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너에게24. 네이비(4)
멋스럽게 리본을 묶은 사회자 선생님이 방송하는 학생과 뭔가를 이야기하더니 마이크를 잡고 사회를 보기 시작했다. 부들부들 떨리는 방송실 강당 속에서 각각의 순서가 지나갔고, 그 속에 로봇처럼 입을 움직이는 내가 있었다. 나는 떨리는 손과 다리를 어찌어찌 붙잡은 채로 순서 속에 어색하게나마 녹아있었다, 다행히도.
모든 의례적인 순서가 끝나고 일본어 말하기 대회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려고 하고 있었다. 대회 참가자들은 모두 앞으로 나와서 순번을 정하는 제비를 뽑았다. 제비를 뽑은 다음 제자리에 돌아가서는 얼굴이 굳어지는 사람도 있었고 갑자기 비명을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그 사람이 첫 번째 사람이겠지. 그 사람 몰래 씨익 웃어 준 뒤에 제비를 뽑았다. 안됐지만 어차피 나만 아니면 되는 상황이라고? 힘내보셔.
번호는 ‘10’, 호흡을 가다듬고 마음을 평안하게 할 수 있는 번호다. 나까지 모두 다 뽑고 난 뒤에 사회자 선생님이 순서 체크를 했다. 자, 이름 불린 사람은 손드세요. 1번 2학년 D반 함유진, 2번 3학년 E반 김수빈, 3번 1학년 B반 배인혁 ..... 9번 2학년 D반 차미애 10번 2학년 A반 박선우, 그 다음부터는 들리지 않았다.
내 앞에 불린 차미애라는 애가 나를 쳐다보았다. 나도 그 애를 쳐다보았다. 그 애가 가진 투명한 네이비 색 눈이 내 몸과 맘을 훑고 지나갔다.
그 긴머리 소녀, 미애는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다 살짝 웃어보였다. 내 온몸의 털이란 털이 쭈뼛 서게 만드는 웃음이었다. 뭐야, 아주 살짝 웃었을 뿐이라고. 왜 이렇게 긴장이 되는 거지? 그 눈에 계속 맴도는 네이비 색 파도는 일렁이며 내 눈 속으로 침투해왔다.
사실은 정말 두려웠다. 이 대회에서 발표를 잘 못하는 것이. 이 대회에서 상을 받지 못하는 것이. 이 대회에서 상을 놓쳐버리면 나의 결심이 부정 당하는 거나 마찬가지니까, 난 그게 싫었다. 여기서 좋은 결과를 얻어서, 다시 시작하는 내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인정받고 싶었다. 그러면 더 힘이 날 것 같았다.
..... 나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내 생각은 그게 아냐! 이렇게 약한 소리하는 것은 박선우가 아니다. 오빠와 약속한 것이 엊그제 같은데 또 그렇게 흔들릴까봐? 그건 오산이야! 그리고 이 대회에도 상을 못 받아도 괜찮잖아. 결심은 상을 받든 안 받든 내가 그걸 기억하면 되는 거니까, 내 결심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난 그저 자신에게 확인시켜 주려고 여기 나온 거야.
마음을 다시 잡았다.
일본어 발표순서가 왔다. 각자 차례대로 불려나가서, 떨리는 그러나 그 속에 숨은 자신감이 살짝 살짝 드러나는 발표를 펼쳤다.. 사랑과 우정 같은 추상적인 발표주제도 있었고 일본의 문화와 먹을거리를 재미있게 발표한 사람도 있었다. 나는 정말 열심히 발표를 들었다. 다들 엄청나게 칼을 갈고 나왔다는 느낌이 들었고 개중에는 내 마음을 감동시킨 발표도 많이 있었다. 다들 너무나 멋졌다.
정신없이 발표를 듣는 와중 드디어 그 애미애의 차례가 되었다. 미애는 그 네이비색의 눈을 나에게 슬쩍 맞추고는 발표 단상에 올라갔다. 마이크에는 미애의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누군가에게 흠집을 내고 싶어 하는 앙칼진 목소리였다.
“꿈이 없다면 살아도 산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그 꿈을 위해서리면 그에 관련한 건 모두 다 할 수 있어야 됩니다. 꿈도 실력이 없이는 이루지 못합니다.”
지당하신 말씀이었다. 꿈은 살아가는 데 큰 원동력을 준다. 그리고 그런 꿈을 소홀히 해선 안 된다. 꿈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언젠가 무너지게 된다. 미애는 많은 사람들의 박수를 받으며 무사히 발표를 마치고 단상을 내려왔다. 그리고 내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은 일종의 도발. 나에게 슬며시 보내는 도전장..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봤지? 이 많은 박수들을. 이렇게 훌륭한 발표 뒤에 이어지는 너의 발표는 얼마나 추잡스러운 것일까? 네가 날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해? 웃기시네! 어두운 네이비 색이 나를 뒤덮으려 하고 있었다.
ㅡ 정신 차려, 선우!
- 보이더?
ㅡ 그려. 저딴 네이비 색에 지면 안 돼! 이때를 위해서 열심히 연습했잖아! 빨리 그 발표를 보여줘!
쳇, 그런 것은 벌써 알고 있었다구. 자, 잠시 흔들렸을 뿐이니까 말이지!
- 알았어. 집중, 집중!
그래, 보이더의 말대로야. 지금 내가 정신을 차리지 못한다면 그 네이비 색미애에 끌려 다닐 뿐이잖아. 정신 차리자. 그 색깔에 지면 안 돼지.
(근데, 잠깐만. 보이더가 왜 내 마음을 알고 있는 건데, 말해준 것도 아닌데. 에이 몰라. 지금은 그런 거 물어볼 시간이 아냐!)
“이어서, 참가번호 10번 2학년 A반 박선우 학생의 발표가 있겠습니다.
내 이름이 불렸다. 나는 일어서면서 미애의 얼굴을 한번 흘깃 보았다. 그녀를 한번 보는 것만으로도 마음에 네이비 색 파도가 넘쳐흘렀지만 그래도 그녀를 바라보았다. 난 너에게 주눅 들지 않을 거야. 도발하는 너를 똑바로 쳐다볼 거야. 그라고 이길 거야, 너를.
단상에 올라섰다. 발표용지를 내 앞에 놓고 심호흡을 했다. 웃고 있는 오빠의 얼굴이 내 앞에 선했다. 눈을 부릅뜨고 자신 있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 안녕하세요. 2학년 A반 박선우라고 합니다.”
....발표를 하며 여러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그리움과 후회, 자신감과 동경, 사랑과 슬픔이 회오리쳐 올라왔다. 복받쳤다. “저는 불의의 사고로 오빠를 잃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저는 오로지 오빠의 겉모습을 닮으려고 꿈까지 바꾸어가며 발버둥 쳤습니다.” 오빠의 죽음과 나의 헛되었던 발버둥을 고백하는 부분에서는 그냥 다 때려치우고 도망치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참았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던 것입니다.” 나는 한 번 더 오빠의 환한 미소를 보았다.
“꿈은 누군가의 노예가 아닙니다. 만약 누군가를 위해 꿈을 결정해 버린다면 살아가면서 뭔가 빠져있다는 느낌을 지워버리기 어려울 것입니다. 꿈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꿈은 절대적인 나만의 영역입니다. 내 꿈의 주인이 될 때 우리는 비로소 누군가를 위할 수 있게 됩니다.”
아마, 오빠도 이런 것을 원했겠지. 그래서 그때 나에게 나타난 거야. 또다시 안에서부터 눈물이 복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나는 있는 힘껏 크게 웃어보였다.
“지금까지 2학년 A반의 박선우였습니다.”
발표가 끝나고 잠시 동안의 정적이 흘렀다. 앞에 앉은 한 사람이 박수를 쳤다. 그리고 그 박수는 심사위원, 사회자, 다른 발표자에게 옮겨갔다. 이윽고 그 한 번의 박수는 커다란 박수 한 다발이 되어서 나에게 다시 돌아 왔다.
작 가 의 말
1. 미애와 선우가 말하는 것은 모두 한국어 번역해서 적어놨습니다. 한마디로 발표내용은 전부 일본어라는 거죠.
2. 네이비색은 왜 미움을 받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