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침공으로 시작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끝나지도 않은 채로, 

2023년 하마스의 기습공격으로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의 전쟁이 시작되었다. 

병자호란을 배경으로 애달픈 사랑이야기인 '연인'에서 길채는 포로가 되어 노예시장에 서 있다. 

가상의 국가 아스달의 두번째 시즌인 '아라문의 검'에서 아스달의 타곤,은 은섬,이 태우는 숲 가운데, 섰다. 


1. 아무도 기억하지 않았다. 

https://blog.aladin.co.kr/hahayo/10172449

6.25 전쟁수기,를 바탕으로 쓰여진 소설이다. 이 책을 읽고, 전쟁,에 대해 썼었다. 


밥 하기 싫어서 뭐라도 생기면 겨우 먹는 배 곯는 원주민을 부러워하는 나는, 전투기의 비행소음이 멋지다고 방방거리는 평화 중에 자란 어린애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책 속의 이상주의자이고 공산주의자인 젊은 남자는 전쟁을 겪으면서 이상을 놓치는 거였던가. 


나는 전쟁이라는 문명의 허약한 울타리가 부서진 진공의 상태를 책 속에서 보고는 무서웠다. 


2. 나목, 도둑맞은 가난

https://blog.aladin.co.kr/hahayo/14868275


엄마가 내게, '얼마나 배고플 거야'라고 말했을 때, 내가 느꼈던 부끄러움이나 한심함,을 읽는 내내 느꼈다. 


전쟁을 겪는 여자들의 이야기를 보면서 경외심을 갖는다. 내게 배고픔을 일깨워 나를 부끄럽게 만든 엄마는 군인 구경조차 못 한 전쟁을 겪었다지만, 그 삶을 어찌 내가 알겠나 싶은 순간 순간들을 내게 전한다. 

생각하는 게 나와 다를 바 없는 젊은 여자가 참혹한 일들을 겪고도 살아남는다. 살아남을 수 있는 건 그 자체로 강인한 거라서, 길을 잃고 헤매고, 비행기에서 우는 그 여자들을 보면서 살아가는 어쩔 수 없음을 본다. 




3. 전쟁같은 맛

https://blog.aladin.co.kr/hahayo/14841842


나목,이랑 같이 이 책을 읽고 있어서, 가소롭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나 보다. 

죽이지 않는데도 죽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물리적 폭력이 사라진 자리에서 다른 걸 폭력이라고 스스로를 괴롭힌다는 생각이 들었달까. 

괴롭지, 괴롭지 않다는 게 아니라, 가소롭다고. 

자기 엄마에게 '배 지나갔다고 티 나냐'면서 양공주라도 해서 돈을 가져오라는 압박에 쫓기듯 결혼하는 젊은 여자의 이야기-위의 책 중 '부끄러움을 가르칩니다'-를 읽다가, 동양인은 하나뿐이라고 소수자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걸 들으면 참. 싶었다. 전쟁의 맛을 모르는 딸이, 엄마가 도망친 세상이 어떤지 모르는 딸이 그 와중에도 사람들이 친절하기를 바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어머니의 병이, 어머니의 삶이 고통으로 점철된 삶이었다고 해석하는 딸의 어떤 말이 나는 가소롭다. 그렇게 쪼개기만 해서야 사는 게 가능한가 싶은 소수자성에 대한 이야기를, 소수자 정체성에 대한 말들을 참기 어렵다.


전쟁으로 펼쳐지는 무법의 공간에 대해 듣는다. 

시사인인가 한겨레인가, 과거사위원회가 전쟁범죄로 인정하지 않는 학살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기억이 있다. 전쟁 중에 군인 신분이었던 사람이 오랜 사적인 원한을 해소하기 위해 마을 사람들을 죽였다. 그 죽음은 국가가 배상해야 하는 전쟁범죄로 최종적으로 평가되지 않았다,는 기사였다. 그 기사가 기억에 남는다. 

길을 걷다가, 명랑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오는 집에 들어가 일가족을 죽인 살인자에 대한 기사도 기억하고 있다. 자신의 쓸쓸하고 외로운 처지에 참을 수 없었다고 했던가. 


인간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존재다. 

앙심을 품는 데는 이유를 알 수 조차 없다. 

평화 시에 문제삼는 어떤 말들,의 억압은 결국 사라질 수 없다. 그 억압이 사라진 자리에는 무엇이 또 나타날까. 사람들과 함께 살기 위해 감수하는 불편이 결국 사라질 수 있을까. 


아라문의 검,에서 예언의 아이들,이 꿈꾼다는 세상이 너무 추상적이라 이야기를 따라가면서도 고개를 갸웃한다. '약한 것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이라니. 약하다는 건 과연 무엇인가. 누구보다 강하다는 뇌안탈은 어떻게 약한 존재들에게 밀려났는가. 약하면서도 연합으로 강해졌다면, 이제 그 정의는 어디에 있는가. 약하고 강하다는 건 불변이 아니고, 거대한 나라에 대해 강한 나라라고 해도 모두 다 강한 건 또 아니고 말이다. 약하다고 해도 뭉치면 강하고, 강하다고 해도 하나 뿐이라면 다음을 기약할 수 없다. 

전쟁이 아니라, 전쟁 다음이, '약한 것이 죄가 되지 않는 세상'이라는 꿈을 증명하는 공간이 될 테지만,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과거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보복의 멈출 수 있을 것인가. 


연인,에서 길채는 '일하는 언니가 사람들 입길에 올라서 부끄럽다'는 자신의 여동생에게, '사람은 밥을 안 먹으면 죽는 거'라고 말한다. 


살고 죽는, 단순함이 가득 찬 서사 가운데, 수없이 쪼개는 말들이 하찮아서 어떤 괴로움의 토로가 너무 가볍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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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강의

법가에 대한 묘사에서, 대부 이상의 자결을 금지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벌을 면하는 것이 금지되었다,는 이야기. 

권력을 가진 대부는, 벌을 받기보다 스스로를 죽임으로써 지지부진한 심판을 피했다. 

'자결하라'라는 명은, 사약을 내리거나, 목을 베어버리거나, 사지를 묶어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 같은, 벌이라기보다는 어쩌면 혜택이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부이상의 권력자들은 삶과 죽음에 대해 스스로 판단하였다. 죄를 저질러 죽어야 할 때조차, 자신의 생사여탈권을 내어주지 않았다,라는 인상을 받았다. 

현대 법체계 하에서도 자결은 어쩌면 그런 방식으로 작동한다. 법의 가장 큰 처벌은 이뤄지지 않은 지 여러 해인 '사형'이고, 죽은 자에 대해서는 공소권,없음으로 더 이상의 분별은 이뤄지지 않는다. 스스로를 죽이는, 건 '절대'가 붙는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2. 왜 사람들은 자살하는가?

읽고 한 마디도 남기지 않았지만, 책 속에서 이것도 자살인가? 싶은 묘사를 만난다. 

늙어 숟가락조차 들 수 없을 때, 곡기를 끊음으로써 죽음을 맞이하는 것,도 자살인가? 

나는 자살이라고 생각하는가?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했다. 

그래 그것도 자살,이라고는 할 수 있겠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까지 잘못이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라고도 생각했다. 

이탈리아에선가, 전신이 마비된 채로 생명유지장치에 의존하던 남자가 자신을 좀 죽여달라고 청원하는 이야기를 기사에서 본 적이 있다. 가족들은 반대하고, 그 남자는 청원하는 와중에 나는, 그 남자의 가족들이 나쁘다고 생각했다. 

산다는 건 뭘까. 죽는다는 건 뭘까. 

전신이 마비된 상황에서도 의식이 있는 채로 1~2년?을 보내다가 깨어나는 사람이 쓴 책도 있으니, 나는 안다고 할 수 있을까, 싶다가도, 나는 연명치료거부 의향서를 미리 써둬야겠다고 생각한다.



3. 나를 찾고 너를 만나

이 책을 읽는데, 자결하는 선비의 묘사가 있다.(아름다운 가풍을 이어가려면, 이라는 쪽글이다) 프랑스 함대의 침략에 죽어 여귀가 되어 원수를 갚겠노라 자결하는 형 뒤를 따라 아우가 뒤따라 자결한 묘사 다음에 '그 의리 정신도 장하지만, 형제 사이의 깊은 우애를 넘어 서로 한 마음을 이루고 있었음을 말해준다'는 작가의 말에 이상한 감정을 느낀다. 


망해가는 나라의 운명에서 죽음을 택하는 선비들을 '장하다'고 할 수 있을까. 나는 죽지만, 나를 보아, 너는 움직여 달라,는 걸 '용감하다'고 할 수 있을까. 





스스로를 죽이는 사람이 없으면 좋겠다고 바라지만 어떤 선택으로의 죽음이 있다는 생각은 하고 있다. 

공개된 나의 죄를 내 스스로 벌하는 죽음도 있고, 더 이상 내 손으로 내 몸을 건사하지 못할 때 곡기를 끊음으로써 더 빨리 죽음을 당기는 방식도 있다.

더하여, 살아서는 갚지 못하는 갚을 수 없는 나의 깊은 원한을 죽음 후에 갚겠다는 선택인 죽음도 있다.


사는 게 괴롭고 힘든 순간에 다른 사람을 죽이겠다는 것도 아니고, 나 혼자 죽겠다는 게 뭐 그렇게 비난받을 일이야,라고도 가끔은 생각하는 것도 같다. 그런데, 그게 다 순간이니, 뭐 그러지 말라고 너를 아는 나를 위해 그러지 말라고 하고 싶다. 나를 아는 너를 위해서라도 어차피 닥칠 죽음을 당길 필요야,라고도 생각한다. 

각각의 다른 이유 가운데, 나는, 우리 사회가 움직이는 어떤 방향이 세번째 죽음을 응원하는 것은 아닌가 싶어 심난하다. 

괴로운 상황을 마주하고, 나를 괴롭히는 사람을 괴롭힐 방식을 궁리하다가, 나를 죽이기로 하는 어떤 선택이 싫다. 

그런데, 그런 선택 다음에 화가 난 사람들은 그 죽음을 들어, 죽은 자의 소원을 풀어준다는 태도로 응징하려 든다. 그런 이유인지 아닌지 말할 수 없는 이미 죽은 자를 앞세우고, 무언가 자신의 분노를 덧 씌워서 응징을 하려 든다. 

살아있는 누군가는 그걸 보고, 복수하는 원혼,에 대한 이야기를 또 듣고, 지금 약하고 대책없고 괴로운 자신을 죽이는 건 아닐까. 

 

나는 뭐라고 말하고 싶은가. 


복수던 뭐던 네가 하라고. 가장 좋은 복수는 '잘 사는' 거고, 잊는 거라고, 원망을 가득 담은 유서 같은 거 남기고 죽어서 뭐하냐고. 죽지 말라고.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낫다, 고. 아무리 나를 괴롭게 했더라도, 나를 죽이지 않았으면 죽이지 않은 거라고. 살라고, 살아서 복수던 뭐던 직접 하라고. 난 너 대신 복수 따위 하지 않을 거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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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시우행 2023-10-18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울림이 있는 좋은글입니다.

별족 2023-10-19 09:1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eBook] 나를 찾고 너를 만나: 유학자와 함께 일상에서 철학하기
금장태 지음 / 바오로딸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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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유학에 호감이 있고, 기독교에는 편견이 있다. 

유학이 꽤나 이성적인 학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서-의심이 들 때는 꼭 물을 것을 생각하고(사자소학의 구사九思 중)-, 이렇게 이성적인 유학자가 어떻게 기독교도가 될 수 있는지 궁금했다. 그래서, '다산, 자네에게 믿는 일이란 무엇인가'( https://blog.aladin.co.kr/hahayo/11596640 ) 를 구해 읽기도 했었다. 나의 호기심에는 먼저 읽은 책보다는 이 책이 더 맞는 거 같다. 

영성에 대한 이야기다. 

무언가 설명을 듣다가, 그래서 그게 뭔데?라는 질문이 닥치는 순간 조용히 눈을 들여다보면서 해야 하는,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것들에 대한 이야기다. 


글을 쓰는 동안 필자의 생각이 어둡고 이해도 얕아 벙어리가 꿈 이야기를 하려는 듯하여 말하는 사람으로서 답답함이 심했으니, 듣는 사람까지 답답하게 할까 두려운 마음을 떨칠 수 없다. -4%(머리말)


따라서 내가 '나'에게 어떤 나를 바라고 있는지, '나'를 어떤 품격의 존재로 알고 있는지 끊임없이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론 신전 현관 기둥에 새겨져 있다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유명한 구절은 여러 의미로 해석될 수 있다. 인간존재로서 숙명적인 한계를 알라는 말도 되고, 사회 안에서 자신의 처지나 분수를 알라는 말도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나'라는 존재는 결코 고정된 사물이 아니다. 

'나'에는 이미 굳으져 형체를 드러내는 부분이 있지만, 그보다 훨씬 더 큰 부분이 지금 형성되는 도중이고, 언제 어디로 얼마나 큰 힘이 터져 나올지 모르는 활화산같은 존재다. -5% (나는 어떤 사람인가)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라야 자기를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를 사랑할 수 있고, 자기를 가르쳐 준 스승을 사랑할 수 있으며, 조국을 사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를 사랑하고 스승을 존경하고 조국을 사랑하라고 아무리 도리를 따져 가르쳐도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공허한 말일 뿐이다. 그래서 맹자는 "자기를 해치는 자와는 더불어 말할 수 없고, 자기를 저버리는 자와는 더불어 일을 할 수 없다 自暴者, 不可與有言也, 自棄者, 不可與有爲也" 맹자 7-10:1 고 했다.-7% (자기를 사랑해야)


사람은 언제나 잘못을 저지르고 난 다음에야 고칠 수 있으며, 마음이 괴롭고 생각이 막힌 다음에 분발하며, 안색에 나타나고 소리로 터져 나온 다음에 깨닫는다. 나라 안에는 법도 있는 집안과 보필하는 선비가 없고, 나라 밖으로 적국과 외환이 없으면, 그런 나라는 언제나 멸망하기 마련이다. 그런 다음에야 '우환 속에서 살아갈 수 있고 안락 속에서 죽게 된다'는 것을 알 것이다. 맹자 12-15:1 - 19% (편안할 때 근심을 잊지 말아야)


자신의 기질이 지닌 문제점을 스스로 고칠 수 있다는 말은, 고칠 수 있는 것도 자신이요 고치지 않고 방치하는 것도 자신이라는 말이다. 바로 이 점이 자전거 같은 사물과 인간존재가 다른 점이다. 스스로 노력하고 있는 동안은 비록 고장이 난 상태라 하더라도 그것은 '자포자기'가 아니다. '자포자기'는 스스로 고치려는 생각도 의지도 없는 자기 파괴요 자기 부정인 것이다. ~ 하늘이 인간의 가능성을 끊은 것이 아니라, 인간이 스스로 하늘이 주신 가능성을 끊은 죄를 지적한 것이다. '자포자기'란 바로 인간이 스스로 하늘을 끊은 '자절自絶'이라 하겠다.-26~27% (자포자기와 자절)


항상하면 긴장을 풀고 안심할 수 있으니, 그 편안함을 누구나 바란다. 변화하면 긴장해야 하고 불안해지니, 그 불편함을 누구나 피하고 싶어한다. 그러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으니, 변화는 숙명적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항상함이란 변화가 없는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변화하는 현실 속에서 그 변화를 조종할 수 있는 원리나 법칙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하늘이 영원불변의 존재라는 말도 변함이 없는 것이 아니라 모든 변화를 다 포함하면서 유지해가는 변함없는 근원이 된다는 것이고, 우리 마음에 항상한 성품과 지조가 있다는 것도 순간순간 변하는 마음에서 그 중심을 지속적으로 지켜주는 힘이라 하겠다.-27% (항상[常]과 변화[變])


우리의 몸이 활동하는 것은 그 바탕에 고요함이 중심축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니, 항상 활동[動]과 고요함[靜]은 서로 보완하는 작용을 하는 것으로 본다. 이처럼 일하고 쉬는 것도 어느 한 쪽이 결핍되면 다른 쪽도 무너진다는 사실을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일만 하고 쉴 줄을 모른다면 그 일의 바탕이 허약해져서 언제 병들고 주저앉을지 알 수가 없다. 마찬가지로 쉬기만 하고 일하지 않으면 그 휴식은 쓸모가 없어 저절로 녹슬어버릴 것이다.-30%(휴식에서 얻는 활력)


문제는 어떻게 해야 '덕'을 쌓아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오상'의 다섯 가지 '덕' 가운데서도 전체를 대표하는 덕이 '인 仁'인데, 정약용은 '인 仁'이라는 글자가 '사람[人]'과 '둘[二]'을 뜻하는 두 글자가 결합된 것임을 주목하여, 두 사람 사이에 행해야 할 도리라 했다. 그렇다면 인간의 덕목 가운데 가장 중요하고 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덕인 '인'은 바로 나와 너 두 사람 사이의 도리를 가르키는 말이다. 결국 사람답게 사는 도리는 내 속에 주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 속에서 드러나고 실현될 수 있는 것임을 강조했다. -33% (사람답게 사는 도리)


그래서 대중을 좀 더 쉽게 이끌어 덕으로 나아가게 하는 방법이 제시되었다. 깊은 산골에서 시냇물이 흘러내리다가 바위에 막히면 잠시 기다렸다가 가득 차면 바위를 넘어 다시 흘러간다는 점진적 방법이다. 세상 모든 사람을 자기 몸처럼 사랑할 수 없을 때 먼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시작하여 가족에 대한 사랑으로 넓혀간다. 그리고 가족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면 그 사랑이 이웃으로 넘쳐흐르게 한다. 사랑을 넓혀가고 채워과는 확충擴充의 방법이다. 사랑이 자신을 채우고 바깥으로 흘러 넓어질 때 인간다움의 덕도 커지고, 사랑이 자신 속으로 움츠러들 때 인간다움의 가치도 잃게 된다.-34% (사람답게 사는 도리)


예절이 질서의 이상을 추구하는 것이라면, 법률은 질서의 방어선을 제시한 것이다. 그래도 법률의 한계선조차 어기는 사람이 심심찮게 나오고 있으니, 이들은 형벌로 다스리지 않을 수 없다. 가장 바람직한 것은 사람들이 사회의 아름다운 풍속과 질서를 자율적으로 실현하는 것이다.-36%(예절과 준법정신)


사람이 살아간다는 것은 사방에서 많은 은혜를 입는 것인데 감사하고 보답하기는 쉽지 않다. 반면 원망은 너무 쉽게 분출된다. 조금만 섭섭하거나 불편과 손해를 입으면 격분하는 일이 허다하다. 이것이 반복되거나 심화되면 원한을 품고 쉽사리 용서하지 않는다. 그러니 받은 은혜에 감사하지 못하더라도 남에 대한 원한이 맺히지 않도록 조심해야 하고, 또 은혜를 베풀지는 못하더라도 원한을 사지 않도록 주의하지 않을 수 없다. - 41% (은혜와 원한)


자기 존재에 대한 인식에서 가장 대조되는 양상은 서양의 그리스도교와 동양의 유교다. 그리스도교에서는 육신이야 부모에게서 받지만 생명의 핵심인 영혼은 하느님이 각자에게 부여한다. 그렇다면 영혼은 하느님 앞에 홀로 서는 존재이고, 육신은 영혼의 밑받침 역할을 하는 부차적인 것으로 본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도 그리스도교적 인간관, 곧 하느님 앞에 홀로 서는 존재로서의 인간관이 확산되어, 조상에 대한 관심이 희미해지고, 독립적이고 자율적인 존재로서 나의 위치는 더욱 뚜렷해졌다. 그만큼 개인주의가 팽배하게 된 것이다. 법률은 가족이 연좌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조상의 명성 때문에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에 비해 유교문화는 대대로 이어져 온 연속선 속에서 개인의 존재를 인정할 뿐이다.개인은 결코 고립된 존재가 아니라 조상으로부터 이어져 온 사슬 가운데 하나의 고리라 할 수 있다. 하나의 고리로서는 완성된 개체이지만 전체의 사슬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는 존재로 본다. - 47%(조상과 자손)


율곡은 어두움의 병과 어지러움의 병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이치를 궁구하여 선을 밝힐 것 窮理以明善'과 '의지를 독실히 하여 기질을 통솔할 것 篤志以帥氣'을 제시하고, 나아가 '심성을 배양하여 참됨을 보존할 것 涵養以存誠'과 '성찰하여 거짓됨을 제거할 것 省察以去僞'의 네 조목을 제시하고 있다. 그는 좀 더 쉽게 설명하여, "게으른 것이 병이 됨을 알면 부지런하고 독실함으로써 치료하며, 욕심이 병이 됨을 알면 이치를 따름으로써 치료하며, 자신을 엄격하게 단속하지 못함이 병이 됨을 알면 엄숙하고 장중함으로써 치료하며, 생각이 어지럽게 흩어짐이 병이 됨을 알면 한결같이 집중함으로써 치료하는 것이다. 병이 비록 나에게 있지만 약을 밖에서 구하지 않는다" [贈洪㽒(錫胤)說]고 했다. 마음의 병이 어디에 있는지를 명확하게 인식하면 스스로 치료하는 방법을 찾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95%(마음의 병과 치유법)


그러나 동시에 하늘은 인간을 감시하며 인간의 악에 재앙과 질병을 내리는 한없이 두려운 존재이기도 하다. 공자는 "하늘의 명령을 두려워한다 畏天命"[논어]16-8라 하여, 군자가 천명을 두려워하도록 강조했고, "하늘이 나를 버리시는구나 天喪予"[논어]11-9라 하며 통곡하기도 했다. 하늘이 나에게 덕을 내려주셨고 나를 알아주신다고 믿고만 있을 수는 없다. 하늘은 언제 나를 버리고 죄 줄지 알 수 없는 두려운 존재다. 그만큼 하늘이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이는 존재가 아니라, 마음대로 나를 뒤흔들고 뒤바꾸어 놓는 존재임을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이 가져야 할 태도는 믿고 의지하면서 동시에 두려워하고 조심하지 않을 수 없지만, 더욱 절박한 것은 믿고 의지하는 것보다 두려워하고 조심하는 것이다. - 99%(하늘을 우러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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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킨을 시켜서 밥반찬으로 먹는 저녁, 아들이 묻는다. 

"돈이 많아지면 물가가 오르잖아?"

"그렇지."

"돈이 많은데, 왜 물가가 올라?"

"돈이 많으니까. 옛날에는 아예 돈이 나라 전체에 천원밖에 없었어. 그러니까 짜장면이 오원이지. 그런데, 지금은 나라 전체에 돈이 백만원이 있는 거야. 그러면 짜장면값도 거기 맞춰서 오르는 거야."

"뭔가 이상한데."

"돈은 수단이니까. 돈 자체가 늘어나면 가격이 올라."

"다 오르는데 월급은 안 오른다고 하잖아."

"그건, 옛날에는 나라 전체에 천원밖에 돈이 없으면 많은 사람이 많이 가져봐야 백원있는 건데, 나라 전체에 백만원이 있으면 많은 사람은 그 중에 구십만원도 가질 수 있거든. 나라 전체에 백사람이 있어서 천원을 나눠 가질 때는 부자가 백원가지고 남은 9백원을 99명이 나눠가지는 수준이지만, 백만원일 때는 달라지거든."

이렇게 말하지는 못했다. 뭔가 버벅거렸다. 

돈이 많아진다고 내 돈도 많아지는 건 아니다. 

돈이 많아지면, 물가가 오른다. 돈이 많아지면 돈은 돈끼리 모여서 불어난다. 돈이 돈끼리 모이는 동안, 없는 사람은 더 돈이 없어지지. 

땅 아흔아홉마지기 가진 사람이 땅 한마지기 가진 사람 땅을 빼앗는 거 같은 거지, 뭐. 

나야, 

물가가 오르면 아껴야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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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2023년 9월 9일, ep280) 놀라운 토요일, 을 보고 있었다. 

빽가, 전소미, 정동원이 게스트로 나왔다. 게스트소개를 하고, 시장을 한 바퀴 돌고, 1라운드 음식으로 얼큰해물수제비가 소개되었다. 

빽가가 "작가들이 너무했네. 나는 해산물을 못 먹는데"라고 투덜거리니까, 

문세윤이 잽싸게 "귀인이로구나!!!"라고 말했다. 

그 짧은 순간, 확 변하는 분위기가 좋았다. 

엄마라서 그런가, 어릴 때라면, 빽가에 이입했을려나. 나는 빽가가 그렇게 말했을 때 좀 미운 마음이 생겼고, 내가 그 작가라도 된 듯 불편한 마음이 되었다. 그런데, 문세윤이 "귀인이로구나!"라고 말하는 순간, 조그맣게 뭉치던 미운 마음이 훅 풀어져서는 픽 웃음이 났다. 열명 넘는 사람들 입맛을 모두 다 맞출 수 없다. 누구는 샐러드가 좋고, 누구는 국물이 있어야 한다. 해산물을 못 먹는 사람이 손님으로 오면 그 사람이 못 먹는 걸 내가 먹을 수 있으니 그 사람은 나에게 귀인이 된다,고 문세윤은 말할 수 있는 거다. 뒤에서 태연은 열무비빔밥이 같이 나온다고 그걸 드시면 된다고 빽가에게 말해주고 있다.

분위기,라는 게 있다. 좋은 분위기라야 좋은 장면을 만들 수 있다. 드러내어 말할 수 없는 미운 마음,은 분위기를 다르게 만든다. 생각해보면 내가 말은 못하고 뒤에서 미운 마음을 뭉치곤 하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도 같다. 상황에는 언제나 좋은 점도 나쁜 점도 있고, 모든 면을 완벽하게 누구나를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다. 그런데, 그런 상황에서도 다른 해석을 빠르게 낚아채서 웃을 수는 있다. 빽가는 자신에 대해 알아주지 못한 작가가 서운했을 수 있고, 발언권 없는 작가는 그저 미운 마음을 뭉치고 있을 수도 있었는데, 문세윤은 날렵하게 상황을 눙쳤다.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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