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울 기회 - 민주당 상원의원 엘리자베스 워런 자서전
엘리자베스 워런 지음, 박산호 옮김 / 에쎄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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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워런은 1949년생이다. 올해로 68세다. 현재 미국 메사추세츠 주의 상원의원이다. 그 전에는 하버드 법대 교수를 지냈다. 파산법 분야의 전문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월가의 금융권에서 가장 꺼리는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금융권에 대한 강력한 규제를 적극 지지하는 인물이다.

이 책은 그의 회고록이다. 법률가라서 그런지 그는 대단히 직설적이고 명확한 문장을 구사한다. 회고록의 첫 문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내가 철든 날을 알고 있다.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지자 어머니는 혼자서 가정을 꾸려나갈 수 밖에 없었다. 엄마는 50이 가까운 나이에 백화점에 취직한다. 취직 면접을 보러가기 위해 철지난 옷을 입으며 울먹이던 엄마를 보면서 그는 철이 들었다. 세상사를 환상의 안경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맨눈으로 보게 된 것이다.

이 책에는 이렇게 매력적인 문장들과 일화들이 넘쳐난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보겠다.

-나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방어튀김은 내 입맛엔 별로였지만 브루스가 좋아했다.(195) (브루스는 그의 남편이다.)

-장관은 눈 덮인 산 정상에 서 있는데 나는 사막을 기어가는 기분이었다. 우리가 세상과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은 그렇게 달랐던 것이다.(202)

책의 마지막에 감사의 말이 길게 나오는데, 내가 가장 감동받은 문장은 세 오빠에게 바치는 감사의 말 끝에 나오는 부분이다. 워런은 위로 세 오빠가 있는 막내딸이다.

-이 세 오빠와 함께 살면서 어렸을 때부터 나는 뒤에 남아 사라지든가, 아니면 식탁에서 내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싸워야 한다는 걸 배웠다.(407)

그는 파산법이라는 미지의 영역에 뛰어들어서 파산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세운다. 1980년대에 광범위하게 일어난 파산은 결국 미국경제가 신자유주의 전성기를 맞아서 기업의 인수합병, 노조파괴 등을 통해서 중산층과 서민경제가 붕괴하는 과정의 반영이었다는 것을 입증해낸다. 파산자들은 도덕적인 문제아들이 아니라 열심히 살려고 노력했지만 어쩔 수 없이 사회의 변두리로 밀려난 인생들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 워런은 분노한다. 책임을 져야 할 자들은 정부가 구해주고, 힘없는 자들만 벌을 받는 형국을 그는 견딜 수 없어 한다.

우여곡절을 거쳐서 2008년 미국금융위기 이후 소비자금융보호국이라는 강력한 금융규제기관의 탄생을 불러온다. 맨 앞장에서 전사가 되어 싸운 것은 워런이었지만, 오바마 대통령을 비롯한 많은 이들이 힘을 모아 미국은 금융권의 무차별적인 유혹과 공격에 내몰린 소비자들을 보호하는 강력한 기관을 만들어 냈다. 우리는 아직 이런 게 없다. 텔레비전만 틀면 나오는 대출광고를 생각해보라. 사뭇 끔찍한 현실이다.

엘리자베스 워런은 말한다.

-진짜 전쟁은 모두 공평하게 세금을 내는가 아니면 서민만 내는가, 바로 이것이다.(410)

-내가 얼마나 간절하게 이 싸움을 하고 싶었는지 생각하곤 했다. (392)

앞으로 다가올 5-10년 정도면 우리나라 현실에 직접 가져다 적용해도 될 만한 내용들이 책 속에 가득하다. 곧 우리에게도 이런 일이 닥칠 수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에게도 워런 상원의원 같은 이들이 필요하다. 오바마 같은 대통령도 필요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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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달 2022-03-19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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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사로 고려를 읽다 - 가장 역동적인 역사의 순간
이한우 지음 / 21세기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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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고려역사에 빠져들게 되었다. 그런데 이 나라의 역사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매력이 있다. 500여년의 긴 역사를 가진 왕조답게 이 나라의 역사에는 숱한 사건들이 있다. 특히 매력적인 것은 외침에 대한 고려의 대응이다. 건국초부터 시작된 거란과의 갈등과 전쟁, 여진이 세운 금나라와 갈등, 몽골의 침략, 홍건적의 침입과 왜구의 노략질에 대한 대응 등 숱한 침략에 나름대로 자주적으로 응전해왔다. 문약에 빠진 조선과는 대비되는 지점이다. 어쩌면 고려는 지원국 하나 없이도 거대 군사국가인 거란과 몽골의 침입을 물리치는 용기를 보여주었다.

 

이한우가 쓴 이 책은 <고려사>라는 역사책을 통하여 고려를 읽는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이한우는 조선왕조실록을 다 읽고 조선군주열전 시리즈를 펴낸 바 있다. 역사가는 아니지만 역사에 관심이 많은 우파 언론인이다. 조선일보 문화부장으로 활약했다. <거대한 생애 이승만>이라는 책을 펴낸 바도 있다. 우파치고는 공부를 많이 하는 우파라고 볼 수 있다. 이한우는 조선왕조실록의 연장선에서 조선의 전사라고 할 수 있는 고려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고려사>를 읽게 되었다는 것이다.

 

<고려사>는 고려왕조가 쓴 책이 아니다. 조선의 건국세력이 기술한 고려의 역사다. 고려역사에 대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의 대부분이 바로 이 <고려사>에서 나왔다. 이 책은 고려왕조실록과 당대의 자료들을 참고하여 쓴 고려사 자료집이라고 할 수 있다. 조선왕조 개국이후 60여년이 지난 1451(문종1)에 완성되었지만 반포는 1454(단종2)에 되었다. 사마천의 사기를 따른 기전체 사서로서 세가 46, 39, 연포 2, 열전 50, 목록 2권으로 이루어진 총 139권의 책이다.(여기서 권이란 오늘날로 말하면 부라고 보면 된다.) 편집 책임자는 김종서였지만 김종서가 1453년에 일어난 수양대군의 계유정난으로 제거되어서 인쇄본에서는 정인지가 책임자로 나와있다. 김종서는 1452년에 <고려사>를 핵심요약한 <고려사절요>를 펴냈다. <고려사절요>는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따른 편년체 역사서다. 고려사를 시대별로 쭉 훍어볼 수 있는 통사류 책이라고 볼 수 있다. <고려사>는 북한에서 번역한 책이 신서원에서 11권짜리로 나와있다. <고려사절요>는 역시 신서원에서 3권짜리로 번역되어있다. 한번 마음먹고 읽으면 한 달 정도면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싫으면 이한우의 책이나 박영규의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같은 책을 보면 된다.

 

고려사는 선대인 통일신라와 후대인 조선과 비교해보면 그 특징을 더 자세하게 알 수 있다. 무엇보다도 고려시대는 중국본토가 혼란기였다는 점을 모르면 그 역동성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중국은 당나라의 멸망(907) 이후 유목민족인 거란, 여진, 몽골이 연이어 대제국을 건설하고 한족을 양쯔강 이남으로 몰아냈다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송나라는 군사력이 약한 국가로서 천하의 정치군사적인 중심이 될 수 없었다. 결국 송나라는 문화적이고 경제적인 면에서 놀라운 발전을 이루게 된다. 송나라에서 시작된 자본주의, 신유학은 이후 동아시아 몇 백년을 틀지우는 역할을 하게 된다. 또한 유목민족의 흥기는 동시에 그들만의 문자를 발명하게 하고, 그것이 조선에도 영향을 미쳐서 새로운 문자인 훈민정음을 창제하게 하는 동력이 되기도 한다. 고려는 이 역동적인 시기에 자신의 독자성을 지키면서 북방의 민족들과 투쟁하기도 하고 협상하기도 하면서 역사를 만들어낸다.

 

조선은 중국에서 몽골이 망하고 명나라가 설립된 시기에 건국된다. 명나라는 250여년 만에 망하고 여진족에게 정복된다. 이 시기에 우리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호된 사건을 겪는다. 명나라에서 청나라로 교체되는 시기는 순식간이었다. 여진족은 금나라 때도 그랬지만 청나라 때도 일어나는 속도는 정말 순식간이었다. 명나라는 한순간에 썩어넘어지고 말았다. 그리고 청나라는 중국을 확고부동하게 장악하고 300여년을 통치한다. 명청교체기가 짧은 시기 안에 일어난 점을 감안한다면 중국은 명청조 시대 500년 가까이를 평화롭게 보낸 셈이다. 더불어 조선은 전반기를 평화 속에 보내고 중간에 50여년 가까운 세월 동안 임진왜란, 정유재란, 정묘호란, 병자호란 같은 호된 전쟁을 겪는다. 그러나 조선의 지배층인 신유학자들은 이 사건들을 이겨내지를 못하고 무너져 내린다. 성리학을 중국본토의 성리학자들보다도 더 깊이 내면화한 이 지배계급은 자신의 나라조차 지킬 힘이 없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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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 - 밀레니엄 프로파일 1
로버트 서비스 지음, 정승현 외 옮김 / 시학사 / 200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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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뒤흔든 열흘'이라는 존 리드의 책 제목처럼 1917년의 10월 혁명은 세계를 뒤흔들었다. 역사의 지축이 흔들렸다. 1917년 2월혁명으로 집권한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평화에 대한 인민들의 열망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전쟁은 계속되었다. 토지에 대한 농민의 요구도 무시되었다. 레닌이 이끈 볼세비키당은 임시정부를 무너뜨린 10월 혁명 이후에 즉각적인 전쟁중지를 선언했다. 토지는 농민의 것이라고 선언했다. 러시아 제국 내에 존재하는 소수민족의 권리를 억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런 조치들은 당대의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엄청난 도전이었다.

 

19세기 세계체제는 1차세계대전으로 인하여 무너졌다. 20세기는 레닌이 만든 공산주의 국가 소련과 1차대전의 피해를 겪지 않은 거대한 자본주의 국가 미국이 세계를 이끌고 간 시대였다. 1991년 소련이 스스로 붕괴하면서 20세기의 승자는 미국이 이끄는 자본주의세계체제라는 것이 증명되었다. 자본주의는 무소불위처럼 보였다. 그리고 21세기는 시작되었다. 2001년 9.11 테레와 함께. 미국은 한낱 테러집단에게 자신의 심장부인 뉴욕을 털렸다. 그리고 테러와의 전쟁이 시작되고, 이라크침공이 시작되었다. 결과는 역시 미국의 승리. 그러나 역사는 늘 댓가를 요구한다. 미국은 2008년에 1929년의 대공황에 버금가는 금융위기를 겪었다. 세계경제는 요동쳤다. 이후에 미국은 전대미문의 달러를 찍어내서 전세계에 풀어댔다. 그렇게 자신의 경제위기를 나머지 세계에 전가하고 자신은 겨우겨우 살아남았다. 이후 세계역사는 어떻게 굴러갈 것인지?

 

이 책은 이론 속의 사회주의를 현실 속에 최초로 구현한 소비에트연방을 만든 혁명가 레닌의 삶을 다룬 전기다. 러시아 전문 역사학자인 로버트 서비스는 러시아혁명사의 3대 거두인 레닌, 스탈린, 트로츠키의 전기를 모두 펴낸 바 있다. 이 책은 그 시리즈 중에서 첫번째로 ___년에 나왔다. 자료는 풍부하다. 그것은 서비스가 소련의 붕괴 후에 공개된 공산당의 기밀자료들을 풍부하게 참고할 수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래서 우리는 그동안 몰랐던 레닌이 혁명가가 되기 이전시절과 가족들, 죽기 몇 년 전 스탈린과 벌인 투쟁등을 알 수 있게 된다.

 

레닌의 아버지는 유명한 장학사였다. 사명감으로 불타는 교육계의 지도적 인사였던 그는 그 업적 때문에 나중에는 교육감이 되고, 세습귀족도 되었다. 그러나 갑작스런 병마로 급사하고 만다. 큰 아들이 막 대학에 진학하던 무렵이다. 이 공백은 그의 가족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의대에 진학한 큰 아들 알렉산드르는 나로드니키 테레리스트들의 조직에 들어가고 황제를 폭살시키려는 음모에 가담한다.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고 관련자들은 체포된다. 그리고 레닌이 그토록 흠모하던 형은 너무도 젊은 나이에 사형당하고 만다. 이것이 레닌의 삶과 그의 가족들에게 미친 영향은 정말 어마어마했다. 레닌의 가족들은 지역사회에서 하루 아침에 반역자의 집안으로 낙인찍히고 배제된다. 그들은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옮기게 된다. 이후 레닌은 형이 남겨둔 책들을 열심히 읽게 되고, 체르니셉스키의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는 그가 추구해야 할 삶의 전형을 발견한다.

 

20대의 레닌은 혁명가가 되기 위해서 자신을 치열한 연구와 실천에 몰아붙인다. 10여년의 연구와 조사, 유형지에서도 계속된 작업 끝에 그는 당대 러시아의 맑스주의자들 중에 일급이론가로 대접받게 된다. 그리고 혁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해외로 나간다. 그곳에서 러시아 맑스주의의 지도자인 플레하노프와 '노동해방'그룹을 만나게 되고,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을 재건할 정밀한 계획을 짜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나온 책이 그 유명한 <무엇을 할 것인가>이다. 이 책에는 불굴의 규율에 의해서 인도되는 직업혁명가들의 조직과 전국적 정치신문에 대한 구상들이 들어있다.

 

재미난 것은 레닌이 망명생활을 하던 무렵에 그는 아내인 그룹스카야와 더불어 그의 장모도 같이 모시고 살았다는 것이었다. 또 레닌의 어머니는 레닌을 비롯하여 모두 혁명가가 된 자신의 아들과 딸들(레닌 포함 5명)을 뒷바라지하기 위해서 헌신한다. 레닌은 그의 어머니를 비롯하여 형제자매들에게 아버지처럼 존경받고 사랑받는 존재였다고 한다. 가족들은 아버지와 큰형이 사라진 자리에 레닌을 앉혔다. 촉망받던 인재였던 큰형의 죽음은 레닌의 가족 모두에게 제정러시아체제에 대한 증오를 하나의 가족적 이상으로 만들 수 있게 만들었다. 레닌은 가족의 기대에 맑스주의 진영의 불세출의 이론가, 조직가라는 명성으로 응답했다. 레닌은 가족들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 망명생활을 한 직업혁명가였다.  

 

레닌이 러시아에 혁명을 가져오기 위해서 노력한 것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렇지만 혁명가들의 노력과 무관하게 혁명은 결정적으로 체제의 위기상황인 전쟁과 더불어 찾아온다. 1905년 혁명은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신생국가 일본에 패배하면서 느슨해진 틈을 타서 일어난다. 또 1917년의 2월혁명도 1차대전에 참전한 러시아가 유럽에서 고전하는 동안 일어난 인민들의 삶의 위기가 가져온 사건이었다. 인민들은 전쟁이 가져온 고통에서 벗어나기를 원했다. 그러나 유럽자본주의 열강들이 깊이 얽힌 이 전쟁에서 발을 빼기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케렌스키가 이끈 임시정부는 결국 전쟁을 계속하기로 결정했고, 인민들의 마음은 이미 임시정부에서 떠나고 있었다. 이 상황을 꿰뚫어본 사람은 볼세비키 안에서도 레닌 밖에 없었다. 10월 혁명은 레닌이라는 전략가가 없었다면 결코 성공하지 못했을 사건이었다. 10월 혁명은 사실상 레닌이 이끌어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10월 혁명의 결과는 가혹했다. 즉각적인 전쟁중단을 선언한 러시아에게 독일은 러시아영토의 1/3을 요구했다. 더구나 그곳은 러시아의 곡창지대인 우크라이나를 포함한 러시아의 핵심지역이었다. 마치 한쪽 다리를 잘라내는 것과 같은 일이었다. 레닌은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을 지켜내기 위해서 독일의 요구를 들어준다. 이른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러시아는 세계대전에서 홀로 떨어져나온다. 이것은 곧 영국과 프랑스가 보복전 성격을 가진 간섭을 시도하고, 러시아 내에서 내전이 발생함으로써 러시아혁명은 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상태로 전개된다. 10월의 봉기로 대중들은 압도적으로 볼세비키를 지지하고, 모든 문제는 쉽게 풀릴 거라고 낙관했던 볼세비키들은 무장봉기와는 규모면에서 비교할 수도 없는 거대한 내전에 돌입하게 된다. 이 때 식량공출, 인민의 적에 대한 탄압, 부농에 대한 몰수 같은 전시 공산주의 정책이 시행되고, 이 정책은 나중에 스탈린이 1930년대에 농업집단화를 시행할 때 참고가 되었다. 

 

내전을 승리로 마무리한 볼세비키에게 던져진 새로운 도전은 전시공산주의의 가혹한 정책을 거부하는 인민들의 저항이었다. 혁명의 선봉대였던 집단들이 오히려 반란을 선동하는 상황에서 레닌은 또 한번의 과감한 정책전환을 단행한다. 이른바 '신경제정책'(네프)을 도입하여 자본주의적 요소와 과감하게 타협한다. 생산력을 높이고 인민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 내린 결단이었다. 마치 1980년대 중국의 덩사오핑이 내린 개혁개방정책과 비슷한 방향전환이라고 보면 된다. 그렇지만 이런 전환을 이룩한 레닌은 그가 만들어낸 사회주의 국가를 더 이상 끌고갈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한다. 일종의 일중독자였던 레닌도 버틸 수 없을 정도로 업무가 폭주한 탓에 그의 건강이 급속하게 나빠졌던 것이다. 결국 레닌은 모스크바를 떠나 요양을 갈 수 밖에 없었다. 일은 서기장인 스탈린에게 맡기게 된다. 그러나 레닌은 요양지에서도 정치적이고 행정적인 관심사에서 멀어질 수가 없었다. 결국 다시 일에 간섭하게 된 레닌의 건강은 급속도로 나빠지고, 어느 순간 일어난 급격한 발작은 몸의 한쪽을 마비시키고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상태의 레닌을 만들어낸다.

 

한편 급속하게 자신의 영향력을 넓혀가던 스탈린의 야욕을 뒤늦게 발견한 레닌은 스탈린을 몰아내기 위한 투쟁을 힘겹게 벌인다. 레닌의 마지막 투쟁은 사실상 스탈린을 제거하고 좀 더 편협하지 않은 지도자를 볼세비키의 우두머리로 세우려는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 실패한다. 그리고 이 실패는 스탈린이 이끌고 간 30년 이후의 소련사회를 전대미문의 공포정치에 의해서 통치되는 이상한 사회주의국가로 만들고 말았다. 과연 레닌이 이후 20여년간을 통치했다면 소련을 대숙청과 강제노동이 난무하는 국가로 가도록 이끌었을까? 글쎄 알 수 없는 일이다. 레닌도 민주주의자는 아니었으며,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사회주의국가론으로 제시한 것은 레닌이 10월 혁명 직전에 쓴 <국가와 혁명>이었으니까. 그래도 스탈린처럼 무자비하지는 않은 좀더 인간적인 얼굴을 한 사회주의국가를 만들지 않았을까 하고 상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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