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설명을 이상하게 하니까 아들이 한참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최근에 질문을 했는데, 이게 너무 어려워서 또 이상하게 설명했다. 

주말에 과학토론 심사를 받고 자기보다 잘 한 친구때문에 풀 죽어서는 이마트에 가자고 나선 길이다. 아들은 전기가 이상하다면서 질문을 했다. 

"있잖아. 전기에서 움직이는 건 전자잖아? 전자는 음극에서 양극으로 가는데, 전류는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른다고 하잖아? 우리는 이제 움직이는 건 전자라는 걸 아는데, 왜 흐르는 건 양극에서 음극이라고 하는 거야?"

"..."

"..."

"... 음. 과학의 설명은 어차피 다 헛소리야. 우리가 차를 타고 달릴 때 창밖을 보면 막 나무가 뒤로 가는 걸로 보이잖아. 그러니까 티비에서 차타고 달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차는 가만히 있고 옆에 배경을 움직여서는 우리가 그렇게 보게 하잖아. 사람들은 마이너스가 움직이는 걸 못 본 거야. 움직이는 건 마이너스지만, 플러스만 보고 있으니까 아 전류는 양극에서 음극으로 흐르네,라고 보고 다음을 다음을 설명하는 이야기들을 만든 거야. 그러고 나니까, 나중에 아 진짜 움직이는 건 마이너스를 가진 전자네,라는 걸 알아도 뒤에 이야기가 너무 많아서 어쩌지 못하는 거야. 설명이 이대로 남아 있어도 잘 설명이 되니까."

"뭔가 이상한데." 

"그렇지."

"전자도 2,8,16? 뭐 이런 식으로 첫 궤도에는 두 개, 두번째 궤도에는 8개, 그 숫자가 들어차야 안정되잖아. 그러니까, 두번째 궤도에 여섯개밖에 없으면 다른 데서 두 개 가져오거나, 여섯개를 버리나?"

"다른 거랑 손을 잡지. 그러면 좀 궤도도 바뀌고 안정감도 바뀌고. 그러니까, 화학적 성질이 비슷해지는 거 같은 게 생기지."

그런 게 그저 다 이야기라는 걸, 언제 알게 되려나. 그게 다 이야기이고, 실상은 구름처럼 흐릿하고 불투명하다는 걸 받아들이게 될까. 

아직은 선명해서 과학이 재밌을 텐데, 내가 너무 일찍 이야기를 혼돈에 밀어넣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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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24-04-23 12: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에게 과학설명을 하실수 있다니 별족님 참 대단하셔요^^
 

오랜만에 집에 온 큰 아이가 일찍 깨서 같이 집을 나선 날, 차 안에서의 말들이다. 

아이는 다자이 오사무의 '인간실격'을 읽는 중인데, 갑자기 

"아비지옥이 뭐야?"

"모르겠다. 지옥이 여러개인데"

"나태지옥밖에 모르겠네. 에이, 검색할께."

폰으로 검색해서 나온 아비지옥,은 범어 아비치의 음차로 가장 큰 죄를 지은 죄인이 가는 지옥으로 고통의 간극이 없이 계속되는 무간지옥과 같다, 고 나왔다. 

"무간지옥이랑 같은 거네."

"그런데 고통에 간극이 없어? 그러면 그게 고통인가?"

"고통이 고통이려면 고통아닌 순간이 있어야 하는데, 쭉 고통이면 익숙해지는데. 고통에 간극이 없으면 고통이 고통인 줄 모르게 되는 거라서 거기는 그냥 무척 권태로운 지옥인가?

"에? 최악의 죄를 저지른 사람들이 가는 지옥인데 고통이 없다고? 이상한데."

"이상한가?"

그러면서 책의 그 대목을 잠깐 읽어주는데, 역시 사람 생각은 거기서 거기네, 싶었다. 

고통이 간극이 없이 계속된다,는 말은 고통이 최대치를 늘 갱신하면서 상승하는 것인가, 그래야만 고통을 고통으로 인식할 수 있는 거다,라고 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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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시민'이라는 말이 좀 웃기다. 

'시민의식을 보여달라'는 어떤 종용을 들으면 콧방귀를 흥, 뀌고는 '나는 면민인데, 메롱'한다. 

촌년,이라는 말도 들었고, 내 자신이 그걸 감추려고 한 적도 있기는 하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시민이 아니라서 좋다,고 생각하고 있다.


아이를 도시 아닌 곳에서 키우는 것에 걱정을 많이들 한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지만 아이는 도시 아닌 곳에서 자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도시는 분업으로 굴러가는 곳이라, 도시에서 자라는 아이는 온전하게 스스로를 책임지는 어른이 되지 못한다. 

도시 밖에서 먹을 걸 가지고 들어와서 도시 안의 쓰레기를 도시 밖으로 밀어내는 존재들이 거대한 허영과 우쭐함으로 스스로를 부풀리는 도시에서 사는 마음은 어리석음이 고양된다. 


그런 면에서 서양은 도시국가 이상이 되지 못했다고도 생각한다. 자국민의 불만을 식민지로 해소하는 마음은, 작지. 내가 하지 못하는 일은 신이 해 주십사 하는 마음도 어리기 짝이 없지.  



1. 춘추전국이야기 1 : 춘추의 설계자 관중


나는 관중이 '촌놈'이라는 게 마음에 들었다. 


필자가 관중에 대한 고적을 찬찬히 검토하면서 얻은 결론은 두 가지다. 하나는 관중이 근본적으로 심성이 착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는 관중이 처음부터 끝까지 '야인野人' 곧 촌놈이라는 사실이다. 순자는 공자의 말을 빌려 관중이 천자를 보필할 교양인이 아니라 예를 모르는(교양이 없는) '야인'이라고 평했다. 관중은 소인이 아니라 야인이다. 고대에서 야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도성 밖의 사람, 곧 귀족이 아니라는 뜻도 있다. 그런데 도성에 기반을 두지 않은 인간이 오히려 패업의 드라마를 연출했다. 역시 큰 인물이 되려면 뛰어난 야성을 가져야 하는 것일까? 순자의 의도와는 물론 다르지만, 점차 야성을 잃어가는 현대인이 듣기에 '야인'이라는 말은 꽤 매력적인 말이 아닌가? -p166


 공자가 보는 관중은 어떤 사람인가? 공자는 예를 목적으로 보고 극히 중시하지만, 관중은 예를 다만 도구로 보았다. 예를 근본으로 하지 않는 사람은 공자가 말하는 진정한 교양인이 될 수 없다. 그러나 관중은 예에서 엄격하지 않지만 근본적으로 '착하다'(仁). 공자도 그것을 인정하고 있다. 공자 스스로 관중이 인하다고 했는데, 공자가 보는 인은 예에 비해 어떤 것일까? 

 사람이 되어 인하지(착하지) 않으면 예는 알아 무엇 하며 음악은 알아 무엇하리요[人而不仁如禮何 人而不仁如樂何]? - 『논어』「팔일 八佾」-p171


도시인의 세련된 친절함이 도시라는 문명 밖에서도 유효할 수 있을까, 삐딱한 마음으로 본다. 자신의 주장에 따르는 불편이 자신에게는 올 리 없다는 음흉한 마음을 감춘 어린애같은 존재들이라고도 생각한다. 


2. 유교와 여성

https://blog.aladin.co.kr/hahayo/15272244


'시민사회'나 '공공 영역'의 개념은 서구 자유주의 전통의 발명품이다. 그리고 '시민사회'의 존재를 [이상적인] 규범으로 가정하는 것은 사실상 서구의 역사적 현실을 비서구사회의 이상화된 발전 경로로 투영하고 결과적으로 대안적인 발전 모델의 가능성을 배제한다. - 53%


이런 대목을 만난다. 계속 다르다고, 심정적으로 부인하려는 어떤 태도에 대한 해석이 가능한 대목은 아닌가 생각한다. 


왜 저렇게 싸운대? 싶은 서양의 날 선 태도들을 구경하면서, 억압이라면 억압일 나의 사고방식에 대해 계속 생각한다. 그걸 왜 드러내려고 하는 거야? 같이 살아가는 데 그게 그렇게 중요해? 같은 믿음들을 구경한다. 이슬람교도가 이슬람복식을 유지하지 못하는 한국은 억압적인 거라는데, 억압은 뭔가, 싶기도 하고 말이지. 


3. 논어 

和以不同(화이부동)을 크게 인상깊게 본 적은 없었다. 어디에라도 들어본 듯한 논어의 말들, '子曰, 君子矜而不爭, 羣而不黨'(자왈, 군자긍이부쟁, 군이부당, 군자는 스스로를 자랑스러워하나 다투지 않고, 모이지만 무리를 짓지는 않는다)의 의미를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지금의 대치상태를 보고 있으면, 어떤 말들은 그저 파벌을 만들어 자신의 이익을 탐하는 것의 그럴 듯한 포장지인가 싶다.


같이 살아가기 위해, 무슨 태도가 필요한가. 

국가를 경영하는데 무엇이 필요한가. 

함께 이야기 하기 위해 필요한 대전제는 무엇인가. 

어떻게 같이 살아갈 것인가.  


동아시아에서, 무리를 가족수준으로 쪼갰기 때문에, 국가가 가능했다. 

춘추전국의 피뿌리는 혼란 속에서, 살아남은 정치철학이 유학이다. 그 유학을 통치 이념으로 삼은 이상국가가 조선이다. 

모든 인간은 군자라는 이상적인 인간이 되기 위해 노력하며 살아간다. 자신의 선택에는 명분이 필요하고, 명분의 대결인 정치의 장이 세 대결이 되지 않도록 노력한다. 파벌을 이루지 않은 군자인 개인들은, 명분의 대결 가운데 더 그럴 듯한 명분을 선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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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를 보다가, 불화하는 부자관계와 이 때문에 촉발되는 부부관계의 갈등묘사를 만났다. 


[혼례대첩]에서 절대 악의 축은 정경부인인데, 남편보다 정치적으로 뛰어난 인물로 묘사된다.  ( https://program.kbs.co.kr/2tv/drama/thematchmakers/pc/detail.html?smenu=e126f2 ) 세자의 혼사를 막고, 자신의 조카인 대군을 세자로 만들려고 하고, 더하여 이전에 이미 세자를 독살하려는 실패한 음모를 꾸미기도 했다. 그런데, 정치적 야심가인 정경부인은 시끌벅적한 성혼의 소동극 가운데, 정치적 동지이자 대외적인 자신의 대리인인 남편이 자신의 아들을 살해했다는 걸 알게 된다. 부인은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남편을 살해한다. 정치적 판단,으로 묘사되지 않는다. 자신의 아들을 살해한 남편에 대한 분노가 묘사될 뿐이다. 남편은 아들을 살해했고, 아내는 남편을 살해한다. 


[밤에 피는 꽃]에서도 절대 악의 축인 좌의정은 정치적으로 갈등하는 선왕을 시해했다. 선왕은 좌의정을 피해 자신의 군대에 임무를 주어 궁을 내보냈다. 좌의정은 밀명을 받아 길을 나선 왕의 군인 중 한 명의 누이를 자신의 며느리로 삼는다. 단, 아들은 이미 자신의 사랑을 찾았다며 집을 나간 뒤이니, 이 며느리는 며느리라기보다 인질이다. 자신의 아들을 아내에게 죽었다고 하고, 집을 나가는 아들에게 다시 돌아오면 죽인다고 한 뒤다. 아내에게 죽었다고 한 아들이 15년만에 돌아와 자신의 자리를 찾으려 한다. 좌의정에게 이는 용납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어머니는 남편이 찾고 있다는 말을 믿었고, 아들이 죽었다는 말도 믿었다. 이제 살아돌아온 아들을 기쁘게 끌어안으며, 자신이 자리를 비운 사이에 아버지와 아들이 어떤 날선 말을 주고받는지 아예 모른다. 


부부 사이의 비밀은 어디서 생기는가. 

왜 아버지는 아들과 불화하는가. 

왜 이야기는 이런 상황들을 묘사하는가. 

고릴라 이스마엘을 읽고, 서양의 이야기들이 더 피와 살이 튄다,(https://blog.aladin.co.kr/hahayo/603247 ) 고 생각했다. 피와 살이 튀는 동물적인 이야기 가운데, 부친 살해의 서사 가운데, 앞으로 나아간다. 예수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태어나는 이유는, 부계를 단절하기 위해서이고, 시간축이 사라진 서양의 서사 가운데, 아들인 단독자는 아버지를 죽여야만 자신의 세상을 가질 수 있다. 

문명을 말하는 동양의 이야기들은 긴 시간축에 가문을 만들고, 효와 충을 말한다. 자신의 세상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아들이 아비와 적대하는 것은 자연인가? 

어미가 딸과 적대하는 것은 자연인가?


자연을 거스르기 위한 문명으로 효가 필요했던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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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과에서 진료를 기다리면서 꺼낸 그림책에서 보고 반가웠다. 어디선가 들었거나 본 적이 있는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다.


양반이 머슴을 부린다. 

세경 주는 게 너무 아까워서 실컷 부려먹고는 딱딱한 누룽지를 세경대신 준다. 

머슴은 별 말없이 누룽지를 받는다. 

전쟁이 터지고, 양반과 머슴은 귀한 것들을 챙겨 피난길에 오른다. 

집문서와 땅문서와 금붙이를 챙긴 양반과 그 동안 받은 누룽지를 챙긴 머슴은 고된 피난길을 함께 걷는다. 피난길에 양반은 집문서와 땅문서와 금붙이를 누룽지와 바꿔 먹는다. 

전쟁이 끝나고, 이제 누룽지는 그렇게 귀하지 않고, 양반은 집문서와 땅문서와 금붙이가 아쉬워서 다시 머슴에게 말한다. 


"그건 돌려줘야 하지 않겠느냐."

".....그러지요."


언제나 그러지요,라고 대답할 수 있는 머슴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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