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카드는 그녀에게
제바스티안 피체크 지음, 권혁준 옮김 / 해냄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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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재밌다.  참 재밌다.  정말 정신없이 읽었다.  요즘 책 읽는 시간이 너무 토막 나 있어서 그랬는지 예전처럼 몰입해서 읽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집중력 많이 떨어졌구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한동안 재밌는 책을 만나지 못했었나 보다.  여름의 끝자락, 아니 가을의 첫자락에 제대로 흡인력 있는 소설을 만났다. 

  올 여름 제대로 된 스릴러 한 권 못 읽었다.  그러던 차 이 책이 눈에 띄었고 심리 게임, 전율, 천재 작가 어쩌고....  이런 단어들에 이 책을 선택했다.  이 책을 읽기 전엔 제바스티안 피체크가 누군지도 몰랐을 뿐더러 이 책이 이리 재밌을지도 몰랐다. 

  나는 아기 엄마다.  그것도 이제 네 달을 향해가는 어린 아기의 엄마다.  그러다 보니 책 한 권을 줄창 읽기는 고사하고 극장에서 영화 한 편 볼 수 없는 문화생활에서 처참하게 내팽개쳐진 갈증난 한국의 초보맘이다.  무슨 말을 하려고 내 쓸쓸한 처지를 구태여 소개하느냐고?  이 책은 '극장의 푹신한 의자에 앉아 알싸한 콜라 한 잔 들이키며 도무지 눈을 뗄 수 없는 영화 한 편 봤으면' 하고 생각해 왔던 내 목마름(?)이 어느 정도 해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책으로. 

  정말 한 편의 영화 같은 스토리였다.  아니나다를까, 영화사에서 이미 영화로 제작하기로 했다니 반가운 소식이다.  치밀한 구성과 눈으로 보는 듯한 묘사에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  내가 보고 싶었던 딱 그런 스토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별이 아홉 개인 이유는 아쉽지만 얀이 라디오 방송국에서 인질극을 벌이는 이유가 조금 설득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약혼녀 레오니를 찾기 위해서 왜 그는 하필이면 라디오 방송국에서 인질극을 벌였을까?  차라리 TV 방송국을 선택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을까?  아무리 그래도 라디오보다 TV가 더 파급력이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이 스토리에서는 라디오 방송국이기에 이렇게 재미난 이야기가 펼쳐질 수 있었다.  그건 너무나도 분명하다.  그렇다면 얀이 라디오 방송국을 택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좀 더 맛깔나게 덧붙여 줬다면 어땠을까?  이를테면, '레오니는 시각장애인이고 평소 TV보다 라디오를 즐겨 청취했는데 그 중에서도 이 방송의 열혈 청취자이다' 따위의.  요런 소감은 저자에게 메일을 보내련다.  저자 참 마음에 드네.  p. 456의 '감사의 말'에서 독자의 의견, 비판, 생각거리 또는 다른 형태의 반응이 궁금하며 자신의 홈페이지나 메일로 보내달란다.  와우.  나는 이렇게 적극적으로 상호작용하려는 작가들이 참 마음에 든다.  (그나저나 독일어를 잘 하는 사람에게 작문을 부탁할까?  어설픈 영어로 찔끔찔끔 써볼까?) 

  내용을 간략히 소개하자면(스포일러 질질 흘리면 정말 나뻐!  그래서 살짝만.  후훗) 얀은 사고사를 당했다는 약혼녀의 죽음을 믿지 않으며 의혹이 있고 그녀가 살아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라디오 방송국에서 게임을 제시하며 인질극을 벌인다.  딸을 잃은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자살을 결심한 협상전문가인 이라가 타의(괴츠로 인해)에 의해 이 사건의 협상을 맞게 된다.  하나, 둘 레오니가 살아 있다는 증거들이 확인되고.  결국 레오니와 얀이 재회하게 되고 이라 역시 힘겨운 트라우마에서 벗어나게 된다는 내용이다.  물론 요건 아주 간단한 줄거리이고 이 과정들이 아주 긴장감 만땅이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는 사실도 재미가 쏠쏠하다.  무엇보다 소설은 재미가 있어야 제 맛이다!

  무엇보다 제바스티안 피체크 스토리 중심의 글을 잘 쓰는 작가인 것 같다.  어떤 작가는 문체가 매력이 있고 어떤 작가는 스토리가 좋은데 이 작가는 후자에 속하는 것 같다.  '감사의 말'에서 말했듯, 방송국 관계자, 의사, 경찰, 경호회사 종사자 등의 자문을 통해 각 부분의 오류를 최소화했기에 더욱 실감나는 이야기가 쓰여진 것 같다.  (요런거보면 작가도 인맥이 있어야해. 흠) 

  어찌나 정신없이 몰입해 읽었는지 기어코 이 새벽에 서평을 남기겠다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제바스티안 피체크의 소설로는 '테라피'가 출간된 일이 있고 '그 아이'가 곧 출간될 예정이란다.  '테라피'를 이미 장바구니에 담았다.  '테라피'를 읽어보고 그 작품도 마음에 들면 나는 favorite writer list에 제바스팅란 피체크를 넣으련다.  이 책 <마지막 카드를 그녀에게>가 영화로도 만들어질 예정이라는데 부디 차질이 없이 진행됐으면 좋겠고 영화도 몹시 기대된다.  그럼 '테라피'의 도착을 기다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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닉 혼비의 노래(들) - 닉 혼비 에세이
닉 혼비 지음, 조동섭 옮김 / Media2.0(미디어 2.0)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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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닉 혼비의 작품을 읽기는 이 책이 처음이다.  그의 이름은 많이 들어왔으나 여지껏 읽어보지 못했었다.  소위말해 그는 요즘 잘 나가는 작가다.  그런 '그의 작품을 읽어봐야지' 하고 벼르던 참이었다.  그런데 소설가인 그가 에세이를 내놓았다는 소식을 알고 이번에서야 그의 작품을 읽어보게 되었다.  닉 혼비 어떤 글을 쓰는 사람일까?    

  닉 혼비의 노래(들).  이 책은 말 그대로 '닉 혼비의 노래'다.  닉 혼비가 좋아하는 노래들에 관한 이야기다.  그가 좋아하는 35곡에 대한 감상을 담고 있다.  실지 나는 팝을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는다.  책으로 따지자면 스테디셀러가 될 법한 곡들 몇 곡을 좋아할 뿐이다.  이를테면, 빌리 조엘의 Honsty, 비틀즈의 Hey jude, 에릭 크랩튼의 wonderful tonight, 라이오넬 리치의 three times lady 같은 류의 곡들을 좋아한다.  그런데 팝에 문외한인 나도 책을 읽는 내내 닉 혼비가 소개하는 그 곡들을 들어보고 싶어 어쩔 수가 없었다. 

  이 책은 내게 새로운 곳에 대한 호기심을 부른 반면 따분하기도 했다.  팝을 즐겨듣지 않는 내게 이 책은 쉴새 없이 팝을 들려주는 카페 같았다.  혹은 클럽 같았다.  누군가가 마주 앉아 내 눈을 보고 '난 이 음악이 이래서 좋아.  이 곡은 몇 백번도 더 들은 것 같아.  이 곡은 말이지....' 하고 이야기 한다면 나는 필시 그 곡을 몹시 들어보고 싶을 것이다.  아, 내가 그(그녀)에게 호감이 있을 경우에 해당되려나?  그런데 이 책이 딱 그랬다.  닉 혼비가 다가 앉아서는 정신없이 자기가 좋아해 마지않는 그런 음악들을 내게 한 곡 한 곡 소개하고 있었다.  반면 따분했다는 것은, 너무나 간단히 관심사의 문제였다.  닉 혼비는 클래식은 거의 듣지 않는다고 했는데, 내가 그에게 오페라나 좋아하는 가수의 아리아에 대한 감상을 쉬지 않고 늘어놓는다면 그 역시 비슷한 생각이 들었을 것 같다.  무지가 무관심이 되고 마는 상황이다.  그래서 나는 호기심이 이는 반면 좀 따분하기도 했다. 

  더군다나 닉 혼비는 그의 색깔이 분명했다.  모르긴 몰라도 그가 좋아하는 팝 역시 비슷한 느낌들일 것 같았다.  그런 그는 자신의 색깔의 음악을 신나게 이야기 하다 보니 나처럼 팝에 큰 재미를 못느끼는 독자에게는 너무 깊이 들어가는 듯 느껴졌다.  그래 오타쿠들의 범접할 수 없는 기운 같은 것 말이다.  팝을 아주 좋아하진 않더라도 내로라 하는 팝아티스트 정도의 이름만은 알고 있는데 이 책에 소개한 팝가수들의 이름은 모두 생소했다.  그러다 보니 나는 줄곧 다른 생각이 떠오르고 다시 닉 혼비의 이야기를 듣다 또 한 눈을 팔다 그랬다는 것을 고백해야만 할 것 같다.  

  앞서 말한 것처럼 닉 혼비의 에세이를 먼저 읽게 되었지만 그를 약간은 알 것 같다.  물론 한 차례 미팅만으로 상대를 다 알기는 힘들지만 말이다.  적어도 '아, 이런 사람이구나' 정도는 알게 된 듯 싶다.  물론 그의 필치가 작품마다 팔색조처럼 시시각각 변한다면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담이지만 그의 글과 그의 생김새는 상당히 닮아있어 놀랐다.)   

  닉 혼비의 이 책을 음악의 한 장르로 따져보자면 내게는 힙합 같았다.  내숭 없는 말투, 직설적인 표현, 모자를 삐딱하게 눌러쓰고 침을 튀기며 정신없이 쏟아놓는 라임을 듣는 듯 했다.  나도 그의 훌륭한 라임을 잘 들어보고 싶은 기분이었다.  이 책은 그의 열정이 담겨있다는 느낌이 든다.  그가 얼마나 이 노래들을 사랑하는지 충분히 알 것만 같다.  무엇보다 이 책은 닉 혼비가 소개한 그 곡들을 들어보고 싶게 했다.  그가 소개한 곡들을 한 곡 한 곡 들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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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진 음지 - 조정래 장편소설
조정래 지음 / 해냄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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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정래 씨의 장편소설이다.  오래전, 조정래 씨의 대하소설 <태백산맥>, <아리랑>을 인상적으로 읽었다.  이번에 그의 신간이 발표되었다는 소식에 덥석 집었다.  <비탈진 음지>라는.  그런데 책을 읽다 안 사실인데 이 <비탈진 음지>는 처음에는 중편으로 지어졌단다.  그리고는 다시 살을 덧붙여 장편으로 썼단다.  <비탈진 음지> 장편을 읽고 보니 중편은 과연 어떤지 읽고 싶다.  추후 중편도 읽어볼 작정이다.   

  얼마나 오랜만에 정말 읽을만한 소설을 읽었는지 모르겠다.  간단히 말해서 '문학다운 문학'이었다.  이야기는 1960년대 농촌 인구의 서울 상경에 대해서다.  우리 땅안에서 일어난 '아메리칸 드림' 이랄까?  그러나 서울 상경이 모든 이들의 꿈을 실현시켜주지는 못했다.  도리어 도시 빈민이 늘고 농촌이 붕괴된 원인이 되기도 했다.  이 소설은 농촌에서 무작정 상경한 봉천 영감의 이야기자 우리네 할아버지, 할머니의 이야기였다.  타향살이의 설움과 고단한 일상들 속에서 펼쳐지는 빈부 격차, 잘 살아보고자 하는 한 인간의 발버둥이 가슴 먹먹하게 담겨 있었다.  그러나 이 이야기를 비단 과거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사실이다.  아직도 'in서울'의 꿈이 많은 젊은이들에게 있고 그들 중 몇은 뜻하는 대로 살기도 하지만 또 몇은 힘겹고 고단하게 하루하루를 겨우 살아가고 있다.   

  복천 영감의 삶은 정말 눈물겨웠다.  아내를 잃고 큰아들의 생사도 모른 채 무작정 서울에 올라와 지게가 박살 나고 리어카를 도둑맞던 그 순간은 참 안타까웠다.  그리고 복천 영감의 잘 자란 두 아들, 딸이 참으로 듬직했다.  아비를 극진히 생각하는 그 모습이 참으로 착했다.  마지막 복천 영감이 다리를 잃게 된 장면은 참 마음이 아팠다.  드라마를 보면 남녀주인공의 해피엔딩을 염원하는 마음처럼 복천 영감에게 복권이라도 당첨되기를 바랐건만 그에 삶은 안타깝고 아팠다.  어쩜 그리도 복이 없는지, 어쩜 그리 운이 없는지 말이다.  다리를 잃은 복천 영감의 모습은 우리 사회다.  한쪽 다리를 잃어 쩔뚝이며 겨우 걸어나가는 이 나라, 이 땅의 모습이었다.  위태롭고 아찔한 우리 사회다.  잘 사는 사람이 늘어가지만 여전히 이 땅의 한 곳에는 또 다른 복천 영감이 살고 있다.  싸워야 하고 이겨야 하고 그래야 끝내 몇 푼 챙길 수 있는 삶.  완전해 보이지만 다리를 하나 잃어 어두운 이면을 가지고 있는 이 나라의 모습이다.   

  시인 릴케는 '굶주리는 사람이 단 하나만 있어도 그건 우리 모두의 책임이다'고 했다고 한다.  이 사회는 길거리에서 신문지를 이불 삼아 잠을 청하는 이들에게 차갑지만 하다.  한겨울의 추위보다 더욱 냉하고 차다.  가지지 못한 자들의 설움은 그저 목구멍 안에서 삭을 뿐이다.  피가 솟고 칼칼해진 목으로 육자배기를 더는 올리지 못하는 복천 영감의 끊어진 목소리와 같다.   

  저자는 '이 책을 읽을 필요가 없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고대한다' 고 했다.  두 다리를 가지고 꼿꼿이 선 자처럼 한 다리를 잃은 이도 균형을 맞추어 잘 설 수 있는 의족이 필요하다.  잘려나간 다리로도 곧게 설 수 있는 의족 말이다.  그들이 바로 설 수 있는 그날까지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내 배가 부르고 내 등이 따수워도 주리고 추운 자들이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 땅의 비탈진 음지에도 볕이 들기를.  희망이 움트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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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인간적인 아이로 키워라 - 내 아이가 기적처럼 달라지는 인성양육 지침서
조 웨일 지음, 김설아 옮김 / 지식채널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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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간으로서 최고의 자질은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이 질문에 어떤 답을 하고 싶은가?  이 물음에 대한 답으로 가장 많이 나온 답 열 가지를 나열해보면 1. 선택과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마음, 2. 친절, 3. 동정심, 4. 정직과 신뢰, 5. 넉넉한 마음, 6. 용기, 7. 인내와 자기 수양과 자제, 8. 유머와 농담, 9. 지혜, 10. 성실함을 꼽았단다.  나는 마음속으로 '사랑'이라고 답했다.  가장 많은 답변 열 가지를 보니 내 대답은 너무 포괄적이긴 하다.  하지만 '사랑'이야 말로 인류에게 꼭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당신의 답은 어떠한가?    

  <무엇보다 인간적인 아이로 키워라> 이 책의 표제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내 아이 최고로 키우기', '영리한 아이 만들기' 이런 것들이 아니라 참으로 반가웠다.  정말 그렇다.  왜 요즘 부모들은 조기유학을 보내면서까지 영어를 가르치고, 문화센터를 보내면서 특기적성 교육을, 방과 후 학원을 보내고 하물며 그림책을 놓고도 독서논술지도를 하면서 '인성'에 대해서는 왜 이토록 등한시하는 것일까?  이 책이 이런 부모들의 치마에 바람을 일으킬 책이 아니라는 사실이 나는 반가웠다.  이 조용한 외침이 참으로 감사했다.  이렇듯 이 책 표제에 홀딱 반해서 읽게 된 책이다. 

  오늘날 가장 대두되는 교육의 가치는 바로 창의성과 인성이다.  학부모에게는 몰라도 적어도 교육자들(반드시 교사를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아니 어쩌면 교사는 제외해야 할는지도 모른다.)이 가장 중요시 여기는 것이 바로 창의와 인성, 이것이다.  창의적이면서도 인성이 바로 선 아이, 21세기가 바라는 이상향이 아닌가 싶다.  그러나 인성을 중요시 여기고 있음에도 학교와 교사가 그리고 부모가 그 역할을 잘 감당하고 있는지는 의문이다.  아이가 동그라미 하나를 보고 눈사람, 돋보기, 수박, 안경, 공 따위를 생각해내면 눈을 반짝이며 흐뭇해하면서 방금 파리채에 때려 잡힌 파리를 동정하는 모습을 보고는 아무런 감흥도 받지 못한다.  '세 살 버릇 여든간다'는 속담을 모르는 이가 없음에도 우리의 아이들에게 지적인 발전에만 관심을 갖고 있다.  너무 지나친 억측이라고? 

  "요즘은 져서는 안 돼요.  맞고 오면 저는 그래요.  '너도 한 대 때려'라고요."  나는 유치원 원감으로 근무하던 때 많은 학부모에게서 이 같은 말을 들었다.  이들은 기껏해야 5, 6, 7세 아이들의 부모들이다.  한 번은 놀이터에서 이런 장면을 보았다.  한 아이가 그네를 타고 있었고 그 옆에는 그 그네를 타고 싶은지 그 그네 옆에서 알짱대는 아이가 있었다.  그네를 타는 아이는 지켜서 있는 그 아이가 신경이 쓰였던지 그네는 이전보다 좁은 폭으로 움직이고 있었고 아이는 옆에 선 아이를 자꾸 힐끔거리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이런 목소리가 들려왔다.  "양보하지 마.  신경 쓰지 말고 타.  너 더 타고 싶잖아" 그네를 타고 있는 아이 아빠의 목소리다.  믿을 수 없겠지만 사실이다.  이처럼 책에서는 용서와 양보를 가르치지만 부모들은(어쩌면 교사들도) 내 아이가 그것들을 모르길 바란다.  남보다 앞서면 되고 남보다 잘하면 된다.  그런 부모들(또 교사들)에게 소신껏 외치는 목소리가 바로 '무엇보다 인간적인 아이로 키워라'이다. 

  이렇게 말하면 아이들이 비인간적으로 자라는 것이 모두 성인의 탓인것만 같다.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아이들 역시 더이상 인간적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집단에 소속되어 안전하게 생활하기 위해 힘 있는 아이가 미워하는 아이를 덩달아 미워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생명을 장난감처럼 여기기도 한다.  학교 앞에서 쉽게 살 수 있는 병아리, 소라게 등은 그들에게 생명이 아니라 살아 있는 장난감이 되어 버린 지 오래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교사로서 내 교육철학은(이제는 부모로서의 내 양육철학이 되기도 한) '자연을 사랑하며 생명을 소중히 여기는 아이'를 기르는 것이다.  이것은 내가 교사가 된 이후부터 한 번도 바뀐 적이 없는 가장 우선시 되는 가치다.  자연과 생명은 어쩌면 일맥상통하는 것인데 이것들을 소중히 귀히 여긴다면 절대 악한 일은 할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아이들이 이런 가치를 더불어 귀히 여기게 하는 것이 내 사명이기도 하다.   

  그럼 책을 들여다보자.  이 책은 인간적인 아이로 키우는 네 가지 지침을 소개하고 있는데 '1. 정보 제공하기, 2. 비판적 사고 가르치지, 3. 경외심, 존중, 책임감 가르치기, 4. 긍정적인 선택 제시하기' 이다.  이 지침들을 활용하여 아이 스스로 인간적인 방법(앞서 말한 열 가지를 모두 준하는)으로 문제 해결을 하는 예화들을 수록하고 있다.  그리고 유아기, 아동기, 청소년기, 청년기로 나누어 발달에 맞는 방식을 제시하고 있다.  특히 유아기 아이들과 해 볼 수 있는 활동들은 유치원으로 돌아가면 교육 활동으로 해보고 싶기도 했다.  이 책은 '인간적으로 키워야지.  그렇지만 방법은 잘 모르겠네' 하는 맹랑한 책이 아니다.  구체적인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어 좋았다. 

  그리고 이 책은 '인간적'이라는 개념을 아주 폭넓게 다루고 있다.  환경보호, 자연보호(동식물 사랑을 포함하여)등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동물실험을 하지 않는 기업이나 과대포장을 하지 않는 기업, 공정무역 제품을 판매하는 기업에 대해서도 부록을 붙였고 이런 것들을 지키려는 노력까지도 '인간적'이라는 개념 안에 포함하고 있었다.  단순히 예의 바르고 도덕적이며 착한 것 이상의 의미도 소개함으로 독자로 하여금 '인간적'이라는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끔 하고 있었다.  무엇보다 '비판적 사고하기'는 우리 아이들에게 꼭 필요한 쉐마가 아닌가 싶다.     

  반면 환경과 자연에 대한 저자의 견해가 너무나도 완강하여 다소 거부감이 생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예를 들면, '육식을 하는 것은 좋지 않다' 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렇기도 하고 또 그렇지 않기도 하다.  개인이 소신껏 선택하고 판단하고 실천할 문제이지, 육식을 올바르지 않은 식습관으로 표현한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그에 상응하는 설득이 따라야지 강요가 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저자의 이런 주장이 조금 완화되고 순화되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뒤따른다.  

  위와 같이 아쉬움이 있었지만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너무나도 선하다.  그야말로 말 그대로 인간적이다.  또 일명 '착한 기업' 리스트가 담긴 부록 역시 유익했다.  잘난 아이?  좋다.  그러나 무엇보다 바른 아이, 인간적인 아이로 키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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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네가 어디 있는지 알고 있다
로라 리프먼 지음, 홍현숙 옮김 / 레드박스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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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가 읽은 올여름 처음이자 마지막인 스릴러 소설이었다.  이 책은 무엇보다도 띠지를 보고 선택했다.  '스티븐 킹이 선택한 올해(2010)의 소설' 이라는.  과연 어떤 책이기에 대문호인 스티븐 킹이 올해의 소설로 꼽았을까 싶었다. 

  이 책 제목은 '나는 네가 지난여름에 한 일을 알고 있다' 라는 영화가 생각나기도 했다.  그 영화처럼 긴장감에 한 시도 놓을 수 없는 이야기가 펼쳐지길 바랐다.  그런데 이 소설은 여느 스릴러 소설들과는 조금 달랐다.  바로 처음부터 범인을 드러내놓고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점이다.  여러 등장인물 가운데 '누가 범인일까?' 하는 추측은 필요치 않은 스릴러 소설이었다.  '이런 방식으로도 스릴러 소설이 될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의 가장 굵직한 소재는 '사형제도' 가 아닐까 싶다.  이런 소재로 독자에게 문제 제기를 하고 있다는 점도 여느 스릴러 소설과는 달랐다.  타임킬링용으로 가볍게 읽고 말 스릴러는 아니라는 점, 그것이 이 책의 특징인 것 같다.  개인적으로 '사형제도'에 무척 관심이 많다.  여전히 사형제도 존폐지에 있어서 이렇다 할 답을 내리지 못하겠다.  '존치하자'는 입장과 '폐지하자'는 입장이 양날의 칼처럼 대립하고 있는데 양자의 팽팽한 주장을 듣는 일은 정말 흥미로운 일이다.  저자는 사형제도 폐지를 주장하는 입장이란다.  저자의 목소리를 담고 있는 바버라가 아주 흥미로웠다.  물론 그녀 역시 사형제도 폐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사형수 월터를 도와주지만 '아, 정말 사형제도는 폐지되어야 하는 것이 옳겠어'하는 생각이 들게끔 설득력 있는 인물은 아니었다.       

  이 소설은 스토리보다 등장인물들의 심리와 관계를 통해 독자들을 불러 모은다.  월터의 피해자인 엘리자의 삶이 월터에게서 날아든 한 통의 편지 때문에 흔들리게 되고 계속 엘리자를 조종하려 하는 월터의 묘한 관계가 이야기의 핵심이다.  엘리자는 자신의 지난 허물인 과거의 사건을 주위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하지 않고 월터의 부탁을 하나하나 들어주게 된다.  안타깝기도, 답답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등장인물 어느 하나 공감하기가 힘들었다.  월터도 엘리자도 바버라도. 

  이 스릴러는 흥미진진함보다는 시사성이 강한 소설이다.  피해자의 삶이 얼마나 피폐해질 수 있는지, 가해자의 야망과 악랄함의 끝은 어디인지를 보여준 소설이었다.  그리고 가해자를 보호하는 인권단체의 입장 또한 한 번에 들여다볼 수 있는 소설이었다.  그런데 정말 스티븐 킹이 올해의 소설로 꼽았는지는 의문이다.  아쉽게도 내게는 그럴 만큼 매력적인 소설은 아니었던 것 같다.  스릴러라면 대놓고 긴장감이 넘치고 오싹하기를 기대했기에 그랬던 것일까?  표제와 책의 컨셉이 내용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듯한 느낌이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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