슈테판 츠바이크의 메리 스튜어트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이마고 / 200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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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에 몸을 바친 인간은 더 이상 자기 자신이 아니다. 자기 천성의 법칙이 아닌 다른 법칙에 복종하여야 하는 것이다."(48쪽) 
 
메리 스튜어트의 삶이 비극적으로 끝날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이 구절에 담겨 있다. 정치가인 자기의 본질을 외면하고 자기 내면의 정열이라는 자연법칙을 따르는 순간 그녀의 삶은 구렁텅이로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운명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의 적대자였던 엘리자베스 여왕은 메리 스튜어트와 정반대로 행동했다. 그래서 엘리자베스는 한 사람의 여자로서는 불행했을지도 모르지만 현세에서 승리자가 되었고, 대영제국의 기틀을 놓는 역사적인 위업도 달성했다.  글쓴이인 스테판 츠바이크는 이 책을 통틀어서 시종일관 메리 스튜어트와 엘리자베스의 성격과 성장과정, 사고방식, 통치행태 등을 비교해서 보여주고 있다. 메리 스튜어트가 중세시대의 이상을 물려받은 낭만주의자이며, 골수 가톨릭인데 비해서 엘리자베스는 새로운 상공업시대의 현실을 현실을 꿰뚫어보는 혜안을 지닌 현실주의자이며, 개신교도이다. 이 둘의 대결은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의 대결이며, 중세와 근대의 대결이면서, 가톨릭와 개신교의 대결이었다. 

 메리 스튜어트는 1542년 스코틀랜드왕인 제임스5세의 딸로 태어났다. 당시에 30세였던 아버지는  메리가 태어난지 6일만에 숨을 거두고 만다. 메리는 9개월 뒤에 스코틀랜드의 여왕으로 등극했고, 정치는 그녀의 어머니가 섭정을 했다.  청소년기에는 프랑스의 앙리2세의 아들인 프랑스아2세와 결혼을 하고, 나중에는 프랑스 왕비가 되었다. 당대 유럽 최고의 신분을 지닌 사람이었다. 그러나 남편인 프랑스 왕이 1년만에 사망하면서 그녀는 결국 스코틀랜드로 다시 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 

 당대의 스코틀랜드는 유럽의 변방이며 문화적 오지였다. 또한 종교개혁의 와중에서 가장 격렬하게 가톨릭 신앙과 개신교 신앙이 부닥치는 전장이기도 했다. 그곳에서 메리 스튜어트는 가톨릭 신앙을 지닌 여왕으로서 다수의 개신교귀족들과 대립할 수 밖에 없었다. 메리 스튜어트는 한 사람의 여자라로서 대단히 매력적인 인물이어서 사람을 끄는 남다른 매력이 있었다. 또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여자여서 자신의 왕권에 대해서는 절대 양보하지 않는 고집을 지니고 있기도 했다. 이런 메리스튜어트의 삶에 닥친 위기는 바로 '사랑'때문에 온다. 두번째 결혼 때 그녀는 겨우 스물세살이었다. 남편은 스코틀랜드의 귀족 단리였다. 빼어난 외모를 지니고 여자를 끄는 매력이 있었던 단리에게 메리 스튜어트는 단번에 마음을 뺏기고 만다. 애초에 두번째 남편으로 선택하고자 했던 대상은 강력한 왕권의 소유한 사람이었는데, 사랑 때문에 그녀는 귀족들 중의 한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단리와 결혼을 통해서 메리 스튜어트는 아들 제임스6세-나중에 통합 잉글랜드의 왕이 되는 제임스1세-를 낳게 된다. 문제는 단리라는 사람이 정치적으로 너무 무능했다는 사실이다. 

단리는 나중에 메리의 왕권에 지나친 간섭을 일삼게 되고, 메리는 단리의 정치적 판단을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러다가 메리의 삶을 결정하는 사건이 일어나게 된다. 메리가 보스웰 백작을 사랑하게 된 것이다. 보스웰 백작은 강력한 군사지도자의 한 사람이었다. 보스웰이야말로 진짜 사내였다. 츠바이크의 표현을 옮겨본다. " 그동안은 오직 애송이 같은 남자들만 겪어보았다. 그들은 병들고 허약한 남자들이었다." 애송이 같은 남자들이란 병사한 첫번째 남편인 프랑수아2세와 두번째 남편 단리를 말한다. 두번째 남편 단리는 폭사당한다. 여기에 가장 혐의가 많은 사람은 보스웰 백작이었다. 온 나라에 보스웰 백작과 메리가 합작하여 단리를 죽였다는 소문이 번졌다. 그런데도 메리는 보스웰 백작을 가장 신임하고, 권력은 보스웰이 쥐고 군사독재를 실시하게 된다. 메리는 보스웰과 자신의 정치적 운명을 같이 하려고 한다. 결국 둘은 축복받지 못한 결혼을 하게 되고(그 사이 내막이 복잡하다), 귀족들은 '단리의 살해자 보스웰 처단'을 깃발로 내걸고 반란을 일으킨다. 메리여왕은 보스웰과 같이 귀족들에 대항하다가 실패하고 만다. 결국 보스웰은 망명하고, 메리 여왕은 어느 섬에 유폐된다. 귀족들은 메리의 한살짜리 아들인 제임스6세를 왕으로 옹립하고, 메리의 이복오빠인 모레이백작이 전권을 쥐게 된다. 메리는 1년 뒤에 탈출하여 반란세력 타도를 목표로 봉기하지만, 결국 귀족연합군에 패배하여 도망가게 된다. 

 메리가 스코틀랜드를 탈출하여 망명지로 선택한 곳은 잉글랜드였다. 잉글랜드 여왕은 엘리자베스1세였다. 둘 사이에는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을 둘러싼 알력이 있었다. 둘 다 헨리7세의 손녀였기 때문에 메리는 잉글랜드의 왕위계승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메리는 명시적으로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에 대한 포기를 선언한 적이 없었다. 더구나 엘리자베스1세는 한 때 아버지인 헨리8세에 의해 '사생아'라는 선언을 당하기도 했던 전력이 있었다. 엘리자베스1세로서는 왕권에 대한 알레르기 비슷한 감정상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곳에 망명했으니 늑대의 소굴을 피해서 범의 소굴로 뛰어든 셈이었다. 엘리자베스1세는 메리스튜어트를 사실상 감금상태로 18년 동안이나 잉글랜드에 잡아둔다. 메리는 잉글랜드에 유폐되어 있으면서 사실상 잉글랜드 가톨릭의 희망 비슷한 존재가 되었던 모양이다. 개신교도인 엘리자베스가 제거되면 바로 메리는 왕위계승권자로서 가톨릭을 다시 잉글랜드에 살릴 수 있는 존재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감금되어있던 동안에도 메리는 끊임없이 스페인과 프랑스, 로마의 가톨릭 세력에게 구원과 반란을 요청하는 원격정치를 해나간다. 그러다가 엘리자베스1세와 월싱엄(일종의 경찰총수?)이 펴놓은 그물에 걸려 결정적인 물증을 제공하고 만다. 이른바 '배빙턴 모반사건'에 걸려든 것이다. 가톨릭반란 세력인 배빙턴에게 엘리자베스 암살을 종용하는 편지에 확답을 써 보냄을 보써 반란세력의 수괴 비슷한 위치를 차지하게 된 것이다. 결국 이 사건 때문에 메리는 잉글랜드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587년 2월에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 그녀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잉글랜드 왕위계승권에 대해서는 양보하지 않았다. 결국 엘리자베스1세의 사후에 잉글랜드는 메리의 아들이었던 제임스6세(잉글랜드에서는 제임스1세)가 통치하게 된다. 이 때부터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는 사실상의 통합국가로 나아가게 된다. 

메리는 근세유럽에서는 왕으로서는 최초로 참수형을 받은 존재였다. 메리 이후에 메리의 손자인 찰스1세는 청교도혁명으로 역시 참수형을 당하게 된다.  프랑스에서는 루이16세와 마리 앙투와네트가 참수형을 받은 왕과 왕비였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메리는 유명하기도 하고, 또한 골수 가톨릭이면서 스코틀랜드의 자존심을 대변하는 존재로서 유명하기도 하다. 그녀는 엘리자베스1세와 대비되면서 다루어질 수 밖에 없는 존재다. 엘리자베스1세는 어린시절과 청소년시절을 고난 속에서 보낸 것에 비해서 메리는 성인이 되기까지는 그야말로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타고난 여왕이요 왕비라고 할 수 있겠다. 외모와 교양도 당대 유럽에서는 비길 바가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점들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정치가로서 지녀야할 냉혹하고 계산적인 부분에서 부족한 것이 많았다. 두번째 남편인 단리의 죽음 전후에 그녀는 정치가로서 계산적이지 못한 행태를 드러낸다. 이것이 결국 그녀의 몰락을 가져온 결정적인 전기가 되고 만다. 이에 반해 엘리자베스는 그녀가 총애했던 더들리백작의 부인이 사고사로 죽는 일이 벌어지자, 역시 유언비어에 휩쓸리게 된다. 이 때 엘리자베스는 정치가로서 판단력을 잃지않고 더들리를 과감하게 멀리하는 결정을 단행한다. 이런 점에서 메리 스튜어트는 경쟁자인 엘리자베스에게 모자랐고, 결국에는 엘리자베스의 포로가 되었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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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잔의 차
그레그 모텐슨.데이비드 올리비에 렐린 지음, 권영주 옮김 / 이레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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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그 모텐슨은 평범한 미국인은 아니다. 여러모로 특이한 이력을 지닌 사람이다. 아버지는 루터교 목사였지만, 아프리카의 탄자니아에서 목회를 하다가 나중에 미국에 가서 40대 후반에 죽었다.아버지 탓에 그레그는 어린 시절을 탄자니아의 밀림에서 다양한 흑인부족들과 같이 지내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또한 그레그에게는 평생 불치병에 시달리가 아주 젊은 나이에 요절한 여동생이 있었다. 여동생에 대한 애틋한 사랑의 마음이 그가 파키스탄의 산골 오지에 사는 사람들에게 학교를 지어주는 별난 사업을 하게 된 까닭이기도 하다.  

그레그 모텐슨은 군인경력도 있고, 간호사 경력도 가지고 있는 산악인이었다. 여동생이 어느날 죽게 되면서 그레그는 여동생을 기념하기 위해서 K2 등반대에 비상간호 담당으로 참가한다. K2봉우리에 여동생의 유품을 묻어주기로 결심했던 것이다. 그러나 등반은 실패하고, 내려오는 길에 그는 길을 잘못 접어들게 된다.힘든 하산길에 우연히 그레그는 코르페 마을에서 쉬게된다. 거기서 그는 하지 알리라는 마을 촌장을 만난다. 촌장의 따뜻한 대접에 감사하여 촌장에게 선물을 주려고 하자, 하지알리는 그 대신 학교를 지어달라고 부탁한다. 그들은 대부분이 문맹이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자식들에게는 지식의 빛을 안겨주고싶었던 것이다. 하지 알리는 쿠란을 암송하면서도 쿠란을 읽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쿠란에는 '순교자의 피보다 학자의 잉크가 더 귀하다'는 문구가 있다. 지식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전통이 이슬람에는 있다.

이렇게 해서 그레그가 파키스칸 오지에 학교를 지어주려는 사업은 궤도에 오른다. 그는 미국으로 돌아와서 유명인사들에게 500여통의 편지를 보낸다. 그 중에 답장이 돌아온 것은 단 한통. 장회르니라는 사람이었다. 정보통신업계의 거물이면서 엄청난 부자였다. 그에게 회르니는 몇만 달러의 기부를 약속하고 학교를 지은 뒤에 사진을 보내달라고 한다. 그레그는 학교를 지어주기 위해서 마을로 간다. 그러나 파키스탄에서 그는 좋은 사람도 만나지만, 눈치빠른 사람도 만난다. 온갖 역경을 헤치고 마을에 갔더니, 마을 촌장을 새로운 이야기를 한다. 학교보다 다리가 우선이라는 것이다. 다시 미국으로 돌아와서 회르니에게 말하니 회르니는 다리를 지어도 된다고 말한다. 그렇게 해서 그레그는 계곡에 다리를 건설한다. 이 다리는 그 계곡의 마을을 문명세계에 연결시켜주는 생명의 다리였다.  

코르페에 학교를 지은 뒤에 그는 파키스탄 계곡에 수십개의 학교를 짓게 된다. 이것은 장 회르니가 유산으로 남긴 100만 달러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다. 회르니는 그레그를 '중앙아시아협회' 대표로 임명하고, 협회를 통해서 학교짓는 사업을 하게 한다. 그 동안에 그는 산악인을 아버지로 둔 여자를 만나서 결혼을 하고 자식도 낳게 된다. 그 와중에 2001년 9.11테러가 일어나고, 파키스탄 변경지대는 탈레반과 알카에다에 대한 공격의 거점이 된다. 운명적으로 아프카니스탄에 연결된 그는 아프칸에 대한 침략과 복수가 아니라 교육을 통한 연대를 상징하는 인물이 된다. 순식간에 엄청난 후원금을 모은 그는 새롭게 아프카니스탄의 오지에 새로운 학교를 짓는 일을 하게 된다. 이렇게 히말라야 산맥의 오지에 학교를 짓는 대단한 일을 하게 되는 그레그 모텐슨의 평생의 삶을 담고 있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다.  

이 책은 우연한 만남을 통해서 자신의 필생의 사명을 찾아낸 한 사람의 일대기이다. 그는 두 사람을 만나면서 삶을 새롭게 시작하게 된 것이다. 미국의 장 회르니와 파키스탄의 하지 알리라는 두 현인의 도움으로 그레그 모텐슨의 삶은 전혀 다른 길로 접어들게 된다. 사람의 삶이 이렇게도 바뀔 수 있다는 것을 여기서는 보여준다. 그가 아내를 만나게 되고,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는 것도 이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그레그가 하지 알리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묻는다. 문맹이지만 그가 만났던 사람 중에서 가장 지혜로운 사람이었던 하지 알리를 끌어안고 한 가지만 더 가르쳐 달라고 청했다. 다음에는 그를 만날 수 없음을 알고, 그는 묻는다. 
"먼 훗날에 그 날이 오면 그 때는 전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하지 알리는 코르페 K2의 정상을 올려다보면서 할 말을 진중히 골랐다.
"바람을 말을 듣게."  

히말라야 산맥이라는 고지대에서 사는 어느 늙은이의 지혜는 현대도시의 최고 지식인 못지 않은 내공을 지니고 있다. 지혜란 책속에, 혹은 학교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님을 하지 알리는 가르쳐 준다. 그래서 나는 그레그 모텐슨이 지은 이 학교들이 히밀라야 오지에 지식의 단비를 퍼붓기도 하겠지만, 문명의 해악도 가져오지 않을까 의문스럽기도 했다. 정답은 없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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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의 독서 - 세상을 바꾼 위험하고 위대한 생각들
유시민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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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좀 설렁설렁 읽었다. 너무 쉽게 넘어가는게 흠일 정도로 잘 넘어갔다. 유시민도 어쩌면 그렇게 쉽게 쓴 책인 것 같았다. 글이 논리적인 짜임새를 가진 책은 아닌 것 같다. 여기서 소개한 대부분의 책과 글쓴이를 나도 익히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좀 긴장해서 읽었던 곳은  소스타인 베블런의 <유한계급론>과 헨리 조지의 <진보와 빈곤>, 하인리히 뵐의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를 소개한 꼭지였다. 그 중에서도 제일 재미있었던 부분은 하인리히 뵐의 책을 소개한 곳이었다. 내 느낌에도 유시민의 글발이 제일 살아있는 곳이 여기였던 것 같다.  

소설 속에서 카나리나 블룸은 황색언론에 의해서 자기의 명예를 잃어버리고 거기에 분노해서 기자를 권총으로 죽여버린다. 우리의 전직대통령은 잃어버린 자기의 명예를 위해서 자기의 목숨을 버린다. 차이점은 있지만 공통점은 있다. 정도를 잃어버린 언론의 무책임한 보도와 검찰의 피의사실 사전 공표에 인해서 명예를 잃었다는 점이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미디어법이 현실화되면 대한민국의 언론환경은 지금보다 더 강자숭배, 시장친화, 경쟁찬양의 경향이 노골화될 것은 불을 보듯 뻔하다. 유시민이 하인리히 뵐의 소설을 소개하는 까닭도 그 사실을 알리기위해서일 것 같다. 하인리히 뵐은 노벨문학상 수상작가이다. 그런 작가도 당대 독일의 유력신문-거기도 일등신문이다-에게 좌파,빨갱이 딱지를 받고 괴로웠던 모양이다. 언론은 선출되지 않은 권력이다.  

이 책속에서 또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다. "좋은책은 그 자체가 기적이다. 책보다 위대한 인류의 유산이 달리 또 있겠는가?"  책은 기적같은 일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어떤 기적인가? 지혜와 소통. 하인리히 뵐의 책에 이런 구절도 있단다. "폭력은 무지에서 발생한다. 무지란 처지를 바꾸어 놓고 생각해보는 능력의 전적인 결여를 의미한다." 과연 옳은 말씀이다. 우리를 상대를 이해할 수 없을 때 벌컥 화를 내거나 폭력을 쓰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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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은 이렇게 조용히 - 88만원세대 새판짜기
우석훈 지음 / 레디앙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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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시대가 오고 있다. 이것은 조한혜정 교수가 추천사에서 밝힌 말이다. 무서운 사회란 어떤 사회인가. 조한혜정은 이렇게 말한다. "경쟁과 적대의 원리가 판을 치는 시대는 내부를 분열시키고 아무도 행복하지 않은, 무시와 모욕으로 점철된 사회를 만들어 낸다." 한계가 없는 철저한  경쟁이 만들어내는 사회의 모습을 우리는 지금 보고 있는 중이다. 이보다 더한 시대가 올 수도 있다는 것일까? 우리 아이들이 살아가야 할 사회가 이렇듯 경쟁과 적대의 원리에 충만한 곳이 될 것이라는 예감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우울했다. 이 문제의 해결책은 없을까?

우석훈은 혁명이라는 주문을 불러낸다. 혁명이라는 용어는 9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현실적으로, 학문적으로 쓸모가 없어졌던 말이 아닌가. 그 대신에 개혁이라는 말이 지난 10년 동안 우리 사회를 지배해왔다. 이명박 시대 2년차인 지금은 개혁이란 말조차도 사라져버렸다. 대신에 '잃어버린 10년'이니 '녹색성장'이니 '4대강 살리기'같은 빈껍데기 말들이 현 시대를 지배하는 언어가 되었다. 이런 시대에 2009년 지금 시점에서 혁명이라는 용어를 불러낸 우석훈의 의도는 무엇일까? 과연 우리 사회가 혁명적인 변화가 필요한 시점이란 말이던가. 그리고 그가 주문한 혁명의 내용은 어떤 내용이던가. 

우석훈이 원하는 혁명은 폭력혁명이 아니다. 찰리 채프린과 코코 샤넬로 대표되는 문화적이고 부드러운 혁명이다. 혁명의 주력부대는 20대로 본다. 우석훈은 20대 청년이 만명만 모이면 우리 사회에 획기적인 변화가 올 것이라고 장담한다. 우리 역사를 돌이켜보면, 80년대의 전대협 수준의 조직을 건설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말하는 것 같다고 느꼈다. 그런 수준의 에너지가 모이면 그것이 가지는 파괴력이 엄청날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우석훈은 유럽의 68혁명과 최근 일본의 반빈곤투쟁에 참여하는 청년들의 투쟁도 많이 참고하고 있다. 우리도 지난해에 100만 명 가까운 사람이 참여하는 대규모 항의시위가 있지 않았던가. 우석훈 말마따나 그 항쟁은 규모와 기간의 면에서 68혁명을 뛰어넘는 정도였는데, 왜 사회는 변하지 않았을까. 이것도 깊은 고뇌가 필요한 질문일 것 같다.

2008년의 촛불항쟁은 10대와 30-40대의 연대투쟁 같은 성격이 강했을까? 이른바 386세대의 부모와 그 자식인 10대들의 연대투쟁과 같은 의미를 지녔다는 진단도 많이 나왔다. 20대의 조직적인 참여는 많지 않았다. 20대는 사회적으로 의미있는 모습의 집단적인 참여를 보여주지 못했으며, 그로 인해 그들은 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한다는 것이 우석훈의 진단이다.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모여서 외치지 않으면 자기집단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집단의 요구를 관철시킬 수가 없다.  그런 의미에서 20대들이 모여서 자기들의 요구를 명확하게 표현하고 정치적, 사회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하면 시대의 희생양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얼마전에 우리는 경제위기를 넘어서는 대책으로 대졸 신입사원 연봉을 20-30% 삭감하는 조치를 취했다. 20대를 희생양 삼은 대표적인 조치의 하나인데, 여기에 대해서 20대는 조직적으로 반항하지 못했다. 이것이 20대의 집단적인 무력증을 보여준 하나의 사례로 거론되고 있기도 하다.   

20대의 당사자운동을 이끌어내기 위해서 먼저 '20대 권리선언'을 할 필요를 이야기하고 있다. 여기서 주장하고 있는 권리는 노동권, 주거권, 보건권, 교육권이다. 여기에다가 군복무기간단축과 사회복무제도의 강화를 더하여 제안하고 있다. 사실상 이것은 사회민주주의와 복지국가론에서 주장하고 있는 핵심적인 사안들이다. 이미 유럽의 주요선진국들에서는 보편적으로 실시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미국만 예외라고 할 수 있다. 386세대들이 정치적 민주주의를 얻기 위해서 오랫동안 싸워왔다면 그 다음 바통을 이어받아서 사회적,경제적 민주주의를 정착하기 위해서 후배세대들이 투쟁해야만 민주주의는 완성에 이를 것이다. 이것을 해낼 수 없다면 우리는 복지국가의 문턱에서 좌절하고, 토건세력과 경찰이 힘쓰는 이류국가의 국민으로 늙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이러한 전환은 빠를 수록 좋은데, 이것을 두손들고 환영할 세력보다는 온몸으로 막고 나설 세력이 더 많다는 것이 문제다. 이해당사자들이 앞장서서 문제를 제기하지 않으면 희망은 희망으로만 남을 뿐이다. 늘 그렇듯이 대리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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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지음, 정영목 옮김 / 해냄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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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읽는 자들을 배려하는 책이 아니다.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독서를 불편하게 느꼈다. 그 전에 읽었던 소설책이 너무 술술 넘어갔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 전에 두 주 동안 할레드 호세이니의 <연을 쫒는 아이>와 <천개의 찬란한 태양>을 읽었는데, 언제 그 두꺼운 책을 다 읽었는지 모를 정도로 책읽는 일이 쉬웠다. 이 책은 무려 3주 동안이나 들고 있었다. 200쪽 정도 읽고나니 더 이상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이유가 무엇일까를 생각해 보았는데, 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은 두 가지다. 하나는 사라마구의 글쓰는 방식이다. 소설이 아니라 논픽션글을 보는 것처럼 빡빡하게 들어찬 글의 숲을 헤쳐나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이었다. 문장 안에 말하는 이와 듣는 이를 구분해주는 문장부호 같은 것은 전혀 없다. 따옴표도 없고, 물음표조차도 없다. 오로지 반점과 온점이 있을 뿐이다. 거기다가 장이 바뀌면 나오는 소제목도 없고, 장 번호조차도-1,2,3 하는 식으로 구분되는-없다. 책의 내용이 눈먼 자들의 곤혹함을 다루는 것처럼 책을 읽는 자들도 문장의 늪 속에서 헤매야 했다.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인지는 잘 모르겠다. 어쨋든 나는 그게 힘들었다. 또 하나의 이유는 이 소설에 희망이 안 보인다는 것이다. 소설이 거의 끝나갈 때까지 희망-눈을 뜨게 되고, 세상이 질서와 평화를 되찾는-의 싹을 도무지 보여주지 않는다는 것이 읽는 이의 고통을 배가시켰다.    

주제 사라마구는 포르투갈의 태생으로 노벨상을 수상한 당대 최고의 작가이다. 경력을 보니 재미있는 것은 그가 20대에 소설가로 데뷔하고서도 상당히 긴 세월동안 소설을 쓰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 기간에 그는 공산당 활동을 했다고 한다. 포르투갈의 현대사를 전혀 모르는 나로서는  그가 왜 그랬는지는 추측만 할 뿐이다. 60살 가까운 나이가 되어서야 소설을 써 내기 시작한 그는 이후에 '환상 역사소설'이라는 장르를 개척하면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킨 작품들을 써냈다. 위대한 소설가들이야 대부분 당대의 이단적인 존재였다는 점에서 그도 공통점이 있기는 하다. 그와 비슷한 이미지로 겹쳐지는 작가는 남미의 마르께스,터키의 오르한 파묵, 우리나라의 황석영 같은 이들을 떠올릴 수 있겠다. 책뒤에 보니 사라마구의 책들은 많은 분량이 우리나라에 번역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이 책은 '해냄'출판사에서 나왔는데, 다른 책들도 대부분 '해냄'출판사에서 나온 것 같다.  

이런 책들을 묵시록적인 책이라고 하던가. 미래세계에 닥치는 무시무시한 파탄을 보여주는 문학갈래들이다. 유토피아에 반대되는 개념인 디스토피아 소설이라고도 할 수 있다. 까뮈의 <페스트>나 오웰의 <1984> 같은 소설들이 대표적인 경우에 속한다고 한다. 하나같이 미래세계의 암울함을 비춰보임으로써 인류의 추악한 면을 반성하게 하는 책들이다. 그 속에는 저항하는 고귀한 인간성을 가진 존재들이 늘 등장한다. 카뮈의 <페스트>는 도시를 덮친 질병으로 인하여 변해가는 인간사회를 다룬다는 점에서 이 소설과 비교해서 한번 읽어보고 싶은 책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시작은 간단하다. 어느날 갑자기 어떤 한 남자가 갑자기 눈 앞이 안 보이는 병에 걸린다. 도로 한 가운데서 이 사내는 눈이 멀어 버린다. 이어서 안과 병원에 간다. 눈에 안과적인 병의 흔적은 전혀 없는 특이한 질병이다. 이어서 안과 의사도 눈이 먼다. 이 백색질병-눈앞에 보이는 세상이 마치 우유 속처럼 뿌옇게만 보이는-은 순식간에 도시를 덮친다. 정부에서는 병에 걸린 이들을 수용소에 격리시킨다. 정신병원 건물이 수용소로 이용되는데, 이 곳에서는 인간사회가 파괴될 때 생길 수 있는 온갖 야만적인 일들이 발생한다. 곳곳에 넘치는 오물들, 음식을 둘러싼 아귀다툼, 사적인 이익을 갈취하는 폭력집단의 등장, 여자들에 대한 강간, 살인.  이 곳에서 눈이 멀지 않은 사람은 딱 한 사람, 의사의 아내 뿐이다. 작가는 이들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는다. 의사, 색안경을 쓴 여자, 처음으로 눈 먼 사내, 의사의 아내 하는 식으로 부를 뿐이다. 의사의 아내는 마치 여신 같이 여겨진다. 어쩌면 작가는 그런 의도성을 내포하면서 이 소설을 쓴 것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야기의 중간 정도에서 계속 읽어나가는 것이 힘들었다. 눈먼 자들 중에서도 총을 가진 폭력집단이 등장하고, 그들이 음식을 독점하고 배급하면서 사람들에게 돈과 귀중품을 요구하는 대목에서 주춤했다. 200쪽 정도 되는 부분이었다. 어지간한 분량의 소설같으면 결론부 정도에  해당할 것 같다. 예전 같았으면 이 쯤에서 소설을 던져버렸을지도 모르겠다. 어쨋든 이번에는 끝까지 읽기로 마음먹고 계속 나아갔다. 드디어 강간과 살인, 화재, 탈출이라는 대목이 이르자 이야기가 흥미진진해지기 시작했다. 왜 나는 이 대목에서 흥미를 느꼈을까 하고 스스로에게 묻기도 했다. 감정이입을 한다면 어둡고 무시무시한 장면이기도 한데 왜 이런 것에 끌릴까. 우리가 추리소설이나 모험소설에 열광하는 이유의 한 단면도 여기에 있을 것 같다.  영화로도 나왔다고 하는데, 극장에서는 간판이 내려졌다. 비디오로 나오면 한번 빌려서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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