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 전에 아는 이에게 빌려줬던 이 책을 어제 돌려받을 수 있었다. 한 병 분량의 참이슬과 오뎅탕 만 이천 오백원이 소요된, 확실하게 손해본 건이었다-_-
처음 이 책을 읽었을 때, 들었던 생각은
'요시나가 후미도 이제 다 갔구나....'
하는 느낌이었다. 여전히 시니컬하고 쿨하며 동시에 타인을 배려할 줄 아는 사려깊음을 가진 인물들이 나와서 특유의 포커페이스와 삐죽 튀어나온 입을 하고 인생에 대한 복잡다단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나 그 모든 탁월함에도 불구하고 요시나가 후미의 스타일이란 것이 확고하게 정립이 됐다는 것을 보여준 동시에 매너리즘의 독소마저 내비치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이 작가가 가진 인생관이 가진 이해와 관용, 생활사적 성찰의 폭넓음은 그녀가 주력으로 뛰던 야오이에 한정된 것이 아님을 몇 편의 비야오이물 단편집이나 모음집을 통해 증명한 바가 있다. 하지만 그에 비해 [사랑해야 하는 딸들]은 너무 밋밋한 것이 아닌가, 혹은 자신의 세계에 아주 안주해버린 게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게 만들었다.
그녀의 단편집중 최고로 치고 싶은 아이의 체온.
그런데 오늘, 전철 안에서 [사랑해야 하는 딸들]을 다시 한 번 읽어보다가 문득, 그녀가 지금까지 남성들의 세계에만 천착해왔다는 걸 깨달았다. 그것이 야오이가 아니라 가족 간의 사랑을 다루고 있는 이야기에서조차도 그녀의 작품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은 그녀 특유의 남성 캐릭터들의 군집이었다. 그러니까 여자인 이 작가는 동성애와 탐미적 취향, 예절과 격식과 성욕이 들끓는 남자들의 세계를 거쳐서 [사랑해야 하는 딸들]에 와서야 비로소 여성들의 세계, 자신과 생물학적으로 가장 밀접한 이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것이다.
[사랑해야 하는 딸들]은 그 제목에서처럼 세상의 여성들에 대한 찬가다. 피학 경향이 있는 여자, 각자 컴플렉스를 가진 어머니와 딸, 너무도 스무스하게 부숴져버린 꿈을 안고 가게된 여자들과 사랑을 알기 때문에 사랑을 못하게 된 여자. 작가가 그 모든 여자들, 불완전한 존재로 설정된 그녀들을 바라보는 시선은 그녀의 전작들처럼 이해와 용서의 전례지만 그 속에는 남성들의 세계를 바라보던 것과는 다른 진지함이 배어있다. 전작들에 등장하던 이들이 보여주던 동성간의 끈적한 시선이 배제된 모녀, 혹은 우정의 관계로만 설명이 가능한 이야기들은 그녀의 전작들이 보여주던 은근한 음탕함이 사라져버린 세계인 동시에 그런 의미에서 보다 자유롭게 애정과 관계에 대한 질문을 적극적으로 환기시킨다. 여기서 사랑이라는 화두는 단순하게 남녀든 동성이든 간의 에로스적 애정의 연장이 아니라 여자들에 의해 부드럽게 전복되고 확대되는 아이콘이 된다. 물론 그녀의 작품군이 대개는 애정을 빙자한 인생찬가, 혹은 삶에의 이해에 얽혀있는 이야기였지만 [사랑해야 하는 딸들]에서 그 모든 체념과 회한, 자기만족과 깨달음들은 유난히 담담하면서도 살갑게 다가온다. 사랑은 차별적 개념이 되어 한 여자로 하여금 사랑을 포기한 사랑을 가지게 만들고 모녀들은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이해하고 받아들이게 된다. 이 설득의 과정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었지만 [사랑해야 하는 딸들]이 보여주는 성과는 생각보다 훨씬 넓게 요시나가 후미의 만화가 가진 세계를 확장시켰다.
이젠 그녀의 백합물을 기대해도 좋은 것인가-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