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 더19. 잔혹한 데이트(3)



 

 주문을 끝냈다. 힐끔, 힐끔. 나는 헤일로에게 눈을 붙였다 뗐다. 헤일로는 이런 나에게 의문을 표했다. 왜? 무슨 일 있어? 헤일로의 핫 핑크 눈동자가 순간 빛난 것 같았다. 얼굴이 빨개져서 순간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헤일로를 보는 대신에 폰을 봤다. 그리고 폰 게임을 했다. 하지만 이 짓도 부질없이 느껴졌다. 그래서 레스토랑 인테리어를 대강 살펴보고 손님들도 관찰했다. 직원들도 관찰했다. 창문으로 보이는 쓸쓸한 풍경도 관찰했다. 테이블보에 새겨져있는 체크무늬가 너무나 예뻤다.


 “선우.”
 헤, 헤일로가 나를 불렀다.
 “왜 그래?”
 “나랑 얘기 좀 하자, 응? 자꾸 주변만 보지 말고.”
 “아... 아! 그, 그래!”
 ‘흠....’
 헤일로가 나를 보며 뭔가를 생각하는 것 같았다.


 “너, 혹시 나 보면 얼굴 빨개지는 것 때문에 나하고 눈을 마주치지 않는 거야?”
 찔렸다.
 “아, 사실은....... 맞아.”
 “그런 거 신경 안 쓸 테니까 나 좀 봐주라.”
 “... 그래?”
 나는 밑에 파묻고 있던 고개를 조금 들어 헤일로를 보려고 애썼다. 헤일로와 눈이 마주친 순간, 헤일로는 눈을 반짝반짝 거리며 나를 보고는 밝게 웃어주었다. “너, 부끄러워하는 얼굴 귀엽네~‘ 그 말에 나는 이마 끝까지 황홀하고도 슬픈 생각이 들었다.

 아-! 이러니까 내가 널 보지 않으려고 하는 거야!!


 

 테이블에서 돌이 되어버려 안절부절 하고 있는 사이에 음식이 나왔다. 각종 채소와 특제 소스를 곁들인 특대 스테이크, 버터 감자튀김, 봉골레 스파게티 2인분. 음식은 맛있어보였다.
 “자, 많이 먹어. 오늘은 내가 너에게 쏘는 거니까.”
 “잘 먹을게.”
 헤일로에게 포크와 나이프를 나눠주었다.
 헤일로가 특대 스테이크를 자르려는 것을 간신히 막고 어떻게든 스테이크를 혼자서 잘라보려고 했다. 스테이크가 의외로 질겨 끙끙대는 나를 보고는 헤일로는 몇 번 쯤 웃다가 자신이 하겠다며 나를 쉬게 했다.


 스테이크를 다 자르고 우리는 각자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스테이크 한 조각에 봉골레 스파게티 몇 가닥. 달콤한 맛 그 뒤에 따라오는 봉골레의 매운 맛.(봉골레 기름맛에 뒤따라오는 조금 매운 맛이 나에게는 좀 진하게 다가왔다.) 헤일로는 이런 나를 보고 날 따라먹어보고는 꽤 맛있다며 눈을 반짝여왔다.
 “맛있어?”
 “맛있네! 난 이런 거 처음이니까.”
 “너..... 내 시계에서 지내는 시간보다 여기 나가는 시간이 많은.. 거 아냐? 그럼 이런 곳 한번쯤은 간 거 아냐?”
 “아냐. 절대로 아냐. 잘 생각해봐. 내가 여기 돈이 있긋냐?”
 “듣고 보니 그러네.”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웃음을 지었다. 제일 근본적인 것을 내가 잊어먹고 있었네.
 헤일로가 감자튀김을 입에 넣으며 말했다.
 “선우양 넝 나항테 궁긍항 거 엄냐?”
 흠칫했다.
 ...... 뭐 너에게 궁금한 것은 엄청 많기야 하지만 지금 그걸 말하면 안 되겠지. 그전에 말이야.
 “제발 다 먹고 이야길 하세요.”
 “아 미앙.”
 ‘우물우물, 꿀꺽.’
 

 “나에게 궁금한 거 없냐고. 음파인간의 생태라던가 여기 도망쳐 나온 이유라던가.”
 “너에게 궁금한 거?”
 “응.”
 속마음을 들이 삼키고 말을 했다.
 “음... 아. 예전부터 궁금했던 건데 너희들 음파를 먹는 인간이잖아?”
 “응.”
 “그럼 있잖아. 혹시 음악의 종류에 따라 너희들이 느끼는 맛도 다 달라?”
 “흠.... 그렇다고 볼 수 있지. 음파나 음악에 따라 너희가 말하는 요리 종류도 달라지는 걸.”
 “진짜?”


 “응. 예를 들어서 오케스트라는 너희가 말하는 코스요리, 보통 3분에서 5분정도 되는 음악은 일반적인 밥이고, 효과음이나 짧은 음악은 간식이나 드링크정도 되겠지.”
 “세세하네.”
 “그렇지? 거기다 곡의 분위기가 어떠냐에 따라 느끼는 맛들이 천차만별이야. 분위기가 슬픈 곡은 우리의 혀에는 맵게 느껴지고 분위기가 산뜻한 곡은 달게 느껴져. 그리고 이 두 가지의 맛을 가진 음악도 있어. 그래서 우리들에게 ‘음악’은 복잡하게 느껴져. 무엇보다 표현해낼 수 있는 맛이 너무나 많으니까.”
 헤일로가 음악을 말할 때에 눈빛은, 밤하늘에 별을 눈에 직접 담은 남자아이처럼 반짝였다.
 “아. 그래? 그래서 넌 어떤 맛을 제일 좋아해?”
 “나? 나는 단 것은 별로 안 좋아해. 매운 것을 좋아하지. 무엇보다 매운 맛은 마음에 사무치는 맛이잖아?”
 “.. 그래? 그렇구나.”
 단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구나.
 나는 헤일로를 바라보았다. 나는 알 수 있었다. 헤일로는 음악 얘기를 할 때만큼은 정말 루어 같은 것은 잊어버린 순수한 미그레시 성인이었다. 그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하지만 헤일로는 루어의 스파이다.

 헤일로는 루어의 스파이다.
 .... 내 친구를 납치한 녀석의 부하이자 내가 처치해야할 적이다.



 

 우리는 음식을 먹으며 음악에 대한 이야기를 쭉 이어나가다가 적당한 시간이 돼서 나갔다.





---


아마 선우는 눈물을 꾹 참고 끓어오르는 감정도 꾹 참고 대화에 임했을 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오늘의 메뉴 : 감정 야채 볶음
------------------------------------------------------------

 

이런 감정
저런 감정
싸그리 침침한 마음 속 주방에 가둬
비스무리 특제 감정 볶음으로 만들어주지
기대하시라!

 

더 이상 네가 밥 먹으며 우는 건 내가 용서 못 해.
그러니 내가 너를 위해 아주 특. 별. 히. 감정 볶음을 만들어 줄테니까

 

도망가지는 마
당당히, 이 세상을 마주하자. 둘이서

 

From. 레스토랑 셰디 총 주방장
비스무리 셰디 바르줴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너에게, 더18. 잔혹한 데이트(2)



 

 어제는 밤늦게까지 옷을 고르다 잠을 설쳤다. 슬비를 구하려 헤일로와 데이트를 하는 거지만 그래도, 조금은, 그에게, 여자... 라고 느껴주었으면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은 감정이다. 난 슬비를 구해야 된다. 사랑이라는 바람 같은 감정에 눈이 멀어서는 진짜 소중한 것을 내팽겨 쳐버리면 안 된다.
 그러면 안 된다.
 헤일로는 아침부터 가야하는 데가 있다며 어디 가버렸다. 또 어딜 싸돌아다니는 건지, 한숨을 내쉰다. 정말 너무한다. 여기 내 시계에 같이 있어주면 어때서. 이 나쁜 헤일로 같으니라고!

 설마, 지구에 있는 것을 포기할 정도로 나를 싫어하는 건.......

      그만하자. 이런 생각은 몸에 해롭다.

 오늘은 보이더가 살고 있는 안경을 안경집에 넣고 오랜만에 콘택트렌즈를 꼈다. 왜냐하면, 이렇게 함으로써 헤일로의 숨겨진 모습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보이더가 없는 것을 알면 헤일로는 어떤 행동을 할지 예측할 수가 없다.
 뭐? 그 외의 이유가 있지 않냐고?
 으음... 그럴지도.

 지금 시간은 11시 반. 가볍게 아침을 먹고 난 후에 나갈 준비를 했다. 오랜만에 고데기로 머리도 구부리고 어젯밤 전전긍긍하다가 겨우 고른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이 때를 위해 모아둔 돈도 챙기고,(..... 중요한 워먼덱스의 워프 캡슐도 챙기고.) 헤일로의 눈 색깔과 비슷한 리본을 블라우스에 매었다. 마지막으로 슬비가 나에게 선물한 큐브 팔찌를 손목에 차고 거울을 봤다. 거울에서 슬비가 싱긋 웃는 것 같았다. “역시 너에게는 이 팔찌가 어울려!!” 슬비가 말을 걸어 주는 것 같아 눈물이 나왔다.
 기다려. 이 잔혹한 싸움을 끝마치고 곧장 너에게로 갈게.
 나는 거울에게 속삭이고 바로 기숙사 방을 나갔다.
 
 데이트 장소(전쟁터)로 향하는 길.
 오늘의 전장은 레스토랑 세라비, 서림문고, 스릴 더 시네마. 내가 정한 데이트 코스다.
 생각해보면 이게 내 인생의 첫 데이트다. 내가 예전부터 꿈꿔왔던 나의 연인과의 달콤한 데이트. 언젠가는 나에게도 찾아오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데이트. 그런데 그게 이런 형태로 나에게 찾아오다니 정말 어이가 없었다. 하아, 운이 없어도 너무 없다.
 ... 운이 없어도 너무 없다. 내 인생은.
 이런저런 씁쓸한 생각으로 머리를 채우며 만나기로 약속한 앨리스 네일숍 앞에 도착했다. 네일숍 앞에는 ‘연정’이라는 이름을 가진 버스 정류장 표지판이 있다. 헤일로가 오기 전까지 난 그 표지판에 기대어서 반대편에서 걸어가고 있는 사람을 보았다.
 역시 점심시간이라 그런가, 사람들이 많았다. 나처럼 다른 사람을 기다리고 있는 젊은 커리어 우먼. 둘이서 커플티를 입고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는 닭살 커플. 뭐가 그리 바쁜 지 입속에는 빵을 대충 넣고서 황급히 버스 정류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직장인. 택시에서 내려 어디론가 향하는 아빠, 엄마, 아들.
 어디에서 무얼 하든 그들은 나보다 더 행복한 사람들이겠지.
 어디에서 무얼 하든 그들은 나보다 더 많이 웃는 사람들이겠지. 그들을 자꾸 쳐다보고 있으면 내가 더 초라해보여서 순간 고개를 돌렸다. 고개를 돌린 쪽에서 순간 헤일로와 눈이 마주쳤다. 볼이 또 빨개졌다. 헤일로는 언제나 입던 옷차림이 아니었다. 데님 셔츠 위에 받쳐 입은 진분홍색 스웨터, 그리고 화사한 베이지색 팬츠. 헤일로에게 딱 어울리는 옷차림이었다. 그걸 본 순간 나도 모르게 입가에 황홀한 웃음이 피었다. 아 저 멋진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구나.
 ....... 아, 저 멋진 사람이 내가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이구나.
 

 마음을 굳게 먹어야만 했다. 난 저 남자와 데이트하러 온 게 아니다. 난 저 남자와 담판을 지어야 하는 일이 있다.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하면 슬비를 구하지 못한다. 슬비는 영영 이 지구에 돌아올 수가 없다.
 헤일로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마치 메아리치듯이 그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선우, 많이 기다렸어?”
 “.... 아니. 아니야. 많이 안 기다렸어.”
 “다행이네.”
 헤일로는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바라봤다. 그리고 위아래를 훓어 보고는 나에게 미소 지었다.
 “안경 벗은 모습이 훨씬 예뻐. 오늘은 옷도 여러 가지로 신경 많이 썼네?”
 “.... 너하고 데이트하는 거니까 잘 보여야 되잖아.”
 “정말 이뻐!! 너 원래 이렇게 이쁜 애였구나!”
 난 헤일로에 칭찬에 귀까지 새빨개져서는, 헤일로를 쳐다보고 있던 눈을 치웠다.
 “칭찬, 고마워.”
 헤일로는 이런 나를 보고는 귀엽다는 듯이 웃었다.
 “헤에, 너 의외로 귀엽구나.”
 “그래. 나, 원래, 귀엽다. 뭐.”
 에잇! 박선우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정신 차려!

 “저, 선우.”
 “... 왜.”
 “너 어디 갈 거야? 정했어?”
 “응. 데이트 코스는 이미 있어. 내가 다, 세워놨어.”
 “정말? 재밌겠다!”
 나는 그를 보고는 옅게 미소 지었다.
 “일단, 있잖아.... 배고프지 않아?”
 “응. 배고프네.”
 “그렇다면 우리 스테이크 먹으러 가자.”
 “스테이크? 좀 비싸지 않아?”


 “비싸지. 그렇지만 이런, 때를 대비해서 말야...... 아 내, 내가 비상금을 좀, 모아두는, 성격이거든. 그러니까 문제는 없어.”
 “... 선우는 착실한 애구나.”
 “응..! 칭찬해줘서 고마워.”
 바람이 우리 사이를 지나갔다. 차갑지도 뜨겁지도 않은 바람.

 “그래서, 그 스테이크 집이라는 것이 어디 있는데?
 “여기 앨리스 네일숍의 샛길을 지나가면 있어.”
 “그래서 나에게 앨리스 네일숍에서 보자고 한 거구나~”
 “응. 일단 가자.”
 헤일로와 나는 일단 네일숍의 샛길을 지나갔다. 한낮인데도 어두침침한 골목길을 지나가면서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만 헤일로가 나의 손을 잡으려고만 했다. 나는 헤일로에게 얼굴까지 빨개진 고개를 숨기고 헤일로의 손을 잡았다. 심장이 두근거리는 것을 제어하지 못했다.
 그래서 잡은 헤일로의 손은 너무나 차가워서 내가 더 놀랬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숨기고 얼음장처럼 차가운 헤일로의 손을 좀 더 감싸 쥐었다. 이것이 지금 내가 해 줄 수 있는 최고의 것. 얼굴 새빨개진 것도 아랑 치 않고 헤일로를 봤더니 헤일로가 나에게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부끄러운 것일까, 내 멋대로 생각해버렸다.


 샛길을 통과하니 대명시의 숨겨진 번화가가 나타났다. 젊은이들의 성지, 보금자리. 그 이름하야 성명(成明)로. 이곳에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는 브랜드숍, 치킨 집, 유니크한 팬시를 취급하는 문구점이 많아서 데이트하기에 최고의 장소로 뽑히고 있다.
 우리가 지금부터 가려는 데는 그 중에서도 제일 앞쪽에 자리잡고 있는 레스토랑 세라비이다. 뭔가 할 일이 있어서 그 쪽에 들릴 때마다 항상 이곳을 쳐다보면 연인들이 메뉴들을 나눠먹고 있는 게 유리창으로 보였다. 그들의 모습은 너무 행복해 보여서, 나도 연인이 생기면 언젠간 이곳에 데이트 오자라고 결심했었는데,
 결국 이렇게 와버렸다.

 헤일로와 함께 레스토랑에 도착하니 벌써 무리지은 손님들이 많이 보였다. “두 분이세요?” 투피스를 말끔히 차려입은 레스토랑 여주인이 친절히 자리를 안내해 주었다. 우리는 딱하나 남은 창가 자리를 안내 받아서 그 쪽에 앉았다.
 내가 물과 식기를 나누는 동안 헤일로는 레스토랑 메뉴를 신기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처음 여기 와본 어린 아이처럼 행동하는 그를 보고 좀 귀엽다고 생각해버렸다. 역시 전파 인간이라 그런가 고기나 면 같은 종류는 먹지 못한 듯했다.

 “저, 저기 선우!”
 “응? 왜.”
 “고기라는 거하고 면이라는 거, 먹을 수 있는 거였구나!”
 ..... 엥?
 “너 마트 한번 갖다오지 않았어?”
 “한 번 갔다 왔지만 그게 먹는 건지는 몰랐지..... 잠깐만, 내가 그 큰 마트 갔다 온 거 어떻게 아는 거야?”
 내가 미행한 사실 아직도 모르는구나..

 “나 네가 처음으로 지구구경한 날에 너 미행했었어.”
 정직히 말하자 헤일로는 순간 표정이 굳었다가 다시 풀어진다.
 “아, 그런 거야? 나 그런 것도 모르고 그 때 너 어디 갔다가 왔냐고 했는데...”
 “뭐, 그거 넌 몰랐으니까 그런 거 아냐. 이해해.”
 헤일로는 그런 나를 보고는 조금 걱정한 눈빛으로 나를 본다. 왜 그런 눈빛으로 나를 보는 거야! 나는 가라앉았던 볼이 또 빨개지는 것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왜 고개 돌리는 거야?”
 “아무것도 아냐.”
 “나를 봐. 왜 고개 돌리는 건데?”
 헤일로가 조금 커진 목소리로 나를 부른다.
 “그러는 너는 왜 나를 걱정스런 표정으로 바라보는 거야.”
 나는 아직도 헤일로에게 눈을 맞추지 못한 채로 말한다.
 “아, 그거? 그거는, 네가 그 때 일로 많이 화났나 싶어서.”
 “이제 와서?”
 “...... 늦은 거 알아.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 그 때 일이 좀 맘에 걸리네.”
 “그래?”


 나는 고개를 돌리고 싱긋 웃었다.(정말, 데이트할 때는 이렇게 귀여운 아인데... 이런 사람을 내가 속여야 된다니.)



 “그, 그 일은 벌써 지나갔잖아! 얼른 먹고 싶은 메뉴나 정해.”
 “알았어! 나는 음~ 이걸로 할까?”
 헤일로는 메뉴에 있는 감자튀김을 고르고는 나에게 메뉴를 넘겼다.
 “너 그거로 배가 차겠어?”
 “난 어차피 음파를 먹는 인간이잖아. 거기다가 내가 스테이크를 먹어버리면 니 돈 많이 들잖아.”
 “어머. 내 걱정도 해주는 거야? 고마워!”
 나는 헤일로에게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너, 솔직히 나를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 같았는데 날 이렇게 챙겨줄 지는 몰랐어.
 ..... 역시 우리는 이렇게 만나면 안 되는 거였다.
 나는 여주인을 불러. 헤일로가 말했던 감자튀김이랑, 이 집만의 메뉴인 특대 스테이크랑 봉골레 스파게티를 시켰다. 주문을 받은 여주인은 메뉴를 가지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헤일로가 나를 보고는 “있잖아. 스파게티는 왜 시켰어?” 라고 물어봤다. 나는 그 진분홍색의 눈동자를 똑바로 보고 말했다. 볼과 귀가 빨개지는 것은 상관이 없었다. “내가 너에게 주는 선물이야.” 그러자 헤일로는 나를 보고 싱긋 웃어주었다.




---



선우는 지금 정말로 슬플 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
오늘의 메뉴 : 숫자 모양 공갈빵
------------------------------------------------------------

 

매일
일년의 연장선
십이개월
오십사주
삼백육십오일
팔천칠백육십시간
오십이만오천육백분
삼천백십삼만육천초의 반복 속에서
나는 때 묻은 나의 껍데기 속에
무슨 질척거리는 것을 넣고 있는가.


From. 레스토랑 셰디 총 주방장
비스무리 셰디 바르줴프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너에게, 더17. 잔혹한 데이트(1)




 슬슬 해가 지고 달이 떠오른다. 헤일로는 워먼덱스를 벗어나서 밖에 나갔다. 이 녀석은 내 생명 에너지를 받아야 진정한 자유를 얻을 수 있는데 어디에서 그렇게 탱자탱자 놀고 있는 건지, 요즘 헤일로의 목소리를 잘 듣지 못한 나는 무심코 손톱을 물어뜯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교복에 보라색 목도리만을 두르고 신발을 신었다. 지금 나는 헤일로를 유혹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헤일로를 꾀는 것이다. 헤일로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붉어진 내 두 볼을 붙잡으며 나의 목적을 다시 생각해봤다. 그리고 다시 붉어진 두 볼을 때렸다. 정신 차려! 그러나 그런 주인의 심심한 명령을 무시한 채 볼은 더 빨개졌다.

 말 안 듣는 두 볼을 목도리로 가린 채 기숙사를 나갔다. 학교를 지키는 가로등과 그들에게 뒤를 맡긴 채 산속 집으로 사라져 가는 해가 나를 바라본다. “저 녀석 바보구나.” “응. 저 녀석 바보야.” “가여운 녀석, 그 애가 널 사랑해 줄줄 알았니?” “포기해.” 쉰 목소리로 나에게 뭔가를 말한다. 귀를 막는다. 그만 해! 그렇게 남을 괴롭히는 것이 재미있냐? 그래도 내 맘속에서 그런 생각이 나는 것은 내 맘이잖아. 나를 변호하듯이 말한다. 살짝, 눈물이 또 났다.
 가로등들과 해가 지키고 있던 학교를 겨우 벗어나서 학교 앞에 있던 건널목을 건넜다. 그리고 늘 안경 속에 있는 보이더에게 말을 건넸다.

 

 - 야, 보이더.
 ㅡ 왜.
 - 혹시 헤일로 기억 중에서 뭐 읽은 거 없냐?
 ㅡ 헤일로? 몇 십 개 있긴 해.
 - 뭔데? 말해봐.
 ㅡ 음.... ‘박선우가 쫒아오는 거 아냐?’ ‘아, 그래도 역시 지구 구경은 재밌네. 우리 고향 같아.’ ‘...... 엄마.’ ‘아, 잎이 다 져버렸네? 그 땐 예뻤었는데. 아쉽다.’ ‘루어님 그냥 그 녀석 놔두고 그냥 지구에 살면 안 될까요?’ 정도?
 - ..... 그렇구나.
 ㅡ 뭐, 그 외에도 많지만 다 쓰잘떼기 없는 기억들이야.

 헤일로, 이 나쁜 놈.

 - 고마워. 헤일로 있는 곳 알 거 같아.
 ㅡ 뭘 그런 거 가지고... 일단 헤일로에게 가자.
 - 응.

 보이더의 뭔가 슬퍼 보이는 말을 들으며 나는 은행나무가 줄지어 서 있는 곳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건물들에게 달려있는 지루해 보이는 간판들이 나를 보고 혀를 차는 것이 들리기도 했지만 그런 초자연적인 현상 따위는 나에게 상관없었다. 나는 지금 은행 나뭇길에서 나를 비웃고 있을 헤일로를 찾아야 된다. 그게 제일 중요했다.
 내 심장이 견딜 때까지 달리고, 한계다 싶으면 쉬고, 좀 쉬었다 싶으면 다시 달렸다. 그렇게 해서 다다른 은행 나뭇길엔 어둑어둑해진 저녁과 이미 동화된 헤일로의 뒷모습이 보였다. 만면에 웃음이 돌았지만 바로 모습을 감추고, 쓴 웃음만이 계속 걸려있었다.
 ‘목도리라도 하고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저 오들오들 거리는 다리를 봐!’
 바보 같은 생각을 하며 헤일로에게 다가갔다. 헤일로는 지금 다가가는 사람이 나인 것을 알 텐데도 나에게 얼굴을 보여주기가 싫은 지 내가 다가갈 때마다 한걸음 더 나에게서 멀어졌다. 난 더 이상 사랑하는 사람에게 무시당하기 싫어서 헤일로의 이름을 불렀다.

 “헤일로!! ... 헤일로... 헤일로... 헤일로...
 뻥 뚫린 길이지만 왠지 내 목소리가 메아리친 것 같았다. 그 때야 헤일로는 뒤를 돌아보며 나를 보고는 다시 나에게서 눈을 돌리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놀랬잖아, 선우. 무슨 일인데?”
 보라색 목도리에 숨기지 못한 불이 있을까봐 나도 헤일로의 눈을 다 보지 못하고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진분홍빛의 안광은 날 따라왔다.

 “저기, 헤일로.”
 “왜?”
 “부탁이 있는데 말이야..”
 “응. 무슨 일이야? 뭐든지 들어줄게!!”

 .......... 거짓이라도 달콤한 말이었다.

 “내일은 나랑 같이 지구 구경할래?”
 “에, 너랑?”


 “요즘 네 목소리를 못들은 것 같아서 있잖아. 응? 나하고 딱 데이트 한번만 해주라. 주인의 부탁이야.”
 “음... 응! 언제든지. 한번이 아니라 여러 번이라도 괜찮아.”
 헤일로에게서 살짝 눈을 돌리고 있던 나는 다시 헤일로에게 눈을 맞췄다. 헤일로는 나에게 웃어보였다. 나도 웃었다.
 다행스럽게도 내 얼굴은 일그러지지 않았다.


 “그럼, 선우 언제가 좋아?”
 “내일 12시.”
 “내일? 내일은 학교 가야되는 날이잖아?”
 “학교 당분간은 쉴 거야.. 요즘 많이 몸이 안 좋아서.”
 “괘, 괜찮겠어? 나랑 같이 있어도?”
 “괜찮아.”


 여기까지 말하고 난 일부러 입을 닫아버렸다. 너 아직 할 말 있는 거 아니었어? 마음이 요동치지만 모른 척하고 난 지그시 마음을 눌렀다. 마음 겉으로 피가 새어나왔지만 그것도 모른 척했다.
 대신 그 추워 보이는 헤일로의 목에 내가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둘러주었다. 헤일로는 자신에게 둘러지는 이 목도리를 보고 놀란 듯이 나를 쳐다봤다. 놀란 헤일로의 눈이 내 눈과 맞닥뜨린 순간 몸이 달아올랐다. 그래서 재빨리 하늘로 눈길을 돌렸다. 하늘에서 빛나고 있던 해는 완전히 저물고 그 자리에 달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투명하고도 예쁜 달이.
 “그럼 이만 가볼게. 넌 좀 더 있다 와도 돼.”
 “응.”
 나는 뒤돌아서서 성큼성큼 걸었다.

 

 은행 나뭇길을 빠져나와 마트에서 학교까지 뛰어서 빠져나왔다. 심장이 헤일로를 눈에 담아서 뛰는 건지 아니면 여기까지 달려와서 뛰는 건지 나는 모른다. 학교 정문의 언덕에 무심코 앉아서 숨을 정리했다.


 

 안정을 취한 후에 올려다 본 달밤엔 헤일로와 내가 보였다. 그 달밤에 떠있는 나와 헤일로는 서로 대화를 귓속말로 나누고는 나를 보고 웃었다. 그리고 둘은 서로 눈빛을 교환하고는 빨개진 두 볼을 숨기지 않고 키스를 했다.
 쓴 웃음이 나왔다. 현실의 나와 헤일로에게는 상상도 할 수 없는 황홀한 상황이 달밤에 상영되고 있었다. 난 그걸 그저 바라보기만 하고 아무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 둘은 딥키스를 한 후에 서로 손을 잡으며 어딘가로 발길을 돌려 사라져 버렸다.


 안경을 벗고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그에게 쌓여가는 거짓들, 나에게 쌓여가는 거짓들. 모두 모아 불을 붙여 없애버리고 당장 그의 품으로 달려가고 싶었지만 우리의 꼬여버린 관계가 그걸 가만 두고 보질 않았다. 그저 이 상황에 이끌려 조종당하고 있는 느낌이다. 어째서 이런 일이 나에게 있는 걸까? 어째서. 내가 이렇게 항의하고 저항해도 내 상황은 변하지 않는다. 우리의 운명은 변하지 않는다.


 ㅡ 저기, 선우. 일부러 안경 벗지 않아도 돼. 이래도 들어오는 생각은 들어오니까.
 순간 보이더의 소리가 들어왔다.
 - 아! 그러고 보니 맞다... 미안.
 ㅡ 왜 니가 미안해하는 거야.
 - 왠지 너에게 나쁜 기억만 준 것 같아서.
 ㅡ 아~니야. 사람 안에 좋은 생각만 있는 건 아니잖아. 나쁜 생각도 있는 건 당연하잖아. 그러니 그렇게 죄책감 느낄 필요 없어. 그리고 너는 나를 소중히 여겨 주잖아? 그 안경을 벗어두는 행동만으로도 그건 충분히 느낄 수 있어.
 - 보이더..... 고마워.
 ㅡ 빨리 기숙사로 돌아가자. 너 목도리도 헤일로에게 주고 없잖아?

 “알았어. 가자. 슬슬 배도 고파오네.”

 나는 텅 빈 달밤을 보고 작게 웃음 짓고는 일어섰다. 돌바닥에 앉아있었던 엉덩이를 털고 나는 기숙사 내 방으로 사라졌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