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콘 근크리트 - 전3권
마츠모토 타이요 지음, 김완 옮김 / 애니북스 / 2007년 4월
평점 :
품절


황학동 거리는 유난히 황량해보였다. 이미 청계천 공사때 윗층 반절이 그 무언가에 의해 깎여져 나가 있었던 상아빛 건물들은 이젠 그 벽 곳곳에 붉은색 라카로 철거라는 글자가 자리를 남기기 아까운 것처럼 틈틈이, 길죽하게 그어져 있었다. '한놈만 걸려라. 여기다 쓰레기 버리면 죽여버리겠다', 라는 글자도 덤으로 있었다. 그것은 철거민의 것이었을까 철거자의 것이었을까. 황학동 초입구에 있는 대부분의 가게는 셔터가 내려져 있거나 반쯤 부서져 있었고 그 초라한 건물들 뒤로 한때 공터였던 곳에는 롯데캐슬에서 만들고 있는 '명품주거공간' 롯데캐슬 베네치아의 웅장한 모습이 마치 제 앞의 모든 것을 먹어치우는 괴물처럼 위협적으로 건물들을 내리 깔고 있었다. 을씨년해 보이는 황학동 옛건물들은 그 괴물의 입 속에서 무력하게 박살날 시간만을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싸구려 관우 동상, 황소 모양의 부조, 손때 묻은 워크맨들, 어렸을 적 가는 곳마다 볼 수 있었던 '설산 속의 예수' 그림, 미군부대 쓰레기장이나 군부대 폐품 재고 창고에서 빼내온 듯한 색바랜 군복들과 베낭, 찌그러진 반합들, 먼지 끼고 기스난 플라스틱 케이스의 폴라 압둘 카세트 테이프, 한껏 다리를 벌리고 있는 유치찬란한 표지의 포르노 CD들. 과연 누가 사갈지가 의심되는, 노래방에서 촬영한 것 같은 뽕짝 뮤직비디오를 틀어대고 있는 비디오테이프 판매상, 피곤에 지쳐 팔 속에 머리를 묻은 할머니 뒤로 늘어서 있는 가지각색의 딜도들, 권당 오백원씩에 파는 중고책더미와 그 뒤에 보다 비싼 값이 매겨져서 쌓여있는 복제 출판된 사전들. 그 모든 것이 약간씩 적어지긴 했지만, 적어도 겉으로 보기에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러나 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무기력이었다. 혼이 억지로 뽑혀나간 것 같은 분위기가 거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번달 말까지 다 정리하래."
나에게 벅샷 르팡끄를 알게 해준 중고음반점 안은 사장인 노인이 피우는 담배 연기로 니코틴 안개가 뭉실뭉실 만들어져 있었다. 이미 가게 안은 쉽게 지워지지 않을 주름살이 박힌 노인들이 자리를 떡하니 잡고선 자신들이 차지할 LP들을 골라내고 있었다. 이미 끝날 때를 알아챈 사냥꾼들이 훑고 지나간 듯, 빽빽하게 세워진 LP와 CD들 군데군데 뻥 뚫린 공간들이 만들어져 있었다.
"이걸 어떻게 대처해야 되겠어? 얘기해봐."
사장은 면식이 있는 듯, 사이먼앤가펑클을 찾던 노인에게 지친 목소리로 그렇게 물었다. 그러자 영업권리니, 이득이니, 자산보장이니 하는 자신 없는 소리가 들려온다. 다른 LP사냥꾼인 노인이 뿜어내는 담배 연기가 가게 안을 한차례 회빛으로 물들였다. 구석에 놓인 오래된 빨간색 TV 안에선 이승엽이 친 공이 펜스를 넘어가고 있었다.

 

스즈키 : 3번가에는 겐파치가 하는 스트립쇼 극장이 있습니다. 50년도 더 전부터 이 거리의 사내들이 거기서 어른이 됐죠. 꼭 애들 놀이터로 바꿀 필요는 없잖습니까.

두목 : 하지만 거기도 지금은 댄서 수가 손님보다 많다잖아. 안 그래 생쥐?

[철콘 근크리트] 2권 P61~62

 


짐작컨대, 그곳은 죄많은 거리였을 것이다. 오래 전 그곳에선 유진의 전혀 야하지 않은 초기 단편집을 5000원을 받고 뭣도 모르는 애들한테 팔아넘기던 상인도 있었을 것이고 [여명의 눈동자] 1화를 녹화한 비디오테이프를 키라라 카오리의 최신작이라고 속여 판 상인도 있었을 것이다. 동네 조폭들이 노점상들을 협박해서 자릿세를 받기도 했을 터이고 억대 재산을 가진 노점상이 생활보호대상자인 것처럼 속여서 동사무소에서 생활보조금을 타기도 했을 것이다. 자기들끼리 갈라진 패거리들도 있었을테고 술에 취하면 길거리에 오바이트를 쏟고 가판대를 부숴가면서 개처럼 싸우는 인간들도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지금 그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련의 '처리'는 거리가 짊어진 죄에 대한 합리적 이성의 승리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 모든 죄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진 그 지저분한 거리의 노스탤지어마저 지워버리긴 힘들다. 적어도 예전의 그 거리는 오늘처럼 죽어가는 곳이 아니었다. 노인, 장애인, 약장수, 야바위꾼, 사기꾼, 파키스탄 노동자, 러시아보따리상인들이 쓰레기장에서 주워온 물건들로 만들어진 골목에서 득시글거렸지만 언제나 내일을 향해 걸어갈 힘이 있는 활기가 느껴졌었다. 그러나 오늘 그 거리에선 숨이 턱에 차오른 명멸감만이 느껴졌다. 도살장이 코 앞에 다가와 있었다.

[철콘근크리트]에서 쿠로는 내내 분노와 절망에 가득 차 있다. 그의 분노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한다. 그는 계속 성이 난 채로 지옥의 거리를 날아다니며 끊임없이 사람들을 구타한다.
그는 청춘이자 과거이자 기억이다. 그리고 거리 그 자체다. 그는 뒤틀려가는 자신의 거리 때문에 분노하고 있었다. 자신이 살던 거리가 아닌 변해가는 거리.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다른 세계의 사람들이 들어오며 사람들은 더없이 착해지고(정부 기준) 더이상 지저분한 것이 없어진, 깔끔하고 계획적이며 이상적인 거리. 그 변해가는 거리에서 쿠로는 광기와 폭력으로 저항한다. 그러나 말마따나 그 흐름을 거스를 수는 없다.


이제 그곳이 사라지고 롯데캐슬의 웅장한 콘크리트 장벽 속에서 인공 청계천을 바라보며 자랄 아이들은 또한 그들이 보는 것을 더 미래에 고색창연한 추억으로 간직하게 될 것이다. 그것은 아주 먼 미래의 이야기이다(그리고 거기엔 리모델링과 관련한 집값 조정에 연계되는 아파트 주민 측의 보이콧과 님비현상에 관한 신고전주의적 이야기가 더 어울리게 될 것이다). 나의 노스탤지어는 '지금' 부서져 가고 있다. 나는 이제 미군 전투식량이나 필리핀에서 수입된 머쉬멜로우, 중고음반을 구하기 위해서 인터넷 사이트를 돌아다녀야 할 것이다. 그 명백한 사실이 나를 조금 피곤하게 만든다. 아마 그곳에서 산 마지막 물건이 될 싱가폴제 흑맥주와 미군식량 속 밀빵과 치즈소스, 그리고 로리나 멕케닛이 약간의 위로가 될 듯 싶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로드무비 2007-04-17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산보장을 전 지장보살로 읽었어요.ㅎㅎ
재밌습니다. 이 리뷰.^^

hallonin 2007-04-18 23: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디카를 두 번씩이나 잃어버린 게 정말 안타까웠던 하루였죠.

다락방 2007-04-19 12: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우~ 이 리뷰는 정말 근사한데요. 정신없이 빨려들어가서 읽었어요.

hallonin 2007-04-20 2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게 제 나쁜 버릇이라면 버릇인데 칭찬만 나오면 뭐라고 답해야 할지 한참 고민하게 된다는 겁니다...-_-

다락방 2007-04-21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후훗. 익숙해지시도록, 그래서 고민하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도록 제가 열심히 칭찬할게요. :)

다락방 2007-04-26 08: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거 알라딘의 추천리뷰로 떴어요. 알고계세요? 흐흣

hallonin 2007-04-26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추천리뷰란 건 뭡니까?

다락방 2007-04-26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www.aladdin.co.kr/blog/aladdintown/waladdintown.aspx?start=main

여기에 올라오는거예요. 그런데 목요일 열두시가 넘어서인지, 이젠 다른 리뷰로 바뀌었어요.

hallonin 2007-04-26 20: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그렇군요. 어쩐지 요 몇일 사람들이 많이 온다 싶더만.
 
현시연 9 - 완결
키오 시모쿠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7년 3월
평점 :
품절


박은자 : 여전히 현실감 없는 숫자로군 그래.

블라디미르 블라블라 : 뭐, 인생이란 다 그렇고 그런 거죠....

보리스-조이스 : 하핫, 블라디미르가 오늘은 어째 굉장히 침울한 걸?

블 : 이제 끝이니까요. 끝! 끝!

박 : 아니, 그런데 소됐어는 어디 가고 저건 누구야?

보 : 소씨는 죽고 보리스-조이스로 다시 태어난 거지! 난 피닉스-아키텍쳐의 유일한 계승자다!

박 : 바보로 다시 태어났구만.

블 : ...자, 자. 아무튼 오늘 얘기를 시작하겠습니다만.... 뭐, 끝이군요....

박 : 마지막이지. 음. 뭐랄까.... 착잡하기도 하고, 이 시점에서 끝낸 게 잘됐다고 보이기도 하고. 깔끔하잖아? 딱 대학 4년 동안을 그려냈다는 게.

블 : 솔직히 이 친구들이 학점 빵꾸나서 유급이라도 했음 했지만요(웃음). 사실 9권에서의 드라마라면, 대강 모든 것들이 정리되고 난 다음의 마다라메-사키 라인이 최대 관건이었습니다만, 이 부분을 키오 시모쿠가 무척 능숙하게 처리해줬어요.

박 : 남자의 등짝이 슬퍼보일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고나 할까. 9권에서 마다라메의 등이 강조되는 부분이 두 컷이 나오는데, 거기에 더해 짧게 짧게 치는 말줄임표 또한 감정의 적막함을.... 크흑. 그에게 공명하지 않을 남자가 얼마나 되리.

블 : 사키와의 떡씬이 있을 거란 소문이 있었지만 헛소문이었죠.

박 : 그거, 내가 3년 전에 한 말이군-_- 하긴 그게 정말 현실적이란 의미에서 현시연의 가치는 빛나는 거지만. 사실 사키가 마다라메랑 썸씽이 있을 리가 없잖아?

보 : 모를 일이지. 어떤 종류의 욕구불만에 시달리면 여자는 오기 비슷한 기분이 되서 못난 남자를 선택하게 된다고. 일종의 자폭행위랄까.

박 : 뒤로 30분....

보 : 넵, 졌습니다.

블 : 그렇지만 확실히 사키가 마다라메에게 마음이 약간이나마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박 : 에이, 그거 작가 농간이야. 끝까지 낚을려고 그랬던 거라니깐. 사키가 가지고 있었던 것은 현시연이란 서클에 대한 정이지 마다라메를 향한 건 아니었을 걸.

보 : 그렇다해도 미묘한 장면들이 있긴 하지. 말줄임표를 이용한.... 마지막의 뒤풀이씬에서도 그렇고?

박 : 아아, 그 뒤풀이 에피소드에서 인상적인 게, 전설적 레파토리인 처녀논쟁이 나왔을 때, 이것이야말로 그런 거구나.... 싶었지.

블 : 그런 거죠. 남친이 생긴 순간 게임오버.

보 : 소년만화에서의 연애물 스토리텔링의 법칙이기도 하고 말이지.

블 : 뭐 그렇다해도, 현시연은 동인지 모작품에서의 지적에서처럼 커플완성도가 너무 높아요.

박 : 다 하나씩 가지게 된 셈이니까... 쿠가랑 쿠치키만 빼면?

블 : 쿠가는 나이가 많아서 일찌감치 퇴장. 쿠치키는 개그캐릭터로.... 맺어질 상대가 없기에 확실히 작품 전체적으로 볼 때 비중이 확 떨어진 바가 있죠. 복장도착이라는 흔치않은 취향의 말로랄까. 사실 역할이 너무 미미했습니다.

박 : 동인지 모작품에서의 지적처럼, 문화계 서클이란 현시연처럼 평온할 리가 없는데 말야....

블 : 그렇죠. 한정된 여자수에 비해 바글거리는 남자들 사이에서.... 어떻게든 쟁취해야 하는 입장에 처한 그 수많은 암투와 모략들.... 사키야 그렇다치더라지만, 오기우에-사사하라쪽은 그 극적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꽤 스무스하다는 느낌을 받았을 정도.

보 : 쳇, 그 두 커플은 분명 나중에 가면 서로간의 의견 충돌 끝에 서로를 끝까지 이해 못하는 죄수의 딜레마풍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한계를 절감하며 결국 반드시 마침내 헤어지고 말 것이다!

박 : 이상 '나의 오기우에는 그렇지 않아!'의 절규였습니다.

블 : 확실히 이번 작품에서 오기우에의 파괴력은 엄청났죠. 츤데레 완성형이랄까. 캐릭터 인기로 따지자면 마다라메와 투톱이었을 듯. 마다라메가 동지의식이었다면 오기우에는 도원경이랄까요.

보 : 하아하아.

박 : 그런데다 엄청나게 현실적이었다구? 난 오기우에랑 똑같은 녀석을 하나 알고 있는데, 어떤 때는 대사까지 비슷했어! 다른 점이라면 그 녀석은 자신이 오타쿠란 걸 자각하고 있다는 거지만.

블 : 역시 현시연의 미덕이라면 보편적인 리얼함이랄까요.... 조금 미묘하긴 하지만. 그래서 우리랑 다르면서도 절절하게 공감할 수 있었던 거겠죠.

보 : 누가 다른데?

블 : ...아무튼, 현시연은 끝났습니다. 역사가 이 작품을 안아주겠죠. 쿼바디스 도미네.... 인데. 아니 이건 뭡니까 "현시현 10권을 기대해주세요?!!"

박 : 아, 그거. 잘 보라구. 현시연이 아니라 현시'현'이잖아. 그거 편집자, 모사이트의 모갤러리에서 낚시질하면서 폭주하더만?

블 : 그럼 이건 낚시?

박 : 하하하하하하. 응.

블 : 하하하하하하하.

보 : 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블 : ....

박 : ....

보 : ....

 

 

 


댓글(3) 먼댓글(0) 좋아요(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sudan 2007-03-14 17: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하핫!

sudan 2007-03-14 17: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됐어씨의 안부가 궁금했었는데, 바보로 다시 태어난거군요. 아하하.

hallonin 2007-03-14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됐어는 불멸입니다. 아마도....
 
300 세미콜론 그래픽노블
프랭크 밀러 글.그림, 린 발리 채색, 김지선 옮김 / 세미콜론 / 2007년 2월
평점 :
절판


인종주의, 군국주의, 마초적 이상들과 숭고함에 대한 충성스러운 감수성으로 뒤범벅된 스파르타는 지금 시대에 있어서나, 심지어 당대에 있어서나 무언가 일반적이고 평균적인 '보통의 것'과는 다른 이질적인 나라였다. 정치적으로 현명하지 못했던 그 허울 좋은 시민국가는 마치 자멸하기 위해 태어난 것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약한 아이는 죽여버리고 강한 아이만 골라내서 군사엘리트로 만들고 강력한 육체와 공포정치를 통해 자신들의 수십배에 이르는 노예들을 통제하려 했던, 단순해서 스케일이 컸던 스파르타 사람들은 환상성을 바탕으로 하는 연극도 음악도 몰랐지만 되려 그들 특유의 고착이 더없이 환상적으로 여겨지는 자기모순적인 나라였다. 국가를 지탱해주는 대다수의 노예와 비자유인들을 제압하고 부리기 위해 여성과 남성을 가리지 않고 고도로 발달시킨 그들의 군사질서는 일견 더없이 고압적으로 보임에도 되려 서로가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한 존중과 견제를 통해 긴장감 넘치는 시민사회적 특징을 가질 수 있었던, 날카로운 날 위에서 춤을 추는 것 같은 구조기도 했다. 여기까지만 와도 이 사람들의 생활에는 근본적인 균열점이 있고, 그것이 사회동력을 은밀하게 소진시키고 있다는 인상을 받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선택지가 부족하면 대안도 부재하는 법. 힘외에 어떤 것에도 가치를 두지 않았던 스파르타는 고지식한 군사전술의 한계와 외교적 실패(이들의 사고를 따르자면 그들에게 있어서 외교란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선택, 그것도 전쟁의 선택 유무 그 이상의 개념이 아녔을지도 모른다), 내부의 엔트로피 증가에 따른 결과로 마치 통 속에 갇힌 미이라처럼 멸망해갔다.
테르모필레 전투는 그런 점에서 스파르타 운명에 대한 축소판처럼 보여진다. 전쟁과 싸움으로 지탱되는 것이 삶이라면 그 의미는 살을 에일 것 같은 날카로운 죽음의 긴장에 의해서만이 허용된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선 그런 스파르타적 아이콘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폭발한다. 고립된 공간에서 지독할 정도로 소수인 아군이 승리도 없는 싸움을 위해 아슬아슬한 명분과 그보다 더 큰 죽음에의 취기를 안고 나아가는 모습은 확신으로 이뤄지는 집단자살극에 가깝다. 그러나 흔치않은 맹목성은 다른 이들도 취하게 만든다. 그것은 어떤 이성의 재단이나 철학의 담화로 온전히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닌 종교적인 영역이기 때문이다.

[300]은 스파르타인들이 보여줬던 그 모든 고대성에 대한 노골적인 매혹이다. 죽음에 취해 맛이 가버린 시니컬한 스파르타인들의 근육만큼이나 프랭크 밀러의 애정이 절절하게 닿을만한 일도 그리 많진 않을 것었을 터. 그러니 우선 이 이야기가 특별했던 시대의 특별했던 이들에 대한 이야기임을 우선적으로 감안하고 봐야할 터이다. 무척이나 고전적인 마초적 슬픔을 다루는 테르모필레에서의 5일은 다수의 압도적인 힘에 맞서는 장렬한 소수를 주인공으로 삼아 주체 못할 비장감으로 낭만주의자들을 자극하는 힘을 갖추고 있었고 소위 노블리스 오블리제의 이상적인 현현으로 회자되어왔다. 그러나 그들이 철저하게 소수였으며 결국은 죽어갔다는 것을 기억해보자. 스파르타인들만큼이나 [300]은 정치적으로 현명한 척을 하지 않는다. 다섯 개의 이슈를 모아놓은 80여 페이지 남짓한 짧은 분량 속에서 프랭크 밀러의 거친 선과 불평 가득한 입은 그 단순했던 사내들에게 완전히 취해버려서는, 그들이 남긴 전설을 우직하게 그려나갈 뿐이다.

그들에 대해 멍청하다든지, 숭고하다든지 표현하는 것은 개인의 재량이다. 그러나 신을 비웃고(실제로는 종교축제에 대한 스파르타인들의 광적인 매혹이 있었다는 얘기가 있으며, 이 또한 그들이 가진 자기모순성의 현현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신의 대리인을 비웃으며 영원성을 부정하고 오직 피와 살과 뼈로 자신들을 증명하려했던 이들의 이야기가 이천년을 뛰어넘어 화두로 남았다. 그래서 비판은 가능하되 부정하기는 힘든 것이 바로 현상이라고 하는 것임에 프랭크 밀러는 더없이 충실할 수 있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지르 클린(페이셜 워시) - 남성용 250ml
지르
평점 :
단종


한 반년쯤 전인가, 세바메드 이벤트에 이어서 이번엔.... 이라고 말하기도 힘든, 작년 말 즈음에 지르 클린 이벤트에 당첨되서 잘 쓰고 있다가 드디어 얼굴에 아무런 부작용이 일어나지 않았음을 확인, 이제야 리뷰글을 올리게 된다.

지난 세바메드 때는 화장품 리뷰가 처음이기도 하거니와 화장품을 잘 쓰는 사람이 아닌 입장이기도 해서 빙 둘러서 우회한 리뷰를 걸었었는데, 이번 지르 클린 또한 어떻게 써야 할지 적잖이 고민했다. 문학적 적자들을 불러오는 방법을 재탕하는 것도 그렇거니와 인생은 스트레이트, 니트족으로서의 생활을 영위중인 나로선 지금 눈에 뵈는 게 없다. 그래서 철저하게 기능적인 면에서 지르 클린을 보고자 한다.

앞서 말했듯 난 화장품과는 거리가 멀다. 내 화장품이라고 해야 3년 전에 받은 선물세트 속에 들어있는 두보레 비누와 이제야 슬슬 바닥이 보이는 세바메드, 이니스프리 로션이 전부로서 한마디로 얼굴 컨디션 공정엔 당최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그 결과는 뭐, 아는 사람들은 알겠지...-_-). 그런 사람이 27000원 짜리 얼굴 세정제에 대해서(그리고 뒤로도 관련된 공정이 5개는 더 배치되어 있다) 풍부한 화학적-경험적 지식으로 논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보인다. 그러나 되려 그렇게 무식하게 살아왔기 때문에 하나의 얼굴 닦는 도구로서 지르 클린을 말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일단 지르 클린 페이셜 워시의 첫번째 눈에 띄는 장점은 남자의 허영심을 자극하는 단단한 스틸 몸통과 푸른색의 절제된 선과 글자로 새겨놓은 디자인적인 면에서의 즐거움이다. 자연스럽게 자기절제적 엄격함과 스페셜리스트적 인상에 대한 공상을 불러오는 이 의도된 디자인은 전문직으로 바쁘게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최면적인 경지에 이르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내용물은 그레이프 후르츠향을 내는 점액질의 약간 불투명한 액체인데 보습제가 함유되어 있다. 난 천성적으로 도브 같은 보습제가 많이 들어간 세정류는 싫어한다. 웬지 물로 씻어내도 제대로 닦인 느낌이 안 나고 번들거린다고 느껴지기 때문이다. 지르 클린은 그런 면에서 어떤 절충점을 보여준다. 보습기능을 하되 너무 과하게 부담을 주지 않는 선에서 함유된 멘톨성분을 통해 사용자에게 상쾌함을 보장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세정능력은 탁월하다. 과도한 알칼리 화학작용의 우수성으로 인해 피부를 손상시키며 기름과 때와 각질을 벗겨내는 세정제품들에 비해 지르 클린은 적절한 보습효과로 얼굴이 땡기는 불쾌감을 동반하지 않으면서도 깔끔하게 땀구멍과 이물질들을 정리해준다. 확실히 우수해서, 비싼 건 꽤 좋은 거구나.... 라는, 당연히 그래야하지만 지금 세상에선 쉽게 느끼기 힘든 가치를 체감하게 만들었다.

단점이라면 사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포함된 펌프인데, 점액질인 내용물의 속성 탓인지 내가 악력이 약해서인지 한 번 누르려면 생각외로 꽤 에너지가 필요하다. 이걸 제대로 이용하기 위해서라면 벤치프레스라도 들어야 하는 건가. 어쩌면 지르 클린을 쓰는 이라면 당연히 헬스장을 다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지도. 으음.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비로그인 2007-03-26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하핫-
전 이거 선물해본 적! 있지요
재밌어요 펌프를 누르기 위해서 벤치프레스를 들어야 한다니요.
우연히 들른 서재에서 좋은 글들 잘 읽고 갑니다.
종종 올게요 :)
 
소라닌 1
아사노 이니오 지음 / 북박스(랜덤하우스중앙) / 200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일상의 치명타가 서서히 가해진다. 시간은 흘러가고 나이는 먹어가며 사회는 요구하고 의식은 번민한다. 인생은 선택이다. 그리고 그 씨X놈의 선택은 계속된다. 분단위 초단위로 계속된다. X같이.

날아가버리고 싶다. 그러나 착지할 땐 어떻게 하지? 너무 높이 날았다가 다다른 곳에서 다리가 부러진 사람들. 혹은 부러지는 것이 두려워서 영원히 날아다니는 사람들. 조금만 더 나이가 들면 우리는, 비웃을 수 있는 사람이란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침을 뱉으면 내 얼굴에 고스란히 날아든다. 억지로 뚜껑이 닫힌 머리통은 터져나갈 것처럼 끓어오른다. 우아아아아아악! 악! 악!

 

 

폭발할 거야?

그래.

뭐 그러라지.

 

 


 

 

 

[소라닌]은 공황이 일상이 된 젊은이들의 세계로 들어간다. 아니, 굳이 들어간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이것은 나와 당신과 그 누군가의 이야기, 표현대로라면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려도 아무도 반응하지 않는 세계에서 젊음을 보내야 하는 모든 이들에 대한 '흔한' 이야기다. 보라구, 결국 그들은 좌절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그래도 뭐 그냥저냥 삶을 살게 되겠지? 뻔한 이야기야. 뭔가 화끈한 반전을 원하겠지만 그래, 모든 것에 질려버려서 가운데 손가락을 들어올려도 코웃음만 칠 누군가의 예상처럼 [소라닌]은 그렇게 뻔한 이야기다. 그러나.

우리가 겪는 흔한 고통에 대한 비웃음은 잠시 접어두자. [소라닌]은 놀라울 정도로 섬세하다. 그리고 그 섬세함이란 소위 감상적인 사소설적 만화들에서 발견되는 두서없는 신변잡기의 나열이나 뻔한 우울증적인 쿨함과는 확연하게 다른 자장을 가지고 있다. 후루야 미노루의 스타일에서 영향받은 듯 하면서도 독자적인 평범함을 뿜어내는 인물들, 얼굴에 주근깨가 잔뜩 나거나, 희멀건 안경잽이이며, 비만형 체질이거나 80년대 마초풍 패션을 한 시대착오적 겉늙은이인 이들의 표정, 동선, 사고, 그리고 결과는 일상의 오소독스함과 풍부한 감정선을 살려내는 그들 캐릭터의 원초적인 매력과 더불어 그 모든 과정의 점착성과 인과의 부드러움을 통해 보는 이를 무장해제시켜서 지독할 정도로 절절하게 공감토록 만든다. 즐거워하고 달리고 소리지르고 우울해하는 그들의 손짓과 말 한마디한마디는 자꾸만 어디서 본 것처럼 눈에 밟힌다. 한탄하고 화내며 원망하는 그 극명하고 실감나는 모습들은 또한 라디오헤드, 오아시스와 벡의 노래를 귀에 꽂고 다녔던 이들이 현실적으로 가졌을 감정의 소용돌이와도 같다. 그렇다고 [소라닌]이 그저 궁상맞게 질질 짜기만 한다고 생각지는 말자. 두 권 동안의 짧은 이야기, 청춘의 한순간 동안 이들은 딱 한 번씩만 울 뿐이다. 단 한 번, 그들에게 주어진 눈물의 순간은 현실의 냉기가 만들어낸 결과에 대해 허용된 잠깐동안의 흐트러짐이다.

울어라. 사실, 처음부터 그들은 어디에도 갈 수 없었다. 꿈은 부러지고 현실은 가혹하다. 생활은 엄연하게 존재하고 시간은 흘러간다. 행복에 대해 물어봐도 아무도 제대로 대답해주지 않는다. 꿈을 몰아부치거나 현실을 몰아부치거나 그들에겐 결국 한가지 길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게 싫다면 종교적인 광기에 젖는 수밖엔 없다. 결국 [소라닌]은 그 제목에 준하게 내밀하게 거칠고 잔인한 이야기다. 아무데도 갈 수 없었던 이들에 대한, 그러나 어디로든 가고 싶어했던 이들의 모습. 마치 어떤 이의 소망처럼 단지 조금만이라도 그들의 모습을 지켜봐주는 것, 그것만이 유일한 구원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구원.

그래서 그들은 사랑을 한다. 혹은 했다. 그리고, 하고 있다. 지켜봐줬었고 지켜보고 있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로 하여금 살아있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그 보잘 것 없는 위로에 의해서 모두는 그 얼마나 오랜 삶을 부지하고 있는 것인가. 이 추레한 삶에 대한 [소라닌]의 대답은 그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사랑이다. 구차하다고, 진부하다고 성급하게 결론내리지 말자. 그러기 전에 살아나가는 이들의 모습을, 뒤늦게서야 불러오는 오래 전 기억을, 그리고 그들이 가지고 갈 짐과 공동체의 아련한 풍경들을 보자. 추레하지만, 눈부시다.

 

왜 울고 있니 너는 이 아름다운 세상에서

왜 웅크리고 있니 이 풍요로운 세상에서

너를 위로하던 수많은 말들 모두 소용이 없었지
어둠 속에서도 일어서야만 해 모두 요구만 했었지

네가 기쁠 땐 날 잊어도 좋아
즐거울 땐 방해할 필요가 없지
네가 슬플 땐 나를 찾아와 줘
너를 감싸안고 같이 울어 줄게
네가 친구와 같이 있을 때면
구경꾼처럼 휘파람을 불게
모두 떠나고 외로워지면은
너의 길동무가 되어 걸어 줄게

<무지개> - 산울림

 

아아, 꿈을 꾸고 있는가. 그러나 꿈속에서든 현실에서든 우리는 살아간다. 줄어든 희망과 작은 기대, 보이지 않는 안타까움과 저 가슴 깊이 새겨진 따스함을 안고.

 

 

 

 


폭발한 거야?

그래.

 

그럼, 이제 웃어보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