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쿠와 우키요에, 그리고 에도 시절 - Art 020
마쓰오 바쇼 외 지음, 가츠시카 호쿠사이 외 그림, 김향 옮기고 엮음 / 다빈치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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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요함이여,

바위에 스며드는

매미의 울음.

 

 


글로 그린 그림과 다를 바 없는 하이쿠를 맛보게 된다면 그와 꼭 맞는 그림과 연결시키고 싶다는 욕망을 가지지 않는 것이 되려 힘들 것이다. [하이쿠와 우키요에, 그리고 에도시절]은 전국시대가 끝난 이후 펼쳐진 태평성대의 중심을 뒷심 삼아 우키요에라는 이름을 가진 시대의 병풍을 불러들여 그런 편집자적 욕망을 마음껏, 그리고 정성스럽게 펼쳐보인 결과물이다.

사계라는 주제를 따라 완고하게 진행되는 그 한 수 한 수 속에서 그림은 글을 드러나게 만들고 글은 그림을 움직이게 만든다. 차분하게, 그러면서도 결정적인 이미지의 화학작용을 꿈꾸는 이 너무도 자연스러운 결합의 연쇄들은 편집자, 혹은 가상의 독자라는 다른 이름의 편집자가 가졌을 욕망을 충분히 충족시켜준다는 점에서 그 단순하지만 정석적인 의도에 부응하고 있다. 그리고 온전하게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떤 과함도, 삐져나옴도 없이.

그런 의미에서, [하이쿠와 우키요에, 그리고 에도시절]에선 욕망은 있되 욕심이 없음을 느낀다. 이 책이 두 명의 다른 필자의 힘을 빌어 풀어내는 나긋나긋한 설명을 통해 하이쿠와 우키요에를 처음 접하는 이도 그 낯설지도 모를 세계를 이해할 수 있게끔 친절한 접근법을 시도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그렇다. 그것은 충실함이다. 자기완전성을 보장하기 위해 내면의 호수로 뛰어드는 개구리를 덤덤히 바라보는 하이쿠 시인처럼, 여기서 느껴지는 것은 절제된 욕망의 적극적 자기표상이 보여주는 성숙하고 예의바른 유희에의 초대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쿠와 우키요에, 그리고 에도시절]의 미덕은 마치 하이쿠 그 자체와도 같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단정하면서도 친숙한, 그러면서도 고아한 그 무언가처럼.

 

계절과 풍광과 심상을 표현해야 하는 하이쿠에선 일본적 처연함과 허무함, 그리고 그와 더불어 장르 자체가 가지는 유희성과 그를 따르는 낙천적 기운, 찬탄과 기쁨까지 맛볼 수 있다. 때로는 비극, 때로는 초탈, 때로는 해학을 보여주는 하이쿠의 다양한 면모는 짧고도 변화무쌍하며 그래서 언어유희에 더없이 적합하다는 측면에서 그 폭넓은 수용성을 보여준다. 압축된 삼라만상을 5-7-5의 엄격한 틀속에서 담아내야 했던 이 짧은 시는 필연적으로 고도의 이미지성을 가지게 된다. 그것은 정형시가 빚어내면서 쌓아온 절제되고 정제된 시어가 마침내 도달해야 했던 운명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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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10-3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이쿠를 우키요에로 설명하려는 건, 과한 욕망 같아요.
어느 쪽이나, 서로가 서로를 보한다기 보다는 감하는 느낌이에요.
이 책 안 읽어 보았지만.--;;
근데, 다른 리뷰들이랑은 느낌이 좀 다른걸요.(뭘까?)
너무 나긋하달까.

hallonin 2006-10-31 0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실은 우키요에와 하이쿠의 결합이라는 모양새는 제가 전에 간직했던 아이템 중 하나였거든요. 바쇼에 의해 대중화된 하이쿠와 판화 양식을 통해 대중화되어 에도시대에 대한 일종의 간판 역할을 한 우키요에는 둘 다 민중적인 고아함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이상적인 결합이라고 생각했었습니다.... 그리고 헐, 좀 찌르긴 찔렀다고 의도했는데 역시나 잘 보이진 않는 건지도?

blowup 2006-10-31 0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러셨구나.
아이템 보따리가 뚱뚱한가요?
민중적인 고아함에서는 끄덕끄덕.
제가 아니라고 느꼈던 건, 아주 주관적인데(뭔들 아니겠습니까만)
하이쿠가 우키요에보다 훨씬 더 압축적인 형식이라고 생각해서였어요.
근데, 제가 본 우키요에가 얼마나 된다고 그렇게 단정적인 발언을 하나 싶어
제 발언을 살짝 물리고 싶습니다.(리콜할까요?^^)

hallonin 2006-10-31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물리긴요. 좋은 물음에 최대한 답을 짜낸 제가 안타까워집니다 그럼-_- 인류는 러브&피스죠 핫핫하!
 
언더 더 로즈 Under the Rose 1 - 겨울 이야기
후나토 아카리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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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이야기의 시작은 라이너스 킹이라는 위풍당당한 이름을 가진 한 몰락귀족 소년의 비뚤어진 의식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는 실은 더할 나위 없는 욕심쟁이이자 스스로 내팽개쳐버린 애정에 집착하는 아이지만 아무 것도 원하지 않는 척 하며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처럼 허세를 부리고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 강박적으로 자신이 보지 못했던 것들을 어떻게든 뜯어내고 캐내서 확인해 보려고 한다. 그러나 그가 시골 구석 바닷가에 자리한 다 무너져가는 조그만 집을 나와 접하게 된 세상은 19세기 영국. 금욕과 퇴폐라는 두 극단적인 이미지가 공존하는 그 전통 있는 시공간 속은 그의 생각처럼, 그의 행동을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세계가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아이임을 거부하지만 그럴수록 그는 무의식적 가해자의 역할만을 떠맡게된다. 그자신은 자신이야말로 홀로 정의를 행하고 있음이라 여기고 있었음에도 말이다. 그러나 마치 광기에 젖은 것 같지만 어설프게 의도된 그의 행동들은 표피 너머에 새겨진 상처들과 사건들, 기억들에 비교하면 그저 재롱일 뿐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모든 흔적들을 한꺼번에 되살려주는 것 같은 [언더 더 로즈]는 시작부터 불분명한 죽음으로 촉발된 우울한 정서로 가득하다. 이미 가문의 역사가 만들어내는 비밀스러운 이야기들을 다룬 많은 결과들을 접한 이들에겐 익숙하겠지만 그것은 숙명과 핏줄, 잘못된 관계와 꼬인 시간이 만들어낸 오래된 잔혹극의 낯익은 정경이다. 그러나 [언더 더 로즈]의 미덕은 단순히 옛전통의 안이한 답습에서 끝나지 않는다. [언더 더 로즈]는 가혹한 세계를 보다 세련되고 정교하게 숨이 턱턱 막히는 좁고 내밀한 미궁으로 직조하여 펼쳐보인다. 그 방법론은 보다 분명한 시대적 리얼리티의 부여와 인물들을 향하는 확고한 시선, 그리고 개성으로 충만한 그들 하나하나를 어느 하나 소외되지 않고 살아 움직이게 만드는 배려를 통해서다. 한 남자와 세 여자, 그리고 그들 사이에 있는 여덟 명의 아들들. 이 복잡다단하면서도 위태로운 관계는 태생적으로 절대 물리쳐지지 않을 신경증적 강박과 불안을 담보한다. 따라서 사계절로 예정된 이 긴 이야기(두번째 에피소드인 '봄의 찬가'는 7권에서 끝나는 걸로 예정되어 있다고 한다. 기쁘게도 아직 갈 길이 한참 남았다!)가 겨울을 지나 봄을 맞이했음에도 여전히 서늘하고 딱딱하게 마른 미로를 더듬고 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건 당연한 것이다.

그 과정을 보다 견고하게 지켜주는 것은 후나토 아카리의 매력적이면서도 탄탄한 작화와 작가로서의 냉정한 자각으로 유지되는 엄격한 태도다. 자칫 잘못하면 과잉된 정서의 분출로 인해 신파극이나 가학-피가학적 상황의 너절한 나열이 되어 지극히 아마추어적인 인상으로 끌고 갈 수도 있었던 이야기를 그녀는 흔들림 없이 침착하게 이끌어간다. 그렇게해서 추리극의 면모를 진하게 띄는 '겨울이야기'의 서스펜스가 보장될 수 있었으며 뒤틀린 치정극인 '봄의 찬가'의 잔인한 전개가 설득력을 가질 수 있게 됐다. 후나토 아카리는 이 고도화된 소프 오페라 속에서 빅토리아 시대의 제도와 관습 뒤에 엉켜있는 비틀린 인간들의 감정을 직시한다. 그녀의 인물들이 달려가는 곳은 외적인 요소들에 의해 예정된 수순이되 시대에 의해 정당화되고 안정된, 감춰진 광기의 세계다. 그러나 자신의 자리를 보장받은 그들은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쳇바퀴 돌듯 끊임없이 방황해야 할 이유를 부여받는다. 도대체가 완전하게 닫혀버린 미로 속에 던져진 다음에야 어떻게 구원을 바랄 수 있겠는가. 그 안에서 잊어버린 죄를 찾기 위해, 혹은 속죄하기 위해 부여된 방법이 그저 그 미로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어 나가는 일이라면 과연 어떻게 해야겠는가.

그러니 이 고통은 끝없이 파고 들어가는 나사와 같다. 한 번 넣기 시작하면 그 결에 자신을 단단하게 새겨버리는 끈질긴 나사처럼. 그렇기 때문에 그 가혹한 흐름에도 불구하고, 어찌되었든 그 있을지 없을지 모를 끝을 보기 위해 파고 들어갈 수밖에 없는 유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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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wup 2006-09-24 10: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 정말 강렬한 제목이군요.
일본 사람들은 왜 이 시대와 이 공간에 집착하는 걸까요?

hallonin 2006-09-24 12: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선 저 시대와 공간 자체가 근대라는 이름으로 가장 막바지에 도달한, 현대와 고전시기의 융합이 집중적으로 이뤄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고도의 양식화와 더불어 금욕과 퇴폐라는 두 영역이 극단적으로 맞물려 있는 시대라는 점에서 매혹의 대상이기 때문이기도 하고.... 그리고 일본의 이상적인 근대화 모델인 것과 더불어 지리적-제도적 동질감을 가진 나라가 영국이었다는 역사적 현실로 인한 문화적 파장의 결과도 그 원인에 들어가리라 봅니다. 뷁사마와 안경잽이 마법사 꼬마에게 열광하는 것처럼 말이지요.
 
엠마 Emma 7
카오루 모리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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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4년 6개월간의 월간 연재. 우리나라에서 엠마 1권이 나온 건 2003년 3월이라니 이 메이드광인 능글맞은 작가가 여자였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은 것도 어느새 3년하고도 4개월이 지난 셈이다.

사실 메이드를 다룬 만화가 '또' 나온다고 했을 때의 반응은 그런 식상하고 뻔한, 오타쿠나 볼 법한 것을 뭐하러 보느냐는 것이었다. 이것은 [강철천사 쿠루미]로 국내에도 제법 인지도가 확산되었던 동시에 처음부터 왜곡된 이미지를 안고 수입되었던 일본 오타쿠 트렌드의 한 축을 담당했던 메이드물 장르의 지나친 매너리즘화에 의한 것이었다. 그 메이드의 이미지화가 다분히 성적인 트렌드의 이동에 의한 것이라는 점에서, 당시의 메이드물이 가지는 한계란 명확해보였다. 그러나 [엠마]는 정반대의 방법으로 메이드물의 정통성을 획득해내려 했다. 그것은 (성적인) 기능적인 면만으로 특화된 기존 메이드물이 무시해버렸던 길의 우회한 복권과도 같았다.

[엠마]의 스토리는 무척이나 단순하다. 또한 그 단순함에 굳이 기교를 부리려 하지도 않는다. 귀족사회에 진입하려는 젠트리 가문의 남자가 천한 신분의 메이드에게 반해서 사회적 갈등을 일으킨다는 내용이 말그대로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끝까지 진행된다. 이 일련의 단순한 이야기 흐름 속에서 일본만화라는 거대한 브랜드에 씌워지는 만연한 섹슈얼리티에 대한 문제제기는 [엠마]에선 거의 이뤄질 공산이 없다. 혹 [건슬링어 걸]의 케이스와 비교하여 이 금욕적이고 절제된 시선에 대한 페티쉬즘적 결론을 내리는 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카오루 모리의 시선은 이야기 자체에 내밀하고도 섬세한 묘사의 의무를 부여함으로써 그자신이 원하던 작품의 순수한 면모를 구축해낸다. [엠마]는 확실하게 저자극성이다.

사실 어떻게 보면 스토리의 기교나 응용은 작가로선 상대적으로 비중이 덜했을 사항인지도 모른다. 평범하고 절제된 감정으로 가득한 스토리에 비추어 [엠마]는 메이드, 그것도 그 양식이 구체화되기 시작한 고전적인 19세기풍 메이드를 표현하기 위해 모든 걸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특히 당대의 정경들에 대한 신경질적이라 해도 부족하지 않을 고증과 재현에서 찾아볼 수 있다. 특히 메이드의 복식에서부터 생활에까지 이르는 메이드의 모든 세부사항들에 대한 천착은 [엠마]가 실제적으로 지향하는 모든 것이다. 물론 작가는 19세기 영국이 가지고 있는 다양한 풍경들을 열렬하게 사랑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을 주변부적인 요소로 만드는 것은 메이드라는 특화된,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무수히 오해된 캐릭터다. 작가는 언제나 고전적인 이야기 속의 조연이었던 그 캐릭터를 정당하게 복권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니 여기서 우리가 매혹되어야 할 것은 메이드에 대한 따뜻한 동시에 더없이 열정적인 작가의 시선이다. [엠마]에서 우리가 즐거워해야 할 부분은 드라마가 아니라 일상이다. 과장되지 않은 메이드의 삶에 시선이 맞춰진 프레임은 그들의 손동작, 드레스끝, 헤어스타일, 발걸음, 말투까지를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세세하게 보여준다(오직 안경 쓰는 엠마를 보여주기 위해 그 과정과 동작을 일일이 보여주는데 3페이지를 써버리는 만용을 부렸던 작가임을 기억하자).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잊어왔던, 제멋대로 바꿔버렸던 오래된 조연이 비로소 주연의 자리로 올라서는 그 모든 과정을 진득하게 볼 수 있게 됐다. 단순히 메이드의 일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지는 작가를 통해 현실적으로 승화된 이야기는 독자를 침착하게 건조하면서도 매혹적이고, 무엇보다도 살아있었던 메이드의 삶 속으로 이끌어준다. [엠마]라는 만화의 소중한 경험이란 그 소박하면서도 흔치 않은 지점에서 비롯된다. 

 

추가하자면 메이드복을 벗고 비로소 드레스를 입은 엠마를 맨 마지막 장에서야 겨우 배치해놓는 작가를 보면서 엠마에게서 메이드복을 벗기는 게 가장 싫었던 사람은 작가 본인이 아니었나 생각하게 된다. 이것은 동시에 작품 전체의 절제된 기조를 반영하듯 [엠마]가 '고작' 7권에서 본편의 이야기를 끝낸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설명해주고 있는 바이기도 하다. 즉, 더이상 엠마는 '메이드'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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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시대의 재구성 - 인류 역사상 가장 참혹했던 시대의 내밀한 이야기
존 켈리 지음, 이종인 옮김 / 소소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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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룡이라는 거대한 존재들이 지구에서 살고 있었고 이제는 그 존재가 싸그리 사라져버렸다는 역사적 발견은 성서적 세계관에서 자신의 존재증명을 찾아내던 이들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그것은 한편으론 지구의 지배자가 인간뿐이 아니었다는 점에선 성서의 세계관을 부정한다는 의미에서 그 첫번째 충격이 자리하고 있었고 두번째는 역설적으로 생물체의 완전한 말살의 증거로 인해 요한묵시록의 장엄한 죽음의 세례가 땅 위에서 실제적으로 실현된 적이 있다는 걸 증명한다는 점에서 충격으로 다가왔으리라. 실상 종말론은 중동 사막신의 전기에서보다 더 깊은 태고적 신화의 세계들 속에서도 찾을 수 있는, 상상과 표현의 능력을 가진 포유류의 유전자에 각인된 트라우마와도 비슷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가 겪은 오래 전 기억인 그 모든 과거 종말들의 표식이자 장차 인류에게 공평무사하게 내려올 동시다발적인 죽음 - 혜성충돌, 폭풍, 지진, 화산폭발, 역병, 대해일과 전쟁 등의 직접적 요인들은 신화 속에서 신들의 전쟁이라는 고상한 포장으로 덧씌워져 표현되곤 했었다.

합리적(?) 종말론자들을 계속 매혹시켰던 그 모든 현상들 중 전염병의 이야기는 유독 돋보이는 것이었다. 전염병은 흡사 죽음의 실체화와도 같다. 전염병의 풍경은 무감각한 떼죽음의 경지를 보여주는 기상변화나 개인적-국가적-민족적 이익을 걸고 '숭고한 가치'를 기치로 '숭고한 죽음'을 추구하는 전쟁의 풍광과는 다르다. 그것은 그 모든 종말의 풍경과 같이 무분별하지만 동시에 완전하게 무가치하다. 또한 전염병은 감염자에게 무자비할 정도로 긴 죽음의 시간을 선사해준다. 가족이나 친구가 역병에 사로잡혀 서서히 피를 토하며 죽음에 침식되어가는 광경을 떠올려보라. 육체에 가해지는 긴 고통에 대한 인간의 공포는 국지적으로는 깔끔하게, 단번에 끝나는 죽음의 미덕에 대한 찬양을 읊게 만들었다. 실제로 죽음은 예술을 통해 실체화되어 아이콘이 됐다. 바로 저 중세 때, 죽음의 춤이란 주제로 만들어진 수많은 그림들을 떠올려보라. 인간의 세시기라고 이름 붙여진 무상함에 대한 고전적 주제 또한 마찬가지다. 그래서 브뢰겔의 '죽음의 승리'는 공포와 매혹에 대한 압도적인 풍경화로 볼 수 있다.

[흑사병시대의 재구성]은 그 '죽음'을 사방에서 춤추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고 살아남은 사람들에게 어두운 미학으로써 그를 기억하게 만들었으며 중세를 암흑의 시간이라 부르게 만든 흑사병이란 현상에 대한 총괄적인 재구성이다. 실로 책은 저 제목이 지칭하는 바를 워낙 충실하게 따라간다. 우리는 저자의 손에 끌려 펼쳐진 지도와 문서들, 당대 사람들의 생생한 증언을 통해 죽음의 길이 차례로 전개되는 과정을 실감나게 목도한다. 긴밀하게 겹쳐진 사료들의 실제적 의미들과 구멍난 부분을 메우는 작가적 상상력은 우리가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흑사병이란 실체를 몸뚱아리 그대로 끌어내보이는데 성공하고 있다. 즐겁게도 그 과정은 딱딱하거나 지루하지 않다. 유럽사를 전공한 작가의 미시적인 시선은 병의 근원이자 통로였던 몽골의 사막에서부터 당대의 유럽까지 독자들을 종횡무진 끌고다니며 때로는 죽음이 도래하기 직전의 부산하지만 평온했던 광경들 안에, 때로는 그 죽음이 모든 것을 쓸고 간 지극히 조용하고 처연하며 너저분한 풍경들 한가운데에 서게 만든다.

저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이 역병의 불평등한 부분을 지적해낸다. 그것은 인간의 바퀴벌레와 맞먹는 생명력과 그와 비슷한 정도의 편견, 그리고 그리 평등하지 않았던 죽음이, 그러니까 모든 인류를 말살시킬 정도로 완벽하게 압도적이진 못했던 죽음이 불러일으킨 결과다. 그것은 또한 원초적인 공황 안에 자리했을 때 이성의 동물인 인간이 불러일으킬 야만에 대한 많은 우화들과도 일맥상통하는 이야기다. 그것은 보다 잔인하고 억울하며 반복되어온 죽음, 바로 인종차별-유태인사냥에 대한 것이다. 병의 전래가 인간 스스로의 손으로 인해, 인간의 오만과 실수로 인해 시작되고 진행되었음에도 그 죄를 타인을 찾아 돌리는 이 오래된 이야기는 언제든 똑같이 우울하게 느껴질 따름이다. 여기에 거의 언제나 역사 속의 피해자였던 이 유명한 유목민족이 지금은 가해자가 되어 똑같은 일을 저지르고 있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하늘은 노을과 겹쳐져 검붉은 빛을 커다란 먹구름 사이로 뿜어내고 있었다. 마을을 바라보자 아직 채 치우지도 못한 시체들이 들어가는 길목 곳곳에 방치되어 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자리에 커다란 구덩이가 파여있고, 수북하게 쌓인 시체들과 내팽개쳐진 삽들, 주인 잃은 수레가 보인다. 그 뒤로 마치 시체들을 보호하는 수호령처럼 축 늘어진 덩어리-랍비모자가 모욕적으로 입에 쑤셔박힌 사람 몇이 목이 매달려서는 까마귀한테 살을 뜯기고 있는 중이다. 저녁 때이지만 불이 들어와 있는 집이나 연기가 피어오르는 집은 몇 채 보이지도 않는다. 저 멀리 반대편에 마을 바깥으로 난 길에선 반은 중얼거림이고 반은 괴성에 가까운 기이한 기도문을 외우면서 탁발수도자들이 마을로 들어서고 있다. 이윽고 축축하게 시린 비가 한 두 방울 땅바닥을 적시기 시작한다. 그 아래론 지하의 왕이 비를 피해 분주하게 죽음을 배달하고 있을 것이다. 이것이 바로 죽음의 풍경, 정적과 공허만이 지배하고 있던 세계의 모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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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 포 벤데타 일반판 (2disc) - 일반 킵케이스
제임스 맥티그 감독, 나탈리 포트만 외 출연 / 워너브라더스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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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먼저 분명히 밝히자면, <브이 포 벤데타>는 뻔한 영화다. 실로 관객의 예상치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않는 전개와 결말. 그런데다 거의 직설법에 가까운 화법은 이 영화가 <매트릭스> 같은 수수께끼 놀음-사실 텍스트로서의 철학자들, 사회학자들의 쓸만한 몇몇 논의들을 제외하고 <매트릭스>가 퍼즐식 철학 놀음으로 비춰져서 사람들로 하여금 소모적인 철학논쟁을 불러 일으킨 것은 <매트릭스>의 배경에 깔린 매니악한 자양분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처음 접한 이들이 저지른 대표적인 실수다-이 아니라 던지면 터져버리는 그 자체인 다이너마이트란 걸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브이 포 벤데타>는 그 외피의 확고한 방향성에도 불구하고 분명하고 익숙한 요소들에 대한 미묘하고 섬세한 조율과 재해석을 통해 흔한 히어로물의 매너리즘에서 벗어나는 즐거움을 안겨주고 있다.

 

무엇보다도 이 영화는 교조적이지 않다. 영화의 메시지성이 너무 강한 나머지 이 영화를 선동용 영화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완전히 오해하는 것이다. 영화 속에서 브이는 단순히 절대악과 싸우는 히어로가 아니라 원죄를 가진 하나의 흐름이자 운동movement 그 자체로 보여진다. 가이 폭스 가면으로 그런 자신의 위치를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브이는 대중을 일으켜서 앞으로 돌진하여 걸리적거리는 것은 거침없이 박살내버리는 마초적-선동적 먼치킨 액션 히어로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행하는 폭력의 정당성에 대해서도 다시 문제제기가 가능하다. 영화 속에서 브이의 손에 죽어나가는 경찰들은 과연 무슨 죄가 있어서 죽는 걸까. 브이가 영화 속에서 보여주는 연쇄살인, 폭력과 막판의 군중들의 무혈 행진의 대비를 눈여겨보라. 브이가 지하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있는 동안 똑같은 브이가 된 군중은 아무 폭력 없이 앞으로 나아간다. 이것을 일종의 씻김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은, 브이는 지하로 내려가서 자신을 만든 악마들과 자폭을 행함으로서 과거시대와의 완전한 단절을 이뤄내기 때문이다. 저 <양들의 침묵>에서도 지적됐던 바, 빛으로 채워진 지상세계를 지탱해주는 것은 지하의 악마라는 진리가 여기서 하나의 페이소스로 작용한다.

 

영화의 절제된 키를 맡고 있는 또 하나의 축은 영화 속 상황을 바라보는 일종의 거울 밖 화자인 이비 해먼드의 역할이다. 그녀의 눈높이는 관객의 눈높이와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 영화와 관련된 논의들에서 이비의 감금고문에 대한 논의가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고난을 겪어낸 이비는 물로서 일종의 세례-깨달을 얻어내는데 이것은 불에서 태어났던 브이와 명백하게 대비되는 씬이다. 아울러 이비에 대한 고문은 브이로 하여금 심각한 정체성 고민-자신의 탄생과 파시즘으로 가득한 사회의 유사성에 대해서-을 겪게 만든다. 그래서 후에 브이가 죽을 때 자긴 틀렸고 이비가 옳았노라며 말하는 것은 이 영화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가장 의미심장한 씬이라고도 할 수 있다(그러나 이 부분 역시 이비의 감금고문 시퀀스만큼이나 논자들에게 천대받은 씬이다). 그래서 그녀는 미치광이 같은 브이의 행동을 낯설어하고, 그에게 교화되긴 하지만 그의 곁에 머무르지 않는다. '괴물' 브이의 아름답고도 처절한 로맨스를 매혹적으로 보여줄 정도로 이 영화는 정신이 나가지 않았다. 되려 <십이야>와 <멕베스>를 읊고 줄리 런던을 듣는 브이의 낭만주의적 태도들과는 정반대로 영화가 그를 바라보는 시선은 제임스 멕티그의 숫기 없는 건조한 연출과 시나리오의 냉정한 톤 유지가 맞물린 무척이나 담담하고 자비심 없는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나아가 그가 개인사적으로 행복할 겨를을 주지 않는 전개는 브이가 가진 고전적 딜레마, 분노와 구원받을 수 없는 운명에 대한 가차 없는 판단을 따른다.

 

그렇기 때문에 브이를 연기하고 있는 휴고 위빙의 연기는 정말 탁월하다고 단언할 수 있다. 가면에 가리워진 인간의 정서를 억양과 몸짓을 통해 구현해내는 그의 능력은 한 인간인 동시에 하나의 준동이었던, 그래서 끝까지 가면을 벗지 않는 브이와 군중 속의 개인이자 교화-교감의 대상으로서의 이비 사이에 벌어지는 얕은 로맨스를 아무런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게 만들어 줄 정도다(덧붙이자면 브이라는 낭만주의적 캐릭터의 메타희곡적 특성을 구축해내는 데엔 그의 끝내주게 중후한 영국식 영어 발음 또한 한몫한다). 그에 반해 신인 감독 제임스 멕티그의 단조로운 연출은 워낙 많은 대사량이나 설명해야 할 내용들이 두시간 남짓한 상영시간 안에 들어가 있는지라 각본을 겨우겨우 따라가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달리 말하자면 욕심을 내지 않은 것이지만 그 여유의 부족은 몇몇 씬에선 비주얼적 빈한함을 안겨주고 있다.

 

그리고 <매트릭스>의 자장은 워낙 컸던 것이라, 개봉 당시에 무리라는 게 분명했음에도 불구하고 <매트릭스>와 연계되는 홍보전략을 구사해야했던 홍보팀의 고초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그런 홍보로 인해 잃은 것도 많은 것이 사실일 것이다. 굳이 분류하자면 정치액션스릴러라고 할 수 있는 <브이 포 벤데타>는 이 시대에 이르러선 남용될대로 남용된 불릿타임에 절어버린 관객의 시각을 만족시킬 법한 액션은 딱 한 번밖에 안 나온다. 막판에 펼쳐지는 브이의 칼부림씬이 바로 그것인데, 내내 틀어막혀있던 긴장감을 한 번에 풀어주는 씬이기에 이미지적 임팩트는 상당하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신인 감독 제임스 멕티그의 빈약한 연출력으로 구축된 영화의 답답함을 날려버리는 꼭지점 역할을 해주고 있다.

 

처음에 얘기한 것처럼, 그리고 많은 이들이 지적한 것처럼 <브이 포 벤데타>가 보여주는 소재와 주제는 그리 새로운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정치적 향락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가 아니라는 것도 기억해야 한다. 현학적 구원을 바란다면 132분을 엉뚱한 곳에 바치느니 차라리 역사 이래로 수만종이 쏟아져 나왔지만 결국 세상을 하나도 바꾸지 못한 정치학서적들이 깔린 서점에 가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극단적인 안티 히어로물이자 <몽테크리스토백작>을 변주하는 복수극으로서 <브이 포 벤데타>는 내밀하고 미묘한 감정의 꿈틀거림과 복수극이 만들어내는 기본적인 재미, 그리고 인간이 가진 순수한 영역의 열정을 자극하는 요소들을 갖추고 있으며 보는 이로 하여금 의미의 재발견을 촉구하고 있다. 그것은 단순히 유치하다고만 몰아버릴 수는 없는 복잡미묘함을 담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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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가본드 2006-06-30 0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흑 그토록 보고싶었지만 이젠 집에서 봐야하다뉘
그나마 홈시어터 없었으면 비디오방 갈뻔..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