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 교과서 논란 넘어서기
조동일 지음 / 지식산업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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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일 교수의 <한국 문학통사>를 읽어본 사람은 그가 얼마나 넓은 시야를 갖고 있는 줄 짐작할 것이다. 그는 문학사를 통해서 역사를 보는 새로운 거대이론을 세우려고 한다. 그가 역사를 바라보는 역사철학은 이른바 생극론이다. 생극론은 유럽의 변증법과 비슷한 측면도 있지만 좀 다르다. 나는 이 생극론이라는 것이 변증법과 다르게 순환론적인 측면이 있다고 느꼈다. 조동일 교수는 역사를 고대, 중세, 중세에서 근대로의 이행기, 근대라는 틀로 이해한다. 중세는 전기와 후기로 나뉜다. 근대가 가진 많은 문제들을 그는 중세의 틀을 다시 도입하여 극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게 이른바 생극론적 바탕에서 주장되는 것이다.

 

조동일 교수는 이번에 일어난 국사교과서 국정화 문제도 좀 다른 시각에서 바라본다. 현 정권이 추구하는 국사교과서 국정화는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일이라고 잘라서 말한다. 오히려 그가 이 책에서 주장하는 대상은 국사교과서 국정화에 반대하는 야당들이다. 그들이 문제를 국사교과서 국정화에만 좁혀서 보면 안 된다는 것이다. 좀 더 거시적으로 역사문제를 접근하자고 한다. 지금처럼 국사에 매몰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국사의 차원을 넘어서서 동북아시아 문명사의 차원에서 접근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이야기의 배경이 되는 사상이 2010년에 나온 <동아시아문명론>에 나온다고 한다.

 

책에는 한반도의 역사가 가진 특징을 주변나라들과 비교하는 대목이 나온다. 중국과 일본, 베트남과 비교했을 때 우리나라는 내전이나 외침이 적은 편에 속했다고 한다. 칼보다는 글로 논쟁하는 역사가 깊었다고 말한다. 반도 국가라서 물산도 풍부하고 전쟁도 적은 편이라서 백성들이 살기가 편했다고 한다. 이건 주변 나라들의 역사와 비교해서 그렇다는 말이다. (오해없기를). 또한 중국에 대한 사대정책도 당대의 국제관계에 비추어보면 우리가 오해하듯이 식민지나 반식민지 같은 성격이 아니라 평화로운 국제체제를 만들기 위한 일종의 협약 같은 것으로 파악한다. 이런 면에서 보면 역사는 굳이 긍정적인 시각으로 볼 것도 없이 이미 긍정적이다. 우리는 외침이 오면 적극적으로 저항한 민족이었다. 베트남과 비슷한 특징을 공유하고 있다. 세계사적으로 보면 이렇게 식민지화에 저항한 민족도 드물다는 말이다. 다른 분야도 그렇듯이 역사는 비교가 중요하다. 남과 비교해보아야 나의 상태를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것이 쉽다는 것이다. 조동일 교수가 <한국문학통사>이후에 주력한 작업이 비교문학이다. 세계사적인 비교를 통해서 비로소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학의 특성이 밝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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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의 외교 담판 - 역사상 가장 성공한 외교
장철균 지음 / 살림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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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907년 당나라가 멸망했다. 동아시아를 지배하던 거대한 제국은 어느 순간 무너져 내렸다. 동아시아에 생긴 힘의 공백은 지각변동을 가져왔다. 중국 문명의 근거지인 화북지방에서는 후량(907-923), 후당(923-936), 후진(936-946), 후한(947-950), 후주(951-960) 같은 나라들이 세워지고 망하는 과정을 되풀이했다. 당나라처럼 강한 나라는 없었다. 화남,강서지방에서는 10개의 나라가 세워졌다. 이 시기를 중국사에서는 5대10국의 혼란기라고 한다.

당나라 멸망 후 50년 가까운 혼란기를 극복하고 중국본토에는 960년에 송나라가 건국되었다. 거란이나 고려에 비하면 송은 후발국가라고 볼 수 있다. 당시의 최강국가는 거란이 세운 요나라였다. 요나라는 기병에 근거한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중국본토를 위협했다. 거란은 만리장성 안에 연운16주를 점령하고 있었다. 연운16주 문제는 거란과 송나라 사이에 내내 논란이 되는 영토문제였다. 송나라는 연운 16주를 회복하고 만리장성 너머로 유목민들을 몰아내는 것이 국가적인 목표였다. 마치 우리가 통일이 지상목표인 것처럼 송나라는 연운 16주 회복이 목표였던 것이다. 4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송나라와 거란을 대결을 벌였다. 그러나 결국 전쟁을 통해서 거란을 이길 수 없었던 송나라는 거란과 1004년 ‘전연의 맹’이라는 평화조약을 체결한다. 전연은 전주라는 도시의 아명인데, 거기서 맺은 평화조약인 셈이다. 이로써 송나라는 해마다 거란에 비단 20만필, 은 10만냥을 지급하고, 국경은 현상태(연운16주를 거란이 보유)를 유지하며, 송나라는 거란을 형으로 부르기로 약속한다. 송나라는 평화의 댓가로 돈과 명분을 팔아넘긴 셈이다.  

비슷한 시기에 한반도에도 지각변동이 시작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는 후삼국시대가 시작되었다. 900년 후백제가 건국되었다. 901년 궁예는 후고구려를 세웠다. 왕건은 폭군으로 전락한 궁예를 쫓아내고, 고려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나라를 건국했다. 918년이었다. 후삼국이 고려에 의해 통일되는 936년까지 한반도의 40여년의 세월은 피를 부르는 전쟁의 시기였다.

이 무렵중국의 변경지대에서는 유목민들이 새로운 나라를 만들었다. 거란에서는 야율아보기가 북방 유목세계를 통일하고 새로운 제국을 세웠다. 916년 야율아보기는 황제국을 선포했다. 10년 뒤인 926년 야율아보기는 발해를 멸망시켰다. 발해는 고구려를 이어서 동북지방을 지배하다가 230여년 만에 멸망하고 말았다. 이후 우리민족은 두 번 다시 만주를 찾지 못했다. 이곳은 이후 거란, 여진족의 무대가 되고 말았다. 이곳을 기반으로 하여 거란과 여진은 대제국을 건설하고 중국을 위협하였다.

발해가 멸망하고 난 뒤 발해유민 10만여 명이 고려로 들어왔다. 왕건은 이들을 적극 받아들였다. 발해의 세자이 대자현도 고려로 망명했다. 왕건은 왜 이들을 받아들였을까? 왕건은 고려의 태조로서 국가의 비전을 고구려를 잇는 것으로 정했다. 왕건은 버려진 땅이었던 평양을 재건하고, 이곳을 서경이라고 부른다. 또한 일 년의 절반을 평양에서 보내라고 후손들에게 ‘훈요 10조’에서 훈계하고 있다. 당나라가 멸망하고 발해마저 망해버린 상황에서 만주지방을 다시 찾겠다는 왕건의 결심은 이른바 북방정책으로 부른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만주를 정복하고 있던 왕조는 거란이었다. 고려와 거란의 충돌을 불가피했다.

왕건은 942년 거란이 보내온 사절을 섬으로 귀양보내고 낙타 30마리를 만부교 다리 아래서 굶겨죽었다. 유명한 만부교 사건이다. 거란과 대결을 선포한 셈이다. 이 때는 태조 25년이었다. 이 때 태조는 중국의 후진과 함께 거란을 협공하려는 계획이 있었다는 설이 ‘자치통감’에 전하고 있다. 이후 고려와 거란은 외교적인 마찰을 계속하고 있었다. 얼마 뒤 중국본토에서는 960년에 송이 건국되었다. 송은 남진정책을 통해서 남쪽의 영토를 회복했다. 남은 문제는 연운 16주였다. 연운 16주 문제를 놓고 송과 거란은 40여년 가까이 갈등한다. 이 사이에 고려는 늘 경계와 친교의 대상이었다. 거란에게도 고려는 골칫거리였다.

서기 986년부터 4년 정도의 기간 동안 거란과 송은 격렬하게 충돌한다. 결과는 전쟁국가인 거란의 완벽한 승리였다. 거란은 송의 서쪽에 있던 나라인 서하를 점령하고(990년), 요동지방에 있던 서여진,정안국을 점령했다(991년). 송을 사방에서 에워싼 형국이었다. 마침내 거란은 동경유수(동경은 요양을 말한다)인 소손녕을 시켜서 고려를 침략한다(993년). 소손녕이 고려에 보낸 국서에 의하면 80만 대군을 이끌고 왔다고 한다. 학자들은 숫자가 터무니없이 부풀려졌다고 본다. 6만 명 정도의 군대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고려조정은 대혼란에 빠진다. 그도 그럴 것이 이미 거란은 송나라 주변을 평정한 당대의 초강대국이었으니 고려로서는 백천간두의 위기에 섰다고 느낄만하다. 이 때 고려 조정에서는 할지론(평양이북땅을 넘겨주자) 대 항복론으로 나뉘었다가 할지론이 우세했다. 이 때 서희(942-998)가 등장해서 선항전 후협상을 주장했다. 병자호란과 유사한 상황이었다고 할까? 거란과 고려가 맞붙은 첫 싸움에서 고려가 승리한다. 그리고 서희는 협상에 나섰다. 서희는 18세에 과거에 급제하고, 국방장관인 병관어사를 지내기도 한 군사통이었다. 거란 침입 때 정부는 방어군을 상군, 중군, 하군으로 나누어 배치했는데, 서희는 중군사였다. 북방 최전방 사령관이었던 셈이다.

소손녕의 요구는 두 가지였다. 첫째, 고려는 신라를 계승한 나라이니 옛 고구려의 영토를 거란에 넘겨라. 둘째, 송과 단교하고 거란에 사대하라. 서희와 소손녕은 1주일 간을 회담하였다. 서희가 주장하는 바도 두 가지다. 첫째, 고려는 고구려를 이어받은 나라다. 국호도 그래서 고려다. 둘째, 고려가 거란에 사대하고 싶어도 압록강 인근을 여진이 점령하고 있으니 어렵다. 압록강 인근의 여진족을 몰아내면 거란에 사대하겠다.
회담의 결과로 두 나라가 합의한 것은 이렇다. 첫째, 압록강 서쪽에 거란이 5성을 쌓는다. 고려는 압록강 동쪽에 성을 쌓는다. 이로써 고려는 압록강 동쪽 280리를 우리 땅으로 확보했다. 이른바 강동 6주다. 이로써 거란에 조공하는 길이 열린다. 둘째, 고려는 송과 외교관계를 끊고 거란에 사대한다. 이것이 이른바 서-소(서희-소손녕) 협정이다. 거란과 고려가 맺은 평화조약인 셈이다. 압록강 인근에 있던 서여진 영토를 양국이 분할하고 국경선을 정한 협정인 셈이다. 서-소 협정은 거란과 송이 맺은 ‘전연의 맹’(1004년)과 함께 120여년간 동아시아 지역질서를 유지하는 양대 축으로 기능했다.

협정 후 양국은 바로 조치에 들어갔다. 994년 압록강 동쪽과 서쪽에 있던 (이른바 서여진이다. 동여진은 두만강 부근에 있었다. 이들이 나중에 금나라를 세우는 여진족이다.) 여진족을 몰아내고 성을 쌓았다. 그리고 후속조치로서 고려는 거란에 유학생을 파견했다. 양국에 포로를 송환했다. 또 소손녕의 딸을 고려에 출가시키기도 했다. 고려는 송과 외교관계를 단절한다. 이후 거란이 망하기 전까지 고려는 송과 외교관계를 맺지 않았다. 1071년 고려의 문종 때 송과 이른바 ‘문병외교’(고려 문종의 병치료를 위해서 송나라에서 의사를 파견한 일)를 계기로 하여 고려와 송은 문화적이고 경제적인 관계는 트게 된다.

서-소 협정은 명분(사대)과 실리(강동6주)의 교환이다. 거란은 고려와 송의 외교관계를 끊어놓았지만, 고려로서는 강동6주라는 영토를 확보했다. 그리고 강동 6주는 군사적인 요충지였다. 이것은 거란의 2,3차 침입 때 고려가 대승한 곳이 거의 강동 6주에 쌓은 성 때문이라는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이 이루어지는 귀주성도 강동 6주에 포함된다. 그리고 서-소 협정을 통해서 고구려를 실질적으로 우리 역사에 편입시키는 쾌거를 이루었다.

고구려가 역사책에서만 우리 땅이 아니라 당대의 외교문서에 그런 사실이 기록되었다. 고구려 땅의 전부는 아니지만 중요한 일부를 고려가 소유하게 됨으로써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자임을 내세울 수 있게 된 것이다. 만약 고려 조정이 평양 이북의 땅을 거란에 넘겨주었다면 고려는 사실상 신라의 영토만 소유하는 신라의 계승국이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고려를 고구려의 계승국이라고 적시한 왕건과 강동 6주를 확보한 서희, 두만강 이남 북방 영토(4군과 6진)를 개척해서 우리 땅으로 만든 세종은 실질적인 의미에서 고구려를 한국사에 포함시킨 후대인이라고 볼 수 있다.

서-소 협정과 전연의 맹 이후 동아시아가 늘 평화로웠던 것은 아니다. 거란은 1010년에 거란성종에 직접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두 번째로 침입한다. 개경을 점령하고 궁궐을 불지르고 가는 만행을 저지른다. 이때 고려 초기 7대 왕들의 실록이 불에 타서 없어지는 참화를 겪기도 했다. 그러나 고려는 돌아가는 거란군을 물리친다. 이후 1018년 12월에 거란은 소배압(소손녕의 형)을 대장으로 하여 1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세 번째로 침략한다. 강감찬은 귀주에서 거란군을 박살낸다. 이후에 거란은 고려를 다시 침략하려는 야욕을 버리고, 두 나라는 서-소 평화협정의 틀로 돌아간다. 두 나라 모두 10여년 동안 벌인 전쟁으로 국력이 너무 낭비되었고 나라도 혼란스러웠다.

서-소 협정은 이후에 우리 나라 역사가 보여주는 많은 분쟁 중에서도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병법에서 말하는 지피지기의 실례를 보여주는 것이 아닐까? 서희는 거란의 속내를 정확히 간파하고 실리를 얻어냈다. 거창한 명분은 버리고(송과의 외교관계단절), 소중한 실리(영토확장)를 얻었다. 이것은 이후에 일어난 여진과의 동북9성 관련 협상이나 조선시대 청나라의 침입으로 겪은 고난과는 명확히 대비되는 부분이기도 하다. 윤관이 별무반을 조직하여 얻어낸 동북9성은 결국 여진에게 돌려주고(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부르겠다는 여진의 맹세를 명분삼아), 이후에 여진은 재기하여 금나라를 세우고 거란과 송을 대파하며 당대의 초강대국으로 성장했다. 이 때는 실리를 버리고 명분을 취한 경우였다. 병자호란 때는 제대로 된 대비도 없으면서 다 죽어가는 늙은 명나라를 지킨다는 명분만 붙들고 있다가 청에게 호되게 당하는 국가적인 불행을 겪게 된다. 명분도 실리도 얻지 못한 경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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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 - 출간 15주년 기념 개정증보판
로버트 풀검 지음, 최정인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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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인 로버트 풀검은 1937년 미국 텍사스주 웨이코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남부침례교의 엄격한 규율에 얽매인 삶을 어린시절과 청소년 시절에 보냈다. 젊은 시절에는 웨이터, 선불교 수도사, 조각가, 음악가, 로데오선수 등 다양한 직업과 삶을 경험했다. 신학대학원을 졸업한 뒤 20여년간 퍼시픽 노스웨스트의 어느 교회에서 파트타임목사로 봉직했다. 올해로 79세다. 그는 성직자라기보다는 개그맨이나 예술가가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의 글은 웃기고 자기의 신념을 숨기지않으며 감성적이다. 글에는 자기만의 독특한 시선으로 세상을 보는 그의 생각이 느껴진다. 모든 훌륭한 작가들이 그러하듯이 이 독특함이 그의 글이 주는 매력이다. 

 
책에는 모두 70여편의 에세이가 실려있다. 주로 그가 만난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그 밖에도 그가 일상생활에서 느끼는 것들, 동물들, 사물들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그는 시시한 일에서도 재미를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모든 이야기꾼들이 그러하듯이 그는 예리한 관찰자다. 그는 인류의 이야기꾼 전통을 잇는 사람이다. 소설로 풀어낼 수 있는 것들을 그는 에시이로 남겼다. 나에게 그는 미국의 작가들인 빌 브라이슨, 스티븐 킹, 레이먼드 카버, 스캇 펙과 같은 종류의 인간이다. 그들은 재미있고 심오하다. 세상은 살만한 가치가 있고 알고보면 너무 재미있다는 게 그들이 전하는 메시지다. 
 
풀검의 책에는 신조에 대한 이야기들이 나온다. 2003년에 쓴 수정판 머리말에는 그가 쓴 이야기꾼의 신조가 있다. 모두 6개조다. 그는 아마 이 신조는 오랜세월 동안 변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한다. 

상상력은 지식보다 강하다.
신화는 역사보다 강력하다.
꿈은 사실보다 힘이 있다.
희망은 늘 경험을 이긴다.
웃음만이 슬픔을 치유한다.
사랑은 죽음보다 강하다. 
 
상상력, 신화, 꿈, 희망, 웃음, 사랑은 모두 인간이 만들어낸 정신적인 가치들이다. 인간은 어쩌면 이런 것들 때문에 사실과 역사, 경험, 죽음, 슬픔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도착했는지도 모른다. 이것이 인류가 멸망하지 않고 지구에 번성하는 비밀일지도 모른다. 특히 모든 것의 앞에는 상상력이 있다. 상상하는 힘은 우리는 전혀 다른 우주로 데려간다. 
 
책 제목에서 말하는 바, 유치원의 모래성에 배운 것은 16가지다. 그는 어른들의 세계에서도 이 어린시절에 배운 진리를 행동으로 옮긴다면 지구는 좀 더 평화롭고 살기좋은 행성이 되리라고 말한다. 문제는 늘 믿음이 아니라 행동이다. 이것은 기독교를 믿지 않았던 그의 아버지가 늘 하던 말 속에 들어있다. "네가 뭘 믿는지는 중요하지 않아. 중요한 것은 네가 어떻게 행동하느냐야." 이건 어쩌면 예수가 말한 이야기 중에 나오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와도 통한다. 
 
무엇이든 나누어가지라.
공정하게 행동하라.
남을 때리지 마라.
사용한 물건은 제자리에 놓으라.
내 것이 아니면 가지지 말라.
다른 사람을 아프게 했으면 미안하다고 말하라.
우리는 모두 죽는다.
모든 단어중 가장 의미있는 단어인 '보다'(look)을 기억하라.
 
풀검의 에세이는 사실 심오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접하는 것들이다. 보통과 다른 것은 그의 독특한 시각(look)이다. 그가 뉴욕의 택시기사를 만나고서 썼던 글에 나온 것처럼 '모든 것은 태도에 달려있다.' 어떤 시각으로 사물을 바라보고, 어떤 태도로 대할 것인가가 그의 사람됨을 결정한다. 
 
책을 다 읽고 나면 기억에 오래 남는 사람과 사건들, 동물, 사물들이 있다. 낙엽청소부인 청각장애아 도니, 매년 크리스마스에 구세군 냄비를 들었던 '위대한 이교도'인 풀검의 아버지, 신학대학원 은사인 바틀렛 학장, 진공청소기 파는 남자, 구두닦이 엘리 에인절, 1인 성가대 소년, 버펄로 술집에서 만난 인디언 춤꾼, 인어소녀, 인도인 독립운동가 메논의 보좌관의 아들, 16년동안 그의 머리를 깎아준 이발사, 옆집 흑인남자, 그리고 거미와 너구리, 고장난 뻐꾸기 시계, 버섯, 민들레, 그리고 베토벤 9번 교향곡. 이들은 모두 시트콤의 등장인물들처럼 느껴진다. 에세이 한 편은 적어도 10분 정도 분량의 이야기가 들어있다. 
 
이 중에서 가장 독특한 이야기는 단연 '의자 조종사' 래리 월터스의 비행일 것이다. 너무나 기발한 이야기라서 충격적이다. 아이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줬더니 '설마'한다. 래리 월터스를 기념하는 웹사이트와 그의 비행사진을 보여주면 '우와'한다. 그는 1982년에 33살의 트럭운전사였다. 그는 정원용 알루미늄 의자에 헬륨을 가득 채운 45개의 풍선을 묶고 로스엔젤레스 국제공항 위로 날아올랐다. 16,000피트(4,878미터)까지 올라갔다. 그는 낙하산, 라디오, 캔맥주 6개, 땅콩버터와 샌드위치, 내려오기 위해 풍선을 떠뜨리는데 쓸 BB총을 갖고 있었다. 나중에 미연방항공국은 래리에게 '허가받지 않은 민간항공기를 조종한 죄'와 '공항 위를 날면서 관제탑과 교신하지 않은 죄'로 벌금 1,500달러를 물렸다. 그는 이 일로 유명해져서 <뉴욕타임즈>에도 실리고, 텔레비전에도 출연했다. 그런데 여기가 끝이 아니다. 그는 10년 뒤인 1993년에 로스엔젤레스 국립공원으로 등산갔다가 총으로 자신의 심장을 쏘았다. 이것도 충격이다. 풀검은 이렇게 썼다. '그가 느낀 절망의 깊이가 그가 가진 상상력의 높이와 비슷해서였을까.' 풀검의 방 벽에는 래리 월터스가 하늘을 나는 사진이 걸려있다고 한다. 
 
또 한 사람 기억나는 이는 유대인 구두닦이 엘리 에인절이다. 그는 자기 일에 충실한 사람이다. 동시에 학식과 사랑이 풍부한 사람이다. 학교는 안 다녔지만 독학으로 여러 개의 외국어를 능숙하게 할 줄 앍고, 역사와 철학, 신학에도 박식하다. 그는 착한 일을 하면 복을 받는다는 신념의 소유자다. 그 믿음을 바로 행동으로 옮긴다. 보상을 바라지 않고 좋은 일을 하는 것을 유대인들은 미츠바(mitzvah)라고 한다는데, 그는 미츠바의 대가다.  풀검은 그를 땅 위에 내려온 천사라고 말한다. 그의 심성은 그대로 아들과 딸들에 물려진다. 그들도 미츠바를 행한다. 그 결과로 세상은 더 살기 좋아진다. 그리고 그런 미츠바를 행하는 이는 미국에만 있는 게 아니라 인도에도 있다. 인도인 독립운동가 메논은 늘 자선을 행한다. 그는 젊은 시절 어느 이름모를 시크교도에게 받은 자선을 잊지 않고 죽을 때까지 대가를 바라지 않고 자선을 베푼다. 그 자선은 돌고 돈다. 이런 가르침은 이슬람교의 수피즘에도 있다. 모든 인간적인 종교에는 이와 같은 가르침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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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랑 먼저 놀 거야! - 코숙이 선생님의 시공책
강승숙 지음 / 낮은산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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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엔 모두 32편의 시가 실려있다. 어린이들에게 들려줄 만한 참 좋은 시들이다. 시인이 쓴 시도 있고, 어린이가 쓴 시도 있다. 강승숙 선생님이 직접 그린 그림도 같이 곁들여져있어서 한 권의 그림책을 읽듯이, 누군가에게 보낸 편지를 읽듯이 그렇게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다.

 

덕분에 발견한 시들도 여럿이다. 구일초등학교 2학년 박철순이 쓴 시 '바람소리'가 좋았다. 나무 밑에 있으니/바람 소리가/파라파라거린다/그 소리가 좋다/바람이 피리를 분다. 9살 어린이의 감성이 그대로 느껴지면서 어른도 공감할 수 있는 좋은 시였다. '뻔하지 않아/뻔뻔하지도 않아'라는 시구가 들어간 정유경의 '번데기'도 좋다. 어린시절 고소하게 먹던 번데기 생각이 절로 났다. '나는 개밥주는 시간이 좋다'는 망상초등학교 5학년 김파란의 '개밥주기'를 읽으면서는 정호승의 시(개밥그릇인가?)가 얼핏 생각났다. 개가 밥그릇을 밑바닥까지 핥아먹는다는 그 시가 문득 생각났다. 이렇듯 좋은 시와 글은 잊혀졌던 많은 것을 생각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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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의 교육학, 비고츠키 - 한국 교육의 새 지평을 여는 비고츠키 교육학 입문서
진보교육연구소 비고츠키교육학실천연구모임 지음 / 살림터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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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프 비고츠키(1896-1934)는 심리학의 모차르트, 미래에서 온 사람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대단한 통찰력과 열정의 소유자였던 그는 폐결핵으로 38세에 요절한 천재다. 너무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유산은 거대하다. 신자유주의와 경쟁교육이 만들어낸 황폐한 사회와 학교현장에 그가 제시하는 ‘협력과 발달’의 교육학은 마치 복음처럼 들린다. 공생애 활동 3년만에 인류에게 사랑의 복음을 전해주고 떠난 예수처럼, 비고츠키도 짧은 활동기간에 인간과 교육에 대한 날카로운 진단과 처방을 남겨주고 떠났다. 그는 죽음에 이르는 순간까지도 병상에서 <생각과 말>로 구체화된 사상을 제자들에게 남겼다. 그의 사상은 소련의 관변과학에서 탄압받았지만 30여년이 지난 후 다시 부활했다. 그의 사상은 현대적인 발달 심리학과 뇌과학, 인지과학의 성과를 예언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시대를 앞서갔다.

 

이 책은 비고츠키 교육학에 대한 입문서다. 비고츠키 교육학의 핵심개념과 원리들을 차근차근 설명하고 있다. 저자들이 오랫동안 비고츠키 저작들을 가지고 세미나를 하고 현장에 적용하면서 고투해온 흔적이 엿보인다. 덕분에 우리는 비고츠키 이론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지도를 건네받은 셈이다.

 

책은 모두 6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1장에서는 비고츠키 교육학의 기본관점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관계와 협력을 통한 주체적인 인간발달이 교육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2장에서는 고등정신기능에 대해서 다룬다. 도구와 기호의 문제, 창의성에 대한 비고츠키의 견해를 알 수 있다. 3장에서는 생각과 말의 문제를 다룬다. 비고츠키의 마지막 저작인 <생각과 말>을 자세히 풀어 쓴 글이라고 보면 되겠다. 4장에서는 근접발달영역과 오브체니(우리말로 교수-학습)에 대해서 다룬다. 용어가 어려워서 심오한 것 같지만 그다지 어려운 영역은 아니다. 학교 교육현장에서 꼭 필요한 영역이기도 하다. 5장에서는 유아에서 청소년까지 인간발달이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과정을 설명한다. 6장에서는 비고츠키 교육학이 교육현장에서 실천적으로 적용된 사례를 다룬다. 배움의 공동체나 혁신학교 운동에 대해서 잘 알 수 있다. 실천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관심있게 볼 부분이다. 보론에서는 비고츠키의 주요저작에 대한 안내를 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롭게 본 부분은 고등정신기능의 문제를 다룬 2장과 생각과 말의 관계를 다룬 3장이다. 물론 실천적인 적용의 문제를 다룬 4장도 흥미로웠다. 모두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의 문제, 어떻게 자유의지를 지닌 주체적인 인간이 형성되는가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이것은 철학과 교육학의 문제이기도 하면서 인간이 다루는 모든 학문의 궁극적인 지향점이기도 한 영역이다.

 

보통 인간을 규정할 때 도구를 사용하는 존재, 사회를 이루는 존재, 말하는 존재라는 정의를 많이 인용한다. 약간 식상하기도 하지만, 인간이 다른 동물과 구분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기호는 심리적인 도구라고 한다. 기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언어다. 비고츠키는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언어라고 말한다. 언어활동에서도 고등기능을 가지는 것은 글쓰기다. 입말과 글말은 똑같은 말 같지만 엄연히 구분되는 기호다. 단지 우리가 날카롭게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이 지점에서 이오덕 선생의 글쓰기 교육이 가지는 교육학적 의미를 새롭게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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