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더10. 보이더(1)
디르 · 데라벨 식물 연구소는 분홍색 돔 안에 있는 지상낙원이었다.
카르텔 성의 하늘은 막 구겨진 종이처럼 칙칙하고 하늘색이라고는 코빼기하나 안 보였지만, 그 분홍색의 아늑한 연구소에 들어가기만 하면 돔의 천장에 펼쳐져 있는ㅡ비록 인공으로 만든 것이지만ㅡ예전 모습 그대로의 쨍한 하늘색을 볼 수가 있었다. 어릴 적의 나는 연구소 방문객이 없으면 그 쨍하고 밝은 하늘만을 보며 하루를 보냈다고 할아버지는 말했었다.
지금도 생각난다. 연구소에 들어가면 바로 펼쳐지던 초록의 향연. 이름 모를 풀꽃들, 나무들, 졸졸 흐르던 시냇물. 그 속에서 날 부르시던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걱정스런 목소리. 지금은 내 마음속에서만 생생하게 떠오르는 영상들, 지금은 잃어버린 영상들.
디르 · 데라벨 식물 연구소에는 사람들이 많이 드나들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도 자기들은 보지 못한 별의 진짜 모습을 보기 위함이겠지. 어릴 적의 나는 그 사람들에게 얼굴 내 보이는 것이 싫어서 연구소 깊숙이 있는 침실 이불에 얼굴을 파묻고, 혹시나 이곳에도 사람이 올까봐 떨고 있었다.
난, 특정범위 내에 있는 사람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었으니까.
지구에 도착한 지금은 이런 능력에 익숙해져서 내가 필요한 생각만 내 머릿속에 남기고, 나에게 해가 될, 이른바 찌꺼기 생각들은 그냥 넘겨버리는 것이 가능하지만 그때는 그게 되지 않았다.
그땐 나에게 오는 나쁜 생각들을 여과 없이 받아들였다.
헤엥~ 연구소가 의외로 작네. 이래가지고 식물 연구가 제대로 되려나? 저 지식은 나도 아는 건데. 왜 자기들만이 아는 것처럼 떠들어 대는 거야? 저 식물 좀 징그러! 별거 없잖아? 왜 우리가 식물을 잘 돌보아야 되는 거지? 지금도 살기가 편한데. 이런 연구소 왜 세웠을까? 우리가 이런 걸 알 필요가 있는 거야?
여과 없이 들리던 나의 가족들과 연구소에 대한 험담들.
태어나자마자 버려져서 그 칙칙한 하늘 아래 있다가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맡겨져서 자라온 나에게는 그 험담들을 듣고 가만히 입 다물고 있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겨우 8살 밖에 되지 못한 내가 그 사람들과 싸울 수도 없었기에, 그 사람들이 가고 나서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괜히 분풀이를 했다.
“왜 그 사람들에게 화 내지 않았어? 바보들이야? 그 사람들이 우리 연구소를 얕보고 있었어. 그걸 왜 잠자코 바라봐. 왜 당하고만 있냐고! 이러다가 할아버지랑 할머니가 더 욕먹을 지도 모른다니까?”
그땐 내가 철이 없었다.
할머니는 그런 나의 말을 들으며 할아버지와 싱긋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곤 돈가스 향 향수를 뿌리며 말했다.
“보이더, 네 말이 맞을 수 있어.”
창문 사이로 바람에 흩날리는 나뭇잎이 보였다.
“하지만, 세상엔 말야. 그래도 좋은 사람들이 많이 있어. 이 식물 연구를 후원해주는 사람들도 많단다. 안 그러면 이 연구소를 여기에 세울 수도 없고, 국가에서 지원 받는 연구가 될 수가 있었겠니? 없지. 그러니까 보이더. 세상에는 물론 우리를 비웃는 사람들이 많겠지만, 우리를 응원해주고 사랑해주는 사람들도 많아.”
할머니가 옳았다.
그 후 난 조금씩 조금씩 침실을 나와서 사람들에게 나의 얼굴을 비추기 시작했다. 연구소에 오는 사람들은 갑자기 연구소에서 나타난 조그마한 인간을 보고 호기심을 비쳐왔다. 물론 내 머릿속에 나에 대한 험담이 올 땐 어찌할 줄 모르고 울어버렸지만 그때는 할아버지가 나를 안아서 사랑한다는 생각들을 많이 넣어주시곤 했다. 그런 일이 쌓이고 쌓여 난 점점 그런 일에 익숙해져 갔다.
내 나이 20살. 겨우 할머니와 할아버지 이외의 사람들과 대화를 술술 나눌 수 있게 됐다.
역시 할머니의 말씀은 옳아서, 뭐, 식물 연구에 별 관심 없고 필요성조차 못 느끼는 사람도 많았지만, 대개는 식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많았다. 연구소가 있는 돔에만 펼쳐진 초록의 향연을 연구소 바깥에도 재현하고 싶어 하는 사람도 있었다. 난 그럴 때마다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정말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하고 있구나라고 느끼는 것이었다.
그런 할아버지 할머니를 돕고 싶어서 난 식물을 공부했다. 처음에는 그 이유만으로 식물의 공부를 했었는데 어떤 책에서 지구라는 먼 행성에서는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식물이 있다는 것을 읽고 그것에 흥미를 느꼈다. 대개 카르텔 성에서 식물이라 하면 관상용이나 산소 공급용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세상에! 먹을 수 있는 열매가 있다니. 나로서도 깜짝 놀랐다. 우리들은 향기로 배를 채우는데, 지구인들은 입으로 그걸 먹으면서 배를 채우네? 죽기 전에 그 식물들을 보고 싶어졌다.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그런 식물이 있었냐고 물었더니 두 분은 우리도 그 식물들에 대해서는 연구 중이라고, 하지만 언젠가는 카르텔 성 전체에 그 식물들을 심을 수 있을 거라며 눈을 반짝거렸다. 나도 그런 날이 올 수 있도록 더 공부하겠다며 할아버지와 할머니에게 웃어보였다.
그로부터 반년 후에, 디스트럭션 쿰바가 일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