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1 - 사랑의 여러 빛깔, 개정판 이문열 세계명작산책 1
바실리 악쇼노프 외 지음, 이문열 엮음, 장경렬 외 옮김 / 무블출판사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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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의 기숙사 방에서 읽은 기억이 있다. 어떻게 구한 책인지는 모르는데,  강렬하고 불투명한 기억으로 남아 있었다. 사랑이 무언지 한창 궁금하던 때라서, 그런 인상이었던 걸까. 단편선의 제목처럼 사랑의 형태란 참으로 다양하구나, 라고 생각했던 걸까. 열병이나 교통사고 같은 사랑 뿐 아니라, 있는 듯 없는 듯 하면서도 애달픈 그런 사랑도 있다고 생각했을까. 

다시 나와서 구경하면서 책을 검색했는데, 처음부터 전체가 검색된 게 아니라 단편이 따로 따로 묶여서 전체 한 권보다 싸게 나온 걸 본 거다. 욕을 하면서 다운 받아 본 첫 이야기는 '달로 가는 도중에'였다. 무언가 아련하게 슬픈 사랑,으로 기억하고 있었던 걸까. 그게 첫 이야기여서 였을까. 사건이랄 것은 별로 없는, 몸은 다른 여자랑 섞으면서, 마음은 다른 여자를 쫓는 남자의 이야기를 읽었다. 사건이랄 것은 없고, 무언가 사랑이라 부를 만한 것이 있는가 싶으면서도 그것도 사랑이라면 사랑이겠지,라면서 읽었다. 

나중에 전체가 한 권으로 나온 이북도 있다는 걸 알고 다시 다운받아서 순서대로 읽었다. 개정판을 내면서 추가로 넣은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슌킨 이야기'는 앞쪽에 오 헨리의 '잊힌 결혼식'은 맨 마지막에 있다. 

사랑이 존재하는 것인지도 의심스러운 이야기-'슌킨 이야기'- , 한 번 만나지도 못하면서 마음만 홀로 커지는 이야기-'환상을 쫓는 여인', '달로 가는 도중에'-, 만났어도 일방인 이야기-, '별'- , 일방이 아니었어도 서로의 색깔이 다른 이뤄지지 못한 이야기-'르네'- 사랑했으나 결국 이뤄지지 못한 이야기-'임멘호수'- ,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살아가지만 영원하지도 격렬하지도 않은 이야기-'사랑스러운 여인', '잊힌 결혼식'-, 남녀간의 정염과 다른 종류의 사랑이 결투하는 듯한 이야기-'바니나 바니니'-, 강렬하고 지독하고 어긋나 죽음에 이르게 하는 이야기-'에밀리를 위한 장미', '라이젠보그 남작의 운명'-도 있다. 

돌이켜 스무살 무렵의 나에게 예방주사 같았다,고 생각한다. 격렬하고 기이한 이야기들만 가득 차 있었다면, 아마도 그런 사랑이 두려워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는 환상으로 커지는 사랑만을 품고 두려움에 살았어도 역시 삶을 살아내지 못했을 지도 모른다. 격렬하지 않더라도, 이뤄지지 않더라도, 사랑이라고 이름붙이기 애매하더라도, 애국심에 자리를 양보해야 할지라도,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고, 이야기로도 남을 수도 있다,고 내 이야기는 내가 쓰겠다고 마음먹을 수 있게 한 것도 같다. 사랑은 제목처럼 여러 빛깔이고 어떤 이야기를 쓸 지는 내가 고를 수도 있다고 이야기들 가운데 즐거웠다. 

재미있었어. 다시 읽어도 역시 재미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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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김동인 붉은 산
김동인 / 북위드미 / 202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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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할 수 없는 사람을 만났을 때 늘 '삵'생각이 났다. 그러고도, 다시 읽어볼 생각을 아주 오랜만에 했다. 검색했더니(https://namu.wiki/w/%EB%B6%89%EC%9D%80%20%EC%82%B0 ), 75년부터 88년까지 중학교 2학년 1학기 국어 교과서에 실렸었다고 한다. 내가 교과서에서 읽은 걸까. 책이 없던 어린 시절에 언니 책에서 읽은 걸까. 

어린 나는 삵이 무서워서 한참동안 '공동체의 규율을 무시하는 사람을 어떻게 제어할 수 있지? 삵,같은 사람을 어찌 피하지?' 고민했다. 그러고도 삵의 좀 이상한 죽음 때문에 삵에 대한 감정이 남았었나 보다. 영 모르겠는 사람이어서 잊히지가 않았다. 

나이 먹고 다시 읽었더니, 내 기억보다 삵이 괜찮아 보여서 놀라고(면전에서 험담을 하는 사람과는 시비를 붙지만 전해 들은 험담에는 '흥~'하고 만다고 했다), 공동체의 무력함에 놀란다. 삵에게도 어떤 제재도 하지 못하던 마을 사람들은, 역시 중국인 지주의 횡포에도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 평화로울 때는 같이 살기 좋지만, 위태로울 때 한 없이 무력한 사람들을 보고 있는 것은 답답했다.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서 더욱 그랬다. 그나마, 삵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었던가. 

다시 읽어도, 너무 짧아서, 그저 미스터리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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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 2022-09-21 16:0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소설 교과서에서 배운 세대인데.... ㅎㅎ (괜히 머쓱) 지금 생각 해 보니 국어 교과서가 그 때는 참 재밌는 읽을거리였던 것 같아요. 책이 귀해서였겠지요.

별족 2022-09-21 17:48   좋아요 1 | URL
어디서 읽었는지 기억을 못 하고 있었어요. 나무위키 검색결과를 보고 알았습니다.
 
[eBook] 헤어질 결심 각본
박찬욱 외 지음 / 을유문화사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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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못 보고 각본집을 본다. 

막 개봉했을 때 봤어야 했는데, 개봉 첫 주를 넘기고 나니, 작은 영화관 하나뿐인 동네를 벗어나 대도시에 가서야, 애매한 시간대에야 볼 수 있는 지경이었다. 

잉크가 번지듯 느리게 달뜨는 열광이 궁금해서 인터뷰도 블로그도 구경하고, 이북으로 각본집을 구해 읽었다. 늘 광고는 1부 위주라, 책 속에서 2부의 이야기를 알게 된다. 서래에게도 해준에게도 이입하지 못한 건조한 나는, 서래가 2부를 만드는 과정에 현실적 배경들을 궁금해한다. 노인을 돌보던 서래는 기도수씨의 연금을 상속하지는 못했던 건가, 따위의 생각을 하는 거다. 이건, 우영우,의 여파일 수도 있고 말이지. 서래는 기도수씨를 죽였지만, 법적으로는 무죄니까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게 아닌가, 그렇다면 굳이 왜 그런 나쁜 남자를 만나서 다시 또 결혼으로 걸어들어갔을까, 같은 생각을 하는 거다. 

사랑은 힘이 세다,라는 게 모든 이야기의 귀결이라고 생각하지만, 이 이야기는 내가 좋아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사랑은 힘이 세고, 그 사랑이 세상을 살 만하게 만든다,라는 이야기를 나는 좋아하지. 사랑은 힘이 세고, 위험하다,라는 이야기는 뭘까. 그러니까, 사랑을 조심하게 하기 위해서 필요한 걸까. 영화로 보면 다르려나. 그래도, 역시 단순하고, 유치하고, 주말연속극 수준의 아이들과 같이 볼 수 있는 정도의 감정을 선호하는 나는 굳이 찾아서는 안 볼 거 같구나. 

참, 검색하다가 '역시 난 istp(feat. 헤어질 결심 스포주의)'(https://cafe.daum.net/10in10/1pRl/1338441?q=%ED%97%A4%EC%96%B4%EC%A7%88+%EA%B2%B0%EC%8B%AC&re=1)라는 글을 보고 나도 istp인 건가, 잠깐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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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서양의 인간 이해
한자경 지음 / 서광사 / 200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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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가 평평해졌다고들 말한다. 국경이 의미가 없고, 모두 하나로 통한다고도 말한다. 세계화라는 거대한 흐름이 있고, 미국 팝문화에 열광하던 세계와 지금 한류에 열광하는 세계는 이미 하나라고도 한다. 그러나, 과연 그러한가. 책을 읽으면서 떠오르는 기이한 의문들 가운데서 이런 책들을 읽는다. 활자화된 책의 바닥에 흐르는 다른 생각에 대해 생각한다. 

나는 소설은 못 읽겠어, 라고 사회과학 책을 읽던 선배가 말하는 걸 들은 적 있다. 

과학,이라고 이름붙인 어떤 것과 소설 사이의 간극, 동양과 서양 사이의 간극은 스위칭이 필요하다. 생각의 지도(https://blog.aladin.co.kr/hahayo/2508428)라는 책을 읽을 때, 연구자는 실험 전에 피험자의 동양적 정체성을 상기시키는 행위를 하고 질문을 한다. 사람에게는 동양적 사고도 서양적 사고도 논리적 사고도 감성적 사고도 존재한다. 그 안에서 스위칭하고 입장과 태도를 선택하는 중인 것도 같다. 동양과 서양은 어떤 사고적 특성이 좀 더 고양되는 방식으로 특정한 태도가 비대해진 두 세계 같다. 

동양과 서양 사이의 커다란 틈, 그 틈에 대한 이야기다. 의식의 바닥에 깔려있는 대전제, 지금 마구 섞였다고는 하나, 여전히 영향력을 발휘하는 희랍, 기독교, 불교, 유가의 태도에 대해 설명하는 교과서적인 책이다. 시작하고 한참은 과학책인 것도 같다고 생각했고, 덮으면서 역시 과학이 현대의 종교라고도 생각한다. 


나중에 정리할 때 적어야지, 하고 붙인 포스트잇이 너무 많다. 그래도 정리하기로 했으니 정리한다. 


제1장 인간 존재의 근원


이렇게 해서 플라톤에 있어 우주 영원설은 부정된다. 우주는 영원히 있어온 것이 아니라 그 시작을 가지는 것, 즉 없다가 있게 된 것이다. ~ 이는 희랍인들이 존재와 무를 서로 뒤바꿀 수 없는 절대 모순적인 것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존재는 존재이고 무는 무이다.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는 것이기에, 있는 것이 없게 될 수 없고, 없는 것이 있게 될 수 없다고 본 것이다. 이것이 파르메니데스의 기본 명제이다. 그것이 존재의 원리이며, 신도 그 원리를 벗어날 수 없다. - p41~42,(희랍)


이것은 창조자와 피조물, 신과 인간은 질적으로 서로 다르다는 말이다. 이와 같은 인간과 신의 질적 차이의 강조, 따라서 무한하고 절대적인 신에게 인간 스스로는 결코 접근해 갈 수 없다는 인간 유한성과 무의 강조가 기독교적 인간 본질 규정의 핵심이 된다. 

그렇다면 기독교는 왜 굳이 신과 인간의 질적 차이를 그렇게 강조하는 것일까? ~ 정통 기독교에 따르면 창조자인 신과 피조물인 인간은 질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이며 따라서 그 둘 간의 직접적 교통이란 가능하지 않다. 그러므로 그 둘 간의 교통을 통한 인간의 구원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제3의 매개자가 요구되며, 그가 곧 예수이다. 따라서 정통 기독교에 있어 예수의 역할은 절대적이 된다. ~이처럼 신비주의는 정통 기독교와 달리 창조자와 피조물 간의 질적 차이 그리고 피조된 것들 간의 질적 계층적 차이를 인정하지 않으며, 따라서 질적으로 서로 다른 둘을 매개하는 구세주 예수의 역할을 그다지 중시하지 않는다. 예수는 철저하게 자신의 신성을 실현시킨 완전한 인간의 한 전형일 뿐이며, 인간은 누구나 다 본질적으로 예수와 다를 바가 없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급진적 사상으로 인해 신비주의는 정통 기독교에 의해 이단시된 것이다. 

정통 기독교가 존재 전체를 계층적 질서로 이해하는 것은 본문에서 인용한 아우구스티누스의 글에서도 볼 수 있는데, 우리는 그 안에서 중세 스콜라철학의 장을 여는 아우구스티누스의 사유가 한편으로는 희랍적 사유로부터 거리를 취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어쩔 수 없이 희랍적 사유의 맥을 유지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p55-57(기독교)


여기에서 불교와 기독교의 사유의 차이가 드러나는 것처럼 보인다. 기독교는 시간상으로 과거를 물어나가다가 무한소급을 끊음으로써 최초를 상정한다. 그러므로 신만이 존재했고 그 신이 우주를 만드는 '태초'가 논의되는 것이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가 그것이다. 공간상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공간을 확대하다가도 무한소급을 끊어 우주의 끝을 인정하고, 최소로 분석해 가다가도 무한소급을 끊어 더 이상 분할될 수 없는 최초의 입자적 존재를 인정하는 실체론적 사유이다. 이에 반해 불교는 무한소급을 인정한다. 불교에 있어서는 최초와 최후의 경계는 그을 수 없는 것이 되며, 모든 것은 무한한 순환관계 속에 있다. 무시 이래로 무명이 있고, 무시 이래로 유정이 있다. 이처럼 무한소급을 허용하므로 최초나 최후의 경계가 그어지지 않고, 경계가 그어지지 않으므로 일체의 존재는 경계지어지지 않은 것, 그 자신의 존재를 무로부터 구분지을 수 없는 것, 따라서 무라고도 유라고도 말할 수 없는 것, 한마디로 공이 된다.-p70-71(불교)


이런 의미에서 불교는 희랍이나 기독교와는 달리 사유될 수 없고 감각될 수 없으나 그 자체로 실재하는 순수 물질 또는 순수 질료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이것이 곧 서양의 유물론적 태도에 대비되는 동양의 유심론적 태도를 말해 주는 것이다. 순수 물질 또는 순수 질료의 전제 위에 주장되는 정신과 물질의 이원론은 신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인간 유정의 차원에서도 부정되는 것이다. 일체는 정신력 또는 의지적 활동성인 업력의 결과로서 생성되는 것이며, 따라서 그 업력이 지탱되는 유정의 식 또는 심 바깥에 그 자체 실재하는 객관 물질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일체는 마음이 만들어낸다"는 일체유심조의 유심론적 통찰이 초기 원시근본 불교에서부터 후기 여래장 사상에까지 이어지는 불교의 핵심 사상이 된다. 결국 이러한 유심론적 관점에서 불교는 인식과 존재, 정신과 물질, 마음과 세계의 이원론을 넘어서며, 그렇게 함으로써 우주 세간의 물질적 존재인 지수화풍을 일으키는 근본 힘을 유정의 정신적 업력으로 간주할 수 있는 것이다. 즉 아무 것도 없는 허공 중에 중생의 업력이 작용함으로써 무엇인가가 존재하기 시작한다고 보는 것이다. -p78-79(불교)


물질세계는 그렇게 인식하는 유정의 식에 대해 그 식의 경계로서만 존재하는 것이지, 그 식을 떠나 그 자체로 존재하는 객관적 실재가 아닌 것이다. 인간이 인식한 대로의 이 세계는 그렇게 인식하는 인간에 대해서만 그렇게 존재하는 것이지, 인간 아닌 다른 존재 예를 들어 개나 곤충 또는 천사에게도 바로 우리에게와 동일한 방식으로 존재할 것이라고 말할 수 없는 것이다. -p83(불교)


인간은 누구나 바르고 통하는 기를 가지고 있으므로 우주 이치를 자각하여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 그러나 이 앎은 단지 자기 자신만을 아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이루는 기를 알며 그 기의 근원이 되는 리 또는 태극을 앎을 의미한다. 즉 우주 전체의 이치를 아는 것이다. 이런 앎이 있기에, 인간에게 있어서는 선악의 도덕이 성립하게 되는 것이다. 인간이 보여야 할 도덕성은 곧 인과 의이다. 전체 존재 중에 나 아닌 것이 없다고 알고 느끼는 것을 인이라고 하며, 그에 따른 공정함을 의라고 한다. -p100(유교)


제2장 인간의 본질


그러므로 그러한 욕망에 무제한적으로 충실하다 보면, 인간 상호간의 배려인 도덕성의 여지가 들어설 수 없게 된다. 이에 반해 이성적 만족을 좆는 욕망이 고급한 욕망이 되는 것은 그것이 보편성을 지니기 때문이다. 나의 지식욕을 중족시키는 것은 그대로 너의 지식욕도 채워준다. 그겅은 서로 나눌 수 있는 것이며, 개체성을 떠난 것이다. 즉 사적이지 않고 보편적, 공적인 것이기에 보다 높은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다. 보편적이고 공적인 원리에 더 높은 가치가 부여되는 것은 그것만이 만인이 더불어 살 수 있는 이성적 사회를 건립할 수 있는 원리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p126, (희랍)


플라톤은 인간을 신체라는 감옥에 갇힌 영혼으로 이해한다. ~인간의 자유는 신체적 욕망으로부터의 자유로움을 뜻한다. 먹어야 하고 입어야 하는 것 등의 신체적 욕망에서 야기되는 자연필연성의 강제성으로부터 벗어나는 자유로움이 곧 인간 영혼의 자유이다. 이는 곧 신체적 욕망을 벗어나 이성 그 자체로 존재하게 됨을 뜻한다. 그러나 영혼이 신체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신체를 벗어남으로써만 가능한다. 영혼이 육체를 완전히 벗어나는 것, 그것은 곧 죽음이다. 철학이란 아직 죽지 않은 상태에서 죽어서나 가능한 자유를 최대한 실현하고자 노력하는 것이다. 즉 이성적 보편적으로 사유하며 그 이성적 원리대로 살아가는 것을 훈련하는 것이다. 인간의 개체적 욕망을 넘어서며 욕망의 필연성으로부터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이란 한마디로 죽음의 연습이다. - p128~129(희랍)


내가 흙으로 빚어 인형을 만들었다면, 그 인형이 어찌 그 스스로 나를 알아볼 수 있겠는가? 신이 흙으로 빚어 만든 인간 역시 신에 대해서는 인형이 인간에 대해 그러하듯 한없이 미련한 존재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 미련한 지혜를 내세우는 것은 더욱더 미련한 짓일 뿐이다. 창조자로서 신과 피조물로서의 인간으로 질적으로 서로 다른 존재이므로, 인간은 지혜로써 신에게 다가갈 수 없다. 오히려 그러한 질적 차이와 인간 자신의 유한성을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인간적 척도와 기준, 인간적 이성과 사변 등을 모두 내버리고 전폭적으로 무릎 꿇을 때, 신이 손을 내밂으로써만 인간이 구원받을 수 있는 것이 된다.- p133, (기독교)


불교의 출발점은 우리의 인생은 고통스럽다는 것이다. 태어나 늙고 병들고 죽는 것이 괴롭고,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야 하고 싫은 사람과 만나야 하는 것이 괴로우며, 구하나 얻지 못하는 것이 괴롭다. 이러한 인생의 고통은 무엇에서 비롯되는가? 불교는 인생의 고통은 바로 집착에서 비롯되며, 모든 집착의 근저에는 곧 자아에 대한 집착, 즉 아집이 놓여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아집은 그렇게 집착할 만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우리의 무지, 즉 무명에 기반하고 있다는 것을 설한다. 종교로서의 불교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바는 해탈이다. 고통과 번뇌의 근거인 아집으로부터의 벗어남이 그것이다. 심정적 정서적으로 번뇌를 벗어나는 해탈을 심해탈이라고 하고, 지성적 이지적으로 무명을 벗어나는 해탈을 혜해탈이라고 한다. 결국 해탈에 이르는 길은 집착할 만한 자아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무아를 깨닫는 것이다.-p141, (불교)


일반적으로 우리는 자아의 정체성이 팔이나 다리 또는 몸통에 놓여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으므로 그것을 남의 것으로 대치해도 나는 나라고 생각할 것이다. 단지 나의 머리, 즉 두뇌만은 나의 본질이기에 남의 것으로 대치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따라서 이 비유에서 머리를 뒤바꿨는데도 동일한 자기 의식이 유지돤다는 것은 말이 안 된다고 반박하려 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등장하는 두 귀신을 옛 나를 먹어치우고 새로운 나를 가져다주는 과거와 미래의 두 시간으로 이해한다면 두 귀신 사이에서 당황하고 있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은 바로 우리 자신이게 된다. 10년 전의 나가  더 이상 없듯이 1년 전의 나, 어제의 나, 1시간 전의 나는 이미 사라지고 없다. 그런 만큼 현재의 는 어제도, 한시간 전에도 없었던 나이다. -p147-148,(불교)


마음이 현상 초월적 존재라는 것을 깨치어 아는 자, 따라서 현상에 따라 이끌리지 않고 언제나 그 마음 자리를 지키어 떠나지 않는 자가 곧 부처이다. 그리하여 더 이상 차별적인 현상 세간에 매여 거기 머물지 않는 마음이 바로 해탈한 마음인 것이다. -p156, (불교)


천지는 만물을 낳는 것을 마음으로 삼기 때문에 태어난 만물은 각각 천지의 생물지심을 부여받아 자신의 마음으로 삼는다. 따라서 사람은 모두 차마 어쩌지 못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주희朱熹, 《맹자집주孟子集註》) 

이렇게 해서 인간은 다시 자연의 일부로 이해된다. 맹자의 심이 인간을 자연적 동식물이나 자연 사물로부터 구분짓는 인간의 자연초월적 본성을 의미하는 것이었다면, 주희는 그 초월적 마음을 다시 자연화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는 우주 자연 안에 그 자리를 갖지 못하는 그러한 초월적 본성은 보존하기 힘들다고 판단되기 때문일 것이다. 결국 도덕성을 지키기 위해 그 도덕적 마음을 우주 안에 위치시키는 것이다. 우주 안에 그 자리를 확립하여 우주론적으로 도덕성을 근거짓는 것이다.- p170 (유교)


제3장 인간 삶의 끝


생도 미처 모르는데, 어찌 사를 말하겠는가? 《논어》<선진>

이는 일상적이고 평범한 삶 속에서 도덕을 실천하고 자아를 실현하는 것이 중요하지 괴상하고 기이한 것, 귀신이나 사후세계에 대해 관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건전한 삶의 자세를 말해주는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공자는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다고 한다. -p179


과학은 삶의 궁극 주체인 영혼에 대해서는 아무런 감각도 갖고 있지 않다. 과학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오로지 영혼이 남긴 흔적, 물리적 현상과 심리적 현상 간의 관계일 뿐이다. 즉 과학은 우리 의식 활동이 우리의 신체, 특히 우리의 두뇌 중 어느 부분의 어느 신경활동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만을 밝힐 수 있을 뿐이다. 그것은 지금까지 논한 것처럼 영혼 자체의 존재론적 위상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말해 주는 것이 없다. 과학은 경험적으로 인식 가능하고 관찰 가능한 대상들만을 다루지만, 철학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 그렇게 인식되고 관찰되는 대상이 아니라 오히려 그렇게 인식하고 관찰하는 주체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과학의 방법으로 철학의 문제를 답할 수는 없는 것이다. 영혼과 육체가 하나인가 아닌가의 물음은 오히려 영혼이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철학적 논의와 결부되어 있는 것이다. -p190~191


영원히 죽지 않는 영혼이라면, 죽은 적이 없는데 어떻게 다시 되살아나는 부활이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부활이 전제하고 있는 것은 한 인간 전체의 죽음이다. 희랍적 사유와 달리 히브리적 사유에 있어서는 처음부터 육과 영이 분리된 두 실체로 이해되지 않았으며, 따라서 육은 죽고 영은 육을 벗어나 계속 존속한다는 영혼불멸을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다. 죽음은 곧 육과 영이 하나로 되어 있는 인간 그 자체의 죽음이다. 죽음이 단지 육체의 죽음만을 뜻하고 영혼은 그 죽음을 통과하여 영원히 죽지 않고 존속하는 것이라면, 죽음은 그렇게 큰 사건으로 부각될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죽음은 나방이 고치를 벗듯이, 우리 영혼이 육신을 벗는 일종의 탈바꿈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영혼불멸을 확신했던 소크라테스는 죽음을 눈앞에 두고 그렇게 태연자약하게 죽음에 대해 논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에 있어 죽음이란 하나의 큰 사건이다. "죄의 값은 사망이다"라고 선포될 만큼 큰 사건인 것이다. 죽음은 신의 명령을 거역한 인간의 죄지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하는 엄청난 사건인 것이다. 죽음은 생명의 반대이고, 생명의 부정이며 생명의 끝이다. 죽음을 통과하여 살아남을 영혼이 없기에, 빛도 생명도 없는 철저한 부정이며 어두움이고 절망인 것이다. -p209


한마디로 말해 불교의 윤회는 불변하는 자기 동일적 실체의 엄밀한 자기 동일성에 의해 성립하는 윤회가 아니라, 업에 따라 형성되며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오온의 연속성에 의해 성립하는 윤회인 것이다. 오온이 불변하는 항상된 것이 아니기에 엄밀한 의미의 자기 동일성은 없지만, 인과 과 또는 업과 보의 관계로 이어지는 연속성이 있기에 오온이 윤회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이 점에서 오온의 윤회는 등불의 이어짐으로 비유된다. -p215


오온으로서의 자아 안에는 자기 동일적 실체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생과 내생의 연결에서뿐 아니라 어제와 오늘의 연결에 있어서도 오온에 있어 자기 동일적 실체는 없다. 두 촛불의 동일성 여부가 문제되기에 앞서 하나의 촛불에 있어서도 한 순간의 불꽃과 그 다음 순간의 불꽃은 동일한 불꽃이 아니다. 오온을 형성하는 일체는 매 순간 찰라생명하는 것이다. -p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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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월기
나카지마 아쓰시 지음, 김영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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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월기,를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https://blog.aladin.co.kr/hahayo/741410 )이라는 책으로 읽었었다. 다시 읽고 싶어서 샀다. 

고래부터 있었던 이야기를 다시 쓴 중국의 고담에 예전에 읽었던 이야기(산월기, 이능, 제자, 명인전)에 영허, 우인, 요분록, 문자화, 호빙이 더해졌고, 식민지 조선의 풍경이라는 다른 소설들(범 사냥, 순사가 있는 풍경-1923년의 한 스케치, 풀장 옆에서)가 더 있다. 역시 좋았다. 

역사 속에서 걸어나온 사람들의 네 이야기는 좀 더 교훈이 명확한 느낌이라면, 더해진 이야기는 흔들리고 어지러운 인간사에 대한 이야기,로도 글을 쓰는 자신에 대한 질문으로도 읽힌다. 다시 읽으면서 아들에게 명인전,을 읽어보라고 '뻥이 세다'고 추천했는데, 관심조차 보이지 않는다. 좀 슬프다. 

문자화나 호빙은 중국의 고담으로 묶였으나, 더 오래된 이야기처럼 보였다. 도자기편에 쐐기문자를 쓰는 문화를 상상해서 쓴 이야기이고, 아예 문자가 없는 초원의 사람들 가운데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였다. 특히 문자화,나 호빙이 그랬다. 문자화는 테드 창의 '사실적 진실, 감정적 진실'이나 켄 리우의 '파자점술사'가 떠올랐다. 

예전에 읽을 때는 산월기의 대목이 절절했는데, 다시 읽으면서는 제자의 어떤 대목이, 이릉의 어떤 대목이 더 와 닿았다. 

식민지 조선의 풍경,으로 묶인 이야기는, 중국의 고담처럼 어디까지가 작가의 경험인지 만들어낸 이야기인지 생각하게 만들었다. 국가라는 건 꽤나 까다로운 정체성이라, 작가가 11살부터 16살까지 식민지 조선에서 살았던 것이 영향을 미쳤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모두가 나의 소심한 자존심과 거만한 수치심 탓이었다. 내가 옥구슬이 아닐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애써 각고하여 닦으려 하지 않았고, 또 내가 옥구슬임을 반쯤 믿은 까닭에 그저 줄줄이 늘어선 기왓장들 같은 평범한 속인들과 어울리지도 않았다.-p16-17, 산월기


자로는 이러한 인간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는 천 근의 솥은 드는 힘센 용사를 본 적이 있다. 지혜가 천 리 밖을 본다는 지자의 이야기도 들은 적이 있다. 그러나 공자에게 있는 것은 결코 그런 괴물같은 비상함이 아니다. 단지 가장 상식적인 것이 완성된 모습이다. 지정의의 각각에서 육체적인 모든 능력에 이르기까지 실로 평범하게, 그러나 실로 곧게 발달한 훌륭함이다. 하나하나의 우수한 능력이 전혀 돋보이지 않을 정도로 과함과 부족함도 없이 균형 잡힌 풍부함을, 자로는 실로 처음 보았다. 활달하고 자유로워 조금도 도학자 냄새가 없는 것에 자로는 놀랐다. 곧 자로는 이 사람이 도인이라고 느꼈다. - p82-83, 제자


그러다가 이상한 일이 생겼다. 하나의 문자를 오랫동안 노려보는 가운데, 언제부터인가 그 문자가 해체되어 의미가 없는 하나하나의 선의 교차로만 보이게 되었다. 단순한 선의 집합이 왜 그러한 소리와 그런 의미를 갖게 되는지 아무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노학자 에리바는 난생처음으로 이런 이상한 사실을 발견하고 놀랐다. 지금까지 70년 동안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간과했던 것이 결코 당연하지도 않고 필연도 아니었다. 그의 눈을 덮은 하나의 막이 비로소 벗겨졌다는 생각이었다. 단순하게 흩어진 개별의 선에 일정한 소리와 일정한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여기까지 생각이 도달한 때, 노박사는 주저 없이 문자의 정령이라는 존재를 인정했다. 사람의 혼에 의해 통제되지 않는 손, 다리, 머리, 손톱, 배 등이 사람이 아니듯, 하나의 정령이 이를 통제하지 않으면 어떻게 단순한 선의 집합이 소리와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 "문자의 정령이 인간의 눈을 먹어버리는 것은 마치 구더기가 호두의 딱딱한 껍질을 뚤고 들어가 속의 열매를 먹어치우는 것과 같다"라고 에리바는 새 점토의 비망록에 기록했다.~ 

그러나 에리바는 마지막으로 이렇게 쓸 수 박에 없었다. "문자의 해악은, 인간의 두뇌를 망가뜨리고 정신을 마비시키는 데 이르므로 매우 곤란하다."- p172~173, 문자화


그러나 실제로는 이것이 잘못된 생각이었음을 깨달았다. 조 군은 사실(자신이 반도인이라는 것보다도) 친구들이 그것을 항상 의식하며 동정적으로 자기와 놀아주고 있다는 점을 매우 불편하게 여겼다. 때로는 그가 그러한 의식을 하지 않게 하려는 교사와 우리의 배려까지 그를 매우 불쾌하게 만들었다. 즉, 그는 스스로 그것에 구애받고 있었기에 역으로 밖으로 드러난 태도에서는 조금도 구애받지 않는다는 모습을 보이며, 더욱 자신의 이름을 밝히거나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내가 알게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었다. -p198, 범 사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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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8-27 06: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별족 2022-08-27 07:17   좋아요 0 | URL
맘에 드시길 바랍니다.