 로마와 베네치아의 화가들은 여행취미에 맞춰 유서 깊은 도시의 풍광을 많이 그렸는데(14주 주제3참조)(도5), 이러한 풍경화의 등장은 신흥 상인층이나 여행객들과 같은 수요계층의 형성과 관련이 있었습니다.

도4 얀 반 고이엔 <도르트레이트 풍경 >, 1644년
나무패널에 유채
 
 
도5 카날레토 <석조장>, 1726-30년
캔바스에 유채, 124×163 cm, 런던, 국립미술관
 
 
 

19세기 낭만주의자들은 자연의 외적인 모습 이면에 신의 질서나 우주의 화합과 같은 진실이 숨어 있다고 믿었습니다. 자연에 초월적인 정신성을 투영하는 범신론적인 풍경화는 독일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제작됩니다. 18세기 이후 독일은 고전주의 미학을 선도하였고 괴테나 쉴러와 같은 걸출한 낭만주의 문학가들을 배출하였지만 미술에서는 이렇다할 국제적인 조류를 만들어내지 못하였습니다. 대신 당시 새롭게 인식되기 시작한 독일의 민족주의 정서와 결합한 종교성이 짙은 미술이 주를 이루었습니다(도6,7,8). 오토 룽게(Philipp Otto Runge, 1777-1810)의 <아침>(도6)은 당시 독일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다소 수수께끼 같은 종교화입니다. 종교적 순수함을 강조한 상징성이 강한 작품이라 하겠습니다.

도6 오토 룽게 <아침>, 1808년
캔바스에 유채, 10985.4 cm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도7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자작나무 숲의 성당>
1809-10년, 캔바스에 유채, 베를린, 슐로스 칼로트부르그
 
 
 
도8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바닷가의 수도승>, 1809-10년
캔바스에 유채, 110×171 cm, 베를린, 국립미술관
 
 

풍경화에 있어서 독일의 음울한 풍토를 인상깊게 반영한 화가는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입니다. 폐허가 된 고딕성당을 찾는 순례자들을 그린 <자작나무 숲의 성당>(도7)은 인간 존재의 무상함을 넘어서 우주적인 고독까지 느끼게 하는 신비스런 그림입니다. 이처럼 그의 그림에는 자연과의 영적인 교감이 드러나는데 <바닷가의 수도승>(도8)은 그러한 독일 낭만주의 미학을 매우 잘 보여주는 작품입니다. 탁트인 검은 바닷가의 수도승은 마치 점처럼 표현되어 있어 자연의 불가사의 한 힘과 인간의 유한함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무한한 자연에 대한 경이감, 비극적인 슬픔, 고립감은 낭만주의 시대의 미학인 '숭고미'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습니다.

 
 

신대륙인 미국에서도 광활한 자연을 바탕으로 한 낭만주의 풍경화가 활발하게 그려졌습니다. 이들 풍경화가들은 주로 허드슨 계곡의 개척지에서 작품활동을 하였기 때문에 '허드슨강 화파'라 부르지만 그들을 지역적으로 한정할 수는 없습니다. 토마스 콜(Thomas Cole, 1801-1848)의 작품(도9)을 보면 미국의 자연은 경이의 대상으로, 그리고 세속을 넘어서는 진실을 담고 있는 신의 그릇처럼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자연 앞에서 압도당할 때 느껴지는 종교적인 신심과도 흡사합니다. 비어스타트 (Albert Bierstadt, 1830-1902)는 로키산이나 요세미티와 같은 서부를 직접 여행하고 그곳에서 받은 감동을 화폭에 담아낸 화가로 유명합니다(도10). 미국의 유명한 국립공원들이지요. 이러한 사실을 볼 때 미국 낭만주의 풍경화는 서부 개척기의 미국역사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9 토마스 콜 <폭풍이 지나간 후 홀리요크 산에서 바라본 광경>
1836년, 캔바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도10 알버트 비어스타트 <로키산의 정경> 1863년
캔바스에 유채,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
 
 
 
 

19세기 풍경화는 터너와 컨스터블 같은 걸출한 풍경화가들을 배출한 영국에서 가장 활발하게 제작되었습니다. "자연으로 돌아가라"는 장 자크 루소의 철학과 영국의 호반시인들의 활동은 이전의 버려 두었던 영국자연에 대해 다시금 눈을 돌리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영국의 부유한 농가출신이었던 콘스터블 (John Constable, 1776-1837)은 주로 자신의 영지주변을 성실한 눈으로 그려냅니다. 그는 직접 야외로 나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자연의 갖가지 표정을 담아내고자 하였습니다. 특히 변화가 심한 영국의 구름의 변화를 관찰한 그의 스케치를 대하자면 마치 기상관이 날씨를 관찰하는 듯합니다(도11). 스톤헨지의 인상을 수채화로 그려낸 습작(도12)에서는 자연에서 받은 첫 느낌과 인상을 중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도11 컨스터블 <구름습작>, 1822년
종이에 유채, 30.5×49 cm, 런던, 코톨드 미술관
 
 
도12 컨스터블 <스톤헨지>
1820-31년사이, 수채, 윌트셔
 
 
 
 

그러나 컨스터블은 그림의 마지막 작업은 화가의 작업실에서 하였습니다. 그렇게 완성된 대작의 풍경화에는 거친 나무둥치들의 질감과 바람에 따라 살랑거리는 작은 잎들의 반짝임이 그대로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습니다. 그의 <건초마차>(도13)가 파리의 살롱에 출품되었을 때 갈색톤의 고전주의 풍경화에 익숙해 있던 프랑스 화가들은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들르크르와가 컨스터블의 그림을 보고 이미 완성된 <키오스섬에서의 학살>에 붉은색의 덧칠을 하였다는 것은 잘 알려진 일화입니다.

컨스터블은 자연은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며 그 안에는 진리가 담겨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컨스터블의 풍경화를 보면 화가의 관심이 눈에 포착되는 시각적인 표면 그 자체에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컨스터블 이전의 어떤 화가도 실제 자연에서 풍기는 싱싱한 초록색의 느낌을 그렇게 풍부하게 그려내지는 못했습니다. 아카데미 화가들은 눈으로 보기보다는 관례적으로 가까운 곳에는 갈색톤을 사용하고 뒤로 멀어지는 배경에는 푸른색을 사용하였습니다. 그러나 도14의 그림을 자세히 보면 컨스터블은 그러한 공식을 따르기보다는 눈에 보이는 대로의 원색들을 사용하였을 뿐 아니라, 빛이 반사되는 것을 묘사하기 위해 서로 초록색과 병치되는 붉은색과 흰색의 반점들을 과감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의 이러한 방식은 프랑스의 바르비종 화가와 훗날 인상주의 화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게 됩니다.

도13 컨스터블 <건초마차>, 1821년
캔바스에 유채, 130×185 cm, 런던, 국립미술관
 
 
도14 컨스터블 <수문>, 1823-24년경
캔바스에 유채, 141.7×122 cm
필라델피아 미술관
 
 
 

영국의 또 다른 걸출한 풍경화가 윌리암 터너(Joseph William Turner, 1775-1851)는 보다 서사적이고 영웅적인 자연의 한 순간을 포착하고자 하였습니다. 클로드 로렌을 연상시키는 초기의 작품 <카르타고 제국의 건설>(도15)을 보면 그가 전통적인 역사화를 중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터너는 주로 폭풍우가 몰아치는 바다의 장엄함이나 숭고함에 깊이 매료되어 있었습니다. 물론 바다는 인간을 한 순간에 파멸시키는 엄청난 힘을 지녔기 때문에 많은 낭만주의 화가들의 사랑을 받았던 주제였습니다. 도16의 <바다에 던져진 노예>는 몇 십년전 제리코의 <메두사의 뗏목>을 연상시키는 바다의 재난을 다룬 작품입니다. 이 그림은 보험을 노리고 노예들을 바다에 던져버린 노예상들의 비인간적인 처사를 주제로 다룬 것이지만, 이 같은 주제는 크게 원형을 이루며 소용돌이치는 색의 소용돌이 속에 파묻혀 버린 것 같습니다. 즉 터너는 무엇보다도 비극적인 사건을 담아낼 전체적인 색채의 효과에 중점을 두었던 것입니다.

도15 터너 <카르타고 제국의 건설>, 1815년
캔바스에 유채, 155.5×232 cm, 런던, 영국미술관
 
 
도16 터너 <바다에 던져진 노예. 태풍의 전조>
1840년, 캔바스에 유채, 보스턴 미술관
 
 
 
 

유럽에서는 17세기 과학의 혁명이후 어느 때보다도 광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는데 터너는 특히, 색채는 빛과 어둠이 서로 경합하는 가운데 발현된다고 주장한 괴테의 이론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고 합니다. 어두움과 밝음, 서로 다른 색조들이 서로 부딪히며 녹아드는 형태를 통해 터너는 자연의 광폭함을 유감없이 표현할 수 있었던 것이지요. 이러한 터너의 풍경화는 <비, 증기, 속도>(도17)에서 보듯이 점차 형태를 무시하고 보이는 것의 인상 그 자체만을 중시하는 경향으로 나아갑니다. 그 효과는 모네의 인상주의(도18)와 흡사합니다. 이는 현대적인 의미에서의 색채추상과 다를 바가 없다고 하겠습니다.

도17 터너 <비, 증기, 속도>, 1844년
캔바스에 유채, 90.8×121.9 cm, 런던, 국립미술관
 
 
도18 모네 <인상. 해돋이>, 1872년
캔바스에 유채, 48×63 cm
파리 마즈몽탕 미술관
 
 

풍경화의 영역이 확장되어가던 영국에 비해, 프랑스에서는 자연은 영웅적인 이야기를 위한 무대여야 한다는 고전주의 전통이 오래 지속되었습니다. 그러나 신고전주의식의 도덕적 윤리나 정치적인 관심이 점차 후퇴하면서 자연주의적인 경향의 독립된 풍경화가 점차 독자적인 장르로 부상하게 됩니다.

파리 교회의 퐁텐블로 숲 근처에서는 루소나 코로와 같은 화가들이 모여 자연을 벗삼아 사실적인 풍경화를 그리게 되었는데, 이들을 바르비종 화가들이라고 합니다. 현장에서 직접 관찰하고 경험한 자연의 모습은 그들 작품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카미유 코로(Camille Corot, 1796-1875)는 전통적인 아카데미 교육을 받았지만 자연의 풍경 그 자체를 더 중시하였습니다.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도중에 그린 도19와 같은 풍경화를 보면 그가 고대의 유적이나 거장을 묘사하기보다는 솔직한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더 즐겼음을 알 수 있습니다. 파리로 돌아온 후에는 <님프들의 춤>(도21)처럼 고대 전원시를 소재로 한 신화적인 풍경을 주로 그렸지만 도20에서 보듯, 말년에 그린 소박한 풍경화의 풍부한 대기의 느낌과 분방하고 가벼운 터치는 훗날 시슬리나 피사로의 풍경화를 보는 것 같습니다.

도19 코로 <로마 파르네제 정원풍경>, 1826년
캔바스에 유채, 25.1×40.6 cm, 워싱턴 D.C, 필립콜렉션
 
 
 
도20 코로 <망트 대성당>
1865-69, 캔바스에 유채
렝스, 생 드니 미술관
 
 
도21. 코로 <아침. 님프들의 춤>, 1850년
캔바스에 유채, 97.1×130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바르비종 화가들이 보여준 이러한 자연에 대한 감수성의 발견은 19세기 중반의 사실주의와 일맥상통하는 점이 있습니다. 자신의 현실이나 주변을 돌아보게 한다는 점에서 말입니다. 끝없이 펼쳐진 풍경 속에서 일하는 농부들의 세계가 당당하게 펼쳐진 밀레의 농촌풍경화는 현실적인 시각이 반영된 새로운 풍경화였습니다. 사실 밀레(Jean-Fransois Millet, 1814-1875)의 풍경화는 너무나 많은 복제품을 통해 잘 알려져 있어서 그림의 진면목을 느끼기가 쉽지 않습니다. 밀레의 농민그림은 보는 사람들의 시각에 따라서 목가적인 전원풍경으로 보이는가 하면, 혁명적인 노동자상을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해석은 작가 자신의 표현이라기 보다는 보는 사람들의 입장에 기인한 결과였겠습니다. 어찌되었든 컨스터블의 농촌풍경이나 밀레의 풍경화가 19세기 산업혁명으로 번창한 도회생활에 염증을 느낀 도시인들의 향수를 반영한 것임에 틀림이 없겠습니다.

도22 밀레 <만종>, 1857-59년
캔바스에 유채, 55.5×66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도23 밀레 <이삭줍기>, 1855-57년, 캔바스에 유채
83.5×110 cm, 파리, 오르세이 미술관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19세기 낭만주의 풍경화는 처음에는 인간의 상상력에 가치를 부여하는 서사적이고 범신론적인 풍경이 주를 이루었으나 점차 눈에 보이는 것 경험할 수 있는 것 자체에 더 큰 의미를 두는 경향으로 변화하였습니다. 컨스터블이나 바르비종화가들의 풍경화는 이처럼 신화의 시대가 끝나고 사실주의가 도래하는 것을 예고합니다. 이제 다른 어떤 교훈적인 주제보다도 자연의 순간적인 느낌과 빛이 사물에 닿는 순간을 포착하는 것이 다음 세대의 화가들에게는 중요한 과제가 되었습니다. 인상주의 미술은 바로 이러한 시각적인 실증성에 기반을 둔 풍경화였습니다. 부댕 (Eugene Boudin, 1824-98)이나 도비니 (Charles-Fransois Daubigny, 1817-1878)는 전환기의 시각을 잘 보여줍니다. 물론 이러한 사실적인 풍경화의 부상 이면에는 현실적이고 비정치적인 주제를 선호하는 중간계급들의 문화층이 두터워지고 있었다는 점을 간과할 수 없을 것입니다.

도24 도비니 <옵트보의 수문>, 1859년
캔바스에 유채, 49×73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25 부댕 <투르빌 해변>, 1865년경
캔바스에 유채, 67.3×104.1 cm, 미네아폴리스 인스티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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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panda78 > 서양미술사 41 - 오리엔탈리즘 : 제국주의의 시선

미지의 장소와 지나가 버린 먼 과거는 인간의 무한한 상상력을 자극합니다(지도). 이국적인 것에 대한 열렬한 호기심은 이처럼 상상력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의 중요한 특징이었습니다. 여기 보시는 지로데-트리오종(Anne-Louis Girodet de Roncy, 1767-1824)의 <아탈라의 매장>(도1)은 아메리카의 황야를 배경으로 종족이 다른 인디안 청년과 처녀의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이 그림의 소재가 된 샤토브리앙의 소설 『아탈라』는 미국에 가본 적이 없는 프랑스인들의 낭만적인 환상을 자극하여 큰 인기를 끌었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이 그림에서 비극적인 최후를 맞은 연인은 한눈에 봐도 인디언의 생김새가 아닙니다. 더군다나 기독교의 사제복장의 노인이 등장하고 동굴 밖에는 십자가가 세워져 있어서 여자의 순결한 죽음과 기독교적인 신성함이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곧 알 수 있습니다. 이 그림이 재현하고 있는 것이 실제 인디언들의 모습과 무관한 것은 더 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도1 지로데 <아탈라의 매장>, 1808년, 캔바스에 유채,
파리, 루브르 박물관
 
 
 
 
 
언젠가 한국전쟁을 소재로 한 미국 영화에서 농부들이 베트남식 모자를 쓰고 나오는 것을 보고 놀란 적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실수는 단순한 외형적인 표현의 문제만은 아닙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서구인들이 동양인을 자신과 다르다고 생각되는 타자로 대하는 인식과 관념의 결과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19세기는 유럽의 열강들이 일찍이 발전한 산업혁명을 기반으로 자신들의 영토와 시장을 확장하던 시대였습니다. 영국은 아프리카 대부분과 인도를, 그리고 프랑스는 북아프리카와 베트남과 같은 지역을 식민지로 경영합니다. 이번 주제에서는 이러한 팽창의 시대에 서구에서 생산된 시각이미지들이 이러한 문화적, 경제적 타자들을 어떻게 묘사하고 있는지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근동이나 아프리카는 지리적으로는 가깝지만 문화적으로는 먼 이질적인 공간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동양'을 야만적이고 후진적인 것으로 상정하여 자신들과의 문화적인 경계를 설정하여 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불편한 만남은 이미 고대 그리스 미술에서도 나타나 있습니다. 파르테논 신전에 서 있었다는 거대한 아테네상의 방패에는 아마존과의 전투장면이 조각되어 있는데(도2), 파르테논 신전을 포위한 아마존은 페르시아 군을 상징한다고 합니다. 도3에서 보듯이, 아폴로 신전의 프리즈에도 그리스 병사와 싸우는 아마존이 묘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와 같은 동방의 적을 여전사인 아마존의 이미지로 표현한 것은 왜 일까요? 그것은 아마도 동방의 문명이 위협적이면서도 동시에 매혹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2 아테나 파르테노스 신상의 방패모형복원
기원전 440년경, 토론토, 왕립 온타리오 박물관
 
 
도3 <아마존을 내리치는 그리스 병사> 바사이의 아폴론 신전 프리즈
기원전420-410년경, 대리석, 높이 64 cm, 런던, 대영박물관
 
 
 
 

들라크르와의 <사르다나팔루스>(도4)는 동양에 대한 유럽인들의 뿌리깊은 관념인 '오리엔탈리즘'을 잘 보여주는 예입니다. 자신의 제국이 멸망하는 마당에 후궁들을 모아놓고 살육의 축제를 벌이는 사르다나팔루스를 보면서 동양은 미개하고 잔인하다라는 통념을 무의식중에 다시 각인하게 됩니다. 그렇지만 정말 앗시리아의 왕이 이 같은 가학적인 최후를 마쳤을까요? 서양사에서 마라톤 전투와 같은 그리스와 페르시아와의 전쟁을 '동방의 무자비한 전제정치에 대한 서구식 민주주의의 승리'로 보는 것도 어찌 보면 매우 유럽인 중심의 역사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사르다나팔루스』와 같은 희곡을 쓴 바이런이나 그림을 그린 들라크르와 역시 그러한 시각을 반영한 것이구요. 우리는 역사상의 명화라고 할 지라도 그것이 어떠한 입장과 생각을 대변하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도4 들라크르와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 >, 1827년
캔바스에 유채, 395×495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들라크르와의 <사르다나팔루스의 죽음>(도4)은 프랑스 낭만주의 미술의 '동방취향'을 잘 보여줍니다. 이러한 '동방취향'은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부터 등장하여서 1832년 알제리 합병을 계기로 커다란 유행이 되었습니다. 미술에 있어서도 동방을 기행하거나 그곳을 소재로 한 작업이 증가하면서 오리엔탈리스트라는 화가집단이 형성되기도 합니다. 1832년 북아프리카 여행은 들라크르와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이때 스케치북에 남긴 이국적이고 감각적인 형상들과 불타는 색채는 이후 그의 작품의 원천이 되어 <사자사냥>(도6)과 같은 작품을 남기게 됩니다.

도5 들라크르와 모로코에서의 스케치
1832년, 수채물감, 19.3×12.7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6 들라크르와 <사자사냥>, 1861년
캔바스에 유채,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
 
 
 
 

이때의 인상을 바탕으로 제작된 도7의 <알제리 여인들>은 회교여인들의 방인 할렘을 묘사한 작품입니다. 그러나 붉은 계열의 따뜻한 색채와 느슨한 붓질로 나른한 분위기를 한껏 돋군 데다가 흑인 몸종까지 딸려 있어 이 곳이 알제리 가정의 실제 모습이라고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하렘'이라는 일상적인 용어가 점차 터어키 궁전의 여인들이 모여있는 관능적인 공간을 가리키는 말로 통용되고 있는 것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즉 '하렘'은 서구인들이 식민지를 대하는 관능적인 시선이 집중된 특별한 장소인 셈입니다.

이에 반해 대부분의 오리엔탈리스트들의 그림에서 식민지 남성들은 부재하거나 아니면 매우 무기력한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제롬(Jean Leon Gerome, 1824-1904)의 <뱀부리는 사람>(도8)에서는 전통의상을 입고 무기를 든 터어키의 군인들이 구경거리나 기웃거리는 좀 한심스러운 모습으로 재현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시선은 동양을 후진성, 게으름, 태만함으로 바라보는 시선이기도 합니다. 당시 프랑스의 문인인 라마르틴느는 "회교도들은 게으르고 그들의 정치는 변덕스러워 미래가 없다"라고 했다고 합니다.

도7. 들라크르와 <알제리의 여인들>
1834년, 캔바스에 유채, 180×220 cm
파리, 루브르 박물관
 
도8. 제롬 <뱀부리기>, 1870 년경, 캔바스에 유채,
83.8×122.1 cm, 매사추세츠, 클라크 안트 인스티튜트
 
 
 
 

들라크르와가 하렘을 그린 것에서 이미 보았지만, 서양인들의 동방에 대한 기억은 주로 관능적인 여인으로 집중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앵그르의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도9)는 그 대표적인 경우가 될 것입니다. 제국의 남성들은 식민지의 이국적인 여인들에 대한 끊임없는 환상을 품어왔으며 미술가들은 이에 부응한 그림들을 계속 생산했습니다. 나중에는 주로 사진으로 이러한 수요를 채우게 되지만 그렇게 찍힌 사진들은 사실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매체의 속성에도 불구하고 사실은 오랫동안 틀지워진 오리엔탈리즘의 시선을 반복하게 됩니다. 도10의 1910년대 제작된 프랑스의 식민지 관광엽서에서처럼 말입니다.

도9. 앵그르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 1839년
캔바스에 유채, 캠브리지, 포그 미술관
 
 
도10. 프랑스 식민지 엽서, 1910년 경
 
 
 
 
 

유럽을 중심으로 특히 아시아나 아프리카를 문화적인 타자, 즉 남으로 바라보는 시선은 인종이나 민족을 표상할 때에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앵그르의 <노예가 있는 오달리스크>(도9)에서는 공교롭게도 피부색이 다른 세여인이 일정한 거리를 두고 차례로 등장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왕의 사랑을 받은 오달리스크는 백인으로, 그를 위해 음악을 연주하는 여인은 황인으로, 그리고 하녀는 흑인으로 그리고 있습니다. 실제 이 세 여인은 모두 아랍인이었는데 말입니다. 식민지 경영과 침략을 가능하게 하였던 바탕에는 지리, 풍토, 민속, 인종학적 분류학과 같은 실증주의 학문의 축적이 있었습니다. 지식이 권력이 될 수 있는 것이지요. 나폴레옹이 이집트 침략길에 수많은 학자들과 미술가들을 동행시키고 이집트 학회를 구성하게 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도11에서 제롬은 이국적인 색채가 풍부한 의상과 흑인 소년의 인상학적인 묘사를 대단히 세밀한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의 대상으로서 말입니다. 이러한 시선은 어쩌면 분류학적인 목적으로 제작된 많은 기록사진들과 같은 시선일지도 모르겠습니다(도12). 그렇다면 흑인미술가가 자신들 스스로를 재현하는 방식은 무엇인가 다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도13의 <감사기도>를 그린 헨리 타너(Henry Tanner, 1859-1937)는 필라델피아에서 토마스 어킨스에게서 그림을 배운 미국 흑인 1세대 미술가입니다. 그는 소박한 식사를 위해 감사의 기도를 올리는 장면을 포착하였는데 화가의 시선이 관찰자의 시점에 있기보다는 따뜻한 분위기에 스스로 녹아들어 가 있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됩니다.

도11 제롬 <터어키 군인복장을 한 흑인 소년>, 1869년
 
 
 
도12 알퐁스 베르티옹 인종분류사진, 1893년
 
 
 
도13 헨리 타너 <감사기도>, 1894년
캔바스에 유채, William H and Camille Cosby 소장
 
 
 
 

미술가가 세상을 재현할 때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입장 즉 어느 지역에 사는지, 남성인지 여성인지, 어떠한 계층에 속하는지 하는 것들의 관여를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림에 드러난 작가의 시선을 읽는 것은 미술의 양식을 분석하는 것 못지 않게 흥미로운 작업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우리는 19세기 서구의 미술을 보면서 열강의 남성이 중심이 된 사회의 시각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면 현재는 어떠할까요. 도14,15에서 보듯 우리가 현대미술의 대가로 주저 없이 손꼽는 고갱, 마티스의 그림에 분명히 이러한 타자를 바라보는 시선이 존재한다는 것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미술관이 아닌 일상생활에서 접하게 되는 다른 이미지들은 어떠할까요? 유감스럽지만 자연과 야만 그리고 여성을 동일화하는 오래된 방식은 출판물의 표지, 광고, 관광포스터 등등을 통해 지금도 이용되는 있는 것 같습니다.

도14. 폴 고갱 <마나오 투파파우, 죽음의 영이 지켜봄>
1892년버팔로, 알브라이트 녹스 미술관
 
 
 
도15. 마티스 <목련꽃이 있는 오달리스크>
1923년, 캔바스에 유채, 65 81 cm, 개인소장
 
 
 
도16.『내셔널지오그래피』표지
 
 
 
 
도17. 모로코 관광 포스터, 199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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