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관심이 가는 책은 올리버 색스의 자서전 <온 더 무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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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그을린 사랑

2.대학살의 신

3.가문의 위기

4.불멸의 연인

5.샤넬과 스트라빈스키

6.비커밍 제인

7.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8.변호인

9.국제시장

10.라이언 일병 구하기

11.너는 내 운명

12.남자가 사랑할 때

 

(2월)

13.말죽거리 잔혹사

14.프로메테우스

15.에일리언 1편

16.비열한 거리

17.HER

18.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

19.소셜 네트워크 서비스

20.머니볼

21.폴링 인 러브

22.터미네이터 1

23.더 테러 라이브

 

(3월)

24.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

25.남아있는 나날

 

(4월)

26. 파 앤 어웨이

27. 이미테이션 게임

28. 지구가 멈추는 날

29. 내추럴

30. 허블망원경, 25주년

 

(5월)

31. 그레이스 오브 모나코

32.화양연화

33. 패닉 룸

34. 노리개

 

(6월)
35.와일드

 

(7월)

36.어톤먼트

37.주라기 월드

38.강남 1970

39.베를린 천사의 시

40.미션임파서블(로그네이션)

 

(8월)

41.엣지 오브 투모로우

42.루퍼

43.차이나타운

44.은교

45.아이즈 와이드 셧

46.오션 자이언트(3부작)

 

(9월)

늘근도둑 이야기(연극)

47.사도

48.영주의 애인

49.하몽하몽

새로운 코스모스 13부작(일부)

 

(10월)

50.마당을 나온 암탉

 

(11월)

51.우리는 형제입니다

52.더 리더

53.베테랑

54.경주

55.비밀(KBS 드라마스페셜)

56.짓

57.마라톤 맨

 

(12월)

58. 헝거게임

59. 카포티

60.스타워즈 4편

61.스타워즈 7편

62. 스타워즈 5편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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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월)

 

1. 페르마의 마지막 정리

2. 1950년대편 2권

3. 1950년대편 3권

4. 4.19과 모더니티

5. 어떻게 살 것인가?

6. 1960년대편 1권

7. 한번은 독해져라.

8. 그리스인 이야기1권

9. 1960년대편 2권

10. 나의 한국현대사

11. 한국생활사박물관(고구려편)

12.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

 

(2월)

13.미움받을 용기

14.1960년대편 2권

15. 흰 그늘의 길 1권

16. 흰 그늘의 길 2권

17. 흰 그늘의 길 3권

18. 바리데기

19. 아들러 심리학을 읽는 밤

20. 글쓰기는 스타일이다.

21. 삶은 어떻게 책이 되는가

22. 가짜 고대사 엉터리 사학자

23. 그들이 숨긴 한국사의 진실

24. 와일드

25. 오래된 연장통

26. 1970년대편 1권

27. 역사글쓰기, 어떻게 할 것인가

 

(3월)

28.창백한 푸른점

29.행성 이야기

30.막스베버, 이 사람을 보라

 

(4월)

31.한국문학통사 4권

32.나라 없는 사람

 

(5월)

33.공짜로 즐기는 세상

34.신기한 시간표

35.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36.나무

37.레일리가 들려주는 빛의 물리 이야기

38.로빈슨 크루소

39.원자폭탄 만들기 1권

40.마법의 설탕 두 조각

41.책과 노니는 집

 

(6월)

42. 2008 이상문학상 작품집

43. 원자폭탄 만들기 2권

44. 안네의 일기

 

(7월)

45. 속죄

46. 내게는 이름이 없다

47. 소년 H 1권

48. 소년 H 2권

49. 핵의 세계사

50. 맨발의 겐 1-10권

51. 순간의 꽃

52. 말랑하고 쫀득한 세계사 이야기 1

53. 말랑하고 쫀득한 세계사 이야기 2

54. 말랑하고 쫀득한 세계사 이야기 3

 

(8월)

55.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56. 대항해 시대

57. 콜롬버스

58. 경도 이야기

59. 나의 유서, 맨발의 겐

60. 관계의 교육학, 비고츠키

61. 자기신뢰

62. 잠의 사생활

 

(9월)

63. 수민이의 왕따 탈출기

64.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65. 잡동사니의 역습

 

(10월)

66. 러셀 자서전

 

(11월)

67.시랑 먼저 놀거야

68.내가 정말 알아야 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12월)

69.글자전쟁

70. 서희의 외교담판

71. 고려사로 고려를 읽다

72.한국생활사박물관(고려생활관1)

73.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1권

74.고려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2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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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의 외교 담판 - 역사상 가장 성공한 외교
장철균 지음 / 살림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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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907년 당나라가 멸망했다. 동아시아를 지배하던 거대한 제국은 어느 순간 무너져 내렸다. 동아시아에 생긴 힘의 공백은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중국 문명의 근거지인 화북지방에서는 후량(907-923), 후당(923-936), 후진(936-946), 후한(947-950), 후주(951-960) 같은 나라들이 세워지고 망하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당나라처럼 강한 나라는 없었다. 화남,강서지방에서는 10개의 나라가 세워졌다. 이 시기를 중국사에서는 5대10국의 혼란기라고 한다.

당나라 멸망 후 50년 가까운 혼란기를 극복하고 중국본토에는 960년에 송나라가 건국되었다. 거란이나 고려에 비하면 송은 후발국가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최강국가는 거란이 세운 요나라였다. 요나라는 기병에 근거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중국본토를 위협했다. 거란은 만리장성 안에 연운16주를 점령하고 있었다. 연운16주 문제는 거란과 송나라 사이에 내내 논란이 되는 영토문제였다. 송나라는 연운 16주를 회복하고 만리장성 너머로 유목민들을 몰아내는 것이 국가적인 목표였다. 마치 우리가 통일이 지상목표인 것처럼 송나라는 연운 16주 회복이 목표였던 것이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송나라와 거란을 대결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전쟁을 통해서 거란을 이길 수 없었던 송나라는 거란과 1004년 ‘전연의 맹’이라는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전연은 전주라는 도시의 아명인데, 거기서 맺은 평화조약인 셈이다. 이로써 송나라는 해마다 거란에 비단 20만필, 은 10만냥을 지급하고, 국경은 현상태(연운16주를 거란이 보유)를 유지하며, 송나라는 거란을 형으로 부르기로 약속한다. 송나라는 평화의 댓가로 돈과 명분을 팔아넘긴 셈이다.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에도 지각변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 900년 후백제가 건국되었다. 901년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웠다. 왕건은 폭군으로 전락한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나라를 건국했다. 918년이었다. 후삼국이 고려에 의해 통일되는 936년까지 한반도의 40여년의 세월은 피를 부르는 전쟁의 시기였다.

이 무렵중국의 변경지대에서는 유목민들이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거란에서는 야율아보기가 북방 유목세계를 통일하고 새로운 제국을 세웠다. 916년 야율아보기는 황제국을 선포했다. 10년 뒤인 926년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멸망시켰다. 발해는 고구려를 이어서 동북지방을 지배하다가 230여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우리민족은 두 번 다시 만주를 찾지 못했다. 이곳은 이후 거란, 여진족의 무대가 되고 말았다. 이곳을 기반으로 하여 거란과 여진은 대제국을 건설하고 중국을 위협하였다.

발해가 멸망하고 난 뒤 발해유민 10만여 명이 고려로 들어왔다. 왕건은 이들을 적극 받아들였다. 발해의 세자이 대자현도 고려로 망명했다. 왕건은 왜 이들을 받아들였을까? 왕건은 고려의 태조로서 국가의 비전을 고구려를 잇는 것으로 정했다. 왕건은 버려진 땅이었던 평양을 재건하고, 이곳을 서경이라고 부른다. 또한 일 년의 절반을 평양에서 보내라고 후손들에게 ‘훈요 10조’에서 훈계하고 있다. 당나라가 멸망하고 발해마저 망해버린 상황에서 만주지방을 다시 찾겠다는 왕건의 결심은 이른바 북방정책으로 부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만주를 정복하고 있던 왕조는 거란이었다. 고려와 거란의 충돌을 불가피했다.

왕건은 942년 거란이 보내온 사절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 30마리를 만부교 다리 아래서 굶겨죽었다. 유명한 만부교 사건이다. 거란과 대결을 선포한 셈이다. 이 때는 태조 25년이었다. 이 때 태조는 중국의 후진과 함께 거란을 협공하려는 계획이 있었다는 설이 ‘자치통감’에 전하고 있다. 이후 고려와 거란은 외교적인 마찰을 계속하고 있었다. 얼마 뒤 중국본토에서는 960년에 송이 건국되었다. 송은 남진정책을 통해서 남쪽의 영토를 회복했다. 남은 문제는 연운 16주였다. 연운 16주 문제를 놓고 송과 거란은 40여년 가까이 갈등한다. 이 사이에 고려는 늘 경계와 친교의 대상이었다. 거란에게도 고려는 골칫거리였다.

서기 986년부터 4년 정도의 기간 동안 거란과 송은 격렬하게 충돌한다. 결과는 전쟁국가인 거란의 완벽한 승리였다. 거란은 송의 서쪽에 있던 나라인 서하를 점령하고(990년), 요동지방에 있던 서여진,정안국을 점령했다(991년). 송을 사방에서 에워싼 형국이었다. 마침내 거란은 동경유수(동경은 요양을 말한다)인 소손녕을 시켜서 고려를 침략한다(993년). 소손녕이 고려에 보낸 국서에 의하면 80만 대군을 이끌고 왔다고 한다. 학자들은 숫자가 터무니없이 부풀려졌다고 본다. 6만 명 정도의 군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고려조정은 대혼란에 빠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거란은 송나라 주변을 평정한 당대의 초강대국이었으니 고려로서는 백천간두의 위기에 섰다고 느낄만하다. 이 때 고려 조정에서는 할지론(평양이북땅을 넘겨주자) 대 항복론으로 나뉘었다가 할지론이 우세했다. 이 때 서희(942-998)가 등장해서 선항전 후협상을 주장했다. 병자호란과 유사한 상황이었다고 할까? 거란과 고려가 맞붙은 첫 싸움에서 고려가 승리한다. 그리고 서희는 협상에 나섰다. 서희는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국방장관인 병관어사를 지내기도 한 군사통이었다. 거란 침입 때 정부는 방어군을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누어 배치했는데, 서희는 중군사였다. 북방 최전방 사령관이었던 셈이다.

소손녕의 요구는 두 가지였다. 첫째, 고려는 신라를 계승한 나라이니 옛 고구려의 영토를 거란에 넘겨라. 둘째, 송과 단교하고 거란에 사대하라. 서희와 소손녕은 1주일 간을 회담하였다. 서희가 주장하는 바도 두 가지다. 첫째, 고려는 고구려를 이어받은 나라다. 국호도 그래서 고려다. 둘째, 고려가 거란에 사대하고 싶어도 압록강 인근을 여진이 점령하고 있으니 어렵다. 압록강 인근의 여진족을 몰아내면 거란에 사대하겠다.
회담의 결과로 두 나라가 합의한 것은 이렇다. 첫째, 압록강 서쪽에 거란이 5성을 쌓는다. 고려는 압록강 동쪽에 성을 쌓는다. 이로써 고려는 압록강 동쪽 280리를 우리 땅으로 확보했다. 이른바 강동 6주다. 이로써 거란에 조공하는 길이 열린다. 둘째, 고려는 송과 외교관계를 끊고 거란에 사대한다. 이것이 이른바 서-소(서희-소손녕) 협정이다. 거란과 고려가 맺은 평화조약인 셈이다. 압록강 인근에 있던 서여진 영토를 양국이 분할하고 국경선을 정한 협정인 셈이다. 서-소 협정은 거란과 송이 맺은 ‘전연의 맹’(1004년)과 함께 120여년간 동아시아 지역질서를 유지하는 양대 축으로 기능했다.

협정 후 양국은 바로 조치에 들어갔다. 994년 압록강 동쪽과 서쪽에 있던 (이른바 서여진이다. 동여진은 두만강 부근에 있었다. 이들이 나중에 금나라를 세우는 여진족이다.) 여진족을 몰아내고 성을 쌓았다. 그리고 후속조치로서 고려는 거란에 유학생을 파견했다. 양국에 포로를 송환했다. 또 소손녕의 딸을 고려에 출가시키기도 했다. 고려는 송과 외교관계를 단절한다. 이후 거란이 망하기 전까지 고려는 송과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다. 1071년 고려의 문종 때 송과 이른바 ‘문병외교’(고려 문종의 병치료를 위해서 송나라에서 의사를 파견한 일)를 계기로 하여 고려와 송은 문화적이고 경제적인 관계는 트게 된다.

서-소 협정은 명분(사대)과 실리(강동6주)의 교환이다. 거란은 고려와 송의 외교관계를 끊어놓았지만, 고려로서는 강동6주라는 영토를 확보했다. 그리고 강동 6주는 군사적인 요충지였다. 이것은 거란의 2,3차 침입 때 고려가 대승한 곳이 거의 강동 6주에 쌓은 성 때문이라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이 이루어지는 귀주성도 강동 6주에 포함된다. 그리고 서-소 협정을 통해서 고구려를 실질적으로 우리 역사에 편입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고구려가 역사책에서만 우리 땅이 아니라 당대의 외교문서에 그런 사실이 기록되었다. 고구려 땅의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한 일부를 고려가 소유하게 됨으로써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내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고려 조정이 평양 이북의 땅을 거란에 넘겨주었다면 고려는 사실상 신라의 영토만 소유하는 신라의 계승국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국이라고 적시한 왕건과 강동 6주를 확보한 서희, 두만강 이남 북방 영토(4군과 6진)를 개척해서 우리 땅으로 만든 세종은 실질적인 의미에서 고구려를 한국사에 포함시킨 후대인이라고 볼 수 있다.

서-소 협정과 전연의 맹 이후 동아시아가 늘 평화로웠던 것은 아니다. 거란은 1010년에 거란성종에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두 번째로 침입한다. 개경을 점령하고 궁궐을 불지르고 가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때 고려 초기 7대 왕들의 실록이 불에 타서 없어지는 참화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는 돌아가는 거란군을 물리친다. 이후 1018년 12월에 거란은 소배압(소손녕의 형)을 대장으로 하여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세 번째로 침략한다. 강감찬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박살낸다. 이후에 거란은 고려를 다시 침략하려는 야욕을 버리고, 두 나라는 서-소 평화협정의 틀로 돌아간다. 두 나라 모두 10여년 동안 벌인 전쟁으로 국력이 너무 낭비되었고 나라도 혼란스러웠다.

서-소 협정은 이후에 우리 나라 역사가 보여주는 많은 분쟁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병법에서 말하는 지피지기의 실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서희는 거란의 속내를 정확히 간파하고 실리를 얻어냈다. 거창한 명분은 버리고(송과의 외교관계단절), 소중한 실리(영토확장)를 얻었다. 이것은 이후에 일어난 여진과의 동북9성 관련 협상이나 조선시대 청나라의 침입으로 겪은 고난과는 명확히 대비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윤관이 별무반을 조직하여 얻어낸 동북9성은 결국 여진에게 돌려주고(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부르겠다는 여진의 맹세를 명분삼아), 이후에 여진은 재기하여 금나라를 세우고 거란과 송을 대파하며 당대의 초강대국으로 성장했다. 이 때는 실리를 버리고 명분을 취한 경우였다. 병자호란 때는 제대로 된 대비도 없으면서 다 죽어가는 늙은 명나라를 지킨다는 명분만 붙들고 있다가 청에게 호되게 당하는 국가적인 불행을 겪게 된다. 명분도 실리도 얻지 못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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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당나귀 곁에서 창비시선 382
김사인 지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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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일상에 대한 정말 따뜻한 시각을 가만히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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