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르세르크 15
미우라 켄타로 지음 / 대원씨아이(만화) / 200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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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집을 비운 사이 또 장편의 만화를 집에 들여놓았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산 것도 아니고.

내게 물어본 적이 있다. 이걸 살 생각인데, 어떻겠냐고. 나는 친구 집에 놀러갔을 때 그 집 화장실에서 딱 한 권을 본 적이 있다. 보고 남은 기억은, 잔인하고 징그럽고, 포악하다는 것. 그 기억 때문에 나는 반대했다. 그러고 나니, 잠깐 참았을 뿐이고, 내가 집을 비운 사이 들여놓은 것이다.

이미 집안에 있는 것, 나도 읽기 시작했다. 그 기억 그대로, 그림은 까맣고, 기형의 괴물들이 출몰하며, 괴물은 여자를 강간하고 남자들을 잡아먹는다. 19세이상에게 허락된 만화들처럼, 여자들은 지나치게 글래머이고, 사람들의 몸통은 뎅강뎅강 두동강난다.

악몽을 꾸겠다고, 이런 만화책을 보겠나, 싶기도 했지만, 사실, 줄거리는 탄탄하고, 짜임새는 치밀하여 참을 만 하다. 욕망앞에 유약한 인간들, 에 대한 이야기이고, 무언가에 지나치게 매달리는 -그것은 선과 악으로 구분할 수조차 없다- 인간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베르세르크 뜻을 물어도 대답해주는 사람이 없어서-사실, 책 주인에게밖에 묻지 않았다-, 혹시 영어일지도 모른다고 검색하였다. 영어 맞다.  

berserk [bəːrsə́ːrk, -zə́ːrk, -́-] a., ad.
광포한, 맹렬한; 광포하게.
㉺go [run] ∼ 광포해지다, 난폭해지다.
㉺send a person ∼ 아무를 난폭해지게 하다

'재미있으나 광폭한'나의 감상은 지독히도 정확한 것이, 광폭하지 않다면 '베르세르크'가 아니었겠지, 싶다.(사전은 한컴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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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사라 BASARA 1 - 완전판
타무라 유미 지음 / 서울미디어코믹스(서울문화사) / 200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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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사라를 읽는 것은 이번이 두번째다. 처음 읽은 것은 대학생일 때, 같은 기숙사에 살던 언니랑 만화방에 가서는 그 언니가 골라주길래 읽었었다. 그게 벌써 십년쯤 전 일이다. 그래서, 신랑이 주문해 온 이 책에 손이 가지 않았다.

"무수정, 무삭제 완전판이래."

그래, 읽기 시작했다. 나의 먼 기억에 바사라는 어땠냐면 재밌게 읽었음에도 흠잡기 좋아하는 성품이 흠결을 찾아낸 그런 만화였다. 모험물, 나라의 형태를 나열한 모험을 계속하는 만화였다고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그만 좀 돌아다니지,라고 속말을 했었나보다.

다시 읽으면서 가장 놀란 것은 이 만화의 배경이 '일본'이란 것이었다. 먼 미래의 일본이 이 만화의 무대이다. 먼 기억이 전혀 그걸 알아차리지 못했기 때문에, 나는 언니에게 확인했다. 그때 거기는 일본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 만화가 '무수정'으로 나왔다는 말이다. 배경이 일본이라니, 이 흥미진진한 혁명의 이야기가 다르게 읽힌다. 이 작가는 자신의 나라에 이런 이미지를 그린단 말인가. 영락없는 아라비아의 이미지, 중세 공주님의 이미지, 기사의 이미지, ... 무국적 혼성의 자유로운 상상력이 만화의 장점이라면 장점이고, 만화 속 남녀가 얼마나 그 인종이나 민족을 닮았는가는 역시 중요한 문제가 아닐 텐데도, 공연히 안쓰러운 심사가 되는 것이다. 

먼 기억 이 만화에 후한 점수를 안 준 이유는, 내가 먼저 '아르미안의 네딸들'을 읽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비슷한 서사구조는 얼마든지 있다. 여자가 주인공인, 운명의 별이나, 조력자, 지나치게 선량한 주인공. 그것은 누가 먼저인가,의 문제일 수도 있다. 하지만, 어쩌란 말인가, 내게 이 만화는 재미있었지만, 조금은 식상한,으로 기억되고 있으며, 다시 읽고 있는 지금도 조금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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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릴라 이스마엘
다니엘 퀸 지음, 배미자 옮김 / 평사리 / 200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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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런 종류의 책을 잘 읽지 못 합니다. '학'적인 책으로 그런데로 선택하는 것은 가끔 '여성학'이라던가, '심리학' 종류인데, 그런 것도 나름대로 쉽다,던지 재밌다,던지로 유명한 책들만을 겨우 읽을 수 있습니다. 생태학 책으로는 '생태학을 잡아라'라는 책을 읽은 적 있고, '에코 페미니즘'이란 책을 읽은 적이 있지요.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작년 11월 말까지 이런 책들 독후감 공모가 있어서 응모할까, 하고 샀습니다. 그런데, 마감일까지 읽지를 못했습니다.

그렇게 천천히 읽었으면서, 누군가 물어보면 '절대로' 재미있는 책이었다고 자신할 수 있습니다. 읽는 내내 아주 흥미진진하였습니다. 속도가 나지 않았던 이유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이스마엘과 책 속의 내가 질문하고 답하면서 나아가는 그 지적인 행로에 내가 동참하는 방식은 그것뿐이었습니다.

매번 다른 국면에 마주치면서 생각해야 했습니다. 그만큼 나아가면서 또 그만큼 생각해야 하는 거죠. 그리고 책의 마지막장을 덮은 지금도 여전히 생각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이야기가 공연되는 세상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가기를 택해야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리고, 대답하게 됩니다. 이스마엘이 조금은 서둘러 끝내버린 것처럼 나는 대답할 수 없다고 말하게 됩니다. 이스마엘이 남긴 화두 '인간이 사라지면 고릴라에게 희망이 있는가' 또는 '고릴라가 사라지면 인간에게 희망이 있는가'에 나는 충분히 동의하지만, 그걸 알게 되고 삶의 방식으로 선택했을 때 하나하나 선택의 국면에 대답을 찾을 수 없습니다. 여전히 인류에게 편협한 애정을 가진 나는 죽어가는 아프리카의 어린이를 위해 성금을 보내어, 제 1세계에서 사라진 어떤 생명체의 빈자리에서 자라난 농산품을 또 많은 생명체를 위협하는 운송수단들을 통해 이동하게 할 것입니다. 불치의 병에 대한 치료를 원하는 누군가에게 '신은 모두를 위해 지구를 만드셨고, 삶과 죽음은 신의 일'이라고 그래서 동물을 이용한 신약개발을 더이상 할 수 없다고는 못할 것 같습니다. 내내 이스마엘이 내게 가르친 것이 결국은 이런 식이 되어버립니다.

그러다가는 어느 순간, 이건 다른 식으로 읽힐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다른 이야기가 공연되는 삶은 전 생태계의 측면에서는 풍요로울 것입니다. 그렇지만, 인간에게만 이기적인 지금의 문화가 약한 '인간'을 보살피라고 하는 것에 저는 여전히 끌리고 있습니다.   

이스마엘은 훌륭한 선생님입니다. 그렇지만, 저와는 다른 배경을 가졌기 때문인지 이 훌륭한 선생님의 말씀은 잔인한 상상들을 불러 일으켰습니다. 언제나처럼 서양의 이야기들은 분명히 좀 더 피와 살이 튀는 것으로 읽힌다,는 것입니다. 오독한 누군가가 지금의 경쟁적인 과학발전을 인간 종간의 진화를 위한 경쟁으로 받아들인다면, 더더욱 속도를 늦추지 않겠구나, 무기들을 포기하지 못하겠구나, 하는 식으로 말입니다.

제가 언제나 무서워했던 것은 아주 작은 그룹이었음에도 모두를 살육하던 역할맡은 자들,이란 존재였기 때문에, 지금 제 배경에서는 그게 '서양인'들이었기 때문에, 제가 다시 이 훌륭한 선생님이 가르쳐 준 삶으로 돌아갈 자신이 없습니다. 혹은 그 삶을 크게 이야기할 수 없습니다. 그건 '동양인'인 저에게는 피해자의 기억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생각합니다. 가해자인 '서양인'이 이 삶을 택할 수 있다면 저는 원래 그런 사람이었다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읽지도 않고, 그건 내 책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 '육식의 종말'처럼 말입니다. 기독교를 배경으로 카인의 역사를 이어온, 제국주의와 침략전쟁을 계속해온, 세상을 쪼개어 과학이라 이름붙인 사람들에게 참으로 훌륭한 교과서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겐 다른 책이 필요한 것은 아닐까, 생각합니다. 논리적이지만 무서운 책이었습니다. 논리적이어서 설득되었지만, 그 길로 나를 당기기에는 무언가 끌림이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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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울의 움직이는 성 2 - 양탄자 상인 압둘라 하울의 움직이는 성 2
다이애나 윈 존스 지음, 김진준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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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기 시작하고 얼마 안 있어, 나는 이렇게 말했다.

'이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 아냐, 전혀 다른 이야기인걸' , 그렇지만, 다 읽고 나서, 그렇지 않다는 걸 알았다.

이건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2번째 이야기가 맞다. 그렇지만, 다른 방식으로 이동하여, 하울의 움직이는 성,이나 하울, 소피는 조연이 되고, 이 이야기의 주연의 단연 압둘라이다. 1권이 중세 유럽을 연상시킨다면 2권은 아라비안 나이트,를 연상시킨다. 시작도 그렇고, 많은 부분, 양탄자 상인 압둘라, 술탄과 하늘을 나는 양탄자, 공주를 납치하는 마신들, 소원을 들어주는 호리병 속의 거인, 사막의 도적떼까지.

귀엽고, 사랑스러운 소설이다.

1권의 소피가 모자에 말을 걸었다면, 2권의 압둘라는 하릴없는 공상으로 행복해하는 사람이다. 자신이 납치된 왕자라거나, 아름다운 공주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름다운 정원을 가진 궁전을  지을 거라는 따위의.

읽다가 무척 재치있고, 즐거워지는 순간이 있었다.

압둘라가 여행의 일행 중에 자신의 위치를 가늠하며 절망하는 순간이라던가, 압둘라가 자신의 용기를 칭찬하는 말들에 당혹해 할 때 누구나 자신이 항상 인정할 수 있는 칭찬의 말을 듣는 건 아니라는, 그러니까 기꺼이 받으라는 식의 조언을 듣는 순간이라던가.

1권이 자신의 운명을 '패배자'로 규정한 소녀가 그런 운명따위 없다는 이야기였다면, 2권은 운명이 작동하는 기이한 방식에 대한 이야기,라고 불러도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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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요나라, 갱들이여
다카하시 겐이치로 지음, 이승진 옮김 / 향연 / 200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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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설에 단호하게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사람은(이제는 그런 사람도 없는 듯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 부분을 맛볼 수 있는 감수성이 없는 것이다'라고 씌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분명히 '없는' 사람입니다.


처음부터 끝까지 아니었다고 하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해설까지 읽어야 했고, 옮긴이의 말까지 읽고, 지은이의 약력까지-보통의 약력보다 훨씬 구구절절한'상금을 경마에 쏟아붓겠다,고 말한 인터뷰가 화제가 되었다'까지를 포함한- 읽어야 했습니다. 이런 것을 다 읽고, 그나마 작가가 제 정신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면, 역시 나는 감수성이 없는 것입니다.


1부는 제게도 그리 이상하지만은 않았습니다만. 2부와 3부로 넘어가면 역시 감당불가입니다. 저는 역시, 다른 방향으로 작동하는 감수성을 가졌나 봅니다.


신기한 것은 그런 데도 여전히 '우아하고 감상적인 일본야구'란 책을 읽어보고 싶어한다는 것입니다. 기이한 호기심으로요.


소설은 해설이나, 옮긴이의 말을 못 들은 체하고 본다면 백일몽같았습니다. 좀 비릿한 꿈이요. 미성년자 관람불가의 장면이 비관적으로 등장하는, 구멍난 육체가 말을 하는, 문장으로 쓰였기 망정이지 화면으로 보이는 것이라면 악취미라고 꺼버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문장이라서 몽환적인 기분이 됩니다. 앞뒤도 없고, 사물과 사람의 구분도 없고, 삶과 죽음의 구분도, 추상의 것과 실존의 것조차 구분되지 않는 이상한 나라에 던져진 기분이었습니다.  쓰여진 데로 상상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처럼도 보였습니다. 혹은 현실속의 그것을 상상하지 말라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피와 살이 튀는 상상을 하면, 그 다음이 이상한, 그래서 내가 그 말이 의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런 것을 그릴 수 없는 이상한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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