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주 사적인 시간 노리코 3부작
다나베 세이코 지음, 김경인 옮김 / 북스토리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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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제와 호랑이와 물고기들'이란 영화로 다나베 세이코를 알게되었다. 원작이 단편이라는데 놀랐고 그 단편집에 포함된 단편소설들이 왠지 모르게 끈적이면서도 쿨한 것에 놀랐다.

여성의 성과 섹슈얼리티...라는 주제에 대한 모호한 의미들이 난무 하면서 이 작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리고 단편집의 소설들이 이제 하나도 기억나지 않을 시점에서 세이코의 장편을 골라든다.

난 이 소설이 또 다른 단편집이라고 생각했고 작가외에는 아무런 사전 정보없이 골라든 책이라 사실 큰 기대를 하지 않고 읽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는 책을 읽었던 터이고 그 책을 통한 일본 가부장제 사회에서의 여성의 규정과 섹슈얼리티의 변화를 나름 흥미롭게 읽었던 터라 결혼과 사랑과 일의 경계에서 흔들리는 여성이라는 주제는 꽤 친숙햇다.

 

문제는 친숙함이 곧 앎으로 이어지지 않는 다는 사실.

페미니즘을 대할 때마다 느끼는 곤혹스러움은 내가 남성으로서 여성에 대한 이해가 한계를 가진다는 점이다. 또한 남성으로서의 사회적 권력에 문제의식이 약하고 페미니즘의 주장에 대해 매우 공격적으로 느끼는 면도 있다는 점... 즉 너무 약자인 남자를 몰아 붙인다고 생각한다는 점이다.

하긴 예전 공지영의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서평을 쓰는 기자들이 집으로 가져가지 않은 책이란 말이 있었다. 집에 있는 옆지기가 보고 어떤 생각을 할지 불안해서 그랬다나 뭐라나...

 

이 소설에서도 이 사회에서 살아가는 여성의 딜레마가 그대로 드러난다. 일부일처제 안에서 남편의 소유물로 전락한 듯한 자신의 처지와 사랑과 결혼제도가 양립하기 힘든 사실들.... 그 속에서 결혼전에 꿈꾸던 자신의 미래상이 어느 덧 사라지고 남편의 통제속에 인간관계마저 왜곡되고 통제되는 현실에 대한 두려움....

 

또 다시 문제는 그러한 여성의 내밀한 독백과 남성에 대한 평가들을 난 얼마나 이해하고 있는가 있다. 피상적으로 이해하고 있을까? 아님 내심 공감하고 있을까? 공감하면서도 인정하기는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나?

 

사적인 생활에 대한 이야기... 그 속에 담긴 일말의 진실과 여성이 바라보는 남성에 대한 생각과 그 생각이 과연 많은 여성들이 공유하고 있는 생각인지에 대한 의문점... 등이 난마처럼 뒤섞여 읽는 내내 혼돈스러웠다.

 

사실 어쩌면 이 책을 읽고 잡글을 쓰는대신 '여성혐오를 혐오한다'에 대한 글을 써야 했다. 그것이 감성적인 소설을 읽고 느낌을 이해하려는 것 보다 나에게 더 적합할지 모르겠다.

여성... 남성인 나로서는 사춘기 시절의 열망했던 소녀에서 지금의 옆지기 까지... 알 수없는 미스테리다. 그리고 그것이 사회적 구조에 따른 남성만들기로 인한 것이라고 그 장벽을 넘어 여성을 이해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가능한지에 대해서도 감이 안온다.

 

그래도.... 남성연대여... 니들의 주장은 너무 허접하고 찌찔하다는 거.... 혹시 남성연대 분이 이 글을 읽고 동일한 느낌을 갖는다고 한다면... 아... 정말 답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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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3-08-13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머큐리님, 너무 오랜만이세요~ ^^
더운 여름 잘 지내시나요?

전여, "아내가 결혼했다"를 읽으면서 진짜 이해가 안 가는거예요.
그건 남자의 눈으로나 가능한 줄거리다, 어떤 여자가 희생 다 해가면서 시댁을 두개,
남편을 두명 모시냐.... 이런 생각에 전혀 공감을 못 했답니다. 큭큭.

어쩔 수 없는 한계같아요. 각자 입장이 다른거, 그래도 이해하려고 노력(!)은 한다는거... 노력만. ㅋ

머큐리 2013-08-15 18:30   좋아요 0 | URL
마고님도 더운날 건강하게 잘 지내고 계신가요? ㅎㅎ
'아내가 결혼했다'를 보시고 시댁에 의문을 가지신거 보니 역시 관점이 다른네요..
남자인 저는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독점하지 않고 공유할 수 있는지가 정말 의문이었거든요...

역시 남녀의 관점은 어디가 틀려도 틀린 모양이에요...ㅎㅎ
 
고령화 가족
천명관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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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처럼 불안한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 소설은 위로를 줄 터이다. 그리고 자신의 삶에 대해 다시 한 번 되묻게 될 것이다. 나는 얼마나 잘 살고 있나? 이 소설에 나오는 가족보다 외형상으로는 평화롭고 평범하게 살고 있겠지만 인생이란 결국 자신이 겪어야할 시련의 종합일 뿐이다. 그리고 그 시련들 속에서 가끔은 평화가 찾아 온다. 물론... 평화는 아주 짧고 시련은 끊임이 없다는 것이 문제지만....

 

소설은 격하게 두개의 세계가 대립되어 있는 듯 보인다.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에 대한 극심한 불신과 혈연으로 맺어진 가족에 대한 사랑. 애증의 굴레는 소설 말미까지 격심하게 부딪친다. 결국 어느 중간에 멈춰서지만 어쩡쩡한 결론을 도출하지 않는다. 오히려 핵가족화 되면서 잃어버린 어떤 향수를 찾고 있다. 물론 그것은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유년의 아름다운 시절을 아무리 되찾고 싶다고 해도 찾을 수 없듯이 가족에게 바랄 수 있는 위안은 찾는다고 찾아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실패한 인간들의 이야기지만 그들이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이야기이고 그 실패를 아무도 끌어안지 않은 사회에서 가족이 주는 의미에 대해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이다. 다만, 어머니가 그야말로 끊임없이 베풀어주는 존재로 그려져 있어 여성주의자들 시각에서는 어떻게 평가할 지 모르겠다. 남자인 내가 볼때 이 소설의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할 여성에 대한 총체적인 상과 남성이 위안을 찾을 때 원하는 완벽한 모성의 상이 결합된 존재이다. 따라서 폭력전과에 성범죄까지 저지르고 홀로사는 큰아들을 거두어 살고, 실패한 영화감독이자 알콜중독자인 주인공을 받아주며, 술집 생활로 올바른 가정하나 제대로 꾸리지 못하고 두번이나 이혼 당한 막내딸까지 안아준다. 그리고 이 삼남매의 애증의 관계의 핵심에는 어머니가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결국 어머니의 존재가 이 삼남매가 가족이란 테두리에 들어오는 가장 핵심적 요건인 것이다.

 

실패한 인생들이고 잉여로 나이 든 어머니에게 얹혀사는 인생들이지만, 그들에게도 사연은 있다. 사연없는 인생들이 어디 있으랴... 다만 소설 시작에서 소설의 화자는 인생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한다.

 

인생은 단지 구십 분의 플롯을 멋지게 꾸미는 일이 아니라 곳곳에 널려 있는 함정을 피해 평생동안 도망다녀야 하는 일이라라. 애초부터 불가능했던 해피엔딩을 꿈꾸면서 말이다. P45

 

하지만 소설 말미에는 이렇게도 되뇌인다.

 

셍각해보면 인생이 늘 계획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무언가에 발목이 잡혀 이리저리 한 세월 이끌려다니기도 하는게 세상살이일 터인데 때론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흘러가게 내버려두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P273

 

이런한 인식의 전환은 무수한 사건 속에서 이루어진다. 그래도 무엇보다 자신만이 가지고 있다고 느끼는 상실감과 아픔을 다른 사람도 가지고 있음을 깨닫는 순간 변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이 세상에서 홀로 살아간다는 것, 모든 책임을 자신이 짊어지고 가야한다는 것은 인생의 무수한 시련을 의지할 곳 없이 건넌다는 뜻이니... 삶이 얼마나 살벌하고 삭막하겠는가?

 

실패자들과 낙오자들이 혈연이란 이유로 살아간다는 건... 지옥같은 일이지만 의지가 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 차이는 서로에 대한 이해에 있다. 이해하지 않고 강요하는 가족은 남보다 잔인하다. 그럼에도 한가닥 희망은 핏줄에서 나오지 않는다. 사람과 사람의 이해 속에서 비로소 나타난다. 이 소설  나에게 살려준 삶의 진실이다.

 

나는 사람들이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다들 속으론 자기만의 병을 품고 살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P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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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수아비춤
조정래 지음 / 문학의문학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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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빨갱이 작가로 찍히신 분이라 이런 소설을 썼을까?  

소설은 시대의 자화상이라고 한다면, 이 소설은 그대로 이 시대의 얼굴을 그리고 있다고 생각한다. 다른 모습들보다 현재 당면하고 있는 정치, 사회적 모순을 있는 그대로 끌어안고 그 모순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욕망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고 본다. 그리고 그것은 87년 체제 이후 정치적 민주화의 일정한 성과를 그대로 부정하는 경제적 독점에 대한 경고다.  

조정래는 이미 80년대에 '태백산맥'이라는 걸출한 장편으로 그 시대적 사명에 온 몸을 던져왔다. 그 후 '아리랑'과 '한강'을 잇는 작품은 그대로 한국의 현대사를 소설로 승화시켰다. 그의 소설 속에는 소설의 배경이 되는 시대의 모순과 아픔이 그대로 녹아들어가 있기에 사실 읽는 사람에게 불편함을 준다. 그리고 그 불편함이 바로 살아가는 현실에 대한 아픈 충고임을 알게한다.  

'한강'이 80년대를 통과하지 못하고 종결된 것은 아마도 작가가 당대를 서술하기에 좀 더 많은 숙고의 시간이 필요해서 였는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한강'에 이어 가장 최근의 배경을 가진 소설이 바로 '허수아비 춤'이다. 이 소설은 결코 낯설지 않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야기들이고 사실 뉴스에서 많이 보고 들은 이야기들이다. 재벌의 행태가 비판받고 있지만 그들의 권력은 철옹성이다. 결국 이 나라의 법과 제도는 어떻게 하면 재벌의 재산을 합법적으로 지켜줄 것인가에 몰두하는 듯 보이고 실제로 결과는 그렇게 나타나고 있다. 여기에는 천문학적인 돈의 힘이 개입된다. 그리고 그 금권은 실제 민주주의를 압살한다.  

재벌의 비자금을 통한 변칙적 재산상속은 일반적 재산의 상속이 아닌 기업의 지배권을 상속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그 결과를 위해 합법적으로 내는 세금은 그야말로 생색용일 뿐이다. 이것을 합법적 절세라는 표현으로 무마한다면 그것 역시 사기일 뿐이다. 그러한 일이 법의 외관을 가지고 버젓하게 행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고, 여기에 항의를 제기하거나 문제를 삼는 일은 철저하게 외면된다. 법조계나 정치계나 기업의 후원금을 받지 않는 곳이 없고, 심지어 언론사는 이제 기업의 나팔수가 되어 불리한 것은 아예 보도하지 않거나 축소하고 마치 기업이 없으면 이 나라가 절단날 듯 선전하고 이 땅의 국민들이 자발적으로 복종하도록 세뇌한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가 돈의 권력으로 무너진다면 그것은 공화국이 아니다. 국민이 주인이 되는 나라가 아니며, 돈을 가진 자가 주인이 되는 나라가 된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이 땅의 민주주의는 결국 재벌을 비판하고 올바르 경제활동을 행하도록 견제해야 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어느 순간 노예처럼 살아갈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삼성을 생각한다'라는 책을 쓴 김용철 변호사는 자신을 체포하고 조사해서 삼성의 비자금 문제를 해결하고자 양심선언을 했지만 공권력은 무시했다. 그리고 파장이 최소화하는 방향에서 무마시켜 버리고 오히려 숨겨놓은 비자금을 합법적으로 승계하도록 해 버렸다. 이런 조사는 정치적 반대파를 겨냥한 무리한 수사에 비하면 수사한 축에도 끼지 못할 것이다. 시간을 끌면서 사람들이 잊을때 쯤이면 바로 무마해버리는 고질적 행태는 '경제에 많은 기여를 한' 기업인들의 공로를 생각한다는 상투적 말로 사람들에게 정당함을 주장한다. 그리고 이제 이 말은 하나의 이데올로기처럼 되었다.  

가진자와 못가진자의 문제라기 보다. 기회의 형평성과 사회적 책임에 대한 문제이다. 이런 문제가 올바르게 해결되지 않으면 사회는 내부적으로 썩어 들어간다. 공적인 업무를 해야 할 사람들이 동에 팔려 공적인 사안을 왜곡하고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현상이 끊임없이 되풀이 되면 누가 이 사회를 위해 헌신하겠는가? 누가 자신의 노동에 긍정적 감정을 가질 수 있을까?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이른바 배운 사람들의 행태는 지식이란 결코 중립적이지 않음을 알려준다. 이러니 공부 잘하고 똑똑한 놈들이 사회에 해악을 끼칠때는 더 파괴적이다.  

사실적이기에 더 불편하고 불쾌한 이야기를 읽다보니... 이 사회는 참 숙제가 많은 사회라는 것을 새삼 느낀다. 이 소설에서는 시민운동을 하는 건강한 시민들에게 기대를 많이 하던데...서울시장으로 시민운동가가 당선이 되고 정치적으로 많은 변화가 올 기회가 왔다고 하지만... 노동이 빠진 시민운동이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왜인지 모르겠다. 재능교육 농성장이 철거되었다. 자본의 부당한 해고에 저항하던 해고 노동자의 농성천막이 시민운동 출신 서울 시장 취임 후 철거되는 현상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 딴나라당을 이기는게 성공이 아니다. 그건 전제조건일 뿐... 갈길은 멀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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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호인 2011-11-07 01: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을 읽으면서 암울함을 느꼈습니다. 우리사회가 정의사회가 되기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이 중첩되어 있음을 깨닫는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지더이다. 우리가 꿈꾸는 사회가 춘몽이 되지않도록 더많은 감시와 각성이 필요합니다. 그런데
왜이리도 먹먹할까요?

머큐리 2011-11-08 10:53   좋아요 0 | URL
저는 그냥 주변에서 할 수 있는 조그만 일을 하면서.. 그 먹먹함을 달래고 있습니다..^^; 안될 확율이 더 높겠지만...그래도 포기하지 말아야죠..할 수 있는 만큼이라도 최선을 다하고 결과에 주눅들지 않으려구요.
 
허수아비 - 사막의 망자들,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5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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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추리소설 작가 중에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들은 잘 읽히고 흥미도 있다. 그런데 마지막을 덮으면 무언가 아쉬워진다. 딱히 뭐라 꼬집지는 못하지만 (물론 내공이 부족해서지만...) 아쉬움이 남는 것이다. 물론 이건 순전하게 개인의 취향일 수 있다. 그렇지 않은 독자들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이 딱 그렇다. 미국 추리소설답게 선도 굵고 사건의 스케일도 크지만 해결된 후의 마지막이 뭔가 허전하다.  

어쩌면 순전하게 개인적인 취향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는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은 전작 '시인'에 등장한 기자 잭 매커보이다. 그리고 매커보이는 우연히 살인사건과 관계된 짤막한 기사 작성으로 항의를 받아 연쇄살인 사건의 단서를 잡는다.  

이미 연쇄살인범 '시인'의 정체를 밝히고 소설까지 써서 베스트셀러 작가로 등극한 매커보이는 어려운 신문사의 사정으로 해고를 통보 받은 상태다. 여기에 중요한 사회적 배경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인터넷의 발전으로 인쇄 매체는 점점 경쟁력을 잃어가고 기자들은 전체적으로 감원당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소설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매커보이는 인터넷에 익숙한 세대도 아니고 고액의 연봉을 받는 베스트셀러 기자다. 그런 기자마저도 시대를 거스르지 못하고 감원대상이 되는 세상이다. 그리고 이 소설은 냉정한 미국의 현재를 가감없이 드러내고 있다. 이 책이 가지는 배경의 첫번째 미덕이다.  

두번째 연쇄살인범의 지능적 범행은 일반적인 범죄의 틀에서 벗어난다. 우선 정보의 비대칭성이 문제다. 살인마는 정보를 획득하고 가공하고 그 정보를 통해 범행을 저지르고 은페하며 심지에 다른 사람에서 누명을 씌워 빠져 나간다. 이러한 범행 수법은 개인적 정보가 인터넷에 존재하는 이상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을 나타낸다. 자신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 사람이라도 이제 인테넷에 자신의 신상이 공개되는 순간 범죄의 대상이 될 수 있는 사회가 된 것이다. 물론 이러한 추세는 제브리 디버의 소설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앞으로의 계속 나타나는 추세가 될 것이다.  결국 범죄자의 지능의 진화는 사회가 지닌 배경의 정보통신 기술의 진화와 더불어 진화해 나갈 것은 틀림이 없다.  

이러한 배경으로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매커보이는 정보환경에 뛰어나지도 않고 그에 대한 충분한 전문가도 아니다. 다만, 직감으로 사건의 개요을 보고 그 사건의 배후를 따라갈 뿐이다. 그러나 그뿐이다. 때문에 사건의 해결에 대해서는 무수하게 많은 우연과 인연이 겹쳐지게 된다. 결국 소설의 결말이 나타나는 순간 우연과 인연으로 해결되는 구조가 마음에 들 이유가 별로 없는 것이다. 더구나 범죄의 수법이 아무리 하이테크로 진화하더라도 범죄를 저지르는 인간의 어둠은 진화하지 않는다. 어두움이 표출되는 방식이 진화할 뿐이다. 따라서 형식이 아무리 진화하더라도 심층에 드러나는 어두움은 어떻게든 표현되었어야 한다. 그러나 이 소설에는 그것이 생략되어 버렸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속은 알지 못한다고 해도 작가가 창조한 세상에서 범인의 심리적 원인을 끝까지 미궁으로 남겨논 것이 아마도 가장 아쉬운 대목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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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익은 타인들의 도시
최인호 지음 / 여백(여백미디어)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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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현대 소설로 돌아온 최인호...
초반기에 현대 소설로 시작한 작가는 역사 소설을 우회해 다시 현대소설로 복귀했다고 서문에서 밝혔다. 더불어 병고 끝에 청탁으로 쓰는 소설이 아닌 자신이 쓰고 싶은 소설을 썼다고 한다. 그것도 짧은 시간안에.... 그는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솔직하게 난 이 소설을 이해하지도 몰입하지도 못했다. 소설의 화자가 느끼는 일상의 이질감을 그저 단순하게 '소외된 현대인'이라 규정하기에도 애매하고 그 낯섬과 낯익음의 극단적 대비가 이끄는 소설의 형식은 반복적이면서 이질적이어서... 계속 같은 자리를 헤매고 있다는 느낌만 든다.
가장 익숙한 사람들마저 알 수 없는 타인처럼 느껴지는 그 순간 일상의 모든 일은 수상한 일이 된다. 아내도 자식도... 심지어 자신의 정체성마저도 그는 의심할 수 밖에 없다. 결정적으로 자신에 대한 확증이 필요한 화자는 자신의 정체성과 이질적으로 변한 현실을 이해하기 위해 길을 떠난다.  

그 길에서 그가 발견한 겻은 몽환적 환상이다. 더불어 모든 차이가 지워진 사람들의 모습이다. 더불어 자신과 동일한 또 다른 자신의 발견이다. 그 분신과 자신의 합체야 말로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수 있는 유일한 방법일테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 들이 난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분열된 자아가 가지는 그 의미의 복수성을 떠나 왜 작가는 이러한 분열과 통합을 이야기 해야 했을까?
그 분열과 통합에 대한 나의 이해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마치 말장난처럼 보이기 시작하면서 이야기 속에서 난 길을 잃어 버렸다.  

낯익은 타인들... 모두가 똑 같이 보이는 사람들... 거기서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사람의 원환운동을 자신으로 복귀하기 위한 이성의 회귀로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그럼 작가는 어디서 출발해서 어디로 회귀하고 있는 것인지... 

잃어버린 길에서 헤매다 보니 글도 횡설수설이다.
어쩌면 난 작가에게 요즘의 나의 횡설수설에 대한 책임을 떠넘기는 건지도... 어지러운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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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16 01: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19 10: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후애(厚愛) 2011-07-16 10: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랜만에 놀러왔습니다.
잘 지내시죠?

머큐리 2011-07-19 10:03   좋아요 0 | URL
나름 잘 지내고 있는데요.. 건강은 어떠신지...서울에 오시지 않는다니 좀 섭섭한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