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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일기를 쓰려고 컴퓨터를 켜는데, 페이스북 알림 카운트가 오른쪽 아래에 보인다. 

언니 뿐이지만, 들어가서 확인한다. 언니는 페북에 포항MBC에서 제작한 '새어나온 비밀' (https://www.youtube.com/watch?v=0zEzNVUSqGQ) 이라는 다큐를 링크로 걸었다. 

잠깐 보다가 끈다. 커서를 빠르게 밀어 보는 인터뷰에서 10년 전에 갑상선 암 수술을 받았다는 할머니도, 할아버지도 보이고, 평상에 모여 앉은 어른들에게 젊은 환경운동가는 계란으로 바위치기고 오래 걸리겠지만 그때까지 살아계시라,고 말한다. 


원자력발전소 옆에 살지 않아도, 사람은 늙고 죽는데, 어떻게 원인을 저렇게까지 확신하지,라고 생각하면서, 새롭지도 않고 언제나처럼 감정에 호소하는 이야기네, 라면서 끈다. 


출근해서 회사의 신문스크랩에서 경북매일의 "방사능 괴담으로 파탄난 지역경제 책임져라"

(http://www.kbmaeil.com/news/articleView.html?idxno=939884 ) 라는 기사를 본다. 환경운동가가, 포항 MBC의 기자가 지역경제를 파탄내려고 그런 기사를 냈을 리는 없다. 더 중요한 게 있고, 더 중요한 걸 위해서 사람들을 위해서 입 없는 사람들의 입이 될 결심으로 하고 있을 것이다.

믿기 때문에, 믿어 의심치 않기 때문에, 감정에 호소하는 일, 공포를 조장하고 있으면서도 그래도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보이지 않아서 알 수 없는 것이라서 더 쉽다. 


다른 누군가-자연, 지구, 약자, 그게 무엇이든-를 위해 높인다는 목소리가 과연 도움이 되는 말일까, 의심하는 지경이다. 


세상의 복잡하고 다양한 면면 가운데, 확신에 찬 목소리들에 의심이 생기고, 감정에 호소하는 말들을 밀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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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 2022-09-30 1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나 친 확신은 좀 부담스럽긴 해요. 신념에 가득 찬 사람들을 보면 좀 불편한데, 그렇게 끊임없이 문제를 제기하는 사람들도 필요하겠지.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도 자기들이 옳다는 걸 증명하려고 감정에 호소하는 건 좀 아닌 거 같아요.

카스피 2022-10-01 1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사능 위협이 큰것은 사실이지만 우리나라의 경우 그걸 어떤사유에선지 너무 과대포장하여 공포감을 조성하는분들이 문제인거 갔습니다

별족 2022-10-03 07:09   좋아요 0 | URL
크다, 작다, 라는 게 모두 상대적인 거라서, 저는 무엇에 비하여 크다는 건지 회의하고 있습니다. -_-
 

일요일, 근처 작은 언덕배기(동산) 정자에 소풍을 갔다. 컵라면을 하나씩 사고, 아침에 먹다 남은 김밥도 들고, 작은 책으로 책도 한 권 넣었다. 취사가 금지되어 있는 정자니까, 라면서 컵라면 물은 전기포트에 팔팔 끓여서 보온병에 담았다. 남편은 물과 전기포트를 들고 가서, 화장실에서 끓이자고 했지만, 나는 언덕을 들고 오르는 게 귀찮을 거 같아서 보온병을 주장했다. 내가 챙긴 물은 컵라면 두 개에 부었더니 없었다. 영 면이 안 서서 안절부절하고 있으려니, 남편이 집에 다시 가서 물을 더 끓여 왔다. 남편 라면과 내 라면의 물을 기다리면서, 바람이 선선하 가을의 정자에서 장자를 읽었다. 소리내어 읽는 장자를 뚱하게 듣던 아들이 특수 상대성이론에 대해 질문하면서 내 입을 막았다. 그걸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붕새와 말매미에 대해 말해 줄 수도 있을 뻔 했네, 참. 

다 먹고 잘 놀고 내려와서야 취사,가 무언지 찾아볼 생각을 했다. 

끼니로 먹을 음식 따위를 마련하는 것을 이름
[다음 국어사전]

취사가 끼니를 준비하는 일,이라는 검색결과를 보고는 에? 그러면 컵라면을 먹어도 안 되는 건가?  

끼니로 안 먹고, 간식으로 먹었으면 되었을 텐데, 끼니였는데 문제일까?

취사,는 불을 쓴다는 의미가 있는 거 아닌가?

아이들 앞에서, 취사금지 정자에서 컵라면으로 끼니를 먹은, 마음이 불편한, 영 찜찜한 설명 앞에 다시 한자를 찾는다. 

취 炊 불땔 취, 사 事 일 사,를 쓴다. 

그래, 역시 불을 쓰지 않으면 되는 거였어,로 자기 합리화를 한다. 

나는 그 한자가 불땔 취,인 것도 모르는데 어떻게 이걸 알았던 걸까. 신기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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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 2022-09-26 1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요일, 가족이 함께 뒷동산에 올라 컵라면을 나누는 모습을 그려보니 흐뭇한 미소가 지어집니다. 거기에 장자는 참 잘 어울리네요.
 

태풍으로 휴교한 집에서 점심을 먹으려는 찰나, 아들이 원자력이 뭐냐고 물었다. 


원자력이라.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하나. 

"있잖아, 이렇게 같이 살려면 싸우고 힘들고 그러잖아? "

아들은 에?하는 표정으로 보다가 피식 웃었다. 

"엄마랑 너랑도 싸우고 싫을 때가 있잖아. 원자들도 그렇거든. 같이 있으면 힘이 든다고. 같이 있으려면 어떤 힘이 꽉 잡아줘야 하는 거야. 그러니까, 그게 나눠지면 밖으로 그 힘이 나와. 그 힘을 쓰는 게 원자력이야."

"뭐가 같이 있는데?"

"양성자, 중성자, 전자?"


말해놓고 곰곰히 생각했더니, 핵분열에너지만 말해줬네, 싶어서 좀 후회가 되었다. 핵융합에너지도 있는데, 적당한 크기,라는 게 있고, 적당한 크기가 될 때까지 나뉘면서 밖으로 내놓는 에너지와 합치면서 밖으로 내놓는 에너지가 있는데 말이지. 아쉽네. 


남편한테 말했더니, 엄밀히 말해서 '원자력'이라는 말이 어디 있냐고 했다. 

남편은 핵력,은 있지만, 원자'력'은 없는 게 아니냐고 했다. 그래서 우선 싸웠다. 

말은 쓰면 있는 거야! 엄밀한 거 좋아하시네. 

수력,은 중력이라고 쓸거냐. 화력은 뭐라고 쓰실려고? 참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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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생각을 벌써 쓴 적이 있지만https://blog.aladin.co.kr/hahayo/12689336 ), 한 번 더 말하기 위해 노력해보겠다.

나는, 여성문화와 남성문화가 있다고 생각한다. 동성끼리 함께 고양시키는 어떤 태도가 있다. 문화는 생물학적 성별에 귀속되는 방식이 아니지만, 생물학적 성별로 특징이 더 드러나는 식이다. 누군가를 천상 여자네,라는 식으로 말할 때, 여자,라는 말은 생물학적 성별이라기보다 어떤 성향이고, 동양의 모호한 문화 가운데서, 저 말은 생물학적인 남성에게도 쓰일 수 있다. 인간의 안에 존재하는 모순적인 태도들 가운데, 어떤 특질이 생물학적인 구분자를 은유로 쓰는 거다. 여성적이라고 표현되는 특질들이 있고, 남성적이라고 표현되는 특질들이 있다. 그리고 이것은 생물학적 성별그룹의 문화 가운데 우세한 어떤 특질들인 거다. 사람 하나하나는 묶지 못하지만, 무리지은 사람들로는 특질을 말하는 방식이 되는 것처럼 말이다. 나는 한국인이지만, 한국인의 어떤 특질을 들을 때 나는 안 그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처럼. 흐릿하고 경계가 불분명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교한다면, 비교 가운데 굳이 어떤 말을 고른다면 선택되는 방식의 말들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은 그런 식의 말들에 억압을 느낄 수 있다. 

말하자면 나는 E만 가득한 세계에 속한 I 처럼 여자들의 문화에 불편함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렇지만, 남자들의 세계에 속한다고 해도 역시 또 다른 불편함이 있다. 성향 상 대세가 되는 어떤 태도에 조금씩 핀트가 어긋난다. 그건 나뿐 아니라, 모든 개인들이 조금씩은 그렇게 느낄 것이다. 여성이란 말이, 동양인이란 말이, 한국인이란 말이, 딸이란 말이, 아내라는 말이, 엄마라는 말이, 나의 정체성이기는 하지만 그 모든 정체성들로만 나를 설명하지 못한다. 


젊은 나에게 주효했던 억압은 순결에 대한 억압과 성폭력에 대한 공포(https://blog.aladin.co.kr/hahayo/13052482)였다. 순결에 대한 억압이 강할수록, 성폭력에 대한 공포가 커진다는 면에서 나는 내 자신의 순결에 대한 억압을 해소하기를 원했고, 그런 말들을 페미니즘에서 찾으면서 해방감을 느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페미니즘의 말들이 고양시키는 태도들이 나의 태도들과 충돌한다고 느낀다. 


1. 성적인 고양

인간과 인간의 관계-남녀는 당연하고, 같은 성별까지도-를 성적인 것으로 해석하는 태도를 고양시킨다. 이건 남성적인 서양문화의 특성일 수도 억압적인 기독교문화의 특성일 수도 있다. 서양의 영화나 드라마나, 소설을 볼 때, "도대체, 섹스 못해 죽은 귀신이라도 들러붙었다니?"싶은 순간들 말이다. 애건 어른이건, 동성이건 이성이건, 단 둘이 있는 어떤 공간에 성적인 문제가 발생할 거라고 조성되는 긴장감, 더하여 삽입성교로의 귀결 말이다. 

다 큰 성인 여자가, 남성의 호의가 무엇을 원하는 것인지 알아차리지 못하다니 멍청하다는 식이라거나, 여자 둘이 한 호텔방에 들어갔는데 성인이고 정치적으로 올바른 당신은, 그 둘이 레즈인 걸 알아차리고, 다른 사람들이 동성연인을 혹시나 차별하고 억압할까봐 보호해야 한다는 어떤 뉘앙스를 만나는 순간같은 거다. 

둘이 무얼 하건, 분명하게 모르는 채라면 모르는 채로 내 맘대로 생각해도 상관없다. 드러내지 않았다면 호의는 호의, 내가 줄 수 있는 것처럼 상대도 줄 수 있다고 인간의 관계가 다 오해지 뭐,라는 태도로 남성의 호의를 받고, 내가 줄 수 있는 호의를 또 주면서. 

여자 둘이 한 호텔방에 들어갔다고 해서, 둘이 레즈라고 당연히 생각하는 게 이상한 거지. 드러내지 않았다면, 갔구나, 하고 말 일이지. 그 안에서 무얼 할 지 생각하면서 보호할지 혐오할지 입장을 정해야 할 일이냐 말이다. 나랑 아무 상관도 없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남성의 호의가 우정일 수도 있고, 여자 둘이 덕질하느라 호텔 방에 갈 수도 있지. 성적인 긴장들이 싫어서 일찌감치? 결혼하고 속 편한 나는 머릿속에 음란마귀가 들어앉았는지 모든 인간관계를 성적으로 고양시키는 지금의 어떤 페미니즘의 태도가 피곤하다. 


2. 위계의식의 고양

읽지도 않은 책들인데, 의문이 생긴다. 

어떤 일이 더 중한가?라는 질문에 서구 백인 페미니스트들은 남자들과 같은 저울을 사용하고, 그게 진리인 양 말한다. 

아이를 먹이는 일과 경제학 저술을 남기는 일. 

지금 당장 필요를 해소하는 일과 미래에 이름을 남기는 일. 

전자를 하느라 후자를 획득하지 못하는 것을 억울해한다. 

1세계 여성 페미니스트의 위계 피라미드는 1세계 남성을 향한다. 경중을 따져 세운 자신들의 위계가 세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든다는 3세계 페미니스트의 말은, 어린 마음을 고양시키며 달려나가는 어린 페미니스트를 고양시키지 못한다. 

이런 태도로, 나의 말들은 서구 페미니스트 철학자의 말들로 반박된다. 공부를 더 하세요,라는 논쟁의 끝을 그렇게 만난다. 페미니즘 공부를 열심히 해서, 정밀한 위계를 스스로 만든다. 공적인 일과 사적인 일의 위계는 당연히 공적인 일이 위로 올라가고, 정치가와 간호사가 있다면 정치가가, 판매원과 엔지니어라면 엔지니어가, 어떤 식으로든 위계와 서열을 만들고, 그 위계 안에서 발언권의 가치를 부여하려 든다. 역시 금과옥조는 이름있는 페미니스트 학자, 나와 같이 공부한 사람들의 말, 자신이 가지는 그 태도에  위계가 고양되었으니, 상대의 말이 서구 이름있는 학자의 말과 대등하다고 사고하지 않는다. 

결국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들을 자본시장에 내어줄 뿐인 논리들을 강화시킨다. 그러고는 다시, 본질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 위계는 직업들 사이에서도 강화시킨다. 애초에 위계가 문제고, 세상이 수직이 아니라 둥근 원과 같다는 좀 더 나은 태도는 고양되지 않는다. 


3. 피해자 서사의 고양

남자와 여자가 다르다,라는 말을 반박한다. 물론 '문명사회에서'라는 '기술로 해결가능한'이라는 전제가 붙는다고 한다. 이 문명이라는 것이 어떤 비문명을 거쳐서 이루어진 것인지 못 본 체 하는 것 같다. 폭력을 억누르는 강한 문명의 힘이 어떤 이야기들로 이뤄진 건지 모르는 체 한다. 비문명의 바탕 위에서 겨우 서 있는 연약한 문명 안에 살면서, 비문명의 바닥을 부수려는 것처럼 군다. 

남자와 여자는 같으므로 같은 권력을 달라고, 여성은 피해자고 무언가 권력을 배분하는 존재라도 있는 양 말한다. 권력을 배분하는 존재에는 내가 포함되어 있고, 그 나라는 존재는 모순으로 가득 차 있다. 

여자는 물리적으로 남자보다 약하다. 그래서, 많은 특성들이 드러난다. 약함에도 불구하고 살아남기 위해서, 여자들의 세계에서 경쟁하고 남자들의 세계를 넘보지 않으려고 해 왔다. 약하기 때문에 치밀하게 반격해야 하고, 실패할 수 없어 조심스럽다. 살아남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고양된 여성의 성정, 여성의 교활함, 여성의 치밀함이 있다. 여성만이 피해자,라고 할 수가 없다. 남성에게는 억압이 없는가? 남성은 피해가 없는가? 다른 방식의 다른 형태로 드러나는 피해일 뿐이다.

남자와 여자는 다르다. 여자는 물리적으로 남자보다 약하지만, 남자는 정신적으로 여자보다 약하다. 나는 남자들이 유리멘탈의 고릴라,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아마도 강철멘탈의 유리동물?이라고. 남자를 정신적으로 옥죄어 조종하는 여자들,에 대한 이야기들을(https://blog.aladin.co.kr/hahayo/12544871 ) 안다. 

여자는 물리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남자랑 나란히 걸을 때도 무서운 상상을 부풀릴 수 있다.(https://blog.aladin.co.kr/hahayo/9957536 ) 그 남자가 아무 것도 하지 않았어도, 여자는 그저 나란히 걸으면서 살해당할지도 모른다고 상상한다. 

인터넷을 돌아다니다가, 반려동물은 아픈 티를 낼 수 없으니, 주의깊게 관찰하고 병원에 데려가야 한다,고 조언하는 짤을 봤다. 물리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가지는 한계는 당연히 있다. 개나 고양이도 안다. 그걸, 억울이나 부당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다. 그건 문명 이전이기 때문에, 이걸 문명으로 교정할 수 있다는 것은 문명을 너무 과대평가한 게 아닌가. 

최재천의 아마존에서는 ( https://www.youtube.com/watch?v=YGDjMALcs7o ) 왜 여성살인자가 더 큰 형량을 받는지에 대해 말한다. 물리적으로 약하기 때문에 실패할 수 없기 때문에 치밀하게 계획하기 때문에 우발적 살인에 비해 더 큰 형량을 받고, 항소하지 않는다. 

남자는 어떨까. 사랑이 없으면 삶이 무가치하다는 이야기 가운데 리니지의 데포르쥬는 오웬의 기사가 되고, 결혼하면 월급을 아내에게 몽땅 맡기고, 사랑받을 수만 있다면 무엇이든 내어주는 서사 가운데 자신을 내던진다. 

특정하여 어떤 성별을 피해자라고 할 수는 없는데, 할 수 있다고 여성이 피해자라고. 인정하라고 한다. 나는 인정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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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이 남의 심부름으로 멀리 가서 빈방에 혼자 있는데, 밤중에 귀신이 송장 하나를 메고 와서 그의 앞에 던진다. 이내 뒤를 이어 다른 귀신 하나가 따라와서 앞의 귀신을 꾸짖되 "이 시체는 나의 것인데 어째서 네가 메고 왔느냐?"하니, 앞의 귀신이 답하기를 "이것은 나의 것이므로 내가 메고 왔다"하였다. 그러나 나중의 귀신이 말하기를 "이 시체는 실로 내가 메고 왔다"고 하여 마침내 두 귀신이 서로 시체의 팔을 하나씩 잡고 다투다가 먼저 귀신이 이렇게 제의를 했다. 

"여기 인간이 하나 있으니 그에게 물어보자."

이 말에 따라 나중의 귀신이 물었다. 

"이 시체는 누가 메고 왔는가?"

그 사람이 생각하기를 "이 두 귀신은 힘이 센데, 사실대로 말해도 내가 죽음을 당할 것이요, 거짓을 말해도 죽음을 당할 것이다. 어차피 죽음을 당할 것이라면 거짓말을 해서 무엇하랴" 하여 사실대로 "그 시체는 앞의 귀신이 메고 왔다"고 하였다. 

그러자 나중의 귀신이 화를 내어 그 사람의 팔을 뽑아 땅에 던져 버리니, 먼저 귀신이 시체의 팔 하나를 뽑아다가 그에게 붙여주어 멀쩡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하여 두 팔, 두 다리, 머리, 허리 등 온몸을 모두 시체의 것과 바꿔놓은 뒤에 두 귀신은 뽑아 버린 사람의 몸을 다 먹고 입을 닦으면서 어디론가 가 버렸다. 

이 때 그 사람이 생각하였다. "나는 지금 어머니가 낳아 주신 몸을 몽땅 두 귀신에게 먹히고, 나의 이 몸은 몽땅 저 시체의 것이니, 나는 지금 몸이 있는 것인가, 몸이 없는 것인가? 몸이 있다고 하자니 모두 귀신에게 먹히었고, 몸이 없다고 하자니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있지 않은가?"

이렇게 걱정하기를 마치 미친 사람 같더니, 이튿날 아침에 길을 떠나 가다가 목적한 국토에 이르렀는데 불탑과 스님들이 있었다. 그는 찾아가서 다른 말은 하지 않고 오직 "자기의 몸이 있는가, 없는가?"만을 물었다. 비구들이 도리어 묻기를 "그대는 누구인가?"하니, 그는 "나도 사람인지 사람이 아닌지 모르겠소"라고 하면서 지난 일을 자세히 이야기하였다. 

비구들은 그 사람이 무아의 도리를 잘 알아서 제도하기 쉬울 것을 알고 그에게 말했다. 그대의 몸은 본래부터 항상 나가 없었다. 새로운 사실이 아니다. 다만 사대가 화합하기 때문에 내 몸이라는 생각을 내었을 뿐이니, 그대 본래의 몸이 지금의 것과 다름이 없다." 비구들이 제도해 주니, 도를 닦아 번뇌를 끊고 곧 아라한을 이루었다. 이것이 때로는 남의 몸에 대하여 나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너와 나를 구분하여 나가 있다라고 말하지 못하는 도리이다. 


- 龍樹 造, 鸠摩羅什 譯 《大智度論》, 제12권, 《大正藏》

 용수 조, 구마나집 역 《대지도론》, 제12권, 《대정장》

p146~147, 동서양의 인간이해, 한자경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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