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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2004-12-31 22:05]  



[동아일보]

▽사회(복거일)=올해가 을사늑약 체결 100년이면서 광복 60주년이고 한일협정 체결 40년이 되는 해입니다. 중요한 시기들에 두드러진 역할을 한 세 분 지도자들을 모셨습니다. 먼저 이완용 선생께 여쭙겠습니다. 을사늑약의 역사적 뜻은 무엇입니까?


▽이완용=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게 이양한다는 겁니다. 그 조약으로 조선은 완전한 독립국가의 지위를 잃었고, 외교라는 채널을 통해 다른 나라들의 도움을 받을 길도 잃었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조약은 국제 관계에서의 실상을 반영해요.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이기면서, 조선의 운명은 결정되었습니다. 온 세계가 일본이 조선에 대해 지닌 특별한 지위를 인정했던 겁니다. 을사늑약은 그런 현실을 반영한 셈이죠.


▽김구=그러나 당시 대신(大臣)들이 일본의 위협에 더 저항했다면, 역사는 조금이라도 달라졌을 것입니다.


▽이완용=당시 일들을 변명하는 것은 부질없습니다. 그래도 당시 우리 대신들은 나름으로 애썼죠. 이토(伊藤) 후작이 황제 폐하께 뵙기를 요청했지만 폐하께선 거절하시고 대신들과 상의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이토 후작과 일본 군대에 모진 핍박을 받았어요. 우리는 방에 갇혀 여러 날을 버텼지만, 외부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했습니다. 어떤 외국 공관도 우리에게 물질적 정신적 도움을 주지 않았습니다. 구차한 변명으로 받아들이시겠지만, 우리가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일본의 압력에 저항했더라도, 상황은 달라지지 않았을 겁니다. 조금 전에 말한 대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이긴 뒤엔 조선이 독립국가로 남을 길이 없었어요. 만일 러시아가 이겼다면, 조선은 러시아의 지배를 받게 되었을 겁니다.


▽박정희=러시아가 이겼다면, 러시아의 지배를 받았을 것이라고 하셨는데, 조선이 독립을 지킬 길은 없었습니까?


▽이완용=사실 조선은 독립을 유지하기 좋은 처지에 있었다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중국 일본 러시아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비록 작은 나라이긴 하지만 지정학적으로 상당히 안정된 나라였어요. 세 나라 가운데 어느 하나가 강해지면, 다른 두 나라들이 연합해서 강자를 견제하게 마련이지요. 게다가 조선에 대한 영토적 야심이 없는 미국이 현상유지 정책을 폈으므로, 상황은 더욱 안정적이었죠. 어려운 시절, 임시정부를 이끄신 김구 선생의 생각은 어떠신지요?


▽김구=그런 점에서 8·15광복은 우리 조선의 왜곡된 역사가 바로 펴나갈 수 있는 계기였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광복은 우리 손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태평양전쟁에서 미국이 일본에 이긴 데서 나온 부차적 효과였어요. 그래서 우리 조선 사람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습니다. 이런 사정이 결국 남북분단과 6·25전쟁으로 이어졌지요. 태평양전쟁이 끝났을 때, 미-소 냉전구도는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였습니다. 그래서 미국과 소련이 나누어 점령한 조선반도에 단일국가가 세워지기는 애초에 어려웠다고 할 수 있지요.


▽박정희=아니, 뜻밖입니다. 그러면 선생께선 남한에 단독정부를 세워야 한다고 주장한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을 뒤늦게 지지하시는 셈입니까?


▽김구=얘기가 그렇게 되나요? (웃음) 사실, 나는 조선 사람들이 영구적 분단을 막을 길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으려고 애썼습니다. 그래서 아시다시피 이승만의 주장에 부정적이었죠. 그러나 이 자리를 빌려, 솔직히 그 뒤의 역사는 그의 주장이 옳았음을 보여 주고 있다고 말할 수 있어요.


▽박정희=그렇다면, 선생께선 이승만 대통령의 업적을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김구=식민지를 막 벗어난 사회는 불모지입니다. 그 위에 나라를 세운다는 일이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사회기구들은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모든 인적 물적 자원들은 크게 부족하고…그런 상황에서 그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한 셈이지요.


▽박정희=정적(政敵)에 대해 그렇게 너그러운 평가를 하시다니, 역시 시간 속에서 영원한 것은 없는 것 같군요.


▽김구=박 대통령 역시 대한민국을 발전의 길로 이끄시는 데 큰 기여를 하셨습니다. 그 길에서 처음 세워진 중요한 이정표가 한일협정이었죠. 박 대통령 스스로는 한일협정의 역사적 뜻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박정희=일본은 유럽 문명권 밖에서 선진국 대열에 합류한 유일한 나라입니다. 그래서 일본은 서양의 우월한 지식이 동아시아로 들어오는 도관(導管) 노릇을 했어요. 실은 지금도 일본은 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한국의 대일 무역적자가 아직도 크다는 사실에서 이 점이 잘 드러나죠. 일본은 자유민주주의 이념과 자본주의 체제를 지녔고 동아시아에서 공산주의 세력과 맞서는 우리에게 유일한 우방입니다. 일본과의 협력적 관계를 전제로 삼지 않고선, 그때나 지금이나 우리는 안보와 경제에서 합리적이고 발전적인 정책을 세울 수 없어요.


▽이완용=당시 반대가 거셌지요?


▽박정희=저는 중요한 것은 협정의 내용이 아니라 협정 자체라고 판단했습니다. 물론 내용도 불리한 것은 아니었습니다만….


▽김구=원수에게 복수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도 잘사는 거예요. 일본의 보상이 종자 자본이 되어 경제를 발전시킨 일을 생각하면, 난 가슴이 따스해집니다.


▽이완용=나라를 망하게 한 장본인이라는 평가에서 자유롭지 못한 제게 변명할 기회를 주신다면, 나라가 망하는 판국에서도, 정치 지도자들은 가장 덜 나쁘게 망하는 길을 찾는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 그 점을 잊으면, 당시 역사를 제대로 살피기 어렵고, 불행한 역사에서 교훈을 얻기도 힘들겠죠.


▽김구=역사의 흐름을 쉽게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환상입니다. 어떤 목표를 단숨에 이루려고 서두르는 것은 위험해요. 여건이 익을 때까지, 겸허한 마음으로 기다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특히 통일에 대해 이 점을 유념해야죠.


▽박정희=민족주의 이념도 진화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열린 민족주의를 추구해 일본과의 관계를 보다 긴밀하게 만들어서 우리의 국제적 입지를 넓혀야 해요.




●복거일(卜鉅一·60)씨



△서울대 상대 졸업(1967)


△대체역사소설 ‘비명(碑銘)을 찾아서’로 데뷔(1987)


△가상역사소설 ‘역사 속의 나그네’ 펴냄(1991)


△사회비평서 ‘죽은 자들을 위한 변호: 21세기의 친일 문제’ 펴냄(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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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완용-김구-박정희 라는 라인은 처음 봤을 때 상당히 생뚱맞은 인물 조합이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보수 민족주의의 상징적인 양반과 그 나름대로들은 민족주의를 주창했지만 뒤통수 치는 민족주의를 실현해주셨던 두 양반 간의 대립각으로 보면 이해가 될 듯. 뭐 대립각이라고 할 것도 없이 나머지 한 양반은 작자의 의도대로 통렬한 자기반성중이지만-_- 무엇보다도 저 인물들을 제멋대로 불러와서 제대로 된 자료도 공개되지 않은 작금의 현실에서 위험천만한 소릴 지껄이는 작자의 머릿 속이 궁금할 따름...

협정서 내용이 공개되는 마당이 되자 박정희께선 '협정의 내용이 아니라 협정 자체가 중요하다'고 판단했다고 선수치게 해주시는 저 어이없음.... 회창옹 피붙이들의 병역 비리 건이 터졌을 땐 그리 발벗고 뛰어다니시더니 요즘도 바쁘시겠구만 복선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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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밀양시 집단 강간 사건이 진행되는 추이는 꽤나 흥미롭다. 41명에 의한 강간이라는 숫자가 보여주는 가혹함도 그렇지만 시선이 끌리는 것은 이 사건을 대하는 시스템의 태도다. 일단 사건 이후에 피해자 여성측에 대한 모욕과 협박이 가해자와 경찰 양측에서 있었다는 기록이 있고 가해자들에겐 이해가 안 될 정도로 얕은 형량이 구형되었다. 이후 밀양시 경찰서에선 재빨리 인사조치를 취했고 피해자에 대한 경찰의 모욕이 있었다는 기사는 이후 신문사 자체에서 수정했다. 밀양시 내의 제대로 된 권위집단이나 단체에서 관련 성명은 발표되지 않았으며 현재 각 포털 사이트와 게시판에서 밀양시 사건과 관련된 사항들은 빠르게 지워지거나 수정되는 형편이다. 주요 방송사 뉴스는 밀양시 사건의 판결 결과와 부수적으로 따르는 뉴스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그리고 황토 단무지 사건이 마치 일전의 국민연금 건 때의 만두 파동이 올라왔던 것처럼 타이밍 좋게 터져나왔다. 이 모든 것은 사건의 주모자들이 유력인사들의 자제이며 밀양시 내에서 이와 같은 사건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는 디시쪽에서 퍼지기 시작한 증언에 신빙성을 더해준다. 그러나 과연 그것뿐으로 이정도의 신속한 '처리'가 가능한 것인가.

 

증언(정확한 사실적 증거가 제시되진 못했음)---------------

본좌는 3년전에 밀성고를 졸업하고 서울에서 학교다니고 있소.
밀성고는 사립이고 밀성학원을 모태로 한곳이오.
밀성학원이 밀양에서 말이 좀 많소..
이사장이 전직 국회의원 줄신이라 거기서 인맥을 튼 사람들이 많아,그걸 믿고 자식들 입학시키는걸 많이 봤소.
밀양시..아니 경남에 있는 고등학교중에서 돈많은 애들이 많이 다니는곳이 밀성고요.

밀성고에 다니는 아그들의 7~80%는 시의원,경찰간부이사,의사,변호사등..
주로 고위층 간부들이오.
그래서 왠만한 사건터져도 그냥 넘어가오.
돈과 빽이 없으면 3년을 못버티는곳이 밀성고요.
그래서 선생들도 거기 안가려고 하고 있다 하오..

올해에만 이 사건 일어난줄 아시오?
본좌 학교 다닐때도 부산에 있는 모 여고 애들 집단 성폭행했는데,
그 피해자중 한명 투신자살했소..
가해자 부모들이 피해자 가족들 다굴하고..
하다못해 조폭들 시켜 개난리 피웠소.

....그 가해자들 부모들...밀양시 의원들이 대부분이었소.
그래서 그걸 보도한 부산 MBC에서도 적잖은 피해를 입었소...

밀성고 말고 왠만한 학교들..부모 빽이 큰 이상.
왠만한 일은 다 덮고 넘어가려 할거요.
이 사건으로 전국에 좀더 퍼져서 망신살 한번 크게 받았음 하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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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로 붙이자면 현 엠비시 왕다마이자 언론협회 왕다마인 아저씨가 밀양인이라고....-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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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효숙 재판관의 요지

<소수의견 개진>

나는 다수의견의 논지는 우리 헌법의 해석상 받아들일 수 없다고 생각하므로
다음과 같이 견해를 밝힌다.

1.
수도의 소재지가 어디이냐 하는 것은 그러한 헌법의 목적 실현을 위한 "도구"에 불과하며,
그러한 목적 실현에 직접 영향을 주는 사항이라 보기 어렵다.그러므로 헌법상 수도의 위치가
반드시 헌법제정권자나 헌법개정권자가 직접 결정해야 할 사항이라고 단정할 수 없다.

2.
서울이 수도라는 사실이 오랫동안 우리 민족에게 자명하게 인식되어 온 관행에 속한다
하더라도, 우리 국민이 그것을 강제력 있는 법규범으로 확신하고 있었다고 인정하기 어렵다.
우리 국민들에게 수도의 위치가 성문헌법과 동등한 효력을 지니는, 즉 헌법개정절차에 의해서만
개정되어야할 정도의 법적 확신이 존재하여 왔다고 볼 수 없다.

그러므로 "서울이 수도이다"라는 사실로부터 "서울이 수도여야 한다"는 헌법적 당위명제를
도출하는 것은 논리의 비약이 있는 것이다.

3.
성문헌법을 지닌 법체제에서, 관습헌법을 성문헌법과 "동일한" 혹은 "특정 성문헌법 조항을 무력화
시킬 수 있는" 효력을 가진 것으로 볼 수 없다.성문헌법이 존재하는 한, 관습헌법은 성문헌법으로부터
동떨어져 성립하거나 존속할 수 없고, 항상 성문헌법의 여러 원리와 조화를 이룸으로써만 성립하고
존속할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헌법적 관행에 의해서 성문헌법이 변질될 수 있다는 것을 뜻하게 되고 성문헌법전보다
불문적인 헌법의 관행예가 우선하고 국가생활을 지배하는 결과가 된다.

4.
다수의견은 관습"법률"이 아닌 관습"헌법"은 "헌법"이므로 그 변경은 헌법개정절차를 통해야 한다고 하나,
이는 형식적 개념논리만 강조된 것이다. 헌법에 들어있지 않은 헌법사항 내지 불문헌법의 변경은 헌법의
개정에 속하지 않으며, 우리 헌법이 마련한 대의민주주의 절차인 법률의 제정, 개정을 통하여 다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5.
서울이 수도"라는 관습헌법의 변경은 헌법개정에 의해야 한다면, 이는 관습헌법이 헌법이 부여한
국회의 입법권을 변경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관습헌법에 대하여 국회의 입법권보다 우월적인 힘을
인정하는 것이 된다.

6.  
결론적으로 서울을 수도로 한 관습헌법의 변경이 반드시 헌법개정을 요하는 문제라고 할 수 없고,
헌법해석상 국회의 입법으로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할 수 없다.
따라서 이 사건 법률이 헌법 제130조 제2항의 국민투표권을 침해할 가능성은 없는 것이다.

 

....나야 뭐 충청도에 땅 한톨도 없고, 친척이든 지인이든 한마리도 없는데다 서울에서 태어나 계속 살아오다보니 이 괴물 같은 도시가 완전히 익숙해져서 수도가 옮겨지든 말든 별 상관도 않는 그런 사람인데.... 어제 벌어진 헌법재판소의 결정은 한마디로 코미디였다. 세상에, 경국대전이라니.... 관습법을 성문법 위에 올려놓은 것도 어지간하게 신선했는데 그 근거라고 들이댄 것이 가히 점입가경이었다. 늙은이들이 무슨 개그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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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한나라당을 지지하는 건 제정신이 아니거나 멍청하거나 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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